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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29)화 (29/159)

 29화

그 후 계약서는 순조롭게 작성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합의한 내용이 정리되어 계약서 위에 쓰였다.

체이서가 꽤 세세하게 정리해 준 덕에 에블린이 보아도 흠잡을 것 없는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1. 결혼 기간 동안 치료제의 완성에 협조하기.

2. 약혼식은 넘기고, 결혼식을 성대하게 하기.

3. 후계자 양성 완료 등 적당한 시기에 협의 이혼과 에블린에게 두둑한 위자료 제공하기.

4. 결혼 전, 결혼 중, 이혼 후 안전 보장, 목숨 보장하기.

5. 수도원 가족들의 시신 양도 후 무사히 장례 치르기.

총 다섯 개의 조항이었다.

체이서는 턱을 괸 채 소소히 기쁨을 표현하는 에블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간 사실이 기뻤는지 그녀는 시선도 못 느낀 채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무조건 굽히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꽤 현명한 편이란 말이지.’

분명 청혼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동안 계약서에 넣고 싶은 내용을 세밀히 정리해 놓았을 것이다.

‘뭐, 무식한 것보다는 낫지.’

드디어 차기 루이사 공작 부인의 자리를 채우라며 귀찮게 구는 가신들이나 그 자리를 탐내는 귀족들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다.

체이서는 만족스러움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또 필요한 조건은 없나?”

아주 자비로운 목소리였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에블린이 해맑게 웃었다. 뿌듯하다 못해 아주 만족이 그득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맺은 계약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과연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어떻게 되려나.’

에블린은 이혼해 달라고 말하였지만, 과연 그 마음이 오래 갈까?

보통이라면 루이사 공작가의 권력과 재력을 포기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에블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치료제 개발했다고 삶의 목표를 이뤘으니 세상을 떠나겠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참 욕심도 없는 이었다.

물론 현재 한정으로.

에블린은 조용히 살고 싶다고 끊임없이 말했으나 애석하게도 체이서는 현재의 에블린은 믿어도 미래의 에블린은 믿지 않았다.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

공작 부인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맛보다 보면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이서에게 좋게 보이려 노력하겠지.

루이사가 되고서 보았던 모든 이들은 그러했으니 에블린이라고 다를 것 없을 것이다.

상호 동등한 관계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체이서가 갑인 상황이었으니 굳이 나서서 쓸데없는 조항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쓸모가 다하면 제거할 생각도 있었으니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굴어 겁을 먹게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 분명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체이서의 속을 뒤집어 버릴 생각인지 에블린은 해맑은 얼굴에 진심을 담아 다시 강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혼 기간 내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편히 이혼을 요구해 주셔도 돼요.”

에블린은 진심임을 강조하며 계속 체이서의 눈치를 보았다.

“진심이니까 이 말 절대로 잊으시면 안 돼요?”

꼭 이혼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에 체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런 이가 자신에게 잘 보여 공작 부인 자리를 계속 꿰찰 것이라 생각했다니.

체이서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만 저런 말을 하니 이혼을 꿈꾸는 저 마음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어졌다. 심사가 뒤틀린 탓이다.

‘결혼 이야기하는 도중에 애인과 이혼 이야기를 함께 해?’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지만.

‘아니, 그렇게 내가 매력이 없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은 채, 체이서는 깜빡했다는 뉘앙스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조건을 빼먹었군.”

“네? 이것 외에 또 내걸 조건이 있을까요??”

되묻는 에블린은 서로가 만족할 만한 아주 완벽한 계약서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체이서는 더욱더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의 마지막을 장식할 말을 꺼내었다.

“내 조건은 별것 없어. 주변에서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것.”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펜을 들고 있던 에블린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블린이 밀랍 인형처럼 딱딱히 굳어 버리자 그 모습에 체이서는 만족스러운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에블린은 나름 힘차게 제 의견을 주장해 보려 했으나.

“보여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귀족 사회는 어차피 대부분 정략결혼이니 사랑에 의해 결혼하지 않는 건 흔하잖아요. 다들 알 만한 사람들일 텐데.”

“내가 싫어.”

단호한 답 뒤 체이서는 에블린을 설득하려는 듯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루이사와 바이아르도 가문의 급은 맞지 않잖아. 나도 나름 가신들의 평판을 신경을 쓰는 사람인지라.”

확실히 바이아르도가 백작가라지만 제국의 최고라 불리는 루이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다.

“급이 차이 나는 결혼에서 사랑은 충분한 명분이 되거든.”

“그것도 그렇기는 한데…….”

에블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체이서랑 내가?’

에블린은 체이서와 자신이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도록 연기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하 호호 웃으며 서로 다정히 눈빛을 교환하고 또 그 이상의…….

‘역시 그건 좀…….’

에블린은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는 난감한 얼굴로 이 조건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체이서를 설득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결혼 생활 내내 마음에도 없는 이랑 사랑하는 연인 모습을 보이는 건 분명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후회할지도…….”

하지만 그는 강경했다.

“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나?”

아주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알잖아요.”

체이서를 생각해서 꺼낸 조건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굉장히 기분이 상해 보였다.

“너무하지 않나? 난 네 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너는 미래의 연인을 위해서 내 조건 따위는 못 들어주겠다고 하는 건가?”

빈정 상한 얼굴 위로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이 날카로운 눈빛이 에블린을 스쳐 지나갔다.

“제가 연인이 어디 있다고…….”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체이서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나도 하나하나 따지자면 얼마든지 조건들을 철회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의 조건을 받아 주지 않겠다면 그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에블린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단호한 답에 그대로 침몰한 것이었다.

“그럼 시나리오가 필요하겠네요. 어떻게 사랑에 빠졌다고 할까요? 거짓말인 게 안 들키려면 자세하게 이야기를 지어내야 할 것 같은데.”

포기하니 대화는 더더욱 빨라졌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만난 걸 그대로 쓰면 되지.”

“하지만 사용인들은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모습을 보았잖아요. 다들 도망쳤다가 잡혀 온 걸로 오해하던데요.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 이 조건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냐며 자연스럽게 철회하려고 했으나, 체이서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술술 내용이 흘러나왔다.

“요양차 시골에 있던 바이아르도 영애와 임무 차 시골에 갔던 루이사 소가주는 서로 첫눈에 반했고 가문의 반대에 두 사람 사이에 위기가 찾아왔지. 결국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내가 너를 강제로 수도로 끌고 온 거고, 뒤늦게 사실을 안 너는 가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걸로 하지.”

“가문의 반대요?”

“바이아르도 가문 쪽에서 아끼는 막내딸이니. 이 정도 설정은 넣어 줘야지.”

“아니, 감히 루이사를 반대한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세요?”

“몸이 약해서 걱정이 되었다 등 여러 이유는 많지 않나.”

체이서가 당당한 눈빛으로 에블린을 응시했다.

“내가 강제로 데려온 것도 맞고 말이야. 아, 조금 더 극적인 걸 추가하기 위해 내가 납치했다고 할까?”

“구해 주신 거잖아요.”

체이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어떠냐는 듯 답을 기다렸다.

‘약간의 각색만 했을 뿐 거짓말은 아니니 의심을 사지는 않겠네. 그런데 진짜 굳이 이런 설정을 넣어야 하나?’

에블린은 도무지 체이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고 해도 정말 사랑하는 척을 할 수 있으려나.’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괜히 어색한 연기로 주변의 구설수에 더 오를까 봐.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체이서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에블린이 내건 조건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없앨 것이다.

그렇다면 협상은 무산되고 다시 어색한 관계 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협력 관계잖아.’

치료제 개발이라는 목적을 위해 만든 부가적인 계약일 뿐이다.

‘좋아, 하자.’

오랜 망설임 끝에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보여 주기식이니 적당히 하면 되겠지.’

에블린은 가볍게 생각하고서 긍정을 표했으나 체이서의 생각은 달랐다.

‘아예 머릿속에서 이혼 생각을 지워 내 버려야지.’

에블린은 정에 약한 사람이니 겉으로도 속으로도 완벽한 부부생활을 하다 보면 분명 이혼에 관한 생각에 변화가 올 것이다.

‘그 이상의 마음을 품으면 더 좋고.’

체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고 선택이었다.

아마 에블린이 아니라 다른 이와 계약을 하게 된다면 이따위 조건은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니까.’

좋은 파트너를 쉽게 놓치기 싫어서 이러는 것뿐이다.

‘이용해 먹기 딱 좋으니까.’

체이서는 그리 생각을 마치고는 빙긋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약서에 여섯 번째 조항인 ‘완벽한 결혼 생활’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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