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루이사 공작가는 철저히 가문의 위상을 높여 줄 실력자를 차기 후계자로 선정한다.
루이사의 시험을 치르고, 살아남은 후보들은 가주가 되기 위해 다시 새로운 경쟁을 펼친다.
체이서 루이사는 잔혹한 경쟁 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자였다.
게임 속 플레이어가 나타나기 전까지 루이사의 차기 가주로 거론되었던 유력인사, 실권을 휘어잡은 가문의 실세.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위협되는 플레이어를 죽이기 위해 노력한 악역.
그자가 바로 체이서 루이사였다.
‘진엔딩에서는 플레이어에게 반한 걸 깨닫고 패배를 인정했었지, 아마.’
환생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게임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나마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장남인 체이서 루이사의 능력은 ‘화염’이라는 것.
어릴 적 루이사의 시험장에서 만났던 체이서의 화려한 불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탁월했으며, 강력한 힘은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수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할 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오늘 꿈을 단단히 잘못 꾸긴 한 모양이다.
아름다운 외모면 무엇하리.
체이서를 보면 볼수록 과거의 기억이 샘솟듯 치고 올라와 속이 울렁거렸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끔찍한 옛 기억에 정신이 아찔해 오던 찰나.
에블린이 한참이고 말이 없던 탓인지 체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의 책임자입니까?”
목소리 또한 외모에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감미롭기 짝이 없었다.
사람을 금방 홀려 버릴 것 같은 목소리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으나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제가 이곳의 책임자입니다. 근처에서 보지 못하던 분이신데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지나가던 용병입니다. 산에서 내려가려던 도중 갑작스러운 비에 피할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이 수도원에 온 거지? 포렌 산맥 쪽에서 오는 게 아닌 이상 마을이 더 가까웠을 텐데……. 설마 이 늦은 시간에 포렌 산맥을 거쳐 온 걸까? 용병이라고 거짓말하는 것도 수상한데.’
술술 흘러나오는 말은 거짓말일 거라고 짐작되었지만, 그럼에도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루이사의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만큼 냉정하고 잔인한 성정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런 설정이기도 했고.’
갑자기 등장한 플레이어를 보며 경계하며 괴롭히다 죽이려는 스토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닐 거다.
‘어떻게 해야 하지?’
수상하다며 그를 내치자니 후에 신분을 밝히고 죄를 물어 벌을 내릴까 두려웠다.
현재 수도원의 책임자는 에블린이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 때문에 이 수도원의 운명이 갈릴지도 모른다.
내쫓고 싶었지만 앞에 있는 사내는 대귀족.
달갑지 않은 거절에 건방지다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 수도원을 활활 불태울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라사냐에게 배운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에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빗길에 길을 잃으신 모양이네요. 산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초행길이시라면 날이 밝고 내려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머물 방을 내어 드릴 테니 오늘 밤은 편히 쉬다 가세요.”
“감사합니다.”
돌아온 답은 깔끔한 인사였지만 에블린의 불안함은 여전했다.
긴장감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티를 내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식사는 괜찮습니다. 간단하게 몸을 닦은 수건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준비해 드릴게요. 머무르실 곳은 2층 왼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이에요. 아침을 드시고 싶으시면 8시까지 식당으로 오세요. 식당은 저쪽.”
1층 계단의 오른쪽 끝을 가리키자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밥도 안 먹고 조용히 떠나 주면 좋겠지만.
고요한 복도에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2층으로 향하는 길이 멀지 않음에도 심리적인 긴장감 때문인지 평소와 다르게 멀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괴롭혔다.
‘긴장하지 말고…….’
에블린은 버릇처럼 목에 걸린 작은 목걸이를 매만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묻기는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체인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럼 체인 씨라 부를게요. 저는 에블린이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평범하게 이름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설마 제 이름을 기억하는 걸까?
에블린은 치맛자락에 손바닥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평정을 유지했다.
진정하려 노력하는 사이 드디어 손님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옆방에 또 다른 손님이 있지만……. 내일 떠날 테니 굳이 말하진 않아도 괜찮겠지.’
에블린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 깜깜한 방의 불을 켰다.
그럴싸한 손님 방이니 그래도 트집잡힐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여관도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아, 수건도 저기 놓여 있네.’
스스로 부지런함을 뿌듯해하며 등을 돌리는데.
“까, 깜짝이야.”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체이서 때문에 에블린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차 하며 곧바로 입을 막으니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방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글쎄. 굳어 있는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괘, 괜찮아요.”
“이런 말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네, 네? 아뇨, 처음 보는데요!”
“그런가요? 내가 착각했나?”
체이서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꼭 상대방을 탐색하는 듯한 서늘한 눈빛에 에블린은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상하네. 분명 낯이 익는데.”
이대로 이곳에 더 있다가는 심장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푹 주무세요.”
에블린은 냅다 말을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와 반대쪽 복도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으로 들어오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문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허억, 허억.”
에블린은 거친 숨을 내쉬며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꾹 눌렀다.
손님 방에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라사냐가 병 때문에 쓰러졌던 후에 후각이 예민해져서 그 이후로 향이 나지 않는 제품을 이용해 청소를 해 왔으니 향기가 날 리가!
갑자기 루이사의 사람을 만나서 자신이 너무 예민해진 걸까?
혹시 향기는 핑계고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관찰한 건 아닐까?
‘설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은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블린 본인 또한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저택에서 보낸 일을 악몽으로 꾸고 있었으니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치렀던 검은 저택은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고는 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목조 저택, 저택 내외 구분하지 않고 포진해 있는 관리자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면 나오는 거대한 미로.
마지막으로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험을 치르는 10명의 아이.
시험장인 저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숨이 턱턱 막히고, 살려 달라는 아이들의 비명이 이명처럼 울려 귓속을 괴롭혔다.
시험의 합격한 이는 살아남아 루이사의 일원이 되고, 실패한 이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관리자들은 실패자들이 죽지 않는다면 그들을 죽여 루이사의 비밀을 지켜 왔다.
그리고 에블린은 실패자임과 동시에 유일하게 저택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만약 내 존재를 알고 죽이려 찾아온 거라면?’
“으으으.”
에블린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방문 뒤에 있는 낡은 전신 거울 속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가녀린 여인 한 명이 보였다.
분명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에 짙은 갈색 눈이 보여야 할 거울 속에는 화사한 금발과 여름의 잎사귀를 닮은 연둣빛 눈동자가 비추었다.
보여서는 안 될 에블린의 진짜 색이 보인 것이다.
“뭐, 뭐야?”
에블린은 당황하여 근처에 놓인 수건을 들어 한참이고 거울을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 냈다.
다시 바라본 거울 속에 비친 것은 평범한 갈색 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진 조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였다.
“모, 목걸이는…….”
겁에 질린 얼굴 아래 조금 흐트러진 작은 펜던트 목걸이도 무사히 잘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다.”
에블린은 다시금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목걸이는 착용자의 머리와 눈 색을 바꿔 주는 간단한 변장이 가능한 마도구로 라사냐가 어린 날의 에블린에게 선물해 준 목걸이였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외출을 꺼리는 에블린을 위해 라사냐가 안겨 준 소중한 보물.
마법이 멀쩡한 것을 확인해서일까.
에블린을 괴롭힌 환각과 환청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 알 리가 없지. 어차피 나는 눈에 띄는 아이도 아니었잖아.’
시험장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이능력을 가진 아이들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에블린은 그들과 다르게 무능력자였다.
에블린은 각성자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으나 돈에 눈이 먼 바이아르도 백작이 루이사를 향해 사기를 친 것이었다.
능력이 없기에 아이들은 그녀를 경쟁 상대라기보다는 덜떨어진 존재, 가치 없는 존재로 대했다. 에이스였던 체이서는 에블린의 존재조차도 몰랐으리라.
‘절대로 들켜서는 안 돼.’
만약 에블린이 루이사 시험의 생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체이서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체를 들킨다면 에블린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수도원 전체가 위험에 휩싸이게 된다.
걱정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소리를 참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