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에블린은 환청을 이겨 내기 위해 속으로 끊임없이 외쳤다.
허전한 목가를 매만지다 손을 아래로 내렸다.
환청에 잡아 먹혀 스스로 목을 조르고만 싶어질 것 같아서.
“저기, 잠시만 밖을 나갔다 와도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간이 너무 늦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만, 정말 잠시만이면 돼요. 너무 답답해서…….”
좁은 곳에 갇힌 듯 답답함이 밀려오고, 트였던 시야가 점점 어둠에 물들어 간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벌건 불이 치솟는다.
다시금 반복되는 지독한 절망에 에블린은 숨을 쉬는 것을 잊은 듯 다급히 목을 매만졌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호위를 서던 기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에블린을 불렀지만, 그녀는 자꾸 무언가를 찾듯 목 근처를 거칠게 쓸어내릴 뿐이었다.
에블린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휘청이자 기사들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녀장을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닌…….”
“무슨 일이지?”
처음 에블린에게 답을 해 주었던 기사가 입을 염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가 깜짝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도착했을지 모를 체이서가 그들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한 기사가 에블린을 살피느라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 에블린? 아직 안 자고 있었나?”
체이서는 기사들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에블린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블린이 숨을 쉬기가 힘들어 점점 몸을 숙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덩치가 큰 기사들의 뒤에 몸이 숨겨져 있던 것이지만.
에블린은 힘겨운 얼굴로 땅에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이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공허한 눈빛에 담긴 절망.
체이서는 에블린의 눈 안에 서린 감정을 읽고서는 천천히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나?”
고작 목소리가 무어라고.
에블린의 주변을 감싼 지옥 불이 점점 사그라든다.
어둠도 거둬지고, 그곳에 만나지 못할 거라 예상했던 이가 나타났다.
“……체이서?”
에블린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안 자고 있었나. 응? 옷차림도 춥게 이게 뭐고?”
“조금 답답해서…….”
“또 도망가려고 했나?”
“아니에요. 그냥, 그냥 바람을 쐬고 싶었어요. 그런데 너무 늦은 시간이니까…….”
체이서는 에블린의 말을 들으면서 겉옷을 벗어 에블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 춥게 돌아다녀. 몸도 연약한 이가.”
‘아침과는 다른 옷…….’
아무래도 에블린과 헤어지고 새로운 겉옷을 챙겨 입고 외출을 한 모양이다.
‘이러다 체이서의 외투는 내가 다 가져가겠네.’
“조금 걸을까?”
조용히 옷자락을 매만지던 에블린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그래도 괜찮아요?”
“잠시라면야.”
“하지만 이제 막 들어오신 것 아니에요? 어서 쉬셔야죠.”
“가끔 보면 루이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단 말이야.”
체이서는 괜찮다고 말을 하며 장갑을 벗은 손으로 에블린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마주 잡은 손으로 향하자 그저 싱긋 웃어 버린다.
“넘어지면 안 되지 않나.”
“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글쎄. 내가 보아 온 것이 있어서.”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분명 저 말은 진심일 것이다.
체이서는 혹 에블린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사로서 하는 배려라고 생각해.”
그렇게 에블린과 체이서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조용한 복도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치던 그날과는 달랐다. 조용하고 한적했으며,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혼자가 아니구나.’
모두가 떠나고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을 깨달았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절망이 찾아왔었다.
‘그때와는 달라.’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심된다니. 무엇보다 그 대상이 체이서라는 사실이 에블린으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놀랍게도 정말 안정되네.’
붉게 타오르는 붉은빛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다.
“조금 기분은 나아졌나?”
“네. 많이요.”
에블린은 그제야 웃음을 보일 수가 있었다.
또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그것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서 문제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괜히 제가 휴식 시간을 뺏는 것 같은데.”
“괜찮아. 그냥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게 내게 더 도움이 되니.”
에블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끔 보면 이 사내, 생각보다 능글맞았다.
‘과연 대귀족이라는 건가.’
에블린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신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는 작은 비밀을 품은 채 말이다.
두 사람은 한참이고 조용한 복도를 내걸었다.
고요히 앉아 있는 새벽을 깨트린 것은 체이서의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직 많이 힘들지?”
약한 모습은 더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맘과 달리 체이서의 질문에 속에 고여 있던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네.”
“힘들 수밖에 없겠지. 그래, 그중 뭐가 가장 힘든데?”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겠다는 어조에 에블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에블린의 삶의 목표’를 정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에블린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행복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요.”
제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울한 목소리는 두 사람의 정적을 채워 나갔다.
“제 삶의 목표가 지워졌으니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너무 막막해요. 눈을 감으면 깜깜하잖아요? 꼭 그게 제 미래 같아요.”
과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는 행복해지고 싶은데 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제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아 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한 기분이었다.
‘체이서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여서 그런가.’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던 루이사 시험의 경험을 공유하고, 또 가족들을 모두 앗아간 참사까지 함께 겪어서 그런 걸까.
이런 공통점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블린은 어느 순간부터 체이서의 앞에서 편히 제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게 되었다.
게임 속 악역이라 생각하여 거리를 두려던 이가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니.
과거의 에블린이 알면 정말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관계의 큰 변화였다.
체이서로부터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어쩐지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니까.
“그 와중에 상처도 발견했어요.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리에게 물렸던 상처 같더라고요.”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체이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에블린은 불안해하지 않고 제 생각을 모두 꺼내었다.
“정보를 얻고 싶어서 신문을 살펴보니 병에 걸린 이에게 물린 상처는 절대 낫지 않는대요. 그런데 제 상처는 낫고 있더라고요. 저는 감염이 된 걸까요, 아닌 걸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체이서의 되물음에 에블린은 숨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제가 언제 마물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어요. 꼭 신이 제게 죽기 전까지 힘들어하라며 벌을 내려 준 것만 같았죠. 이게 내 죗값이구나 싶어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체이서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에블린의 답을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가 감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살고 싶어서요. 행복은 찾고 죽어야죠. 음, 너무 이기적인가요?”
복잡한 속내를 토해 낸 덕인지 심각한 상황과 달리 속은 후련해졌다.
‘체이서가 죽이려 하면 잠깐 도망갈 힘 정도는 나겠어.’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두 사람은 실내와 연결된 작은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체이서와 손을 잡은 덕분인지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작은 정원은 겨울이 찾아왔음을 보여 주듯 주변에는 꽃 한 송이 없이 한적했다.
하지만 고요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느껴져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름답네요.”
무심코 튀어나온 감탄에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의 정원도 나쁘지 않지.”
체이서는 에블린과 함께 정원에 발을 디뎠다.
바람이 수풀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것이 두 사람의 걸음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나는 행복이라는 건 잘 모르겠어. 루이사가 된 뒤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되었고.”
에블린의 시선이 와 닿는 걸 알면서도 체이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을 보고 걸었다.
“덕분에 남을 행복하게 만들 줄도 모르지. 하지만…….”
그날 밤과 같은 바람이 분다.
차갑고 매서운 주제에 위로해 주듯 살포시 뺨을 쓸고 지나갈 바람이.
은은한 달빛 아래 체이서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미의 신이 내려온 것만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외모가 아니라 그의 뒷말을 듣고 싶어서인가?
그래, 절망에 빠진 에블린을 구해 준 그 날처럼.
“도움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금 에블린을 구해 줄 것만 같아서.
체이서가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부드럽게 그 위쪽을 쓰다듬었다.
손목 안쪽의 상처를 조심스레 매만지던 그가 낮게 웃었다.
“만약 네가 마물에 감염된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다시금 찬란한 빛이 체이서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에블린의 눈을 마주하였다.
“어떻게 할래?”
어둡지만 빛이 났다.
“너의 소중한 이들을 지옥으로 몰고 간 그 병을 네 손으로 없앨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