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루이사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오랜 시간 저택을 비웠던 차남과 삼남이 기사단의 임무를 마치고 수도로 귀환했다.
황궁에 복귀 신고를 마치고 오래간만에 저택에 오는 것이니 평소보다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게 움직여!”
청결에 예민한 차남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저택의 대청소는 필수였고, 입이 짧은 삼남을 위한 음식을 따로 준비해야 하다 보니 주방은 다른 의미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사의 귀한 손님, 차기 공작 부인으로 거론되는 아가씨를 모시는 로피 또한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의미로.
“꺅, 아가씨. 이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로피는 선물 더미에서 나온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에블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연둣빛 드레스는 가슴과 허리를 꽉 조이고 있었지만, 허리 아래로부터는 넓게 퍼져 촘촘히 레이스가 퍼지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곳곳에 박혀 있는 진주들 때문인지 에블린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로피가 보았을 때는 전혀 아니었다.
햇살을 담은 듯한 탐스러운 금발, 화사한 연녹색과 어울리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외모는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심하게 말하자면 거적때기를 입혀도 잘 어울릴 미인이었기에 로피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에요! 앞선 드레스 들 중에 가장 잘 어울리세요!”
“그래도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럼 다른 것도 살펴볼까요?”
벌써 반나절 넘게 선물을 풀어 보고, 드레스를 갈아입어 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지쳤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늘 저녁에 있을 오찬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을 테니까!
‘설마 아가씨께서 모르셨을 줄이야.’
루이사의 두 공자의 귀환은 사용인들에게 엊그제 알려진 사항이었지만 에블린은 오늘 아침 이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다고 한다.
사용인 모두가 아는 소식을 애인인 아가씨께서 모르다니? 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내 몸이 좋지 않아서 신경을 쓰시느라 이제 알려 주셨나 봐.’
힘겨운 얼굴로 그리 말하니 그것도 맞는 말이라 이해가 되었다.
‘아가씨는 몸이 약하시니까. 그러니 소가주님 또한 최대한 시간을 내서 아가씨의 옆에서 있으셨던 거겠지!’
로피는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잇몸이 마르지 않도록 재빨리 이을 다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간 외출을 한 적이 없으니 당장 선물들 사이에서 골라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시간이 급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로피는 너무나 기뻤다.
‘드디어 실내복 탈출!’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매번 수수한 원피스만 입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아침 다시 제 이름을 소개하더니 드디어 말도 편히 놓으셨다.
‘바이아르도 백작가라니! 명문가의 영애셔서 다행이야. 이제 다른 애들이 쉬쉬거리는 소문을 확실히 뭉갤 수가 있겠어.’
로피는 하녀들이 에블린을 보며 수군거렸던 것을 떠올리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에블린을 감싼 소문은 생각보다 더욱 치졸하고 더러웠다. 좋게는 납치, 최악으로는 빚에 의해 팔려 온 거란 소문까지.
강제로 끌려왔다는 신비성 있는 증언과 도망치려고 했던 모습을 본 이들로 인해 소문은 더없이 나쁘게 부풀었다.
급에 안 맞는 이를 모셔야 한다는 것에 불만인 이도 있었고, 물밑에서 괴롭힘을 계획하는 못된 애들도 있었다.
‘아가씨는 그런 분 아니신데 모셔 본 적도 없는 것들이 까불긴!’
물론 공작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하녀인 로피는 이런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을 만큼의 현명함은 있었다.
‘애초에 명문가가 아니어도 앞으로 우리의 주인이 되실 분인데 참.’
비록 그녀는 어린 하녀였기에 발언권은 없어 그 자리에서는 가만히 듣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피의 옆에는 신분과 능력이 증명된 권력자가 존재했다.
마야 이소베, 이소베 남작가의 차녀로 젊은 나이임에도 체이서에게 하녀들의 모든 권한을 인정받은 조용한 실력자.
전대 하녀장부터 시작하여 그 아래의 하녀들이 현 가주의 독살 사건과 휘말리며 모두 해고되거나 감옥에 끌려간 후 자연스럽게 권력을 손에 넣은 이었다.
또한 그런 마야가 에블린을 마음에 들어 하며 진심으로 모시는 것을 보니 절로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로피는 삭막한 루이사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넘치는 에블린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었고, 사소한 실수도 눈감아 준 에블린을 향해 열심히 충성심을 키워 갔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주제넘은 이들의 명단을 마야에게 넘겼다.
‘아마 곧 쫓겨나겠지?’
안타깝지만 감히 모시게 될 주인을 가볍게 입에 담은 죄니 어쩔 수 없다.
“아가씨, 공자님들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에블린이 드레스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오찬 시간이 가까워져 갔다.
이미 체이서와 다른 공자들은 저택에 도착하였으니 더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피부도 곱고, 화려한 외모시기 때문에 옷이 붕 뜨지 않고 꼭 하나가 된 것처럼 잘 어울리셔요!”
로피는 진심이 담긴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에블린의 망설임을 곱게 꺾을 수가 있었다.
“로피의 말이 맞습니다, 아가씨. 이대로 화장과 머리만 조금 손 보시면 더욱 아름다우실 겁니다.”
어차피 시간도 없는 탓인지 에블린은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를 고르고 나니 일사천리였다.
치장을 마친 에블린은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보는 것만큼 눈이 부셨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에블린을 에스코트하러 온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 에블린은 체이서의 오른팔에 자기 손을 올리고선 사이좋게 방을 나섰다.
서로를 향해 다정히 시선을 마주하는 모습이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라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도 보자마자 예쁘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로피는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낭만을 키워 가며 모실 주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현재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은 에블린의 마음도 모른 채 말이다.
***
‘또 다른 루이사를 만난다니.’
계약 결혼이라는 산을 하나 넘겼더니 새로운 루이사라는 이보다 더 큰 산이 나타나 버렸다.
에블린이 긴장한 상태로 어깨가 빳빳이 굳어 있으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하지 말고.”
다정한 척하는 체이서의 목소리는 더더욱 귀에 안 담겼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에블린의 긴장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체이서는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무서워?”
그러자 에블린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이제야 체이서의 목소리가 닿았다는 듯.
에블린은 긴장감에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려고 했으나.
“왜 무섭지? 어차피 누구도 내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이가 없을 텐데.”
체이서의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두 눈을 조용히 깜빡였다.
루이사가 무섭냐고?
무섭다.
그럼 공식 악역 체이서가 무서울까 아니면 그의 명령을 따르는 동생들이 더 무서울까?
‘당연히 체이서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긴장감이 한결 가셨다.
에블린의 표정에 안도감이 서리자 체이서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니까 미리 말해 주면 좋았을 텐데요.”
“미리 말하면 며칠 동안 걱정만 했을 거잖아?”
일부러 당일이 되어서 말한 걸 숨기지 않는 태도에 에블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하니 더 칭얼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루이사 가주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체이서가 내 편인데 뭐가 무섭겠어.’
생각의 정리는 빨랐고, 마음의 안정은 그와 함께 찾아왔다.
“참, 잊지 마. 우리는 서로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한 거란 걸.”
“네, 알겠어요. 이제 준비됐으니 문 여셔도 돼요.”
“아, 이 말하는 걸 까먹었네.”
체이서는 식당의 문손잡이를 잡은 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평온히 말했다.
“오늘 예쁘네.”
“네?”
에블린이 자신이 들은 말을 제대로 인식도 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커다란 샹들리에에서 뿜어져 오는 빛이 너무도 눈이 부셨다.
화사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서서히 빛에 적응이 되는지 슬며시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긴 식탁 위에 가득 찬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음식들뿐만 아니라 곳곳에 놓인 화분과 따스한 색으로 꾸며진 식당의 모습은 절로 식욕이 돋구어질 만큼 온화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사 저택에 오고 지금껏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은 없구나.’
아주 오래전 과거의 향수가 슬쩍 에블린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바이아르도에서도 이렇게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는 했었는데.
에블린이 조악한 향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조금 튀는 발랄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분이 형수님이셔?”
에블린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에블린보다 진한 금발을 가진 명랑한 웃음을 띤 사내였다.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어 내지 못한 밝은 목소리와 어울리는 귀공자다운 외모는 체이서와는 조금 결이 다른 미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체격과 덩치가 큰 것은 엇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체이서가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얇은 셔츠를 입은 탓에 움직일 때마다 훈련을 잘 받은 듯 단단히 다져진 몸의 윤곽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반가워요, 형수님. 내 이름은 블러드윈 체이서. 형님과 달리 2소대에서 일하고 있어요.”
블러드윈이 사람 좋은 미소로 자신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