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3)화 (13/159)

13화

에블린은 달갑지 않은 주제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어쨌든 저 환자에게는 다른 의사가 필요해요.”

“마물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수도원에 사람을 부르겠다는 건가?”

“하아. 맞다, 그걸 잊고 있었네요.”

에블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몇 번 대화를 이어 가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오지랖은.”

체이서는 짧게 혀를 차고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깊게 팬 미간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곧 내뱉은 말은 예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루이사의 주치의를 불러 줄게.”

“네?”

고작 수도원에 찾아온 이름 모를 환자를 위해 루이사의 주치의를 이 시골까지 부른다고?

“네가 저 환자가 죽게 놔둘 수 없다면서. 나는 수도원에 외부인이 들락날락하는 게 싫으니 이 방법밖에 없잖아.”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평소만큼 겁이 나지는 않았다.

“의사가 오기까지 좀 걸릴 거야.”

이건 체이서답지 않은 친절함이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체이서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는 입꼬리를 시원스럽게 끌어 올렸다.

그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기어코 에블린이 표정을 구겨 버리게 했다.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이 바라는데 들어줘야지 않겠어?”

체이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아주 끈질겼다.

“제 의견이 반영될 수는 있나요?”

아무리 체이서가 편해졌다고 한들 그는 루이사.

에블린이 긴장한 얼굴로 묻자 그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흘러내린 에블린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에블린, 난 우리가 꽤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는 곧이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수는 없잖아?”

또다.

체이서는 언뜻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제 의견이 어긋나게 될 것 같으면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면서 결혼을 하자고? 제 뜻대로 안 풀리면 매번 이렇게 겁박하려고?’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애석하게도 체이서의 말은 모두 옳았다.

결국, 에블린은 울상인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긍정적인 답 기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체이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방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그가 정말로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계약 결혼을 제시한 것도 말이다.

미약하지만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답지 않은 낯선 배려심에 이리 반응하는 건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참으로도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평소 늦잠에 허덕이던 때와 달리 눈이 일찍 뜨이고, 비가 올 것 같았는데 반대로 날씨가 화창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좋은 날.

에블린은 아직 새벽의 찬 기운이 물든 푸른 창밖을 신기하게 보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재빠르게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내려간 에블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된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앞에 따끈한 허브차 한 잔이 놓였다.

“하아, 오래간만의 여유네.”

겨울이 가까워짐을 보여 주듯 열어 놓은 주방 창문 너머에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에블린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성큼 앞으로 다가온 겨울을 온몸으로 느꼈다.

조용한 새벽에 혼자만의 티타임을 즐기는 게 얼마 만에 맞이한 평화로운 일상인지.

“그럼 슬슬 아침 준비해 볼까.”

에블린을 콧노래를 부르며 충분히 여유를 즐긴 후 창문을 닫았다.

곧 절망으로 물들 하루의 마지막 평화는 너무도 달콤했다.

소중한 것이 모두 지워지고 무너져 내릴 그녀에게 내려진 마지막 선물처럼.

*** 

에블린이 밀린 집안일을 끝마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덧 서서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에블린은 뒷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말고 앞마당 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나와 보았다.

“하나, 둘, 셋….”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덕분인지 아이들이 수도원 내에 있는 대신 모두 앞마당에 모여 숨바꼭질을 하는 게 보였다.

술래인 리제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신나게 앞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러다 멀리 가면 위험할 텐데.’

에블린은 아이들에게 주의 주기 위해서 다가갔다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체이서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피하는 건 좀 이상하겠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 쪽으로 다가가려고 하는데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체이서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미세하게 찌푸려진 눈썹을 보아하니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블린은 아이들이 숨은 위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슬쩍 체이서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 같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이고 움직이지 않고, 에블린의 기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도 괜찮을까?’

에블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히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래도 벌써 얼굴을 본 지 어느덧 일주일을 넘기고, 계약 결혼을 청한 사이에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체이서는 까칠한 목소리로 면박을 주는 대신 멀쩡한 답을 해 주었다.

“안 보여.”

“……마물이요?”

“수도원 천장에 닿을 만큼 덩치도 크고, 오랫동안 굶주렸기에 당연히 자취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산을 뒤져 보아도 마물의 모습은커녕 아주 작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어느덧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 보는 그의 부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럼 이 산에 없는 게 아닐까요? 아스트 산이 넓다고 하지만 이 정도 기간이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충분한 기간이기도 해요.”

체이서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흩트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군.”

평소에 단정하고 차분하던 그의 흑발이 헝클어진 게 꼭 그만큼 그가 답답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른 팀에 연락을 해 봐야겠어.”

“수도원에는 통신구가 없어요. 마을에 내려가 봐야 할 텐데 괜찮으세요? 지금 내려가면 우체국에는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겨울이 코앞에 닥친 것을 보여 주듯 이제 6시만 되어도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금세 주변이 어두워지며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다.

“지금껏 내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를 잊은 거야?”

“물론 밤중에도 산을 잘 돌아다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에블린은 뒷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는 내뱉었다.

“산길을 오르는 건 또 다른 문제라 걱정이 된단 말이에요.”

에블린의 말에 체이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비록 그녀가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걱정이 절로 드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에블린은 차마 체이서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금방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이제 내가 좀 편해지기는 했나 보네. 청혼에 대해 좋은 답변이 예상되는걸?”

체이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큭큭 소리 내어 웃더니 제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에블린에게 씌어 주었다.

“뭐 필요한 건 없지?”

“네, 없으니 일찍 돌아오세요.”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체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따뜻한 로브 자락을 붙잡으며 한참이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체이서의 능력 덕인지 그가 떠난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결혼, 진지하게 생각해 볼까?’

어쩌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니 마냥 나쁜 선택만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플레이어가 나타나면 체이서가 못된 짓을 잔뜩 저지를 테니 안 엮이는 게 낫다지만……. 만약 내가 끼어든다면 중간에서 체이서가 나쁜 길로 가지 않게 조정하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블린은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게임 속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게임의 진엔딩은 역하렘 엔딩으로 플레이어가 루이사의 가주가 되고,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마음을 받아 주어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체이서는 플레이어를 좋아하게 되겠지? 그럼 그때 이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위자료도 톡톡히 챙겨 줄 것 같고.’

잘만 한다면 훌륭한 파트너, 혹은 친하지는 않지만, 가끔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자 친구를 둔다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나. 안 돼, 에블린. 자꾸 긍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잖아!”

평범하게 이혼하는 건 그나마 해피엔딩이지.

에블린의 존재가 자신의 사랑에 방해된다고 그냥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않나.

‘하지만 체이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머릿속에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나타나 체이서를 믿어라, 믿지 말라며 자신들의 의견을 토해 내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수도원 안으로 들어섰다.

“누나! 큰일 났어!”

어느새 숨바꼭질이 끝났는지 수도원 안에 들어와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리모가 에블린을 발견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앞으로 뛰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분명 내가 확인했을 때는 수녀님 약이 충분했는데 지금 보니 약이 오늘 먹을 것밖에 안 남았어!”

“뭐?”

에블린이 깜짝 놀라 주방으로 가 찬장을 열어보았다.

라사냐의 약병에는 1회분의 약만 담겨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일주일 분이 있는 걸 봤는데?”

“그 있잖아. 누나…….”

리모는 뭔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몸을 꼬며 에블린의 눈치를 보았다.

에블린이 무릎을 굽혀 리모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눈을 꽉 감고서 잘못을 고백했다.

“실은 어제 주방에서 큰 소리가 나서 왔을 때 찬장 앞에 제리가 있는 걸 봤어. 무슨 일이냐 물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제리가 약을 가져갔다는 거야?”

“아무래도 손님방의 환자가 신경 쓰였나 봐. 자꾸 기웃기웃하더라고. 가지 말라고 말했는데 몰래 드나드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안 일어나니까 깨워 보겠다고 막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에블린은 움츠러든 리모의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히 웃었다.

“제리는?”

“조금 혼냈더니 형아 미워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어…….”

“새로운 의사 선생님을 불렀고, 곧 오실 예정이었는데 내가 말해 주는 걸 깜빡했네. 누나가 미안해. 제리는 혼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물론 리모도 혼내지 않을 거야.”

“……형인 내가 잘 돌봤어야 했는데.”

“제리의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셔서 아마 더 마음에 걸렸을 거야. 내가 미안해. 아직 너희는 어려서 내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냐! 누나도 아직 어리잖아! 아직 성인도 아닌데 누나가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