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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27)화 (27/159)

 27화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무래도 일정의 여유가 되지 않아 함께 차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연구하는 이들은 대부분 바쁘지. 겸직으로 의사 일도 하다 보니 더 바쁜 이야.”

붙잡는 게 민폐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소는 기가 막혔다.

어제까지 열심히 야근한 덕에 오늘은 외근 후 퇴근하라고 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까.

하지만 하소는 성질이 지랄 맞은 체이서를 상사로 모신 지 오래되었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다음에 대접해 주시면 맛있게 마시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에블린.”

“그래요. 그럼 소가주님도 다시 복귀하시나요?”

“어제까지 충분히 일했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안 그래도 가 볼 곳이 있어서 그런데.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건 어때?”

에블린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마야와 로피가 곁을 지켜 주었지만 원인 모를 외로움은 찾아왔었고, 그럴 때마다 체이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고 있으니 체이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해 보였다.

“내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나 봐?”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에블린은 민망한 와중에도 솔직히 답했다.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아요.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즐겁네요.

하소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은 무슨 사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실례임을 안다면 묻지 말아야지.”

체이서의 타박에 하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옙,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 분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처음 보는 에블린 앞이라 참았지만 하소는 특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본인이 욕을 먹어도 눈치껏 사람을 맥이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체이서 앞에서도 이따금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니 말이다.

흔히 기사단 사람들은 깡다구가 높아서 평민 신분으로 1 기사단까지 들어온 것이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평소라면 참았지만,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시니까.’

하소는 체이서가 화를 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런 말을 던졌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인사를 마친 뒤 방에서 빠져나왔다.

‘곧 좋은 소식 들려올지도 모르겠네.’

외모를 보면 선남선녀지만 성격은…….

하소는 조용히 빌었다.

부디 체이서가 에블린을 만나 조금 덜 지랄 맞아지기를 말이다.

*** 

하소가 돌아간 후, 에블린과 체이서는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목적지를 묻는 에블린의 말에도 체이서는 꿋꿋이 입을 열지 않았다. 진작 체이서에 대한 경계가 풀려서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마차 구석에서 덜덜 떨며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을 보며 에블린의 두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기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 앞에는 ‘제랑드 보육원’이라는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보육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고.

“가문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이야.”

“……왜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오셨어요?”

아이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과거 동생들이 사이좋게 수도원 앞을 뛰어노는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듣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잊고 싶지 않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게 해 주었다.

‘혹시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걸 보려 데려온 건 아니겠지?’

“특별한 이유는 없고.”

체이서는 에블린의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아 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것인지 멀리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오는 이는 없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 조용히 보육원 근처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연구가 꽤 오랫동안 진행될지도 모른다잖나. 저택에만 있으면 답답할 것 같으니 소개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 적어도 이 보육원은 가문에서 관리하니 안전한 곳이니 외출할 거면 이곳으로 오라고.”

호의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에 에블린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앞서 한 지나친 추측은 보기 좋게 오답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네게 안정제가 되어 줄지도 모를 테고.”

체이서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에블린을 걱정하고 있었고.

“꼭 나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저택에 머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 주려는 거야. 보육원 관리인 등 네가 할 일은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강압적인 태도를 지웠다.

그리고 에블린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항체라지만 이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가 있을까?’

바쁜 와중에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굳이 보육원까지 데리고 와서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체이서는 내게 이리 잘해 줄까.’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사내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러니 부담가지지 말고 저택에서 편히 지내.”

쓸데없이 다정한 면모에 에블린의 마음이 거칠게 일렁였다.

“괜히 눈치 보면서 방 안에만 있지 말고.”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불안정한 에블린의 마음을 자꾸 흔들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일주일간 심각히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고작 짧은 말 몇 마디에 청혼에 대한 고민은 손쉽게 막을 내렸다.

“저 방금 결정했어요. 우리 남들 앞에 보일 만한 그럴듯한 사이가 되어 봐요.”

“그게 무슨 소리지?”

체이서는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가 곧 그 뜻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한 달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체이서가 관찰한 에블린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돈에 욕심이 있는 이도 아니었고, 안심시켜도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꽤나 영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런 빠른 결정이 조금 놀라웠다.

‘기분 전환을 시켜 주려 데려왔을 뿐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나?’

물론 결정을 빨리해 주면 이쪽에서야 좋았다.

체이서의 놀란 얼굴을 보며 에블린은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오래 고민해도 결과는 똑같을 것 같아요.”

물론, 이 잠깐의 외출만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다고 하니 망설이던 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생겼으니까.

와중에 체이서가 함께 걸어가자며 손을 내밀어주니 그것을 잡았을 뿐이었다.

‘마야에게는 미안하네.’

에블린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조언을 올렸던 마야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게 나아.’

차라리 루이사 가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에블린이 부인이 되어 적당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이번 대에는 비극의 공작 부인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비극의 공작 부인이 될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여러 변수에 의해 앞날은 모르는 법.

‘체이서를 믿어 보자.’

에블린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체이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계약 결혼 관계니까 계약서를 쓰고, 이건 조항에 넣자.’

에블린은 굳게 다짐한 얼굴로 당당히 말했다.

“그러니 우리 결혼해요!”

“답지 않게 당차군. 좋아.”

체이서 또한 바라던 바였기에 흔쾌히 답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에블린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고민이 떠올랐다.

‘잠깐만. 그럼 나는 무슨 신분으로 결혼해야 하는 거지?’

분명 체이서는 후계자를 선정하기 전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 10년 가까이는 부부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일 테고.

‘루이사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평민과의 결혼은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사망 처리된 예전의 이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고민 하나를 끝내니 새로운 고민이 찾아오네요.”

에블린은 찬찬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아. 그게 문제였나?”

에블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체이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것도 아닌 걸 고민…….”

“중요한 문제예요. 앞으로 제 생활이 달린 거니까요.”

에블린의 태도가 진중한 탓일까.

“그럼 문제가 해결되면 새로운 고민도 사라지겠지?”

체이서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고는 “채혈했으니 어지러울지도 몰라.”라고 말을 하며 잡았던 손을 슬쩍 빼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에블린의 시선이 와 닿았지만, 그는 모르쇠 하며 그저 “넘어지면 안 되니까.”라는 말을 변명처럼 붙이고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뒤 향한 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예요?”

“가주의 집무실이지.”

가주라는 단어에 에블린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을 직접 중앙에 마련된 붉은 소파 위에 앉혀 주었다.

에블린은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이렇게 막 들어와도 괜찮아요?”

“내가 가주 대리인데 뭐가 문제야.”

체이서의 말이 사실인 듯 곧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온 하녀들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간단한 다과를 놓고 있었다.

“찾는 데 조금 걸리니까 잠시 차 마시면서 쉬고 있어.”

하녀들과 함께 들어온 마야가 두툼한 담요를 에블린의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아가씨, 이곳은 공기가 많이 찹니다.”

“고마워요, 마야.”

체이서는 두 사람을 힐긋 보더니 이내 익숙한 손길로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세요.”

하녀들이 벽난로의 불을 때는 것을 마치자 마야는 그녀들을 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에블린은 마야가 따라 준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며 조용히 집무실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단정하지만 높이 쌓인 서류의 산, 왼쪽 벽에는 이제 막 불을 넣은 벽난로가 따뜻한 열을 내고 있었다.

‘내가 루이사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게임 일러스트에서 보았던 공간이어서 그런지 낯선데 익숙한 느낌이 든다.

에블린이 조용히 집무실을 둘러보는 사이 드디어 체이서가 원하던 책을 찾았는지 에블린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황실에 올려진 귀족 계보야.”

이곳에 있는 다른 책들과 달리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티가 나는 책이었다.

“옛날 거 같은데요?”

“많이 낡아 보이지? 이래 봬도 마도구야. 출생과 사망 시 황실에 신고해야 되는데 그 기록들이 1년마다 갱신되는 책이지.”

체이서는 자연스럽게 에블린의 옆에 앉았다.

오래된 만큼 효능은 확실하다며 체이서는 낡은 책을 폈다.

효율성을 위해 빠르게 훑어보는데 다행히 먼지가 휘날리지는 않았다.

“이 페이지에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계보가 실려 있군.”

에블린은 계보를 받아 들고선 천천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계보에는 바이아르도 초대 백작부터 시작하여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역대 바이아르도 구성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망한 해도 표시가 되어 있네.’

에블린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줄로 시선을 내렸다가 깜짝 놀랐다.

에블린이 7살 때 팔려 오면서 당연히 ‘에블린 바이아르도’가 사망했다고 신고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블린의 생각은 착각이라는 듯 그 자리에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플란 바이아르도, 제시카 바이아르도 사망…….”

바로 에블린을 팔아넘긴 친부모님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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