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저……. 저를 기억하세요?”
“내가 어떻게 너를 잊겠어.”
나오는 답이 의미심장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체이서는 시험을 보는 아이 중 가장 뛰어난 아이였다.
그의 손에서 피어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거대한 화마는 가주가 직접 감탄하기도 했으니 잊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체이서와 다르게 에블린은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아니, 다른 의미로 눈에 띄기는 했구나.’
에블린은 능력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난 유일한 무능력자였으니까.
시험이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 결국 시험에 탈락하지 않았나.
‘그래서 기억하는 건가? 그렇다면 설마…….’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저, 저를 죽이러 온 건가요?”
루이사의 비밀을 아는 이는 루이사의 일원이 아닌 이상 모두 죽어야 했다.
기어코 에블린이 살아남은 것을 알아차려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에블린을 죽이러 찾아온 게 분명했다.
체이서는 루이사의 훌륭한 일원이니까.
“저는 지금까지 루이사의 비밀을 잘 지키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밖으로 발설할 생각 없고요. 저를 거두어 준 수녀님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지도 모르겠다.
“저도 어떻게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살게요.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할게요!”
횡설수설 튀어나온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리해서 말을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사, 살려 주세요.”
에블린의 목소리가 기어코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을 죄여 오는 무거운 침묵에 에블린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꾸만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왜 널 살려야 하지?”
조금의 여지조차 없는 말에 에블린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비굴하게 애원해서라도 살아야 하는데.
“말해 봐, 에블린. 내가 너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
“저, 저는…….”
아, 결국 이렇게 끝인 걸까.
에블린은 밀려오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걸까.
포기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퍼뜩하고 수도원의 가족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블린에게 살아가는 행복을 알려 준 라사냐는 병에 걸렸고, 가족의 정을 알려 준 다섯 명의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만약 에블린이 죽는다면 이 겨울마저 버티기 힘들지도 모른다.
아찔한 생각에 용기를 쥐어짜 낼 수 있었다.
“저를 죽여도 괜찮아요. 다만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 주세요. 수도원의 가족들은 제가 누구인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몰라요.”
“흐음?”
에블린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는지 체이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아니, 나중에 죽여도 괜찮으니 이번 겨울이 지나고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없다면 수도원의 가족들은 이번 겨울을 나기 힘들 거에요.”
체이서가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적어도 겨울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처럼 죽은 듯이 살고 있을게요. 도망도 가지 않을게요.”
“하,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들어 줬더니.”
간절한 바람에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반응이었다.
실패한 걸까.
이제 끝인 걸까.
가족들을 책임질 사람은 에블린밖에 없는데 그녀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이번 겨울에 모두가…….
역시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드릴게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질척이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루이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살려 두지 않는 게 맞는데.”
체이서는 피식하고는 짧게 미소를 짓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네가 뭘 해 줄 수 있지?”
“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자신의 가치를 꽤 높게 평가하나 봐.”
그의 짧은 웃음은 꼭 에블린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에블린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한참이나 에블린을 쳐다보던 체이서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고, 에블린은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체이서가 에블린의 허리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에블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체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라도 난 듯이 노기를 띤 목소리로 에블린에게 답해 주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것이든 해 주겠다며.”
허리를 감싼 손이 슬그머니 더 안쪽으로 움직이자 이질적인 가죽 장갑의 느낌이 옷 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로브에 가려져 있던 두꺼운 팔뚝이 에블린의 몸을 더욱 끌어당겼다.
허리를 쓰다듬는 노골적인 손길은 남자의 경험이 없는 에블린이라도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뭐든지 하겠다더니?”
“…….”
“고개 들어.”
겁에 질려 고개를 내젓자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들라 했어.”
에블린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토록 보고 싶지 않던 체이서의 눈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눈 감지 마. 입 맞출 거니까.”
생전 처음 겪는 질 나쁜 희롱에 에블린은 두려움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가까이 다가온 고개가 바로 그녀의 코앞에서 멈출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체이서의 입술과 에블린의 입술이 맞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체이서는 오히려 한심하다는 어조로 에블린은 타박했다.
“흐음, 왜 반항하지 않지?”
체이서의 강압적인 명령에 눈을 감을 용기조차 내지 못한 에블린은 가여워 보일 정도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가 한 말을…… 지키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무섭지도 않나?”
“무, 무…….”
무섭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에블린이라고 어찌 이 상황이 무섭지 않았을까.
서슬 퍼렇게 가라앉은 안광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당장이라도 그만두라 외쳤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너를 강제로 취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면 어찌하려고?”
“아…….”
온몸으로 느껴지는 두려움과 억울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어째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에블린의 눈에 자조적인 감정이 담겼다.
그녀의 환한 녹색 눈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보던 체이서가 에블린의 허리에 감싼 팔의 힘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함부로 뭐든지 하겠다는 말 내뱉지 마. 멍청해서 놀리는 재미도 없네.”
에블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저를…… 살려 주시는 건가요?”
“일단은.”
에블린은 어떠한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이 상황이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는 얼마나 우스운 장난일지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면 지금 죽여 주고.”
“아니에요.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비굴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바짝 엎드린 자세가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나 보다.
에블린의 영혼 없는 대답에 체이서는 피식 웃고는 허리에 얹은 손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렸다.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리던 에블린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니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너를 죽이려고 이곳까지 찾아온 건 아니야.”
체이서는 아쉬운 손길로 에블린을 놓아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에블린의 목에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화사한 금색의 머리칼이 차분한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에블린은 그제야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체이서의 품에서 빠져나오자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체이서가 에블린의 허리를 감쌌던 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 아파요.”
참지 못하고 무심코 내뱉은 말에 그의 몸이 순간 굳더니 손의 힘을 풀었다.
그럼에도 붙잡은 손목은 놔주지 않았지만.
체이서는 조금 전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블린을 살피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닿는 시선이 너무도 끈질겨 두려운 감정 뒤로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이 밀려와 터지기 직전에 그가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많이 말랐군. 수도원에서 밥을 굶기기라도 하나?”
수도원을 욕하는 말에 에블린이 두려움을 잊고 발끈하며 소리를 높였다.
“저를 욕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수도원은 그런 곳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면 네가 먹을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준다거나?”
“아니라니까요!”
“여전히 그럴 줄 알았지.”
체이서는 마치 에블린에 대해 잘 안다는 듯 가볍게 말을 붙였다.
“여전히라니요?”
에블린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의아함을 내비쳤다.
“아침에 그러던데.”
“그건,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거였어요…….”
“그래, 그런 거로 하지.”
에블린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조금 전의 대화로 인해 체이서에게 서려 있던 불쾌한 기색이 조금 가신 것 같았다.
잡힌 손목이 욱신거리기도 했고,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덕에 약간의 용기가 생겨났다.
“저기……. 이거 놔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체이서는 의외로 쉽게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가까이 달라붙었던 몸이 멀어지자 그의 곁에 있을 때 몰랐던 겨울의 한기가 온몸을 타고 느껴졌다.
에블린은 제 몸을 보호하듯 두 팔로 감싸고는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저를 죽이러 온 게 아니라고 하셨죠?”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려나.”
“그럼 왜 여기에 오신 거예요?”
“우연이야.”
우연,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참으로도 편리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