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마지막으로 상호협의 간에 계약 내용을 조정할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조건을 끝으로 계약서 작성이 끝이 났다.
“사인은 어디에 하면 좋을까요?”
빠른 태세 전환에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듯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계약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에 하면 돼.”
에블린이 빠르게 서명했고 또 체이서 또한 사인을 마쳤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에블린.”
“네, 소가주님.”
“사랑해서 약혼하는 사이인데 누가 딱딱하게 소가주라는 호칭을 써? 부르던 대로 불러.”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여야 했기에 익숙해진 호칭을 치우고 예전처럼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잘 부탁드려요, 체이서.”
“좋아.”
두 사람은 사이좋게 계약서 원본을 나누어 가졌다.
계약서를 챙기는 체이서는 배부른 짐승처럼 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괜찮은 거겠지?’
에블린은 불안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굴려졌다. 부디 앞으로의 생활이 평화롭기를, 또 행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하루는 빠르게 흘러가고, 또다시 새로운 날이 찾아온다.
‘피곤했나 보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막 아침이 되었는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린다는 것에 놀랄 뿐.
에블린은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자신을 신기해하며 푸스스 웃었다.
“어머,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그때 마침 조용히 방을 들어오고 있던 마야와 눈이 마주쳤다.
“먼저 세안수를 들일까요?”
“으음, 그 전에 할 말이 있어요.”
마야는 어제의 대화는 모두 잊어버린 양 평소처럼 대했지만, 에블린의 말에 올 게 왔다는 양 금세 표정이 굳었다.
“아직 제대로 된 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네?”
마야가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는 예상 못 했다는 듯이.
에블린은 침대맡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웃어 보였다.
“제 진짜 이름은 에블린 바이아르도예요.”
“그, 그러시군요. ……잠시만요. 바이아르도라면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당혹감이 가득한 마야의 물음에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블린은 어제 체이서와 구상한 두 사람의 만남을 간략히 정리해서 말해 주었다.
시골에서 요양 중 우연히 만났으며 체이서와 서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가문의 반대로 인해 그의 청혼을 거절하던 상황이었고, 어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마야의 조언 덕분에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그런 역경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사,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말을 조금 버벅댔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마야는 그 부분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그저 놀라고, 당황스럽고 또 경악한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니…….”
아니, 조금 감탄한 것 같기도 하다.
마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진심으로 부끄러웠기에 쑥스러움에 찬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야는 진심으로 조언하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사정을 들으니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애초에 제가 괜한 말씀을 올린 것 같네요. 저는 아가씨께서 강제로 끌려오신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군요!”
에블린은 굳이 답을 하지 않고 어색히 웃었다.
강제가 아니라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야의 모습이 고마웠다.
“그래서 저택에서 오래오래 있을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마야가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마야는 조금 전보다 더 감동한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냉한 모습만 보다 로피처럼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낯설었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앞으로는 말 편히 놓아주세요. 장차 가문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니, 그래.”
에블린은 새롭게 마음을 다잡은 것을 보여 주듯 말을 놓았다.
낯간지러웠지만 이제부터는 ‘에블린 바이아르도’로서, 또 차기 ‘루이사의 안주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까.
물론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단 가장 큰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여 줘야 하는 거지?’
체이서와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했고, 계약서의 조건대로 그를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잠이 들 때까지 이 고민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이른 아침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있어야 무슨 느낌인지 알지.’
에블린은 연애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사랑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사치라는 듯 금방 해결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체이서 덕분이었다.
에블린이 깨어 있을지 예상 못 했는지 조금 놀란 듯싶다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오늘은 꼭 배웅해 주겠다더니. 기쁜걸.”
마치 에블린이 체이서를 배웅해 주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는 듯 말이다.
에블린은 무어라 말을 못 하다가 다정한 손길로 제 눈가를 매만지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졸리면 더 자도 되는데.”
어제와 다른 표정과 말투, 그리고 두 사람을 감싸는 분위기는 누가 보아도 다정다감한 연인처럼 보였다.
옆에서 초롱초롱한 마야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사랑하는 연인’ 사이임을 밝히며 수줍어했던 이가 이대로 연인을 외면한 채 잠들면 또다시 의심이 싹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푼 오해인데.’
이대로 다시 원상 복귀시킬 수는 없는 법.
무엇보다 눈치 보아야 할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응? 피곤하면 더 자도록 해.”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서슬 퍼런 눈길은 그대로 잠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사소한 기회도 놓치지 않는 구나.’
그래서 루이사가 된 건가?
에블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오늘은 꼭 배웅하겠다 약속했으니까요.”
마침 타이밍 좋게 마야가 어깨 위에 숄을 걸쳐 주었다.
“고마워.”
마야는 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뒤로 물러났다.
체이서가 에블린을 향해 잡으라는 듯이 팔을 내밀었다.
‘부담스럽다.’
에블린은 속내를 숨기고서는 환히 웃으며 그의 팔에 자기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서는 방을 나섰다.
“순발력이 좋던데.”
“제가 할 말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들짝 놀라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체이서와 에블린은 서로에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체이서의 말에 에블린의 표정은 비장해졌다.
“계약은 확실하게 지킬 거예요. 그러니 어색해도 조금만 지켜봐 주세요.”
부담스럽고 당황하기는 했지만, 계약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체이서는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로비에 도착하자 두 사람을 이어 주던 팔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체이서는 보란 듯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에블린을 응시했다.
“이렇게 배웅해 주니 더욱 일하러 가기 싫은데.”
물론 빈말이었겠지만 이 연극에 제대로 동참하기로 한 이상 에블린은 성실히 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 말 하면 제가 더 당신을 보내기 싫어지잖아요.”
마지못해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모여 있던 사용인 중 몇몇이 숨을 들이켰다.
확연히 어제와 다른 분위기였기에 더더욱.
“일찍 돌아와요.”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올게.”
어쩐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겠지?’
연기에 너무 몰입한 탓일까.
에블린은 답지 않게 체이서의 소매 끝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알겠어.”
올려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체이서가 에블린의 시선을 피하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역시 내일부터 배웅은 하지 마. 몸도 약한 이가 잠이라도 충분히 자야지.”
늦잠을 자도 된다는 말이었기에 고맙다가도 조금 울컥했다.
‘내 연기가 그렇게 별로인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래도 체이서의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로 어색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대사를 이어 갈 자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흔쾌히 수락하면 모양새가 이상할 것이다.
“제가 좋아서 하는걸요.”
“내 마음도 이해해 줘. 널 두고 갈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이때는 웃어야겠지.
에블린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서는 그제야 그의 옷깃을 놓았다.
이제 이 연기를 끝낼 타이밍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체이서가 등을 돌려 나가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참, 내가 중요한 소식을 전달한다는 걸 깜빡했군.”
“네?”
에블린은 이 또한 연기라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오늘 아우들이 수도로 입성한다니 황궁에 복귀 신고 후 저택으로 돌아올 거야.”
“네?”
그리고는 뜬금없는 폭탄을 던졌다.
“드디어 아우들에게도 당신을 소개해 줄 수 있다니 기쁘네.”
체이서는 여전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럼 조금 이따 저녁에 보지.”
꼭 일찍 들어오겠다는 약속과도 같았다.
그렇게 로비의 문이 닫혔고, 에블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휘청였다.
“아가씨!”
당황한 마야가 다급히 에블린을 부축했고 이내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의사를 부르려 했다.
“조금 피곤한 모양이야. 쉬면 될…….”
에블린은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말을 잇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쉬기는 무슨!’
그리고는 욱하는 것을 참으며 마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드디어 그 일을 해야 하는 모양이야.”
“그 일이라니요?”
에블린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에블린이 그토록 미루고 미뤘던 그것.
마야의 뒤에 서 있던 로피는 무언가 깨달은 듯 흥미진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선물 정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가씨?”
에블린이 씁쓸히 웃었다.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