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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4)화 (14/159)

14화

설마 지금껏 아이들에게 이런 걱정까지 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의젓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리모는 울음을 참느라 잔뜩 울상을 지었다.

떼를 쓰기는커녕 제 탓이라며 미안하다 사과하는 모습에 에블린은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한심했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리고 누나는 바빴잖아. 그러니까 집안일도 하고, 수녀님도 돌보고, 이름 모를 환자도 돌보고, 또 데이트도 그렇고…….”

리모가 부끄러움을 참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데이트라니? 아니야!”

그 말에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니 리모가 눈을 꽉 감고 외쳤다.

“누나! 만약에 체인 형이 좋은 사람이면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결혼해! 수도로 가! 우리는 누나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누나에게 방해가 되는 게 싫어.”

에블린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멍청한 표정으로 리모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는 게 힘껏 눈물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에블린은 리모의 어깨를 붙잡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계단 난간 쪽에서 알렌과 리제, 수잔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다른 세 아이의 표정 또한 리모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에블린은 찡하고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어리광을 부려도 좋으련만,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철이 들어 버렸다.

죄책감으로 인한 통증에 에블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결혼해. 난 너희들이 성인 될 때까지 옆에 끼고 살 거야! 너희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것도 행복하게 사는 것도 다 볼 거라니까? 그때 가서 귀찮다고 하기만 해 봐, 나 삐질 거야!”

아이들이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일부러 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아직 어린 동생들에게 이 이상 책무감을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연애하든, 결혼하든 그건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거야! 자, 난 더 늦어지기 전에 제리를 찾고 병원 가서 약을 처방받아 올게. 그러니까 너희 모두 나가지 말고 수도원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

에블린은 답을 듣는 대신 숙여 있던 몸을 일으키고서는 휙 돌아섰다.

어쩐지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피어난 죄책감, 그리고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났다는 것에 대해 대견함.

차마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할 만큼 밀려오는 부끄러움까지.

체이서가 나타나기 전에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타협하려고 한 것이 참으로도 바보 같이 느껴졌다.

수녀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아직 에블린이 필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모두 수녀님 방에 모여 있어. 알겠지? 제리랑 같이 금방 돌아올게!”

에블린은 일부러 힘차게 외치고는 수도원을 나섰다.

뛰쳐나가는 그녀의 등 뒤로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기 시작한 것을 모른 채.

***

피부에 맞닿는 바람이 무겁다 싶었더니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산을 뒤져 보았음에도 제리를 찾지 못했다.

‘하필 이런 날씨에…….’

아무래도 혼날 게 무서워 숲으로 나갔다가 앞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에블린은 속상한 마음을 꾹 누르며 로브의 모자를 꾹 눌러 썼다.

혹시 몰라 랜턴을 챙겨 오기를 잘했단 생각을 하면서 막막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굵은 물방울이 랜턴을 든 손 위로 거침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는데.’

어둠이 내려앉은 빗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제리! 제리! 어디 있어? 누나가 안 혼낼 테니까 어서 수도원으로 돌아가자!”

에블린이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질렀지만, 거센 빗방울 소리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제리…….”

한참을 산길을 돌아보았지만, 제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에블린은 울컥 솟아오른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성인이 되기를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에블린은 가족을 잃는 걸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거친 빗줄기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번쩍 내리치는 번개 뒤로 하늘 가득 울리는 천둥소리는 에블린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찾으려 노력해 보아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냐. 울지 말고 조금 더 찾아보자.”

체이서가 벗어 주었던 로브는 다행히 방수 기능이 있는지 생각보다 몸이 젖지 않았다.

랜턴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 하나만이 유일한 희망과 같이 느껴졌다. 

에블린은 희망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랜턴을 든 손의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점차 온몸이 축축이 젖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에 더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체이서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늦어질 것 같으면 마을에서 밤을 보내고 오라고 했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에블린은 작은 후회를 마음 한편에 미뤄 두고는 다시 쉬지 않고 움직이며 제리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와닿은 것일까.

근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에블린은 다급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높은 수풀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에블린이 높은 수풀을 맨손으로 해치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수풀을 모두 해치고 나왔을 때 보인 풀숲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랜턴을 그쪽으로 들자 흐릿한 빛 너머로 익숙한 작은 인영이 보였다.

“세상에나, 제리!”

하늘이 도왔다.

에블린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모자가 살짝 벗겨진 줄도 모른 채 제리를 향해 뛰어갔다.

“괜찮니? 세상에나. 비를 오래 맞아서 몸이 차가운 것 봐. 어머, 열도 나잖아!”

제리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몸이 끓는 물처럼 뜨거웠고, 거친 숨소리 사이로 괴로움에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제리. 얼른 돌아가자.”

에블린이 제리를 품에 안아 들려고 하자 아이의 입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크윽, 큭!”

고통을 호소하던 제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갈색빛을 띠었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보였다.

‘아무래도 많이 아픈가 보다. 큰일이네.’

빨리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에 앞선 탓이었을까.

쿠웅- 쿵.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커다란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쿵-

꼭 거대한 생명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소리와 그와 함께 울리는 진동.

어둑한 시야 너머로 거대한 짐승의 발이 나타나더니 에블린의 앞에 멈춰 섰다.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제리를 안고 있는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제리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주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진득한 무언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버렸다.

“아, 아.”

에블린은 짧은 감탄사 외에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굵은 빗방울 너머로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에블린의 앞에 선 거대한 괴물의 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도원 천장을 뚫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크기와 체격, 온몸을 감싸고 있는 어둡고 거센 털, 팔다리에는 두껍고 날카로운 손톱이 자란 짐승의 발이 달려 있었다.

늑대의 머리를 달고 있는 모습이 꼭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지만, 앞에 있는 것은 마물. 그것도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신원미상 정체불명의 괴물이었다.

불길해 보이는 붉은 눈을 가진 마물은 에블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체이서의 말이 맞았다.

그가 쫓던 마물은 아직 아스트 산에 머물고 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찾지 못했음에 당연히 이곳을 떠났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에블린은 난생처음으로 보는 마물의 흉측한 모습에 겁먹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물은 다잡은 사냥감을 탐색하듯 에블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작은 고갯짓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탓에 에블린은 강제로 마물의 외견을 관찰하게 되었다.

‘저건…….’

다시 번개가 내리치면서 주변을 환히 밝혀 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둥소리.

빛은 사라졌으나 에블린은 마물의 입가에 묻어 있는 새빨갛고 진득한 피를 보고 말았다.

‘서, 설마…….’

이 산에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은 수도원뿐이기에 마물이 진즉 수도원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가정에 에블린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움찔거리며 몸을 움직여 버리고 말았다.

에블린이 도망친다고 생각했는지 마물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기 시작했고, 에블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리라도 지키자는 생각에 아이를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악!”

그 순간 품에 안겨 있던 제리가 발버둥을 치더니 놔주지 않는 에블린의 손목 안쪽을 깨물어 버렸다.

“안 돼, 제리!”

에블린이 고통에 손목을 움켜쥐는 사이 제리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아이를 잡지 못한 에블린은 그대로 앞으로 털썩 넘어졌다.

손목 안쪽에 물린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에 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대충 천으로 상처를 훔치고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

에블린은 다시 제리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에블린과 제리를 공격하려던 마물 앞에 그보다 체격이 작은 또 다른 마물이 나타났다.

“왜……? 어, 어떻게?”

“도, 도, 망, 가.”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힘겹게 말을 내뱉는 작은 마물의 정체는 분명히 제리였다.

에블린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대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기어코 외면하던 좌절감이 에블린을 무너트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에블린의 등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난리 났군.”

그토록 바랐으나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체이서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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