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체이서는 품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안타까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잠깐만 보고 간다는 게 반가워서 그만.”
그리고는 금방 나가려는 양 몸을 돌리다 말고 다시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모르니 짧은 경고도 잊지 않았다.
“얌전히 있어. 지난번과 달리 호위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안 해요.”
에블린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체이서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답답하다면 저택을 좀 둘러보아도 좋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의 산책은 오히려 도움이 될 테니.”
“…….”
“그렇다고 너무 신나게 돌아다니지는 말고. 이왕이면 저택은 내가 안내해 주고 싶으니까.”
에블린은 한숨을 내쉬는 대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전보다 다정하기는 한데…….’
어째 조금 못되어 보인다.
‘원래 못되기는 했지만…….’
체이서가 다시 등을 돌렸다.
에블린은 매정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체이서가 방문을 나가기 직전에 그를 불러 세웠다.
“오늘 언제 들어오세요?”
“음?”
이러한 질문을 받으리라 예상 못 했는지 체이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름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해서요.”
에블린은 외투 안에 감춰진 오른 손목을 몰래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내뱉는 게 주제넘다는 것은 알지만 에블린에게는 체이서와 대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못 들어올 것 같은데.”
체이서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답을 해 주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불러 세운 것이 기꺼웠나 보다.
에블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쁜 사람이니까.’
하지만 체이서의 답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담은 못 하지만 최대한 일찍 들어오겠다고 말하면 만족스러운 대답이려나?”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무리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나중에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체이서는 방을 완전히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에블린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낼 수가 있었다.
‘아직 힘드네.’
체이서의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릿속에 비극적인 참사가 떠오른다.
시간이 오래 흐른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고통에 파묻힌 채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가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체이서의 얼굴을 보면 가장 괴로운 때가 떠올랐지만 우습게도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키워내 주었다.
‘죽지 말라고 해 준 말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어.’
더는 체이서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체이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야와 로피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우선 환복을.”
“아, 네.”
에블린은 마야의 조급한 목소리에 멀어지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그녀들이 준비해 준 실내복으로 갈아입었을 때는 이미 체이서가 건네준 예복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돌려드려야 할 텐데 이래서야 어렵겠네요.”
“세탁방에 가져가 깨끗하게 세탁해 달라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별건 아니긴 한데 나중에 제가 직접 돌려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마야의 대답에 이어 로피가 눈치껏 겉옷을 챙겨 들었다.
“곧 아침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식사 후 저택을 둘러보시겠어요?”
“네, 혹시 이곳에 따로 서재가 있을까요? 그곳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싶어서요.”
방은 혼자 있기 정말 좋은 장소였지만, 정보를 얻기에는 부족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놀라서 깊게 생각 안 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루이사의 정원에 전염병 같은 소식은 없었어.’
그렇다면 에블린이 알고 있는 게임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걸까?
아니면 게임에서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일 뿐인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을 열심히 할걸. 제대로 기억나는 게 별로 없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그럼요. 서재로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실까요?”
마야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에블린이 아차하며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아, 최근 신문도 좀 구해다 주시겠어요?”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그 말을 끝으로 마야와 로피가 인사를 마친 뒤 방을 나갔다.
온전히 혼자가 된 방은 고요했다.
에블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멍한 시선으로 화려한 방을 구경하듯 훑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런 호화를 누려도 되는 걸까?’
모두가 괴로워하며 죽었는데 이렇게 홀로 몸과 마음이 편해도 되는 걸까.
잠깐 혼자가 되었다고 음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려 들기 시작했다.
‘아니야, 에블린. 우울한 생각은 하지 말자.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하지만 어떻게?
에블린은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마냥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해도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까.
삶의 의지가 되어 주던 가족은 비참히 죽었고, 그들이 없는 미래는 꿈꿔 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것이 모두 사라졌는데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아냐, 이제부터 찾아내면 돼.’
더 이상의 좌절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블린은 스스로에게 새롭게 다짐했다.
다시는 겁먹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
“생각보다 굉장하네.”
마야가 안내해 준 서재는 단순히 작은 방이라고만 생각했던 에블린의 예상과 달리 넓고 커다란 공간이었다.
가득 쌓인 장서들과 묵직한 책의 냄새에 에블린은 절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작은 도서관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한쪽에 놓인 넓은 소파에는 푹신해 보이는 쿠션과 담요가 두툼히 깔려 있었다.
또한 에블린을 위해 가져다 놓은 간단한 다과와 신문까지 함께니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가 참 좋았다.
‘우선 신문을 살펴볼까.’
에블린은 소파에 앉아 마야가 가져다준 최근 신문들을 빠짐없이 모두 정독해 보았다.
몇 부의 신문을 살펴본 결과 그 안에 담긴 정보를 파악했다.
1. 수도 내 빈민가의 감염에 의한 마물의 첫 출현, 병사 중 마물의 공격에 당한 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마물로 변하는 증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 마물에게 물리는 경우,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에 상처가 나는 경우, 혹은 체내에 그들의 피가 섞이게 경우 마물화 증상이 발생한다.
3. 최소 10분 최대 2시간 이내에 감염 증세가 보이기 시작하며, 한번 마물로 변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4. 현재 마물화 증상에 대해서는 원인 불명, 마도구로 피해 예방 중이며, 치료제는 개발 중이라지만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말에 절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긴……. 치료제가 있었더라면 체이서가 그리 행동하지는 않았겠지. 애초에 마물이 도망칠 일도 없었을 테고.’
에블린은 손목에 감긴 붕대를 노려보았다.
“이 신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왜 나는 멀쩡할까?”
신문을 모두 읽고 나서도 두려움에 차마 붕대를 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노려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면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
에블린은 두 눈을 딱 감고 거침없이 붕대를 풀어 헤쳤다.
오른 손목 안쪽에는 아물어 가는 상처가 보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사람의 치열 모양이 보였다.
“상처가 회복되고 있잖아.”
그렇다면 감염이 되지 않은 걸까?
기억을 되짚어 보면 분명 제리에 의해 입은 상처였고, 이는 감염의 매개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은 멀쩡한 것일까?
상처는 어떻게 회복하고 있는 것이고?
제리가 마물이 되기 전에 물렸기에 멀쩡한 것일까?
신문만으로는 정보가 한계적이었기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빨리 체이서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
이 부분은 체이서와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슬며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나도 감염돼서 마물로 변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꼭 하늘이 벌을 내려 준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에블린에게 희망을 주다가도 다시 앗아 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건 죗값일지도 모른다.
‘아, 이런 생각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에블린은 꾸깃꾸깃하게 쥐고 있던 붕대를 한쪽에 치워 두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체이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의 말처럼 오늘은 보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알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택의 정문 앞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이제는 체이서가 보고 싶네.’
분명 지난주의 에블린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
깜깜한 방.
에블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방에는 아무도 없고, 적막만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또 잠든 모양이네.’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서재에서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더니 몸에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노을이 지고 주변이 새까맣게 물들어도 체이서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절로 입맛이 없어 식사를 무르고 마야와 로피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한 채 침대에 누웠던 것이 기억이 났다.
너무 자면 머리가 아프다더니.
에블린은 머리를 짚으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것만으로도 두통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눈을 감고서 잠기운을 몰아내고 나서야 말똥히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몇 시지?’
에블린이 창가로 비척비척 걸어가 살짝 커튼을 거두어 보았다.
창 위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조용하네.”
아무래도 새벽에 잠이 깨 버린 모양이다.
“이대로 그냥 잠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잠기운은 달아났다.
에블린은 후우, 한숨을 내쉬고서는 마야가 놓고 간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체이서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겠지?’
침대맡에는 천사 날개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종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야가 혹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 불러달라며 놓고 간 것이었다.
‘소시민으로 오래 살기는 했나 봐.’
어렸을 적에는 너무도 익숙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에블린은 그들을 부르는 대신 직접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에블린은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어 보았다.
체이서의 말대로 기사복을 입고 있는 두 명의 호위 기사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문이 열릴 줄 몰랐는지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하녀장을 불러 드릴까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지금 몇 시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막 새벽 2시를 넘긴 참입니다.”
“아, 그럼 소가주님은 잠자리에 드셨겠군요.”
그렇다면 내일에나 대화할 수 있겠구나.
에블린이 아쉬워하자 기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직 소가주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셨다고요?”
“찾으셨다 전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급한 건 아니니까…….”
에블린은 어색히 말을 흐렸다.
사실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체이서를 못 볼 것이란 것 정도는 예상했다.
‘내 생각보다 더 바쁜가 보네. 당분간 볼 수나 있을까?’
에블린은 목걸이를 만지려다가 문득 목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아야 할 텐데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꽉 틀어 막힌 채 물속에 갇힌 느낌.
‘정말 행복해질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너 따위가?’
지지직거리는 환청은 에블린의 마음이 약해진 것을 깨닫고 다시금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