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화 (10/159)

10화

‘뭐, 뭐?’

에블린이 몸을 움찔거리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어깨를 붙든 체이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둥글게 뜨며 당황한 에블린은 보이지도 않는지 체이서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보듯 에블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블린, 언제쯤이면 네가 내 마음을 받아 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페제토 자작보다는 내가 훨씬 나은데.”

애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임에도, 아니 오히려 그런 목소리이기에 에블린의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에블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체이서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눈치껏 적당히 맞춰.”

체이서는 에블린에게 푹 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뺨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그럴수록 에블린의 공포는 더욱 커져 갔다.

새하얗게 질린 에블린의 얼굴과 달리 체이서는 연신 다정한 미소로 에블린을 대했다.

“에블린이 페제토 자작에게 시집가는 일은 없을걸세. 에블린이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도 수도원의 안타까운 처지를 고려하여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기로 한지라.”

서늘한 경고는 감히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도와주는 게 맞겠지?’

에블린이 눈을 굴려 체이서를 올려 보았다.

계속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사랑에 빠진 사내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체이서의 상냥한 모습이 오히려 에블린에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왔지만, 그래도 표정을 확인한 덕분에 그 나름대로 도움을 주는 것 같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에블린 같은 훌륭한 이가 굳이 장점 없는 결혼을 할 이유는 없지.”

“어머, 어머.”

조용해진 약방에는 헨나 부인의 감탄 어린 목소리만 들려왔다.

에블린에게 숨 막힐 정도로 두려운 이 순간이 눈앞의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눈요깃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만 갈까?”

체이서는 에블린의 어깨를 감싼 채 그대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뒤에서 붙잡는 주디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에, 에블린! 설마 저 말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건 아니지? 누가 봐도 얼굴 번지르르한 사기꾼이잖니!”

에블린은 식겁했다.

에블린이 주디를 향해 다급히 입을 다물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중매 값을 미리 받은 그녀로서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알겠다고 대답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페제토 자작님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단다. 귀족이 되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데! 중매를 선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너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가져온 자리인데!”

어리숙한 에블린이라도 저자의 행동이 자신을 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에블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기꾼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 좋아, 내가 자작에게 직접 거절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지. 그럼 문제없겠지?”

이렇게 체이서가 대신 답해 주며 해결할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페제토 자작보다는 내가 낫잖아. 그렇지, 에블린?”

체이서의 말이 더해질수록 에블린은 그저 이 약방을 벗어나 포근한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리 그만 나가요.”

“그럴까? 오늘도 네가 해 주는 따뜻한 스튜를 먹고 싶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체이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가죽 장갑의 느낌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뿌리치고 싶었으나 꾹 참고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 해 줄게요. 그러니 이만 가요.”

체이서의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는 에블린의 소원대로 몸을 움직였다. 

곧 딸랑이는 방울 소리와 함께 약방의 문이 닫혔다.

약방을 벗어나자마자 체이서의 입가에 지어진 웃음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왜 저런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지?”

에블린은 체이서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답을 하였다.

“앞으로도 자주 볼 사이인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마을의 약방은 한 곳뿐인걸요.”

주디의 끈질긴 제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고마웠으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약방을 이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약간의 고마움이 든 건 맞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더 큰 건 사실이었다.

“보아하니 하나도 안 고마워 보이는군.”

“…….”

에블린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체이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네 중매 건으로 마을에 소문이 쫙 퍼진 건 알고 있나?”

“듣기는 들었지만…….”

장인의 말이 과장이지 않을까 했는데 애석하게도 사실이었나 보다.

“이제 새로운 소문이 퍼지겠군. 잘난 젊은 귀족이 구애한다는 소문이 따라다닐 텐데. 기분은 어때?”

“잘 모르겠어요.”

“늙은 귀족한테 팔려 간다는 소문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렇네요.”

페제토 자작에게 직접 연락을 넣을 수 있는 귀족가의 도련님이 에블린에게 지속해서 구애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 에블린을 따라다니는 소문보다는 훨씬 나았다.

“도와준 거죠?”

체이서는 답하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소문 한번 제대로 퍼트려 줄 생각인지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떠나지를 않았다.

‘왜?’

체이서 루이사가 이렇게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니.

의외로 게임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걸까?

‘잘 모르겠네.’

이런 모습을 보여도 에블린에게 체이서는 여전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약방에서 대답을 강요하던 섬뜩한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숨이 턱 막힐 정도니 설명이 더 필요할까.

에블린은 무심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맞잡고 있었다고 우습게도 이질적인 가죽 장갑의 질감이 익숙해지고, 그 아래에서 올라오는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체이서는 기어코 마을을 벗어나기 전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복잡하고도 어려운 사람.

체이서 루이사는 그런 존재였다.

***

체이서는 그가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에블린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수도원에 스며들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체이서는 직접 라사냐를 찾아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에블린을 기겁하게 하였다.

에블린의 눈에는 가식적인 모습은 꾸며 낸 겉모습이 훌륭한 덕인지 라사냐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얼마든지 머물라며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에블린은 더욱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에블린과 달리 체이서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시야에서 사라진 탓일까.

덕분에 에블린은 금방 그가 없던 평소의 일상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아직도 안 깨어나네.”

에블린은 이름 모를 환자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주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며칠 전 왕진을 온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수면초의 과다 복용 증상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의사의 진단에도 여전히 의문은 가득했다.

‘아무리 잠들어 있더라도 배변 활동까지 없는 건 역시 이상하지 않나?’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른 건 그렇다 쳐도 며칠씩이나 움직임도 배변 활동도 없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더 지켜보라고 하니 어쩔 수는 없지만.’

에블린은 환기를 시킬 겸 닫아 놓은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갔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 시간에는 없던 체이서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 제리가 체이서의 다리를 꼭 끌어안아 무어라 칭얼거리는 모습에 에블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곧 체이서가 무심한 얼굴로 제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안 돼!’

체이서가 귀찮다며 당장이라도 제리를 냅다 던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창문을 닫는 것도 잊고 다급히 방을 뛰쳐나가려고 하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와, 더 높이!”

체이서가 제리의 옆구리를 쥐고서 하늘 높이 띄우는 높이높이 놀이를 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와, 형! 저도 해 주세요!”

“저도요! 저도 높이 높이!”

아이들은 꺄르륵 웃으며 신이 나서 체이서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에블린은 잘못 본 게 아닌지 눈을 비벼 보았으나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에블린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에블린은 창틀을 붙잡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이들을 내치지 않고 한 명도 빠짐없이 똑같이 놀아 주는 체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무표정이라지만 아이들과 어울린 체이서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에블린의 걱정과 다르게 체이서는 라사냐와도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체이서도 사람이구나.’

물론 금방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어 버렸지만.

*** 

체이서가 수도원에 머물기 시작한 지 어느덧 일주일째.

하필 식료품이 다 떨어져 금방 마을에 갔다 온다는 게 돌아오는 길에 딱 체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간 둘만 있을 상황을 피해 왔던지라 오래간만에 단둘이 마주한 상황이 어색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괜히 눈만 굴리며 시선을 피하는데 체이서가 대뜸 물어 왔다.

“그건 뭐지?”

“식료품이요. 다 떨어졌길래…….”

곧 비가 와 배달이 어렵다는 말에 욕심껏 많이 산 짐은 꽤 무거웠다.

에블린이 무거운 종이봉투를 추켜드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가 한숨과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식료품이 든 봉투를 낚아채 버렸다.

“아, 제가 들게요!”

체이서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섰다.

에블린이 멀뚱히 서 있자 그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나?”

“가, 가요.”

에블린이 한 발 내딛자 체이서가 그 속도에 맞춰서 그녀의 옆을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손이 비게 된 에블린은 민망함에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며 앞을 보며 걸었다.

에블린으로서는 체이서가 원치 않았던 짐꾼 역할을 자처한 것도, 그녀의 속도를 맞춰 걷는 것도 모두 낯설었다.

긴 침묵이 버티기 힘들었는지 에블린이 힘겹게 말문을 뗐다.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요 며칠간 체이서가 조금이나마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 줘 경계가 허물어지기라도 한 걸까.

궁금증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체인 씨가 찾는 게 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궁금한가?”

“조금 생각을 해 보았는데 역시 잃어버린 물건 찾는 것 도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저는 여기 토박이나 다름없으니까…….”

“마물이야. 수도에서 탈출한 마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