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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5)화 (5/159)

5화

하지만 에블린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에블린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한참 산길을 헤매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만약 라사냐가 인적이 드물던 산길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쓰러져 있던 에블린을 구하지 않고 떠났다면 그녀는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어찌나 겁이 많았는지 숨어 버린 너를 찾느라 꽤나 고생 좀 했었지.”

다정하고도 상냥한 라샤나는 보호자로서 또 치료자로서 에블린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주었고 결국엔 그녀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에 에블린이 어색히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숨고, 들키면 도망치고, 그러다 잡히면 울며불며 사람들을 거부하고.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던 에블린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킨 것은 라사냐의 공이 컸다.

“그렇게 어리던 아이가 이렇게 장성했으니 뿌듯한걸?”

라사냐의 뿌듯한 미소에 에블린은 조금은 복받친 목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수녀님은 제 구원이에요.”

“얘도 참. 구원이라니 너무 부담스러운 말이다.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게 맞지.”

라사냐는 언제나 이랬다.

자신의 기준보다 과도한 칭찬에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선의 기준과 가치를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실인걸요. 저는 수녀님이 구해 주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살고 싶었지만 혼자서 살아가기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 에블린에게 살아가라고 응원해 주며 손을 내밀어 준 건 라사냐뿐이었다.

전생에서는 부모의 돌봄 없이 혼자 힘겹게 살다가 죽었고, 다시 태어난 곳에서도 가족에게 버려져 목숨을 위협받는 곳에서 살아남았다.

비극적인 삶을 이겨 낸 것을 보상이라도 받듯 라사냐에게 구출된 후의 수도원 생활은 평화롭고 또 따스했다.

생애 처음으로 에블린에게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중한 이들을 안겨 주었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올바르게 키워 준 사람.

그러므로 더더욱 루이사의 일에 대해서 라샤나에게 말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위험스러운 상황에 자신의 가족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으니까.

에블린은 라사냐를 향해 다정함을 담아 살포시 웃고 말았다.

“그러니 제 옆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주셔야 해요.”

“걱정하지 말렴. 네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예쁜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사는 걸 다 지켜볼 거니까.”

“약속이에요.”

에블린은 라사냐와 마주 보며 웃다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창문 너무 오래 열어 두지 마시고요. 손님방에도 절대로 들어가지 마세요!”

“그래, 그래. 알겠어.”

에블린은 몇 번이나 약속을 받고서야 안심하며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체이서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체이서는 꼭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서늘한 표정이었는데 에블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곱게 접으며 빙긋 웃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자꾸만 눈치 없이 불안감이 날뛰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체이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옛날 생각이요……?”

그 주제를 담는 것만으로도 싫은지 입가에 떠오른 그려진 듯한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에블린을 보면 자꾸 어릴 때가 생각나네요. 왜일까.”

체이서가 긴 다리를 움직여 단번에 에블린의 앞에 섰다.

마치 사물을 내려다보듯 냉기가 서린 눈빛, 그리고 그린 듯한 미소.

체이서는 다시금 반갑지 않은 어젯밤의 주제를 꺼내었다.

“우리 정말 처음 보는 것 맞나요?”

마치 숨기고 있는 것을 자백하라는 듯이.

“그, 그럼요. 당연하죠!”

체이서가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을 더듬었지만 에블린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혹시 어릴 적에 이 지역에 오신 적 있었나요?”

“으음, 아니요.”

“그럼 착각일 거예요. 저는 이 지역 토박이니까요. 무엇보다 체인 씨처럼 미남을 만났더라면 분명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을 텐데 기억나지 않는걸요!”

에블린은 일부러 목소리를 더 높이며 밝은 척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더 늦어지기 전에 얼른 가 볼까요?”

체이서는 언제 에블린을 추궁했냐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블린은 알렌에게 수도원 근처를 벗어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킨 뒤 체이서와 함께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지난 밤에 내린 비로 인해 기온이 더욱 내려간 게 느껴졌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이 미끄럽네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내려가야겠어요.”

“네, 그런데…….”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이면 되지 왜 또 다른 말이 붙는 걸까.

자꾸만 예상했던 말이 아닌 답이 나오니 심장이 크게 뛰는 걸 진정시키느라 힘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고개를 돌리자 체이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산뜻한 목소리로 불안감을 증진시키는 말을 꺼냈다.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이 주변을 좀 둘러보고 가도 될까요?”

“네? 왜요?”

“찾을 게 있어서요.”

분명 자연스러운 말인데 자꾸만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불쑥불쑥 치고 올라왔다.

“중요한 물건인가요?”

“예.”

“…….”

어떤 물건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숨기려는 것 같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혀로 가볍게 축이면서 에블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찾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좀 도와드릴까요?”

눈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일부러 체이서를 지나쳐 그를 등지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예의상 꺼낸 말이었다.

‘중요한 물건 같은데? 당연히 거절하겠지?’

하지만 돌아온 말은 또 에블린의 예상을 단단히 빗나갔다.

“그럼 그럴까요?”

“……네. 혼자보다 같이 찾는 게 더 빨리 찾잖아요!”

당황해서 답할 타이밍이 조금 늦어 버렸지만 어색하지 않게 밝게 대답했다.

다행히도 체이서도 이상함을 눈치 못 챈 듯해 보였다.

“어떤 걸 찾으시는데요?”

“포렌 산맥을 넘어오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음, 포렌 산맥의 흔들 다리를 건너올 때만 해도 있었거든요.”

은근슬쩍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비밀로 해야 하는 물건인가 보다.

괜히 눈치 없이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여기가 아스트 산맥의 중턱이니 근처에서 잃어버리셨나 보네요. 더 늦기 전에 함께 찾아보고 마을로 내려가요.”

“그럼 도움을 좀 청하겠습니다.”

여전히 체이서가 어색하고 꺼려졌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건 에블린 자신이었다.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하는 법.

에블린은 기운차게 주먹을 불끈 쥐고서 포렌 산맥과 연결된 흔들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으음, 산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나뭇잎 더미는 조심하세요. 나뭇잎에 가려진 구덩이가 있을 수도 있어요.”

“구덩이요?”

“아이들이 야생동물을 잡겠다고 파놓은 함정이에요.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조심하죠.”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나마 누그러진 목소리가 다시 날카로워진 것만 같았다.

반갑지 않은 주제였나.

“아이들은 에블린의 친동생들입니까?”

음, 그건 아닌가?

어제와 다르게 먼저 질문을 하는 것도 의외였기에 혼자만의 생각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아니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수녀님이 거두어 주셔서 함께 살고 있어요.”

“에블린도 수녀인가요?”

“그래 보였나요?”

“아니라면 미안합니다.”

이렇게까지 사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신실해 보인다는 뜻 아닌가요? 칭찬의 말인데 뭘요. 저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수녀님에게 거두어진 고아 중 한 명이에요.”

그렇다고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자니 이상해 보일 게 뻔했고, 거짓말을 하자니 언제 들킬지 모르니 차라리 사실을 털어놓는 게 나았다.

“그렇군요. 에블린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보통 성인이 되면 수도원을 떠나고는 하던데.”

“맞아요. 내년이면 성인이 된답니다.”

분명 일상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였다.

그럼에도 자꾸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에블린이 답하는 것을 주저하니 대화가 뚝 끊기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겁먹지 말자. 별것 아니잖아.’

복잡하게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에블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성인이 되어도 계속 수도원에 있으려고요. 여기가 저의 집이니…….”

하지만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마치 데자뷔처럼 체이서가 어제와 같이 에블린의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것이다.

“언제 뒤돌아보나 했더니.”

그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말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만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채 눈을 깜빡이자 체이서는 퍽 잘 어울리는 비소를 입에 머금었다.

“깜빡 속을 뻔했어.”

“네, 네?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었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언제까지 연기할 생각이지, 에블린 바이아르도?”

심장이 발끝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언제부터 알아차렸던 거야?

설마 처음부터?

역시 나를 노리고 온 걸까?

본능적인 두려움에 에블린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등 뒤에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슬쩍 보니 커다란 나무가 그녀의 도주로를 막고 있었다.

피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체이서의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갔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맞닿을 만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에블린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자 서늘한 손이 그녀의 턱을 붙잡아 휙 끌어 올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에블린은 밀려오는 숨을 급히 삼켰다.

매서운 눈빛은 금방이라도 에블린을 잡아먹을 듯 그녀를 옭아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는 것을 감히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세요.”

“계속 회피하는 건 좋은 방법 같지 않은데. 내 인내심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지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듣기 좋은 미성임에도 그녀의 목에 드리운 칼날과도 같이 느껴졌다.

에블린이 다시금 벗어나려는 찰나 서늘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움찔하며 어깨를 떠는데 목 아래에서 툭, 하고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도 아니라고?”

어깨에 닿은 투박한 갈색 머리가 순식간에 레몬빛 금색으로 바뀌는 장면을 보며 그녀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나를 알고 있지?”

최종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겁에 질려 다물린 입술이 달달 떨려 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

짧게 내린 경고는 그의 마지막 인내심이 분명했다.

“……체이서 루이사.”

숨을 쥐어짜듯 힘겹게 내뱉은 말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거봐. 알고 있으면서.”

불쾌함이 풀렸는지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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