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피도 섞이지 않은 이들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슬퍼하고, 괴로움에 목숨을 내던지려고 하는 건지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 이대로 놓아주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체이서의 시선이 붕대로 감싸인 그녀의 오른쪽 손목으로 향했다.
에블린이 목숨을 잃든, 폐인처럼 살든 체이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지난밤 제게 말씀해 주셨죠. 가족들은 제가 죽지 않기를 바랄 거라고.”
그럼에도 그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정말로 가족들이 제가 살기를 원할까요? 저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에블린의 소중한 가족들이 모두 세상에서 지워진 이 순간.
끝도 없는 절망 속에서 에블린을 구해 낼 이는 체이서 단 한 명뿐일 것이다.
그래, 부러질 것만 같이 연약한 이 여인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체이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용 가치를 확인할 때까지는 귀찮음을 감수해야겠지.’
체이서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입가를 가리고는 말했다.
“그래.”
에블린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온몸을 내던지기 직전이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확신의 찬 그의 짧은 한마디가 에블린을 구해 냈다.
에블린이 무거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물기 어린 붉은 눈가는 지난밤 체이서에게 안겼던 여린 이를 회상하게 했다.
‘그래, 이대로 무너지기엔 아깝지.’
모든 것을 잃은 사람만큼 구슬리기 쉬운 사람도 없을 테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체이서는 시커먼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하며 협탁 위에 올려진 작은 상자 하나를 그녀의 손에 올려 주었다.
“이건…….”
불에 그을린 리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자는 처참한 그날의 상황을 다시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되살아나는 끔찍한 기억에 상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으니 열어 봐.”
체이서의 말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한 그녀가 살포시 눈을 떴다.
‘도대체 뭐길래 갑자기…….’
에블린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상자를 열었고, 곧 그 안에 들어 있는 연녹빛 원석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네 원래 눈동자와 똑 닮은 색이지 않나? 감정사에게 물어보니 건강과 행운이 깃든 원석이라고 하더군.”
상자 위쪽에는 작게 ‘생일 축하한단다, 에블린.’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라사냐의 글씨체였다.
“덩치가 조금 큰 마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지키듯 죽음의 순간에도 놓치지 않았더군. 그래서 불타지 않고 이렇게 남은 거겠지.”
에블린이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을 쓰다듬자 손끝이 따끔거렸다.
“수녀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수녀는 네가 네 본래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마음에 이 선물을 고른 게 아닐까 싶어.”
“……죽음의 순간까지 이걸 지키셨다고요? 하하, 하…….”
에블린의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슬프게 흘러나오던 웃음은 이내 울음에 잡아먹혀 서서히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에블린은 울먹이는 얼굴로 소중하게 상자를 품에 안았다.
“고작 이걸, 왜…….”
“자신이 죽더라도 네 생일을 챙겨 주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체이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헝클어진 에블린의 머리칼을 정리하여 귓가로 넘겨 주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 위로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는 것이 보였으나, 붉게 물든 눈가는 감출 수가 없었다.
“라사냐는 네가 살아남기를 원했어.”
체이서는 원석을 소중히 쥐고 있는 그녀의 손 위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죽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은 참으로도 따스했다.
“에블린, 네가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은 네가 결코 죽기를 원치 않을 거야.”
“흐윽, 흑.”
손만큼이나 따스한 위로가 에블린의 마음을 포근히 감쌌다.
“오히려 혼자 남았을 너를 걱정할 사람들이란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차갑게 굳어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웠던 그녀의 마음을 매만져 주며 위태로운 그녀를 붙잡았다.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실수였고, 누구도 막아낼 수 없던 재난이었어. 너의 친절과 선의는 잘못된 게 아니야. 그래, 넌 잘못하지 않았지.”
참으로 우스웠다.
절대로 이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엇보다 그 말에 위안을 받는 에블린 자신도.
“그러니 죽겠다는 허튼 생각 따위 집어치워. 행복하게 살아갈 생각만 해. 너의 가족들이 가장 바라고 염원하는 걸 이뤄내.”
틀에 박힌 듯 단조롭지만 상냥한 위로는 삶을 포기하려던 에블린을 붙잡아 냈다.
“어렵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에블린은 그 말에 봇물 터지듯 엉엉 울음을 쏟아 내었다.
더는 죽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은 가족들을 대신해서라도 이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혼자서도 잘 살았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할 만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살아, 에블린. 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체이서의 위로는 그녀가 지쳐 잠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정했다.
참으로도 그답지 않게.
***
에블린은 스스로 자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리인가?’
가끔 아이들이 몰래 방에 들어와 에블린을 깨워 주고는 했기에 평소와 같이 잠든 척을 하려던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닫고 입가의 미소를 지운 채 이내 서서히 눈을 떴다.
‘제리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에블린은 씁쓸함을 지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이곳은 수도원이 아니었으며 지난 밤에도 체이서의 품에 안겨 엉엉 울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 기억났다.
‘추태를 며칠씩이나 부리는 건지.’
에블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곳에 온 지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난생처음 보는 굉장히 화려한 방이었다.
바이아르도의 여식으로 살던 곳도 부족함 없이 커다랗고 좋은 방이었지만 이곳은 그곳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다.
수도원에서 머물던 에블린의 방을 몇 개를 이어 붙인 것처럼 넓었고, 누워 있던 침대 또한 다섯 사람이 뒹굴어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에블린의 몸을 덮고 있던 침구 아랫부분에는 비싼 금사로 만들어진 화려한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니 난생처음 만져 보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고급스러운 붉은색을 포인트로 주어 꾸민 방의 풍경과 비싼 대리석이 깔린 바닥, 그 위를 덮은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러그까지.
‘화려하구나.’
오래간만에 겪어 보는 사치품을 매만지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에블린은 침구를 꽉 쥐며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분명 발소리가 들렸었는데?’
잠결에 들었던 소리기는 했지만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었다.
에블린이 침구를 가슴 위까지 끌어 올린 채 경계하듯 휙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블린의 착각이 아니라는 듯 왼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셨나요, 아가씨?”
“……!”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에 너무도 깜짝 놀라 에블린은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블린보다 너덧 살 많아 보이는 하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위로 높게 틀어 올린 진한 녹색 머리칼과 진한 검은색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차분한 인상의 여인은 소리 없이 빠른 걸음으로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제 이름 마야 시아고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네? 모신다니요?”
처음 듣는 소리에 에블린이 어리둥절해하며 의문을 구하자 마야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소가주님께서 귀중한 손님을 부족할 것 없이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편히 마야라 불러 주세요.”
“소가주? 아…….”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 이런 화려함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이곳은 그곳밖에 없지.’
“루이사 공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수도의 루이사 공작저.
마야의 말에 에블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덜컥 겁이 났다.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게임의 주된 배경이라니. 이제야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이 실감이 났다.
‘내가 손님이니 잘 대접하라고 말한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큰일을 겪은 게 안타까워서 그런가.
평소와 달리 체이서의 행동이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에블린은 씁쓸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는 없겠지.’
에블린의 죽음을 막아 주고, 위로해 준 것처럼, 이 또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라는 작은 호의일 것이다.
물론 체이서가 더 머물러도 좋다 하더라도 게임 속 배경이 되는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럼 체, 아니 소가주님은 어디 계시죠?”
“소가주님께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신 터라 신경 쓸 곳이 많아 당분간 얼굴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
도망친 마물 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저택을 비워 바쁜 게 분명했다.
‘미안하네…….’
그 와중에도 에블린의 자살 소동을 막아 주고, 뒤이어 그녀가 크게 앓는 동안도 옆을 지켰다.
혼자 이렇게 가만히 누워 쉬었다는 게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에블린의 안색이 흐려지자 마야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앓기 전 찬바람을 오래 쐬었다 들었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하는 중이니 우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것 같아 찝찝하기는 하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우선은 씻고 생각해 보자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로피, 목욕물은 다 준비되었니?”
“네, 하녀장님!”
마야의 물음에 방의 끝 쪽에서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목욕물 다 받아 두었답니다. 몸에 좋은 입욕제도 풀어 놓았고……. 아앗!”
욕실로 보이는 곳에서 나오던 한 아이가 에블린을 보고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욕실이 있었구나.’
마야가 어디서 튀어나온 건가 싶었던 궁금증을 해결하여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로피를 향해 매서운 말이 쏟아졌다.
“귀한 분을 모시고서 경솔한 태도구나!”
“죄송합니다, 아가씨! 로피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함께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아이는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열넷도 안 되어 보이는데…….’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커다란 주황색 눈동자 아래 콕콕 박힌 주근깨와 해맑은 미소가 그 나이대의 활기참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행동거지를 주의하라 경고하려던 찰나 에블린이 물었다.
“몇 살이에요?”
“아, 저는 열한 살입니다! 곧 열두 살이 되어요! 아직 어리지만 정말 열심히 보필할 자신이 있습니다!”
‘정말 어리네…….’
에블린이 바로 답을 하지 않자 자신을 못마땅히 여긴다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로피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마야가 작게 한숨을 내쉰 것 같았지만 얹혀 있는 객 주제에 어린아이를 박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오래 있지는 않겠지만 잘 부탁해요.”
무엇보다 로피의 순진무구함을 보니 수도원의 동생들을 떠올렸다.
나이도 알렌과 엇비슷하다는 걸 알고 나니 어쩐지 긴장이 풀어졌다.
“네!”
‘밝네. 어쩐지 리제랑 수잔이 생각나는걸.’
평소에도 에블린을 돕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귀여운 여동생들이 떠오르니 애써 외면하던 슬픔이 다시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지.’
행복하게 살기로 하지 않았나.
계속해서 슬픔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