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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1)화 (11/159)

11화

에블린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충격적인 대답에 그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체이서를 올려다보았다.

“네?”

마치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인받고 싶다는 듯한 눈빛에도 체이서는 여전히 똑같은 무표정이었다.

“농담이…….”

에블린은 차마 뒷말을 잇고 싶지 않다는 듯 망설였으나 끝내 내뱉고 말았다.

“아니군요.”

에블린은 떨리는 두 눈에 힘을 주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거짓말이라고 해 주세요.”

“네 눈에는 내가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

에블린의 말에 어디가 웃긴지 모르겠지만 체이서는 가볍게 미소를 흘렸다.

여유로운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금방이라도 울 듯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잠시나마 체이서가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두려움에 잘 묻어 놓았던 감정이 이내 펑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걸 왜 이제야, 이제야 말해 주는 거예요? 당신 혼자 찾는 거예요? 지원군은 더 없어요? 마물이 언제 이 산에 들어왔는데요? 어디에 있을지 예상은 가나요?”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 산 위에…….”

에블린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죽이며 낮게 읊조렸다.

“수녀님이랑 애들이 있단 말이에요. 만약 자리를 비운 틈에 마물이 다녀갔다면 어떻게 해요?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어느새 성큼 옆으로 다가온 체이서가 급하게 뛰려는 에블린의 팔을 붙잡았다.

“급하게 굴 필요 없어. 수도원은 괜찮을 테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장담해요? 지금 저는 걱정돼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부드러운 손길에 오히려 몸서리칠 것만 같아 에블린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참아 냈다.

당장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가려 했지만 체이서의 뒷말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수도원 근처에 방어용 마도구를 설치해 놨어. 웬만한 공격은 막아 낼 거야.”

“……언제요?”

“처음 수도원에 온 날에. 애들한테도 수도원 근처를 벗어나지 말라 말해 놨어.”

에블린이 씨근덕거렸던 숨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체이서의 눈을 응시했다.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그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눈빛으로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에블린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그런 건 진작 말해 주셨으면 좋았잖아요.”

“네가 묻지 않았더라면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날까 봐.”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어요.”

에블린이 체이서를 흘겨보자 그가 자신은 잘못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안심하라고.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혼자 올라가도 에블린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체이서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상황이란 게 참 무섭네.’

에블린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뭐가?”

“그러니까 이런 일……. 당신이 굳이 해 줄 필요 없다는 거 알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는 말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호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나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의 착각을 끊어 내겠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원래 이런 일이야. 마물로부터 사람들 지키는 것.”

조금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진실된 표정이었다.

“…….”

에블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있을까.’

체이서 루이사는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일주일 가까이 함께 있었다고 기어코 이 두려움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자신을 향해 위압적으로 구는 것도 체이서였고, 밤을 새우는 에블린에게 자신 몫의 이불을 덮어 주고 옆을 지킨 것도 그였다.

자신의 목숨을 쥐고 협박한 것도 체이서였으며, 불쾌한 소문에 휩쓸린 그녀에게 도움을 준 것도 그였다.

‘지금도 그래.’

아무렇지 않게 마물이라는 폭탄을 던져 놓고는 수도원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리 예방해 놓았다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모습까지.

체이서 루이사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마냥 못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가도 이런 모습을 보면 제 생각이 그저 착각이었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마음이 든다.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데. 그것도 루이사의 일원을.’

“해가 지고 있으니 서두르지.”

체이서는 조금 전과 달리 에블린을 신경도 쓰지 않고 앞장서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지며 점점 멀어지는 체이서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 일이 끝나도 그가 자신을 살려 줄 것만 같은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

“참, 오늘 마을에 가니 안 좋은 소문은 모두 사그라들었더라고요.”

에블린은 침묵이 어색한 듯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다 곧 아차 하더니 부끄러운지 목소리를 죽였다.

“대신 새로운 소문이 퍼졌지만요.”

자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 있는 젊은 귀족이 에블린에게 구애한다더라, 약사 주디는 중매를 잘못 서더니 결국 쌓이는 빚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했다더라.

아마 에블린이 듣고 온 소식은 그런 말들일 것이다.

체이서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소문이었기에 심드렁하였으나 일부러 처음 듣는 척 반응하였다.

“그래?”

“네. 체인 씨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에블린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람들이 다가와서 체인 씨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칭찬하는데 조금 부끄럽지만, 가짜라도 기분 좋았어요.”

그녀가 헛소문으로 힘들어한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었으나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을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관찰하였다.

에블린의 입가에 은은히 떠오른 미소는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고, 비밀을 속삭이듯 작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소리보다 감미로웠다.

‘별나단 말이야.’

체이서의 곁에 이토록 솔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어린 날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던 탓일까.

체이서는 그답지 않게 에블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블린은 꼭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처럼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실천으로 옮겼다.

이토록 순수하고 어리석은 인간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자꾸만 시선이 갔다.

체이서를 싫어하는 기색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의 도움을 받으면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두려워 겁에 질린 와중에도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지키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약하지만, 또 누구보다 강인하다.’

체이서가 일주일 동안 에블린을 관찰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겉으로도 속으로도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루이사의 시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진즉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살려 둘까?’

처음에는 가문의 규칙대로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이려 했다.

그러다 도중 불쌍히 애원하는 모습에 마음이 동해 살려 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현재까지 고민 중이었다.

‘가문의 다른 이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려나.’

루이사의 시험에 대해 아는 이들은 목놓아 에블린을 죽여야 한다고 의견을 낼 것이다.

에블린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사는 이들 모두 죽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겠지.

‘하지만 변수라는 게 존재하니까.’

만약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그녀 홀로 살아남고 수도원 사람들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에블린은 그대로 무너지는 걸 택하는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수도원 사람들의 복수를 해낼 것이다.

신념을 가진 이란 어떻게든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니까.

물론 체이서가 직접 처리한다면 변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후환은 없애는 게 낫지.’

그래, 그게 정답이라는 걸 체이서는 지난 세월 동안 충분히 학습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형은 가주가 될 생각인 거지? 그렇다면 주변에서 귀찮게 굴기 전에 쓸 만한 배우자를 들여.’

루이사의 시험에서 통과한 후 막 루이사 저택에 입성하였을 때 그의 동생인 블러드윈이 했던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쓸 만한 여자라.’

외모는 사교계의 어떤 여인들보다 출중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 현재 이름이 많이 바랬다지만 제국의 시작부터 함께한 명문 가문 바이아르도 가문의 태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루이사의 비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제 주제를 알기에 선을 넘지 않는 존재.

수도원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만 해 준다면 에블린은 체이서의 기대보다 더 훌륭히 공작 부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지 않나?’

체이서가 한참이고 에블린을 응시하자 그녀는 등줄기에 땀이 삐죽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슬금슬금 다시 체이서에 대한 두려움이 차오려는 찰나.

드디어 도착지인 수도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움에 에블린이 달려가려는 순간.

“에블린.”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며 뒤를 따라오던 체이서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에블린이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체이서는 훈훈한 미소로 벼락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직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난 농담뿐만 아니라 거짓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아.”

“네?”

“생각해 보니 집안에서 결혼 독촉이 있었던 게 떠오르지 뭐야.”

체이서는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그녀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는 그녀가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재앙과도 같은 말을 던져 버렸다.

“루이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과 결혼이라면 나도 꽤 편할 것 같고.”

“예……?”

본능적으로 떨려 오는 목소리에 오히려 체이서는 작게 웃었다.

멈춰 선 체이서가 뒤를 돌아보자 그의 입가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환한 미소가 걸린 게 보였다.

“수녀의 회복을 위한 의료비와 시설, 아이들의 성장에 아낌없는 지원, 성인이 되고서 안정적인 직업 확보, 또한 모두가 수도에서 머물게 거처도 마련해 주지.”

“예에?”

에블린은 똑같은 말이 녹음된 인형처럼 되묻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다음 말을 들을 자신이 없어 다급히 체이서의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들었으나, 그는 에블린의 손을 낚아채고는 손바닥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에블린, 나는 지금 네게 구애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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