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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2)화 (12/159)

12화

체이서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에블린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치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체이서는 기분 나빠 하기는커녕 에블린이 물러난 만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쥐고는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생각해 보니 그대만 한 신부는 없을 것 같아서.”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인 탓에 그의 황금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니 나랑 결혼하지 않겠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린 것 치고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매서웠다.

“결혼, 진지하게 생각해 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체이서는 에블린의 머리칼에서 입술을 떼고는 그대로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답이 나올지 알겠는지 아주 당당한 뒷모습으로.

“허허허…….”

에블린은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팠다.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

‘정말 진담일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하며 머리를 붙잡을 때였다.

“언니이.”

에블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수도원 안에 있어야 할 리제와 수잔이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너, 너희! 시간도 늦었는데 왜 나와 있어!”

걱정되어 목소리를 한껏 높였지만, 아이들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언니, 체인 오빠랑 결혼해?”

“그럼 우리 다 같이 수도에 가는 거야? 진짜?”

수잔이 들뜬 목소리로 묻고, 리제가 입가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따라 물었다.

“어, 어디서부터 들었니?”

“으응.”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리제와 수잔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대만 한 신부는 없는 것 같다였나?”

“역시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였나?”

그나마 다행히도 앞부분의 내용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에블린은 밀려오는 당혹감에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청혼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농담하신 거야, 농담. 그러니까 누구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

특히 수녀님이나, 수녀님에게는 절대로! 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리제와 수잔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자신들을 안으려는 에블린의 팔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수도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둘의 목적지는 뻔했다.

바로, 라사냐의 방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다정한 척 연기하더라니! 체이서는 애들이 지켜보는 걸 다 알고 있던 거였어!’

에블린이 다급히 두 아이의 뒤를 쫓기 시작했지만, 어찌나 뛰는 속도가 빠르던지 에블린이 아이들을 잡기도 전에 이미 라사냐의 방에 입성한 상태였다.

하필이면 라사냐의 침대 주위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리제와 수잔은 조금 전 에블린에게 보여 줬던 것처럼 체이서가 한 말을 대사처럼 읊기 시작했다. 

역할극이 끝났을 때 모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는 에블린을 보았다.

“어머, 에블린. 왔구나.”

라사냐가 화사한 미소로 에블린을 반겨 주었는데 어째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

알렌과 리모가 궁금증을 못 참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흥분한 기색으로 물었다.

“에블린 누나! 리제랑 수잔이 한 말이 사실이야? 누나 정말 결혼해?”

“진짜? 용병 형이 누나한테 고백했어? 둘이 사귀어?”

“아, 아니. 얘들아, 그런 게 아니야.”

결혼 생각은 없을뿐더러 특히나 루이사의 안주인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에 에블린은 나름대로 절박하게 해명했다.

“얘는. 연애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네 나이대 애들이면 서로 첫눈에 반할 수도 있고 그러는 거지. 어쩜, 네가 오죽 예쁘니.”

라사냐가 흐뭇하게 웃었지만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기에 에블린이 진땀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진짜 그런 것 아니라니까요.”

남의 연애 이야기는 재미있다더니.

라사냐도 그런 모양인지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알겠어.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래도 바로 결혼은 안 된다? 연애부터 해야 해. 어떤 사람인지 알아 갈 시간은 있어야지.”

진중히 조언하는 것과 달리 지금의 라사냐는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다.

“맞아! 누나, 아무리 용병 형이 좋아도 결혼은 일러!”

“무슨 소리야, 리모! 언니 나이대는 딱 결혼 적령기거든?”

“맞아! 그리고 체인 오빠는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란 말이야!”

리제의 말에 힘을 실어 준 건 수잔이었다.

“며칠이나 봤다고?”

알렌이 어이없는 얼굴로 지적하자 수잔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

“그게 뭐야. 물론 그 형이 멋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서 체이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잘생기고, 몸도 좋고, 또 용병이니 강할 테고, 아이들과 놀아 주며 나름 다정한 성격을 연기한 탓일까?

“누나! 다음부터는 형도 같이 밥 먹자고 하자! 응? 우리 조용히 얌전히 먹을게!”

“따로 먹지 말고 같이 먹는 건 나도 찬성!”

쌍둥이답게 리제와 리모가 신이 났다.

“수도로 함께 가자고 했다며?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수도로 갈 생각 없다니까요, 정말이지.”

심지어 라사냐까지 한술 더 거드니 에블린도 더 이상 해명하기에 지쳐 버렸다.

‘그래도 다들 즐거워 보이네.’

라사냐의 얼굴에 이런 미소가 보인 것도 오랜만이고, 어차피 진짜 결혼할 것도 아니니 그냥 이 정도에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작은 헤프닝, 소소한 웃음, 그걸로 인해 라사냐가 즐겁다면야 뭐.

‘그냥 놀리려고 꺼낸 말이겠지?’

체이서와 다시 대화를 나눠 보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오늘의 에블린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소중한 가족들의 곁에서 지친 하루를 보상받아야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 가실 것 같달까.

에블린은 모두가 모여 있는 라사냐의 침대 곁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보다 중요한 발표가 있답니다.”

라사냐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모두 에블린을 주목하자 그녀가 입으로 두구두구 효과음을 내며 기대감을 증진시켰다.

“사실 얼마 전에 공방에 수녀님의 휠체어 제작을 맡겼었거든요.”

깜짝 소식에 라사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머? 그게 정말이니?”

기대하지 않았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에 에블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휠체어는 주문 제작하는지라 많이 비쌀 텐데…….”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수도원 앞으로 익명의 기부금이 들어왔어요. 휠체어 제작도 하고, 약도 사고, 식료품을 잔뜩 샀는데도 겨울을 나기 끄떡없을 정도로요.”

당당하게 말했음에도 라사냐의 얼굴에 어린 근심과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에블린은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고서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았다.

“아무튼! 하고 싶었던 말은 다음 주만 지나면 완성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휠체어가 완성되면 같이 눈도 구경하고, 봄이 오면 도시락 들고 함께 소풍도 가요. 너희도 좋지, 얘들아?”

“눈! 그럼 이번 겨울에 같이 눈사람 만들어요!”

알렌이 신이 나서 외치자 다른 애들도 꺄악 소리를 지르며 찬성했다.

“난 수도원 문 앞에 둘 커다란 눈사람이 좋아!”

“그럼 난 눈사람의 얼굴을 예쁘게 꾸며 줄래!”

리모와 리제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꼭 같이 만들어요, 수녀님!”

수잔은 에블린과 반대쪽으로 가서 라사냐의 손을 붙잡으며 방방 뛰었다.

제리 또한 에블린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라사냐의 손등 위에 얹었다.

“봄 소풍도 가여!”

에블린의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아이들마저 행복하게 미소를 짓자 결국 라사냐도 전염된 듯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벌써 그날이 기대되는걸?”

***

휠체어 소식 덕인지 수녀님도 아이들도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에블린은 손님방에 머무는 환자에게 들렀다.

“아직도 안 깨어나셨네.”

에블린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이름 모를 환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에게 전염병이 아니라는 진단을 들은 후 방문의 잠금쇠도 풀어 놨지만, 이 환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지? 큰 마을의 의사를 불러 봐야 할까.’

에블린은 손님방을 환기하고, 가볍게 청소를 마친 뒤 탁상 위에 새로운 물을 놓고 방을 나왔다.

마을에 내려갔다 왔더니 온몸이 피곤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블린은 주먹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나오다가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체이서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적어도 오늘은 더 안 마주치고 싶었는데.’

체이서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위에 저 사내가 또 다른 손님?”

에블린은 한숨을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게 질문한 것을 알면서도 그의 비위에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도 이어 갔다.

“네. 수도원 앞에 누가 쓰러져 있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거든요.”

“의사는?”

“내원하셨었는데 병은 아니고 그저 잠들어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수면초의 부작용 같기도 하다고….”

에블린은 뺨을 감싼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더 큰 병원의 의사를 불러 봐야 할 것 같아요.”

“하지 마. 수도원에 새로운 외부인이 오는 거 달갑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에블린의 입에서 바로 그러겠노라 하는 답이 나오지 않은 탓일까. 체이서가 대놓고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 손님에게 주는 관심의 반이라도 내게 좀 줘 보는 건 어때? 대놓고 어색하게 피하려 하지 말고.”

“윽, 그럼 체인 씨야말로 저에게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

“농담?”

에블린의 욱하는 목소리에 체이서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에블린.”

체이서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블린이 답하지 않자 체이서는 하, 하고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난 농담 따위 안 한다고.”

에블린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자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체이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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