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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화 (1/159)

1화

“에블린, 너는 선택받은 아이란다.”

에블린의 비극은 부모님이라 믿어 왔던 이들의 거짓말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리스리아 제국의 남부 끝자락에 있는 무역 도시인 체인 령.

이 도시를 다스리는 바이아르도 백작의 막내딸인 에블린은 가족들에게 아주 귀한 보물이었고, 그에 걸맞은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어린 시절부터 침상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약한 아이였지만, 몸이 약한 것을 뺀다면 그녀의 어릴 적 인생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평온하고 풍족하였다.

체인 령은 이웃 왕국들과 활발히 무역이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보니 재산이 넘쳐 삶에 부족함이 없었고, 영주 성의 누구나 그녀에게 다정하고 상냥했다.

언제나 오빠와 언니에게 언성을 높이는 부모님도, 부모님을 질색하는 오빠와 언니도 그녀 앞에서는 순하디순한 양처럼 그녀에게 조심스러웠다.

모두가 에블린을 가엾게 여겼고, 또 아주 귀한 아가씨처럼 대했다.

그건 아마도 에블린이 죽을 위기를 넘기고 태어났고, 그 후로 갖은 병을 앓는 등 원체 몸이 약해서리라.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아이가 에블린인가? 주인님께서 비싼 값을 지불한 것 치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군.”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선 이에게 팔리기 직전까지는.

오늘은 곧 있을 에블린의 생일을 맞아 형제들도 두고 부모님과 소풍을 나온 날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풍의 장소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어두운 숲속, 낡은 마차 그리고 처음 보는 수상한 사내와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부모님까지.

“잘 들어라, 에블린. 너는 하늘에게 선택받은 아이란다.”

“네? 아빠, 그게 무슨 소리세요? 우리 소풍 온 것 아니었어요? 여기는 어디예요?”

에블린의 아버지인 바이아르도 백작은 덜덜 떠는 에블린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네 특별한 힘은 우리에게 너무 버겁다. 우린 너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그래도 루이사 공작님께서 너를 거두어 주신다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특별한 힘이라니요?”

“루이사라니! 정말이지, 네가 대귀족이 된다니 믿기지 않는구나. 에블린, 루이사가 되어서도 우리 가문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단다?”

백작 부인마저 거드는 말에 에블린은 믿기지 않은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라는 질문은 꺼낼 필요가 없었다. 

‘루이사’.

그 단어 하나로 에블린의 머릿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전생의 기억이 풀려 버렸으니까.

그건 아마도 에블린이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라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생에 ‘루이사의 정원’이라는 게임을 만들고 해 본 회사의 직원이어서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고.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기라도 한 듯 낯설지 않았던 제국의 이름, 약화된 신권,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능력자의 존재 그리고 그 중축에 있는 거대한 가문인 루이사 공작가.

자신이 왜 팔려 나가는 건가에 대한 의문은 ‘루이사의 정원’에 대한 스토리가 떠오른 후 바로 풀렸다.

이능력자들이 존중받고 그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세상. 

권력을 오랫동안 지켜 나가고 싶었던 루이사의 초대 가주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으로 가문의 후계를 결정하였다.

바로 이능력 각성의 징조를 보이는 어린아이들을 조사하여 찾아 데려와 적당한 수준의 시험을 치르고 후보를 추슬러 가문에 입적을 시키는 것이다.

밖에서 데려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친자식으로 둔갑시키고 가문 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여 가장 뛰어난 자가 루이사 가문의 가주가 된다.

그게 초대 가주의 취지였고, 가문의 번영을 위한 계략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잔인한 조건이 더해졌고, 죄 없는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 ‘루이사의 정원’은 뒤늦게 뛰어난 치유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루이사가 되어, 가문 내에서 펼쳐지는 권력의 다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게임이었다.

‘왜 이제야 떠오른 걸까.’

전생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에블린은 어린 나이라 이해하지 못했던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애정이 섞인 눈으로 에블린을 바라보던 것이 아니었다.

외도와 도박으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던 아버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애인을 침대로 끌어들이며 사치를 일삼던 어머니, 19살에 사업에 실패한 오라비, 고작 17살에 대놓고 횡령한 언니.

그래, 그들은 마치 값비싼 물건을 대하듯 고작 7살의 에블린을 향해 탐욕이 어린 시선과 행동을 보이고는 했다.

아마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뒤늦게 깨달은 진실은 참으로도 비참하였다.

에블린을 데리러 온 정체불명의 사내는 그녀를 보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인생 역전의 기회가 네 눈앞에 주어진 거니까.”

사내는 에블린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부모라는 작자들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이제 정말 그를 따라 시험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네 존재 가치만 증명한다면 저들의 말처럼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에블린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사내는 마차의 문을 열어 주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죽는 거다.”

정적을 머금은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음, 눈빛은 좋구나. 명심하렴, 아이야. 패배자를 기다리는 건 비참한 죽음뿐이다.”

마치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듯 덧붙인 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자, 이제 마차에 타렴. 시험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인적이 드문 숲속, 딸을 팔아 버린 부모, 수상한 사내, 그리고 어디론가 팔려 가는 자신.

그것이 전생을 떠올린 첫날의 기억이었다.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저택.

바닥에 쓰러진 어린아이들이 에블린의 발목을 잡은 채 그녀에게 절망과 분노를 담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아악! 싫어! 도와주세요!’

하지만 원망과 증오는 어느 순간 사그라지면서 서글픈 목소리로 변해 가기 시작했고.

‘왜 너만 살아 있는 거야?’

‘나도 살고 싶어!’

‘살려 줘, 에블린…….’

끝내 체념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려는 순간.

‘넌 살아, 에블린.’

새로운 목소리가 구원처럼 들려오며 그와 동시에 번쩍하고 눈이 떠졌다.

“허억!”

에블린은 이불을 박차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옅은 햇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밖에서는 수도원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지 맑은 웃음소리가 2층에 있는 에블린의 방까지 들려왔다.

평화로웠다.

“꿈이구나.”

에블린은 제 이마에 고인 식은땀을 훔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발견하고는 괜히 이불을 꽉 쥐었다.

참으로 지독한 악몽이었다.

지워 버리고 싶은 어린 날의 기억은 짓궂게도 잊힐 만할 때쯤 이리 꿈에 나와 에블린을 괴롭히고는 했다.

이미 그곳에서 빠져나온 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이다.

“오늘은 몸을 좀 사려야겠네.”

이런 꿈을 꾼 날은 항상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늦장을 부릴 수는 없었다.

산골에 있는 작은 수도원.

수녀 라사냐가 고아가 되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의 소중한 집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올해는 환자도 있다 보니 더더욱 신경 쓸 게 많아졌다.

에블린은 주방으로 향하기 전 2층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고는 노크를 했다.

“수녀님, 저 에블린이에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오렴.”

안에서 들려오는 온화한 목소리에 언제 악몽을 꿨냐는 듯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늦잠을 자 버렸지 뭐예요.”

방 안에는 창백한 안색의 노년 여성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은 애들이 챙겨 줬나 보네요. 식사는 맛있게 드셨어요?”

“그럼. 누가 챙겨 준 건데. 잘 챙겨 먹었지.”

어제보다 더욱 하얗게 바랜 얼굴을 보며 에블린은 씁쓸한 기색을 숨기고는 애써 밝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약은 드셨고요?”

“조금 이따 먹으려 했지.”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해요. 그래야 빨리 나으시죠.”

에블린이 따뜻한 물을 손에 쥐여 주자 라사냐가 조금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약을 삼켰다.

“그러게. 내가 빨리 나아야 너희들이 고생을 덜 텐데. 약값도 부담스러울 테고…….”

라사냐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듯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수녀님. 저 에블린이에요. 제 뜨개질 실력 모르세요? 곧 겨울이라고 제 목도리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약값 치르고도 남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에 에블린은 더욱 밝은 목소리를 내어야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 괜찮으니까요!”

*** 

“에블린, 이번 약값도 외상이니?”

약사의 난감한 목소리에 에블린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라사냐에게 당당하게 말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약값은 밀리기 시작했고, 수도원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래도 곧 겨울이니까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네가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약사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약 봉투를 건네주었다.

정작 겨울이 다가오면 어떻게 될지 에블린은 걱정이 컸다.

‘잠을 좀 줄이면서 작업하면 좀 괜찮아지려나……. 이번 겨울은 꽤 추울 것 같아서 장작도 많이 준비해야 하는데.’

새해가 되면 수도원의 지원비가 들어올 테다. 두 달 정도 남았으니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내야 했다.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걱정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하니 이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약사가 슬그머니 조언을 던졌다.

“차라리 수녀님이 시설이 좋은 다른 수도원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니? 수녀님은 나이도 있으시다 보니 약값도 더 많이 들 텐데.”

이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 라사냐의 병환을 알아차렸을 때 제일 먼저 수도 쪽으로 가라 권유한 것도 에블린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사냐는 그걸 거부했다.

“수녀님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요.”

라사냐가 수도원을 떠나게 되면 수도원을 담당할 새로운 수녀가 와야 한다.

하지만 수도와 멀리 떨어진 산골 깊숙한 곳에 있는 수도원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라사냐가 떠나면 수도원은 철거될 것이다.

그럼 남은 아이들이 살 곳을 잃어버리게 되니 라사냐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이러한 결정을 내려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병환 때문에 장거리 이동도 어려우시고요.”

“하긴. 요새 수도에 이상한 전염병이 유행이라고 하니 차라리 시골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전염병이라니요?”

“나도 건너 들어서 자세히는 몰라. 어휴, 아무튼 너도 이래저래 걱정이 많겠구나.”

“어쩔 수 없죠.”

“그럼 내가 그때 말한 건 조금 생각해 봤니?”

이런, 반갑지 않은 주제가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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