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멍해 있던 수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현재에게서 몸을 떼려 했지만 허리를 단단히 휘감는 팔에 저지당했다. 수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야?”
“응.”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에는 헛웃음이 났다. 수연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자신이 없는데.”
“무슨 자신?”
“지금에야 이러겠지만, 우린 오래가지 못할 거야.”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수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를 볼 때마다 도재를, 도재를 볼 때마다 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재도 사람이다.
수연의 체념한 표정에 현재가 이를 악물었다.
“너는 왜 나를 그렇게 쉽게 놓으려고 해?”
“…….”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내가 그걸 증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왜 다 포기해 버리려고 하냐고. 너한테는 내가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어? 아니…… 헤어지자고 하면 애초에 내가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던 거야?”
입술을 달싹이던 수연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로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가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싸늘한 말투와는 다른 애달픈 시선이 눈에 밟혀 그럴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에도 화내지 않던 남자가 헤어지자는 제 말 한마디에 눈이 도는 것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현재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로 상상하지 못해서.
“생각할, 시간을 갖자.”
떠듬떠듬 흘러나온 말에 현재의 눈이 번득였다. 흐리게 반짝이는 그것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워졌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의 수연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재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덜컥 문을 열고 나간 현재가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것을, 수연은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어디 가?”
“…….”
차가 출발했지만 현재는 말이 없었다. 불안해진 수연은 다시 채근했다.
“어디 가냐고.”
“우리 집.”
“뭐?”
“정확히는 내가 이사하는 집이지만……. 네 방도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오늘은 거기서 자고 가. 웬만한 건 다 이미 들어가 있으니까.”
“이현재.”
“…….”
“현재야.”
최대한 차분하게 불러 봤지만 현재는 묵묵부답으로 운전만 했다. 그럴 일도 없지만, 만약 현재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사귀다 이런 상황이 왔으면? 정말 가만히 안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수연은 막무가내로 굴고 있는 남자 앞에서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옆모습이 왜 이렇게 안쓰러운지.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같이 아파 수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나 그냥 근처에 내려 줘.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집에 데려다줘. 말했잖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 수연의 말에 현재가 깊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시간을 가지면 뭐가 달라지는데?”
“뭐?”
“그래, 시간을 준다 쳐. 얼마나? 하루? 이틀? 난 너에 관해서만은 인내심이 제로라 그 이상은 못 기다려 줄 것 같은데.”
당연히 기간까지 생각해 볼 틈이 없었던 수연은 침묵했다. 여전히 앞만 보는 현재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네가 그렇게 혼자 생각할 동안 나는 어떨 것 같아? 정말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네가 어떤 결론을 낼지 마음 졸이고 초조해 돌 게 뻔한 나를 모르냐고…… 수연아.”
떨리는 말끝에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졌다. 어쩔 줄 모르고 불안하게 시선만 돌리던 수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일 먼저 해야 했는데 못 한 말이 있었다.
“나도 솔직히 네가 다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해서…… 당황스럽고, 미안해. 너무 미안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나는 차마 말할 자신이 없었어. 다 알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너무 무서워서.”
말하다 보니 더 염치가 없고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모든 것을 고백하는 대신 이별이라는 회피를 택했던, 마지막까지 나쁘다 못해 한없이 비겁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
그제야 현재가 수연을 한번 흘깃 돌아보았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네가 다 알고도 이렇게 말할 줄 몰랐어.”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알았다면 글쎄. 나도 이렇게까진 안 했겠지.”
다시 앞을 주시한 현재가 무심하게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바로 헤어졌을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어쨌든 고민은 했었을 것 같아. 근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고민 자체를 할 수가 없다고. 너라는 사람을 알고 마음을 다 줘 버려서. 나한테는 선택지가 없어.”
“……언제부터 알았어?”
도무지 감도 오지 않아 조심히 물으니 현재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뭔가 걸리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 애초에 나는 형을 잘 아니까 그런 이유로 너랑 알았던 것을 비밀로 했다는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형은 그렇게 세심한 편이 아니고, 뭣보다 상당히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널 못 알아봤을 리 없거든. 그래도 쌍방일 거라고 생각했지, 너 혼자 형을 좋아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
“결정적이었던 건 지난 주말이었지. 왜, 네 친구 만나고 늦게 데려다줬던 날. 그때 카페 앞에서 너랑 형을 봤어.”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절로 놀란 소리가 났다. 그런 수연을 두고 현재는 태연히 말을 이어 나갔다. 보고 싶어 집 앞으로 가던 길, 카페 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저와 이도재를 봤다고. 불과 몇 발짝 앞에 있었지만 차마 그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고. 안 그래도 질려 있던 수연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었지? 이도재는?’
너무 충격이라 귓가에 순간 이명이 울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애써 기억을 되살리려 했지만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거 하나야.”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수연은 이어지는 현재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게 형이 좋았어? 몇 년 만이잖아. 그냥 스치는 게 끝이 아니라, 내 옆에 있으면서라도 형을 지켜보고 싶었던 마음이 든 거야? 그렇게 애틋했던 마음이었어? 그렇게 너한테 형이…… 내내 큰 의미였냐고.”
느릿하게 떨어지는 말끝에 마음이 무겁게 침몰했다.
현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론 제게 이도재는 큰 의미이긴 했다. 당연히 나쁜 쪽으로. 만약 이도재가 다른 방식으로 저를 거절했다면 이루지 못한 첫사랑으로 아련하게 필터가 끼워졌겠지. 잊는 게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얄궂게도 현재가 오해하는 이 지경까지 흘러갔다.
“이건 대답 안 해도 돼. 어차피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어차피 할 말도 없었던 수연은 침묵했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날 얼빠져 있다 새벽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미칠 것 같았어. 네가 미워야 하는데. 나한테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온 네가 미워야 하는데.”
“…….”
“……형이 밉더라.”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수연의 시선이 방황했다. 그 후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 속, 둘을 태운 차는 말없이 밤길 위를 달렸다.
정말 이사하는 오피스텔에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현재는 익숙한 골목에 차를 세웠다. 수연이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현재도 따라 내렸다.
“이틀 줄게. 그 이상은 안 돼.”
“…….”
“헤어지냐 마냐를 생각하라는 게 아니야. 너도 놀랐을 테니까,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겠지.”
수연은 눈앞에 있는 한없이 미련하다 못해 바보같이 느껴지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순간 상황이 바뀐 게 아닌가 싶었다. 매달려야 하는 사람은 저인데, 정작 현재가 저한테 이러고 있는 모순이라니. 아는데,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지금은 현재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수연은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오는 감정을 애써 누르고 말했다.
“갈게.”
그대로 뒤돌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슬쩍 돌아본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우뚝 선 남자가 있었다. 수연은 부러 더 발걸음을 빨리해 안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더 썰렁하게만 느껴지는 제 방 안에서 멍한 정신으로 외투를 벗는데, 주머니에서 뭔가가 잡혔다.
‘아.’
반짝이는 반지를 보고 있자니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이 북받쳤다. 분명 제 눈치를 살피는 듯 조심스러웠지만, 설렘을 채 숨기지 못하던 그 얼굴이 생각나서.
‘현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광경을 다 보고도, 제가 이도재를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고 오해까지 하고서도 제게 줄 반지를 준비했던 현재의 마음이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만약 수연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현재는 그대로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겠지. 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그렇게 깊고 깊은데, 자신은…….
수연은 반지를 꼭 쥔 채 고개를 떨궜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 내서 엉엉 크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전날 무슨 일이 있건 하루는 또 시작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수연은 터덜터덜 학교로 향했다. 뭔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멍한 머리에 아무것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습관처럼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 슬쩍 주위를 한번 둘러봤으나 현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늘 수연과 비슷하게 오거나 더 일찍 와 앉아 있었는데.
‘왜 안 오지.’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현재가 오지 않자 조금 초조해졌다. 수연이 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던 찰나.
“……!”
마침 딱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괜히 가슴이 쿵쿵 뛰는데 앞문에서 들어오시는 교수님이 보였다. 이내 출석을 부르시는 굵직한 목소리 너머 현재의 대답 소리가 났다.
‘뒤에 앉았구나.’
왜 당연하게 현재가 제 옆에 앉을 거라 생각했을까?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은 저였으면서. 완벽한 착각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화면을 띄워 놓고 열심히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잡생각만 가득한 채 그렇게 허무하게 수업이 끝났다. 수연은 평소보다 미적거리며 책을 챙기고 강의실을 나섰다. 저만치 문 옆에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아.’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현재였다. 딱히 무시한다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냥…… 모르는 사람 얼굴 한번 보고 별생각 없이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어쨌든 제 의사를 존중해서 현재가 이렇게 하는 걸 아는데,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말도 안 돼, 염치없는 생각을 부정하듯 수연은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캠퍼스를 거닐며 수연은 문득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현재와 사귀기 전으로 말이다.
‘헤어지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당연한 사실이 사무쳤다. 사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혼자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정도야, 원래도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저를 지나치는 현재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사실 오가는 반경이 비슷하다 보니 오늘만 해도 두세 번 마주쳤다. 그러나 수연이 멈칫할 새도 없이, 현재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튿날도 상황은 비슷했다. 커다란 강의실 안, 매번 앞자리를 고수하는 것과 다르게 수연은 현재와 저만치 떨어진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재의 앞에는 잘 모르는 얼굴인 여자 두어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름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수연은 의식적으로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노력하며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래도 이것만 들으면 집에 갈 수 있었다. 종일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계속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생각을 해.’
수업이 거의 다 겹치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수연이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저 좋다는데. 이대로 철판 깔고 그냥 만날까, 생각하다가도 과연 그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도돌이표 같다고 생각하며 괜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오빠!
“…….”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현재의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순간 수연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얼른 목소리를 낮추고 뭐라 다시 소곤거리긴 했지만. 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뭐가 저렇게 웃기지?’
제가 아는 현재는 딱히 농담을 잘한다거나 얘기를 재밌게 하는 편은 아닌데. 비뚤어진 생각의 끝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헤어지면 현재가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졸업 전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다정한 현재의 모습을 보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수연은 도망치듯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딱히 현재를 피해서라기보다는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였다. 집에서도 현재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게 뻔하니 차라리 도서관에라도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건물을 빠져나온 수연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찰나.
“저, 선배님.”
“……어?”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수연은 멈칫했다. 윤성이었다. 직전 같은 수업을 들었던지라 아까 수업 시작 전에 인사 정도만 했었는데.
“왜?”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한 얼굴에는 저를 볼 때면 꼭 어색하게 떨리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왜인지 듣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말해도…….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수연은 애써 삼켰다. 예전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현재와 만나며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배웠던 수연이었다. 어차피 거절이라도 길에서 이렇게 하는 건 경우가 아니겠지.
“알았어. 근데 나 도서관 가고 있었는데.”
“아……네! 그럼 그쪽으로 같이 가요.”
제 말 한 마디에 확 펴지는 윤성의 얼굴을 보자니 안 그래도 심란하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수연은 윤성과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남자의 존재는 인지하지 못한 채.
*
“제가……선배님을 많이 좋아해서요. 이제 졸업반이시고, 더 바빠지실 텐데. 그 전에 말이라도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고백조차도 꼭 저처럼 순하게 하는 윤성 위로, 그 언젠가 현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하필 장소도 중앙 도서관 뒤라서 더 그랬다.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가볍게 호감을 표시하는 이들을 내치는 것은 정말 수없이 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윤성에게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꽤 오래 묵혔던 마음이라는 것을 무감한 자신조차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러나 그럴수록 더 깔끔하게 끊어 내야 했다. 그게 상대에게도 예의니까.
“미안해.”
“…….”
제 말에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수연은 다시금 쐐기를 박았다.
“지금처럼 좋은 선후배로 지내자.”
사실 딱히 그렇게 지낸 적도 없긴 하지만. 수연의 말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윤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박자 늦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평온했다.
“네. 선배.”
“…….”
“사실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아까도 말했지만 제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그런데요.”
그런데? 수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윤성을 마주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유?”
“네, 제가 안 되는 이유요.”
수연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지만 윤성의 하얀 얼굴은 진지했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안 되는 건지, 아님 어떤 상황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저는 선배님 마음이 알고 싶어요. 거절당한 마당에 이렇게 하는 거 싫어하실 거 아는데, 제가 그래야 확실히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선배님을…… 상당히 오래전부터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어서……. 죄송해요.”
호기롭게 입을 연 것과 다르게 윤성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말문이 막힌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은 윤성에게 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수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마도 제 생각보다 윤성은 저를 많이 바라봤을 것이다. 제가 눈치챈 것의 두 배, 세 배,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 오며 가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하루가 설레고 어쩌다 대화를 할 때는 두근대는 가슴을 숨기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호감 정도였던 마음이 깊어질수록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겠지. 아주 낮은 가능성에도 혼자 기대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상처받고 접으려고도 노력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은 그 마음을 안다. 황홀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 짝사랑의 특권이다. 특권이라 하기에는 마냥 좋지만은 아닌 게 문제지만.
“나는…….”
남자 친구가 있어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수연이 그 말을 입에 올리려던 차였다. 윤성의 뒤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한 수연의 시선이 흔들렸다.
“수연아.”
언제나처럼 저를 부르며 현재가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제 어깨를 감는 친근한 제스처에 수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학교에서 이런 행동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도 절대 하지 않았는데. 다 알고서 온 거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익숙한 체향과 품에 안정감을 느끼는 자신이 황당했다.
“윤성이도 있었네. 둘이 여기서 뭐 해?”
“잠깐 과제 얘기…….”
“선배님. 혹시.”
짐짓 여유로운 투로 묻는 말에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대충 둘러대려던 수연이 멈칫하던 찰나, 윤성이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
“수연 선배님하고…… 사귀시나 해서요.”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윤성의 말에 현재가 옅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수연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사귀어.”
“…….”
“1년 거의 다 되어 가고. 수연이가 티 내는 걸 싫어해서 비밀로 하고 있긴 해. 그래도 알게 모르게 다들 눈치챘다고 생각하긴 했고, 아, 내 관점에서는 그랬어.”
“……네.”
조그맣게 대답한 윤성이 굳어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막상 수연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뭐가 죄송해, 네가.”
“솔직히 현재 선배님하고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매번 하셨던 말씀처럼 정말 그저 친한 친구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냥 다 죄송해요, 덧붙인 윤성이 현재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이고 그대로 뒤돌았다. 건물을 돌아 사라지는 윤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수연은 황급히 현재에게서 몸을 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비딱하게 받아치는 현재에 잠깐 당황했던 수연은 다시 날 서게 말했다.
“네가 나서지 않아도 내가 얘기하려고 했어. 남자 친구 있다고.”
“그게 나였다는 것도 말하려고 했어?”
“…….”
이번에는 말문이 막혔다. 현재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꼭 너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보다 아직 이틀 안 지났어…… 아!”
갑자기 제 손목을 낚아채는 현재에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손을 꽉 잡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현재의 보폭이 커서 수연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따라가게 되었다.
“뭐 해? 여기 학교야……!”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아귀힘은 더 세졌다. 저만치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보였다. 수연은 표정 없이 걷고 있는 현재를 올려다보며 항의했다.
“왜 이렇게 제멋대론데?”
“어쩔 수 없잖아. 잠시만 틈을 주면 별 같잖은 놈들이 다 꼬이니까.”
“또 뭘 그렇게까지 말해?”
“그럼 어떡해. 눈앞에서 최윤성이랑 너랑 사이좋게 가고 있는 거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 딱 봐도 각 나오는데 보고만 있냐고. 그리고 최윤성, 너랑 나랑 사귀는 거 분명히 알고 있었어.”
“뭐? 어떻게 알아?”
“물론 대놓고 내가 말한 적은 없어. 너랑 약속한 게 있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알아듣게 눈치를 몇 번이나 줬다고. 오늘 딱 고백한 것도 너랑 나랑 깨졌다고 생각했으니까 타이밍을 본 거겠지.”
“그렇게까지 머리 쓰는 애는 아닌 것 같은데.”
“하, 언제부터 그렇게 걔를 잘 알았는데?”
유치하다 못해 한숨 나는 말들의 향연이었다. 그 뒤로 조금 더 말다툼을 했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빠르게 걷다 보니 평소 별로 가 볼 일 없는 공대 뒤편까지 오게 되었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현재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후미진 공간에서 어느 순간 둘의 걸음이 멎었다. 수연은 그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 좀 놔 봐. 어디 안 도망가니까.”
그렇게 서로 투덕대면서도 손은 땀이 날 정도로 꽉 잡고 있었던 게 어이가 없었다. 수연의 말에 현재가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제야 현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수연은 멈칫했다.
“…….”
옅게 흔들리는 시선이 그의 얼굴에 잠시 꽂혔다. 그새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에 가슴께에 뭔가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눈썹 뼈와 높은 콧대가 도드라지고, 굳게 다물린 입술 아래 떨어지는 남자다운 턱은 날카로웠다.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에 묘하게 어두운 감이 더해진 낯은 싸늘하게까지 보였다.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지친 눈빛에, 수연의 마음속엔 스멀스멀 죄책감이 번졌다.
불과 하루 만에 현재가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되진 않았을 거였다. 헤어짐을 고하기 그 전부터, 저와 도재를 봤던 그 순간부터 현재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을 테니까.
“……이틀 안 지났는데.”
수연은 이번에는 정말로 제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뱉는다는 말조차 한없이 자기방어적이고 뻔뻔했다. 수연의 말에 현재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따 열두 시에 다시 올까?”
“…….”
“한 대여섯 시간 남은 거 같은데. 그냥 내 옆에서 생각하면 안 돼?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는데.”
대꾸할 의지를 잃어버린 수연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유독 차게만 느껴지는데.
“도대체 얼굴은 왜 그러는데?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읊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 현재가 내쉬는 한숨에 심장이 딱딱한 돌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뭐라 할지 몰라도 지금 너 내 눈에 하나도 안 예뻐. 정말 별로야. 밥도 좀 잘 챙겨 먹고 다니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왜 안 들어줘. 딱 보니까 잠도 많이 못 잔 것 같고……. 옷은 왜 이렇게 얇게 입었는데? 외투 하나 걸치고 나오는 게 어려워? 또 감기 걸리면 혼자 끙끙 앓을 건가?”
분명 걱정해 주는 건 알겠다. 더구나 부러 더 세게 말하는 것 같은 냉정한 말투에 뭔가 울컥 서러워지는 건 왜일까. 이번에는 공부하느라 못 잔 게 아니라 현재 생각하다가 거의 밤을 새웠던 건데. 물론 그걸 들키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괜히 입술만 꾹꾹 누르는데.
“……!”
그대로 꽉 끌어안겼다. 단벌로 입기에는 아직은 좀 얇은 감이 있는 옷 위에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감각이 새삼스러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종일 고생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확 느껴지는 익숙한 안락함이랄까? 물론 그러기에는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긴 했지만……. 수연은 습관적으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시간? 앞으로는 그 단어 입에 올리지도 마. 생각만으로도 골 울리니까.”
현재가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평소 같지 않게 흥분한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가슴팍이 들썩이는 게 맞닿은 몸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날 그렇게 너 보낸 다음에 아무것도 못 했어.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그런데 너는 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최윤성하고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고. 미칠 노릇이잖아?”
시시덕거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곧바로 들려오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 포기했다. 말해 봤자 현재 속만 터지게 할 듯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너는 이해 안 될 거야. 고작 이틀 가지고. 아니, 누구라도 이해 못 하겠지. 하지만 난 정말 후회했어. 살면서 그렇게 내가 한 행동을 반성했던 때가 없었다고. 이틀이 뭐야, 하루, 반나절? 아니, 아예 그딴 말을 하지 말걸. 그냥 뒷일 생각 안 하고 그날 밤 계속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좀 더 대화하고, 좀 더 너를…….”
말을 채 잇지 못한 현재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수연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의 힘이 순간 느슨해졌다. 서로를 향한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두 남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뜨겁게 키스하고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학교라는 것도 알고, 지금 현재와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상황을 돌이켜 봐도 정말 최초의 출발점이 생각이 나지 않는 행위였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당연한 것을 했다는 느낌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여전히 자신은 현재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제야 주위가 의식된 수연이었으나 다행히도 둘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물론 확실치는 않지만…….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뒤늦게 민망해진 수연은 되는 대로 말을 이었다.
“……하나도 안 예쁘다면서 왜 이렇게 안고 있는데?”
정말 별로라더니, 떨떠름하게 덧붙인 말에 현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난 네가 예뻐서 좋아한 거 아니니까.”
“…….”
“그 말이 그렇게 신경 쓰였어?”
별일이네, 입술에 다시 짧게 키스한 현재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힘없이 웃었다.
“그런 말은 믿으면서 왜 정작 중요한 말은 다 안 믿어 주는데?”
뼈 때리는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가만히 안겨 있던 수연은 조금 힘을 주어 현재에게서 몸을 뗐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순순히 수연을 놓아준 현재가 말했다.
“집에 가자.”
현재가 말하는 집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지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도착한 현재의 집은 아늑했다. 이사할 집 보러 다닐 때 한 번 와 보긴 했지만 그때는 전 사람 짐도 있고 해서 어수선했는데, 완전히 현재 취향으로 바뀐 내부는 아예 다른 공간 같았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 토요일에 입주할 계획이었으나 좀 더 일찍 방이 빠진 덕에 짐을 옮긴 것은 이미 일주일 전이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강에서 만났을 때 현재는 이미 혼자 이사를 다 마친 거였다. 현재의 설명을 들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데 수연은 순간 아찔했다. 이도재가 이사 가기 전에 끝을 보라고 했었는데.
“밥부터 먹자.”
자연스럽게 말한 현재가 손만 씻고 오라며 욕실을 안내해 주었다. 엉겁결에 씻고 나오니, 냉장고를 열어 보던 현재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뭐가 든 게 없네.
“지금 장 보기에는 늦고…… 배달 시켜 먹을까?”
“굳이? 라면 같은 거 없어?”
“컵라면 몇 개 있긴 한데 그걸 먹을 순 없잖아. 그냥 맛있는 거 시켜 먹자.”
“왜 못 먹어? 그냥 먹자.”
수연이 고집을 부려, 결국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컵라면을 먹게 되었다. 그 흔한 김치 하나 없이 정말 라면만. 그런데도 왜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지, 최근 했던 식사 중에 제일 제대로 배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하나 더 끓여 먹어도 돼?”
“……내가 해 줄게.”
그런 자신을 현재가 심란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팠다는 자각은 먹으면서 났다.
“그럼 내내 뭐 먹지도 않고 살았어? 부엌에 요리한 흔적도 없네.”
라면 두 개째를 다 먹어갈 때쯤 휑한 부엌이 다시금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 이도재랑 같이 살 때는 이렇지 않고 생활감이 있었는데. 수연의 말에 현재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무래도 혼자 있으니까 잘 안 해 먹게 되더라고.”
“…….”
그러니까 이도재랑 있지, 그러면 겸사겸사 끼니 챙기게 됐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은 조용히 남은 라면만 마저 먹었다.
그렇게 잘 먹어 놓고 둘은 또 싸웠다. 몇 개 안 되는 그릇의 설거지를 위해 개수대 앞에 선 수연이 왜 그러니까 대책 없이 집을 덜컥 나와서, 라고 말했던 게 화근이었다. 제가 할 테니 내버려 두라며 옆으로 다가온 현재가 눈썹을 씰룩였다.
“대책 없이 나온 건 아니야.”
“그래, 아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이 은연중에 나왔던 건데 현재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수연은 내심 당황했지만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그간 몰랐는데 자신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했던 별 의미 없는 대치가 장소만 바꿔서 또다시 이어졌다. 분명 서로가 밉고 싫어서가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말에 서로 발끈하고 과하게 반응했다. 둘 다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저야 원래 그렇다 쳐도 웬만한 건 받아 주던 현재가 그러지 않으니 실랑이가 길어졌다. 그런 현재를 이해하면서도 서운했던 수연은 더 세게 말하고, 그런 수연에 울컥한 현재가 평소보다 더 감정을 실어 대꾸하고. 거기에 또 수연이 발끈하고…….
악순환의 연속이랄까.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나중에는 서로 다 진이 빠졌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러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아. 다 좋으니까.”
아까보다도 더 어두워진 얼굴로 현재가 중얼거렸다.
“늦었으니까 자고 가. 웬만한 거 다 갖춰 놨으니까 불편한 건 없을 거야. 네 방도 있고.”
“…….”
그럼 나 좀 씻고 올게, 지친 표정으로 현재가 먼저 등을 돌렸다. 잠시 고민하던 수연 역시 이내 힘 빠진 얼굴로 현재가 말한 ‘제 방’으로 향했다.
‘뭐야.’
방 안에 들어갔을 때는 저절로 한숨이 났다. 아까는 정신없어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가장 큰 방은 제 차지였다. 침대와 빌트인된 옷장, 일전 같이 가구를 둘러볼 때 봤던 널찍한 책상과 편하겠다고 제가 한번 앉아 본 기억이 있는 의자를 보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걸 진짜 다 산 거냐고.’
같이 샀던 물품들은 분명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책상 위에 올려진 둥그런 원목 연필꽂이나 칙칙하지 않게 꽃이라도 꽂아 두자며 샀던 화병 같은 것들. 지금은 거기에 사 둔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한 생화가 담겨 있긴 했지만.
분명 과하지 않고 깔끔한 인테리어인데 군데군데 묘하게 제 취향이 묻어 있었다. 책상에 올려져 있는 새 노트북 외에도, 한숨 나오게 하는 것들은 얼핏 둘러봐도 곳곳에 많았다. 방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위하고 있는 대상은 딱 하나였다. 심란함과 부담스러움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수연은 저만치 현재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히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왔을 때는 몸이 다 노곤했다. 욕실에 마침 드라이기도 있기에 머리까지 시간을 들여 다 말리고 왔다. 솔직히 얘기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고 싶었던 것 같다. 제가 쓰는 로션과 제품들을 기가 막히게 똑같이 사 놓은 현재 때문에 씻으면서도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고 매번 다 받는 것 같아서 짜증 났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지만 어쨌든 결론은 같으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기분 좋게 받는 게 낫겠네.’
‘언행 불일치도 이 정도면 병이다, 병.’
그 외에도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할 신랄한 말을 속으로 퍼부으며 수연은 다 마른 머리를 괜히 헝클었다. 미리 챙겨 두었던, 현재의 취향이 분명할 하늘하늘하다 못해 치렁치렁한 잠옷을 입고 나왔다. 그러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길쭉한 인영에 멈칫했다. 한쪽 팔을 머리 뒤에 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보였다.
“다 씻었어?”
“……응.”
“이리 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현재가 말했다. 많이 피곤한지 푹 잠긴 목소리가 나른했다. 잠깐 머뭇대던 수연은 조심히 그 옆에 누웠다. 푹신한 시트 위에 눕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자신도 여러모로 지쳐 있긴 한 모양이었다.
조명을 조절했는지 적당히 어둑해진 방 안, 대책 없이 잠이 솔솔 밀려오는 탓에 눈에 힘을 주고 버티는데.
“수연아.”
“…….”
“난 내가 널 더 좋아하는 걸 알아. 네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나직한 목소리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슬쩍 옆을 보자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현재가 보였다. 수연은 다시 시선을 돌려 높다란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게 앞으로 바뀌지 않을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덧붙이는 말투는 차분했다.
“그냥 나는 네가 이렇게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하거든. 배부른 고민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데, 너를 만나기 전 나는 진심으로 몰두해 본 적이 없었어. 그게 좀 힘들었고. 뭘 해도 재미가 없고 감흥이 없다고 해야 하나?”
서로의 숨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리는 조용한 어둠에 섞인 목소리에 고단했던 마음이 천천히 누그러졌다. 수연은 처음 듣는 그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근데 널 만나고부터는 세상이 달라지더라.”
“…….”
“진짜 그런 감정을 경험했어. 사실 나 말고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거야. 어쩌면 너조차도 평생 몰라줄지도 모르지. 어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겠어? 중요한 건 진심이잖아. 나는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 너와 내 기본 성향이라든지 자라 온 환경, 만나게 된 상황,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우연 같은 부분까지…….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내가 너 아니면 안 되게 됐어. 그리고 나는 너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해.”
나긋하고도 감미로운 고백에 새삼 벅찬 기분이 들었다.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 말에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기까지 했다. 수연은 슬며시 현재의 몸에 기대 보았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현재가 팔을 벌려 그제야 저를 끌어안는데 그 단순한 스킨십에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말랑한 볼에 조심히 입술을 대며 현재가 속삭였다.
“내 말 이해해?”
“……그냥, 적당히.”
솔직한 답에 현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 수연은 내심 안심했다.
“못 믿는 것도 많고 의심도 많은 너한테 당장 확신을 바라지는 않아. 그냥 지켜보기만 해.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허풍이었는지……같이 있다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나는 너한테 뭐 해 주는 게 없는데.”
그 말에는 현재가 내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래. 그럼 이렇게 계속 있으면서 생각해 보면 되겠네. 앞으로 뭘 해 줄지, 나한테.”
“…….”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을 수연은 피하지 않았다. 가볍게 흩뿌리듯 짧은 입맞춤이 연달아 이어졌다. 맞부딪히는 숨결이 지나치게 따뜻하고 달았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살짝 귀를 건드리며 목을 감싸 오는 손에 은근한 힘이 실려 있었다. 입 안으로 파고들어 질척하게 엉겨 오는 혀에 수연의 몸에 힘이 점점 풀렸다. 기껏 입은 새 옷이 맥없이 벗겨지고, 서로의 맨몸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적당히 속도감 있게 이어지는 그 모든 행위가 현실감이 없었다. 정도를 넘은 피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 버린 느낌이었다. 생각을 담당하는 기능이 작동을 멈췄다. 가장 본능적인 감각만으로 행동하는 단순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예민한 허리를 혀로 길게 핥아 올릴 때는 저절로 몸이 뒤틀렸다.
“읏…….”
집요하고 섬세한 애무에 몸이 따뜻한 물 안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침몰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거부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이 아니라 좀 더 진실한 대화로 풀어 나가는 게 게 건설적이고 이성적인 흐름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 아픈 대화 대신 정신없이 섹스하고 싶었다. 아마 현재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책 없는 말이지만, 저와 현재에게는 지금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
잠깐만, 벗은 어깨에 짧게 입을 맞추며 몸을 일으킨 현재가 수납함 맨 밑에서 콘돔을 꺼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이 중얼거렸다.
“준비성 너무 철저한 거 아냐?”
“누구 애인인데, 당연히 철저해야지.”
씩 웃은 현재가 수연의 몸 위를 덮어 왔다. 오랜만의 관계는 고요한 방 안에서 숨 가쁘게 이루어졌다. 서로의 숨소리, 살과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소리, 부드러운 시트에 피부가 쏠리는 소리가 수연이 내뱉는 신음에 섞여 공간을 가득 메웠다. 들끓는 감정을 몸으로 표출하듯, 현재는 평소보다 확실히 거칠게 섹스했다.
원래도 행위 중에는 말이 없는 현재지만 가끔 흥분이 고조되면 정제되지 않은 말을 뱉어 내곤 했는데 그조차도 없었다. 그저 정욕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하고 수연을 마음껏 집어삼킬 뿐이었다.
체위는 휙휙 바뀌었다. 제가 위에서 움직일 때는 하도 엉덩이를 터질 듯 주무르는 현재 때문에 분명 손자국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그를 받아들일 때는 우악스러운 정도가 더했다. 뒤에서 정신없이 쳐올리는 게 너무 빠르고 깊어서 눈앞이 새하얘졌다 까매졌다만 반복했던 것 같다. 잠깐만, 천천히, 그런 말들은 현재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수연이 넋을 놓는 그 와중에도 현재는 변덕스럽게 굴었다. 그렇게 무섭게 허리를 놀리다가도 문득 행위를 멈춘 채 고개만 돌려 뜨겁게 키스해 오기도 하고, 가슴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다가 다시 똑바로 눕힌 채 정신없이 빨기도 했다. 그사이 콘돔이 한 번 더 바뀌었다. 두 번째 관계는 정말로 꿈과 현실이 모호한 경계에서 이루어졌다.
이미 체력적 한계에 달한 몸에 쾌감을 계속해서 끼얹는 것은 달콤한 독과 같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말도 안 되지만 섹스로 벌을 받는다면 이런 걸까 싶었다. 그리고 긴 파정 후 현재가 한 번 더 몸을 일으켰을 때, 수연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 더는 못 해, 제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응, 한 발짝 늦게 대답한 현재가 제가 직전까지 물고 빨던 몸을 끌어안았다.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씻겨 줄게.”
“그냥…… 씻지 말자.”
뭐? 현재가 드물게 놀란 소리를 냈지만 정말로 수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수연아.”
“……부르지 마.”
“응……. 사랑해.”
수연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정말 눈을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이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에는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정신 놓고 휩쓸렸던 수마에서 깬 것은 아마 틈 없이 저를 옭아매고 잠든 현재 탓이 컸던 것 같다. 끈적였던 몸은 산뜻했고, 잠옷 대신 현재가 입고 있던 커다란 티셔츠가 입혀져 있었다. 어차피 잠옷들도 다 제가 사 준 옷인데도 굳이 제 옷을 입히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얜 이렇게 벗고 자니까 안 덥나 보네.’
집에서 잘 때는 밤에 약간 선선했는데 지금은 더울 지경이었다. 수연은 현재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뗐다. 팔이 저릴까 싶어 팔베개를 해 준 팔에서도 슬쩍 벗어나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워낙 피곤했는지라 곧바로 잠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연은 눈앞에 곤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조금만 뒤척여도 깨는 현재인데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엄청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렇게 나란히 잠들 줄 상상도 못했는데…….
연애라는 것은 정말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에게는 조금 많이 어려웠다. 또다시 머리가 아파져 오기 전 수연은 애써 다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둘 다 일찍 눈이 떠졌던지라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수연을 집에 데려다주고 현재는 먼저 학교에 가기로 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드문드문 오가는 차 안의 분위기는 어느 때와 다름없게 평온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건가?’
모처럼 좋아 보이는 현재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현재와 계속 만나려면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수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근데 나 할 말 있는데.”
“뭔데?”
금세 심각한 표정이 된 현재가 옆을 돌아봤다. 할 말, 이란 단어에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도재랑 내가 직접 한 번은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걔가 널 되게 많이 생각하고 아끼잖아. 솔직히 형제 입장에서는 헤어졌으면 하는 것도 이해가 가. 물론 헤어지자고 했던 게 이도재 말 때문에서만은 아니고. 어쨌든.”
이사 갈 때까지 헤어지지 않으면 현재뿐만 아니라 어머니께도 전달하겠다는 말이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달에 오신다는 이도재의 말을 차마 그대로 전할 수는 없어 최대한 뭉뚱그렸다.
“혹시나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말해 두는 거야. 나 너랑 안 헤어질 거니까. 그냥 확실히 해 두고 싶어. 만나는 건 걔도 싫을 거고, 통화로 하기 전에 너한테 미리 얘기하려고.”
수연의 말을 경청하던 현재에게서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마음은 알겠어.”
마음은? 현재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해 준 것도 고맙고.”
“…….”
“하지만 수연이 네가 형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락할 필요는 없어. 이미 다 끝난 얘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형이랑 이미 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했다는 말이야.”
이어지는 현재의 말에 의하면, 카페에서 둘을 봤다는 현재의 말에 이도재는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수연에게 했던 말을 현재에게 그대로 다 전했다고 했다.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있다더니 정말 실행에 옮긴 모양이었다.
“더는 형이 너한테 연락할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럴 필요 없어.”
“이도재랑…… 싸운 거야?”
“음. 너랑 헤어지라는데 좋은 말이 나올 수는 없었겠지.”
“……이도재는 뭐래?”
“뭐라 하겠어. 내 일인데. 내 연애까지 간섭받을 이유는 없잖아?”
고저 없는 말투지만 드물게 날이 서 있었다. 수연은 머뭇대다 중얼거렸다.
“너한테 가족 중요하잖아.”
“중요하지. 언제든 내 옆에 있을 사람들이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딱히 변함은 없고.”
확신을 담은 말투에 그 와중에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든 내 옆에 있을 사람들. 수연이 조용히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려 보는데 어느덧 차는 익숙한 골목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끈 현재가 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넌 아니잖아.”
“…….”
“형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절박해서 그래.”
그렇게 좋았던 형제 사이를 제가 망쳐 버린 것 같았다. 아니, 망쳐 버린 게 사실이겠지. 괴로워진 수연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셋이 얘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 그럴 수 있겠지. 시간이 쌓이면 보통 다 그렇게 되잖아.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내가 안 돼.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정확히 이해하는데, 너랑 형이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게 싫어.”
그러니까…… 덧붙이며 현재가 손을 뻗었다. 수연의 손을 깍지를 껴서 꽉 잡더니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발, 수연아.”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그가 다시금 부탁했다. 수연은 제가 할 일을 남이 해결한다는 느낌이 싫었다. 물론 현재가 남은 아니지만, 어쨌든.
“……알았어.”
그래도 간절하기 그지없는 저 얼굴 앞에서 차마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예전이라면 ‘저렇게까지 한다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말이 지금은 애정으로 알아서 치환되는 것을 보면 저도 참 현재에게 어지간히 빠져 있긴 한 모양이었다. 고마워, 낮게 덧붙인 현재가 팔을 벌려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이도재가 어머니 오신다는 얘기는 안 한 것 같다는 생각은 차에서 내린 후에야 났다.
*
그렇게 하루하루가 갔다. 둘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취업 준비에 바쁜 수연 때문에 잘 만나지 못하는 것을 빼면 나름대로 순조로운 날들이 흘러갔다. 가끔은 현재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머쓱한 얼굴로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 들고 원룸 건물 앞에서 전화를 걸기도 했고 또 가끔은 수연이 먼저 전화해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연은 다시금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현재가 좋았다. 앞뒤 생각 없이 뻔뻔하게 그의 옆에 있을 정도로 여전히 좋아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힘들었다.
그동안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마음이 계속 시끄러웠다. 가끔은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현재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동안에는 다 잊히는 게 신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방심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 현재와 간만에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차수연 학생 번호 맞나요?
차분하다 못해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네. 맞아요.”
대답하며 수연은 직감했다. 앞으로 제게 펼쳐질 현실을.
현재의 어머니와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수연은 처음 가 보는 한식당이었다. 미리 좀 알아본 바로는 저녁 시간에만 잠깐 문을 여는, 꽤 유명한 파인 다이닝인 모양이었다. 언제나처럼 현재와 헤어져 집에 가자마자 수연은 며칠 전부터 고민해 골라 놓은 제일 단정한 옷을 입고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차마 이 자리를 위해 옷을 새로 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면 어차피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실 테니까.
그냥 예의만 차리고, 어머니께서 저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나 보고 싶었다. 그게 현재 모르게 어머니와의 만남을 수락한 이유였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밀릴 것을 감안하고 나와서 일찍 그런가, 생각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가게 앞, 다시금 간판을 확인한 수연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된 어머니의 성함을 말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룸으로 들어가던 순간.
‘아.’
저를 보며 살짝 놀란 듯하다 이내 미소 짓는 어머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정말 현재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수연 학생? 반가워요.”
“네…….”
어머니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뭐 다른 호칭 없나. 고민하던 수연은 그냥 다시금 묵례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오히려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힘드셨죠.”
“힘들긴. 온 김에 가족들도 보고 그런 거죠. 여기가 내 여동생이 하는 곳이라.”
아아…… 수연은 말끝을 늘였다. 어쩐지, 조금 전 저를 안내해 주시던 여사장님이 유독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온 김에 우리 현재 여자 친구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요. 도재랑 다르게 우리 현재는 워낙 그런 쪽에 예전부터 관심이 없어서, 엄마로서 솔직히 너무 궁금하더라고.”
네, 짧게 답하며 수연은 어머니를 다시 한번 살폈다. 솔직히 현재의 어머니라는 정보가 있어서 그렇지 아니었다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모셨다. 세련되고 이지적인 외모에, 아나운서같이 발음이 정확하고 또렷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는 사뭇 경쾌하게까지 들렸다.
수연이 엄청나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식사 자리는 내내 순탄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예뻐서 먹기도 아까운 화전부터 시작해 제철 채소와 해산물을 베이스로 한 정성 가득한 음식들은 하나하나 다 맛있었다. 특제 소스로 맛을 살렸다는 한우 채끝살 요리에서는 어머니가 안 되겠다며 와인을 주문하셨다.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어머니와 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곧 졸업이면 바쁘겠네.”
“아…… 네.”
“뭐, 다른 계획은 있고?”
“그냥 안정된 곳에 얼른 취직하고 싶어요.”
대답하며 수연은 슬쩍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조금 전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냐고 먼저 물어 오셔서 당연히 그러시라고 했던 터였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제가 혼자 그렸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셨다. 조금 차갑고 까칠하실 것 같다고 은연중에 상을 그렸었는데.
“그래, 꼭 원하는 대로 잘되길 나도 바랄게.”
“……감사합니다.”
훈훈한 대화가 다시금 이어졌다. 수연이 식사 내내 괜히 더 눈치를 보고 몸 둘 바 모르게 되는 것도 그 이유였다. 수연의 기준에서 어머니는 지나치게 제게 잘해 주셨다. 비록 속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으레 저를 보면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는 외모 이야기도 한 번도 꺼내지 않으셨다.
그저 현재 어렸을 때 이야기, 지금 나온 음식 이야기, 하다못해 어머니께서 맡으셨던 재판 중 가장 만만치 않았던 이야기 등……. 물론 워낙 말씀을 재밌게 하셔서 전혀 지루하진 않았으나 은근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제가 한 말도 네, 네, 아아, 그러셨군요. 이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이건 또 다른 방식의 테스트인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현재랑 만난 지가 1년 좀 넘었다고 했나?”
“아, 네.”
그래서 디저트를 먹을 때 나온 현재의 이야기에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이제 시작인 건가, 셔벗을 먹던 손이 멈추자 어머니가 얼른 먹으라는 눈짓을 하셨다.
“몰랐는데, 우리 현재가 좀 철없는 면이 있더라고.”
“…….”
“얼마 전 통화했는데 혼자 수연 학생이랑 이런저런 미래를 생각하는 걸 말하는데…… 물론 귀여웠지. 수연이가 그만큼 멋지고 좋은 애니까 우리 현재도 그러려니 싶어서 더 궁금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설핏 웃으셨다. 아들을 향한 애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잔잔한 미소였다.
“혹시 현재도 수연이 부모님 만나 뵌 적이 있나 하고. 갑자기 궁금해지네.”
“그런 적은 없어요.”
“하긴 부모님 얘기를 한 적은 없더라고. 걔가.”
수연의 눈빛이 잠시 방황했다. 대수롭지 않게 하신 말인 듯했으나 수연은 어머니가 제게 궁금증을 표시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제 감이 틀렸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수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제가 부모님이 안 계셔서요.”
“…….”
“아버지는 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하고는 사이가 좋지 못해서 고등학교 이후로 연락하지 않고 살아요.”
지금까지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랬구나, 잠시 후 입을 연 어머니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지금 서울에 계시고?”
“아뇨. 지방에요.”
“혹시 어떤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
“지금은 작은 카페 하고 계세요.”
“전부터 하시던 업인가?”
“아뇨…… 전엔 그냥, 장사하셨어요.”
나중에 실망하시기 전에 차라리 다 솔직하게 말하자 싶었는데, 차마 술집을 하셨다는 것까지는 말하기 싫었다. 다 까발린 마당에 같잖은 자존심이었다.
“응, 내가 너무 캐물었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수연 학생.”
“아니에요.”
그사이 아까 어머니가 친동생이라고 말씀하셨던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드리는데, 딱 들어오는데 너무 예뻐서 놀랐다며 말도 예쁘게 한다는 등 이런 저런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그렇게 사장님이 나가시고 어머니가 마지막 잔이라며 건배를 제안하셨다. 이 자리도 끝이구나,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수연이 다 비운 잔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내 동생은 보다시피 여기에서 너무 잘 살아요. 자기 적성과 취미를 잘 살려서 풀린 좋은 케이스죠. 사실 더 넓은 세상으로 갔으면 하는 가족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지만 본인이 만족하면 된 거니까.”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제게 다시 말을 높여 주고 계셨다. 처음 만나서 인사했을 때처럼.
“하긴, 나도 내 동생처럼 여기서 이렇게 잘 살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는 왜, 무서운 게 없잖아요? 자기 뜻대로 세상이 다 돌아갈 것 같지. 지금 우리 애들처럼.”
“…….”
“그때는 우리 부모님 말씀이 그렇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결국 내 행복은 내가 만드는 건데 왜 본질을 보지 못하고 내 커리어나 현실적인 문제만 들먹이시는 건지. 결국 결론을 보면 내가 틀렸던 건데, 그걸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과 감정 낭비가 필요했어요.”
말을 멈춘 어머니가 옅은 한숨을 흘려보내는 것을 수연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첫 만남에서 개인적인 얘기 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됐네. 재미없는 얘기 들어줘서 고맙고, 오늘 시간 내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요.”
그게 끝이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우아하셨고 상냥하셨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굳이 본인의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시는 친절까지 베푸시고 말이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는데, 이 밤에 딱히 다른 곳을 들른다고 하는 것도 이상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익숙한 건물 앞에 도착한 순간.
“……여기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째 드나드는 건물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작고 허름하게만 보이는지. 순간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현재가 처음 집에 데려다줬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꾸벅 하고 어머니가 가시는 것을 배웅했다.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는데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재와 어머니가 닮은 것은 비단 외모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더할 나위 없이 품위 있는 방식으로 저를 거절하셨다는 것을, 수연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성큼 다가온 여름이 느껴지는 주말. 오랜만에 현재의 집에서 점심을 해 먹었다. 지나치게 잘 꾸며져 있는 큰 방은 볼 때마다 아직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현재와 함께 장을 보는 것만큼은 정말로 즐거웠다. 같이 요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평소보다 말이 많은 저를 보며 현재는 내내 행복하게 웃었고 자잘한 스킨십도 많이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제가 어렵사리 꺼낸 말에 충격받은 표정이 된 남자를 보자니, 셀 수 없이 했던 다짐이 순간적으로 무색해질 뻔했다.
“말 그대로야. 취직할 때까지만 잠시 만나지 말자고. 헤어지자는 것과는 다른 얘기야.”
“만나지 않는 게 헤어진다는 것과 뭐가 다르지? 학교에서도 아는 척도 하지 말자며. 문자도 전화도 아예 금지고.”
“정 와닿지 않으면 그냥 유학 갔다고 생각해. 내년 상반기 지원으로 하면 합격자 발표까지 한 1년 남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할 테니까…….”
“합격하지 못하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만큼 기간이 늘어나겠지. 나는 모아 둔 돈도 없고 알바 하면서 취업 준비해야 할 테니까 더 늘어날지도 모르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지금 한 번씩 만나는 것도 그렇게 방해야? 혹시 또…….”
울컥 말을 쏟아붓던 현재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하지만 수연은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알 것 같았다. 분명 이도재를 떠올렸겠지. 억울함과 착잡함이 섞인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현재의 마음을 수연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 역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현재와 저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막말로 현재가 취업에 몇 번 실패한다 해도 그의 인생은 여태까지처럼 별 탈 없이 흘러가겠지만, 저는 달랐다. 지난번 어머니를 만나고 와서 더욱더 확실히 깨달은 현실이었다.
물론 어딜 봐도 평범하지 못한 가정 환경이나, 어머니께 오늘 입고 오신 옷이 너무 잘 어울리신다는 칭찬조차 잘 못 하는 싹싹하지 못한 성격 같은 것들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자신은 뭐라도 있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 기준에서는 딱히 차지 않는 타이틀이라 해도. 어찌 보면 중대한 자존심 문제기도 했다. 수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랑 너는 달라, 현재야.”
“…….”
“나는 연애에 모든 걸 쏟을 수 없어. 아니, 나는 원래 두 가지를 동시에 잘 못 해. 만약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나는 이렇게 선택했을 거야.”
수연은 진심으로 제 마음을 현재가 알아줬으면 했다.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하는 저를.
“그리고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이도재가 좋아서 너한테 다가갔던 게 아니었어. 지금 와서 굳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확실히 한 번은 말하고 넘어가고 싶었어.”
제 말에 세차게 흔들리는 남자와 눈을 마주하며 수연은 담담히 그간의 일을 털어 놓았다. 그녀 역시 또 한 번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화제였으나, 혹시나 제가 이도재한테 미련이 남았다 생각한 현재가 혼자 상처받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나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나도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근데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래, 현재야.”
현재와 연애하며 충분히 취업 준비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솔직히 말만 하면 현재는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게 어떤 형태로든 안겨 줄 애인이니까. 하지만 수연은 현재를 아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결과가 좋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 못난 자신은 분명 실패 원인을 다른 지점에서 찾을 게 뻔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정말로 현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오래오래 만나고 싶어서 제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정말 너는…….”
꽤 오래 이어진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그러고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현재가 한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라 말해도 네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응.”
“그래. 너는 그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내가 받아 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조소하는 현재의 얼굴에 우울한 음영이 졌다.
“지금 나한테 선택권은 없잖아. 내가 싫다고 하면 우린 이대로 헤어지는 거잖아.”
“…….”
“하…….”
입을 꾹 다문 수연을 보며 현재가 다시금 한숨을 토해 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남자 앞에서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란히 침대 위에 눕기 전까지 둘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무슨 할 말이 서로 그렇게 많았는지 정말 쉬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진지한 부분도 있었고, 하등 의미 없는 티격태격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은연중에 아쉬운 마음을 서로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만큼은 수연은 현재가 팔베개를 해 줘도 가만히 있었다. 현재도 그걸 느꼈는지 힘없이 웃으며 오늘은 가만히 있네, 라는 말을 했다.
“……그래, 알겠어.”
수연은 한숨같이 부서지는 현재의 말에 집중하며 그의 품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꼭꼭 숨길 생각이었다. 보고 있으면 너무 슬퍼질 것 같으니까.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좋아. 기다릴게. 네 말대로 네가 먼저 나에게 연락할 때까지.”
“…….”
“그렇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어둠 속에 숨은 수연과 기어이 시선을 맞춘 현재가 분명하게 말했다.
“너도 그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약속해.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난 어떤 식으로든 널 놓지 않을 거야. 그때만큼은 네가 무슨 핑계를 대건, 어떤 이유가 있건 상관없어.”
“……알았어.”
“그래. 약속한 거야.”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무게감 있는 약속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꼭 지킨다는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그날 밤 둘 중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왜 안 자느냐며 저를 가만히 끌어안는 품 안에서 수연은 염치없이도 조금 눈물이 났다. 그런 저를 들키지 않으려, 불편해서 못 자겠다며 홱 등을 돌리고 벽만 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선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