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

11

1월 중순은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내내 내리던 눈도 그치고 간만에 하늘은 맑았지만, 한파주의보가 내린 낮의 바람은 차디찼다.

집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온 현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학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차 적응하느라 고생했는데 오늘은 확실히 몸이 가뿐했다.

‘엄마 따라 여기서 대학 다녔으면 얼마나 좋니.’

학기가 마무리되자마자 출국해 지난주까지 어머니가 계신 뉴욕에 머물렀던 현재였다. 평소 감정을 내비치는 타입이 아닌 어머니지만, 이번에는 드물게 상당한 아쉬움을 표했다. 자신은 늘 그랬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암튼, 군대도 잘 다녀오고. 어디 가서나 건강한 게 최고야.’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품에 슬쩍 안아 주었다. 무뚝뚝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 표현이었다. 물론 멋쩍음을 숨기지 못하고 금방 몸을 떼기는 했지만. 다음 달에 입대하는 아들이 내심 걱정되는 모양이셨다.

‘남들 다 가는 건데요, 뭐. 걱정 마세요.’

돌아오는 답 역시 딱히 살가운 투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것만으로 만족하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상성이 잘 맞는 모자였다.

아직 덜 녹은 눈들과 얼음이 곳곳에 널린 거리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현재에게 머물렀다. 손에 캡을 든 채 운동복에 패딩을 걸친, 편하기 그지없는 차림이었지만 워낙 체형 좋고 수려한 얼굴이었던 탓이다. 늘 있는 일이기에 그는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형은 일어났으려나.’

찌뿌둥한 기분이 싫어 땀이 흠뻑 날 정도로 웨이트를 했던지라 곧바로 샤워를 하고 나왔던 그였다. 살짝 덜 마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현재는 문득 제 형을 생각했다.

그렇게 같이 가자고 말했는데 도재는 이번에도 어머니를 보러 가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그래도 드문드문 연락하는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형은 어머니와 확실히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짚이는 것을 꼽자면…… 역시 그때였을까.

축구 선수를 목표로 어릴 때부터 운동에만 매진하던 제 형은 열여덟 봄에 무릎 전방 십자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곧바로 재건 수술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혹독한 재활 훈련도 이겨 내고 기필코 다시 복귀하려던 도재의 노력은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은 예후로 무산되었다. 수술과 재활 후에 일상생활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격한 운동은 절대 삼가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그였다.

‘부상 한 번 안 당한 선수가 있나? 얼른 털고 일어나서 또 훈련 가야지.’

‘할아버지한테 약속했던 건 지켜야 할 거 아냐.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신다고 했는데.’

수술대에 오를 때도 수년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담담했던 도재는 제 꿈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때는 부모님의 이혼 후 여러 사정으로 현재와 도재, 둘만이 살던 때였다. 현재는 어떻게든 도재에게 힘이 되어 주려 노력했으나 아무리 어른스러워 봤자 그도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 보는 제 형의 모습은 어느 순간 달라져 있었다. 원래도 사람을 좋아해 어딜 가나 무리의 중심이 되고 친구도 많은 도재였다.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데에서 온 상실감은 질 나쁜 친구들과의 일탈로 채워졌다. 제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현재도 도재의 텅 빈 마음을 채워 줄 수 없었다.

결국 부모님께 호출이 가는 사태까지 갔다. 멀리 계신 어머니는 당연히도 오시지 못했고, 대신 제주도에 있던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그 후 도재는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했는데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단지 통화를 끊고 난 후 도재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던 것만은 선명했다.

그 일 이후 어긋나던 기세는 그나마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말을 터트린 도재였다. 어머니까지 한국에 들어오실 정도로 또 한 번 집안이 뒤집어졌다. 이혼 후 처음으로 네 가족이 모인 자리였다.

‘축구 끝났다고 네 인생이 끝난 거니? 지금부터라도 맘 잡고 재수해서 대학은 가야지.’

‘대학 나와서 취직할 맘도 없는데 왜 가야 하죠?’

‘그럼 뭐 하고 살려고?’

‘제가 먹고살 돈은 알아서 벌게요.’

‘그게 여기까지 온 엄마 앞에서 할 소리야? 지금 고작 그 푼돈 가지고 내가 이러는 것 같아?’

‘어차피 제 인생에 별로 관심 없으시지 않으셨어요?’

‘흠흠, 도재야.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어머니와 심드렁한 도재의 대치는 결국 아버지와 현재의 개입으로 끝이 났다. 도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어머니는 네 알아서 하라는 말과 함께 다음 날 바로 출국했다. 그 혼란한 가운데에서 수능을 본 현재는 지금의 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어머니 말대로 미국에서 대학을 준비하는 것도 생각해 보긴 했으나, 현재는 도저히 그런 제 형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도 형제 사이만큼은 돈독했다. 가끔 왜 쌍둥이 형을 그렇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호칭은 정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형이라는 호칭은 현재에게 그냥 정말 도재의 또 다른 이름 같은 거였다. 형은 가족임과 동시에 제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때로는 정말 형같이 멋있기도 하고 가끔은 동생같이 제가 챙겨 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한 대상.

‘어제도 많이 마시고 들어온 것 같던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즘은 창업에 관심을 보이는 도재였다. 어제도 하루 쉬는 날에도 아는 형이 하는 클럽에서 진탕 마시고 온 모양이던데, 그래도 오후에 또 일을 하러 가려면 지금쯤 일어났을 터였다. 북엇국 끓여 놓고 온 거 먹었냐고 전화를 하려는데, 때마침 주머니 안 핸드폰이 진동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성혁의 전화였다.

―아, 현재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만나자고 해 놓고.

간만에 시간 맞는 애들끼리 술자리를 갖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불참인 모양이었다. 때마침 누구 하나도 못 온다는 게 단체 방에 올라왔다. 아쉽다기보다는 솔직히 잘됐다는 마음이 컸다. 술자리에는 어차피 별 흥미가 없었다.

시차 적응 핑계를 대며 적당히 못 가겠다는 말을 하니 그럼 현재 군대 가기 전에는 꼭 뭉치자는 말과 함께 약속이 미뤄졌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대학가를 넘어 평소 가지 않은 쪽의 방향으로 걸음이 향하고 있었다. 낡은 원룸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이름 모를 작은 카페나 밥집이 몰린 동네였다. 이쪽엔 거의 와 볼 일이 없었다.

‘그럼 이제 뭘 한다…….’

간만에 세차나 할까. 입학 선물로 어머니가 사 주신 차는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 정말 팔아 버릴까. 인적 드문 길을 현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스물한 살 이현재의 일상은 지극히 계획적이고 일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체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성숙한 면이 있다는 평을 어려서부터 받아 온 데엔 그 영향도 분명 있을 거였다. 현재는 잔소리를 듣기 전에 알아서 하는 편이었다. 규칙적인 일상을 벗어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도 6시면 눈을 뜬다. 집 주변 공원을 한 시간 정도 가볍게 돌고 와서 씻고 형과 먹을 간단한 식사를 준비한다. 형은 밤낮이 바뀌었으니 혼자 식사를 한 후 학교에 간다. 방학인 지금은 그 시간에 집안일을 하거나 책을 읽지만.

가끔은 최신 유행하는 영상물도 본다. 그보다는 클래식한 외화를 보는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도 있고 잠시 미국에 머물렀던 경험도 있어 영어로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없으나, 언어는 안 쓰다 보면 고여 버리기 십상이라 생각해 평소에도 나름대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원서를 읽거나 고전 영화를 보는 것은 어느 곳에도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가 그나마 약간의 보람을 느끼는 취미 활동이기도 하고.

그러다 몸이 찌뿌둥하면 점심을 먹고 또다시 센터에 운동하러 간다. 겨울에도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운동하고 나오면 속이 다 시원하다. 트레이너가 은근히 이런저런 권유를 하지만 현재에게 운동이란 잡생각이 드는 머릿속을 깨끗이 날리는 행위일 뿐이었다.

‘커피나 한잔 마실까.’

편의점 옆, 다들 고만고만 조그만 가게들 사이에서 조금은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꽤 커다란 카페의 파란 간판이 보였다. 현재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곳에 들어갔다. 카페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는데, 기분 탓인지 대충 봐도 남자의 비율이 월등히 많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습관처럼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려던 현재는 매대에 진열된 조각 케이크 몇 개를 몇 개 더 주문했다. 도재를 위해서였다. 이미지와 다르게 제 형은 달콤한 디저트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방 포장해서 준비해 드릴게요.”

수줍게 답하며 계산하는 와중에도 저를 연신 흘깃거리는 눈앞의 여자를 두고, 현재는 매대 근처 일인용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막 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앉을 수 있었다. 장사 잘 되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 테이블의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사람 소리에도 바로 옆인지라 잘 들렸다.

“진짜 존나 이쁘다.”

“내 말 맞지? 여기 알바생 유명하다니까.”

“씹, 완전 인정. 택시 타고 온 보람 있네.”

그 정도였나? 현재는 방금 주문받은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잘 웃었다는 거 외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별 신경 쓰지 않고 매장을 한번 휙 둘러보던 현재의 시선이 문득, 한창 음료 제조 중인 바 안에서 멎었다. 정확히는 뒤돌아 열심히 커피를 만들다 막 몸을 돌려 컵을 집는 한 여자에게.

“…….”

순간, 정말로 놀랐다.

……너무 예뻐서.

옆자리에서 연신 격한 표현을 쓰던 남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했다. 머리를 올려 묶은 희고 작은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머신과 그라인더 사이 바쁘게 손을 놀리는 여자를 현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 심장이 순간 철렁할 정도로 예쁜 애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새침하다 못해 냉하고 예민한 분위기였지만 그조차도 특유의 분위기로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구석에 앉은 현재에게는 기역 자로 된 바 안에서 혼자 엄청 바빠 보이는 여자의 옆모습이 보이다 말다 했다.

‘어.’

부산하게 손을 움직이던 여자가 우유를 엎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여자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현재도 멈칫하는데, 들고 있던 벨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까 제게 주문을 받았던 여자가 포장된 봉투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서비스로 뭘 더 넣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관심이 다른 데 가 있어서 잘 듣지는 못했다. 살짝 고개를 까딱해 마주 인사한 현재는 곧바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걷다 우뚝 멈춘 현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관심도 없던 카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하는데,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

그 후 현재는 사흘 만에 그 카페를 다시 찾았다. 집 앞에도 버젓이 카페가 많은데 굳이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로 도재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 도재가 만나던 직장인 여친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거나 안 가리고 잘 먹게 생겨서 은근히 입이 까칠한’ 도재는 그날 현재가 끓여 준 북엇국을 싹싹 비우고 조각 케이크 세 개를 앉은 자리에서 해치우고 일을 갔다. 집 앞 디저트 카페 것보다 훨씬 맛있다며 어디냐고 직접 갈 기세로 묻기에, 어차피 운동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있으니 제가 사 온다 했다.

“어, 며칠 전에도 오셨죠?”

저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띠는 기억력 좋은 직원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주문을 하려던 현재가 멈칫했다.

문득 조금 계획을 변경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케이크를 사고 곧바로 집에 가서 어제 오후 배송받은 책을 읽는 대신, 카페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시켜 놓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현재는 카페에 머물렀다. 운동을 다녀오는 길이라 딱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 조금만 있다 일어날 요량이었다. 이번에는 바 근처에 자리가 없어 창가 쪽에 앉아야 했는데, 그 편이 오히려 더 카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애는 오늘도 있었다.

저번처럼 머리를 질끈 묶고 바에서 음료를 만들고 컵을 씻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충 제 또래 같이 보이긴 한데, 워낙 표정이 없고 뭔가 초연하게까지 보이는 분위기에 좀 헷갈렸다.

‘우리 학교 학생인가?’

대부분 이 근처에서 알바하면 그러니까. 아니면 곧 들어올 신입생일 수도. 그럼 저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릴 거고…….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바에서 나왔다. 괜히 찔려 시선을 다른 데 주는데 빈 테이블을 빠르게 정리한 여자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현재는 평소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핸드폰을 괜히 이것저것 눌러 가며 시간을 때웠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 오갔다. 하지만 여자는 음료를 만들고 아주 간혹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 이외에 카운터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보통 번갈아 가면서 할 법도 한데. 상당히 역할 분담이 잘된 곳인가, 라는 사소한 의문이 들던 찰나.

“개이뻐, 진짜. 번호 따 볼까?”

“야. 백 퍼 남친 있다.”

“왜, 아닐 수도 있지.”

“어휴, 등신아. 저 얼굴로 없겠냐? 그리고 없어도 너한테는 나 같아도 안 주겠다. 놀라서 안 도망가면 다행임.”

“뭐 이 새끼야?”

자기들끼리는 작게 말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다 들리는 옆 테이블의 굵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곧바로 납득했다. 아, 저게 이유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근데 왜 저렇게 혼자 다 일하는 거 같지.’

어느새 커피의 반이 비워졌다. 슬쩍 다시 바 안을 바라보던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사이 저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했는지 화들짝 놀라던 직원이 핸드폰을 열심히 했다. 와중에도 그 애 혼자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좀 뭐랄까, 짜증 났다. 직원인지 젊은 사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도와줄 것이지.

현재는 식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트레이를 정리한 후 미련 없이 카페를 나왔다. 또 오세요! 지난번과 묘하게 달라진 인사를 받으며 카페 문을 나섰다. 형에게 줄 케이크를 사지 않았다는 사실은 집에 거의 다 와서야 생각났다.

그 후, 현재는 몇 번 더 그 카페를 찾았다. 늘 캡을 눌러쓰고 아메리카노를 시킨 채 적당한 자리를 찾아 잠시 있다 집으로 돌아갔다.

도중 그 직원이 수줍게 여자 친구 있냐는 말을 묻는 불상사가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현재는 짧게 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약간 민망해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것만 빼고는 별다를 게 없었다.

그 여자애는 계속 포스기 앞에는 기웃거리지 않고 음료만 만들었다. 인형같이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간혹 뭔가 상당히 힘이 빠지고 지친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틀에 한 번씩 카페를 찾으면서도 현재는 정말로, 딱히 제가 그 애를 보기 위해서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뭐…… 흘러나오는 음악도 취향이고 커피도 맛있으니까, 하는 간단한 이유였다. 칼 같았던 하루의 루틴에 작은 변화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덧 입대할 날아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운동하다 우연히 만난 동기와 근처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신 현재는, 문득 든 충동에 집 방향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렸다. 어느덧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몇 시까지 하더라.’

그러고 보니 폐점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했다. 잠깐 멈칫하던 현재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문 닫았으면 내일 운동 다녀올 때 들리면 되지.

다행히 가게 안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앞에 쓰인 마감 타임은 10시 반. 현재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서 오세요.”

늘 카운터에 있던 여자 대신 그 애가 저를 맞았다. 사실 상당히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현재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무튼 그 애가 말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그렇게 평소처럼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계산을 마쳤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잠시만요, 짧은 말을 남긴 후 뒤돌아 커피를 내리는 뒷모습을 보는데 자꾸 입술이 움찔거렸다. 할 말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지만.

음료를 컵에 따르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현재는 불쑥 든 충동에 쓰고 있던 캡을 벗었다. 정말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제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기계처럼 말을 읊던 여자가 한 번쯤 저와 눈을 마주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했던 것 같다. 하긴, 다 늦은 시간에 캡 눌러쓰고 온 남자가 어떻게 보면 좀 무서울 수도 있으니까.

“안녕히 가세요.”

하지만 그 여자애는 끝까지 냉정했다. 현재는 어쩐지 답답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카페를 나왔다. 혼자 마감하고 가는 건가. 유독 인적 드문 골목길이 오늘따라 좀 위험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한동안 카페에 가지 않았다. 군대 가기 직전이라 평소보다 더 많이 사람들도 만나고 형도 챙겨 주는 와중 시간은 빠르게 가 어느덧 입대를 닷새 앞두고 있었다.

그날은 심각하게 창업 얘기를 하는 도재와 시간을 보내느라 운동을 늦게 갔다. 오다가 도재가 근처에서 뭘 좀 찾아와 달라고 부탁해서 차도 갖고 간 터였다. 저녁 먹을 때쯤 해서 집으로 돌아오다, 다시 그 카페에 들렀다. 아마 이 카페를 가는 것도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딸랑, 골목에 간신히 차를 대 놓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던 현재가 멈칫했다. 어쩐지 웅성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장 안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나였다. 저만치 계산대 앞에 남자 서너 명이 몰려 있었는데, 매대 밖에서 트레이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직원의 얼굴이 먼발치에서도 보였다. 뭐지, 현재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하 씨! 진짜 어이가 없어 가지고.”

“야, 그만하고 그냥 가게.”

머리를 왁스로 넘긴 반질반질한 낯의 남자가 저를 말리는 남자들을 밀치며 그 여자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실수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저럴 일인가? 현재는 주문을 할 것처럼 계산대 앞에 우뚝 서서 남자를 지그시 내려 보았다. 그 와중에도 여자애는 현재에게는 시선 한번 안 주고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마치 엄청나게 한심한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제 어깨를 간신히 넘는 남자가 한 발짝 뒤에 선 현재와 눈이 마주치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아니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 하니까.”

존나 개싸가지없네 씨발, 이어지는 상스러운 욕설에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남자에게서는 희미하게 술 냄새도 나는 듯했다. 놀랐을까 슬쩍 바라봤지만 여전히 그 애는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서서 욕을 받고 있었다.

‘뭐 이런 개념 없는 사람이 있지?’

도대체 이 여자애가 무슨 잘못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엄연히 장사하는 곳에서 이딴 식으로 나오는 것은 경우 없고 무례한 짓이었다. 순간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현재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던 순간.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 지랄이에요?”

“……뭐?”

얼핏 조용한 듯 날카롭게 울리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현재도, 남자들도 멈칫했다. 당황한 남자를 앞에 두고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을 이어 갔다.

“번호 한번 안 준 게 이렇게 영업 방해하면서 쌍욕할 일이에요? 뒤에 손님 밀린 거 안 보여요?”

“아니, 씹, 번호만 안 준 게 아니고…….”

남자가 현재를 다시 슬쩍 바라보더니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뭐, 남친 있냐 했더니 없어도 나한테는 안 준다며, 그딴 식으로 싸가지 없게 꼭 해야 했냐 이거지. 나는.”

“저기요, 할 거면 말은 똑바로 해야죠.”

대놓고 한숨을 쉰 여자의 얼굴과 남자를 번갈아 보다 현재는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패딩 안 핸드폰으로 시선을 주고, 터치 몇 번으로 녹음을 눌렀다. 딱히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쪽이 나한테 번호만 물어봤어요? 매일같이 끝날 때쯤 찾아오고, 며칠 전에는 남친 있냐고 어디 사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집 앞까지 따라왔잖아요? 신고한다고 했더니 미안하다고 싹싹 빌면서 갔던 거 기억나죠? 그 뒤로 안 보이나 싶더니 오늘은 아예 술까지 퍼먹고 친구들 대동해서 당당하게 나한테 번호 달라고 했죠. 그리고 지금은 아예 당당하게 영업 방해 중이시고.”

미친 새끼였네, 이거. 쥐고 있던 핸드폰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남자가 당황해 말을 버벅댔다.

“아니, 뭐, 나는…….”

“말해 봐요. 내가 지금 없는 말 했어요?”

“하, 그래. 몇 번 따라가긴 했는데. 그게 뭐,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 이상 뭘 더 했으면 지금 여기가 아니라 경찰서에 앉아 있겠죠. 허구한 날 앵무새처럼 남친 있냐고 묻기에, 있어도 안 주니까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한 게 잘못이에요? 옆에 누구 있으면 되게 어깨에 힘 들어가는 타입인가 봐요.”

찌질하게, 덧붙인 목소리는 중얼거림 같은데 다 들렸다. 현재는 남자에게 다시 흘깃 시선을 주었다. 술김인지 화가 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얼굴에 열이 오른 게 볼만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야, 그만하자고.”

“아, 몰라. 이 새끼 냅두고 그냥 가게.”

저들끼리 웅성대던 남자들이 먼저 등을 돌렸다. 계속해 씩씩대던 남자도 여기 있어 봤자 더 이득 될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재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매장을 빠져나갔다. 현재는 얼른 여자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 애는 별다른 표정 없이 뒤돌아 컵이 높이 쌓인 개수대로 가 버렸다.

소란이 가신 매장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저,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그 와중에도 놀랐을 여자애를 챙기는 대신 계산대로 향하며 제게 말을 거는 직원을 내버려 둔 현재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멀리 가지 않은 남자들은 그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얼굴값이니 뭐니 저들끼리 하는 말이 다 들렸다. 현재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또라이 같은 년이 진짜……뭐, 뭐요?”

아까 그 남자가 현재를 알아봤는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상당히 앳된 얼굴인 게, 물론 저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나 싶을 정도였다. 비스듬히 눌러쓴 캡 사이로도 보이는 싸늘하다 못해 음산한 눈빛에 남자가 멈칫했다.

“사과해요.”

앞뒤 다 자르고 한 말에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뭘요?”

아까 그 여자애 앞에서는 반말 찍찍이더니, 제 앞에서는 요, 자를 꼬박꼬박 붙이는 행동에 정말 더 화가 났다. 현재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딱 봐도 키도 몸도 저보다 한참 큰 현재의 위압적인 기세에 남자의 눈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아까 그 아르바이트생한테 욕한 거, 사과하고 오라고요. 다시는 쫓아다니지 않겠다는 말도 꼭 하고.”

“뭐?”

이번에는 정말 놀랐는지 남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뒤에 선 제 친구들을 한번 쓱 둘러본 남자가 이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왜 사과를 해요?”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는 건 상식인데.”

“하, 진짜! 그러니까 당신이 뭔데 사과하라 마라 하냐고.”

재수가 없으려니까, 중얼대던 남자가 한 발짝 성큼 앞에 다가온 현재에 지레 놀라 뒤로 물러났다. 겁도 많기는, 현재는 픽 웃으며 말해 주었다.

“남친인데.”

“……뭐?”

“네가 쌍욕 박은 애 남친이라고.”

“거, 짓말.”

남자가 놀란 눈치로 현재를 한번 훑더니 다시 말했다.

“구라 치지 마요, 말도 안 되게.”

“맞아, 남친 왔는데 쳐다도 안 보나…… 누가.”

한 발짝 뒤에 있던 남자 하나도 조그맣게 거들었다. 당연히 누가 봐도 안 믿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지만 현재는 뻔뻔하게 답했다.

“아, 우리……가, 좀 그런 면이 있어서. 일할 때는 아는 척 말라고 하거든.”

순간 이름도 모른다는 게 생각나서 말을 흐렸다. 뭐, 상관없겠지. 현재는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걔가 원체 저 힘든 얘기는 도통 안 해서 몰랐는데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무슨 이런 등신 같은 새끼가 꼬이는 것도 모르고……. 들으라고 덧붙인 중얼거림에 역시나 남자가 발끈했다. 뭐요? 씨근대는 머저리를 앞에 두고 현재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녹음을 재생했다. 일부러 맨 앞까지는 감지 않아 아까 그 여자애가 영업 방해라고 말하는 부분이 조그맣게 재생되었다.

“참나, 뭐 이런 걸로 신고 가능한 줄 알아요? 신고해도, 처벌 안 받거든?”

당황하던 남자가 이내 더 목소리를 높였다. 어깨를 한번 으쓱한 현재가 녹음을 끄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알아, 이걸로 뭘 할 순 없겠지. 하지만.”

“…….”

“추후 같은 일이 재발했을 때 도움이 아예 안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집까지 쫓아가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 아닌가?”

원래 무식한 놈들일수록 겁이 많다. 찔리는 게 많은지 움찔하는 남자의 눈을 현재는 말없이 똑바로 응시했다. 종전의 웃음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눈빛을 마주하던 남자가 정신 사납게 눈을 굴리더니 에이, 소리와 함께 우물쭈물 말을 뱉었다.

“아…… 아까 내가 이제 안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남친 있는 줄 모르고 한 거니까.”

“남친 있든 없든 그런 행동은 정당화가 안 되는데.”

“그니까……! 암튼 이제 안 온다고, 그리고 사과는……좀 전해 주시죠? 미안했습니다.”

사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닌데. 갑자기 현재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한 남자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 친구들을 데리고 뒤돌았다.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느낌상 다시는 그 애를 찾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후 현재는 카페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가지도 않았다. 그새 어두워진 밖을 지키듯 골목 어귀에 대 놓은 차의 운전석에 시동을 꺼 놓은 채 앉아 있었다. 카페 뒷문과 작은 주차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잘은 안 보여도 입구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렴풋이 보이는 자리였다.

알고 있었다. 오지랖이라는 거.

저랑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의 대화를 녹음했던 것도, 굳이 남친이라고까지 하면서 사과를 종용했던 것도 모두 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진정되질 않았다. 딱히 어쩔 마음도 없으면서 몇 시간째 차 안에 있는 제가, 저조차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어쩌려고, 뭐. 마감 때까지 있으려고?’

핸드폰으로 시각을 확인하는데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자그마치 세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에 있었다.

‘그만 가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자각이 든 현재가 막 시동을 걸려던 차였다. 뒷문으로 나오는 인영에 멈칫한 현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가슴께까지 오는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이 추위에 외투 하나 없이 앞치마 차림으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영은 그 여자애가 맞았다. 무겁지도 않은지 빠른 걸음으로 걷더니, 가로등 밑에 묵직한 봉투를 내려놓았다.

거리상 표정까지는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별일 없이 씩씩한 거 같아서 안심이 들었다. 사실 아까 그 남자에게 밀리지 않고 쏘아붙이는 태도에 내심 놀랐던 현재였다. 만약 거기서 그 애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제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모습이 솔직히 더 마음에 들었다……고 까지 저도 모르게 생각하는데.

‘……!’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현재의 눈이 커졌다. 움찔하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그러니까 그 애는…… 울었다. 갑자기.

침침한 가로등 아래 주저앉아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딱히 작은 키라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워낙 체구가 마른 탓에 현재의 눈에는 작게만 보였다.

거리상 우는 얼굴까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으나 조막만 한 얼굴을 푹 덮은 손이나 멀리서도 분명하게 흔들리는 어깨를 보면 틀림없이 울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분명 소리조차도 제대로 내지 않고 우는 그 모습과 마주한 순간……. 심장이 지끈했다. 뱃속 깊은 무언가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올라오는 생소한 감각에 현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도 그 애가 왜 우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몇 시간 전 있었던 일과 자꾸 연관을 짓게 되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데.

‘아.’

여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쓱쓱 손등으로 닦아 내고, 정신 차리자는 듯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서성이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안에 들어가면 또 아무런 말 없이 열심히 일만 하겠지. 그동안 봐 왔던 표정 없는 옆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그 애의 다른 얼굴을 안다.

그 후에도 현재는 한참을 거기 있었다. 카페 불이 완전히 꺼지고 그 여자애가 반대 방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연아, 조심히 가! 손을 흔들며 말하는 직원의 커다란 목소리에 그제야 그 애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수연, 현재는 이제야 알게 된 그 여자애의 이름을 조용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수연…….

‘이름도 예쁘네.’

이름을 알았다는 그 사소하기 그지없는 사실에 왜인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아니, 사실 그간 부정했다기보다는, 너무나 낯선 감각에 알지 못했던 그 사실을. 생각해 보면 진작 답은 나와 있었는데 말이다. 안 하던 짓을 하며 타인을 향해 처음으로 느꼈던 강렬한 호기심과 관심.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현재는 내내 정말 제가 그 여자애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사람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연예인을 보고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지 않는가. 그저 보기 좋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니까, 이 정도로 가볍게 치부한 듯싶었다. 그 애는 지금껏 제가 봤던 여자들과는 조금은 다른 독특한 분위기기도 했고.

특유의 분위기와 예쁜 외모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맞았지만, 그게 감정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야 표현하는 방식만 다를 뿐 아까 그 남자가 느낀 호감과 결이 같은 감정일 테니까. 신중한 것은 제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적 없고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여자와 연애를 한다면, 어렴풋이 상상했던 제 모습이 현재는 그간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일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울고 있는 그 여자애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감정은 확신으로 변했다. 예쁜 외모에 순간 끌렸던 건 맞지만, 진심으로 깊이 반한 순간은 정작 울고 있는 모습에서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짠하고 안쓰러운데…… 막상 또 그런 감정만은 아닌. 분명 못 견디게 안타까우면서도 묘하게 귀엽고 애틋한 느낌을 받았던 것을 보면, 제 안에 뭔가가 잘못되긴 한 모양이었다.

생각의 끝자락, 문득 헛웃음이 났다.

‘어차피 난 곧 군대 가는데.’

사실 안 가도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도조차도 해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는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 후 현재는 아버지와 형, 친구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무사히 입대를 했다.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그 애의 생각은 당연하게도 잠시 잊혔다. 하지만 고된 훈련 후 잠을 청할 때면 왜 가끔 그 얼굴이 떠오르는지. 한번 의식하고 나자 본인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주 생각났다. 그 일은 그냥 뭐, 에피소드 같은 일인데…….

아는 것이라고는 수연. 이름 하나뿐인 그 여자애가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나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고. 뭐, 성격이야 물론 지금껏 본 것으로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현재는 속단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휴가를 나왔을 때, 그 앞을 지나갈 일이 있어도 현재는 일부러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아마 그 애는 제 얼굴조차도 기억나지 않을 텐데 혼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스스로 자괴감이 들기도 했고, 현재는 애초에 깊이 생각한 후에야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갔다. 말년 휴가 때 충동적으로 들른 카페에 그 애는 없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지난달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순간, 너무나 진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진작 한번 와 볼걸.’

아쉬움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허망한 상실감……. 상실감. 떠오른 단어가 황당했다. 가져 본 적도 없는데 상실감이라니. 하지만 그것보다 제 마음을 더 잘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전역을 했다. 복학한 학교는 역시나 무료했다. 어느 것 하나에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료함은 아마도 평생 제가 고치지 못할 고질병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지루한 일상 생각을 하니 벌써 한숨이 나왔다. 현재가 그나마 요새 관심을 쏟을 곳은 요즘 호프집 일에 진심으로 매달리는 형을 돕는 것이었다. 어머니야 질색하셨지만, 현재는 도재가 뭐 하나에 마음을 쏟고 집중하는 게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수업 시작 전, 개총 뒤풀이 왜 안 나왔냐며 한 소리 하는 성혁의 옆에 앉아 있는데.

“야, 저기, 저기. 내가 말한 애.”

“……누구.”

“기억 안 나? 신입생인데 엄청 이뻐서 다른 과 남자애들이 도강도 들어오는 애.”

강의실 뒤쪽을 흘깃대던 성혁이 호들갑을 떨었다. 박성혁이 예쁘다는 애가 한둘도 아닌데 당연히 기억할 리 없었다. 아예 시선도 안 주는 심드렁한 반응에 성혁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차수연이라고, 봐 봐.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작냐?”

“…….”

책에 꽂혀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드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수연이라는 이름은 흔하니까. 하지만.

저만치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 옆모습을 확인한 순간, 현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그 애였다.

1년 반 만에 보는 그 애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카페에서는 늘 묶고 있던 머리를 풀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뭐, 굳이 찾자면 익숙한 공간 안에서 보니 더 현실감 없고 혼자 빛나는 느낌이었다는 것 정도? 특유의 무표정과 세상만사 하나 관심 없어 보이는 눈빛도 그대로였다.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는 여자의 모습을 현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바라보았다.

널뛰는 심장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꿈에도 나와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상대가 고작 몇 발자국 앞에 나타나다니. 정말 다시는 마주칠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순간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 있는 현재의 반응에 신난 성혁이 바쁘게 입을 놀렸다.

“그치? 예쁘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다니까.”

“……신입생이야?”

“엉? 어. 신입생. 근데 재수해서 우리랑 나이는 동갑이라더라.”

혹시 들릴까 그런지 성혁이 소곤댔다. 그사이 둘이 뭘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하느냐며 진철이 등장했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강의실 안, 현재는 애써 수연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내 수업이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처음으로 교수님의 말씀에 하나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이건 운명인가?

자신답지 않게 로맨틱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

그러나 운명 운운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학기 내내 현재는 수연과 전혀 교류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대충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수연의 철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연과 겹치는 수업은 딱 두 개였는데, 수연은 강의 시작 전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앉고 수업이 끝나면 칼같이 가방을 챙겨서 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녀를 붙잡아 뭐라 말을 거는 타 과생을 본 적도 종종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어색하게 구겨지는 남자의 얼굴을 봐서는 오갔던 대화가 대충 짐작 가기는 했지만.

‘너무 예쁜 것도 피곤하구나.’

떨떠름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현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과 내에서 수연은 어쩔 수 없이 유명 인사였지만 동시에 좋게 말하면 도도하고 나쁘게 말하면 냉정한 이미지였다. 딱히 무례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딱딱 자기 할 말만 하고 말수도 없는 편이라 학기 초에는 엄청나게 관심을 보였던 과 사람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단계였다. 넘겨짚자면 본인 성향 자체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더 어려웠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수연은 뒤풀이나 엠티 같은 과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건 물론, 학부 사람들 대부분이 속해 있는 단체 메시지 방에도 없다고 했다.

‘김다미하고는 그나마 좀 친한 것 같은데. 그래도 걔도 같이 밖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대. 이번에 조별 과제 같이 할 때도 자기는 저녁에 알바 있다고 밥도 안 먹고 할 것만 하고 갔다고.’

성혁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는 모양이었다. 차마 성혁에게는 더 못 캐물었는데, 나중에 남자애들의 대화에서 수연이 일하는 카페를 알게 되었다. 예전 그 파란 간판 카페가 아닌, 반대쪽으로 꽤 가야 나오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그날부로 운동 삼아 저녁에 한번 들렀지만 역시나 먼발치에서 있는 조그만 얼굴만 슬쩍 보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다시금 상기하는 바이지만…… 정말로 어려웠다.

이미 수많은 남자들이 거쳐 왔을 똑같은 루트로 접근하고 싶지 않은데, 그 방법 외에는 답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를 나서는데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애초에 만만치 않은 상대를 골랐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엄청나게 폐쇄적인 수연과 지나치게 신중한 현재의 조합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왔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 현관에 들어서는데 늘어지게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도재가 반겼다. 안에 들어서던 현재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재희랑?”

몸을 일으키며 도재가 눈앞의 맥주 캔으로 손을 뻗었다. 시원하게 한 모금 비워 낸 그가 픽 웃었다.

“쫑났지 뭐.”

“…….”

간만에 쉬는 날 애인 만나러 간다던 도재였다. 왜? 눈으로 묻는 듯한 표정에 도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자마자 무슨 와이프처럼 바가지 팍팍 긁기에 이럴 거면 관두자고 했지. 일하는 거 이해도 못 해 줄 거면 뭐 하러 만났냐고 했더니 뭐랬더라. 이렇게 방치당할 줄 몰랐다고 했나. 어째 내가 만나는 여자들은 치는 대사가 짠 것처럼 똑같냐? 더 볼 것도 없잖아. 대판 싸우고 그 자리에서 끝냈지.”

“좀 좋게, 잘 풀 수도 있잖아. 그래도 형 많이 좋아하던 눈치던데.”

호프집에서 몇 번 봐서 어렴풋이 생각나는 동갑내기를 떠올리며 말하니 도재가 피식 웃었다.

“내가? 왜? 황금 같은 휴일을 날린 것만 해도 존나 빡쳐. 나도 사기당한 느낌이라고. 시작할 때는 세상에서 제일 이해심 많고 쿨한 여자인 것처럼 굴더니.”

“…….”

“뭐, 그래도 속궁합은 제일 괜찮았는데. 그거 하나만 아쉽지. 걔 정도의 몸매야 널리고 널렸는데 합 맞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씻고 올게.”

도재가 저런 이야기를 입에 올릴 때면 아무래도 껄끄럽다.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라 해도 혈육이라 그런가. 사실 저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라 뭐라 대꾸하기도 애매하고.

“어휴, 순진한 자식 진짜.”

방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도재가 낄낄 웃는 소리가 났다. 섹스를 해 본 적 없으면 순진한 건가. 현재에게는 별로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그렇게 씻고 나와 도재와 거실 앞에 TV를 틀어 놓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던 차였다.

“근데 너 요새 기분 좋아 보인다?”

“내가?”

도재의 말에 현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기분이 좋을 일이 있던가?

“어.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 느낌이 꽤 오래 가네. 들떠 보인다고 해야 하나.”

“…….”

들떠 보인다니. 현재는 찬찬히 제 모습을 돌아다보았지만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떠보는 듯한 시선으로 도재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옷도 은근히 신경 쓰는 느낌이고. 아까도 난 무슨 데이트 다녀오는 줄 알았잖아.”

“데이트는 무슨.”

“그래, 너는 그냥 운동복 입고 나가도 빛이 나니까 괜히 더 멋있게 다니지 말라고. 벌레 꼬인다.”

언제나처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한 도재가 건배를 제안했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알코올에 섞여 또 수연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재였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취향도 성격도, 저와 180도 다 다른 도재라면 수연 같은 타입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갔을까.

확실한 것은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였다. 모가 되든 도가 되든 일단 거리낌 없이 다가갔겠지. 안 돼도 어쩔 수 없지, 하며 금세 호기심을 껐을 것이고.

그런 현재의 생각을 알 리 없이, 옆에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도재가 별안간 물어 왔다.

“근데 넌 진짜 이상형이 뭐냐?”

“갑자기?”

“왜, 맨날 모른다고만 하지 말고. 그래도 취향이랄 게 있을 거 아냐.”

씩 웃은 도재가 턱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음, 외모만 봤을 때. 쟤네 중 누가 제일 끌리냐?”

“…….”

시선을 따라간 곳에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여자 아이돌이 보였다. 옆에서 도재가 누구라고 덧붙였는데, TV를 하도 안 보는지라 그룹 이름은 들어 봤는데 얼굴은 다 처음 봤다.

“모르겠다 금지, 다 별로다 금지. 무조건 한 명 골라봐.”

일단 난 쟤, 도재가 도도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누군가를 또 턱짓으로 찍었다. 현재는 감흥 없는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물론 연예인이니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했으나 현재는 정말로 이렇다 할 정해진 이상형이랄 게 없었다.

그래도 하도 끈질기게 물어 오기에 노래가 끝날 때쯤 대충 한 명을 고르니 도재가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고, 역시나 그때그때 느낌대로 대강 답해 주었다.

“알겠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침내 크나큰 발견을 했다는 듯 도재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존나 귀여운 애 좋아하네, 너.”

“내가?”

“어, 딱 봐도 다 애교 쩔게 생긴 애들이잖아.”

도재가 소리 내서 웃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그런가?

‘……아닌데.’

반사적으로 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비워 냈는데 수연의 그 작고 또렷한 얼굴이 또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수연이 귀엽고 애교 많게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 울고 있는 모습이 왜 떠올랐는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 있으면 말만 해. 이 형이 진짜 귀엽고 착한 애로 소개해 줄게.”

“…….”

“말했잖아, 세상만사 재미없을 땐 연애 한번 찐하게 하면 또 괜찮아진다니까.”

저렇게 말해 놓고 다음 날 술이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너는 사회 경험 좀 쌓고 연애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해서 현재는 잠자코 있었다. 도재는 늘 너처럼 연애에 숙맥인 애가 한번 잘못 걸리면 된통 고생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정작 현재는 별 생각 없이 흘려들었지만.

“근데 너 졸업하면 진짜 로스쿨 갈 거냐?”

“글쎄, 생각 중이야.”

언젠가 어머니와 통화했던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이었다. 성적에 맞춰 입학한 대학과 학부였지만 어머니는 영 탐탁지 않아 하셨다. 그 당시 챙겨 줄 사람 하나 없이 오히려 형을 챙기면서 기대 않고 본 수능 성적이 그 정도였으니 더 그러시는 걸까. 정 그러면 졸업 후 로스쿨로 빠져서 시험을 치른 후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왔으면, 하시는 모양이었다.

“뭐…… 너야 뭘 해도 잘하겠지. 근데 너 한국 뜬다고 생각하면 왜 이렇게 벌써 기분이 그렇냐.”

“그런 생각을 왜 해?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고, 절대 쉽지 않은 목표다. 하지만 진지하게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도재의 얼굴을 보자니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많은 도재는 모순되게도 외로움을 타는 편이었다. 가끔은 그런 형이 이해가 되진 않았다. 현재는 애초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선만 지키면 대체로 무난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사람을 끌긴 했으나,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을 훨씬 더 선호했고 그런 성향을 그의 친한 친구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너 가면 어머니야 엄청 좋아하겠지. 난 가끔 그런 생각 한다? 어머니가 재혼 안 하는 게 너 때문인가 싶다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왜, 보통 사람보다 멀리 보고 계획 잡는 거 너랑 어머니 공통점이잖아. 아무래도 재혼하면 너도 지금처럼 편하게 들락날락하기도 쉽지 않을 거고.”

“너무 간 생각이야. 좋은 분 만나면 어머니도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암튼 너도 은근 냉정한 게 어머니랑 판박이야.”

도재가 혀를 끌끌 찼다. 남은 맥주를 비운 현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이야말로, 어머니가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서운하실 거야. 이번 겨울에는 나랑 같이 들르게.”

“흐응, 장사 놓고 가라는 거야? 이번에 호프집 차릴 때도 트러블 있었던 거 알면서.”

“번갈아 다녀와도 되고, 내가 있어도 되니까. 어쨌든 그래도 안 보고 살 건 아니잖아.”

“안 보고 사는 게 더 편한 관계도 있어.”

그렇게 잠시 투닥거렸다. 내일 일도 가야 하니 그만 먹자 했는데, 아무래도 도재는 오늘따라 취한 모양이었다.

“난 그거 아직도 기억난다, 현재야.”

“뭔데.”

“예전에 사고 치고 다닐 때, 어머니가 나한테 너는 정말 네 아빠랑 판박이라고 한 거.”

“…….”

“아버지 못 견뎌서 이혼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대놓고 욕 아니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건 형도 알잖아.”

“글쎄, 모르겠는데?”

피식 웃은 도재가 좀만 있다 씻어야겠다며 바닥에 덜렁 누웠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성격적인 면에서 아버지와 도재, 저와 어머니가 비슷한 결이긴 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런 뜻으로 말했겠지. 은근히 세심한 면이 있는 도재는 다른 쪽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만.

“들어가서 자.”

상을 치우는 그새 곯아떨어진 도재를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을 덮어 주고 베개까지 머리맡에 살뜰히 밀어 넣은 후 일어나는데 괜히 제 형의 얼굴이 짠해 보였다. 낯간지러워 차마 말하지는 못하지만, 제게 1순위는 언제나 제 형이었다. 형 역시 그러하듯이.

그렇게 한 학기가 훌쩍 흐르고, 겨울을 지나 또다시 봄이었다. 그동안 현재의 일상은 여전히 변한 게 없었고, 현재는 꽤 오래 전부터 저를 지배했던 무료함에 하루하루가 조금 힘들었다. 예전에는 이게 우울증인가 싶어 어디 상담이라도 가 봐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그것은 아니라는 자체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우울하지 않았다.

단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단 하나도 없을 뿐이다. 실제로 할 일이 많아 바쁜 것과 관성적인 무료함을 순간순간 느끼는 것은 다른 선상의 일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복에 겨워 배부른 소리 한다 욕해도 할 말은 없었다. 지금껏 제가 목표로 해서 딱히 안 된 것은 없었다.

물론 당연히 자신도 노력이란 것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치열하게, 이것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몰두했던 적은 맹세코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도 없고 느낄 필요도 없었다.

한창 예민할 수험생 시기 형과 둘이 살며 엇나가던 형 챙기면서도 지금의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동기며 선후배며 할 것 없이 저를 좋게 평가해 줬으며 교수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항상 흘러갔다. 딱 하나, 이혼하신 부모님 사정만 빼고.

솔직히 도재처럼 뼛속까지 아웃도어 파도 아니고 오히려 집에 있는 편을 선호하지만, 하이킹도 다니고 가끔 장기 캠핑도 다니며 몸을 움직이려 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면 뭐 하나 제 흥미를 끌 수 있는 게 생길까 해서.

형이 가끔 말하는 연애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도 남자니 가볍게 호감을 느끼거나 하는 상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몇 초도 안 되는 잠깐의 감각이었고 실제 그 상대가 제게 호감을 표하면 오히려 더 식는 고약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연애나 더 나아가 결혼 같은 것은 생각만으로 너무나 막연해서, 솔직한 말로 현재는 제가 평생 혼자 살 타입인가라는 생각도 꽤 많이 했었다.

그래서 수연과의 재회가 현재에게 더욱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거였다. 후에 생각하면 거의 본능적인 감각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수연을 향한 마음이 정처 없이 커지는 것과는 별개로 현재는 조금씩 더 힘들어졌다. 제풀에 지쳤다고 할까.

내내 같은 색의 머플러를 칭칭 두르고 맨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벽이나 계단 같은 정물을 보는 듯한 무심한 눈빛으로 저를 스쳐 지나가는 무정한 얼굴을 볼 때마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손에 든 뭔가를 오물대며 멍하니 앉아 있던 모습을 종일 곱씹으며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정작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면서 왜 혼자 등신같이 이러는 건지.

‘그만하자.’

개총 뒤풀이에 같이 가자고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성혁에게 볼일이 있다고 대충 둘러대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오면서 학교 앞 대형 서점에 잠깐 들렀는지라 평소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터였다. 아직은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던 현재는 어느 순간 결심했다. 그만하자고. 뭐 사실 한 것도 없지만, 그만둬야겠다고.

딱히 부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그는 수연에 있어서만은 자신이 없었다. 만약 수연이 다른 남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저를 희미한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타격감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눈이 가고, 관심이 가고 생각이 나는 것은 이성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인데.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코트 안에서 계속 진동이 느껴졌다. 안 봐도 뻔했다. 아예 꺼 버려야지, 생각하며 무심결에 액정을 확인하던 현재의 눈이 커졌다.

[진짜 안 오냐? 차수연도 와 있다고!!]

뭐?

내가 잘못 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재는 다급한 손짓으로 밀려 있던 성혁의 메시지를 모두 확인했다.

[애들 개많아 진짜 술집 터질 것 같다니까? 차수연 와서 신입생 남자애들 지금 다 난리임ㅋㅋㅋㅋ]

[오늘 이도재 일복 터진 날이다]

[너까지 오면 진짜 우리 학부 딱 완성인데]

그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왜 읽기만 하고 씹어? 일 있다는 거 뻥이지??? 얼른 튀어 와라??]

답을 보낼 것도 없었다. 종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몸을 돌린 현재는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거의 뛰어가다시피 빠른 걸음이었다.

조금 전 나름대로 힘겹게 결심해 놓고 이러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새도 없었다. 타이밍도 좋게 그만하자는 생각을 하자마자 찾아온, 제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현재는 수연에게 지극히 진심이었다.

그리고 술집 안, 현재는 제 생각보다 더 수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제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걸까. 이번 아니면 이런 식으로 가깝게 있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평소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이 불쑥불쑥 나왔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계속 말을 걸고 살뜰하게 챙겨 주고, 집에 데려다준다는 말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수연을 달래는 와중에도 설레고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미치겠네.’

이렇게 가까이서 수연을 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여전히 하얀 얼굴과 경계하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 뭔가 다 귀찮다는 듯한 뚱한 표정마저도 정말 너무 귀여웠다. 수연을 힐끔대는 남자들, 특히 앞에서 수줍은 듯하면서도 내내 수연만 보고 있는 윤성이 거슬려 부러 더 수연을 챙겼던 것도 있었다.

어쩌다 합석한 도재가 수연을 보고 조금 놀라는 것 같았을 때는 괜한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형이 수연이한테 반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따지고 보면 그간 봐 온 도재의 외모적인 이상형은 수연에 가까우니까. 그러나 다행히 도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두근거렸던 술자리가 파하고 거의 어깃장을 놔서 수연을 데려다주는 길. 어둑한 골목길을 걷는데 새삼스럽게 묘해졌다. 그 얼굴 한번 보려고 한때 그렇게 오갔던 길을 수연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다니. 어쨌든 수연은 틱틱대면서도 저를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번호 좀 알려 줘.’

제가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 수연의 입에서 나온 순간, 세상을 온통 다 가지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감상이 들었다.

그 후의 일들은 현재의 생각보다도 더 좋은 쪽으로 가파르게 흘러갔다. 그의 인생이 늘 그러했듯이.

수연과 같은 조가 되고 형의 가게에서 함께 술을 마신 날, 오늘도 데려다줄 수 있냐고 제게 속삭이듯 묻는 수연의 행동에는 정말로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일단 물꼬를 트긴 했지만 앞으로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다가와 주니 기쁘고 반갑다 못해 정신이 다 혼미했다.

그리고 드디어 고백의 날, 입을 옷을 몇 번이나 고르고 할 말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입시 치를 때에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나도 너…… 좋아해.’

돌아오는 답은 수줍다기보다는 어쩐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말이었다. 가슴 한쪽이 못 견디게 찡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수연도 저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연과 제 마음이 절대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 좋았다. 원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편인 수연이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 황홀했다. 모든 것을 천천히 다가가고자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저도 모르게 수연을 꽉 끌어안아 버릴 정도로.

‘내가 정말 잘할게.’

수연에게 말하며 현재는 속으로 무언의 다짐을 했다. 가벼운 감정이든 순간의 변덕이든 간에 그녀의 의지로 제 품에 안긴 수연을 절대 잃지 않을 거라고. 수단과 방법을 다 가리지 않고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 거라고. 풋풋한 첫사랑이라기보다는 조금은 꾸덕꾸덕하고 짙은 감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늘 바라보기만 했던 대상이 제 손에 알아서 들어왔는데, 놓아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그렇게 현재는 난생처음 연애란 것을 하게 되었다.

무료함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느낄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솜사탕 위를 걷는 것같이 둥둥 뜬 기분의 날들이 이어졌다. 수연과 함께하는 그 어떤 것도 좋았다. 늘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을 때는 신분이 상승된 기분이었고 학식을 함께 먹고 도서관에 같이 가는 사소한 일상이 다 설레고 소중했다. 가끔이지만 밖에서 하는 데이트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첫 키스도. 하루하루가 현재에게는 기분 좋은 자극의 연속이었다.

―일어났다고……그만 끊어.

“응, 1분만 더 있다가.”

―1분은 무슨…… 10분이겠지…….

들켰네. 멋쩍게 답하는 와중에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연의 귀여운 포인트는, 저렇게 불퉁대면서도 제가 먼저 팩 끊어 버리는 일은 없단 거에 있었다.

“오늘은 모카라떼 말고 다른 커피 사갈까?”

―그만 사……남들이 오해해.

“왜, 내 커피 사는 김에 사는 건데.”

―어휴…….

제 말에 한숨 쉬는 것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드물게 일찍 일어난 도재가 살짝 열린 방문을 흘깃대고 지나가는 게 보였지만 통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사귄 지 초반부터 현재는 제 의지로 매일같이 알람을 해 주고 있었는데, 아침잠이 많은 수연이 자다 일어나 약간의 짜증을 섞어 웅얼대는 목소리가 너무 귀여웠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되게 손 많이 가고 예민한 작은 동물을 키우는 느낌이랄까? 근데 또 못 견디게 귀엽고 예뻐서 까칠한 반응에도 자꾸 건드리게 되는.

이제는 모닝콜을 해 줄 수 없는 주말이 조금 서운할 지경이었다. 수연은 가끔 부담스러움을 대놓고 표시했으나 현재는 잘 보이려 무리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제가 좋아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들이었다.

뭐, 딱 하나 불만이라면 남들에게는 비밀인 관계랄까.

원래도 거슬렸던 수연을 향한 관심들이 사귀고 나서는 더 불쾌해졌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도 있었다. 또한 굳이 더 하나를 더 꼽는다면…… 사실 이건 불만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묘한 거리감이랄까?

현재는 가끔 수연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애초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지만, 사귀면 사귈수록 묘하게 감이 어긋나는 느낌이 분명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받아들여졌다는 것만 해도 좋아서 앞뒤 판단이 잘되지 않았는데…… 뭐, 지금도 그건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조금 진정해 보니 수연은 제 옆에 있으면서도 저를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따지고 지나가기에는 애매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어쩐지 불안한. 물론 당연히 제 착각이길 바라는 찝찝한 감이었다.

수연이 유일한 친구라 부르는 그녀의 동창을 만났던 밤.

현재는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각에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이미 잘 자라고 문자까지 보내 놓고도, 읽긴 했지만 답이 없는 수연의 별다를 것 없는 행동이 오늘따라 좀 원망스러웠다.

그나마 수연이 집에 있는대서 다행이었다. 밖에서 마신다고 했으면 데려다준다는 명목하에 수연 모르게 술집 앞을 지키고 있었을 것 같다.

미친놈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가끔 여친이 술 마시면 불안하다는 말을 옆에서 들을 때 그 정도의 믿음도 없이 만나냐며 속으로 혀를 찼는데,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수연을 못 믿는 게 아니라, 꼬여들 날파리들을 못 믿는 거였다.

연애라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감정 소모를 수반하는 행위였다. 어쨌든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자야지,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액정을 바라보았다. 수연이었다. 웬일이지?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연아, 불렀는데 어쩐지 감이 멀었다.

“수연아?”

취해서 잘못 눌렀나, 여전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 핸드폰을 귓가에 더 가까이 붙이며 현재는 잠자코 수연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엄마…….

“…….”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는데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현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술에 취한 수연이 아마도 착각해 전화를 건 듯했다. 잘못 걸었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띄엄띄엄 이어지는 한숨 같은 말들을 듣고 있자니 차마 그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가 정말 미워. 지긋지긋해.

―그래도 전화 한 통을 안 하네…….

조금 뭉개져 웅얼거리는 말들을 듣고 있는데 가슴이 아팠다. 수연이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수연은 그 뒤에도 푸념 같은 말을 조금 더 했다.

―나 힘들어.

―외로워.

―혼자 자는 거 싫어. 옛날부터 그랬다고. 엄만 모르지?

어느 순간, 어린애 투정과도 같은 말들이 쏟아질 때는 솔직한 말로 충격이었다.

분명 물기가 담겨 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애처롭다 못해 심장이 자글자글 끓었다. 단단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는 안에 있는 한없이 약한 것을 보니 안타깝고 안쓰러우면서도, 제가 그렇게 아무것도 의지가 안 되나 싶어 조금 울컥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꼭 끌어안고 울지 말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나한테 말해 주지. 힘들다고, 외롭다고.

물론 사귄 지 얼마 안 되고, 많은 것을 털어놓기에는 아직 설익은 관계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외롭지 않게 계속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술김에 털어 놓는,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수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고스란히 현재의 가슴에 와 박혔다. 어느 순간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현재는 한참 동안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저를 보고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는 수연 앞, 저도 잠결에 받았다 그대로 다시 잤다는 말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했다.

“내가 뭐…… 다른 말 한 건 없지?”

“응? 그냥 숨소리만 나던데. 네 이름 몇 번 부르다가 나도 그냥 잤나 봐, 피곤해서.”

“……그래.”

미심쩍은 듯하면서도 안도하는 표정을 보는데 또 한 번 가슴이 아렸다. 나는 절대 너를 외롭게 하지 않을 거야, 현재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했다. 어젯밤 수도 없이 했던 다짐이기도 한 그 말을.

수연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렇게 쏜살같이 흘렀다. 현재의 하루는 수연으로 시작해서 수연으로 끝났다. 늘 제 몸 챙기는 것은 뒷전인 수연에게 해 줄 것을 생각하고 실천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제가 없으면 밥 한 끼도 제대로 안 먹을 수연의 상태를 알게 된 후로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 형이 그랬다. 너 같은 애가 한번 빠지면 무섭다고 혀를 끌끌 찼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너무 즐겁고 좋았다. 현재는 제 애인에게 정도를 모르고 몰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수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양한 모습으로 현재를 도무지 정신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아서 그게 더 문제였다.

어디서나 당당하고 똑 부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알고 보면 수연에겐 은근히 순진하고 여린 면이 있었다. 넘겨짚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지 않은 게 많이 티가 났다. 일례로 당장 첫 야외 데이트였던 수목원을 갔을 때에도 떨떠름하게 처음 와 보는데 생각보다 되게 좋다, 라고 말했으니까. 내심 시시하다고 할까 떨었는데 꽃과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커다란 눈망울에 또 한 번 반했었다.

그 밖에도 수연이 가진 수많은 의외성 중에서도 현재가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눈치를 상당히 많이 봤다. 물론 본인은 아마 모르는 것 같지만……. 예를 들어 지금처럼.

“이제 시험 기간이니까 당분간 만나지 말자.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수연을 집에 데려다주던 길, 밑도 끝도 없이 나온 폭탄 같은 말에 현재는 당황해 반문했다.

“……어? 잠깐도 못 보는 거야?”

“잠깐이 잠깐이 안 되잖아. 나 집중하다 깨지는 거 진짜 싫어해.”

“문자나 전화 같은 건 되지?”

“……안 하는 게 좋을걸. 폰 꺼 놓을 거니까.”

그렇게 샐쭉하게 말해 놓고 꼭 슬쩍 제 눈치를 봤다. 솔직히 당장 수연을 못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으나, 까칠하게 해 놓고 제 심기를 살피는 듯한 표정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현재는 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누가 보면 몇 년 떨어져 있는 줄 알겠네. 당장 내일 아침에도 보거든?”

“이렇게 손도 못 잡고 뽀뽀도 못 하는데?”

은근슬쩍 허벅지 위에 올려진 수연의 손 위에 손을 포개니 수연이 운전에 집중하라며 매몰차게 손을 빼 버렸다. 흐음, 아쉽다는 소리를 낸 현재는 정말 앞만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하는 척했다.

아닌 척 저를 흘금대는 수연의 시선에 자꾸 입술이 움찔대는 것을 꾹 참느라 더 무표정이 되었다. 얼른 차를 멈추고 둘만 있는 곳으로 가서 저 새침하다 못해 앙큼한 입술을 벌리고 그 안을 헤집고 싶었다. 적어도 수연은 몸을 맞대는 순간만큼은 솔직했으니까.

결국 수연의 집 앞 으슥한 골목에서 한참이나 키스하고 나서야 그녀를 들여보낼 수 있었다.

‘진짜 내일부터는 못 만나는 건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갑자기 울적해졌다. 그래도 끼니는 잘 챙겨야 할 텐데.

‘저녁만이라도 같이 먹자고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가던 현재가 흠칫했다. 현관 옆, 도재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상당히 음침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렸지. 나 쉬는 날 같이 한잔하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나 참.”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현재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형이 저를 예의 주시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수연이 하도 비밀 유지를 원해서 괜히 노파심에 말하지 못했다.

“말만 그렇게 하고 다른 데 놀러 갈 줄 알았지. 그…… 누구더라.”

“현서? 걔랑 깨진 지가 언젠데 그 소리야.”

그건 또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현재는 도재의 문란한 여자관계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형은 이제 연애 좀 쉬어.”

“연애가 아니고 기분 전환.”

“상대도 그렇게 생각한대?”

“응. 처음엔 다들 동의하고 시작하는데 꼭 얼마 못 가서 뒤통수를 친다고.”

뻔뻔한 대꾸에 현재는 한숨을 쉬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무래도 도재가 작정을 한 것 같으니, 곧바로 들어가 씻는 건 조금 후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그 옆을 도재가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마주한 눈빛은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진지했다.

“연애하는 건 이미 알고 있고.”

“…….”

“혹시 걔냐? 왜, 개총 뒤풀이 때 네 옆에 있던 애.”

현재는 부정하려 했으나, 끈질긴 도재의 질문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형한테만은 수연의 존재를 알리고픈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래.”

조금은 멋쩍게, 수연과 사귄다는 말을 전하는 저를 바라보는 도재의 표정에 현재는 사실 놀랐다. 물론 좀 갑작스럽고 의외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형의 눈빛은 경악을 넘어 오버 조금 보태서 연인의 배신을 목도한 그것 같았다.

“뭐, 잘 만나 봐. 연애도 많이 만나 본 사람이 잘한다더라.”

그러나 이내 다시 표정을 풀며 제 어깨를 툭툭 치는 도재에 현재는 이내 안심했다. 언제 한번 소개해 주라는 말에는 괜히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형한테 빨리 제 애인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순조로운 연애를 지속하던 중이었다. 조금씩 제게 마음을 여는 수연에게 현재는 제 몸도 마음도 모두 내주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고 의미 있어서, 사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던 시점에서 현재는 도재를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했다. 도재가 수연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게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재의 여자 친구인 희진과 넷이 자리를 만든 그 순간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이건 쌍둥이만의 감이었다. 물론 이해했다. 제게 유난인 형이니까.

‘괜히 얘기했나.’

그러나 알면서도 기분이 꽤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제가 수연에게 어지간히 빠져 있나 싶었다. 형이 저를 걱정하고 신경 써서 그렇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감정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달까.

더군다나 저를 제외한 타인에게는 그렇게 무관심한 수연이, 도재 앞에서는 은근히 감정 표현을 잘 하는 게 보여서 더 난감했다. 물론 좋은 쪽은 아니고 누가 봐도 도재를 좀, 싫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사랑은 사람을 상당히 치졸하게 만든다는 것을 현재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묘하게 저를 비껴나 시선을 마주치는 도재와 수연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은연중에 도재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굳는 수연의 얼굴에서도, 분명 수연에게 흠뻑 빠진 저를 알면서도 은근슬쩍 다른 여자를 자꾸 소개해 주려는 도재에게 싸늘하게 일갈하면서도.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싸한 감은 있었어도 그럭저럭, 넘길 만했다. 하지만.

“왜, 고딩 때 기억 안 나? 나 그때 네가 강진욱한테 하는 거 보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 도재에게서 나온 말에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당황한 빛을 숨기지 못하는 수연의 얼굴을 보자니 더 기분이 묘했다. 수연의 친구와 사귀다 안 좋게 헤어져 수연이 저를 싫어한다는, 얼핏 허술한 듯하면서도 그간의 행적으로 아예 가능성이 없진 않는 도재의 말을 왜인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수연의 옆에 있었지만 현재는 가끔 마음이 복잡했다. 제 형에게 캐묻기도, 수연에게 꼬치꼬치 묻기도 어느 것 하나 내키지 않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있었을까?’

‘형이라면 그런 걸 딱히 부끄럽게 생각할 사람은 아닌데.’

단순히 그런 일로 서로 껄끄럽다기에는 둘의 반응이 과했다. 적어도 현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럴듯한 상상을 했다.

‘……설마 둘이 사귀었었나.’

차라리 이 가능성이 제일 맞아 보였다. 제가 한 생각에 제가 상처받는 찰나, 언젠가 진실 게임을 할 때 제가 처음이라던 수연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종종 냉소적인 어투로 현재를 가슴 아프게 하는 면이 있는 수연은 그래도 절대 거짓말은 안 했다. 고등학생 때의 연애는 카운트를 안 할 수도 있지만, 현재는 수연을 믿고 싶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사귀었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잖아.’

지금 수연의 옆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물론 최악의 가정이라지만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리고 현재는 그 자리를 그 누구에게도 뺏길 마음이 없었다.

*

안 그래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불안한 느낌이 있는 수연인데 도재의 일까지 겹치니 현재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현재도 사람이니 가끔 무심한 수연의 태도에 서운하고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은 가실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아주 가끔은 현재는 저를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듯한 수연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럴 때.

“잠 온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수연이 제게 엉겨 붙었다. 먼저 이렇게 안겨 오는 것을 보면 꽤 취한 모양이었다. 현재는 익숙하게 수연을 품에 안으며 조그마한 술상을 저만치 밀어 버렸다.

스물세 살도 얼마 남지 않은 겨울날, 조촐한 둘만의 송년회를 가진 장소는 수연의 집이었다. 연말 내내 바쁜 도재를 도우러 간 현재였지만 오늘만큼은 수연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여기보다는 제집이 훨씬 여러모로 편했지만, 수연이 도재를 의식해 가지 않으려는 것을 알아 굳이 고집하지는 않았다. 사실 미리 호텔을 잡아 놓긴 했는데 수연이 돈 그만 쓰라고 해서 취소했던 터였다.

“그만 잘까?”

“응…… 근데 좀만 이러고 있다가.”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대는 수연을 안고 있는데 마음 한쪽이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드물게 풀어진 모습의 수연 앞에서 현재는 늘 무방비했다.

수연은 평소 제가 술이 세다고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명제였다. 분명 잘 마시는 편이고 주사도 없었지만 아주 가끔, 저와 편하게 마신 날이면 이렇게 먼저 애교를 부리고는 했다. 특히 집에서 긴장을 풀고 있을 때는 더 그런 성향이 있었다. 남들은 절대 모를, 저한테만 보여 주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오는 깊은 만족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 있잖아.”

앉은 채 제 무릎 위에 올라온 수연의 등을 살살 쓸어 주며 현재는 입을 열었다. 응, 한 박자 늦게 수연이 답했다. 그의 어깨를 잘근잘근 물면서. 수연은 아마 제가 취하면 이렇게 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절대 모를 거였다. 물론 현재는 수연이 제 어깨가 아니라 몸 전체를 깨물어도 좋았지만.

“생각해 봐.”

“뭘.”

“졸업하고, 좋은 데에 취직했어. 일하다가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

“……그때도 우리가 사귀고 있을까?”

수연이 취한 걸 아니 하는 얘기였다. 아무리 현재라도 맨정신으로 물었다가 돌아올 답에 충격받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현재의 물음에 천천히 품에서 얼굴을 뗀 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는 제 말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보며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글쎄. 모르겠는데.”

“아…….”

이건 좀 많이…… 가슴 아픈데. 술김이라지만 역시 수연은 솔직했다. 언젠가 결혼을 생각한다는 제 말에 당황하던 수연을 알아 최대한 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았을 속내를 털어놓는 등 꽤 제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차오르는 씁쓸함에 현재는 다시 물었다.

“왜 몰라. 나랑 헤어질 거야?”

헤어지다니. 제가 뱉어 놓고 부정한 말을 한 것 같은 후회에 현재는 미간을 좁혔다. 열 오른 뺨을 하고 현재를 멀거니 보던 수연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심란한 와중에도 꽉 깨물어 주고 싶게 깜찍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말 안 해.”

“뭐?”

수연은 정말 말을 안 하겠다는 듯 아예 샐쭉하게 고개까지 돌려 버렸다. 좀 더 다그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래, 취한 사람 갖고 뭔 말을 하겠어. 물론 쓰린 속은 어찌할 수 없어 잠시 마음을 추스르는데.

“현재야.”

“……응.”

갑자기 제게 얼굴을 바짝 붙여 오는 수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콩깍지 벗고 봐도 어느 곳 하나 안 예쁜 곳이 없는 수연이지만, 현재는 수연의 눈이 제일 예뻤다. 그리 짙지 않은 쌍꺼풀이 있는 맑은 눈은 유독 동공이 새까맣고 크다. 얼핏 무심한 듯하지만 수많은 감정을 품고 있는 눈빛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으면 속절없이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보던 수연이 눈을 깜박였다.

“나 예뻐?”

“…….”

얘가 오늘 작정했나, 현재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미인계에 속절없이 당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냥 미치게 이쁘지. 사람 돌아 버리게 예뻐.’

격하게 답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현재는 순순히 답했다.

“응.”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하하, 현재의 말에 수연이 눈을 접어 웃었다. 꽃같이 번지는 화사한 웃음이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그것을 신호라도 된 양 지그시 아랫배가 당겼다. 사실 수연이 제게 안길 때부터 이미 조금씩 묵직해지고 있던 터였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이 갑자기 현재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키스할 것처럼 입술이 가까워졌다. 수연이 킥킥댔다.

“뽀뽀하고 싶지.”

“응.”

현재는 냉큼 답했다. 어디 뽀뽀만 하고 싶겠는가. 당장이라도 눕혀 놓고 이런 저런 것 다 하고 싶지만 오늘은 가만히 방에서 손만 잡고 잘 생각이었다. 옆방은 얼마 전 이사 나가 공실이라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곧바로 대답하는 현재를 보며 수연이 흐응, 입술을 삐죽였다.

“난 안 하고 싶은데.”

“…….”

아주 날 말려 죽일 생각인가. 꼿꼿이 서 있는 제 것에 비벼지는 하체에, 현재는 안 하던 욕이 잇새로 흘러나올 정도로 흥분했다. 꼬리 백 개 달린 여우가 앞에서 살랑거리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에는 그렇게 새침하고 차갑다가 이렇게 한 번씩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줄 때면 정말 어쩔 줄 모르겠는 게. 진짜 알면서 당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평소 그런 모습도 제 눈에는 지극히 사랑스럽고 귀여웠지만. 얼굴도 성격도, 제가 챙겨 줘야 할 것 같은 어설프고 약한 부분까지도. 수연은 현재의 취향을 모조리 때려 박아 만들어진 피사체였다.

“왜 안 하고 싶어, 응?”

현재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지그시 살 오른 엉덩이를 쥐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맨투맨을 들추고 아예 속옷 안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무르니 수연이 몸을 들썩였다. 그 반응에 이제는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입고 있는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현재는 더 참지 못하고 수연에게 입을 맞췄다. 으응, 사람 환장하게 하는 소리를 내며 키스를 받아 주던 수연이 갑자기 인상을 쓰며 얼굴을 뒤로 물렸다. 열에 들뜬 눈으로 현재가 다시 수연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오려는데.

“안 씻었잖아. 안 해.”

매몰차게 몸을 떼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수연에게 덜컥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피곤하고 심지어 열이 펄펄 끓어도 무조건 씻고 나서야 침대에 드는 수연을 알긴 했지만.

“먼저 꼬셔 놓고 이러기 있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언제?’라는 듯한 시선을 받는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웃을 때가 아닌데. 현재는 입술을 깨물며 슬쩍 제 아래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봐. 네가 와서 비비니까 이렇게 됐잖아.”

시선을 따라가던 수연이 흠칫한 눈빛으로 몸을 더 뒤로 물렸다. 그 찰나 조금 멀어진 거리가 싫어 다시 품에 꼭 당겨 안았다. 수연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가만히 제게 안긴 채 종알거렸다.

“……난 딱히 뭐 한 거 없는데.”

“난 네가 쳐다만 봐도 서.”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병원 갈 필요가 뭐가 있어.”

헐렁한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봉긋한 가슴을 현재가 한번 부드럽게 쥐었다 뗐다. 수연은 관계할 때도 가슴을 빨아 주거나 만져 주면 유독 더 흥분했다. 하얀 손을 슬쩍 끌어다 제 것 위에 놓으니 수연이 파드득 손을 뗐다. 현재는 부러 더 능글맞게 말했다.

“네가 좀 만져 주면 금방 풀리는데.”

“변태 같아.”

하하, 곧바로 돌아오는 뼈 때리는 말에 현재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수연과 이렇게 몸을 맞대고 꽁냥대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그대로 끌어안고 목에 입술을 묻으며 바닥을 뒹굴자 수연이 질겁하며 제 어깨며 등을 퍽퍽 때렸다. 제 딴엔 힘을 준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아프고 좋았다. 오히려 더 세게 때려도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좀 정상 같지는 않았지만. 한참 그러고 있다 결국 겨우겨우 몸을 떼고 욕실로 쪼르르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그래. 이거면 됐지, 뭐.’

욕심내지 말자. 당장 1년 전만 해도 수연과 이런 사이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현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더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다. 형은 형이고, 수연은 수연이다. 형 말이 다 맞을 거다. 제가 수연을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괜히 예민해졌을 것이다.

얼마 후, 현재도 뒤따라 씻고 온 사이 수연은 이미 누워서 눈을 감은 채였다. 잠든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씻어.”

불을 끄고 조심히 옆에 누우니, 그새 깼는지 수연이 중얼대며 제 품 안에 파고들었다. 잠기운이 가득 묻은 목소리는 애교 있었고, 씻고 나와 따끈해진 부드러운 몸은 직전 샤워에서 수연을 생각하며 했던 행위가 무색하게 유혹적이었다.

갈증 같은 성욕이 순간 확 솟구쳤으나, 현재는 개의치 않고 그저 수연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현재는 섹스할 때 욕망에 솔직하고 의외로 적극적인 편인 수연도 좋아했지만, 이렇게 저 좀 예뻐해 달라는 듯 가만히 안겨 오는 수연도 그와 똑같은 선상에서 좋아했다. 몸을 겹쳐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좋았다.

“피곤하지, 얼른 자자.”

“우응.”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느라 뭉개진 발음이 들려왔다. 귀여워, 잠시 애 다루듯 토닥이던 현재는 무심코 드는 생각에 조심히 물어 보았다.

“수연아.”

“…….”

“수연아.”

“……왜.”

자라고 해 놓고 왜 부르냐는 듯한 뚱한 대답이었다. 피식 웃은 현재가 물었다.

“지금, 외로워?”

그 언젠가 저를 엄마로 착각해 전화한 후 울며 뱉던 말들 중에서 제일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던 단어. 외롭다는 말. 혼자 자는 게 싫다고도 했었지. 후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문득 그것이 생각나 물어보았지만 속은 제법 시끄러웠다. 아까 졸업하고 나서도 우린 사귀고 있을까, 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던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으응? 내가?”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수연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슬쩍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뭐가 외로워?”

네가 옆에 있는데, 덧붙인 수연은 별 걸 다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뭐라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충족감이 들었다. 현재는 한동안 잠들지 못하고 수연의 잠든 얼굴만 바라보았다.

*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조금 늦은 점심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도재의 눈빛이 퍽 매서웠다. 현재는 별다를 것 없는 투로 답했다.

“그냥. 나도 슬슬 혼자 살아 보고 싶어서. 예전부터 생각하긴 했었어.”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사실 난 집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는데. 뭐 하러 두 집 살림을 해.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훨씬 편한 게 많은데.”

“…….”

다 맞는 말이라 잠시 침묵했다. 그 잠깐의 정적을 견디지 못한 도재가 다시 물었다.

“차수연 때문에 그래? 나 있으면 집에 잘 못 데리고 오니까?”

“아냐.”

맞지만, 부정했다. 더 솔직히 얘기하면 집에 올 때마다 수연이 도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즉각적인 반응에 도재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려 웃었다.

“아니긴. 너 진짜 걔 만나고 이상해진 거 알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오죽하면 어머니가 나한테까지 다 전화를 하셨겠어? 이번에 2주만 있다 간다는데 왜 그러는지 넌 아냐고. 얼마나 서운하시면 데면데면한 나한테까지 물으셨을까.”

“……그건 내가 가서 잘 말씀드릴게.”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출국에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였다. 잠시라도 수연과 떨어지기 싫은데. 수연은 제가 없어도 잘 먹고 잘 잔다고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당장 제가 없으면 잘 안 챙겨 먹을 게 뻔했다. 또 초콜릿이나 과자 부스러기로 끼니를 해결할까 걱정되어, 집 이야기를 마치면 근처 마트에서 장을 좀 봐 놓을 계획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동거를 해?”

“동거라니. 아니야.”

“너 하는 거 보면 그렇게 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형 하나도 동거했다가 어물쩍 발목 잡혔어. 피임한다고 철저히 했는데도 임신돼서. 양가 부모님 다 결사반대해서 혼인 신고만 겨우 하고 둘이 사는데 사는 게 말이 아니더라.”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는데?”

현재의 단정한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하, 과장된 한숨을 내쉰 도재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왜긴, 걱정되니까 그렇지. 이거야 뭐, 첫 연애를 너무 과하게 하는 거 아니야? 어머니 아셔 봐. 당장 한국 들어오실걸. 굳이 나가서 사는 거 아니라도, 네가 걔한테 하는 것 보시면 뒷목 잡고 쓰러지실 거야. 이건 뭐 남친이 아니라 거의 남편 수준으로 챙기잖아, 아니, 남편도 웬만큼 자상하지 않고서야 그렇게는 못 할걸. 당장 나만 해도 그렇게 못 해.”

“…….”

타박하는 말투에도 현재는 일단 침묵했다. 도재의 기분이 상할 것은 충분히 예상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제 형과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걘데?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면 내가 다른 여자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솔직히 난 걔 얼굴 빼고는 뭐가 너한테 그렇게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딱 봐도 차갑고 냉정하고 너랑 안 어울려. 왜 너 아니어도 상관없는 여자애한테 목매서 너답지 않게 구는 거야? 걔는 너 없어도 잘 살아. 네가 그렇게 정성 바쳐서 수발들 애가 아니라고.”

“……수연이를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조용히 뇌까리는 현재의 말에 멈칫하던 도재가 이내 답했다. 뭐, 동창이니까. 석연치 않은 답이었다. 너 아니어도 상관없는, 너 없이도 잘 사는. 누구보다 저를 잘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에게서 듣는 말이라 더 마음이 쓰렸다.

“차수연 마음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는 진지하다는 거 알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널 모르겠어? 너 걔랑 끝까지 가고 싶잖아. 넌 원래 그랬어.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거 욕심도 없다가 뭐 하나 꽂히면 은근히 고집 세서 아무도 너 못 꺾었지. 근데 걔랑 너는 미래 없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말을 잇는 도재를, 현재는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알고 있을 것 같지만, 걔 아버지는 진작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술집을 오래 했어. 좀…… 불법적인 것도 하는 그런 술집. 우리 아버지도 한때는 뻔질나게 거기 드나들었고. 그래, 물론 그런 게 절대 걔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아시면 기함하실걸. 너도 어머니 잘 알잖아.”

“계속해.”

“현재야.”

“난 형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숨을 한번 크게 내쉰 현재가 무겁게 덧붙였다.

“내가 당장 수연이랑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나야 같이 살면 좋지만 동거는 절대 아니야. 수연이 졸업반이라 안 그래도 많이 못 만날 것 같고. 물론 걱정할 수 있지. 그렇지만 수연이 부모님 이야기까지 들먹이면서 내 앞에서 이러는 거, 솔직히 이해가 안 돼.”

“…….”

처음으로 도재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도재는 현재가 지금 감정을 추스르려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빛만 봐도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이자 유일하게 제 옆을 항상 지켰던 가족. 그게 저희였으니까.

그 언젠가 결혼식도 합동으로 하고 옆집에 살자는 제 말에 웃으며 그러자고 말했었던 제 동생 현재.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는, 여러모로 하자 많은 저와는 다르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또 다른 자신.

현재를 잘 아는 만큼 도재는 불안했다.

물론 그들이 결혼까지 골인할 확률은 한없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함께 있는 둘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도재는 그들의 미래를 예상하는 것만으로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혹시나, 아주 만약에 정말 둘이 결혼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당연하지. 차수연은 순진한 내 동생을 갖고 놀았으니까.’

도재는 수연만 생각하면 명치께가 체한 것처럼 답답해져 오는 이유를 모두 그것으로 치부했다. 사실 달리 이유가 또 뭐 있겠는가.

자신은 어디까지나 현재를 위해서 이러는 거였다.

“현재야.”

“어.”

“지금 내가 할 말, 진짜 이해 안 되고 좆같이 들릴 거 다 아는데.”

도재는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가만히 앉아 있는데 전력 질주한 사람처럼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그래도 형으로서 한 마디만 할게.”

“…….”

“걔랑 헤어져.”

충격을 받은 듯, 급속도로 침잠하는 눈빛과 직면하고도 도재는 멈출 수 없었다.

“차수연은 너 안 좋아해.”

“……왜 아까부터 자꾸 그런 소리를 하지?”

“하, 내가 진짜……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긴, 현재 입장에서 보면 제가 유난이다 못해 미친놈처럼 보일 거였다. 차라리 다 말해 버릴까. 아무리 수연에게 푹 빠져 있는 현재라도 수연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접근했는지 알면 정이 떨어지겠지. 도재는 찰나 치열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딱 봐도 보이니까. 원래 이런 건 제삼자가 더 잘 보는 거야.”

왜 하필 그때, 둘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차 안에서 들켰을 때 파리하게 질렸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감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늘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동요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나 좋다고 했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나?’

희미해진 과거의 일을 잠시 상기하던 도재는 뭔가를 꾹꾹 눌러 참는 것 같은, 싸늘한 현재의 얼굴에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재는 이 역시 충격받을 현재를 위해서라고 결론지었다. 현재가 알면 정말 충격받을 테니까.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꺼낼 패로 미뤄두자.

두 남자 사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현재는 도재를 지그시 응시했고, 도재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형.”

“……어.”

“형이 뭐라 해도 나 수연이랑 헤어질 마음 없어.”

“…….”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형이 이러는 거 정말 이해 안 되는데. 나도 하나만 물을게.”

“……뭔데.”

“수연이랑 원래 아는 사이였다는 거 말 안 한 이유가, 정말 나한테 말한 그 이유에서인 거 맞아? 수연이 친구랑 사귀었다가 안 좋게 헤어져서.”

“그럼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정곡을 찔린 도재가 부러 더 과민하게 반응했다. 현재가 낮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미묘하게 흔들리는 도재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던 현재가 말을 이었다.

“이미 잘 아는 것 같지만, 나 수연이 정말 좋아해.”

“…….”

“어느 정도냐면 수연이가 지금 동의만 해 준다면 당장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결혼이 아니라면 혼인 신고라도 하고 싶어. 법적으로 묶여 있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거 아는데…….”

“응, 당연히 말도 안 되지. 미친 생각이야.”

성급하게 제 말을 자르는 도재에 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일단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 앞으로는 나도 더 열심히 해서 졸업 후에 수연이 성에 차는 남자가 되려고. 수연이한테 밑지는 남자 되면 안 되잖아.”

“그건 또 뭔 소리야, 네가 뭐가 밑지는데?”

“뭐, 더 잘난 것도 없잖아? 형이 아까 수연이 부모님 이야기 한 김에 하는 말인데, 나는 그런 환경에서 혼자 씩씩하게 해내고 있는 수연이가 정말 대단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

현재는 드물게 제 앞에서 날 서 있는 형을 복잡한 심경으로 응시했다.

“자꾸 외모, 외모 하는데 나는 수연이를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냐. 그래, 물론 예쁘지. 근데 그럼 수연이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나면 마음이 달라질까? 아니잖아. 솔직히 처음에는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걔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근데 만나면 만날수록 더 마음이 가더라고. 걔가 내 마음을 잡아 두는 면이 있어. 수연이가 나한테만 온전히 마음을 주고 의지하는 것을 보면…….”

말을 잇던 현재는 순간 드는 울컥함에 깊게 숨을 한번 들이켰다. 잠시 2주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에 심드렁하게 그래, 하면서도 서운한 낯을 얼핏 숨기지 못하던 수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나누며 같이 지낸 시간만큼, 현재는 처음에는 눈으로 보면서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수연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무심하고 도도하게까지 보이는 눈빛 안은 사실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타인을 경계하고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주기를 꺼리는 단단한 껍질 안에는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한없이 사랑에 목마른 아이 같은 미숙함과 순진함이 존재했다.

그런 그녀를 온전히 알아차린 어느 순간, 현재는 수연의 옆에 정말로 평생 있고 싶어졌다.

완벽할 것 같던 수연이 제게만 조금씩 보여 주는 약하고 모난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그 생각은 더욱더 굳어져 마음속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말로는 싫고 귀찮다고 하면서도 수연은 제가 주는 애정을 진심으로 거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회의적이면서도 사실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수연이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손 많이 가고 까칠하지만 그것조차도 기껍고 귀여운 애인. 알면 알수록 더 애틋하고, 더 욕심이 생기는 제 것을 현재는 절대 제가 먼저 놓을 마음도, 놓칠 마음도 없었다. 앞으로 혹시나 그 어떤 장애물이 생긴다 할지라도.

“암튼 갑자기 집을 나간다고 해서 당황스럽고, 서운할 수 있다는 거 충분히 이해해. 더 빨리 얘기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어머니한테 갔다 오는 대로 슬슬 구하고 나면…… 아마 빠르면 개강 전에는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실 아버지한테는 이미 말씀드렸어.”

“뭐라셔?”

“나도 혼자 살아 보고 싶다니까 그럴 수 있지, 하시던데. 형 안 외롭게 종종 올라오신대.”

“……아버지야 뭐 좋은 게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우리가 뭘 해도 반대했던 적이 있었어?”

“미안해, 형.”

“…….”

현재의 말을 입을 꾹 다문 채 듣고 있던 도재가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선연했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고서 한 번에 들이켜는 그를, 현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 한 번 떼지 않고 캔을 깔끔히 비워 낸 도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수연이랑 계속 만나면 내가 널 안 본다고 해도?”

“…….”

현재의 가지런한 눈썹이 들썩였다. 우뚝 선 도재가 다시 물었다.

“그냥. 극단적으로 묻는 거야. 지금에야 뭘 어쩔 수 없긴 한데. 아주 만약에, 나중에 말이야. 그런 일이 생기면 넌 어떡할래?”

지금 제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짐작되면서도 도재는 제멋대로 나오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라도 안심하고픈 심정이었던 것 같다. 도재는 정말로,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현재가 저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 길지 않은 침묵 후, 돌아오는 것은 현재의 무거운 목소리였다.

“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이런 기분일까? 도재는 순간적으로 제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다그치는 목소리 끝이 저도 모르게 조금 떨렸다.

“상관없다는 거야? 나랑 안 봐도?”

“상관없다는 게 아니라. 먼저 극단적인 예를 든 건 형이잖아.”

“아니, 씨발, 그러니까 그게 지금 네가 나한테 할 소리냐고.”

순간적으로 치솟는 배신감에 도재는 흥분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다 당겼다.

“아무리 여자한테 빠져도 그렇지 너 존나 너무한 거 아니냐?”

“…….”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을 하냐. 차수연은 남이고 우린 가족이잖아. 아주 만약에 걔랑 너랑 결혼해도 네 첫 번째는 나여야 하잖아. 걔가 도대체 어떻게 여우 짓 해서 너를 홀렸기에 네가 이렇게…….”

“형.”

서늘한 목소리에 도재는 움찔했다.

“나한테는 뭐라 해도 좋아.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수연이한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하, 아무것도 몰라?”

“그럼 수연이가 뭘 아는데.”

“아, 씹…… 그런 말이 아니고.”

도재는 이를 꽉 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후 한동안 제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현재에게 감정을 쏟아 부었던 것 같다. 현재는 제게 대꾸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을 피하지도 않았다.

“……모르겠다. 네 알아서 해.”

결국 제풀에 지친 쪽은 도재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엌을 빠져나가는 도재를, 현재는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 수연을 만나고 밤늦게 돌아오던 현재는 오는 길에 집 근처 막걸릿집에 들렀다. 유독 여기 파전을 좋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들르는 도재에게 줄 것을 포장하기 위함이었다. 두어 시간 정도 있으면 집에 올 테니 안 자고 기다릴 요량이었다. 딱히 무슨 얘기를 하기 위함은 아니고, 그냥……. 화해의 의미로.

어제 도재와 그렇게 해 놓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도 더 격한 반응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욱하는 면이 있는 도재였지만 그렇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드물었다. 오늘만 해도 제가 차려 놓은 아침 겸 점심도 먹지 않고 굳은 얼굴로 집을 나서던 제 형의 모습에 마음이 쓰였던 차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면이 있는 사장이 반겨 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포스 옆 조그만 테이블에 잠깐 앉는데.

“……현재 오빠?”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한 현재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 취기가 흠뻑 오른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여자가 낯이 익었다. 누구지, 누구였더라.

“저 까먹은 건 아니죠?”

“…….”

기본적으로 애교가 묻어 있는 목소리에 한 발짝 늦게 생각이 났다. 맞아, 희진이. 현재는 슬쩍 테이블을 보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여자 두어 명이 저를 보고 꾸뻑 고개를 숙였다.

“……아니지. 친구들이랑 왔어?”

“네에. 여기 파전 맛있잖아요. 오빠는 혼자 왔어요?”

“난 그냥, 포장해서 가려고.”

“아아…… 도재 오빠 주려고요? 그 오빠 여기 단골이잖아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현재를 보던 희진이 묘한 얼굴을 했다. 아예 제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기까지 했다.

“도재 오빠…… 잘 지내죠?”

“응.”

“……다른 여자 친구 생긴 건 맞고요?”

“지금은 없어.”

“그새 헤어졌구나. 하지만 곧 생기겠죠……?”

“…….”

이미 취한 얼굴을 하고 희진은 조금 더 말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도재에 대한 푸념이었고, 현재는 대꾸 없이 그것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타인의 술주정을 들어 주는 건 질색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조금 전까지 제가 품에 끼고 있던 제 애인이랄까. 사실 취한 수연이 하는 말을 주정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괜히 주방 쪽을 흘깃대던 현재가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저도 수연 언니처럼 예뻤으면 안 차였을까요?”

푸념 끝 섞여 있는 이름에는 저도 모르게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희진은 우울한 얼굴로 계속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도재 오빠 예쁜 사람들만 만났었잖아요. 무슨 모델에, 연예인 지망생에…… 하물며 직장인도 무슨 그 회사 광고 찍게 생긴 여잘 만나고. 아, 다른 건 알바 애들한테 들은 거구요…… 제가 실제로 본 건 XX 다닌다는 딱 한 명이었는데 그 언니랑 지금도 친구처럼 지낸대요. 밥도 먹고 가끔 술도 마시고. 말이 돼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다.”

“네…… 맞아요. 많이 마셨어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희진이 쓰게 웃었다.

“오빤 수연 언니랑 계속 만나요?”

“어.”

왜 자꾸 수연을 들먹이는지, 희진에게 일말의 연민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조금 불편해지는 찰나.

“도재 오빠가…… 저한테도 수연 언니 얘기 되게 많이 했거든요.”

“……형이?”

“네에, 왜, 동창이라 했잖아요. 아……! 이거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니, 아닌가? 오빠도 알고 있던가요?”

취해서 기억이 엇갈리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사장이 현재에게 포장 봉투를 건넸지만 현재는 곧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취한 사람 얘기를 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건 아는데, 어쩐지 제가 모르는 얘기를 하는 희진의 말을 바보처럼 가만히 듣게 되었다.

“알아. 왜?”

“아…… 다행이다! 그쵸, 오빠는 당연히 알죠. 암튼 도재 오빠가 술 마시면 꼭 수연이 언니 얘기 한 번씩 해서, 제가 사실은 조금 질투도 했었거든요?”

“형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별안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희진이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다시 초점이 흐려졌다.

“그냥 뭐…… 걔가 진짜 예쁘긴 예뻤다, 남자애들이 차수연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사족을 못 쓴다 뭐 그런 거죠. 그걸 왜 저한테 계속 얘기하나 했었는데 수연 언니가, 도재 오빠한테 고백했었다는 거 알고서는…….”

“뭐?”

저절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희진이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제 입을 꼭 틀어막았다.

“오빠는 몰랐어요?”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한 현재가 다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당황해 눈을 굴리던 희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고등학교 때였다고, 별거 없었대요. 언니가 좋아한다 했는데 오빠가 찼다고…… 그래서 제가 사람 인연 참 신기하다고까지 했거든요. 도재 오빠가 하도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해서 저는 오빠도 다 알고 만나는 줄 알았죠.”

“…….”

“저는 솔직히, 도재 오빠도 수연 언니한테 마음 있나라는 생각도 했거든요. 왜냐면 은연중에 수연이 언니 말을 많이 하니까……. 아니 뭐, 좋은 쪽으로 얘기하는 건 아닌데 자꾸 그러니까 듣기 싫잖아요. 사실 차인 것도 그렇게 싸운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 자기를 동생 여친한테 마음 있는 사람으로 모냐고 하고, 저는 그럼 왜 이렇게 수연 언니랑 섞여서 보려고 하냐 하고……. 그건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제가 좀 잘못했던 거긴 한데…….”

“그만.”

현재가 말을 잘랐다. 희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미 끝난 마당에 너도 형 그만 잊고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굳이 도재의 단골집에서 술을 먹는 심정이 이해 가면서도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말을 마친 현재는 저를 멀뚱히 앉은 희진을 두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돌아와서도 현재는 옷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한 채 널찍한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 중 현재를 괴롭히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정말 수연이가 형을 좋아했을까?’

갑자기 개총 파티 때가 생각났다. 그 후로 수연은 분명 제게 호의적으로 굴었다. 물론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것도 있지만, 현재의 기억에 그 호프집에서, 적어도 초반엔 수연은 제게 냉랭했었다. 그러고 보면 거기서 둘이 좀…… 묘했었나. 확신을 담은 도재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차수연은 너 안 좋아해.’

시곗바늘이 움직일수록 생각의 가지도 촘촘히 뻗어 나갔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 안의 남자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평소 살짝 찝찝한 정도로 넘겼던 감이나, 가끔 이해가 되지 않았던 형의 말들. 연애 초반 제 옆에 있으면서도 제 것 같지 않았던 수연이 그저 제 마음과 크기가 다를 뿐이라 여겼었는데.

‘설마.’

생각만으로 목구멍이 꽉 조여드는 감각이 불쾌했다. 현재는 불쑥 튀어나온 아찔한 가정을 애써 털어 넘겼다. 문득 도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홧김이라는 것은 알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던 그 말.

‘차수연이랑 계속 만나면 내가 널 안 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현재 역시 그답지 않게 흥분한 상태에서 한 말이었다. 당연히 진심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

풀리지 않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현재는 미국행에 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는 여전했다. 어마어마한 업무량에도 운동과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 면이나, 아무리 늦게 잠들고 심지어 휴일이라 해도 정시에 일어나는 칼같이 규칙적인 생활. 얼핏 보면 냉정하다 생각되는 말투.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얼굴 등.

미국에 와서도 현재는 수연과 계속해서 연락했다.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되고 계속 생각나는 게 각오했던 것보다 커서 너무 힘들었다. 이제 고작 사흘짼데 어떻게 버티나. 그런 생각과 함께 브런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던 어머니가 슬쩍 핸드폰을 곁눈질하며 물으셨다.

“여자 친구니?”

“네.”

“별일이네. 도재는 몰라도 너는 졸업하고 나서야 애인 만들 줄 알았는데.”

어머니 눈에는 아직도 한없이 제가 애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현재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학생이고?”

“네, 저랑 동갑이고 같은 학부예요.”

그 외에 별다른 것은 묻지 않았지만 현재는 어머니의 속이 꽤 복잡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젯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한국에 들어가면 집을 알아볼 예정이라는 말도 했었으니까. 현재는 수연에 대해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얘기하고 자랑하고 싶었으나 시기상조라 판단해 제가 배울 점이 많다는, 성실하고 착한 애라는 말만 한 마디 했다.

“연애는 적당히 하면 돼. 엄마처럼 너무 무리하다가는 사달 나니까.”

하지만 며칠 후. 영상 통화를 하던 중 수연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곧바로 한국에 들어가야겠다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결국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죄송해요.”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실지 알았다. 하지만. 다친 손으로 제대로 씻을 수나 있을지, 손 핑계로 잘 챙겨 먹지 않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것을 다 제쳐 놓고라도 수연이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현재는 다시금 다짐했다. 그런 취한 애 헛소리에 휘말려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말자고. 설령 사실이라도 어쩌겠는가. 보고 싶다는 제 말에 한참 있다가 나도, 라고 말해 주는 수연이 지금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리고 문제의 그날.

당장 2주 후로 정해진 이사에 필요한 것들을 산다는 명목하에 현재는 주말 내내 수연과 함께 있었다. 언제나처럼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간신히 돌려 집에 돌아갔다.

‘형 와 있으려나.’

여행을 다녀온 도재가 돌아와 있을 때긴 했다. 도재와는 분명 겉으로는 별다를 것 없이 지냈지만, 그렇다고 예전 같은 친밀한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원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면이 있는 도재지만 호프집을 시작하고서는 그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갑자기 문을 닫고 이틀 여행을 간다는 것도 그답지 않긴 했지만.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조금 더 진중하게, 진솔하게. 현재는 다른 사람도 아닌 도재와 해결되지 못한 찝찝함을 갖는 게 싫었다. 그러나 돌아온 집에 형은 없었다. 짐도 채 풀지 않고, 샤워를 하고 나간 것으로 보이는 흔적만 있을 뿐.

‘이 시간에 어딜 간 거야.’

뭐, 도재야 만날 사람이 넘치고 넘쳤지만 좀 느낌이 이상했다. 돌이켜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감이라는 거였나 싶었다.

현재는 찝찝한 기분으로 형의 짐을 정리해 준 후 저도 씻고 나왔다. 할 것은 많은데 이상하게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심결에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거푸 걸었는데도 받지 않았다. 물론 공부한다고 잘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거야 매번 하는 인사 같은 말이고 늘 뭐야, 하면서도 잘 받아 줬는데.

‘얼굴만 한번 보고 와야지.’

형의 부재와 수연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 둘이 전혀 연관 없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차피 자고 있지 않을 테니 한번 얼굴 보고 오는 게 뭐 그리 어렵나 싶고.

맹세코 그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이 기묘한 불안함을 해소할 사람은 제 품에 안기는 수연이었다. 그거 하나면 지금까지 다 괜찮아졌던 것처럼.

*

차에서 한 번 더 전화를 했지만 역시나 수연은 받지 않았다. 습관처럼 대 놓는 골목 한 귀퉁이에 차를 두고, 저만치 보이는 언제 봐도 마음에 안 드는 허름한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데.

“……!”

갑자기 굉음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그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이 동네 마음에 안 든다니까. 그러나 더 놀랄 것은 따로 있었다.

“미친 새끼네, 저거.”

밤이라서 유독 더 크게 들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 틈도 없었다. 모퉁이를 막 돌던 현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말 본능적인 감각으로, 현재는 저도 모르게 그대로 한 발짝 물러났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거나 예기치 못한 것을 보면 진짜 눈앞이 하얘진다는데. 무슨 뜻인지 뭔지 처음으로 알 것 같았다. 비록 찰나였으나 수연을 끌어안고 있는 제 형을 보는 순간 뒷골이 띵했다. 물론 수연이 곧바로 몸을 떼기는 했지만. 그 장면 자체가 너무 충격이어서 순간 다른 것들을 잊었다. 그러니까 왜 둘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와 같은.

다행인지 뭔지 둘은 자신의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현재는 한 발짝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언젠가 저만의 추억을 쌓았던, 수연을 처음 봤던 파란 지붕 카페 앞에서. 엿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워낙 조용한 골목이라 대화를 알아듣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도재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터뜨리는 수연의 목소리를 듣자니 괴로웠다. 알아듣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을 보기 힘들었다. 네가 오죽했으면 현재까지 그렇게 꼬셨을까, 라는 도재의 말에서는 정신이 혼미했다.

“차라리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받아 줬으면…….”

회한과도 같은, 어쩌면 도재의 진심일지도 모르는 그 말을 들었을 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현재는 그대로 뒤돌았다.

수연이 제 형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형과 재회한 후 제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지금 저를 향한 수연의 감정이 어떻든, 저를 향한 죄책감이든 미안함이든 시작은 그러했던 것이었다. 어렴풋이 각오했는데도 직접 사실 확인을 한다는 것에 대한 충격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더 나아가 그런 수연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보이는 제 형까지……. 멍한 정신으로 차로 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물질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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