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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화 (4/159)

4화

에블린은 다리에 힘을 주어 힘겹게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걷고 창문을 열자 어느새 비는 멈췄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이 보였다.

초겨울의 찬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왔지만 에블린은 문을 닫는 대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블린은 겨울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겨울바람을 조금만 쐬어도 감기에 걸리기 일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겨울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라사냐가 자신을 구해 준 날이 겨울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저택을 빠져나왔던 계절이 겨울이어서 그런 건지.

이유야 어쨌든 겨울 날씨를 즐기며 따뜻한 차를 마시는 건 그녀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에블린은 찻물을 끓여 오는 대신 창문 아래 양초를 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께 간절히 빌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저택에서 빠져나와 살아남은 어린 에블린은 죽고자 하였고, 그런 에블린을 살린 것은 라사냐였다.

텅 빈 그녀의 삶에 라사냐가 들어왔고, 뒤이어 생긴 다섯 명의 동생들은 또 다른 삶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공허한 에블린의 눈에 일렁이는 촛불의 불이 반사되었다.

‘부디 바라건대…….’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았다.

들켜도 상관없었고, 죽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수도원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고작 자신과 연관되었다는 것만으로, 에블린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재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부디 이 수도원만큼은 오랜 시간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랄 뿐.

간절한 소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였지만 진심을 담은 소원을 부디 신께서 알아주시길 바라며.

‘가여운 이의 구원을 앗아 가지 마시옵소서.’

에블린의 기도는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졌다.

어쩐지 오늘 밤도 악몽을 꿀 것만 같았다.

***

불안한 탓인지 잠을 설쳤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망했다’였다.

혹시나 해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에블린의 바람과 다르게 창밖은 해가 뜬 지 오래였다.

어제와 같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는 게 이틀 연속으로 늦잠을 잔 게 확실했다.

‘일찍 일어나려고 했는데……!’

에블린은 어제보다 더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름 모를 환자를 살펴봐야 했고, 체이서도 무사히 떠나보내야 했으며, 마저 월동 준비도 이어 가야 했다.

‘일단 환자부터!’

빠른 걸음으로 손님 방으로 향했지만 이름 모를 환자는 여전히 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환자는 괜찮고! 그렇다면 체이서 쪽은? 아, 옆방은 비어 있잖아!’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이른 아침 떠나 줬으면 좋으련만.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1층으로 내려가자 식당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제발, 제발 자신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건 너무 많은 바람이었나 보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에여?”

“용병이면 무슨 일 해요? 막 마물도 잡고 그래요?”

“진짜 마물 본 적 있어여?”

다섯 아이들의 중심에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지금 에블린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 안 돼!’

체이서의 잘생긴 외모는 아이들의 관심사가 되기 충분했다.

아이들은 즐겁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체이서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시끄럽다며 아이들을 내칠 것 같은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절로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얘, 얘들아. 손님을 귀찮게 하면 안 돼.”

뛰어오느라 거친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다행히도 에블린의 목소리에 아이들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옮겨 왔다.

“누나, 좋은 아침!”

“언니, 오늘도 늦잠 잔 거야?”

“늦잠꾸러기!”

알렌의 뒤로 쌍둥이 남매인 리제와 리모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장난을 던졌다.

“우리 귀찮게 한 거 아니야! 아침 차려 준 거란 말이야.”

수잔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고, 가장 어린 제리는 의자에서 내려와 에블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누나아.”

아직 졸린지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제리를 마주 안아 주고 슬쩍 체이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잔의 말대로 그의 앞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이 올려진 접시가 놓여 있었다.

‘오렌지 주스까지 줬나 보네.’

아무래도 아이들은 체이서가 단단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껴 마실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주스마저 턱 내놓은 걸 보니까 말이다.

다행히 아직 식사 전인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블린은 뻗친 머리를 대충 묶으며 최대한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다.

“예. 좋은 아침이네요.”

“죄송해요.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리고는 어색히 웃으며 황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어제 스튜를 많이 끓여 놓길 잘했다.’

다행히도 스튜의 양은 체이서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먹기에도 충분했다.

따뜻하게 데워 가장 먼저 체이서의 앞에 내려놓으니 그가 목을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군말 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 또한 제 앞에 스튜가 놓이자 신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껴 있지만 언제나와 같은 평화로운 모습에 그제야 급한 불이 조금 꺼진 느낌이었다.

‘흠, 스튜는 딱 수녀님 몫만 남았네.’

어차피 입맛도 없으니 아침은 그냥 건너뛰어야겠다.

에블린이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고 라사냐의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어느새 식사를 끝냈는지 곁으로 거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 먹었습니다.”

면역력이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에블린은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굳으려는 것에 애써 힘을 풀며 최대한 평범을 가장하며 웃었다.

“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덕분에.”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잠시 체이서의 시선이 에블린의 목덜미 쪽에 향했던 것 같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

“곧바로 떠나시나요?”

“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어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에블린이 원하던 말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끄럽게도 사실 제가 길치여서 말입니다.”

“아, 네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색히 웃으니 그가 마주 따라 웃었다.

경계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눈이 부신 미소라 저도 모르게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체이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괜찮으시다면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네?”

찬란한 외모에 밀려나 있던 불안감이 다시금 에블린 앞으로 껑충 다가왔다.

“아, 그…….”

“어려울까요?”

시무룩하게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린 표정이 참 안타까워 보였다.

‘진짜 길치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조심스러운 말투는 협박이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블린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부탁에 약했다.

‘그래, 내려간 김에 목도리도 팔고 오면 되지 뭐.’

겸사겸사 밀린 약값 일부도 지불하고.

‘그리고 직접 배웅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정말 길치여서 또 산에서 길을 잃어 하룻밤 더 머문다고 찾아오면 그것만큼 싫은 일도 없을 것이다.

도움을 줘서 뿌듯함도 얻고, 직접 떠나보내며 불안감도 덜고.

차라리 이게 낫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에블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수녀님께 식사만 가져다드린 후에 함께 마을로 내려가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체이서의 시선이 에블린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내 뒤에 뭐가 있나?’

라사냐의 식사를 차리던 도중이라 뭐 이상한 건 없을 텐데.

“에블린은요?”

“네?”

“에블린은 식사를 안 하시나요?”

“아, 저는 입맛이 없어서.”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던 긴장감이 금세 가라앉았다.

에블린은 아침 식사를 올려놓은 트레이를 들고서 최대한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금방 내려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죠.”

뭐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걸까?

뒤늦게 나온 답이 신경이 쓰였지만 이러다 신경쇠약으로 쓰러질 것 같아 휙 등을 돌려 버렸다.

에블린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왔니, 에블린?”

“네, 수녀님 오늘도 좋은 꿈 꾸셨어요?”

“그럼. 너희와 함께 소풍을 가는 꿈을 꿨단다.”

몸에 힘이 없어 부축이 없으면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평소에도 외출을 자제하시는 분이다.

‘휠체어가 있으면 조금 더 편할 텐데.’

휠체어 같은 제품은 공방에 개인적으로 의뢰를 해야 하다 보니 값이 매우 비쌌다.

‘어떻게 돈을 마련하면 좋으련만.’

에블린은 이런 생각을 티 내지 않고 밝게 웃었다.

“겨울은 추우니 어렵고 봄이라면 가능하겠네요. 도시락 싸 들고 함께 가요.”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한지 라사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제 늦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수도원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머물고 계세요.”

“손님들? 일행이시니?”

“아니요. 한 분은 수도원 앞에 쓰러져 있어서 일단 안으로 들인 분이고, 다른 분은 비를 피하고자 하룻밤 머무르신다고 찾아오셨어요.”

에블린은 따뜻한 차를 건네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말했다.

“한 분은 아직 잠들어 계신 것 같고, 다른 분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게 어렵다 하셔서 도움을 좀 드리려고요.”

에블린의 말에 라사냐는 방긋 웃었다.

“다 컸네, 우리 에블린. 이곳에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바들바들 떨던 토끼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언제 적 이야기예요. 제가 이렇게 멀쩡하게 자란 건 다 수녀님 덕분이라고요.”

에블린은 감사의 인사를 하며 그녀의 손에 구해진 어린 날을 떠올렸다.

에블린은 루이사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고, 감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도 없었다.

탈락한 자의 최후는 죽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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