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보통 대리석을 깎아 만드는 수도원의 건물과는 달리 이곳의 수도원은 지원이 현저히 적은 것을 보여 주듯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규모도 작아 1층에는 작은 기도실, 주방, 식당이 겨우 자리를 잡고 있었고, 2층에는 작은 방이 고작 4개가 있었다.
3층은 그나마 커다란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마 아이들이 생활하는 듯해 보였다.
아무리 신권이 떨어졌다지만 체이서는 평생토록 이렇게 초라한 수도원은 처음 보았다.
‘그럴 만도 한가? 남아 있는 수녀가 죽으면 이마저도 바로 철거해 버릴 테니.’
낡은 수도원, 늙고 병든 수녀, 아직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 다섯 명.
희망차기는커녕 에블린으로서 저들을 원망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일 환경이었다.
‘도망치려나?’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애초에 루이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을 들켰다는 것만으로도 그리 겁을 먹었던 사람이니 자신이 처한 형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줄을 다른 이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으니 보통은 그 줄을 끊기 위해 달아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체이서의 예상과 달리 에블린은 눈물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축 늘어진 어깨를 펴고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한참이고 기다려 보았지만 도망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원 쪽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웃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이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무 위에서 한참이고 에블린의 이상 행동을 기다렸던 체이서는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떻게든 다 함께 살아 보겠다 이거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니, 할 수 없는 이가 살아 보겠노라 발버둥 치는 장면은 그에게 퍽 유쾌하게 다가왔다.
“살려 준 보람은 있네.”
에블린은 현명한 선택을 하는 대신 옳은 선택지를 골랐다.
‘운이 좋아. 도망쳤으면 그냥 죽이려 했는데.’
에블린 바이아르도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참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래서 흥미롭기도 했다.
‘그때도 울면서 손을 놓지 않았었지, 끝까지.’
체이서는 얼핏 떠오르는 과거 기억 속 에블린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체이서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바닥을 디뎠다.
나무 위에서 주위를 살펴보았을 때 그가 찾는 것으로 의심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있으니 분명히 근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크기도 작지 않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춘 걸까.
‘답답하네.’
차라리 이 산을 통째로 불에 태워 버린다면 일은 쉬울 텐데.
가죽 장갑 아래로 체이서의 손이 움찔거렸다.
조금이라도 체이서의 의지가 반영된다면 그의 손에는 금세 불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작은 화염은 금방 몸통을 키워 이 산을 순식간에 잡아먹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일이고 오히려 일을 더 쉽게 끝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동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평소답지 않은 인내심 넘치는 모습을 그의 형제들이라면 눈에 띄게 놀라워했겠지만 이곳에는 그럴 존재들이 없었다.
겁을 먹는 존재라면 있겠지만.
체이서는 다시금 떠오르는 에블린의 얼굴에 피식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산을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체이서는 수도원에 없었다.
“누나! 날씨가 너무 좋다. 그렇지?”
“우리 같이 놀자!”
에블린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원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같이 술래잡기를 하다가 빨래도 하고, 근처에서 마른 나뭇가지도 다 함께 주워 왔다.
한참이고 몸을 써서 그런지 그 시간 동안만큼은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낼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가져다드리며 라사냐에게 허락을 구할 때는 내심 그녀가 거절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손님이 며칠 더 머물고 가겠다고 하셨다고?”
“네. 이 산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있으신가 봐요. 며칠 더 묵고 싶다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난 괜찮지.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께서 우리에게 내려 준 축복인걸.”
역시나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라사냐다운 말이었기에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도 어차피 그녀가 허락지 않는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기에 씁쓸해지기도 했다.
즐거워야 할 저녁 식사 시간에 달갑지 않은 주제였지만 아이들에게 단단히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체인 씨는 용병이기 때문에 갑자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야. 그러니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언제나 예의를 지켜야 해.”
아이들은 손님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투덜거렸지만.
“누나 말 듣고 언제 잘못된 적 있었어? 낯선 사람은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아.”
알렌의 도움으로 해결이 되었다.
“또 다른 손님방에도 손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몸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아. 오늘도 깨어나지를 못하시니 의사를 불러올 거야.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니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기야.”
“많이 아파? 엄마랑 아빠도 많이 아팠었는데. 수녀님도 많이 아프시구.”
제리가 눈가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훌쩍였다.
손님이 아프다는 말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린 모양이다.
에블린은 제리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며 제리를 포함한 모두를 향해 다정히 말하였다.
“수녀님도 손님분도 다 쾌차하실 거야. 그러니 우리는 그런 날이 빨리 오도록 신께 기도드리자.”
“우웅.”
다행히도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 사람만 만족스러운 약속이 체결된 후 마냥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었는데.
‘역시 내가 지켜야지.’
라사냐와 동생들을 보니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는 다짐과 함께 그날의 하루는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수녀님도 아이들도 모두 잠든 시각.
오후 11시를 넘어가는 시계를 보며 에블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쯤 오려나.”
에블린은 문 근처에 있는 낡은 손님용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의자 옆 탁상 위에 올려진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이 주위를 은은히 밝혀 주고 있었다.
어두운 로비에 홀로 빛나는 작은 불빛을 보며 에블린은 얌전히 체이서를 기다렸다.
손님을 이렇게 기다릴 이유는 없었지만, 오히려 체이서가 눈에 띄지 않으니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 자정이 넘었네.”
혹시 수도원을 떠나 버린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잠들 때를 기다려 수도원에 불을 질러 미리 잡음을 제거한다든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희망은 모습을 감추고 그보다 더욱 커다란 부정적인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감 때문인지 몸이 달달 떨려 왔다.
‘제발 최악의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을 때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졸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황금색 두 눈동자를.
***
“으으음.”
에블린은 찌뿌둥한 몸이 불편한지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잠결 때문에 흐릿한 시야 사이로 비치는 천장이 어쩐지 낯설었다.
‘어쩐지 로비 같은……, 헉!’
에블린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어젯밤 체이서를 기다리다가 로비에서 깜빡하고 잠이 든 모양이다.
‘체이서는?’
혹시 돌아오지 않은 걸까?
다시금 피어오른 희망은 에블린이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에블린이 잠들어 있던 자리 건너편 소파에 체이서가 몸을 반쯤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들어왔구나. 그런데 방에서 자면 되는 걸……. 왜 여기서 자는 거지?’
에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손님 방에 놓아둔 이불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체이서가 이불 대신 자신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님방의 이불은 에블린이 덮고 잠들었으니 아마도…….
“이제 깼나? 방으로 데려갈까 하다가 그럼 잠에서 깰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는데.”
체이서가 가져온 것이겠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체이서는 졸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에블린을 보고 있었다.
“설마 밤새 안 깰 줄은 몰랐지만.”
“이불은…….”
체이서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마. 감기라도 걸리면 서로 피곤해지니까.”
어쩐지 조금 우스워졌다.
이 무서운 사내가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고 곧바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다니.
에블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호의를 베푼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았다.
작은 호의를 보여 준다 한들 그가 무섭고 잔인한 이라는 게 변치는 않으니까.
“오늘은 마을에 가야 해. 안내를 부탁하지.”
그래서 체이서가 이렇게 대화 주제를 돌리는 것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산에 찾을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마을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전 7시, 아직 밖은 어두웠지만, 곧 주위가 밝아질 테고 수녀님과 아이들도 금방 깨어날 것이다.
“아침 먹고 가도 괜찮을까요? 아이들에게 점심은 따로 먹으라고 말해 둘게요.”
“마음대로 해.”
“체인 씨는요? 식사하셔야죠. 어제저녁도 거르셨잖아요.”
“됐어.”
체이서는 준비가 끝나면 불러 달라는 말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에블린은 망설임 없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불 없으시면 추울 텐데.”
이불을 뺏은 못된 아이가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에 조금, 아주 조금 뻘쭘한 중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