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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9)화 (19/159)

19화

헝클어진 머리가 이리저리 휘날리며 가려져 있던 에블린의 얼굴이 드러났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듯 두 눈은 절망에 잠겨 있었다. 울음을 참아 내느라 입술은 일그러졌고, 턱이 가여울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소중한 가족들이 죽었어요. 나 때문에! 고작 내 어리석음 때문에 그들이 죽었단 말이에요!”

참고 또 참아 내던 눈물 한 줄기가 다시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나 혼자 살아서는 안 돼요. 내 죽음으로서 가족들에게 사죄해야 해요!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 잘못이니 너도 죽은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맞아요. 그래야 해요.”

힘겹게 외치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에블린은 지친 얼굴 위로 간신히 작은 미소를 띠었다.

“마지막 부탁 하나만 할게요. 죽는 건 직접 해낼 테니…… 그들과 같이 내 시신을 불태워 주세요. 이 세상에 흔적도 남지 않도록, 온전히 그들의 곁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이게 네가 죄책감을 덜 방법인가?”

“이런다고 그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더더욱…….”

“정말 그것뿐인가? 네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죽고자 하는 이유가?”

체이서의 냉철한 물음은 에블린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상처를 매섭게 헤집었다.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에블린은 기어코 마지막 순간까지 내뱉지 못했던 속내를 체이서의 앞에서 털어놓았다.

어떻게든 제 죽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보려고 했으나 이것은 죗값을 치르는 게 아닌 절망 어린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내 인생을 모두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람들이었어요.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이들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는 이 절망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었다.

“내 낙원, 나의 구원, 나의 삶의 이유를 내가 스스로 망쳤어요. 나는…… 그들이 없는 이 세상을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가장 무섭고 끔찍하다고 여기던 이에게, 가족들의 목숨을 거둔 이에게 이런 속내를 고백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 죽기 전에라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자.’

저승에서 만날 가족들에게도 또 다른 타인들에게도 감히 토해 낼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비웃어도 좋고, 경멸해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한심하게 여겨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 가족들은 네가 이렇게 죽는 걸 바랄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위로의 말이었다.

“수녀는 너와 헤어지는 슬픔을 감수하더라도 네가 수도에 가서 지금보다 더 잘 살기를 바랐지. 네 동생들도 네 행복을 위해 자신들이 짐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움직여 떨어지려고 하던 그녀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다시 한번 묻지, 에블린. 네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는다면 네 가족들이 행복할까?”

“아, 나는, 나는…….”

망설이는 에블린과 다르게 체이서의 목소리는 단호하였다.

“아니, 그 누구도 원치 않을 거야. 적어도 내가 아는 그들이라면 홀로 남을 네가 걱정되었겠지. 그래……, 아마 네가 잘살기를 바랐을 거야.”

차디찬 바람이 다시금 에블린의 뺨을 스쳐 지나간다.

매섭기만 하던 바람이 어느 순간 따스함을 머금은 것처럼 상냥했다.

마치 체이서의 말이 정답이라는 듯.

에블린은 벅차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에블린은 누군가가 머리를 내려친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에 절로 눈을 떴다.

아니, 분명 떴다고 생각했는데 눈 위로 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앞이 흐릿하였다.

‘여기는 어디지?’

초점을 잡아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그럴수록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방인 것 같은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움직이려니 두통은 더 심해졌고, 속은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듯 울렁거렸으며, 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에블린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힘겹게 떴던 눈을 감아 버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은 어떤 상태인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이 괴로움 속에 몸을 맡겨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었다. 그러던 중 문득 검은 시야 너머로 한 사내의 모습이 일렁이며 비치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응시하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깜깜하던 시야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맴돌던 테라스 위로 찬란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테라스에 걸려 있던 하얀 천이 휘날렸다.

그리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칼 아래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의 사내, 체이서였다.

시린 겨울이 서린 낯빛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체이서는 금색 눈동자를 곱게 휘며 에블린을 향해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는 에블린이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힘들다면 도와줄게.’

안심하라는 듯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 따스하게 다가왔다.

우습게도 고작 몇 마디로 고통에 들끓던 속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러지 마.’

그와 동시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듯 에블린의 주위가 깜깜해졌다.

그리고 조금 전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에블린은 고통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잠든 사이에 울기라도 했는지 친절한 누군가가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고 있었다.

‘……체이서?’

에블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이가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일어난 에블린 때문에 놀란 체이서가 어정쩡하게 손수건을 들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는 손을 내렸다.

에블린의 시선이 아래로 내린 그의 손으로 향했다.

다시 보아도 그의 손에 쥐여 있는 하얗고 보드라운 손수건은 사라지지 않았다.

“깼나?”

조금 전의 표정과 달리 놀란 기색이라고는 섞여 있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에블린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다 목이 따끔거려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해서 말할 필요 없어. 비를 맞은 데다 찬바람을 너무 오래 쐐서 감기에 걸렸다더군.”

“아…….”

체이서의 말에 잊고 있었던 지난 밤의 추태가 떠올랐다.

‘구해 줬더니 죽겠다고 소동이나 일으키고.’

깊게 한숨을 내쉬다 오른손에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뭐지?’

에블린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오른손이 체이서의 왼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고 있었다.

‘계속 잡고 있었던 건가? 자고 있던 내내?’

몰려오는 창피함에 에블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블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자 그제야 체이서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커다란 손은 작은 에블린의 손을 감싸듯 쥐고 있었는데 무슨 장난기가 분 것인지 그가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꺅!”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며 꽉 붙잡고 있던 체이서의 손을 내팽개쳐 버렸다.

“뭐, 뭐 하는!”

놀란 마음에 비명을 질렀지만,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목이…….’

에블린이 메마른 목을 부여잡으며 가볍게 기침하자 체이서가 그녀의 입가에 조심히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체이서가 천천히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켜 주었다.

한결 나아져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장난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손을 놔주지 않은 탓에 밤새 옆자리를 지켰더니 이제는 필요 없다고 이렇게 바로 내쳐 버리는군.”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요. 그냥…….”

에블린은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자살 소동을 벌인 지난 밤에 이어 밤새도록 체이서를 곤란하게 했다니.

자신이 저지른 민폐에 머리가 다시 어질거렸다.

“죄송해요.”

에블린은 변명을 내뱉는 대신 솔직히 사과하는 걸 선택하였다.

“흐음?”

“환자를 들여서 가족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건 저였잖아요. 체이서 씨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는데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었나 봐요. 그래서 잘못 없는 당신에게 화를 내었어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에블린은 체이서가 손에 쥐여 준 물잔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소동도 미안해요. 기껏 구해 주셨는데 죽겠다고 그 소동을 벌였으니…….”

에블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녀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상하게도 어제와 같이 죽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고작 조금 위로받았다고.

“참 바보 같다. 그렇죠?”

어리석은 과거의 자신을 향해 내뱉는 자조적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체이서는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보았다.

아직 그날의 충격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멀쩡한 척하려는 모습이 조금 기특해 보였던 탓일까.

체이서는 친절함을 가장한 채 위로의 말을 던졌다.

“갑자기 가족을 잃었잖아.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에블린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고마워서요.”

그러나 말하는 것과 달리 에블린의 낯빛은 금방이라도 다시 죽으러 갈 사람처럼 어두웠다.

에블린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체이서는 그녀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되었다.

‘또 울 것만 같은 표정이겠지.’

체이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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