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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33)화 (33/159)

 33화

“하하하. 아니라니까요. 저는 정말로…….”

에블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덧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정말로 뭐요?”

블러드윈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어찌나 얄미운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정말로 뭐?”

체이서의 재촉까지 이어졌다.

‘차라리 바로 부끄럽다고 말하면 됐을 일인데.’

이미 타이밍은 늦었다.

에블린은 머릿속으로 스스로에게 다시 세뇌를 걸었다.

‘나는 체이서를 사랑한다. 너무너무 사랑해서 가족들의 반대에도 사랑의 도피를 한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간절한 최면에도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에블린은 수도원의 가족들과 함께 소풍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눈밭을 뛰어놀고 있는 알렌과 리모와 리제,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는 라사냐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수잔과 에블린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피우는 제리까지.

‘아.’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달콤해 원했던 행복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정말로 체이서를 사랑해요.”

하지만 거짓말을 입에 담는 순간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 행복이 가득한 상상에 균열이 가고, 이내 와르르 무너졌다. 

심장이 빨라지며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친절한 낯을 하고 있지만 마치 가시와 같이 매서운 눈빛들이 에블린에게 닿았다.

‘정신 차려야지.’

세 사람의 시선 덕분에 다행히 금세 정신을 차리며 제 역할을 되새길 수 있었다.

에블린은 이대로 끝내지 말고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서 솔직히 말은 못 했지만, 제가 몸이 약해 평생 결혼은 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는 수줍어서 눈을 못 마주치겠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사랑하는 이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건 사실이 섞인 거짓말이어서 그런지 말이 술술 터져 나왔다.

“물론 놀란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너무도 미안하지만요.”

“에블린.”

체이서의 상냥한 부름에 에블린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약이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속아 넘어갈 만큼 다정한 눈빛이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체이서. 당신 덕분에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어요.”

체이서는 식기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에블린의 뺨을 감싸며 차마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조급했었던 것 같아. 차분히 백작가를 설득했더라면 더욱 축복받으며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상냥한 낯으로 에블린에게 사과를 전했다.

 “네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음고생 했을 걸 생각하니 내 가슴이 미어지는군.”

“저는 괜찮아요.”

무언가 식탁 위를 감도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데몬스를 제외하고 첫째와 둘째 사이가.

데몬스는 흥미를 잃었는지 어느새 다시 술을 마시고 있었고, 블러드윈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와, 진짜 사랑하는 사이인가 보네요.”

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축하의 말을 담고 있었지만, 여전히 의심이 섞인 듯 애매한 반응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모습을 보여 주면 둘째 루이사에게 먹잇감을 만들어 주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블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요. 정말이지 많이 사랑하고 있답니다.”

“흐음. 처음에는 사랑하는 연인치고 너무 딱딱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에블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이상한 걸 눈치챈 걸까?’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바짝 쪼여지는 것만 같았다.

“그만해, 블러드윈. 에블린은 여린 이라 네 장난에 덜컥 놀랄지도 모른다.”

“그런 것 같네. 방금은 농담이에요, 형수님.”

블러드윈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진지한 얼굴로 축하를 전했다.

“진심이 느껴졌어요. 루이사에서 볼 수 없는 진심이.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고맙다, 블러드윈.”

체이서의 말로서 오묘한 대화는 끝이 났다.

블러드윈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마저 식사를 이어 갔고, 데몬스는 입가를 일자로 굳힌 채 연거푸 와인만 들이켜더니 뒤늦게 눈치를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백작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에 체이서는 블러드윈에게 대했던 것과 달리 나름 상냥히 답을 해 주었다.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정중히 담아 백작저로 보냈으니 곧 받아 줄 거란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가주님께는 언제 말씀드리실 겁니까?”

“어제 말씀드렸지, 아주 기뻐하시던걸.”

처음 듣는 소식에 에블린이 깜짝 놀라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맹렬한 시선에 체이서는 자세한 설명 대신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형님, 가주님은 의식도 없는데 어떻게 기뻐하는 걸 알았어?”

“충격적인 소식일 텐데 눈을 뜨지 않았잖아. 그럼 기뻐하는 거지.”

오, 과연 틀린 말은 아니네. 반대할 생각이면 이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시겠지.”

블러드윈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에는 어딘가 뼈가 돋아 있었다.

“그러시진 않으실 겁니다.”

“누가 진짜 그렇데? 비유지, 비유. 뭐야, 데몬스. 너 또 술만 들이켜고 있어?”

블러드윈이 못마땅한 걸 숨기지 않고선 타박하자 데몬스가 풀이 죽은 얼굴로 조금씩이라도 식사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좋아, 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할게.”

‘이렇게 축하받으니 대단한 사랑을 하는 것 같네.’

블러드윈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고, 또 다른 형제들보다 활기찼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연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덕분에 식탁 위에 흐르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았으며, 오찬은 나름 평화적이고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 

모두가 잠든 새벽.

체이서는 가주의 집무실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결혼식과 동시에 공작위를 계승받는 건 병상에 누워 있는 현 공작에 대한 불충이라……. 영원히 가주 대리로 살며 가신들의 눈치라도 보란 말인가?”

공작령에 있는 가신의 우두머리인 트렐로니 백작의 서신을 보던 체이서는 비웃으며 그대로 손에 불을 피워 내 말끔히 종이를 불태워 버렸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죽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짖어 대는군. 그냥 하던 대로 아이들의 뒤꽁무니나 쫓을 것이지.”

트렐로니 백작은 루이사 공작가의 충신으로 비밀스러운 ‘루이사 시험’의 후보자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이었다.

그것을 핑계로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어린아이들을 핍박하는 악취미를 가진 이이기도 했다.

“어련히 알아서 있으면 천천히 숨통을 조여 죽여 주려 했건만. 자꾸 귀찮게 구네.”

후계자를 모아 오는 역할을 하는 주제에 모순적이게도 이렇게 루이사 공작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모습을 보여 줄 때면 참으로도 같잖았다.

‘어릴 적 모습부터 보았으니 내가 우습다 이건가.’

현 루이사의 세 공자를 진심으로 루이사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알 만했다.

‘제대로 숨기기나 할 것이지. 이렇게 멍청한 모습을 보여 주며 귀찮게 굴면 빨리 처리할 수밖에 없는데.’

어릴 적 치욕을 갚기 위해 천천히 숨통을 조일까, 아니면 더 귀찮게 굴기 전에 제거할까.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때, 누군가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블러드윈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와인 병을 다른 손에는 와인 잔 두 개를 들고선 흥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체이서가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아?”

“보다시피.”

“참 형님도 피곤하게 산단 말이야. 본업인 기사단 일도 하고, 가주 대리도 하고. 와중에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황실에 치이고, 가주에게 치이고. 그냥 나처럼 편히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럼 네가 나 대신 가주가 되어 줄 테냐?”

“그럴 리가.”

블러드윈은 씩 웃고서는 체이서 앞에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세간에서 형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 형의 그늘에 묻혀 가는 것. 난 어릴 때처럼 치열하게 살 생각 없거든. 가주 자리는 더더욱 욕심 없고.”

피처럼 붉은 와인이 와인 잔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형도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가주 자리를 탐내면 그대로 죽여 버릴 거면서.”

“애정하는 동생에게 그럴 리가.”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하면 좋겠단 말이지.”

블러드윈은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고서는 그대로 잔을 들어 올렸다.

“미리 결혼 축하해.”

블러드윈이 부딪히려 잔을 슬쩍 내밀었으나 체이서는 무시하고선 홀로 와인을 마셔 버렸다.

“무드 없기는. 그렇게 하면 형수님이 싫어할 거야. 잘해 줘야지. 형수님은 착한 아이를 좋아하잖아?”

“언제 적 이야기를.”

체이서의 반응에 블러드윈이 킥킥 웃고는 그대로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와인 향에 기분이 좋은 듯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설마 이럴 걸 대비해서 살려 준 건 아니지?”

“어디까지나 우연이야. 마물이 도망친 곳에 에블린이 있었거든.”

“그래? 이 정도면 두 사람 운명 같네. 그나저나 형수님도 처지가 참 딱해. 결국 돌고 돌아서 루이사로 돌아오다니.”

“에블린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는 마.”

냉담한 어조에 블러드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2기사단에서 한량처럼 사는 거 진짜 즐거웠는데. 이제 무리겠지? 결혼하면 바로 공작위에 오를 거잖아?”

“잘 알고 있구나.”

“공작이 되면 가신들 좀 쳐 내. 미로 안에서 악질적으로 괴롭혔던 거 떠올리면 마주칠 때마다 웃는 얼굴을 그대로 갈아 버리고 싶다니까.”

“마음은 굴뚝 같으나 아직 일러. 그리고 결혼 즉시 그런 행동을 옮기면 에블린 귀에 안 들어갈 리도 없고.”

블러드윈은 홀로 와인을 홀짝이며 조용히 체이서를 관찰했다.

아직 스스로 자각을 못 하는 것 같았지만 에블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피식거리며 웃는 모습이 퍽 낯설었다.

‘관심이 있나?’

이리 후하게 미소를 보이는 이가 아닐 텐데.

자신이 알고 있는 체이서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절로 궁금증이 샘솟았다.

그래서 물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나고 후계자가 정해지면 예정대로 죽일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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