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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8)화 (18/159)

18화

에블린이 선의를 품고 안으로 들인 손님은 그녀가 없는 틈을 타 수도원의 사람들을 공격하였고, 모두를 죽음의 끝으로 몰아갔다.

그녀가 없는 틈을 타 갑자기 깨어난 손님은 마물로 변하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을 것이며, 아프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구해 줄 에블린을 찾았을 테고.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라사냐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켰다가 마물의 또 다른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감염된 아이들에게 물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다들 감염되어 마물로 변한 상태였고, 리모 혼자만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어. 하지만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리모가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누나가 무섭지 않게 자기가 지켜 주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에블린의 눈이 처음으로 온전히 체이서를 마주하고 있었다.

경악에 찬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표정을 은밀하게 관찰하면서 말을 이었다.

“마을을 덮치기 전에 그들을 처리해야 했고, 수도원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을 헤치기를 원치 않았을 걸 알기에 망설이지 않았어. 그러다 처음 쫓던 마물이 도망치는 걸 발견했고, 그 마물을 뒤쫓다 에블린 너와 제리를 만나게 된 거야.”

친절할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에블린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러한 말만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기를 원치 않았을 이들을 마물로 만든 건 에블린, 너라고.

그래, 그들을 끔찍한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이는 에블린이었다.

이토록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끊임없는 자책감과 절망이 에블린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에블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제 막 깨어난 이에게 못 할 말을 했군. 상태가 좋지 않아. 의사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누워 있도록 해.”

체이서는 에블린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꿈속에서 보았던 어둠은 바로 에블린이 만들어 낸 죄책감이었다.

끊임없는 죄책감에 눌려 금방이라도 압사당할 것처럼 숨을 내쉬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움에 울부짖던 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힘없는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움직이더니 방문을 열었다. 방 앞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블린은 눈물에 젖어 흐린 눈으로 어둡고 텅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루이사 시험에서 살아남고 후에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준 행복한 공간이 마치 모래성과 같이 쉽게 무너져 내렸다.

에블린의 과거였으며 현재였고, 그리고 꿈꾸던 미래를 만들어 줄 곳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에블린의 손으로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

살 가치가 없는 목숨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불행할 미래라면 차라리, 차라리…….’

에블린은 끝없는 복도를 앞만 보고 내달렸다.

목적지는 이 건물의 가장 높은 곳.

그곳에서 자신은 수도원 가족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 했다.

죄인인 에블린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 되었다.

하찮은 목숨은 죗값으로 부족하겠으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래, 어리석게도 누군가에게 죽음을 애원할 필요 따위 없었다.

자신이 지은 죗값은 스스로 치르는 게 맞았으니까.

복도를 뛰는 내내 마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뛸 때마다 이제는 다시 겪을 수 없는 행복이 마치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은 라사냐라고 한단다. 네 이름이 뭔지 알려 주지 않을래?’

‘에블린, 날씨가 참 좋아. 우리 함께 소풍을 가지 않을래?’

‘모두가 떠나도 네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어 줄 테니 그리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사람 많은 곳이 무섭다고 했었지? 자, 이 목걸이면 네 눈부신 금발도 감쪽같이 감출 수 있을 거란다.’

‘왜 이렇게 네게 잘해 주냐고? 어머나, 그거야 당연히 네가 좋으니까 그렇지. 에블린, 너는 내게 친자식 같은 아이인걸.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단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그리고 그대로 흘려 사라져 간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때로는 엄격하고, 그럼에도 언제나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 사람.

에블린에게 있어서 라사냐는 부모였고, 스승이었으며 때로는 친구가 되어 준 존재였다.

‘제 이름은 알렌이라고 해여. 누나, 앞으로 잘 부탁드려여.’

처음으로 동생이 되어 준 언제나 의젓하던 알렌.

‘안녕, 웅니. 나는 리제. 리모의 누나예요.’

‘나눈 리모, 리제 누나의 동생이에요’

수도원 앞에 버려진 불쌍한 처지임에도 해맑음을 유지하던 쌍둥이 남매.

‘엄마가 없어도 괜찮아. 언니가 옆에 있어 주니까.’

어렸음에도 기특한 소리만 하던 수잔.

‘누나아. 비밀인데, 나는 누나가 제일 조아!’

에블린이 직접 거두어 온 막내 제리까지.

힘겹게 쌓아 올린 소중한 가족이 고작 작은 선의 하나로, 아니 자신의 실수로 모두 엉망이 되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내가,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픈 사람 따위 모른 척할 걸 그랬다.

아니, 차라리 제리를 대신하여 물렸어야 했다.

왜 그날따라 손님방에 가지를 않아서 이런 사단을 만들어 냈을까.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모든 것을 앗아 갈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블린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 덕에 이 건물의 가장 높은 꼭대기 층에 도착하였고, 가장 가까운 방의 문을 열어 들어가 밖으로 트여 있는 테라스를 발견하였다.

테라스로 나가자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그녀의 몸을 매섭게 치며 지나갔다.

언제 목걸이가 끊겼는지 몰라도 익숙한 갈색 머리가 아닌 본래의 색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어두운 밤을 밝혀 줄 달은 구름의 등 뒤에 숨어 자취를 감추었고, 을씨년스럽게 가라앉은 바람만이 그녀를 반기었다.

밖을 내다보니 대충 4,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아래의 바닥은 딱딱한 돌길이었으니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곧바로 즉사할 수 있으리라.

다시금 거세게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하하, 하하하…….”

찬바람을 맞고 나서야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했던 이 순간이 현실임을 다시 한번 자각할 수 있었다.

기어코 멈췄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가 되어 남아 있을 생이 무서워 죽음을 택하니 두려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이 눈물은 죄책감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것뿐이다.

‘죄책감을 가질 자격이나 될까?’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 에블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해요, 수녀님. 저는 울 자격도 없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날까요.”

누구라도 답을 해 주면 좋으련만.

생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답을 해 줄 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차라리 다행이에요. 답을 해 줬다면 망설였을지도 몰라.”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체념한 미소였다.

에블린은 눈물을 닦는 대신 휘날리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기고는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넘어가 아슬아슬하게 난간 끝자락에 섰다.

“사실 죄책감이 아니라…….”

에블린을 말을 꺼내다 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더는 아무런 말도 안 할래요.”

눈가를 가득 적신 눈물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이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려 왔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당신들은 내 소중한 가족이었고,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며, 함께 살아갈 날이 후회되지 않았다.

부디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이제는 죗값을 치를 시간이었다.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금 불어오며 에블린의 주위를 맴돌았다.

찬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에블린은 눈을 감았다.

“곧 만나요.”

흩날리는 눈물과 함께 부디 이 감정과 가족들에게 전해지기를.

에블린의 손아귀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버팀목이 없자 에블린의 몸이 중력에 의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몸을 바로 잡지 않은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렇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항 없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그 순간.

“이게 무슨 짓이야!”

누군가가 힘없이 떨어지는 에블린의 허리를 빠르게 낚아챘다.

아래로 기울어졌던 에블린의 몸이 끌어당겨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올려졌다.

억센 힘에 에블린의 몸이 테라스 난간에 부딪혔고, 그 고통에 그녀의 입가에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윽!”

“진정 미치기라도 한 건가? 죽으려고 작정이라도 했어?”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블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테라스 밖으로 몸을 기울인 사내 덕에 제대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가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 대신 머리와 옷이 있는 대로 헝클어진 체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꼭 에블린,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급하게 뛰어온 것처럼 말이다.

의외였다.

에블린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살려 달라 애원해도 그녀의 목숨 줄을 움켜쥐고서 농을 치던 이가 정작 뛰어내리려던 그녀를 붙잡은 것이.

“난…….”

체이서는 에블린이 무어라 말하고 싶어 함을 알아채고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블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절망에 찬 눈빛으로, 금방이라도 크게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듯 일그러진 얼굴로 체이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블린의 발이 난간 사이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것을 본 체이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뛰어내릴 것만 같이 위태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안으로 들여야 했다.

체이서는 에블린이 놀라지 않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우선 위험하니 안으로 넘어오고 이야기하도록 하지.”

에블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체이서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어리석은 생각은 그만두고 그만 이리로 넘어오도록 해.”

“하지만…….”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내게서 힘겹게 지켜 낸 목숨을 이리 쉽게 버릴 생각인 건가?”

다시 상냥해진 체이서의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더는 없잖아요!”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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