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에블린은 당황하며 책 위를 쓸어 보았다.
하지만 부모님 이름 옆에 쓰여 있는 사망 연도가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상해요. 왜 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체이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슬쩍 물었다.
“에블린, 네가 어떻게 루이사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지?”
“부모님이 직접 저를 팔았어요.”
“자식을 팔아넘긴 부모의 인생이 곱게 풀릴 리 있나.”
명쾌한 답처럼 느껴지지만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다시금 보니 바이아르도 백작 부부는 에블린이 실종된 해에 사망한 것으로 신고가 되어 있었다.
“알고 있잖아, 에블린.”
문득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사의 비밀을 아는 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 따위 없다는 걸.”
에블린은 당황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미처 숨기지 못한 증오를 담고 있는 체이서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네요.”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들 어떻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에블린이 체이서를 두려워하고 경계한 이유.
그건 에블린이 루이사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루이사의 손에 의해 처리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부모님 또한 예외는 아니었겠군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체이서는 루이사의 횡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두 명이면 적은 편이지.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마을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일도 있으니.”
오히려 익숙한지 담담해 보였다.
‘수락하길 잘한 거 맞겠지?’
기껏 풀어졌던 경계심이 다시 팽팽히 당겨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부모님은 어떻게 루이사에 연이 닿아서 나를 팔아넘긴 걸까.’
보통 이능력은 성인이 되기 전에 발생하는데, 본격적인 각성 전에 각성자의 주변에 그가 가지게 될 능력과 비슷한 자연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각성 초기 증상이 관찰되면 각 도시에 파견된 국가 감찰단들이 능력을 검증하는 거울을 통하여 각성자의 능력을 측정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에블린에게서는 그러한 전조가 전혀 없었고, 각성 또한 하지 못했다.
에블린은 아무런 능력도 없으니 분명 루이사에서 직접 접촉했을 리도 없을 텐데.
‘내 기억에 문제가 있나?’
분명 루이사 시험장을 빠져나올 때의 기억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탈출했을 때의 충격 때문이라 어림짐작했기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애초에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웠으니까.
‘혹시 뭔가 더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특별한 건 없었다.
바이아르도 백작 부부가 어떻게 루이사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루이사 공작가를 속였기에 죽지 않았을까?
‘확실히. 그게 맞을지도 몰라.’
이능력이 발생하는 경위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지만,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기에 이능력자들은 하늘이 선택한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는 했다.
각성만 해도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을 텐데 굳이 딸을 다른 귀족에게 팔아넘긴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 돈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친 게 분명했다.
“부모님의 죽음은 이해했어요. 하지만 저는 왜 아직도 살아 있다고 표시되어 있을까요?”
“정치적 문제 때문이겠지. 네가 없어졌다고 한들 후에 아무나 데려와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우긴 뒤 정략결혼에 쓰이게 할 수도 있고.”
“……그렇네요.”
어차피 진심으로 에블린을 사랑해 주던 가족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체이서의 가설이 마냥 헛소리 같지는 않았다.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막내 영애는 몸이 좋지 않아 외딴 시골 영지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말이 있더군. 그러니 네 대역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나서면 돼.”
“그럼 저는 자연스럽게 에블린 바이아르도가 되겠네요.”
어쩐지 남의 옷을 뺏어 입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고민이 해결되었는데도 에블린의 표정이 좋지 않자 체이서가 대뜸 물었다.
“원래 네 신분이었는데 뭐가 문제야?”
“아니, 문제는 아니에요. 그냥…….”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은 굉장히 오묘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가족들이 많이 놀라겠구나 싶어서요.”
계보를 보면 오빠인 찬슬러 바이아르도와 언니인 아사블랑 바이아르도, 아니 이제 결혼을 해서 출가한 브렌다 자작 부인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죄를 지은 건 저쪽이지 않나. 당당해지라고.”
“그래야죠.”
에블린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건 아마 루이사와 관련된 속사정까지는 자세히 몰라서였겠지.’
그렇다면 혹시나 만날 때 그 부분만 주의하면 될 것이다.
“자, 그럼 신분은 문제가 없을 테고. 이제 우리 사이를 정정해 보면 좋겠는데.”
드디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새로 거론되었다.
에블린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먼저 결혼에 대해 입을 담아 보았다.
“결혼 말이죠. 역시 계약 결혼이겠죠?”
마지막 점검차 물었던 질문에 체이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지.”
‘조금 망설인 것 같은데. 아니겠지?’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니 후회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되돌리기는 너무 늦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봐.”
체이서가 소파 위에 팔을 올리고는 자연스럽게 턱을 괴었다.
청혼에 대한 답을 들어서인지 체이서의 태도는 퍽 여유로워 보였다.
그와 달리 에블린은 땀이 고인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닦아 낼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수도원의 제 가족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 궁금해요. 혹시 장례도 못 치르고 소각이 된 걸까요?”
결혼 이야기를 하다 말도 이런 질문을 하리라 예상 못 했는지 체이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잠시였지만.
“혹시 몰라 시신의 일부는 보존해 두었어. 아마 연구 자료로 쓰이고 후에 소각 처리될 거야.”
반갑지 않은 주제였겠지만 체이서는 성실이 답해 주었다.
에블린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더니 단단히 결심한 듯 말했다.
“전 가족들의 장례를 치러 주고 싶어요. 온전하지 못한 시신 일부라도 그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고 싶고요.”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계약 조건에 그걸 넣고 싶다는 거겠고?”
“맞아요.”
에블린의 표정은 자못 비장했다.
그녀의 진지한 모습에 체이서는 턱을 괸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웃음을 참아 냈다.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많이 했나 보지? 가족 때문에 계약 결혼이라는 말을 붙인 건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해 달라면 해 줬을 것을.’
체이서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으나 이 또한 티는 내지 않았다.
체이서는 에블린이 놀라지 않도록 평소와 같은 태도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외에는?”
“안전한 결혼 생활, 적당한 시기의 합의 이혼, 목숨의 보장이에요.”
“예상치 못한 내용도 있는데.”
체이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못마땅한 표정은 조건이 마음에 안 든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안전한 결혼 생활이라느니 목숨이 보장이라느니.
에블린은 겁이 많은 이기에 목숨과 관련된 부분은 당연히 조건으로 내걸 것으로 생각했다.
수도원 사람들의 시신에 관해서도 언젠가 물어 올 것을 알기에 따로 명령도 해 놓은 상태.
하지만 이혼 건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굳이 이혼해야 하나?”
그래서일까.
쉽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이혼 조건을 걸고넘어지고 말았다.
“안전이 보장되는 걸 원한다면 쭉 공작 부인 자리에 있는 게 네게는 더 좋은 일일 텐데.”
체이서의 말대로 공작 부인의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누가 보아도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 에블린은 필요 이상으로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 루이사 공작 부인으로서 역할을 잘할 자신이 없어요. 그리고 혹시 또 모르잖아요. 소가주님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
에블린은 변수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만약 게임의 스토리 대로 플레이어가 나타난다면 분명 그녀는 루이사 가문을 휘저어 놓을 테니까.
“사랑? 내가?”
하지만 체이서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나랑 이혼하고 싶단 건가?”
왜 똑같은 질문을 자꾸 하는 걸까.
에블린은 불편한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저는 치료제 개발을 마치면 고즈넉한 시골로 내려가 혼자 조용히 살고 싶어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려는 건 아니고?”
“그럴 리 없다는 거 아시면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잖아요.”
신랄한 말에 상처받는 대신 에블린은 그저 가볍게 웃었다.
감정 정리라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조금씩 마모가 되나 보다. 가족들을 떠올리는 게 처음보다 아프지 않았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속내를 들여다보겠다는 양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삐딱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 갔다.
“과연 네가 공작 부인의 자리에서 모든 걸 누리다가 단번에 포기하고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게 신경 쓰이시면 위자료를 두둑하게 챙겨 주시면 되고요. 사실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죽이지만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말에 뭐가 우스웠는지 몰라도 체이서가 소리를 내 웃었다.
“말했잖아, 에블린.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니까?”
그것도 아주 즐거워 보였다.
다행히 기분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다. 에블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그걸 계약서에 잘 명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에블린의 태도는 단호했고 계약 조건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체이서는 어쩐지 심사가 뒤틀렸다.
왜 자신이 이혼에 대해 이렇게 발끈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에 더더욱.
‘뭐, 나는 손해 보는 것 없으니까.’
어차피 아쉬운 것은 에블린이기에 체이서는 뒤늦게서야 이 조건을 수락해 주었다.
“좋아. 안전 보장에 이혼 시 위자료도 듬뿍 주는 걸로 가자고. 대신 공작 부인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