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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24)화 (24/159)

 24화

절망에서 끌어 올려진 날 보았던 구원의 빛이 다시 에블린에게 와 닿은 것이다.

“제리는 감염자였고, 제리에게 물렸다면 너도 감염이 되는 게 맞아. 하지만 그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너에게서는 어떤 전조 현상도 보이지 않지. 그건 아마도…….”

차분한 음성은 오히려 에블린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깊숙이 잠들어 있던 삶의 열정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듯 몸을 일으켰다.

차오르는 기대감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달뜬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항체일 수도 있다는 거겠지.”

“제가…….”

에블린은 무언가 복받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제가 정말 항체일까요?”

부디 착각이 아니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기에.

“부모는 어린 저를 팔았고, 팔린 곳에서 마저 능력 하나 없다고 쓸모없는 계집이라 불렸어요. 겨우 손에 넣은 가족도 멍청하게 잃어버렸고요. 이런 제가…….”

에블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물기가 서렸다.

“정말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요?”

이건 본능적인 자기 혐오감에 가까웠다.

모든 것을 망친 자신이 감히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는 듯, 큰 두려움은 에블린의 정상적인 사고를 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은연히 부디 그렇다 답해 주기를 원하는 작은 소망이 들어 있었다.

체이서는 그걸 읽었고, 에블린을 위해 또 그녀가 필요한 자신을 위해 내뱉었다.

“원인 불명의 전염병은 수도뿐만이 아니라 제국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이야. 언젠가 이번처럼 죄 없는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건 정말이지 최악의 일일 테고.”

체이서는 굳은 얼굴로 에블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네가 희망이 될 수가 있어.”

그 말은 마치 꿈결처럼 달콤하고도 유혹적이었다.

“네가 있다면 진전이 없는 치료제의 개발을 금방 이뤄 낼 수 있을지도 몰라.”

체이서는 마지막 말을 꺼내는 것이 미안한 듯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면서도 약간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죽은 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또 앞으로 그들과 같은 피해자를 막아내기 위해 나와 함께하지 않겠어?”

에블린은 홀린 듯 체이서의 눈을 응시하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

그건 사람을 구하고자 원하는 이의 신념이 담긴 눈이었다.

에블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 이건 눈물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찬란한 달빛이 체이서의 몸에 내려앉았다.

아름다운 사내는 꼭 독을 품은 듯 날카롭고, 그녀에게 두려움을 선사해 주는 이었다.

게임 속 악역,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던 두려운 이, 사건의 원흉, 가족을 죽인 살인마.

그를 칭하는 끔찍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체이서는 루이사임에도 올바른 신념을 가진 이였으며, 상처 입은 이를 위로할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단순한 악역이 아닌 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블린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라며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더 이상 에블린에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에블린은 제 가슴 속을 꽉 채운 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체이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터질 것만 같은 이 기쁨에 몸이 못 버틸 것만 같았다.

“할래요, 함께하고 싶어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삶의 목표가 생겨났다. 목표가 생기자 살아가고자 하는 생의 의지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니.’

라사냐가 어린 에블린을 향해 해 주었던 말.

에블린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그녀의 신념이 절망이라는 진흙탕에서 다시 피어났다.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사심을 조금 담아 보자면 가족들을 죽음에 이끌게 한 질병을 몰아내어, 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걸 해낸다면 적어도 저승에 갈 때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 혼자 살아남은 이유도 이것 때문일지도 몰라.’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에블린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겠다 결심을 한 것이니까.

이제 혼자가 되어도 완연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만 같지 않았다.

어쩌면 체이서가 없어도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에블린을 마주 안아 주던 체이서 또한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군.’

그녀와는 정반대의 오만한 생각을 하며 말이다.

체이서는 지난밤 죽고자 했던 여린 이를 회상했다.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헝클어진 화사한 금발, 붉게 충혈되어 버린 청아한 연녹빛 눈, 눈물에 젖은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삶의 끝자락에서까지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감탄하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마저도 말이다.

그래, 체이서가 구한 생명은 참으로도 처연하고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더욱 탐이 났다.

항체 그 이상으로 이용 가치가 높아질 테니까 말이다.

‘여러모로 말이지.’

체이서는 제 품에 안겨 기쁨의 눈물을 터트린 에블린을 신기한 생물을 보듯 쳐다보았다.

지난번에는 죽고 싶다고 울더니 이번에는 삶의 목표가 생겼다고 운다.

체이서는 울음소리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장면을 보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는 싫은 것을 참지 않기에 이 상황을 박차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의 소유자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블린이 우는 것은 그에게 싫게 다가오지 않았다.

‘죽고 싶다고 우는 것보다 지금의 눈물이 더 낫네.’

왜 좋은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유가 필요할까?

어차피 어떤 것이든 상관없을 텐데.

에블린은 필요 있는 패였고, 체이서는 그런 패를 손에 넣었다.

‘귀찮음을 감수하기를 잘했군.’

어쩐지 섬뜩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체이서를 껴안고 있던 에블린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껏 기뻐하던 에블린은 뒤늦게 제 스스럼없는 행동에 당황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분위기에 취해서 체이서를 끌어안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니 뒤늦게서야 이성이 돌아왔다.

에블린은 민망함에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 굳게 결심한 듯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저……. 그러면 치료 약이 개발될 때까지 당분간 신세를 좀 질게요.”

체이서는 제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돌리는 에블린을 보며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일렁이는 걸 느꼈다.

먼저 기쁜 얼굴로 제 품에 달려들어 안겨 온 주제에 뒤늦게서야 시선을 피하는 행동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뭐, 이번 한 번만 놓아줄까. 어차피 앞으로도 이럴 기회는 많으니까.’

앞으로 이런 포옹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수도 없이 껴안을 테니 인자한 자신이 마음을 너그럽게 쓰기로 했다.

얼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하여 말을 꺼낸 에블린이 몸을 떼어 내려고 하자 체이서가 말했다.

“참, 에블린은 잊지 마. 아직 내 제안은 유효하니까.”

“네? 무슨 제안…….”

화들짝 놀란 에블린이 단숨에 체이서를 밀어냈다. 기억을 더듬는 듯 당황하는 에블린을 지켜보는 체이서의 입가에는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냥 손님보다는 약혼녀가 낫지 않겠어?”

“어, 어?”

에블린이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결혼해 주면 더 좋고.”

체이서는 한 걸음 다가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 줄게.”

다시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로 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강요가 아닌 권유. 이번에는 네 선택을 존중할게.”

다정한 미소가 어쩐지 낯간지럽다.

에블린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움찔거리다 간신히 답을 할 수 있었다.

“새, 생각해 볼게요.”

그렇게 두 사람 다 만족스러운 겨울밤이 지나갔다.

*** 

에블린이 끔찍하리라 상상했던 루이사 저택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굉장히 평화로웠다.

현재 루이사 가주는 병상에 누워 있고, 소가주인 체이서는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기에 공사다망하다.

체이서의 아래로 두 명의 공자가 더 있다고 들었지만, 그들도 임무로 바빠 저택을 비운 지 오래라고 하였다.

‘가주 대리 일에 기사단에서 맡은 임무와 이번 전염병과 관련된 일 처리도 해야 한다 했지.’

그렇기에 에블린은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양 얼마 전의 재난을 잠시 잊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겠지.’

에블린은 밝은 창밖을 내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체이서의 바쁜 일이 얼추 정리되면 그때부터 함께 치료제 개발을 위해 힘써 보기로 했으니까.’

바빠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에블린을 얽매던 절망스러운 겨울밤을 완전히 지워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춥디추웠던 시린 겨울은 다시 에블린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외롭지 않아서일까.

에블린은 더는 살아가는 게 무섭지 않았다.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어찌 보면 목표가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셔요.”

“아하하. 그게 다 보이나 봐요.”

찻잔에 차를 따라 주던 로피가 에블린의 얼굴을 보며 함께 웃었다.

웃음은 전염이 된다더니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잘 웃은 적이 없지.’

에블린은 어색히 뺨을 매만지는 대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스한 차를 음미하기로 했다.

비록 마야와 로피의 만류로 창문을 열지는 못했지만, 그 너머 보이는 겨울을 차를 더 한껏 향긋하게 해 주었다.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셔요?”

말로는 설명해 줄 수 없는 무언가이기에 이번에는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마야가 로피에게 눈짓했지만 어린 소녀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이 물었다.

“역시 소가주님과 아가씨는 그렇고 그런 관계이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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