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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9)화 (9/159)

9화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체이서는 어제와 같은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고, 에블린은 새벽에 받은 호의로 그를 향한 경계가 조금이나마 거두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체이서는 에블린에게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볼일 다 보고 찾으러 갈 테니까 마을에 가만히 있어.”

체이서는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경고를 남기고 발 빠르게 사라졌다.

에블린은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버렸지만 오히려 한결 마음이 편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에블린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평소와 달리 두둑한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떠올리며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왕 돈이 생겼으니까 수녀님의 휠체어를 맞춰 볼까.’

강제로 받은 돈이기에 쓰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과 별개로 현재의 수도원에는 돈이 나갈 곳이 많았다.

어차피 체이서가 수도원에 머무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 이건 마땅한 대가이니 사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결국, 다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였다.

얼마나 양심에 찔리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쩍슬쩍 쳐다보는 것이 꼭 속물적인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속물 맞지 뭐. 양심도 없이 돈을 바로 쓸 생각을 하는걸.’

에블린은 고민 끝에 대장간과 연결된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에블린은 자신을 보며 놀란 눈을 하는 장인을 보며 차분히 라사냐가 사용할 휠체어를 의뢰하였다.

“주문 제작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 거란다. 대략 2달 정도 소요되고, 선금으로 반 그리고 완성 후 나머지 금액을 지급하면 된단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인은 걱정스러운지 한마디를 보탰다.

“그런데 괜찮겠니?”

이 마을에서 에블린과 수도원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에블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제작해 주세요. 아, 겨울이 가기 전에 받을 수는 없을까요? 수녀님과 눈 구경을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거야 가능은 하지만…….”

에블린은 가방에서 금화를 한 움큼 쥐어서 꺼냈다.

“이 정도면 부족할까요?”

“으응?”

장인이 동그란 안경을 치켜세우며 눈을 껌뻑였다.

마치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진짜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금화를 들고 한참을 관찰하기까지 했다.

“최대한 빨리 완성됐으면 좋겠어요.”

“어, 어…….”

장인은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휠체어라면 예전에 만들어 본 적도 있고, 이 정도 금액이면 자재도 좋은 거로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야. 한 달 안에 완성해 보마.”

자신만만한 대답에 에블린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장인은 금화를 쓸어 손에 담고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에블린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주디 말이 맞았구먼. 자작님과 결혼하기로 한 게지? 네가 고생이 많구나.”

“네? 결혼이라니요?”

뜬금없이 약사 주디가 거론되자 에블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주디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러더구나. 곧 네가 결혼할 거라고. 자기가 중매 서 줬다고 당당히 말하던걸.”

할 말을 끝낸 장인이 입을 다물자 공방 안에는 동전을 정리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에블린은 손바닥에 자국이 깊게 팰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에블린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서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상하네요. 약사님께 결혼 생각 없다고 분명 말씀드렸는데 왜 그런 헛소문이 퍼진 거지?”

“으응, 그려? 그럼 이 돈은 지참금이 아니야?”

“네, 수도원에 들어온 기부금이에요. 약사님도 참. 결혼 건은 분명히 거절했는데 어쩌다가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어요.”

“주디가 중매 대박 났다고 신난 것 같다더니 다 거짓말이었구먼. 요새 도박에 미쳐서 가게 사정이 좀 어렵다던데, 끌끌.”

장인의 마지막 말에 약사가 그렇게 끈질기게 권유하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확실하게 말씀드려야겠네요. 혹시 누가 이런 말 하고 다니면 아니라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마을에 꽤 소문이 퍼지긴 했다만……. 그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

“고맙습니다.”

에블린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공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곳에 들어서기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던 미묘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느껴지는 시선들이 자기혐오에서 오는 과민 반응이라 생각하였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에블린은 화가 났다.

‘분명 확실하게 거절했는데 헛소문을 퍼트려?’

지금까지 철저한 을의 처지기에 무례를 참아 왔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에블린의 눈은 이내 분노로 활활 타올랐고, 거침없는 걸음에는 화가 실렸다.

마을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약방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에블린은 세 번의 노크 후 거칠게 문을 열었다.

주디는 손님을 응대하다 말고 에블린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머, 에블린 아니니. 오늘 또 왔네? 역시 내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본 거지?”

‘하필이면 지금 손님이 있담. 아냐, 소문을 겉잡으려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몰라.’

에블린은 활짝 웃고 있는 주디의 얼굴과 대비될 정도로 표정을 굳힌 채 다가갔다.

“네. 제 마음은 어제와 같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응?”

예상하지 못한 답안이었는지 주디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는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수녀님이랑 아이들이랑 평생 같이 살려고요.”

‘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서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이상 앞으로의 미래는 암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희망을 놓지 않기로 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약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어머. 그런 생각이 너를 망치고 있는 거라니까.”

주디는 혀를 차면서 제 불쾌함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현명하게 생각해야지, 에블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수녀님이랑 다 자라려면 한참 남은 애들 뒷바라지하느라 네 청춘 다 허비할래? 그리고 나면 네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니? 나이 많은 여자를 누가 예쁘다고 데려가니?”

“괜찮아요. 그때 가서 생각할게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주디의 얼굴은 열이 올라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씩씩거리는 목소리에 오히려 에블린은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내가 좋게 말하니까 네 처지를 아직 잘 모르나 보다? 목도리 떠서 파는 거로 용돈 벌이가 되니까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마을 사람들이 목도리가 좋아서 사 주는 건 줄 아니? 다 네가 불쌍해서 네 사정이 안타까우니까 사 주는 거지.”

날카로운 말은 꼭 칼을 품은 듯 매서웠다.

“어우, 주디 그만해.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주디 옆에 있던 헨나 부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팔을 내치고서는 더욱더 언성을 높였다.

“밀린 약값은 생각 안 해? 나도 네가 안타까워서 좀 너그럽게 봐주고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멍청하게 나온다면 곤란해!”

이해할 수 없는 주디의 화풀이는 그저 에블린을 더욱 피곤하게만 할 뿐이었다.

“왜 이리 멍청하게 서 있어? 어떻게서든 돈을 마련해서 당장 밀린 약값이나 지불하라고 꼭 직접 말해 줘야 상황 파악을 하겠니?”

“서로 의견이 맞아서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약값을 지불하려고 왔거든요.”

“하! 줄 돈은 있고?”

에블린은 대답 대신 밀린 외상값의 두 배인 금화 두 개를 약사의 앞에 내놓으려고 했다.

“무슨 일이야?”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뭐예요? 언제 왔어요?”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 약방에 들어왔는지 약방의 환한 조명 아래 체이서의 아름다운 얼굴이 반짝이며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인물에 주디도 헨나 부인도 감탄을 숨기지 못하였다.

두 사람의 시선에도 체이서는 무심히 에블린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별거 아니에요. 약값 때문에 조금 언쟁이 있었어요.”

그 말에 체이서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말은 안 했지만 자기가 준 돈은 어쨌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에블린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여 준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에블린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가방에서 금화를 꺼내어 주디의 앞에 놓았다.

“약값은 여기 있어요.”

책이 잡힐까 봐 일부러 넉넉한 금액을 계산해서 준 덕인지 주디는 공방의 장인이 그랬던 것처럼 금화를 보고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이런 큰돈을?”

당황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에블린이 답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옆에서 입을 가리며 구경꾼이 되어 준 헨나 부인도 있으니 이 정도면 소문이 가라앉지 않을까.

에블린은 그리 생각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간 배려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앞으로는 약값을 외상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 정도면 좋은 마무리였을 것이다.

무작정 화를 내는 것보다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낼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에블린과 다르게 체이서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는지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지, 에블린. 앞으로 이곳을 올 일이 없다고 말해야지.”

에블린이 무슨 소리냐 묻기도 전에 체이서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토해 냈다.

‘어쩐지 조금 추운 것 같은데.’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에블린이 몸을 떠니 체이서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안 그래?”

곧바로 그녀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에블린은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쥐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체이서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제야 체이서의 얼굴에 서린 불쾌감을 읽을 수가 있었다.

체이서의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진 게 보였다.

가장 먼저 든 건 의문이었다.

‘왜?’

에블린이 폭언과 무례한 상황에 부닥쳤다 하더라도 체이서가 이리 화낼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비웃는다면 모를까.

혹시 도와주는 걸까?

“하, 하지만…….”

지금까지 주디에게 당한 취급을 생각하면 냉큼 그렇노라 답하고 싶었으나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의 약방은 이곳뿐이니까.

체이서는 에블린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듯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이제부터 약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예?”

어떻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녀가 묻기도 전에 턱 하고 튀어나왔다.

“약 걱정 따위 하지 않게 해 주겠단 내 말 잊어버린 건 아니지?”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에블린과 체이서의 사이가 좋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냥한 물음과 달리 낮게 가라앉은 눈빛은 에블린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랬죠?”

“그랬지.”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답에 그제야 체이서가 빙긋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신지…….”

타이밍 좋게 가만히 지켜보던 헨나 부인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체이서는 기다리던 답이 나오자마자 냉큼 답을 꺼냈다.

“에블린에게 구애하는 젊은 귀족 청년이면 대답이 충분하겠나?”

에블린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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