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로피!”
머무는 시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로피가 나쁜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가씨가 너를 편히 대해 주신다고 한들 네 직책을 잊고 주제넘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했을 터!”
하지만 하녀로서 부족한 모습이었기에 마야는 매섭게 로피를 다그쳤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해맑게 웃던 로피도 금세 겁을 먹고 울먹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사에 이어 모시는 주인에게도 벌을 받을까 두려운 듯 닭똥 같은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로피가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당황한 에블린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는 눈가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궁금할 수도 있지.”
다정한 위로에 로피가 소리를 내 훌쩍이기 시작했다.
‘하녀라지만 아직 어리지.’
에블린은 소맷자락으로 부드럽게 로피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수잔이 울 때도 이리 닦아 주고는 그랬었는데.’
추억은 잠시 접어 두고.
“다만, 사생활을 묻는 건 타인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에요. 이번에야 모르고 그랬을 수 있다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 해요?”
“흐윽, 네!”
에블린의 위로에 로피가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마야가 그런 로피의 행동에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음, 아무래도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긴 하지.’
에블린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방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체이서가 보내 준 선물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아기자기한 인형, 이 계절에 구하기 어려운 꽃다발,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드레스, 화려한 보석이 박힌 장신구.
누가 보아도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니 그리 오해할 만도 했다.
에블린은 로피의 울음이 그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피, 밖에서 조금 쉬었다 오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때마침 마야가 로피를 타이르며 권했다. 반성하라는 의미가 섞여 있었기에 로피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남들의 눈에는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로피의 말에 의하면 지금껏 체이서가 이렇게 선물을 가져다 바친 여자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애인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에블린이 기분이 좋아 보이니 틈을 타 물어보려 했던 거겠지.
사람들이 로피와 같이 에블린을 체이서가 숨겨 둔 애인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눈앞이 아찔했다.
‘더 큰 소문이 퍼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게 맞는데…….’
어찌 이리 쉽지 않은지.
그런 에블린을 조용히 바라보던 마야가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만, 아가씨. 제가 질문을 하나 드려도 괜찮을까요?”
“질문이요?”
마야는 그녀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마치 자신이 입에 담을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듯 말이다.
“혹시 루이사 공작 부인 자리에 얽힌 저주에 대해서 들어 보셨을까요?”
과연 굳은 표정만큼이나 심각한 주제이기는 했다. 에블린은 처음 듣는 소식에 고개를 내저었다.
마야는 사명감이 투철한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귀한 자리인 만큼 무게를 짊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곱게 잡고 있던 두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말을 꺼냈음에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적어도 마야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에블린은 이야기를 마저 해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사 가문의 계보를 보면 역대 공작 부인들 대부분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병에 의해서, 혹은 암살로 인해서 등 그 이상의 갖가지 방법으로 말이죠.”
마야는 지금껏 보았던 것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조심히 저주에 대해 읊고 있었다.
“물론 후계자를 낳고 오랫동안 평화로이 살다 가신 분도 계시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듯 마야가 숨을 깊게 들이 삼키고 다시 내쉬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로 손에 꼽을 정도의 수준입니다. 대부분 공작 부인들의 삶은 비참히 끝났으니까요. 죄를 지어 가문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친정 가문이 반역을 일으키는가 하면,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신 분도 계시죠.”
끝이 아니었다.
“또한 건강한 몸으로 시집을 오셨다가 시름시름 앓는 경우도 많다 들었습니다. 그 후 요양을 위해 공작령에 내려가지만 보통…….”
“사망하는군요. 병으로 인해서.”
“예, 그렇습니다.”
에블린의 표정이 심각하자 주제넘은 발언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였는지 마야가 허리를 숙였다.
“로피는 아직 어리기에 직접 보지 못한 저주보다 주인 어르신들에게 관심이 더 갔을 뿐입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탓이니 로피 대신 저를 벌해 주세요.”
“괜찮아요, 화는 안 났는걸요.”
에블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다만 궁금하네요. 제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저의가 무엇인지.”
에블린은 그리 말하면서 마야를 바로 세웠다.
드러난 마야의 얼굴은 평소 냉정한 그녀답지 않게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물론 금방 갈무리하기는 했지만, 에블린은 이미 보았으니 늦었다.
은연히 퍼진 소문이라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무서웠을 것이다.
적어도 어린 나이에 루이사 공작가의 하녀장이란 직책을 가진 이니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입을 가볍게 놀린 죄로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어째서 에블린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걸까.
에블린은 저주의 내용보다 마야의 속내가 궁금했다.
“처음 아가씨가 이곳에 오셨을 때…….”
마야는 눈을 내리깔고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몸에 상처가 많으셨고, 열이 들끓으셨죠.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셨답니다. 의사도 약은 처방해 주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에블린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가씨께서 겨우 의식을 차리고 깨어나셨을 때……. 방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아가씨는 다시 소가주님의 품에 안겨 돌아오셨지요.”
“맞아요.”
“주제넘게도 저희는 감히 아가씨의 사정에 대해 추측하고, 입에 담았습니다. 아가씨께서 공작 부인에 관한 소문을 알고 있기에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왜냐하면 누가 보아도…….”
다시 마야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네, 누가 보아도 아가씨가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의 모습은 강제로 끌려 온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랬었나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처참한 모습이긴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루이사 저택을 찾아온 손님에게 이렇게 호위 기사와 하녀를 붙여 주는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보호의 목적이라 하셨지만 이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입니다.”
‘그러고 보니 더는 도망을 못 친다느니 그런 말도 했었지. 이렇게 생각할 법도 한걸.’
에블린의 난감한 표정에 마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걱정이……. 걱정이 되어서 감히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아가씨는 이 저택에 어울리지 않으시니까요.”
이건 에블린을 깎아내리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제가 일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 저택은 사람을 잡아먹는 곳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하녀장에 오를 수 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쩐지 기분이 오묘했다.
“네, 이곳은 행복과 거리가 먼 곳입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밝고, 또 누구보다 맑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아가씨께서 이곳에서 괴로워하실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루이사의 고용인에게 이런 걱정을 받으니 참으로 이상하고 낯설었다.
루이사 공작저는 분명 사악하고 무서운 곳이어야 하는데.
체이서도 그렇고, 마야도, 로피도 그렇고.
에블린이 만난 몇 안 되는 사람은 그녀에게 있어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저건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이야.’
수도원에 살던 시절, 마을 사람들은 수도원의 사정을 모두 알았기에 에블린을 가여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동정 어린 시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마야가 품은 감정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에블린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죽을까 봐 걱정된다는 거죠?”
“…….”
마야는 답을 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긍정을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을 에블린은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어쩐지 에블린은 즐거워졌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말이다.
“마야가 솔직히 말해 줬으니 나도 고민을 털어놓을래요. 사실 얼마 전 소가주님께 청혼받았어요.”
계약이라든가 상호 합의라든가.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마야의 얼굴이 답지 않게 새파랗게 질린 것에 에블린은 오해를 잡기 위해 다급히 답을 이었다.
“소가주님께서는 편히 답해 달라 하셨어요. 협박도 강요도 아니라고 덧붙이셨죠.”
물론 처음 제안했을 때는 협박이었지만.
‘사실 저주에 관한 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
루이사 공작가는 후계자를 밖에서 데려와야 하므로 그들에게 공작 부인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거슬리면 제거한다.
끔찍하게도 진정 루이사다운 방식이었다.
공작가는 사람들이 의심을 사지 않도록 공작 부인을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내몰았고, 이는 사교계를 넘어 제국 암암리로 퍼지게 된다.
‘기억나. 게임을 했을 때 뭐 이런 가문이 있냐며 욕도 했었으니까.’
후계가 뭐고, 가문이 뭐라고 살생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걸까.
‘결혼하면 나도 마야의 우려처럼 죽으려나?’
아니면 플레이어가 등장하여 가주 자리를 뺏을 테니 공작 부인이 되지 못하여 ‘저주’를 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 전에 체이서와 상호 합의하에 이혼을 하고 조용히 살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변수가 너무 많아. 플레이어가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확실치 않잖아.’
만약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이 게임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