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5)화 (15/159)

15화

“체, 체인 씨.”

에블린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체이서를 불렀다.

“이상해요. 갑자기 제, 제리가…….”

에블린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었다.

“제리가 마, 마…….”

“제리가 마물로 변했나?”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진실에 에블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에 반해 체이서의 반응은 덤덤했다.

전혀 놀라지 않은 목소리에 에블린이 퍼뜩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빗물에 흠뻑 젖어 있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사내가 서 있었다.

에블린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의 끝자락에서 뚝, 뚝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피라고 하기에는 꼭 죽은 피인 것처럼 색이 검었으며, 오래된 것처럼 진득하였다.

“이런, 곧 한쪽이 죽겠군.”

에블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마물들이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마물임에도 제리가 어린 탓인지 체격 차가 컸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제리를 보며 에블린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 돼. 제리!”

에블린이 당장 제리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체이서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더 빨랐다.

“놔주세요! 제리가, 지금 제리가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놔 달라고요!”

에블린은 당장 체이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하지만 냉정한 체이서의 목소리에 보잘것없던 움직임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싸늘히 경고했다.

“송장 하나 더 처리하기 싫으니 여기 얌전히 있어.”

체이서는 에블린을 그대로 멀리 떨어진 곳에 앉혀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힘없이 떨군 고개를 들어 매정히 떠난 체이서의 뒷모습만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든든한 구원자의 등장임에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분명 체이서는 마물을 죽일 것이다.

지금껏 그가 수도원에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듯 망설이지 않겠지.

그렇다면 제리는?

제리는 왜 마물이 된 거지?

제리 또한 체이서의 목표물이 되는 걸까?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에블린은 휘몰아치는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이 순간에 체이서가 나타난 것일까.

땅을 짚고 있던 에블린의 두 주먹이 곧바로 무너질 듯 힘없이 떨렸다.

몇 시간 전이었다면 체이서의 등장이 반가웠을 것이다. 그래, 제리가 마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체이서가 나타났음에도 덩치가 큰 마물은 제게 피가 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비 냄새 사이에 섞인 피 냄새에 흥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리의 몸에 깊은 상처가 하나씩 패일수록 에블린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려왔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지켜보는 사이 뒤늦게 체이서를 발견한 마물이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빨랐다.

체이서는 아주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머리부터 발끝,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내려 그려진 검격.

체이서는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듯 검을 거두었다.

곧 믿기지 않을 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물의 머리부터 사타구니 중심까지 일직선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그곳에서 화르륵 하고 불꽃이 피어났다.

작은 불꽃은 거센 빗줄기에도 줄어들기는커녕 마물의 몸을 장작으로 삼아 끊임없이 몸치를 키워 갔다.

크아아악-!

마물은 도망가려는 순간까지 쥐고 있던 제리의 멱살을 놓고 바닥에 내팽개친 채 괴로움에 펄쩍 뛰기 시작했다.

쿵, 쿵 거리며 날뛰는 움직임에 땅이 절로 진동하였고, 끔찍한 비명이 숲을 울렸다.

하지만 이러한 광경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채 10분이 흐르기도 전에 마물의 몸은 말끔하게 전소되어 버렸으니까.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체이서는 귀찮다는 듯 머리에 젖은 머리칼을 넘기며 몸을 틀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쪽에는 마물로 변해 버린 제리가 쓰러져 있었다.

제리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상처에서 꿀렁이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 말이지.”

체이서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빗물을 털어 냈다.

그의 움직임에 검에 맺혀 있던 핏물이 바닥이 흐트러졌다.

체이서는 골치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망설임 없이 검을 치켜들어 올렸다.

루이사의 차기 가주라면, 아니 이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마물을 없애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덩치가 큰 마물이 완전히 전소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까.

“아, 아아. 아파. 누, 누나. 나, 아파. 사, 살려줘.”

체이서가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멍청하게 쳐다보던 그때.

괴로워하는 마물의 모습 아래 괴로움에 흐느끼는 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요!”

제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에블린이 다급히 체이서를 불러 세웠다.

에블린은 자존심을 모두 내다 버린 채 체이서의 앞까지 기어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주, 죽이면 안 돼요! 제리예요. 모습은 이래도 제리란 말이에요!”

“알아.”

“갑자기 나타난 마물로부터 저를 지켜 줬어요. 지금 모습은 이렇지만 아프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고,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요!”

체이서는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는지 물끄러미 에블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붙잡은 몸을 흔들어 대며 애원하는 탓에 그의 검이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곧 그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제리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이유를 덧붙였지만, 끝내 그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하.” 하고 기가 찬 듯한 비웃음뿐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분명…….”

“어떻게?”

체이서는 한심함이 어린 눈빛으로 에블린을 내려 보고 있었다.

한 줄기의 희망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인 에블린의 외침은 체이서에게 효과가 없었다.

“수도의 뛰어난 학자들조차 알아내지 못한 방법을 너 따위가 어떻게 되돌리겠다는 건데?”

“……네?”

에블린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가끔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결국 마물로서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감염시키기 위해, 혹은 잡아먹기 위해 덤벼들겠지.”

“그게 무슨…….”

체이서의 말은 너무도 이상했다.

꼭 이런 상황을 몇 번이고 겪어 본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물속 깊이 잠긴 것처럼 무언가 무거운 것이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이 에블린은 답답해졌다.

에블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체이서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그녀가 애타게 붙잡고 있던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떼어 주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기다려.”

냉정한 말을 남긴 체이서가 다시 한 걸음 마물에게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마물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체이서를 향해 뛰어올랐고, 그는 조금도 고민치 않고 매정히 검으로 마물의 몸을 그었다.

그 후로 보인 것은 꿈속에 나올 것만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제리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배에 그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은 핏물이 주위로 넓게 펼쳐졌다.

에블린은 제 얼굴 위에 튄 핏물을 닦지도 못한 채 멍하니 제리였던 마물의 사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리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에블린의 눈에는 흉측한 마물의 모습이 제리처럼 보였다.

아프다고, 살려 달라 호소하던 제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아, 아.”

에블린은 올라오는 비명을 삼키며 마물의 사체로 향해 다가갔다.

체이서가 말리지 않아 사체에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제, 제, 제리…….”

꽃을 좋아하는 에블린을 위해 놀러 나갈 때마다 한 송이씩 꺾어다 주던 마음씨 착한 아이였다.

‘누나만 주는 거니까 수녀님한테는 비밀이야?’ 

‘나는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조아!’

분명히 오늘 오전만 해도 밖에서 뛰어놀며 환히 웃던 아이였는데 어째서?

평소 감기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죽는다고?

에블린은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가는 마물이 된 몸뚱이를 부여잡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쯧.”

가만히 두면 울다가 정신을 잃은 것만 같은 모습에 체이서가 짧게 혀를 차더니 에블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어 짐 덩이처럼 어깨에 매달았다.

“아, 안 돼! 제리! 제리!”

멀어지는 제리의 사체에 에블린이 힘껏 발버둥을 쳤으나 강인한 남자의 팔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이것 놔! 안 돼, 제리!”

에블린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더라면 체이서의 심기를 거슬릴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히 여기던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에블린은 이성을 놓았다.

에블린의 행동이 거추장스러울 게 분명함에도 체이서는 그녀를 내팽개치지 않은 채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듯 차가운 빗방울은 끝없이 내리며 그녀의 몸을 때리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깨닫자 멀리 달아났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지친 듯 몸을 축 늘어트리자 기다렸다는 듯 체이서의 입에서 온기 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는 운이 좋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체이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수도원 사람들에게는 뭐라 말해야 하지?’

제리가 갑자기 마물이 되었다고? 그래서 체이서가 제리를 죽였다고?

저와 같이 제리의 죽음을 슬퍼할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살려 달라 호소하던 제리의 모습이 번갈아 떠오르며 간신히 멈춘 울음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흑, 흐윽. 미안해, 제리. 미안해.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체이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리를 죽였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은인에게 이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향한 원망의 마음이 멈추지 않았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을 죄책감을 토해 내는데 에블린의 후회를 들은 체이서의 딱딱한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체이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블린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에블린은 죽은 눈빛으로 체이서의 시선을 쫓았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아늑한 집의 역할을 해 주던 수도원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이제야 눈치챈 것이 이상할 정도로 거센 불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듯 수도원 내부를 집어삼켰고, 주위에서는 자꾸만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괴롭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려 주듯 어두운 사위로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치자 불길 속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제리의 모습과 같은 마물의 사체들이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몸체를 가진 한 마리 마물 뒤로 그보다 작은 체구의 마물 네 마리가 나란히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찢긴 옷가지들이 그들의 사체 위에 엉겨 붙어 있었고, 불길에 오그라들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을 맞아 에블린이 직접 떠서 수도원 가족들에게 선물해 준 스웨터임을 단순에 알아본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한때나마 인간이었던 수도원 가족들의 사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