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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6)화 (16/159)

16화

끊기지 않는 빗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물은 눈앞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펼쳐진 끔찍한 광경이 바뀌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

내뱉는 말은 탄식에 가까운 짧은 웅얼거림뿐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언제나 혼자였던 에블린에게 가족의 사랑을, 스승의 가르침을, 또 친구의 우정을 알려 주어 그녀에게 삶의 이유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에블린에게 삶에 존재 가치가 되어 주던 이들이 한순간에 그녀의 곁을 떠났다.

에블린만 홀로 남겨 놓고.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족이라 여겼던 소중한 이들의 죽음에 에블린의 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가만히 있던 고개를 힘겹게 움직여 쓰러져 있는 사체들을 살펴보았다.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마물의 사체는 모두 불에 타 까맣게 그을린 채 불에 타고 있었다.

비가 끊임없이 내림에도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수녀님과 아이들로 보이는 사체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블린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였어요?”

“그래.”

“왜……?”

나지막한 질문에 상식을 이야기하듯 당연한 어조의 답이 돌아왔다.

“마물이니까.”

“……사람이었잖아요.”

“내 눈앞에서 마물로 변했고, 이지를 잃었으며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덤벼들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원망하지 않으려고 했다.

제리를 빨리 찾지 못한 제 잘못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현실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외면이 끝난 순간 돌아온 것은 악몽과 같은 끔찍한 현실이었다.

“불을, 불을 꺼 주세요. 제발…….”

에블린은 서럽게 울음을 토해 내며 간절히 빌었다.

체이서가 만들어 낸 이 상황이, 가족들을 모두 죽게 만든 그가 너무 원망스러웠음에도 이 불길을 꺼트릴 수 있는 사람은 체이서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했잖아요. 제발요…….”

“마물의 생명력은 끈질겨서 확실하게 죽여야 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에블린이 보아도 저들의 생명은 끊어진 상태였다.

“이미 죽었잖아요…….”

체이서가 말하는 ‘죽는다’는 의미는 마물이 된 이들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지워 버려야 한다는 뜻인 걸까?

눈에서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정도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독히도 무거웠다.

제 어깨에 매달려 있던 책무감이 비와 함께 쓸려 내려간다.

그리고 그 자리는 절망이 채워 간다.

“흐윽, 흑. 제발요. 제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순식간에 몰살된 가족들의 모습에 제정신을 차리고 싶음에도 어느새 열이 오른 머리가 핑핑 돌며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한참을 간절히 애원했지만, 두 사람의 눈앞에 일렁이는 거대한 불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체이서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마음은 서서히 줄어들어 갔고, 그의 뻔뻔한 작태에 분노가 차올랐다.

“꼭 죽여야만 했던 건가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만약 이들의 생포가 실패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면 또 이러한 일들이 반복될 테니까.”

“왜 최악을 먼저 생각해요?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결국 에블린은 체이서를 탓하는 말을 꺼내 버렸다.

자꾸만 피어오르는 증오심은 수도원을 감싼 불꽃처럼 에블린의 이성을 잡아먹어 갔다.

“애초에…….”

외면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오른다.

“당신이 와서 이렇게 된 것 아니에요?”

어느새 에블린은 핏발 선 눈으로 체이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고도 체이서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냉정하게 말하는 체이서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쌓였던 정이 낮은 곳으로 추락하며 대신 그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들이었어요.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일상을 즐기던 사람들이 갑자기 저렇게 변한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애초에 사람이 마물로 변한다니? 이게 무슨…….”

“이딴 산골에 처박혀 있어서 잘 모르나 본데.”

믿기지 않는 현실을 입에 담자 돌아온 건 체이서의 차디찬 냉소였다.

“이런 일은 간간이 일어나고 있었어. 제국 수도에 전염병이 퍼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정말 몰랐냐는 듯한 한심 어린 시선이 에블린에게 와 닿았다.

언뜻 예전에 주디가 했던 병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도 체이서가 말하는 병이 그것인 것 같았다.

체이서의 신랄한 말에 에블린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이건 다 진작 마물을 죽이지 않은 당신들 잘못이잖아요! 왜 죽이지 않았어요? 감염을 초래한다면 사살하는 게 맞는데 왜 살려 둔 거냐고요. 도대체 왜!”

“난 네게 충분히 주의를 줬다고 생각하는데.”

거침없이 뻗어 간 생각은 결국 말도 안 되는 가정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에블린은 자신의 힘으로 이겨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체이서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결론은 네 탓이라는 거잖아! 네가 마물을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잖아!”

아무리 에블린이 체이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먼저 지치는 건 에블린이었다.

“왜, 왜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거야…….”

지금 에블린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구원이었다.

적어도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나왔더라면 에블린은 어떻게든 천천히 이성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이 상황에서 뭐라 말해야 하지?”

하지만 체이서의 입에 나온 것은 다정한 말도 조심스러운 위로도, 그녀가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나야말로 당황스러워. 우연히 몸을 의탁하던 곳에서 사람들이 집단으로 감염되어 마물로 변했어.”

그의 책망 어린 시선에 에블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난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한데.”

“당신, 지금 나를 의심하는…….”

“멀쩡한 머리로 잘 생각해 봐. 이 상항에서 누가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인지.”

에블린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 나는 아니야.”

“그건 기사단이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아, 이제야 알겠다.

체이서는 아무 목적 없이 가만히 에블린을 지켜본 게 아니었다.

유일한 용의자를 감시하고 있던 것이다.

“하, 하하. 하하하.”

이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에블린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은 여자가 미친 것처럼 계속 웃음을 터트리니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인내심이 다다랐나 보다.

“일단 함께 수도로 가지. 조사는 그곳에 가서도 충분할 테니.”

“그냥…….”

한참을 혼자 웃던 에블린이 체념한 듯 낮게 읊조렸다.

“그냥 나도 죽여.”

변명하려는 건가 싶어 주의 깊게 듣던 체이서로서는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나보고 멀쩡한 인간을 죽이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청탁에 그가 코웃음을 쳤지만, 에블린은 진심을 담아 꺼낸 말이었다.

애초에 진작 죽을 인생이었다.

하지만 빈약한 에블린의 삶에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은 지금 부서졌다.

더는 에블린에겐 살아갈 이유가 없었으며,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삶을 이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부서졌고, 숨통이 틀어막힌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모두가 죽었잖아. 나를 두고 떠났잖아…….”

에블린은 실성한 듯 홀로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체이서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나도 죽여 줘요.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그냥 나도 여기서 함께 죽게 해 줘요. 제발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점점 풀리더니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삶의 의지는 이미 끝도 없는 절망 속에 추락하였다.

에블린은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원망하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그냥 나도 죽여 줘요.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잖아요. 그냥 마물에게 잡아먹혔다고 둘러대면 되잖아요!”

에블린의 간절한 외침에도 체이서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체이서에게 있어서도 그녀의 요구가 기꺼운 부탁이기는 했다.

‘이렇게 됐으니 그냥 죽이는 게 맞기는 한데.’

결국 체이서가 우려한 대로 루이사의 일원이 에블린의 가족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아무리 의무였다고 한들 체이서가 가족들을 죽인 상황이니 그녀가 정신을 차리면 제게 복수한다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어차피 힘도 없는 여인의 반항 따위 그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지만.

‘어째 죽이기 싫단 말이지.’

체이서는 제게 몸을 붙인 채 애원하는 에블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장시간 동안 비를 맞아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눈에 띄었다.

‘몸이 연약해도 생기는 있는 편이었는데.’

잃어버린 제리를 찾겠다고 이 밤중에 빗줄기를 뚫고 산을 돌아다녀 이렇게 변한 거겠지.

체이서가 줬던 로브는 멀쩡한 흔적을 찾을 수 없이 푹 젖어 있었다.

입술뿐만 아니라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물에 쫄딱 젖은 여린 몸이 한기를 버티지 못하고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가족들이 죽는 충격을 받았으니 아마 곧 정신을 잃겠군.’

일단은 에블린이 정신을 잃은 틈을 천천히 결정을 내려 보자 마음먹은 순간.

체이서가 에블린의 손목 위에 난 이상한 상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에블린이 응급처치로 감아 두었던 천이 서서히 풀리면서 상처가 드러난 것이었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상처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제발요. 제발 나도 죽여 줘요. 여기서 죽을래. 제발…….”

“설마 마물에게 물렸나?”

“흐윽, 흑……. 나도 죽여 달란 말이야…….”

“보아하니 아직 사람일 때 물린 것 같은데.”

체이서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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