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3)

13

머리와 마음의 시간이 다르게 가는 날이 이어졌다. 할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흘러가는 하루가 그렇게 아쉽고 짧을 수가 없는데, 제가 잠깐 놓아 버린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리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유독 장마가 길었던 여름을 홀로 보내고 돌아온 가을. 마지막 학기는 같이 시간표를 짜지 않은 덕에 현재와 겹치는 수업은 딱 하나가 다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코앞에서 마주친 순간이나, 어쩔 수 없이 맞물리는 시선을 겪은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도 문득문득 상념이 치솟곤 했으니까.

그럴수록 수연은 더 독해졌다. 목표로 한 기업의 설명회에 가고, 며칠 밤을 새워 자소서를 쓰고 수없이 많은 평가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사무치게 보고 싶은 대상을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가끔은 그 언젠가 현재가 말한 불안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했다. 저는 절대 아님을 확신하지만, 만약에 지친 현재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다면?

학교에서 현재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여자들을 가끔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 밤 책을 붙들고 있다 당연히 연락 한 통 없는 핸드폰을 볼 때마다 못 견디게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닌 줄 알면서도, 그랬다.

‘알고 보면 은근히 나보다 더 독하다니까.’

알겠다고는 했지만 정말로 문자 한 통 없을 줄은 몰랐다. 제 선택을 존중해서 그렇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는데 서운한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현재가 없는 일상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날부로 시간이 멈춘 자신과는 다르게 현재는 제가 없는 하루하루가 익숙해졌을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러던 와중 현재와의 약속을 의도치 않게 많이 어겼다. 끼니를 못 챙겨 먹는 것은 일쑤였고 규칙적인 생활 같은 것은 당연히 실천하지 못했다. 가끔은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들었고, 가끔은 못 견디게 보고 싶기도 했다. 피곤함에 찌들어 취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어떤 날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현재에게 달려가고 싶은 미친 생각도 들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자신을 몰아세웠던 것 같다.

*

스물넷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원룸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등바등 다니던 학교도 이제 졸업이었다. 한때는 무사히 다닐 수나 있을까 막막했는데. 이십 대 초반의 자신을 완성했던 크고 작은 추억이 쌓인 공간을 관성적으로 가는 일은 이제 없을 거였다.

[나 이제 짐 다 풀었어ㅠㅠ 죽겠다]

[암튼 나도 이제 독립이다!!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내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는데 현지의 메시지가 온갖 이모티콘과 함께 있었다. 간단히 답을 한 후 다시 두툼한 패딩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모 디자인 회사에 취직한 현지는 다음 달부터 일을 나가기로 되어 있어서,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한 터였다. 자신도 취직이 확정될 때까지는 못 만나겠지만 확 가까워진 거리에 현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찬기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현재와 떨어져 있은 지 반년이나 지났다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원래 같으면 시험 끝나면 같이 가볍게 술도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곤 했는데.

‘배고프네.’

현재를 생각하며 외투를 벗는데 갑자기 허기가 치솟았다. 습관처럼 라면 봉지를 집어 들다 오랜만에 밥을 했다. 작은 상을 펴는데 습관적으로 엉거주춤 앉은 구부정한 자세가 나와 얼른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다시 잘 앉았다.

늘 마음이 쫓기듯 불안하니 어떤 때는 컵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것도 부엌 개수대에서 선 채로 대충 먹기도 했다.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에 유난이라고 할지 몰라도, 제가 절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 없는 수연은 늘 쫓기는 기분에 식사 한번 제대로 맘 편히 한 적이 없었다.

김과 밥, 밑반찬 하나. 소박하다 못해 단출한 끼니를 해치우고 씻고 나오자 잠이 쏟아졌다.

‘조금만 자고 해야지.’

보일러 온기가 조금씩 올라오는 방 안은 따뜻했다.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꾸물꾸물 감기던 눈으로 바라보던 수연은 어느 순간 곤히 잠이 들었다.

단잠을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이 시간에 누가? 그러다 이내 현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혼자 살게 되니 좋으면서도 좀 무섭다고 했던 지난번 통화가 잠결에도 스쳐 지나갔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 침대맡을 휘적였다.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흐린 시야로 현지의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수연아.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오는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

수연은 액정에 뜬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현재.

그러니까 전화가 오고 기다렸다는 듯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어떡하지? 끊을 수도 없는데 딱히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잠이 절로 확 깼다. 벌떡 일어나 앉은 수연의 심장이 빠르게 달음질했다.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어쩔 수 없이 샘솟는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제멋대로 섞인 마음이 어지러웠다.

―수연아……? 듣고 있어?

핸드폰 너머 잠깐 멀어지던 감이 다시 선명해졌다. 현재도 제가 갑자기 받을 줄 몰랐는지 놀란 듯했다.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

잘못 받았어, 덧붙인 말에 현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안, 이러는 거 싫어할 거 아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

―이제 학교에서도 못 보니까. 아쉬워서. 아아…… 이런 말도 하면 안 되는데. 미안. 그치, 근데…….

제가 좋아하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수연은 미묘하게 횡설수설한 현재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술 마셨어?”

―응? 음……아니, 응.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수연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현재가 열없이 웃었다. 이렇게 취한 목소리는 정말로 처음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수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와중에도 현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 술 먹고 전화하고 진짜 없어 보이네, 미안해.

몇 번째 덧붙이는 말은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 외에도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잠도 좀 자면서 하지, 체력이 중요한데 등등 눈 감고도 읊을 수 있는 질문들에, 수연은 그저 다 잘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연락 안 하기로 했잖아. 인제 그만 끊어.”

사실은 계속해서 통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기껏 참았던 시간이 무색해질 것 같았다. 냉정한 목소리에 현재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응. 알아.

“…….”

―그런데 수연아. 진짜 이제 나 더 연락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얼굴 보고 가면 안 될까? 정말, 얼굴만 보고 바로 갈게.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억눌린 목소리에서 수연은 자신만큼, 아니, 더 많이 힘들어했을 그간의 현재를 보았다.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수연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알고 있다. 현재는 약속처럼 정말 얼굴만 보고 돌아갈 남자라는 것을. 하지만 수연은 현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안겨서 한없이 어리광부리고 투정 부릴 것 같았다. 반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달라진 것이 없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소리다. 덜컥 감정에 휩쓸려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이 아무 의미 없어질지도 몰랐다.

“술 취했으면 얼른 자.”

―…….

“맨날 나만 챙기지 말고 너도 밥도 잘 먹고 다니고 건강 잘 챙기고. 난 잘 하고 있으니까.”

알았어, 상당한 시간 후에야 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연은 현재의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싶어 핸드폰을 좀 더 귓가에 가까이 붙였다.

―나도 내 할 일 잘 하면서,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 ……돌아오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어디 멀리 떠난 사람처럼 현재는 그렇게 말했다. 잘 자, 수연은 그 말만 남기고 먼저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더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그 후 현재에게서는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 딱 한 번. 겨울의 끝자락 갑자기 도착한 퀵 배달 문자가 오긴 했다. 의아해 나가 본 현관에는 예쁜 꽃바구니가 있었다. 멈칫하다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갖고 안에 들어온 수연은 색색의 꽃들을 가만히 살펴보다 그 안에 있는 카드를 꺼냈다.

[졸업 축하해, 수연아. 다 잘 될 거야.]

[사랑해.]

오늘이 졸업식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짧은 몇 마디를 몇 번이나 고민했을 현재의 얼굴이 은은한 향기를 타고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던 수연은 꽤 묵직한 꽃바구니를 적당한 곳에 올려 두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게 취업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지에 와 있었다.

*

6개월 후.

적당히 부는 후덥지근한 바람마저도 마냥 산뜻하게만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나고 자란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 안, 수연은 울컥울컥 설레는 마음에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원하던 1순위 기업에 합격 통보를 받은 게 바로 어제였다. 태블릿으로 제 이름을 확인하는데 정말로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 원룸은 중요한 순간에는 제게 기쁜 기억만 남겨 준 것 같다. 대학도, 취업 합격도 여기서 확인했으니까.

몸이 안 좋아 마침 연차를 내고 쉬고 있던 현지도 잠깐 들렀던 차였는데, 둘이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현지는 심한 목감기로 목소리도 잘 안 나오면서 수연보다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역시 차수연. 진짜 난 네가 한 번에 딱 붙을 줄 알았다.”

제 일처럼 좋아해 주는 착한 친구와 함께 그날 저녁을 보냈다. 밖에서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었는데 현지의 몸 상태 때문에 결국 또 배달 음식을 먹긴 했지만. 야무지게 핸드백에 챙겨 온 감기약을 먹고 일찍 잠든 현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 가로등 밑, 핸드폰을 꺼내 들며 새삼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분명 어제와 같은 밤인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처럼 세상이 반짝거렸다. 신호가 채 두 번도 가지 않았는데 통화가 연결되었다.

―수연아.

“현재야.”

서로의 이름을 거의 동시에 불렀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괜히 좀 민망해지기도 했다. 발끝을 땅에 툭툭 차며 수연은 멋쩍게 중얼거렸다. 나, 됐어.

―……잘했어.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너무 잘 됐다, 정말.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 주는 현재의 목소리를 듣는데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

―집이야?

“응, 근데 우리 집에 지금 현지가 와 있어서.”

수연은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내가 내일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저녁쯤 너한테 갈게……. 괜찮아?”

마지막 말을 덧붙인 것은 혹시 현재도 다른 스케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말하면서 낫기 때문이었다. 자신 없는 말투에 조금은 허탈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당연히 괜찮지. 어딘지 말해 주면 내가 데리러 갈 텐데.

“아니, 그냥, 혼자 갔다 오고 싶어서. 암튼 내가 갈게.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응. 올 때쯤 연락해 주면 맞춰서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아니, 집에서 먹을까?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현재와 통화를 이어 가는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후로 한참 더 통화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고 통화를 마무리하자니, 현재가 문득 말했다.

―참. 약속 안 잊었지?

“응?”

―이제 우리 평생 같이 있기로 했잖아.

벌써 잊어버린 거 아니냐며 현재가 예의 그 안쓰러운 목소리를 냈다.

“응. 안 잊어버렸어. 평생 같이 있자.”

농담 겸 진담을 흘려보내는 수연의 말에 현재가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여긴 거의 변한 게 없구나.’

서울에서 직행버스를 타면 두 시간 반 정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터미널에 내려 주위를 괜히 한번 휘휘 살피던 수연은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했다. 엄마의 카페가 있는 곳은 터미널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호수공원이었다. 관광지로도 유명해 타지에서도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익숙하지만, 몇 년 새 괜히 어색해진 거리를 눈에 담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오늘 자신이 들를 곳은 엄마의 카페였다. 엄마가 일을 갔는지 놀러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연은 엄마가 어쨌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단 것을 확신했다. 지난겨울 차단 문자를 정리하다 엄마의 문자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하고 결론적으로 틀어졌고, 서울에 올 이유도 없어졌다는 문자. 그리고 이제 정말 너 귀찮게 안 할 테니 너도 지금처럼 잘 살라는 내용이 엄마답지 않게 구구절절하게 장문으로 와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찾아와서 그럴까? 그냥, 엄마를 한번 보고 싶었다. 물론 갑자기 절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제가 인연을 끊자고 해 놓고 새삼스럽다는 것은 알았다. 솔직히 오늘을 계기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 마음도 그럴 자신도 없으면서 한번은 찾아와야 할 것 같은 감이 들었다. 수연에게도 나름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아, 여기서 세워 주세요.”

택시 안에서 카페의 아기자기한 외관을 확인했을 때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났다. 어쩌면 혹시 하는 생각이 내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적당히 바빠 보이는 내부의 풍경에 괜히 찡한 마음이 들었다. 곧바로 카운터로 향한 수연은 눈앞의 꽤 어려 보이는 직원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사장님 가게 나오셨나요?”

“네? 네, 잠깐 지금 식사 중이세요!”

사실 오기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고 떠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제 말에 눈이 동그래진 직원이 잠시만요, 소리와 함께 카페 바 옆에 딸린 조그마한 문을 노크했다. 수연도 가끔 저기서 엄마와 끼니를 때운 적이 있다. 물론 그건 엄마가 카페 사장이란 타이틀에 심취해 있던 초창기였긴 하지만.

잠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괜히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 만나러 오는데 이런 루트를 겪어야 하다니.

“누가……? 어머, 누구세요?”

그러나 마주한 중년의 여자를 발견한 순간 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수연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여기 사장님이세요?”

“네? 네. 맞아요. 그런데 아가씨는…….”

저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장 앞에서 수연은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 사이 이어진 몇 마디 대화는 금세 끊겼다. 힘없이 카페를 나오는 수연의 등에 안녕히 가시라고 깍듯이 인사하는 앳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수연은 발이 닿는 대로 그냥 걸었다. 초등학교 때도 매년 소풍을 이곳으로 올 정도로 익숙했던 곳인데 이제 보니 나름대로 여기저기 바뀐 게 꽤 보였다. 호수 위 나무다리를 걷던 중,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저만치 뿜어내는 분수를 바라볼 때에는 예전 생각에 괜히 울컥하기도 했다.

날이 좋아 그런지 곳곳에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솜사탕과 풍선을 든 아이들, 다정히 손잡은 어린 연인들, 운동복을 입고 삼삼오오 뭉쳐 바쁘게 걷는 사람들까지. 어딜 가나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 사이에서 수연은 정처 없이 계속 걸었다. 나무다리의 끝까지 걸어가면 호수를 빙 두르고 있는 꽤 긴 산책로가 펼쳐진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빨리 걸어도 한 시간은 걸리는 코스였다.

더운 날씨에 조금 지쳤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걷는 것보다 좋은 게 없었다.

‘여기 지난달에 내가 인수했어요. 전에 사장님? 글쎄,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는데 나한테는 한국 뜬다고 자랑하셨어.’

‘그러고 보니까 되게 닮았다, 혹시 조카인가?’

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도, 할 필요도 없어 수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치솟는 자괴감과 창피함에 서둘러 카페를 나왔던 자신이었다. 그래도 푸르른 숲과 어우러지는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걸으니 정신없이 뛰었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색한 표현이지만, 수연은 자신이 지금껏 내내 엄마를 짝사랑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애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억울한 감정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감정이 치솟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신은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이 낳았다는 그 이유로 자식에게 한없이 사랑만 주는 존재가 부모라는데. 자신은 그것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의심 많고 사람도 잘 못 믿는 제 마지노선은 결국 엄마밖에 없어서,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는 꼭꼭 숨겨 놓은 엄마의 방이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돌아갈 곳이라는 얄팍한 보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수연은 정말로 그 방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는 아무 미련 없이 핸드폰 번호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공허했지만 후련함이 더 컸다.

이젠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 새롭게, 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더는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고, 지나간 어린 시절에 얽매여 있고 싶지 않다. 이젠 자신도 다 컸으니까. 제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던 과거 또한 다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희망차고 좋은 생각만 하며 행복하게, 재밌게 살고 싶었다.

‘이따 버스 타면 현재한테 전화해야겠다.’

생각이 조금씩 정리됨에 따라 분명 비척비척 힘없던 수연의 걸음걸이가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분명 단번에 이루어진 결론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묵힌 마음의 짐이 내딛는 걸음과 함께 하나하나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산책로의 끝자락, 괜한 감상이 든 수연은 마지막으로 한가로운 호수의 풍경을 다시금 눈에 감았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택시를 잡기 위해 공원 초입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던 수연은 때마침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현재였다.

“응, 안 그래도 지금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딘데?

“아, 나 지금…….”

굳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말을 해야 하나, 수연이 조금 망설이는데.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 봐.

“어?”

―아아, 거기 말고. 응…… 나 보여?

설마, 현재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릴 때만 해도 수연은 지금 상황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저만치 보이는 익숙한 차 앞, 이쪽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한 순간.

정말로 심장이 철렁했다.

너무 좋으면 그런 식으로 가슴이 내려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살면서 처음 알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수연을 향해 성큼성큼 현재가 다가왔다. 호수를 등진 채 여름용 얇은 슈트를 빼입고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남자가 근사해 눈이 부셨다.

“수연아.”

그대로 숨이 막히게 끌어안겨졌다. 1년 만에 다시 안기는 품에서는 잊을 수 없던 시원한 향이 났다. 얼떨떨했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그간 억눌러 왔던 마음이 맞닿은 온기를 타고 터져 나온 듯해 오히려 더 말문이 막혔다. 현재도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말없이 수연을 그렇게 끌어안고만 있었다. 남들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 쓰는 수연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와 현재를 제외하고 시간이 멈춘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

하하, 제게서 몸을 떼며 하는 수연의 말에 현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청량하게 부서지는 그림 같은 미소에 또 한 번 심장이 뛰었다.

“우리 냥이는 여전하네. 너무 좋다.”

“……어떻게 알고 왔냐고.”

“친구 찬스 썼지. 솔직히 나도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왜인지 네가 어머니께 갔을 것 같아서, 네 친구한테 연락해서 어머니 하시는 카페 상호만 좀 알려 달라고 부탁했어.”

“현지한테?”

“응. 번호는 예전에 한번 만났을 때 받아 둔 게 있었거든. 아, 물론 연락한 적은 서로 한 번도 없고. 너 잠깐 자리 비웠을 때 내가 그냥…… 보험상 알려 달라고 했던 거라.”

“보험이라니.”

“이럴 때를 대비한 선견지명이라고 좋게 생각해 줘.”

현재가 씩 웃었다. 수연은 말없이 제 앞의 남자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잘 만났어?”

“아니. 엄마 카페 이제 안 하나 봐.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제 말에 급격히 굳어지는 현재의 표정에 수연은 얼른 살을 붙였다. 지금까지 느꼈던 솔직한 제 마음을 짧게 털어놓으니 현재도 그나마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암튼 지금 나 엄청 후련하니까 혹시나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건 그렇고, 혹시 우리 엄마 만나게 될까 봐 이렇게 입고 온 거야?”

평소에도 깔끔하게 잘 입긴 하지만, 딱 봐도 격식을 제대로 차린 것 같은 옷차림을 지적하자 현재가 머쓱하게 웃었다.

“응, 아주 혹시 또 모르잖아.”

“……암튼 준비성 철저해.”

중얼거린 말에 현재가 웃으며 다시 수연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린 수연이 현재를 꾹꾹 밀었다.

“밖이니까 그만해.”

“응.”

“그만하라고. 이따 해.”

“와, 이따 얼마나 안아 주려고 그러지? 설레네.”

“너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응? 그래서 싫어?”

기어이 짧게 입술에 입을 맞춘 현재가 손을 잡아 왔다. 더운데 어디 들어가서 시원한 음료라도 마시자며. 고개를 끄덕인 수연은 현재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1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것만은 아니니까. 다시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도 했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현재와는 방금 몇 시간 전 만났던 사이 같았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나 지금처럼 손을 잡아 오는 아주 사소한 스킨십에도 과하게 가슴이 뛴다는 거였다. 물론 예전에도 설레고 좋았던 것들이지만 공백이 있어서 그런지 그게 몇 배, 몇십 배로 크게 다가온다고 할까.

*

그간 서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카페에 있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이제 한 학기만을 앞둔 현재 역시 기업에 취직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은 모양인데, 거기에서 어머니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수연이 지난번 만났던 것을 현재는 끝까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도재는 여전히 호프집을 잘 운영하고 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올해 내로 청산하고 모은 돈으로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였다. 그래도 제 형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는 현재의 얼굴이 밝아, 수연은 조금 안심했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까지 먹고 나오니 어느새 날이 꽤 어두워져 있었다. 둘은 사람이 별로 오가지 않는 계단 끄트머리에 앉아 호수의 야경을 즐겼다. 여전히 사람이 많긴 해도 서울과 비교하면 확실히 조용하고 평온한 느낌이 있었다.

“수연아.”

“응?”

제 어깨를 끌어안은 현재에게 수연은 조심히 머리를 기대 보았다.

“나한테 다시 와 줘서 고마워.”

“고맙긴…….”

고마워야 할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와도 여전히 그대로인 호수처럼, 현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줄 것을 믿어서 잠시 시간을 두자는 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수연이 현재에게 물었다.

“너는 나 미웠던 적 없어?”

“네가?”

“어. 나 솔직히 엄청 제멋대로잖아. 내 생각만 하고.”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할까.”

현재가 잡고 있던 수연의 손등을 섬세한 손짓으로 살살 쓸었다.

“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정말이야.”

“…….”

“그리고 자꾸 넌 네가 나쁘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나한테는 누구보다 마음 여리고 순수하게만 보여서.”

“와…… 그건 진짜 아니다. 너는 진짜 이럴 때는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니 현재가 낮게 웃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저 때문에 좀 더 넓은 세상으로 갈 기회를 날려 버린 현재에게 미안하면서도 안도했던 자신을 모르니까 저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만약 현재가 꿈을 따라 멀리 가 버린대도 저는 막을 수 없을 거였다. 자존심 세우느라 붙잡지 못하고 혼자 끙끙댔겠지. 현재가 알면 많이 서운해하겠지만 수연은 제가 과연 현재처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왜? 그럼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야 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지.”

수연의 말에 손을 지분대던 현재의 손이 뚝 멈췄다. 내가? 하는 반문에는 수연은 이번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의 반응에 현재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그냥, 우린 되게 잘 맞는 거야.”

“…….”

무슨 소린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그냥 넘겼다. 수연은 말없이 현재에게 기댄 채 눈앞의 야경을 감상했다. 조명을 받아 바뀌는 빛들로 물든 강물과 다리의 풍경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은은하게 집중되는 맛이 있었다.

“우리, 오래 갈 수 있겠지?”

무심코 수연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현재의 진심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수연은 현재의 애정이 계속해서 제게 머무를지에 대해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마음이라는 것은 가변적인 거니까. 너무 좋은데, 이제 저는 현재라는 존재가 없는 인생을 생각만으로도 벌써 힘든데…….

합격이 확정되고 나서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제야 현재가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수연은 1년이란 시간 동안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속 깊은 곳에 현재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현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동시에 제 모습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약한 소리에 현재가 곧바로 반응했다.

“오래 가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가는 거야. 계속.”

“…….”

“그거 알아? 너는 은근히 잘 안 바꿔. 로션도 쓰는 것만 쓰고, 커피도 마시는 것만 마시고. 집는 과자나 간식 같은 것도 크게 바뀌지도 않아.”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애인 자리도 쉽게 안 바꿀 거란 얘기지. 물론 내가 멋대로 바꾸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지만.”

짐짓 심각하게 말하는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현재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맞춰 왔다. 밀려드는 혀가 부드럽게 감싸는 감각에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리 길지 않았던 키스였지만 입술이 떼어졌을 때 수연의 얼굴은 이미 숨길 수 없는 열이 올라 있었다. 그 언젠가 현재와 처음 입을 맞췄던 순간보다도 더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수연아.”

제 흔적이 묻은 입술 위 다정히 키스하며 현재가 속삭였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수연에게 황홀하게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마저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했다.

“응.”

짧게 답하며 수연은 현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더 저도 현재처럼 다정하게 말해 주고 싶은데 어려웠다. 표현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앞으로 많이 해야지. 그런 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저 다정히 마주 안아 주는 품 안에서 수연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있잖아, 현재야.”

“응.”

“사랑해.”

잠시 멈칫하더니 현재가 숨을 가파르게 내쉬었다. 조금 후에야 그는 약간 메인 목소리로 답을 들려주었다.

“나도 많이 사랑해.”

그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생각해 보니 제가 현재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둘은 꽤 오랫동안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물렀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아도 좋았고, 커다란 품에 안겨 바라보는 밤은 모든 장면이 다 아름다웠다.

한때는 현재가 없었으면 진작 끊어졌을 관계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연은 달라지기로 했다.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지속되는 관계는 없으니까.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욕심을 내서 현재를 제 옆에 붙들어 놔야지. 현재는 제가 수연을 붙들어 놓는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수연은 그 반대였다. 이제 자신은 현재가 없으면 안 되었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몰랐지 알아 버린 순간 놓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함에 집착했던 때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감정과 앞일에 휩쓸리는 게 두려워서. 지금은 재회한 기쁨에 살짝 제쳐 놓았지만 수연은 아직 헤쳐 나갈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있다 보면 또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혼란하고 마음고생을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현재와 있다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인 순간, 수연은 처음으로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이제 갈까?”

“어디로?”

“우리 집이지.”

이제 너는 아무 데도 못 간다니까,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하며 현재가 수연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사실 가라고 해도 가기 싫은 사람은 저였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의 차가 있는 곳으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데 상쾌한 밤바람에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졌다.

길지는 않았지만 순탄치도 않았던 지금까지의 일들이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버티고 또 버티고, 가고 또 가다 보니 새로운 길이 있었다.

홀로 걸었던 기나긴 밤은 마침내 끝이 났다.

Short story

근 한 달 만에 집을 찾은 동생은 역시나 집안일에 열심이었다. 모처럼의 휴일에 느지막이 늦잠을 자려다 불시의 습격을 받은 도재는 어물어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현재가 오자마자 곳곳에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추워서 강제로 기상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겨울에도 환기는 꼬박꼬박 시켜야 하는 거 알지?”

“모르겠는데.”

“이제 알면 되겠네. 그건 그렇고, 밖에 함박눈이 내리는데 아직도 홑이불이야? 안 추워?”

진작에 이불 바꾸랬는데 아직도 안 바꿨냐며 한 소리 하더니,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솜이불을 갖고 와서 침대 위에 세팅해 준다.

정리되지 않은 옷들도 바닥에서 구제해 착착 옷걸이에 걸어 주고, 건조기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못했던 빨랫감도 착착 개는 손놀림은 빠르면서도 섬세했다. 분명 현재가 있을 때에는 도재도 집안일을 나름대로 했었는데, 혼자 살다 보니 아예 어느 순간부터는 놓아 버려 집 꼴이 제가 봐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집사 노릇은 할 만하고?”

냉장고 문을 연 현재의 표정이 또 미묘하게 어그러지자, 지레 찔린 도재는 먼저 선방을 날렸다. 역시나 보기 좋게 먹혀들었는지 현재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는 내내 심란하고 한심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더니.

“어, 너무 좋은데?”

“어휴, 이 사랑에 미친 놈 같으니.”

순도 100%의 진심을 담아 욕해 주었는데도 그저 좋다고 허허실실 웃는 얼굴을 보자니 저도 웃음이 나왔다. 아, 이건 물론 어이없을 때 나오는 헛웃음이다. 도재는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부엌을 나섰다.

“씻고 올게. 밥은 나가서 먹자.”

“알았어.”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쉬고 있어. 청소는 나중에 내가 몰아서 할 테니까.”

제가 생각해도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을 지껄이며 욕실로 향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났다. 응, 수연아. 소름 끼칠 정도로 꿀 떨어지는 목소리에 귀가 썩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런 소리는 어떻게 하면 낼 수 있는 건가. 객관적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인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도재는 진절머리를 치며 욕실 문을 꽉 닫았다.

느지막한 점심 식사는 집 앞 파전집에서 했다. 점심때만 파는 국밥이 꽤 맛있어서 혼자서도 자주 오는 편이었다.

“그래서, 가게는 다음 주까지만 나가는 거지?”

“어, 사실 인계는 다 끝났으니까 지금 떠도 되긴 한데 조금만 더 옆에서 봐달라고 해서. 아직 알바 애들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하니까.”

한창 바쁠 토요일에 늦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내 잘 해 오며 분점 이야기까지 나왔던 가게를 정리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 주위에서 다들 그를 말렸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잘 아는 사람에게 몇 달 맡기고 가라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도재는 어느 순간 그렇게 빠져 있던 가게에 완전히 미련이 없어졌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 공간 자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기에서 재회한 여자애 하나 때문에 뭔가 틀어진 것 같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현재의 시선은 핸드폰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실 내내 핸드폰만 들여다본 것은 아니었지만 도재 눈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저, 저…… 도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부러 더 비뚤게 말했다.

“데이트나 하러 가지 왜 와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잡아 둔 줄 알겠다.”

“아, 수연이 지금 친구 만나고 있어서. 이따 데리러 가기로 했어.”

“어련히 알아서 잘 들어갈까. 기사가 따로 없다.”

“그래도. 술 마신다니까 걱정 되잖아.”

네가 술 마실 때만 걱정하냐? 밥 먹을 때도, 카페 갈 때도, 하물며 집 앞 편의점 갈 때도 걱정하지. 도재는 치미는 말을 애써 삼키고 애꿎은 국밥만 푹푹 떠먹었다.

아까 집사라고 했던 것은 현재가 제 여친을 냥이라고 부르며 정말 무슨 새끼고양이 키우듯 애지중지하는 것을 알아서였다. 얼마 전 우연히 현재의 핸드폰을 봤는데, 수연의 뚱한 얼굴에 고양이 귀를 그려 놓은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해 놓기까지 했다. 직접 그걸 꾸미고 있었을 현재를 생각하니 진짜로 팔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거냐고.’

미리 그럴 낌새라도 줬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지. 평생 수도승처럼 살 것처럼 굴다가 어쩌다 여자애 하나한테 단단히 코가 꿰어 가지고. 도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제가 볼 때는 연애가 아니라 아예 모시고 산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갖 수발 다 들어주며 사는 것 같은데, 회사 일이 바빠서 수연이 힘들어한다며 간혹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짓는 것만 봐도 얼마나 떠받들고 살지 눈앞에 선했다. 뭐, 본인이 그걸 행복이라 한다면야……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애인 데리러 갈 때까지 시간 비니까 나랑 놀아 주러 온 거?”

“뭘 또 그렇게 말해. 그냥 너무 얼굴 안 본 지 오래된 것 같아서.”

“…….”

크흠, 현재의 말에 좀 찔렸던 도재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잘 안 받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많이 돌아다니기도 해서 현재가 집에 왔을 때는 도재가 없었던 때도 많았다. 같이 살 때야 밤에라도 얼굴 봤겠지만, 현재가 여친과 동거를 시작하고서는 그런 식으로 제 동생 얼굴 보는 것은 먼 과거의 추억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똑 부러지기 그지없는 차수연은 역시나 취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떡하니 입사해 주셨고, 수연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반쯤 영혼 나가 살며 마음고생 제대로 한 제 동생은 그런 수연과 같은 회사를 들어가겠다며 또 한 번 도재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니, 물론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니 들어가면 좋을 거긴 한데, 그래도……. 그새 국밥 한 그릇 뚝딱 비워 낸 도재는 문득 든 생각에 현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어머니랑은 요새 연락해?”

“……아니. 해도 안 받으셔서.”

“뭐? 언제부터 그랬는데?”

“꽤 됐는데. 그냥 어머니한테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지켜보려고.”

아무튼 차수연한테 하는 거만 빼면 냉정한 놈이었다.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챙기는지 알면서. 도재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찾아가 보기라도 하지 그래. 기다리실지도 모르잖아.”

“가서 뭘 하겠어. 난 어머니를 딱히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

말은 저렇게 해도 생각이 복잡하겠지 싶어 도재 역시 더 살을 붙이진 않았다. 문득 예전 제게 불쑥 전화해 수연의 연락처를 혹시 알고 있냐고 묻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래서 차수연한테 미친놈 소리 들어 가며 잠든 현재의 손으로 핸드폰 지문 인식을 풀었다. 제가 먼저 손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차수연이랑 만났다가, 그걸 또 하필 현재가 딱 봐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고.

아무튼 뭐가 한번 잘못되면 끝까지 잘못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결론만 보자면 어머니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여자애와 미래를 약속하고 한국에 눌러앉기로 한 현재에게 단단히 화가 나 계셨다. 물론 어머니와 연락을 안 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라 그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러했다.

“현재야. 형이 그냥 충고 하나만 하자면, 사귀는 사이에도 가끔 갑을 관계인 애들이 있어.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있는 건 있는 거니까.”

물론 굳이 따지자면 도재 자신은 항상 갑의 위치에 있었다. 경험상 마음을 적게 줄수록 오히려 연애가 쉬웠던 것 같다. 상대의 반응 하나하나를 기민하게 살피며 피곤해질 일도 없고 헤어짐에 아파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그게 핑퐁처럼 왔다 갔다 하는 동등한 관계가 좋은 거지 너처럼 홀랑 모든 걸 다 주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거야.”

솔직히 제가 할 말은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다 퍼주기만 하는 동생이 답답해서 던진 말이었다. 제 말에 눈을 잠시 크게 뜨던 현재가 이내 웃었다. 상당히 여유롭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충고 고맙긴 한데 걱정할 필요 없어. 형. 우린 이미 동등한 관계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속사정은 수연이랑 나만 아는 거잖아, 사실.”

“…….”

“그리고 정말 내가 을이면 어때? 난 수연이가 그냥 날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일 새롭게 기쁜데.”

“하, 그래. 말을 말자.”

저런 대사는 미리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도재는 애인 얘기를 할 때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제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꼴을 그만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한국을 떠야 할 것 같았다.

*

그 후 집에 돌아와 집안일과 잔소리를 조금 더 한 후 현재는 돌아갔다. 사실 간만에 가볍게 한잔하고 싶었는데 대리 기사를 자청해 가는 애한테 술을 권할 수는 없어서 내심 아쉬웠다. 모처럼의 휴일이니 만날 사람은 차고 넘쳤지만 오늘은 어쩐지 누구도 당기지 않았다. 도재는 아쉬운 대로 홀로 맥주 한 캔을 따서 거실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TV조차 틀어놓지 않은 커다란 집은 적막했다.

‘차수연.’

방심하면 이따금 치고 들어오는 대상에게 무의미한 내적 화를 내며 도재는 인상을 썼다.

제가 그 애에게 가졌던 감정은 정확히 뭐였을까?

언젠가 아버지가 그랬다. 긴 여행을 다녀오면 그 끝에는 반드시 깨달음이 있다고.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인 것도 같은데 나름 그럴듯해서, 충동적인 면이 있는 도재는 생각보다 쉽게 결정을 내렸다. 지금 하는 일에 진심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막상 접고 훌쩍 떠나려니 싱숭생숭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환경을 바꾸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린 탓이다.

‘진짜 미쳤었지.’

몇 개월 전이지만 아직도 선명한 꿈의 잔상을 떨치려 도재는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아마도 결심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그 꿈.

그날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 고된 몸을 침대에 눕혔다. 그때만 해도 현재가 수연에 대해서 제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물론 기계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제 동생의 상태를 보아하니 둘이서 꽤 감격스러운 재회를 한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 밤 꿈에 이상형이 나왔다. 어떻게 이상형인 것을 확신했냐면, 앞뒤 생략하고 다짜고짜 몸을 섞고 있는 와중에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좋았다. 맞닿은 살결은 순간 정말 섹스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생하게 부드러웠고, 얼굴은 뿌옇게 흐려져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드러난 몸매는 웬만한 여체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도재에게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홀린 것처럼 박아 대는데 정말 황홀경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관계할 때 다정하게 키스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라 정신없이 성기를 쑤셔 넣으면서도 집착적일 정도로 혀를 얽는 자신이 꿈속에도 상당히 생경하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꿈같이 느껴졌던 행위 후 지친 듯한 여자에게 다시금 입을 맞추려 얼굴을 가까이한 순간.

“……!”

색에 젖어 달아오른 눈가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도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아니, 뭘 본 거지? 에어컨을 틀고 자서 방 안이 서늘한데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정신없이 탐한 여자는 분명…… 수연이었다. 제 동생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여자이기도 했다.

‘미친 새끼네, 이거.’

‘정신 나간 거 아닌가? 그냥 죽자, 죽어.’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 도재는 자신을 신랄하게 욕했다. 아무리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 상황이라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못해 심각했다. 혈기 왕성한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알아서 잘 풀고 다니니 욕구 불만은 절대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꿨단 말인가.

부정하고 싶어도 그 예쁜 얼굴은 수연이 맞았다. 애가 얼굴은 또 짜증 나게 지독히 예뻐서, 도저히 다른 사람과 착각할 수도 없는 이목구비였다. 아래에서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 뒤늦게 전해졌을 때는 자괴감에 그냥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씨발…….’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또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튼 그런 연고로 도재는 모았던 돈을 몽땅 털어 여행을 가는 것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빨리 떠나고 싶어 몸이 다 근질근질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축구 빼고는 하나를 진득이 못 하는 자신이 집과 가게만 왔다 갔다 하면서 꽤 오래 버텼다 싶었다.

나중에라도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또 한 번 황당해하시겠지. 예전부터 다시 공부 시작하라고 하셨는데 별안간 제가 술집을 한다 했을 때 나름 충격 받으셨던 것 같으니까. 아니, 어쩌면 별다른 생각이 없으실지도 모르겠다. 실망도 결국에는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니 말이다.

‘창창한 어린애가 무슨 물장사를 하니? 얼마나 더 엇나가려고 그래.’

언젠가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은 아직도 생생하다. 엇나가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고심 끝에 하는 건데. 솔직히 도재는 공부를 다시 할 자신도 없었고 마땅한 비전도 없으면서 졸업장을 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더 화를 내실 걸 알아서 가만히 있었다.

‘너는 정말 네 아빠와 많이 닮았어, 그냥 아빠 판박이야.’

‘아버지 아들이 아버지 닮는 건 당연하죠.’

‘현재는 안 그렇잖니?’

하긴, 그럴 리도 없지만 만약 현재가 술집 차린다고 했으면 이렇게 전화로 훈계할 게 아니라 당장 한국으로 날아오셨겠지. 원래도 데면데면한 모자 사이는 도재가 기어코 호프집을 오픈하며 더더욱 서먹해졌다. 현재의 일로 걱정을 표할 때가 아니면 어머니는 절대 제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생각을 하니 괜히 또 씁쓸해졌다. 도재는 다 마신 캔을 손에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모 자식이라고 다 상성이 맞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느꼈지만 도재는 가정에 무심하고 냉정한 면이 있는 어머니보다 사람 좋고 다정한 아버지가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했다. 두 분 다 바쁘시긴 했지만 실제로 어머니보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훨씬 더 많으니까.

딱 하나 문제라면 역시 유혹에 너무 잘 넘어간다는 거겠지.

물론 그건 가정이 있는 남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행위였다. 한창 예민할 시기, 현재는 어머니에 동화된 것처럼 그런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도재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아버지가 걱정돼 지방 발령에 따라갈 정도였던 것을 보면 그래도 현재나 어머니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도재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였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부터 어머니와 미묘하게 사이가 벌어졌던 것도 같고…….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기는 하지만.

어딜 가나 적응 잘하는 저였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촌구석에 박혀 있을 때가 제일 암울했던 것 같다. 같이 꿈을 키웠던 친구들이며 코치님과도 멀어지며 여기서는 제대로 축구를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불안감, 사정은 알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어머니와 동생, 이혼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별생각 없이 할 거 다 하고 다니는 것 같은 아버지.

거기서 만난 딱 하나의 흥밋거리는 수연이었다.

중학교 때는 제 옆 반, 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던 동급생 여자애. 또래보다 조숙해 중학생 때부터 이미 고등학생 누나들을 만나고 다닌 도재의 눈에도 수연은 뭔가 달랐다. 처음 봤을 때는 뭐 저렇게 생긴 애가 있냐고까지 생각했으니까.

한번은 무슨 강의를 한다고 강당에 모여 합동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금 떨어진 대각선 옆자리에서 뻔뻔하게 관찰해 보기도 했다. 뭐 저렇게 봐도 봐도 안 질리게 예쁜 애가 있나 하고.

‘어떻게 저렇게 생겼냐.’

쌍꺼풀이 옅게 진 큰 눈도, 갸름하게 잘 빠진 오뚝한 콧대도, 묘하게 위아래 볼륨감이 다른 도톰한 입술도. 솔직히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하나하나씩은 수연보다 예쁜 애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화가 미쳤다는 느낌이랄까?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도재의 눈에 수연은 뭔가 달랐다.

거기에 수연은 나뭇잎만 떨어져도 까르르 웃기 일쑤인 그 나이 때의 여자애들하고는 확실히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작 열여섯에 세상 다 산 듯한 느낌의 애는 많지 않으니까. 얼굴 믿고 나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는 게 좀 신기하기도 했다. 다른 애들 다 놀 때 혼자 책 펴 놓고 앉아 있는 걸 보면 솔직히 좀 아니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거기에 또 성격은 어찌나 까칠한지. 아무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면이 많은 애였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수연은 이미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애로 이미지가 박혀 있었다. 수연이 저 좋다고 하는 남자를 어떤 식으로 내치는지는, 어쩌다 지나가던 길에 보게 되어 도재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수연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살짝 의외였지만 당연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모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수연은 티를 냈다.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서 막상 눈이 마주치면 홱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리는데, 어떤 때는 집에 갈 때도 그 모습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만약 서울에서, 그러니까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수연 같은 애가 있었다면 제가 먼저 사귀자고 했을 거였다. 외모도 취향이고 까칠한 성격도 뭐,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수연이 2차 나가는 술집 사장 딸이라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던지라 걔랑 뭘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 자체는 애초에 접었던 터였다.

도재는 그때만 해도 부모님이 다시 합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애초 두 분이 갈라진 이유를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데, 술집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자신은 여길 곧 뜰 거기도 했고.

암튼 도무지 정을 붙일 곳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환경 자체에서 아무것과도 엮이고 싶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몇 달 잠잠하던 아버지가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과 자주 드나드는 술집이 수연의 어머니가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는 더더욱 날이 섰다. 아버지에게 화도 내 보고, 진지하게 얘기도 해 봤지만 천성이라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결혼을 안 했으면 여러 사람 편한 거 아닌가?’

‘끝까지 책임질 자신 없으면 정말 하면 안 되는 게 결혼이구나.’

덕분에 가정을 이룬다는 것의 무게감을 꽤 어린 시절 깨달았다. 부담 없는 가벼운 관계를 지향하는 지금의 모습을 만든 데는 그 영향도 분명 있을 거였다.

결국 몇 달 내로 정리하고 올라갈 거라는 아버지의 말과는 다르게, 도재는 자그마치 1년 반을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지내다 고등학교까지 진학해야 했다.

그사이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네 가족은 서울에서 오랜만에 재회했다. 꿈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도재는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미웠다. 정확히는 서운했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재는 어머니를 좋아했다. 단지 아버지도 미워하지 못했을 뿐이지.

“미안하다, 도재야.”

“너희 둘만 덜렁 남겨 놓을 생각을 하니까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너 축구도 그만두면 안 되고 현재도 지내던 데가 좋을 테니까……엄마 말이 맞긴 하지. 아무튼 다 내 잘못이다.”

앞으로의 거취를 논의하고 다시 돌아오는 차 안, 제게 미안하다고 연거푸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정상 아버지는 계속 지방에 머무르고, 도재는 곧 학기가 마무리되는 대로 서울로 올라가 현재와 둘만 살게 되었다. 그 부분이 당연히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시는 모양이셨다. 교육 문제도 있고 하니 그렇게 하자며, 대신 여러 지원을 약속한 어머니는 정작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으셨는데.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학교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뜻밖의 고백을 받았다.

“……좋아해.”

평소의 무표정과 딱 떨어지는 차가운 말투는 찾아볼 수 없는,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눈빛. 그때야 걔가 좀 제 또래처럼 보이긴 했다. 솔직히 수연이 먼저 제게 고백을 해 올 줄은 몰랐던 지라 그때는 도재도 꽤 당황했다. 고백한 사람은 수연인데 왜 제 가슴이 미친 듯 뛰는 건지. 찰나 든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도재는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해서 뭐, 사귀자고?”

“어? 아니…… 나는 그냥 말하고 싶어서.”

‘쟨 왜 저렇게 생겨 가지고.’

놀란 수연을 보고 도재는 매번 수연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을 또 했다. 툭툭 말을 뱉는 저를 보며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마저도 존나 예뻤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수연 때문에 여자 외모 취향이 완벽하게 정립된 것도 같다. 취향 한번 소나무라며, 딱 봐도 좀 까칠할 것 같은 애들만 만난다는 평을 듣는 게 도재였다. 그런 주위의 반응에 자신은 시간이 지나고도 순간순간 수연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했으니까. 제 인생의 암흑기라 불릴 수도 있는 그 시기에서 유일하게 차수연만큼은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만약 그때 수연이 아니라 다른 애가 제게 고백했다면 좀 좋게, 에둘러 거절했을 수도 있었을 거였다. 곧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근데 어떡하냐? 난 너 존나 싫은데.”

수연의 앞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약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수연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여자 때문에 이혼당한 아버지랑 동급이 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따지고 보면 저도 수연의 외모 때문에 혹했을 테니까.

순간 저 몰래 퇴근하고 수연의 어머니가 하는 술집에 가는 아버지를 감시하기 위해 그 앞에 죽치고 있던 자신이 생각났다.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제 말에 하얗게 질려 얼어붙은 수연을 두고 성큼성큼 앞서 가는데 기분이 못 견디게 더러웠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예전 일을 회상하던 도재의 얼굴이 후회로 물들었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인데,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사과도 했는데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수연에게 미안했다. 수연을 다시 만났을 때도 사과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를 싫다 못해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현재 옆에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갑자기 배알이 뒤틀렸다.

그래서 현재가 수연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 더 수연에게 그딴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왜인지 현재와 수연이 함께 있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싫었다. 단순히 제 동생을 걱정하고 신경 서서 그런다기보다는…… 자신조차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좀 더 복잡한 이유로.

뭐,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도재는 순간순간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열일곱 수연의 그 수줍은 고백을 받아 주었다면? 아니, 그 전에 제가 먼저 다가가서 잠깐이라도 사귀었다면? 재회했을 때, 수연의 속을 들쑤시는 대신 예전 일을 사과하며 지금부터라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면…….

‘그만하자.’

역시 자신은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이 모양 이 꼴로 삽질을 하니 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재는 현재가 말끔히 정리하고 간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진작 단순하게 털어 냈던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차수연 생각이 왜 이렇게 나는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도재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핸드폰을 켰다. 대충 아무나 불러낼 생각이었다.

솔직히 수연과 제가 정말로 사귀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물론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그냥 저도 모르게 한 상상으로. 하지만 절대 오래가지 못했을 거였다.

‘파국이지, 파국.’

착해빠진 현재야 차수연 성깔 다 받아 주고 살고 있지만 저는 아니다. 강한 것과 강한 것이 만나면 한쪽이 부러져야 결말이 나는 게 아닌가? 아마 서로 박 터지게 싸우다 진작 쫑 났을 거다.

몇 번이나 내린 결론을 다시금 상기하니 그나마 좀 마음이 편했다.

도재는 시간의 힘을 믿었다. 지금은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몇 년간 쏟아져서 이런 거지, 새로운 곳에서 낯선 사람들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면 현재 좀 그만 부려 먹으라고 한 마디 해야지. 돌아가는 상황으로는 아마 결혼식장에서야 만나지 않을까 싶지만.

‘그냥 집에 있자.’

애꿎은 통화 목록만 한참 뒤적거리던 도재는 결국 포기하고 침대에 길게 누웠다. 돌아오면 다시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해야지. 자신은 아직 젊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도재에게 불확실한 미래는 오히려 설렘의 대상이었다.

언제일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돌아올 때쯤이면 저도 그런 사람 한 명쯤 생기기를. 몸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욕구를 채우다가도 불현듯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랑스러운 상대 말이다.

자신답지 않은 괜한 생각인 것은 알았지만 현재가 하도 옆에서 저러고 있으니 저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마음이 드나 보았다.

살면서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는데, 혼자인 집 안에서 도재는 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에필로그

한여름, 그것도 황금 같은 주말에 산을 타는 것은 삶에 찌든 직장인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그게 비록 집 근처 뒷산을 오르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일단 잠을 포기하고 집을 나와야 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힘들어…… 더워…….’

이제 중턱쯤 올라왔는데 벌써 땀이 흐르고 숨이 찼다. 수연은 가쁜 숨을 고르며 은근슬쩍 저만치 벤치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려 했다. 얄팍한 수는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에 의해 곧바로 제지당했다.

“벌써 앉으면 어떡해.”

“아니, 후, 힘들다고.”

“숨을 좀 크게 쉬면서 가 봐. 너무 헐떡거린다.”

“그만큼 힘들단 소리잖아…… 나 어제도 야근한 거 몰라?”

“알아. 그래서 느지막이 나온 거잖아. 원래는 아침 일찍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건 네가 마음대로 한 약속이잖아. 그리고 토요일 아침 10시가 느지막한 거야? 한창 잘 시간이지? 수연은 무해하게 웃으며 제 모자챙을 가볍게 건드리는 현재의 장난을 받아 주지 않고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운동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또 피트니스나 요가 같은 건 싫다고 하니까. 나랑 같이 하면서 제일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잖아. 여기에 좀 익숙해지면 다른 높은 데도 조금씩 도전해 보자.”

“그걸 지금, 말이라고……후우.”

제가 도전할 것은 곧 다가올 인사고과지 이런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가 아니었다. 화를 빽 내고 싶은데 힘들어서 말하기도 귀찮았다. 수연은 대화를 포기하고 그냥 걸었다. 어차피 못 꺾는 고집이라면 차라리 빨리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도 제 체력이 정말 바닥나긴 한 건지 생각보다 더 힘들긴 했다. 아무튼 어떻게든 핑계 내고 나오지 않는 거였는데. 얼마 전 현지가 다 죽어 가는 소리로 회사 부장님이 주말만 되면 등산 파티원을 모집한다 해서 아직도 그런 데가 있냐고 안타까운 소리를 냈는데, 정작 저는 애인이 이러고 있었다.

‘수연아, 일어나 봐. 날이 너무 좋다. 비 올까 봐 걱정했는데.’

‘우리가 그러고 보니까 같이 등산을 한 적은 없잖아. 기대되지 않아?’

기념하는 의미로 오랜만에 직접 쌌다며, 김밥과 과일로 꽉꽉 들어찬 3단 도시락을 자랑스럽게 들이미는 얼굴이 굳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게 문제였다. 그러는 현재도 어제 늦게까지 회식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몇 시간 자지도 않고 일어나 새벽부터 부산했었지…….

그래, 다 제 탓이었다.

사랑하면 닮아 간다고, 수연은 둘 사이 조그마한 분쟁이라도 생길라치면 다 제 탓으로 돌리는 남자의 모습을 어느 순간 저에게서도 발견했다. 이건 모두 다, 그 기대에 반짝이는 눈빛에 부응하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찰나 휘말린 제 잘못이었다.

“너무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꾸준하게.”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전투적으로 걷는 수연의 옆을 따라가며 현재가 페이스 조절하라는 잔소리를 했다.

“고생했어. 여기 물.”

마지막 고비였던 오르막을 넘어가자 드디어 정상이 나왔다. 현재가 건네준 물병을 꿀꺽꿀꺽 비우며 수연은 산 아래 보이는 경관을 잠시 감상했다. 사실 어디 가서 등산했다고는 말 못 할 낮은 산이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니 바람도 솔솔 불고 나름대로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상쾌하지 않아? 원래 쉬는 날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면 머리 아프다고 했잖아.”

“상쾌해. 상쾌한데…… 한번 경험으로 족할 것 같아.”

지금도 눈이 감긴다며, 수연은 진작 깬 잠이 또다시 밀려오는 척을 했다. 제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발연기였는데, 현재는 그럼 도시락만 먹고 얼른 내려가자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이런 데서 도시락 먹은 거 되게 오랜만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던 수연은 한입 크기로 잘 자른 김밥을 들고 아, 소리를 내는 현재에게 못 이긴 척 입을 벌려 주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김밥을 먹는데 밖에서 먹어서 그런가 더 맛이 있었다. 현재랑 가끔 캠핑을 다닐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뭔가 소박한데 더 정감 간다고 해야 하나.

“응, 좋잖아. 나무 냄새 풀 냄새도 맡고. 이런 게 진짜 힐링이지. 아주 나중에 이런 데서 집 짓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

“넌 가끔 보면 나보다 한 스무 살 많은 것 같아.”

생긴 건 차가운 도시의 능력 있는 직장인처럼 생겨서 가끔 저렇게 귀농에 꿈이 있는 사람처럼 얘기를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수연을 보며 현재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저렇게 좋아한다면야.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산도 탈 만했다. 딱 한 번 정도는. 수연은 산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내음을 깊게 들이마셔 보았다.

‘뭐, 나쁘진 않네.’

선들선들한 바람에 땀도 좀 가시고 배도 차니 점점 마음이 허물어졌다. 그래도 기분 좋은 티를 너무 내면 매주 오자고 할지도 모르니 적당히 해야 했다.

“우리 언제 내려가?”

“음, 온 김에 좀만 더 둘러보다 가게.”

김밥을 우물댈 때도, 다 먹은 것을 같이 정리하다가도, 온 김에 한번 해 보자며 몇 개 안 되는 운동기구 위에 올라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스트레칭하는 수연의 사진을 현재는 쉼 없이 찍었다.

“이런 걸 왜 찍어.”

“왜, 귀엽잖아. 우리 냥이가 이렇게 운동하는 모습 언제 또 보겠어.”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며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매일 보면서 뭘 이렇게 찍나 싶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익숙해진 지금은 그러려니 하는 수연이었다.

*

그렇게 때 아닌 등산을 마치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온몸이 노곤해졌다. TV를 보다 소파에서 깜빡 졸았던 수연은 입술과 뺨에 다정한 키스를 뿌리는 현재 덕분에 잠에서 깼다.

“지금 너무 많이 자면 밤에 못 자.”

“응…….”

멍한 정신으로 눈을 끔뻑대던 수연의 시야에 휙휙 넘어가는 CF 화면이 들어왔다. 어……. 새로 나온 슬림한 디자인의 스타일러 광고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수연에 현재가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저거 예쁘다.”

역시나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수연은 기가 막히게 반응했다. 그러네, 대충 고개를 끄덕인 현재가 얼른 덧붙였다.

“우리 집 스타일러 저기 멀쩡히 잘 있잖아, 처음에 여기 들어올 때 샀던 거.”

“……그냥 그렇다는 거야.”

곧바로 여지를 차단하는 말에 수연은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현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도 어째 오늘따라 보는 것마다 수연의 물욕을 자극하는 광고투성이였다. 현재는 미련 없이 곧바로 채널을 돌렸다.

같이 산 지는 4년째, 둘이 합심해 구한 이 오피스텔에서 살게 된 것은 햇수로 3년째였다. 그간 알게 된 바, 수연은 은근히 충동적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연은 명품 가방이나 옷 같은 것에는 딱히 욕심 없으면서 이상하게 가전제품과 가구에 집착했다. 물론 그마저도 현재 눈엔 한없이 귀엽게만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제가 바꿔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막상 사 주려고 하면 수연은 엄청나게 싫어했다. 이런 건 제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맛이라나? 그렇다고 자기 돈으로 사 놓고 후회하는 얼굴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알아서 자제시키는 편이었다.

“왜, 계속 생각나?”

그러면서도 또 신경 쓰여 물으니 수연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니, 나 인제 충동구매 안 한다니까. 열심히 모아서 너랑 잘 살 생각만 해야지. 나중에는 더 좋은 데로 이사도 가고.”

하긴, 지금도 충분히 넘치게 좋지만. 중얼거리는 입술에 현재가 짧게 입을 맞췄다. 수연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너무 좋고 예뻐서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울컥하기도 했다. 처음 사귈 때만 해도 저렇게 순순하게 답해 주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저와의 미래를 그리는 수연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현재는 애써 태연하게 답했다.

“그래. 기특하네.”

“근데 사실 여기만 한 데도 또 없어. 출퇴근도 가깝고 조용하고 편의 시설 다 있고.”

“우리가 열심히 발품 팔았잖아. 여러모로 타이밍도 좋았고.”

맞아, 현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안아 달라는 듯 품에 파고들었다. 수연은 평소 애교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고 일어난 직후는 확실히 나긋해지고 유해지는 면이 있었다. 제게 꼭 들어맞는 사랑스러운 몸을 꼭 끌어안으며 현재는 괜한 감상에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기서 벌써 3년이나 살았네.’

지금 사는 이 공간은 둘이 같이 마련했다. 졸업 직후, 그 전부터 있었던 어머니와의 오랜 갈등 끝에 현재는 혼자 살고 있던 집을 정리했다. 수연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가지고 있던 여유 자금으로 지금의 오피스텔을 구했는데 투자 개념을 어릴 때부터 알려 주셨던 어머니와 돈 굴리는 감각이 있었던 덕분에 학생 신분으로도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재가 호프집을 창업할 때 자금도 사실 현재가 꽤 보탰으니까.

어머니는 앞으로의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는 말로 아들이 만나는 여자가 탐탁지 않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셨으나, 안타깝게도 그 말은 현재에게는 아무 타격도 주지 못했다. 사실 그간도 어머니가 주시는 것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가 제게 어린 시절 함께 있지 못한 미안함을 표시하셨다는 것을 알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

“배 안 고파?”

며칠 전 보다 말았던 최신 영화를 다시 재생하며 현재가 물었다. 둘 다 워낙 바쁘다 보니 요즘은 극장에 간 것도 뜸했다. 별 감흥 없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별로? 아까 김밥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래도 곧 저녁때니 뭐 먹고 싶은 거 말해 보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너 어제 회식 끝나고 뭐 받아 왔던데, 뭐야?”

“응?”

갑작스러운 말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으니 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모른 척해? 하트 상자. 쇼핑백에 담겨 있던 거.”

“아아.”

그제야 생각났다. 현재는 혹시나 수연이 오해할까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거 초콜릿이야. 우리 팀 최유미 씨가 어제 회식 자리에서 팀원들이랑 부장님한테까지 다 다 돌렸더라고, 요즘 취미가 베이킹이라나.”

“진짜?”

“진짜지, 그럼.”

현재가 속한 기획 2팀은 다른 곳보다 비교적 회식에서 자유로운 편이라, 오히려 어쩌다 한번 하면 참석률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도 저 없이 혼자 집에 있을 수연 생각에 정말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간 회식의 끝자락에서 엉겁결에 받아 온 것이었다. 쇼핑백을 흘깃 보던 옆자리 김 대리가 우리 이 사원 것은 특별히 상자도 특별히 하트 모양이네, 하면서 껄껄 웃긴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초콜릿인 줄 몰랐어?”

현재의 말에 수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궁금하면 열어 보지.”

“네 건데 왜 내가 열어 봐.”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우리 사이에.”

픽 웃은 현재가 벌떡 일어나 방 한구석에 대충 던져 놓은 쇼핑백을 갖고 왔다.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야근하고 지쳐 먼저 자고 있던 수연의 모습을 한참 감상하느라 아무렇게나 버려둔 터였다.

“포장도 직접 한 거래?”

“음, 그렇겠지?”

“참 나. 엄청 부지런하네.”

혹시 상자 안에서 손수 쓴 카드라도 나오는 거 아니냐고 귀엽게 볼멘소리를 하던 수연은 초콜릿을 보고 잠시 침묵하다 이내 다시 물었다.

“근데 그 최유미라는 여자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이틀 전에 회의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도, 너한테 말 거는 눈빛이 아주 하트 뿅뿅이던데.”

아아, 현재는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을 늘였다. 그때는 눈도 안 마주치고 쌩하니 지나가더니, 다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불퉁하게 삐져나온 입술에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으며 현재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 웃으면 수연이 정말 토라질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음, 그건 아닌 것 같고. 만약 그렇대도 뭐 어때? 나 결혼할 애인 있는 거 회사 사람들 다 아는데.”

“…….”

“봐, 이렇게 떡하니 반지도 끼고 다니잖아.”

씩 웃은 현재는 수연의 손을 이끌어 약지에 나란히 껴 있는 반지를 굳이 또 한 번 보게 했다. 예전 현재가 한강에서 고백할 때 줬던 건 현재가 끼고 다니고, 입사 후 둘이 같이 가서 새로 맞춘 건 수연이 끼고 다녔다. 연애 상대를 들키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습관이 되어 주말에도 계속 끼고 있다 보니, 둘이 마음먹고 같은 반지를 끼는 것은 휴가를 맞았을 때 정도였다. 말없이 반지를 바라보던 수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짜증 나.”

“응? 왜.”

“왜 너는 회사까지 따라와서 신경 쓰이게 하는 건데? 차라리 안 보이면 내가 괜히 기분 나쁠 일도 없는데. 말이 나와서 하는 거지만 넌 여기 말고도 다른 데도 합격했었잖아. 더 좋은 조건으로.”

“알잖아. 어차피 난 너랑 같은 곳에 취직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혹시 몰라서 몇 군데 더 지원했던 거였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는 얘기에 자신도 또 같은 답을 해 주니, 할 말이 없는지 수연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처음 현재가 자신이 입사한 기업에 지원했다는 말을 했을 때는 수연은 장난인 줄 알았다고 했다. 설마 회사까지 따라올 거냐고 속 편하게 웃기도 했고. 하지만 수연이 입사한 지 정확히 반년 후, 같은 기업도 모자라 같은 부서에 합격한 현재를 보고 수연은 황당해 입을 떡 벌렸다.

‘진짜 이현재 넌…… 여러모로 대단한 것 같아.’

‘왜, 넌 안 좋아?’

‘아니. 이게 좋고 안 좋고의 문제야? 미리 말하는데 난 사내 연애는 절대 못 해.’

‘그건 나도 각오했어. 아무래도 좀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아니, 안 한다고.’

덕분에 캠퍼스 비밀 연애를 넘어 사내에서도 비밀 연애 커플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수연에게 필연적으로 붙을 남자들의 즉각적인 퇴치가 입사의 한 이유였던 현재는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제 뜻을 고집했다간 수연이 정말 스트레스로 이직을 고민할 것 같아 그 건은 넘어가기로 했다.

같은 부서긴 해도 팀이 달라 사무실도 갈라진 것만 제외하고는, 그 외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쨌든 현재는 수연과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직업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더 고되다든가, 딱히 적성에 맞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은 그에게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진짜 안 들킨 게 용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던 수연이 중얼거렸다. 맞아, 현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자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회사 내에서는 거의 말도 안 하고 조심한다 쳐도, 밖에서 데이트할 때는 신경 안 쓰고 마음대로 다니니 혹시라도 직장 내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언제든 하고 있었다.

사실 수연도 숨기고 연애하는 것에 대한 피곤함이 있는지라 내심 걸리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마음이었는데 3년 동안 둘의 사이는 어찌어찌 비밀리에 잘 유지되고 있었다. 아마 수연이 회사에서 현재에게 유독 더 냉정하게 구는 것도 둘의 사이를 딱히 의심하지 않는 이유가 된 듯했다. 아무튼 이건 얼른 치워 버려야지, 현재가 초콜릿 상자를 집어 들며 일어나려고 하자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 가?”

“응? 버리려고.”

“뭐? 왜 버려. 먹을 거를.”

수연의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현재였다. 그야 당연히 수연이 싫어하니까 그런 거였다. 애초에 저만 안 받겠다는 것도 이상해 별생각 없이 받은 거였고. 드물게 질투하는 수연의 모습은 뽀뽀를 백번은 더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로든 수연이 조금이라도 마음 상하는 게 싫었다.

“줘. 내가 다 먹을 테니까.”

대신 넌 하나도 먹지 말고, 수연이 홱 상자를 빼앗아 갔다. 얼떨떨한 표정의 저를 두고 태연히 하나를 꺼내 먹기 시작하는 모습에 결국 현재는 웃어 버렸다.

“근데 요즘엔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더라. 그 미지의 남자랑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그래? 누가?”

혹시 녹았을까 슬쩍 다른 초콜릿의 상태를 확인하며 현재가 되물었다. 수연이 먹을 줄 알았으면 냉장고에 넣어 놓고 잘걸…….

사실 회사 내에서 수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입사 직후부터 유명 인사였다. 뭐,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외모 치장에 전혀 신경 쓸 새 없을 때에도 빛났던 수연인데, 마음과 지갑에 여유가 생기며 제대로 꾸미고 다니기 시작하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과한 것도 아니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하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현재는 요즘 수연과 밖에서 데이트할 때도 가끔 불안증이 도졌다. 제가 그렇게 못난 면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기도 했고……. 특유의 딱 떨어지는 성격과 다년간의 경험으로 무장된 철벽, 애초 결혼할 애인이 있다는 말을 수연이 확실히 못 박아 두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하루하루 불안해서 못 살 거였다.

사실 종종 현재의 귀에도 애인만 없었으면 대시해 보고 싶다는 남자 사원들의 말이 들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현재는 뒷일이고 뭐고 그 애인이 자신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고역이었다. 현재의 그런 마음까지 알 리 없는 수연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여기저기서 다. 그래서 식은 올릴 마음 없고 적당한 때에 혼인 신고만 하고 살기로 합의 봤다고 하니까 다들 놀라더라고. 옆에 오 대리님은 말은 그렇게 해도 부모님들 때문에 안 될 거라고 하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음, 우린 부모님도 다 합의하셨다고 했지.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잘했어.”

옅게 웃은 현재가 그새 초콜릿 하나를 더 까는 수연을 다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오물대며 먹는 게 귀엽다며 볼을 콕콕 찌르기에, 한 마디 할까 하다가 수연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현재의 무릎 위에서 초콜릿을 먹으며 수연은 새삼스럽게 제가 택한 남자가 현재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지 남친처럼 결혼을 조르지도 않고, 스몰 웨딩을 넘어 아예 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제 말에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할 거냐고 물었더니 결혼은 우리 둘이 하는 건데 왜 설득해야 하냐고 오히려 되물어 수연을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저에게는 다행이지만, 현재의 부모님에게는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끔 씁쓸하고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현재를 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현재의 어머니와는 작년부터 간혹 통화를 하긴 했는데 수연도 어머니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통화 시간은 늘 짧았다. 수연과 어머니가 만났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현재도 알게 되었는데, 현재의 말에 의하면 저를 처음 봤을 때 어머니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끌었던 건 어머니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대외적인 가면 같은 거라고. 그럼 지금은 제게는 편한 모습을 보이시는 거라고 나름대로 수연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참, 아까 형 연락 왔거든. 내일 저녁에 잠깐 얼굴 보자고 하는데 괜찮아?”

“나도 같이?”

“음. 같이 봐도 상관없고. 나도 너 같이 나가면 좋지.”

정말 그럴까?

수연은 제 볼을 살살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을 느끼다 고개를 저었다.

“너 혼자 갔다 와. 난 내일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에서만 있을 거야.”

“그냥 나도 가지 말까?”

“아니. 나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딱 잘라 말하자 현재가 너무하다며 우는 시늉을 했다. 겉으로는 저렇게 해도 속은 아마 다를 거였다.

지내 온 시간만큼, 사랑하는 마음만큼 수연은 현재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현재는 더는 수연과 제 형 사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음 안쪽엔 아직 미묘한 거부감과 껄끄러움이 있었다. 적어도 수연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지금 펜션 한창 바쁠 시기 아니야?”

“응, 그런데 형도 답답하니까. 일주일 휴가 받고 잠깐 온 거래.”

그렇구나,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잘나가던 호프집을 접고 훌쩍 여행을 떠난 지 반년 만에 돌아온 이도재는 계속해 제주도에 머물며 아버지 펜션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솔직히 현재도 그렇고 수연도 도재가 얼마나 거기에 머무를까 싶었는데, 아예 거기서 눌러살고 싶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잘 적응해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워낙 변수가 많은 이도재니까 또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어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수연은 이도재의 이름을 들어도 더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제가 새삼스럽게 신기해졌다. 그냥 현재 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주 가끔 만나는 자리면 현재 좀 그만 부려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봐도 콧방귀가 나올 정도로. 도대체 제가 현재를 뭘 부려 먹는다는 건지. 수연은 가끔은 좀 억울했다.

“인제 그만 먹어.”

“알았어.”

무심코 초콜릿 세 개째를 집던 수연의 손을 현재가 지그시 누르며 저지했다. 위에서 깍지를 껴 오며 조금 힘주어 움켜쥔다 싶더니,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쓸었다. 사실 별거 아닌 스킨십인데 느리고 은근한 몸짓에 괜히 기분이 야릇해졌다. 한동안 그렇게 손을 붙들고 있더니, 이윽고 가냘픈 팔을 스치고 간 커다란 손은 이내 수연이 입고 있는 티셔츠 위로 향했다.

속옷을 입지 않아 그대로 전해지는 물컹한 감각을 즐기듯 현재는 적당한 힘으로 가슴을 쥐어 왔다.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한 초반만 해도 씻고 나서도 브래지어를 갖춰 입었는데, 현재가 편한 게 좋지 않느냐고도 하고 사실 수연도 앞으로 계속 같이 있을 건데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 생각해 자연스럽게 안에선 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같이 있는 상대가 현재라도 어색했는데, 생각보다 금세 익숙해지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소파 위에 몸이 눕혀졌다. 품이 헐렁한 티셔츠가 현재에 의해 말아 올려지고, 무방비하게 드러난 굴곡진 살결에 현재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파묻었다. 다시금 느끼지만 현재는 제 가슴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도 물고 빨리다 보니 저도 한층 더 예민해진 느낌이기도 했고……. 귀엽게 솟은 정점을 혀끝으로 애무하던 현재가 슬쩍 눈만 들더니 중얼거렸다.

“너무 야하다.”

“……흐, 뭐가.”

“그냥, 네 모습이.”

정작 그렇게 말하는 제 얼굴이 더 야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차분한 말투와는 다르게 욕정을 숨기지 않는 눈빛은 노골적이었다. 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현재는 확실히 평소 모습과 잠자리에서의 모습이 갭이 큰 편이었다. 평소에는 제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다 받아 주면서 관계할 때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배려가 없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페이스대로 끌고 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그의 방식에 이미 익숙해진 수연에게는 섹스할 때면 조금은 강압적이 되는 남자의 이면이 더 성감을 고조시킬 때도 있었다. 당연히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말이다.

“……하려고?”

“응.”

여전히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현재가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어, 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쩌다 가끔 도재 얘기가 나온 직후에는 현재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꼭 그 자리에서 섹스를 했다. 전에는 때문에 차에서 일을 치른 적도 있었다. 현재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흣, 수연은 가슴을 힘 있게 빠는 입술에 저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그사이 입고 있던 짧은 반바지와 속옷이 현재의 손에 단번에 맥없이 벗겨졌다. 잠깐만, 소리와 함께 몸을 뗀 현재가 바로 앞 테이블 밑 선반에서 콘돔을 꺼내 그새 무섭게 발기한 제 것에 씌웠다. 집 안 곳곳에는 콘돔이 상주했는데, 어차피 이 집에 올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으니 상관없었다. 수연도 사회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인간관계도 넓어졌고, 현재도 여전히 친구들도 잘 만나고 했지만 이 공간에만큼은 아무도 들인 적이 없었다.

“응…… 힘 좀만 풀고.”

수없이 몸을 겹쳤는데도 삽입의 순간은 아직도 조금 몸이 굳었다. 그런 수연이 익숙한 듯 다정하게 입을 맞춘 현재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밀어 넣어 왔다. 으응…… 수연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숨기지 않으며 저를 끌어안은 현재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오늘은 어쩐지 마음껏 응석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제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현재가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수연은 제 위에 쏟아지는 남자의 무게를 기껍게 받아들이며 한동안 그의 아래에서 뜨겁게 흔들렸다.

*

“그러고 보니까 나도 할 말 있는데.”

“응? 뭔데?”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물을 마시던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연거푸 이루어진 정사로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그냥 깔끔한 간장 국수가 먹고 싶다는 수연의 말에 현재가 금세 뚝딱 만들어 주었는데, 술술 들어가 한 그릇을 금세 비웠던 터였다.

“너희 팀 강차영 대리님하고 너, 어제 단둘이 식사했잖아.”

“……너한테 미리 말했던 거잖아.”

“어, 알긴 아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 통해서 또 들으니까 기분은 안 좋더라. 회사 앞에 일식집에서 오붓하게 먹었다며.”

“그래도 도움 받아서 밥 한 끼 사는 건데 구내식당에서 살 순 없잖아.”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괜히 찔리는 마음에 수연은 슬며시 눈앞의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솔직히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자신도 이해는 가지만 기분은 좋지 않을 상황이니까.

지난주 업무 중 수연답지 않은 실수를 해서 꼬박 이틀을 야근했어야 했는데, 예전 수연의 사수기도 했던 강 대리가 제 잘못으로 돌리며 함께 일을 도와주었다. 아무리 수연이라도 감사하면 밥 한번 사라며 담백하게 말하는 강 대리 앞에서 차마 그건 좀, 이란 말을 할 순 없었다. 실제로 강 대리는 그간 업무 얘기 빼고는 수연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편하기도 했고.

‘또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지…….’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한 현재의 얼굴을 보는데 조금 불안해졌다.

“이제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좀 쉬고 있어.”

일단 화제를 빨리 돌려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수연은 이어지는 현재의 말에 다시 주저앉았다.

“나 지금 소원권 쓰고 싶은데.”

“소원권? 굳이 지금?”

“응.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거 아니야?”

“…….”

아무튼 집요하다니까. 수연은 지난 봄 현재 생일 때 소원권이라는 것을 만든 제 손을 원망했다. 공들여 고른 선물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 회사 동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은근 반응 좋다며 만든 쿠폰 같은 개념이었다. 처음에는 뽀뽀하기나 안아 주기 등 주위에서 들은 대로 쿠폰을 만들다가 도저히 오글거려서 중단하고 현재한테 대신 적으라고 했다.

‘이걸 내가 만들라고? 내가 뽑는 거 아니야?’

‘그래, 네가 뽑는 거니까 네가 만들어. 너 좋을 대로.’

현재는 조금 황당해하면서도 수연이 준 수십 장의 포스트잇을 다 채웠다. 딱 세 장만 뽑으라고 했는데, 두 장은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행위였는데 생일 당일 다 썼다. 그리고 한 장이 남아 있었던 터였다.

“야옹.”

수연은 아주 성의 없게 그가 원했던 말을 뱉어 주었다. 현재가 역시나 정색했다.

“그거 아니잖아. 나는 분명히 ‘아주 귀엽게 고양이처럼 야옹 해 주기’라고 썼는데?”

“하……내가 한 번 더 소원권 같은 걸 만들면 진짜 사람도 아니다.”

“이왕 하는 거 진짜 제대로 해 주면 안 돼? 마음속에 평생 간직하게.”

“그렇게 좋으면 진짜 고양이를 키우라고.”

“난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닮은 네가 사랑스러운 거야.”

말이나 못 하면. 수연은 인고의 깊은 한숨을 내뱉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어차피 할 거면 확실하게 해 주자. 다시는 해 달라고 못하게. 수연은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고개를 까딱이고 한껏 귀여운 척을 했다. 야옹, 야옹. 제가 들어도 나름 고양이와 비슷한 소리를 낸 것도 같았다.

“…….”

그러나 그대로 굳는 현재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엄청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아, 정말 이현재……. 시키는 애도 문제였지만 하는 애는 더 문제였다. 수연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됐지?”

“……잠깐만.”

뭐야?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를 향하는 현재를 보고 수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세 돌아온 현재가 수줍게 건넨 무언가에 수연은 순간 험한 말이 나올 뻔했다.

“그만하라고, 진짜.”

“이왕 하는 김에 이거도 한번 써 줘.”

“…….”

눈앞에 들이밀어진 물건에 수연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것도 다 제 탓이라고 돌려야 하나? 지난번 현재 생일을 준비하며 이것저것 인터넷으로 파티 용품을 주문했었다. 굳이 사은품을 챙겨 준 판매자의 정성으로 고양이 귀 머리띠를 얻은 현재였다. 그때도 한번 써 보라고 하기에 코웃음 치고 거실 한구석에 던져 버렸는데. 버린 줄 알았던 그걸 내내 갖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야옹 소리를 낸 시점부터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수연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순순히 머리띠를 써 주었다. 와, 현재가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 와중 사진까지 몇 장 찍히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핸드폰은 또 언제 갖고 온 건지. 치밀함에 치가 다 떨렸다.

“진짜 귀엽다.”

“…….”

“그거 쓰고 같이 설거지하면 안 돼?”

“적당히 해, 이현재.”

“응.”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어휴, 수연은 머리띠를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해, 설거지 같이하자며.”

“어? 어.”

결국 그릇 몇 개 되지도 않는 설거지를 나란히 서서 같이 하게 되었다. 최신 가전제품에 물욕이 많은 수연이지만 설거지만큼은 직접 하는 것을 선호해, 식기 세척기는 아예 이사 들어올 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수연은 현재가 저를 힐끔대며 평소보다 더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느리게 그릇을 헹구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해 주었다. 어쩌겠는가, 취향이 저렇다는데……. 그런 모습조차도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면 제 취향도 알 만했다. 말없이 그릇에 거품을 내는 데에만 집중하는데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하고 다리 마사지해 줄게. 오늘 많이 걸어서 뭉쳤을 수도 있어.”

“그래? 안 그래도 좀 무거운 느낌이긴 해.”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려니 갑자기 현재가 조금 몸을 숙여 수연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서 아무 맥락 없이 자주 하는 행동인데, 지금 괜히 더 달콤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수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잠시 현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20대 초반의 현재와 후반의 현재는 같은 듯하면서도 확실히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디 내놓기 불안하게 잘난 건 여전하지만, 확실히 후자 쪽이 더 안정되고 여유로운 느낌이 있달까.

문득 현재와 함께하는 이 소소한 듯 안락한 일상이 사무치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꽤 오래 제 안에 세워 놨던 기준을 미련 없이 버리고, 현재와 있으며 의도치 않게 겪게 될 수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사는 쪽을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행복하면 됐지 뭐.’

그랬다. 수연은 지금 누가 뭐래도 행복했다. 휴일 아침 반강제로 등산을 다녀오고, 팔자에도 없는 귀여운 척이 사진으로 박제된 데다가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있는데도 행복하기만 했다. 그럼 된 거겠지. 뚫어지게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현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너무 잘생겼어?”

“어휴, 진짜.”

딱히 부정할 수도 없는 농담을 하며 씩 웃는 남자를 어이없다는 듯 보던 수연은 결국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런 수연을 보며 현재도 따라 웃었다. 웃음과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는, 평화롭고 온화한 저녁이었다.

어쩌면 수연이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장면이 그렇게 또 한 번 지나가고 있었다.

- fin. -

AGITOON ♡수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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