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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2)화 (3/159)

2화

“페제토 자작님이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평판이 좋은 분이긴 하시죠.”

나이가 60살이 넘은 사람이 이제 갓 성인 되기를 앞둔 어린 여자애를 탐내는 것을 좋다 표현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블린의 표정이 좋든 말든 약사의 신분을 던지고 중매쟁이로 돌연해 버린 주디는 이번에야말로 허락의 말을 받아 내야겠다는 듯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평민이 귀족의 정부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그 정도면 시집 잘 가는 거라니까?”

예전부터 은근히 물어 오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은근슬쩍 회피하니 참다가 못 해 결국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나 보다.

언제까지고 어영부영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저는 결혼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귀족이 되고 싶지도 않고, 동생들하고 이대로만 살고 싶은걸요.”

자식을 망설임 없이 팔아넘긴 바이아르도 백작 부부도 귀족이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 아이들을 사들인 것은 루이사 공작가였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두 가문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한 일.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더는 더러운 귀족들 사이에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그분이 아이들을 챙겨 주신다면?”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말 그대로야. 수녀님의 진료비, 약값 그리고 수도원에 머무르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를 집과 비용 모두를 지원해 주신다면 어떠니?”

상상해 보지 못한 말에 에블린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

“자작님께서 네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 네 사정을 듣더니 마음씨도 여리다면서 네 책임을 함께 지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아.”

“친가족도 아닌데 이리 챙겨 주신다는 분이 많은 줄 아니? 어차피 자작가에는 장성한 자식도 있으니 후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자제분이 몇 살이셨죠?”

“……으음, 서른다섯이라 들었던 것 같은데.”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이 될 사람은 40살이 많고, 자식이 될 사람은 15살이 더 많다니.

막상 입에 올리니 민망하기는 했는지 주디도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결혼하고서 영지에서 조용히 살기만 하면 될 텐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는지.”

이 또한 걱정에서 나온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지만 주디는 선을 넘는 발언을 해 버렸다.

그러나 저 발언에 무작정 화를 내기에 에블린은 약 때문에 철저히 을의 신분이었다.

에블린은 난감함을 숨기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에블린,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이런 혼처 자리 다시는 안 생긴다?”

더는 상대하기에 지칠 것 같아 황급히 마무리했지만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뒤에서는 똑같은 말이 들려왔다.

주디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라사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파질 것이고, 아이들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돈은 더욱 필요해질 테고, 에블린 혼자서 그들을 모두 감당하지 못할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정말 시집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처음에는 마냥 싫은 제안이었지만 약사의 말을 듣고 보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라사냐와 수도원의 아이들 모두를 챙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지금 에블린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영지에 조용히 처박혀 지낸다면 루이사나 바이아르도 가문에서 알 일도 요원하지 않을까.

‘40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면 수녀님은 뭐라고 하실까.’

기겁하실 거다.

물론 에블린도 질색할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소중한 가족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을 살린다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에블린은 어느새 도착한 산의 초입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푸르고 날씨도 춥지 않고 좋았다.

그래서일까?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제 인생이 더욱 비참해 보이는 것은.

에블린은 비참함을 이기기 위해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보았다. 어서 올라가서 월동 준비를 이어 가야 했다.

언제까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씁쓸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블린은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참아 낸 한숨은 수도원에 도달하자마자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에블린은 수도원 앞에 쓰러져 있는 수상한 사내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침에 그런 꿈을 꾼 탓일까.

어째 오늘따라 일진이 너무 사나운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사람이 수도원 바로 앞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으니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사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으윽.”

깨어났나 싶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그 이후로 사내에게서 움직임은 없었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 신분도 증명되지 않은 수상한 사람을 함부로 수도원에 들일 수는 없는데.

심지어 사내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얇고 추레한 옷차림에 며칠 굶기라도 한 듯 얼굴빛이 좋지 않았으며 체구 또한 굉장히 야위어 있었다.

‘범죄자면 어떻게 하지?’

수도원에는 라사냐와 에블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더더욱 낯선 손님에 주의해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라사냐도 아파 병상에 누워 있는 상황이지 않나. 

결국, 모든 일에 관한 결정과 책임은 에블린이 홀로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큰 부담감이 에블린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상황 속에서 사내의 입에서 다시금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사내의 뒤로 몸을 질질 끈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는 수도원이 있는 쪽을 향해 팔 한쪽을 뻗은 채 기절해 있었다.

수도원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곳까지 온 것을 보여 주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나니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에블린은 결국 한숨을 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수녀님이라면 분명 어려운 사람을 그냥 두고 떠나지는 않으셨을 거야.’

이 사람이 범죄자든 범죄자가 아니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줄 분이니까.

에블린도 라사냐로 인해 구원을 받아 살아남지 않았던가.

‘왜 저를 구했어요? 왜? 어째서?’

배은망덕하게도 차라리 죽게 두질 그랬냐며 화를 내는 어린아이에게 그녀는 그리 말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건 라사냐의 가치관이었으며 그녀의 손길을 받으며 자라 온 에블린이 배운 것이기도 하였다.

에블린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또 다른 가족인 수잔, 리제, 리모, 알렌, 제리까지 그렇게 새로운 삶을 구원받았으니까.

‘어차피 이대로 들어가도 계속 신경 쓰일 거라면 그냥 마음 편히 도와주자.’

이곳은 누구에게든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신성한 수도원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 결정은 분명 옳을 것이다.

“저기요. 깨어 있으세요?”

“으으, 윽.”

몇 번 사내를 불러 보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정신이 들었다면 부축하며 안으로 옮기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에블린 홀로 사내를 옮겨야 했다.

‘어떻게든 해낸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사내를 손님 방으로 옮기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밖에서 문까지 잘 잠가 둬야 한다.

에블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웃으며 힘내기를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 

“어휴, 힘들어.”

길게만 느껴졌던 오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사내를 방으로 옮기고 월동 준비를 하고 나니 바쁘게 하루가 흘러갔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라사냐의 방문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단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선행동 후보고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저녁 식사 때 말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깜빡해 버렸어.’

막상 라사냐의 방문 앞에 서니 몸이 딱딱히 굳어 버렸지만 피할 수만도 없는 법.

하지만 오늘 하루는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에블린 누나, 손님이 왔어!”

수도원에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당황스러운 에블린의 심정과 다르게 2층까지 뛰어 올라와 소식을 가져다준 알렌은 평소보다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있지. 되게 잘생긴 사람이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 목소리도 좋고, 되게 멋져!”

“……그러니?”

“그,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들어오라고 한 건데. 화도 안 내고 괜찮아 보였어.”

에블린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알렌이 목소리를 죽이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알렌이 동생 중 그나마 나이가 많은 아이라고 하지만 고작 10살이다.

그래도 형이라고 나서서 손님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니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에블린은 알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냐.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이잖니. 잘했어.”

그제야 알렌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애들은?”

“조금 전에 다 씻었어! 그리고 손님이 왔으니 모두 방에 들어가 있으라 했어!”

“정말 잘했어. 손님은 내가 만날 테니 알렌도 이만 방으로 올라가자. 그리고 저분 외에도 다른 손님이 있는데 환자니까 그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고 전해 줘. 혹시 병이라도 옮으면 안 되니까.”

“응, 에블린 누나!”

“언제나 고마워, 알렌. 오늘은 손님을 안내해야 하니 여기서 굿나잇 인사를 해야겠네. 좋은 꿈 꾸렴.”

에블린은 알렌을 꼭 안아 주고는 아이의 뺨에 가볍게 굿나잇 키스를 했다.

알렌은 꺄르륵 웃으며 3층으로 올라갔다.

1층 수도원의 문 앞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문의 대부분이 가려질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는 멀리서 보아도 절로 위압감이 넘쳤기에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도둑처럼 보이지는 않네.’

알렌의 말대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 건 아닌지 가만히 서서 안내할 이를 기다리는 모습에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사내가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블린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깜빡이는 조명이 사내의 외모를 비추었다.

과연, 알렌의 말처럼 사내는 아름다웠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그와 대조되는 검은색 머리칼, 언뜻 보기에 조금 사나운 눈매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 약간의 붉은 기가 도는 입술 아래 날카롭게 빚어진 턱선까지.

흔히 말하는 사내다움과는 거리가 먼 외모였으나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에블린은 가만히 서서 사내의 외모를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긴장감에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눈앞의 사내는 과거 에블린이 루이사의 시험장에서 본 적 있는 이였다.

‘체이서 루이사.’

에블린과 다르게 루이사의 시험에 통과하여 정식적으로 루이사의 이름을 받은 게임 속 등장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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