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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26)화 (26/159)

 26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였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엇 하나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애초에 전염병도 게임 속에서는 없었던 내용이니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리라 단정해서는 안 돼.’

하지만 모든 것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만약 에블린이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체이서와 에블린은 계약 기간 동안 사이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치료제의 개발과 후계자의 선정 후 이혼한다는 서약은 필수일 테니 문제없이 이혼도 마칠 테고.

물론 이 또한 체이서를 믿는 것과 루이사 가문을 믿는 건 별개의 문제니 이 부분도 신중히 생각을 해 봐야 했다.

‘그런데 나 자꾸 결혼했을 때의 방향으로만 생각하네.’

감히 거절하는 게 상상이 안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에블린은 불쑥 떠오른 감정을 되새기지 않고 꾹 눌러 버렸다.

‘아니면은 무슨 아니면이야. 체이서가 무서워서 그런 거지 뭐.’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지가 뻗쳐 나가는 걸 보니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았다.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요. 마야가 저를 그만큼 신경 써 줬다니 기분이 좋은걸요?”

내뱉은 말과 달리 에블린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일까.

마야의 얼굴에 근심이 찬 게 보였지만 에블린은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고민은 사치지.’

체이서 또한 자신의 필요로 청혼한 것이라지만 그보다 에블린이 보는 이득이 더 클 것이다.

지금의 에블린은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으며 돈도 없으니까.

‘그러니 고민은 사치라는 걸 아는데…….’

딱 한 걸음만 나아가면 청혼을 승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과 달리 그게 쉽지 않다.

그때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소가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 잠시만요.”

밖에 서 있던 호위 기사의 목소리에 에블린도 마야도 분주해졌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야는 프로답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서는 방문을 열어 주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미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창밖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기에 체이서가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데 너무 박한 질문 아닌가?”

까칠한 목소리였지만 예전과 같이 겁은 나지 않았다.

체이서는 어느새 에블린 앞에 멈춰 섰다.

에블린은 문득 그가 지난번보다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서 일하는 것 맞으세요?”

“괜찮아.”

에블린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체이서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괜찮대도.”

말하는 것과 달리 체이서는 에블린이 감싼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더 괜찮아질 것도 같은데.”

그대로 눈을 감은 체이서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평온해 보였다.

‘얼마나 일이 바쁘면 철인 같은 사내가 이리 피곤해하는 걸까.’

그때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가 체이서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제 존재를 잊은 건 아니시죠, 단장님?”

길게 흘러내린 하늘색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은 푸른 물방울 같은 여인이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에블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체이서가 고개를 들고는 짧게 혀를 찼다.

“전에 말했던 의사야.”

그 말에 에블린의 눈이 절로 반짝였다.

너무 여유로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일상의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제 이름은 하소 필론. 단장님이 속한 제1 기사단의 단원입니다.”

“반갑습니다, 하소 경. 제 이름은 에블린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소개 뒤로 마야가 방을 나서는 게 보였다. 곧 방문이 닫혔다.

방에 셋밖에 남지 않자 하소가 에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네?”

에블린이 어버버하는 사이 체이서가 그녀를 방 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혔다.

하소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품속에서 외알 안경을 꺼내어 쓰고는 에블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외알 안경을 쓴 오른쪽의 푸른 눈이 새롭게 색칠되듯 황금색으로 변하였다.

“자, 감염 여부부터 확실하게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소는 맥을 짚듯 상처 위에 두 손가락을 대고서 천천히 시선을 올려 에블린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하소의 눈이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감염된 게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됐었죠. 신체가 자가 치료해 감염 세포를 몰아낸 것 같아요.”

하소는 유심히 상처를 살펴보더니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 감염자에게 물린 상처는 아물지 않죠. 하지만 에블린 양의 상처는 보다시피 흐릿해질 정도로 아물었네요.”

“그럼 제가 마물로 변할 위험은 없는 건가요?”

“예, 그 부분은 확실하게 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세게 물린 터라 가벼운 흉터는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레이디의 몸에 흉터라니…….”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에블린은 감사했다.

자신이 감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또 항체의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 말이다.

하지만 체이서는 아니었나 보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하소, 흉터를 제거할 방법은 없나?”

그는 에블린이 괜찮다고 만류해도 계속 하소를 닦달했다.

하소가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통 마물에게 입은 상처는 아물지도 않는데 흉터 제거법이 어디 있…….”

그러다 체이서가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잘 아는 약제사가 있으니 그분과 함께 의논해 보고서 다시 이야기해 드릴게요.”

“이 정도 흉터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에블린과 달리 체이서는 강경했다.

“네 몸에 흉터가 남는 걸 나보고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어차피 내 몸인데…….’

에블린은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지만, 체이서는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더 이상의 말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건 아닌데요…….”

하소의 중얼거림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한 듯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장님 말씀대로 에블린 양이 항체일 가능성이 크다 볼 수 있어요. 특수한 상황이다 보니 연구를 해 보아야 겠죠. 많이 힘드실지도 모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하소의 걱정과 달리 에블린은 환히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힘들어도 해야죠.”

“와, 멋지시네요. 그럼 간략히 설명해 드리자면 어째서 항체 반응이 보이는지 연구해 볼 생각이에요. 실례지만 혹시 이능력을 보유하고 계실까요?”

하소의 말에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요. 이능력을 보유한 경우 능력에 의한 반응인지 확인하게 되지만 이능력자가 아니라면…….”

하소는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보통은 채혈을 통해 실험자의 피를 분석하고, 그를 토대로 연구하게 됩니다.”

하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능력 ‘체내 분석’을 통해 본 에블린의 몸 상태를 떠올려 보았다.

‘전체적으로 근육 부족에 체중도 적고, 체력도 좋지 않아. 무언가 희미한 힘이 느껴지는데……. 혹시 각성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없다 싶을 정도의 적은 양이다 보니 아마 각성 판정이 내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일반인처럼 살아온 거겠지.’

그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현재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님으로 루이사 공작저에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필시 귀한 집안의 여식일 터.

신비한 요정을 보듯 아름다운 외모에 예의가 갖춰진 자세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

딱히 손님이 아니더라도 귀한 집안에서 보호받고 자란 레이디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자기 피를 황금과도 같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고위 귀족일 경우 건강과 관련된 게 아닌 이상 채혈은 더더욱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채혈이 필요하겠네요?”

“네, 번거롭겠지만…….”

하소가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치료제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쁜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에블린이 흔쾌히 허락하였다.

‘천사인가?’

하소는 에블린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 괜히 눈을 비볐다.

“괜찮겠나?”

에블린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 와중에 오히려 체이서가 못마땅한 듯 물었다.

‘단장님은 아까부터 왜 저래?’

하소가 체이서의 색다른 모습에 질색하고 있는 도중에도 에블린은 씩씩하게 답했다.

“치료제 개발을 위한 일이잖아요. 이 정도는 각오했어요.”

“지속해서 피를 뽑겠다는 건데도?”

“네!”

에블린은 힘차게 대답했다.

현대에서 살았던 기억 덕분인지 오히려 헌혈과 같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뿌듯함이 들었다.

“고작 채혈만으로 도움이 된다니 너무 기쁜걸요?”

“고작 채혈이라니.”

다시 체이서가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저 지금 조금 더 신나는 것 같아요!”

하소는 ‘하지만’과 ‘괜찮아요!’를 번갈아 가며 말하는 두 남녀를 보며 두 사람 몰래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긴 것은 에블린이었다.

***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신난 것은 에블린이 유일하였다.

가족들을 죽인 그 병을 세상에서 지워 낼 수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 에블린은 매우 들뜬 것이다.

채혈을 마친 하소가 작은 병에 피를 담고는 익숙하게 일정을 조정하였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씩 채혈하는 것으로 하고, 사전에 연락드려 약속을 잡고 방문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예.”

“손님께 차도 대접 못 해 드렸는데…….”

에블린이 아쉽다는 얼굴로 하소를 붙들었다.

‘마셔도 되나?’

간절한 부탁과 같은 말에 하소는 고민에 빠졌다. 체이서는 진단만 하고 빠르게 퇴장하라고 했고, 하소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소는 연구를 위해서, 또 에블린이라는 사람 개인에게 흥미가 생겼기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를 살펴보고 싶었다.

‘어차피 외근 후 퇴근해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있다 갈까?’

하소가 그리 생각하며 체이서를 올려 보았다.

‘가.’

그리고 눈빛에서 읽은 명백한 축객령에 ‘그럴까요?’라고 말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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