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에블린은 애써 미소를 짓고는 로피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욕실로 향했다.
‘크구나.’
욕실 또한 방에 지지 않게 크고 화려했다.
에블린이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얇은 가운으로 갈아입혀졌다.
“뜨거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요.”
로피는 해맑게 웃으며 에블린을 욕조 앞으로 데려갔다.
천사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욕조에는 연둣빛의 따스한 물이 김을 내뿜고 있었다.
마야가 물의 온도를 점검해 보더니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가운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기에 망설이지 않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스한 물이 몸을 감쌌고, 물에서 흘러오는 향긋한 꽃향기에 잠깐 몸을 담근 것뿐인데도 이것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물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네, 너무 좋아요.”
마야의 손길 아래 욕조 끝에 편히 목을 기대고서는 눈을 감았다.
“머리를 감겨 드릴게요.”
마야가 부드러운 타올로 몸을 닦아 주자 로피가 머리가 있는 곳으로 오더니 조심스럽게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마냥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이들의 솜씨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부끄러운 것과 별개로 몸을 편히 맡길 수 있었다.
“피부가 참으로 부드럽고 고우세요. 찬바람을 오래 쐬어서인지 손가락 끝이 조금 갈라지셨네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장미 크림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칼은 처음 봐요. 화사한 금색이라니. 꼭 밤하늘의 별을 녹여 낸 것만 같아요! 사실 조금 전 아가씨를 뵈었을 때 깜짝 놀랐어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거든요!”
부담스러울 정도의 칭찬에 에블린이 어색히 웃었다.
“하하. 그런가요?”
물에 젖은 자신의 금발은 본래의 색임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목걸이를 잃어버렸나 봐.’
그날 밤, 정신없이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참, 붕대도 갈아야 했었는데. 목욕을 마치고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붕대요?”
마야의 말에 에블린아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제리를 꽉 붙들었다가 분명 팔목 안쪽을 물렸던 것 같은데 ……. 보통 이런 전염병은 물리면 감염되는 것 같던데 괜찮으려나.’
에블린은 지난 생에서 보았던 좀비 영화를 떠올리며 몸을 흠칫 떨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고 있나요?”
“네, 아가씨께서는 일주일 전에 이곳에 오셨답니다. 내내 앓으셔서 얼마나 걱정이 컸는지 몰라요.”
‘일주일이나 경과가 없다면 감염은 아닌 걸까?’
그 후로도 두 사람에게서 외모를 찬양하는 칭찬이 한참 이어졌지만,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체이서는 알고 있으려나? 만약 나까지 감염된 거면 또 피해를 주는 걸 텐데.’
전염병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는지 어지러워질 때쯤 두 사람이 에블린을 일으켜 주었다.
로피가 커다란 타올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 주었고, 마야는 보송보송해진 그녀의 몸 위에 새로운 가운을 걸치듯 입혀 주었다.
“크림은 밖에서 발라 드릴게요. 우선 감기 걸리시기 전에 빨리 머리를 말려 드…….”
욕실을 나서던 마야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마야?”
“아, 아가씨. 아직 나오시면 안…….”
당황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에블린이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곳에 있어서 안 될 이를 마주하고 말았다.
“체, 체이서?”
고작 몇 시간 안 봤을 뿐인데 그와 오래간만에 만나는 것만 같았다.
그간 보았던 편한 옷차림과 달리 정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한결 더 빛이 났다.
“아, 아가씨! 우선 옷을 갈아입으셔야……!”
아름다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으니 마야가 다급히 에블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그제야 자신의 차림을 눈치챈 에블린이 얼굴을 확 붉히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가운을 움켜쥐었다.
에블린이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자 마야가 급히 외쳤다.
“빠르게 환복을 돕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절박해 보일 정도로 급박한 마야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체이서가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어 에블린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많이 놀랐나?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 몰랐는데.”
“아, 오늘은 일찍 눈이 떠져서…….”
그 대답이 뭐가 재미있는지 체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이 낯설기는 한 모양이야. 이리 이른 시간에 눈을 뜬 거 보면.”
체이서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답할수록 에블린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쌌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어깨 또한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은 언뜻 추위에 몸을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몸이 약한 이니 주의하라 하지 않았나.”
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실은 것이 아님에도 절로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 에블린의 어깨가 다시 튀었다.
더욱 매서워지는 체이서의 시선에 마야와 로피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방 안을 맴도는 분위기가 굉장히 불편한 게 금방이라도 두 사람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둘이서 할 이야기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나가 있어 줄래요?”
에블린의 말에 체이서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선 방을 빠져나갔다.
하녀들이 방을 빠져나가니 다시 방이 조용해졌다.
“하녀들을 바꿔 줄까?”
에블린은 제 몸을 감싼 겉옷을 꽉 움켜쥐고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랬어요. 분명 바쁘시다고 하셔서 당분간 얼굴을 못 본다 들었는데…….”
어쩐 일로 이곳에 왔냐? 라고 묻는 속내를 읽은 듯 체이서의 시선이 다시 에블린에게로 향했다.
“외출하기 전에 몸 상태를 확인하고자 들렀어. 꽤 오래 앓았으니까.”
“아, 이제는 괜찮아요. 두 사람 덕에 따뜻한 물로 목욕도 했더니 기분도 훨씬 나아졌어요.”
“그래? 그런 것치고 주인을 보살피기에는 부족한 것 같던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체이서는 그리 유한 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블린은 두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의견을 전해야 했다.
“아니에요. 소가주님께서 두 사람을 붙여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힘들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다행히 에블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체이서의 입가에 다시 웃음기가 서렸다.
“정말 하녀를 바꿔 줄 필요는 없고?”
“네. 둘 다 좋은 분 같아요.”
이건 진심이었다.
물론 두 사람과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단지 그들의 직업정신이 투철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런 편견 없이 손님으로 대해 준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는 있었으니까.’
“다행이네. 그렇다면 이제 도망치지는 않겠군. 지난밤과 같이 또 말도 없이 그리 사라진다면 이제는 널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 죄를 물을 테니까.”
체이서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숨을 거세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에블린은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체이서가 자못 냉정한 시선으로 에블린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적이 있으니 못 믿겠지.’
어떻게 해야 체이서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에블린은 최대한 체이서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말을 정리해 꺼내었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걱정한 게 맞겠지?’
에블린은 찰나였지만 보았던 체이서의 다정함을 믿고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소가주님께 폐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게요.”
“그게 끝?”
“아, 그리고 고마워요. 덕분에 몸을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
체이서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진다. 아무래도 이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나 보다.
‘아, 혹시 이건가?’
에블린은 심사숙고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참, 그래서 말인데요. 저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나요? 이제 몸도 다 나아서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그 질문에 체이서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물론 어떻게든 도와주신 사례는 할 거예요. 언제까지고 제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에블린인 무언가 실수했다는 생각에 손사래까지 치면서 제 무해함을 주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틀렸는지 결국 체이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네? 하지만…….”
“어차피 갈 곳도 없지 않나.”
물론 체이서의 말이 맞았지만, 이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왜? 아직도 나를 보면 괴롭나?”
“…….”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블린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 앙다물어진 입술은 더 이상 거절의 말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체이서는 붉어진 에블린의 눈가를 빤히 바라보다 그 위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움찔거리지만 피하지는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괴롭겠지.’
에블린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짧은 순간에 가족들의 죽음을 털어 내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한들 체이서를 보면 그 순간이 떠올라 괴롭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져야지.’
체이서는 이대로 에블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의 상처를 헤집어 고통에 익숙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계속 내 옆에 둘 거니 오히려 배려하는 거지.’
만약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다시 망가져 무너져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다른 용도를 찾아보면 된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겠지.’
적어도 체이서가 판단한 에블린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