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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7)화 (17/159)

17화

‘어린아이의 치열인 걸 보아하니 아마 제리에게 물렸던 모양이군.’

그와 동시에 의아함이 생겼다.

수도 오티에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원인 모를 전염병은 해당 병에 감염된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빠르게 전염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전염성이 극도로 높기에 황실에서는 주의를 기울였지만 결국 생포된 마물 중 한 마리가 탈출하였고, 책임자인 체이서가 직접 찾아 나서게 되었다.

최대한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소규모의 인원으로 움직였으나 결국 일반인이 휘말려 버렸다.

체이서가 뒤늦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수도원의 구성원들이 마물에게 물려 마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곧 유일한 생존자였던 리모를 발견하였지만 마물이 자신의 누나 리제라면서 누나를 지키기 위해 다가가 버렸고. 아이는 체이서가 손을 쓰기도 전에 마물에게 물려 감염되어 버렸다.

수도원 모두가 마물에게 감염된 이 상황 속에서 물린 상처가 있음에도 에블린 유일하게 홀로 무사하다.

“어떻게 멀쩡하지?”

체이서는 자신을 제발 죽여 달라며 비는 에블린을 바라보며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물린 이상 용의자는 아닐 테고…….’

애초에 믿지도 않았던 가설이기에 곧바로 지워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항체일 수도 있다는 거지.’

마물화의 감염자에게 물렸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유일하게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혹 항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병의 진행이 이렇게까지 늦는다면 약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자꾸만 눈에 밟혀서 기분이 나빴는데 오히려 잘되었다.

‘병에 걸린 누구에게는 좋은 일이겠군.’

체이서는 금방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 같은 얼굴을 숨기고는 차분히 에블린을 말리려 했다.

“이런.”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에블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체이서는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언제 목걸이가 끊어졌는지 벗겨진 로브 모자 뒤로 비에 젖은 금발이 천천히 흘러내려 체이서의 팔뚝을 간지럽혔다.

빗물에 젖었어도 가려지지 않는 특유의 향기가 느껴져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에블린을 제 몸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과하게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들끓던 힘이 그녀의 몸과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확실히……. 항체가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어느덧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있었다.

체이서는 쫄딱 젖은 에블린을 품에 안아 들고서는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루이사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깜깜했다.

‘여기는 어디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정처 없이 떠돌아 보았으나 어둠에는 끝이 없었다.

누구도 보이지 않고, 또 아무도 살지 않은 것만 같은 공간에 홀로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수녀님의 약이 떨어졌으니 어서 가져다드려야 하고, 아이들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갑자기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이상해졌다.

꼭 불길에 갇힌 것만 같이 숨을 쉬기가 어려워 에블린은 두 손으로 목을 잡았다.

“크윽, 큭.”

괴로움에 앓는 신음을 내뱉는데 귓가에 비웃는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간다고? 어디로?’

‘킥킥, 키킥.’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그만해!”

에블린이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절로 소름이 끼치는 비웃음 소리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이고 괴로움에 멈춰 달라 호소하던 중.

문득 에블린은 이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잠깐만, 이거 내 목소리잖아……?”

그러자 에블린을 괴롭히던 비웃음 소리가 뚝 하고 멈추었다.

‘고개를 들고 똑바로 봐.’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에 에블린이 고개를 저었다.

‘똑바로 보라고!’

고통으로 가득 찬 외침이었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고 마주쳤다.

거대한 불꽃의 향연을.

모든 것이 화려하게 불타고 있었다.

에블린의 소중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수도원이, 그녀의 어린 날의 추억을 쌓아 주었던 소중한 공간이 불길에 잡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은 맨몸으로 불에 잡아먹힌 수도원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거센 불꽃 너머에 괴로움에 울부짖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언니, 언니. 나 너무 괴로워.’

‘누나, 누나. 미안해, 누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리제와 리모.

‘도와줘, 언니이! 제, 제리가 죽었어! 흐어엉.’

슬픔을 토해 내는 수잔과 아이의 품에 안겨 있는 싸늘히 식어 버린 제리.

‘누나, 우리 죽고 싶지 않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담담히 살고 싶다고 말하는 알렌의 모습 뒤로 라사냐가 슬피 웃고 있었다.

‘너를 거둔 대가가 이런 죽음이로구나.’

한마디씩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해 낸 이들은 불길에 휩싸여 붙잡을 틈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를 잡아먹은 불길을 보며 에블린은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음 한구석이 뻥 뚫려 버린 것처럼 숨을 쉬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거대한 불을 사라지지 않았다.

에블린이 원했던 것은 이런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이런 결과를 원치 않았노라 외쳐 보았으나 더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아니야!”

에블린은 고통스러운 외침과 함께 눈을 떴다.

허억, 허억.

에블린은 거친 숨을 내쉬다가 자신이 있는 곳이 깜깜한 어둠 속도, 거대한 불길이 감싼 곳이 아님에 안심하며 숨을 골랐다.

꿈의 여파가 어찌나 큰지 깨어난 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음에도 땀에 젖은 손은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에블린은 거친 숨을 고르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꿈이라 다행이다.’

그러다 번쩍하고 눈을 떴다.

꿈이 아니었다.

그래, 자신은 분명 제리를 찾다가 산길을 헤맸고 겨우 찾은 제리는……, 수도원의 사람들은…….

“괜찮나?”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블린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이고,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누워 있던 침대 옆에는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체인…….”

에블린이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떼었으나 체이서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라 냈다.

“체이서.”

“…….”

“이제는 신분을 숨길 필요 없으니 그리 부르도록 해.”

체이서의 서늘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마물의 생명력은 끈질겨서 확실하게 죽여야 해.’

‘멀쩡한 머리로 잘 생각해 봐. 이 상항에서 누가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인지.’

쓰러지기 직전 보았던 끔찍한 광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폭풍처럼 내리쏟는 비,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채 수도원을 잡아먹고 있는 불길, 그 아래 마물의 모습을 한 수도원 가족들의 시체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의 장작이 되어 주고 있었다.

불을 꺼 달라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에블린과 그런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고 불길을 피워 내던 체이서.

“우욱!”

에블린은 구역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눈가에 눈물방울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끊임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윽, 흑, 으흐흑.”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것조차 사치라는 듯 에블린은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거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토해 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을까.

옆에서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울다가는 또 쓰러질 텐데.”

그답지 않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에블린은 고개를 매섭게 치켜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가는 끊임없이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짓물러 있었고,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체이서는 걱정이 깃든 눈빛으로 에블린을 바라보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에블린은 울컥 치솟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가오던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내었다.

그리고는 놀란 눈빛으로 에블린을 보는 체이서의 멱살을 잡아챘다.

“왜 하필 우리 수도원이었던 거야? 차라리 네가 다른 곳에서 머물렀더라면……. 그랬더라면……!”

울부짖으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체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죽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저 에블린에게 있어서 소중한 가족들의 죽음이 체이서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자신의 미래, 목숨. 그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소중한 이들을 잃은 상실감에 다시 에블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리가 맞섰던 그 마물.”

그렇게 체이서의 멱살을 붙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에블린의 머리 위로 드디어 기다렸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수도원에 들인 손님이었더군.”

“……뭐?”

멍하니 대답한 에블린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겁게 변명하냐며 타박하려고 했으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두려움에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해 보니 수도원 주위에 배치해 놓은 마도구는 멀쩡했어. 이는 외부에서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다는 걸 뜻해.”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예요? 정말로……? 거짓말하지 마세요.”

에블린은 간절히 아니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원에 머물던 손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의식도 없는 사람이 혼자 도망칠 수 없었겠지.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발견되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이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나도 이런 참변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지만…….”

“…….”

“완전히 마물로 변한 이가 다시 사람으로 변한 건 본 적이 없으니, 그가 마물일 거라 생각지 못했고, 나의 부주의였다.”

놀랍게도 쉴새 없이 흐르던 눈물이 단번에 그쳤다.

에블린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하니 체이서를 바라보았다.

진실이 담긴 눈과 장난이 아님을 보여 주듯 굳게 다물린 입.

“미안하다.”

체이서는 서글픈 표정으로 에블린에게 사과하였다.

진심으로 내뱉은 사과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

달갑지 않았다.

에블린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더니 툭 하고 무릎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역겨웠다.

에블린 자신의 존재가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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