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32)화 (32/159)

 32화

‘보다 보니 조금 기억나네.’

블러드윈 루이사, 루이사 공작가의 차남이며 장난기 많은 성격과 함께 다른 이들과 달리 능력이 조금 신기한 사람이었다.

‘전투와는 관계가 없었던 능력이었던 것 같은데.’

임무 수행할 때마다 다쳐서 플레이어가 치료해 주는 장면이 있던 게 연달아 기억이 났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벌했던 것 같아.’

얼핏 듣기로는 배드엔딩을 타면 가장 무서운 캐릭터라는 소문도 있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체이서와 다른 주의할 인물로 판단하면서도 에블린은 맑은 미소를 지었다.

“얘는 막내인 데몬스 루이사. 원래 밥을 잘 안 먹는 편인데 형수님 온다고 식당까지 나왔어요. 낯을 많이 가려서 말주변이 많이 없는 편이니 이해해 줘요.”

블러드윈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체구가 작은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놀랐다.

‘그래, 이런 캐릭터도 있었지.’

보통 180은 훌쩍 넘는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170 중반 정도에 선이 조금 얇은 소년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다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루이사 중 그나마 마음에 들어 했던 캐릭터였다는 게 기억이 났다.

‘이상한 짓 안 하고 플레이어가 하라는 대로 불만 없이 따라서 좋아했었는데.’

데몬스 루이사, 루이사 공작가의 막내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사생아였다가 후에 정식으로 가문에 입적된 케이스였다.

아마 루이사 내에서 뒤늦게 쓸 만한 능력이라 판단하여 가문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애초에 루이사 시험에서 본 기억도 없고.’

시험 끝의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데몬스 루이사가 후보진에 없었던 기억은 확실했다.

실제로 보니 검은색 머리가 눈까지 덮고 있는 것이 일러스트에서보다 더욱 우중충해 보였다.

말수까지 적으니 더더욱.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나마 썩 괜찮았던 인물이기에 삼남의 능력이 기억났다.

데몬스 루이사의 능력은 분명 염력이었다.

‘첫째는 화염에 둘째는 뭔가 정신적인 것과 관련되었고 막내는 염력이라니, 진짜 무섭다.’

새삼 현재 루이사 가주가 제대로 후보진들을 키웠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체이서가 가주가 될 수 있겠지?’

체이서는 당연하게도 동생들을 경쟁자로도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다들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절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소가주께 짝이 생겼다니. 이거 차차 소가주를 보필할 일원으로서 든든하네요.”

그런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 블러드윈은 능청스럽게 에블린의 걱정을 덜어내 주었다.

‘믿어야지, 그래.’

어차피 에블린이 할 수 있는 건 체이서를 믿는 것밖에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든가, 이곳이 게임이 아니고 현실이라든가.

순간적으로 오는 괴리는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피어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크기를 키워 가려고 했다.

“일단 앉고 마저 인사를 나누지.”

그러나 곧 들려온 목소리에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계속 서 있다 다리에 무리라도 가면 어쩌려고.”

“제가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한 건 아니에요.”

“그래? 내 눈에는 아닌 것 같은데.”

체이서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에블린을 이끌었다.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집중하자, 집중.’

에블린은 체이서 덕분에 잡다한 생각은 정리하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상석의 오른편에 마련된 의자 두 개는 분명 체이서와 에블린의 자리일 것이다.

에블린은 체이서가 빼 준 의자에 앉고서는 그제야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해요.”

그런데 블러드윈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입꼬리도 비뚠 것이 굉장히 못마땅한 듯 보였다.

“바이아르도? 그 다 망해 간다는 바이아르도 백작가?”

그리고 설명을 해 달라는 듯 체이서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설마 설명이 안 된 거야?’

에블린 또한 당황하여 체이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았음에도 체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만 꺼내었다.

“망해 간다니. 말조심해,”

“아, 아. 죄송해요, 형수님. 기분 나쁘시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혼수도 못 준비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어째 말이 하나같이 비꼼이 가득한 게 날카롭기만 하다.

“혼수는 필요 없어.”

에블린이 어찌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체이서가 그녀의 답을 가로챘다.

“어우. 가신들이 도움 되는 결혼도 아닌데 혼수도 안 들고 온다면 열심히 반대하겠는데? 어떻게 설득하려고?”

“내가 하고 싶다는데 설득해야 할 이유라도?”

체이서와 블러드윈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닿았다. 식당 안에 절로 긴장감이 고였다.

두 형이 기 싸움을 하든 말든 막내 데몬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만 홀짝거리며 마실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급이 맞는 가문을 데려와야 결혼이 좀 더 수월하지 않겠어? 약혼식이나 올릴 수 있으려나 몰라.”

비아냥거리는 말투인 것만 같았지만 그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체이서랑 사이가 안 좋은가?’

아무것도 모르는 에블린은 조용히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입을 열어야 체이서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약혼식은 올리지 않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릴 거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미쳤어?”

쾅, 하고 식탁을 내려치는 소리에 에블린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분노에 찬 모습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다.

블러드윈이 사실을 파악하려고 에블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번뜩이는 눈에 에블린이 몸을 흠칫 떨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바로 앞에 호화스러운 음식이 놓여 있어도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고라도 친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답해 줄 수 있었기에 에블린은 반사적으로 소리치듯 외쳤다.

“그럼 왜?”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블러드윈의 표정에 체이서는 적당히 뜸을 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식기를 들고서 여유롭게 답했다.

“에블린은 바이아르도 가에서 귀하게 아끼는 막냇동생이거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결혼을 반대하더라고.”

블러드윈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에블린을 납치해 왔어.”

그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따지듯 물어보던 블러드윈도 조용히 와인만 마시던 데몬스도. 그리고 가만히 체이서의 답을 듣던 에블린마저도 말이다.

‘물론 설정을 그렇게 짜기는 했다만…….’

이게 맞는 걸까.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침묵을 보니 노선을 잘못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거 괜찮을까요? 약탈혼 같은데……. 루이사의 위상이…….”

침묵을 깬 것은 삼남 데몬스였다.

“감히 루이사를 거절하다니. 배짱 한번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블러드윈은 열을 받은 듯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는 것이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하긴. 보통의 루이사라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맞지.’

힘겹게 루이사가 됐는데 한미한 가문이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좀 날 것이다.

바이아르도에 불똥이 튈 걸 생각하니 미안하다가도 괘씸하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 순간 블러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무언가 파악하겠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에블린을 훑고 지나갔다.

“아?”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짧은 탄성이 들려왔다.

“아니지. 그럴 수 있지.”

블러드윈의 변덕스러운 말에 데몬스가 열심히 마시던 술을 내려놓았다.

“형님?”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다.

블러드윈은 언제 화를 냈냐는 양 태평한 얼굴로 다시 서글서글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처가에서 반대했다니 형님이 마음고생 좀 했겠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수님을 강제로 모셔 오면 어떻게 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게 문제가 되나?”

타박이 섞인 말투였지만 장난스러운 말투여서 기분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데몬스는 긴장된 얼굴로 두 눈을 굴려 가며 블러드윈과 체이서를 번갈아 보았다.

“에블린도 이해해 줬는데 그쪽에서 주제넘게 나서면 안 되지.”

그러더니 이내 포기한 듯 마저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쩜 형제가 이리 닮았을까.’

타인의 동의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오만한 발언이었으나 블러드윈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님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아무튼 환영해요, 형수님.”

“당연히 환영해 줘야지. 에블린, 식사는 입에 맞아?”

“아, 네.”

에블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다 동시에 관심이 쏠리자 황급히 웃어 보였다.

“많이 드세요, 형수님.”

두 사람의 재촉에 뒤늦게 포크를 들어 보았지만 그렇다고 입맛이 돌지 않았다.

‘차라리 술을 마시고 싶어.’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시는 데몬스가 부러웠다.

에블린이 깨작거리며 샐러드만 먹고 있으니 그걸 유심히 바라보던 블러드윈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어째 형수님은 입맛이 없어 보이네. 진짜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네? 아니에요. 그냥 조금 긴장했나 봐요.”

체이서의 시선이 와 닿았다.

보지 않아도 ‘잘하겠다더니?’라는 의미의 시선임이 분명했다.

“진짜 둘이 사랑하는 건 맞죠? 억지로 결혼하는 거면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블러드윈이 스테이크 옆에 가지런히 놓인 당근 가니쉬를 포크로 쿡 집어서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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