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3)

10

이도재가 말한 카페는 수연이 몇 년 전 알바를 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사장도 바뀌고 인테리어도 좀 바뀌긴 했지만. 현재랑도 곧잘 가곤 했는데 이도재랑 여기서 만날 줄이야. 수연은 습관처럼 맨 구석에 앉고 싶었으나, 이도재는 당당하게 창가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는 반갑게 손까지 들기도 했다.

“넌 딱 봐도 이거 마실 것 같아서 시켜 놨는데. 맞지?”

누가 봐도 끌려 나온 것 같은 표정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는 수연에게 이도재가 물었다. 수연은 쌀쌀맞게 답했다.

“나 아메리카노 안 마시는데.”

“왜?”

“왜긴, 내 맘이지.”

“까탈스럽긴. 그냥 마셔.”

시킨 성의가 있는데, 덧붙이는 말 때문이 아니라도 속이 시끄러웠던 차였다. 수연은 컵을 잡고 유난히 더 쓰게 느껴지는 차가운 커피를 그대로 들이켰다. 순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차디찼다. 현재라면 절대 찬 거 안 시켜 놨을 텐데. 은근슬쩍 떠오른 생각을 수연은 얼른 털어 버렸다.

“…….”

커피를 마시는 수연에게 노골적인 시선이 따라붙었다. 막 씻고 나온 티가 나는, 아직 젖은 머리칼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편한 옷차림에도 숨겨지지 않는 은근하고 매력적인 몸의 선까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따라붙는 시선을 남자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이.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현재가 알려 줬을 거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냉담한 어투에 이도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 현재 잘 때 지문 인식했어. 필요할 거 같아서.”

“미친 거 아니야, 진짜?”

경악하는 수연을 보고도 이도재는 심드렁했다.

“다른 거 딱히 본 건 없고 번호만 봤으니까 안심해.”

“안심 같은 소리 하네. 집은 또 어떻게 알았는데?”

“내비게이션 기록에 있던데. 어차피 학교 근처랄 건 알았고.”

“하…… 너 스토커야?”

“그런 거 아니란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당당한 언행에 순간 욕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도대체 자신은 왜 저런 남자를 좋아했던 걸까? 수연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이도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알겠고 이제 말해 봐. 왜 갑자기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냈는지.”

“왜 그런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씩 웃은 이도재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여행을 다녀와도 피곤 하나 없어 보이는 남자의 반질반질한 낯이 수연을 마주 응시했다. 창밖 너머 내리깔린 어둠이 마음에 시커멓게 번지는 착각이 들었다.

“왜 현재랑 안 헤어져?”

“…….”

“이번까지 하면 세 번째 말하는 거야. 이제 아주, 없었던 일로 깔아뭉개고 가기로 한 거야? 철판 깔고 가는 거냐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말투는 험악했다. 그 반드르르한 낯과 마주하며 수연은 마음속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한 번쯤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 없었던 일로 할 건데.”

“…….”

“막말로 너랑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네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래, 물론 내가 처음에는 불순한 의도로 현재랑 만난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수연은 한번 깊이 심호흡을 했다. 직전까지 저를 보며 예쁘게 웃던 현재의 미소가 괜히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도 현재 많이 좋아해. 그럼 된 거 아냐?”

실상 현재에게도 그다지 많이 한 적 없는 말을 이도재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뻔뻔하게 들리더라도 진심을 말하는 게 수연이 생각한 최선이었다.

“……좋아한다고?”

이도재의 얼굴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웃음기가 빠진 날카롭게 빠진 눈매는 서늘하다 못해 사나웠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이 마주쳤다. 기 싸움이라도 하듯 누구도 시선을 먼저 피하지 않았다. 두 남녀를 둘러싼 공기는 끊어질 듯 팽팽했다. 그렇게 가만히 수연을 바라보던 이도재가 이내 흐음, 마뜩잖다는 소리를 냈다.

“내가 현재에게 다 말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어차피 내가 하지 말래도 할 거잖아?”

테이블 밑 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제가 먼저 말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비록 몇십 번, 몇백 번을 그렇게 생각하고도, 막상 제 앞에서 웃는 얼굴만 보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그만뒀지만.

“현재가 너한테 상당히 믿음을 줬나 보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게 질릴 때는 언제고. 하긴, 걔가 하나에 빠지면 좀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면이 있는 것 같아.”

“…….”

“그럼 다시 물어볼게. 현재는 당연한 거고, 우리 부모님도 아셔도 되는 얘기지? 네가 나한테 차인 걸 앙심 품고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 꼬신 거.”

“너!”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났다. 카페 안 드문드문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순간 이쪽을 쳐다볼 만큼 큰 소리였다. 수연은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낮췄지만 진정이 안 되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린데.”

“헛소리라니? 난 진심이야.”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이도재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특유의 여유를 다시 찾은 모습이 재수 없었다.

“그 정도의 각오는 있어야지. 현재는 지금 가족도 등질 각오로 너한테 진심인데.”

“……뭐?”

가족을 등지다니? 생각해 보지도 않은 말에 수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도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따라 웃지 않았다.

“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짜증 나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억눌린 목소리에 이도재가 하하, 웃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래, 동거는 누가 먼저 하자고 한 거야?”

“무슨 소리야. 동거라니?”

“모른 척 하지 마. 현재 곧 집 나온다는 거 잘 알잖아?”

“그러니까, 현재가 독립하는 건 알겠는데 동거는 아니라고.”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곧 동거가 되겠지.”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곧바로 되받아쳐야 되는데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절대 그럴 마음이 없는데 솔직히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것은 아니어서일까?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도재가 픽 웃었다.

“내가 무슨, 고리타분한 드라마에서 돈 봉투 내밀면서 우리 아들하고 떨어져, 하는 아줌마 역할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긴 한데.”

“…….”

“줄 돈은 없지만 대신 너한테 도움 될 얘기를 해 줄게, 수연아.”

수연아, 그가 처음으로 성을 떼고 저를 불렀다는 것을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수연은 자꾸 곤두박질치는 마음을 잡으려 애써 노력하며 이도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전에 하나만 묻게, 너 현재 좋아한다고 했지.”

“몇 번을 말해?”

“걔랑 결혼할 만큼 진심인 거지?”

“앞서가지 말라고. 동거든 결혼이든 아직 아무 생각 없으니까.”

“그래, 너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곤란한 듯 웃는 모습이 현재와 형제기는 하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현재가 하면 설렜고 이도재가 하면 짜증 났지만.

“현재는 졸업하면 바로 너랑 결혼하고 싶다더라. 그냥 순간 감정에 취해서 걔가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닌 건 너도 알 것 같고.”

“……생각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수연의 미래에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말하던 현재가 생각났다. 지금 상황에서도 현재가 보고 싶다고 느낀다면 저도 중증인 걸까.

“그래, 근데 걔는 진심이니까 문제지. 당장 졸업 후 미국으로 대학원 가려던 계획도 접고, 너 따라 여기서 취직하고 살고 싶은가 봐. 뭐…… 자기 인생이니까 뭐라 할 건 아니지만, 현재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어머니 입장에서는 충격이겠지. 현재가 거기서 아예 자리 잡고 사는 것도 어머니 계획에 있었을 테니까. 아, 참고로 그건 현재도 동의했던 바야. 걔는 항상 여기서 사는 걸 좀 따분해했어. 근데 널 만나고 인생 계획이 완전히 바뀐 거지.”

말을 잇는 이도재의 얼굴에는 특유의 거만함이나 껄렁껄렁함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에 수연은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해졌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현재뿐이야. 딱히 물질적으로 편애받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놓은 자식인데, 현재는 아니거든. 아버지도 나도 어머니한테 위안이 되지 못했지만 현재는 달라. 엄마의 유일한 자랑이지. 기대에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고. 아…… 대학도 아예 미국으로 가라는 그거 하나는 안 들어줬지만. 너도 알다시피 형제 사이도 꽤 좋은 편이었어서.”

현재와의 사이를 과거형으로 지칭하는 이도재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했다.

“나가서 살겠다는 말에 나랑 좀 다퉜어. 솔직히 난 여러모로 걱정되거든. 물론 네가 얄미울 만큼 똑똑하다는 것도 알고, 현재도 믿어. 근데 믿는 거랑 이거는 또 다른 문제라……. 덜컥 애라도 생기는 날에는 우리 어머니 진짜 쓰러지실 것 같아서.”

“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한 줄은 몰랐네.”

수연은 입꼬리를 비틀었으나, 이도재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사실 너랑 헤어지라고 말해 봤어.”

“……!”

“그리고 처음으로 크게 싸웠어. 뭐, 싸웠다기보다는 내가 좀 일방적으로 화를 많이 내긴 했는데. 어쨌든 홧김에 정기 휴일 빼고는 한 번도 안 닫던 가게 문도 닫아 버리고 여행 갔지. 아, 걱정 마. 다 말한 건 아니니까. 그냥 너랑 걔는 미래 없다고, 조건 따지는 어머니가 나중에 걔를 만나 보겠다는 말이라도 할 것 같냐고만 했어.”

뒷골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띵했다. 수연은 아프게 들려오는 이도재의 말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고작 너 손목 좀 삐끗했다는 말에 어머니와의 약속도 깨고 곧바로 한국 들어오는 게 현재야. 애가 완전 이상해졌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이도재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일교차가 큰데 반소매 티셔츠 하나 덜렁 입고 나온 그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현재는 그렇게 너한테 빠져 있는데, 정말 진심인데 너는 그만큼의 각오가 되어 있냐는 거야.”

“…….”

“당장 다음 달, 어머니가 한국 오셔. 직업상 시간 내기도 힘들고 여기서 좋은 꼴 본 적 없어서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다고 하시는 분이. 왜일 것 같아?”

이도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참고로 그건 현재가 모르는 일이야. 어머니가 나에게만 얘기하셨으니까. 너를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셔. 당연하겠지, 도대체 어떤 애한테 홀려서 안 그러던 애가 앞뒤 생각 없이 저러는지 궁금하실 테니까. 현재야 너에 대한 좋은 얘기만 잔뜩 해 놨겠지만…… 우리 어머니가 좀 깐깐한 면이 있으시거든. 집안 같은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머니께 잘 보여야지, 이런 마음은 들지도 않았다. 만나자마자 실망하고 화를 내실 것 같다는 당연한 결론이 내려졌다.

‘어쩐지. 그간 너무 행복했지.’

별일 없이 행복한 일상이 이따금 못 견디게 불안했는데, 이러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수연은 인정했다. 늘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제가 그간 현재 앞에서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몰두했었다. 앞뒤 생각 없이 순간의 행복에만 젖어 있었던 결과는 참담했다.

수연은 그새 녹아 가는 컵 안의 얼음만 말없이 내려다봤다. 온몸과 마음에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독기가 완전히 빠지고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에 남자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현재를 좋아한다고. 그래, 좋겠지. 어떤 여자가 싫다고 하겠어?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애가 눈 돌아서 너만 좋다고 매달리는데. 요새야 내 앞에서 네 얘기 안 한 지 좀 됐지만 나 초반엔 진짜 무서울 정도였다니까? 근데 너도 알잖아, 너네 둘은 안 된다는 거. 당장 나도 있고, 우리 어머니도 있지. 현재는 가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애고 말이야. 차라리 네가 나랑 만난다면 어머니는 아무 신경 안 쓰겠지만…….”

갑자기 이도재가 비죽 웃었다.

“야, 차라리 나로 할래? 그게 여러 사람 편하겠다.”

미친. 수연은 매섭게 이도재를 노려보았다. 질 나쁘다 못해 역겨운 말이었다.

“아아. 농담이지.”

덧붙이는 말투도 어찌나 가벼운지.

“근데 내가 볼 때는 너랑 현재도 그렇게 보여. 어차피 끝까지 못 갈 거라면 현재를 위해서라도 그만해. 너는 남이지만 걔랑 나는 가족이야.”

말을 마친 이도재가 컵에서 빨대를 빼더니 남은 커피를 물 마시듯 털어 넣었다.

“2주 안에 정리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집을 계약해 버려서 안됐지만 위약금이야 물어주면 되는 거고, 그럼 어머니도 굳이 바쁜 일정 쪼개 들어올 필요 없으시겠지. 어머니가 너 만나고 현재한테 아무 말 없이 출국하실 것 같아? 아마 난리 날걸.”

“…….”

“현재도 처음에야 힘들어 하겠지만 똑똑한 애라 금방 깨달을 거야. 평생 제 편일 가족들 말 들었던 게 정말 다행이었다고, 멀지 않아 알게 될 거라고. 콩깍지야 벗겨지면 그만이니까.”

평생 제 편, 그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제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단어다. 이도재는 저조차 몰랐던 제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쓰게 웃은 이도재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현재한테 더 미움받긴 싫지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야지. 난 진심으로 걔가 너랑 있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거든. 어떤 이유로든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사실 짜증 나서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싸움하다 좀 감정이 격해졌거든, 내가. 그래서 너랑 계속 만나면 나 안 볼 생각 하라니까 현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

“어쩔 수 없지. 그러더라.”

걔가…… 나한테. 하, 존나 충격받아 가지고.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는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덧붙이면서도 이도재는 깊은 실망과 서운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수연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 안 연한 살만 잘근잘근 씹었다.

“난 사실 네가 이해가 안 돼.”

뭐가, 물을 새도 없이 이도재가 말했다.

“넌 현재 아니어도 되잖아. 너한테 그렇게 잘해 줄 남자? 솔직히 찾으려면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외롭던 차에 현재가 타이밍 잘 봐서 들어간 거 아니냐고. 당장 현재 없으면 허전하고, 외로울 거 같아서 못 놓는 거잖아. 틀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도재한테 분명 할 말이 많았는데,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양심이 있다면 그건 아니지. 이런저런 꼴 다 보고도 걔랑 끝까지 갈 자신 있으면 네 마음대로 해. 물론 그 과정에서 너 하나 얻자고 현재가 잃는 건 많겠지만.”

말을 마치고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남자 앞에서 수연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카페를 나오는 수연에게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 앞, 곧바로 뒤따라 나온 남자가 수연을 불러 세웠다.

“차수연.”

“…….”

“내 말 다 알아들은 거 맞지?”

조용한 거리에서 이도재의 목소리는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수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건들거림이나 가식적인 미소를 싹 지운 얼굴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

분명 저를 보고 있으나 어쩐지 텅 빈 듯한 눈빛에 도재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 다시금 입을 떼는 순간.

“……!”

뒤에서 무섭게 달려오는 오토바이 굉음에 놀란 수연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더 놀랐던 것은 제 몸을 홱 끌어당겨 품에 안은 이도재의 행동이었다. 서늘한 기온과 다르게 맞닿은 남자의 온도는 뜨끈했다.

“미친 새끼네, 저거.”

술 처먹었나? 골목 모퉁이로 빠르게 사라지는 오토바이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이도재가 거칠게 욕을 뱉었다. 수연은 파드득 그에게서 떨어졌다. 멍하게 있던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한 행동이라는 건 알겠는데 상당히 불쾌했다. 수연은 한번 깊게 심호흡을 했다.

“네 말 잘 알아들었어. 앞으로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더는 이도재와 있고 싶지 않았다. 수연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

“그리고, 현재 얘기랑은 별개로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이도재는 그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고민하는 듯 입술을 움찔대던 그가 이내 한숨 같은 말을 뱉어 냈다.

“미안하다. 그, 고등학교 때…… 너한테 심하게 말했던 거.”

이제 와서?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에 찔리는 게 있는지 이도재가 얼른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전에 네가 말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어. 내 기억에 너는 좀 냉정한 애였으니까, 내가 했던 말에 별 타격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듣고 싶지 않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수연은 슬쩍 시선을 다른 곳에 주었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이 꽤 찼지만 속은 뜨겁게 들끓었다.

“근데 그 후에 차근하게 생각해 봤어. 입장 바꿔 그랬다면 나도 진짜 화났을 것 같더라. 다시 만났을 때도 내가 너무 오버했던 것 같고…… 따지고 보면 내가 만든 상황인가 싶었어. 네가 오죽했으면 현재까지 그렇게 꼬셨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리 어렸을 때라지만 내가 너무 철없고 내 생각만 했던 것 같다는 반성도 나름 했어. 이건 정말 진심이야.”

미안해, 이도재가 낮게 덧붙였다. 수연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하고 난리야? 지금 와서 네가 미안하다고 말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어.”

“알아. 아는데 그냥 말하고 싶어서.”

“하…….”

수연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튼 이도재는 최악이었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더 짜증 났다. 지금 와서 받는 그의 진심은 후련하기보다는 찝찝하기만 했다. 이도재가 정말 제게 남은 빚을 다 청산한 듯한 느낌이어서.

“너도 괴롭겠지만 그간 나도 괴로웠어.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다. 차라리 그때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받아 줬으면…….”

“그만해.”

어쩐지 안 하던 짓을 한다 싶었다. 날 선 눈빛에 이도재가 쓰게 웃었다.

“그냥. 다 내 업보 같아서 말이야.”

“헛소리 하지 말고 할 말 다 했으면 가.”

가라고 해 놓고 참지 못한 수연은 먼저 뒤돌았다. 저만치 보이는 낡은 건물로 빠르게 걸어가는데 자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집에 돌아온 수연은 한동안 멍하니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무의식중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통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했지.’

무음이라 몰랐던 모양이었다. 통화 목록을 가득 채운 현재의 번호를 눌렀지만, 평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연결되던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자나.’

벌써 잘 시간은 아닌데.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현재까지 전화를 받지 않자 더더욱 마음이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절망. 수연은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단어의 의미를 이제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오는 나약한 마음. 수연은 아주 잠시, 현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현재야,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나 사실 처음에 너 좋아하지 않았어. 호감은 둘째 치고 아예 관심도 없었지.’

‘예전에 너희 형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는데, 그 과정에서 좀 심한 말을 들었거든. 그래서 걔 열받게 해 주려고 홧김에 너한테 접근한 거야. 그런데 내게 진심인 네 곁에 있다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널 좋아하게…….’

진짜 뻔뻔하네.

‘그거 알아? 다음 달에 너희 어머니 오신대. 솔직히 안 나가면 그만이긴 한데, 여기까지 오신 분 헛걸음하시게 만들 수는 없잖아. 만나면 무슨 얘길 하실지 대충 짐작도 가고 날 얼마나 맘에 안 들어 하실지도 보여. 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데 그래도 네 어머니이시잖아. 미움받으면 되게 슬프고 괴로울 것 같아.’

그래도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은 염치없어 못 하겠지만, 어쨌든 다 말했다 치자.

현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서웠다. 상상만으로도 정말로 정말로 무서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현재의 성정상 제게 대놓고 크게 화를 낸다거나 이도재처럼 욕을 하지 않을 것은 확신했다.

다만 가슴 깊이 실망하고 슬퍼하겠지. 배신감과 함께, 그간 아무것도 모른 척 그의 옆에 있던 제 모습이 가증스럽게 여겨질 것이고. 저를 좋아했던 만큼 충격도 클 거였다.

늘 저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을 이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걸 보느니, 차라리…….

‘역시 헤어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그간 미뤄 왔던 대가를 이제 다 받는 느낌이었다. 회피한다 비난받아도 할 수 없지만, 수연은 고군분투해 현재의 마음을 잡아 둔다는 선택지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이유로 헤어져 버리면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현재의 싸늘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2주라 했지.

수연은 이도재가 멋대로 부르고 간 기간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왜 갑자기 그 언젠가 제가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하늘색 원피스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그런 비싸고 좋은 옷은 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처럼, 제게 현재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나 보았다.

‘내 수준에 안 맞는 걸 하면 꼭 탈이 나던데.’

수연은 그 후에도 잠들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제가 만든 수많은 생각들이 몸집을 부풀린 괴물이 되어 저를 집어삼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흘렀다.

학교에서 보는 것을 제외하고 주중 내내 수연은 현재를 따로 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재깍 집에 와서 공부만 했다. 현재는 예전에 했던 말이 있어서 그런지, 아님 내내 무거운 분위기의 수연을 알았는지 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문자의 답도 드문드문 하고 전화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안 받았는데도 말이다. 솔직히 내심 이상하긴 했지만 이미 생각이 복잡한 수연은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 오후, 잠깐이라도 좋으니 얼굴 보고 싶다는 현재의 연락에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까.

*

“생각보다 너무 추운데. 괜찮아?”

쌩쌩 불어오는 강바람에 현재가 수연을 제 품 안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낮에는 완연한 봄처럼 날이 좋았는데, 밤에는 일교차가 심하게 났다.

“시원하니 좋기만 한데, 뭐.”

힘없이 대꾸하며 수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싸늘한 저녁인데도 한강은 활기찼다. 이 바람에 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뭔가를 먹는 사람들도 많았고 산책을 나온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사람들도 꽤 보였다. 그렇게 사람 구경, 경치 구경을 하며 쭉 이어진 강변길을 나란히 걸었다.

“저녁은 뭐 먹었어?”

“그냥, 밥 먹었지.”

물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간 학교에서 현재랑 점심을 먹을 때 빼고 집에서 뭔가를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도저히 속에 받지를 않아서.

“바쁠수록 잘 챙겨 먹어야 돼, 이따 마트에 장 보러 갈까?”

“…….”

수연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걸었다. 여전히 살가운 현재를 보고 있자니 자꾸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예쁘다고 생각했을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다리와 강물의 풍경이 지금의 제게는 아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아.’

수연은 문득 탄식했다. 자신은 이 감정을 알았다. 눈앞의 모든 것의 색이 바래 버리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시커먼 기분. 그 언젠가 현재와 처음으로 헤어질 결심을 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저는 또 달랐다. 현재를 향한 감정이 이렇게 커져 버릴 줄은 1년 전의 저는 정말로 몰랐다. 역시 사람은 제가 한 만큼 다 돌려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수연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이 레몬차 맛있네.”

“그래?”

오는 길에 카페에 잠시 들렀다. 속이 타서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려 했는데 현재가 제지한 바람에 따뜻한 티를 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수제 레몬청도 팔던데. 가면서 사자.”

“아니…… 뭐 그렇게까지.”

“왜, 두고 먹으면 되지. 난 네가 뭐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입이 워낙 짧아야지, 덧붙이며 현재가 옅게 웃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인데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쳤나 봐. 수연은 현재 모르게 입술을 꾹 누르며 치솟는 감정을 가까스로 눌렀다.

이도재의 말은 틀렸다. 꼭 현재가 아니어도 된다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수연은 현재가 막연히 제게 잘해 줘서 좋은 게 아니었다. 그냥, 현재라서 좋았던 거였다.

늘 저보다 살짝 높았던 체온, 특유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 한없이 든든한 품은 저의 어떤 모습조차도 다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단호해서 정신을 차려 보면 현재의 페이스대로 끌려갔다. 불평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조차도 좋았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뜯어봐도 귀여운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제게 매일 귀엽다고 노래 부르고 냥이라는 애칭까지 정해 줄 정도로 안목이나 취향은 상당히 독특하다. 몸을 섞을 때는 거침없고 야한 말도 의외로 뻔뻔하게 잘하고.

물론 진심이 아니겠지만, 저랑 헤어지느니 이도재를 안 봐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모질고 냉정한 면도 있다. 손목 조금 삔 것 가지고 미국에서 바로 날아올 정도로 대책 없고 바보 같은 점도 문제가 있고 말이다.

수연은 옆에서 빤히 보내오는 현재의 시선을 알지 못한 채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끝이 코앞에 다가와서 그럴까? 파노라마처럼 그간의 추억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생전 처음 가 봤던 수목원의 살랑이던 봄바람, 소나기를 맞아 흠뻑 젖었으면서도 뭐가 좋은지 웃던, 천진하게까지 느껴지던 소년 같은 얼굴, 그런 그와 정신없이 키스했던 습기 묻은 여름밤, 처음으로 갔던 둘만의 여행에서 온전히 서로에게만 취해 있던 순간들, 텅 빈 냉장고를 열어보며 잔소리하던 진지한 표정, 샌드위치 가게에서 알바하는 제게 말도 못 걸면서 괜히 매장에서 이것저것 주문하던 멋쩍은 모습, 이사 갈 집에 채워 넣을 물건들을 사며 비밀번호는 우리가 처음으로 사귀던 날이라고 속삭이던 목소리. 물론 날짜를 곧바로 기억하지 못해서 현재가 조금 서운해하긴 했지만…….

켜켜이 쌓여 간 수많은 기억들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이러다 정말로 말도 안 되게 눈물이 터져 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정말 현재를 좋아하는구나.’

끝날 때가 돼서야 제 마음을 사무치게 깨닫게 되는 모순이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현재 같은 사람이 제 인생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점 하나만은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수연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저를 바라볼 그의 얼굴을 상상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제 안에 있는 한없이 이기적인 것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순간에서도 자신만 생각했다. 미움받기보다는 아픈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게 나았다. 현재에게 한없이 가증스럽고 뻔뻔한 여자가 아니라, 정말 좋아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여자로 남고 싶었다. 차라리 전자 쪽이 저를 빨리 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곤해? 그만 갈까?”

“응.”

“그래, 날 좀 풀리면 다시 오자. 여기서 먹으면 배달 음식도 괜히 더 맛있잖아.”

“……그러던가.”

힘없이 대꾸하며 수연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정말 천천히 걷고 있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순간, 수연의 어깨에 둘러 있던 현재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그러고서 걸음을 멈춘 현재에 수연도 저절로 우뚝 섰다. 입고 있던 점퍼 안 포켓으로 현재가 손을 넣는 모습이 느리게 펼쳐졌다. 그리고.

“…….”

반짝이는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제 왼손 약지에 끼우는 남자의 모습을 수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딱 맞네, 만족스럽게 말한 현재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이내 그의 왼손도 슬쩍 들어 보였다. 누가 봐도 저랑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언제부터 끼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계속 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어둑하게 빛나는 밤의 가운데에서 제게 커플링을 끼워 준 현재의 목소리가 조금은 어색하게 들렸다. 수연은 천천히 다시 반지로 시선을 내렸다. 고작 반지 하나일 뿐인데 그 무게가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매번 끼라는 건 당연히 아니고, 음……이렇게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좋으니까.”

덧붙인 현재가 수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쩌면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인데 어쩐지 선수를 뺏긴 느낌이었다. 다가오는 1주년에 제가 끼워 주고 싶어서 없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모았었는데.

멍하니 선 수연을 응시하던 현재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없어졌다. 수연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반지를 제 손에서 뺐다. 다시 현재에게 내미니 현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싫어?”

다시 되돌려 줄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수연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현재가 빨랐다.

“그럼 안 껴도 되니까 그냥 갖고만 있어.”

“그게 아니라, 나 이거 못 받아.”

심장이 거세게 달음질쳤다. 뒷골이 띵할 정도로 긴장이 되는 것을 가까스로 추스른 수연이 냉정히 말을 이었다.

“우리…… 그만하자.”

“…….”

제 말에 그대로 굳어 버린 남자의 모습에 마음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끈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연은 최대한 담담하고 쌀쌀맞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울 수 있다는 거 아는데, 이대로는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우린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현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극심한 충격을 받고 아무 생각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수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더 말해야 하는데, 현재가 말이 없으니 수연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갑게 부는 바람을 맞는 모습까지도 분위기 있는 남자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나온 것은 한참 후였다.

“……이유가 뭐야?”

떨리는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다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훈련된 기계처럼 뱉어 냈다.

“별다른 이유라기보다는 내가 연애랑 안 맞는 것 같아서. 너도 그동안 나 지켜봤으니까 알잖아. 그냥 나는 역시 혼자가 편해. 연애도 결혼도 다 필요 없고, 졸업하고 혼자 일하고 돈 벌면서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인 것 같아. 네가 좋고 싫고, 뭐 이런 감정을 다 떠나서 솔직히 네가 귀찮고 부담스러울 때도 많아.”

마지막 말을 할 땐 말하는 제가 다 상처를 받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기분. 차마 현재의 얼굴을 더는 볼 수 없어 수연은 시선을 조금 떨구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싶었다.

“미안해. 너는 되게 나한테 잘해 줬는데. 그런데 더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쯤에서 정리하고…….”

고저 없이 흘러나오던 수연의 말이 멎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다음 말이 뭐였더라. 차라리 더 빨리 헤어졌어야 했다는 말이었던가?

그러나 순간 뭔가에 꽉 막힌 것 같았던 목구멍에서 더 이상의 말은 뱉어지지 못했다. 수연의 손을 꽉 잡은 현재가 성큼성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엉겁결에 현재에게 이끌려 가던 수연은 정신을 차리고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워낙 세게 잡혀 그럴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놔.”

“…….”

“헤어지자고. 내 말 안 들었어?”

“들었어.”

높아진 수연의 목소리에 앞만 보고 가던 현재가 슬쩍 시선을 주었다. 직전 제게 커플링을 끼워 주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무심한 표정에 수연은 멈칫했다.

“그런데 왜 이래?”

“인정할 수가 없어서.”

“뭐?”

“당장 다음 주만 해도 이사 간 기념으로 같이 주말 보내기로 했잖아. 곧 1주년에는 바다도 다녀오기로 했고.”

“…….”

“네 말대로 그간 널 지켜봤으니까 알지. 네 성격에 싫으면 계획조차 잡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헤어진다는 게 이해가 전혀 안 가는데.”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덧붙인 현재가 다시 주차장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연의 손을 붙잡은 채였다. 허를 찔려 잠시 멈칫하던 수연이 재빨리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알긴 뭘 알아, 나 원래 변덕스러운 거 몰라? 그냥 홧김에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니고 진심이라고. 나름대로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니까 존중해. 헤어지는 마당에 서로 구질구질한 모습 보이지 말자.”

“…….”

“이현재! 놓으라니까.”

드문드문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진짜. 수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에 현재가 정말 싫었다면 별 짓을 다 해서라도 끌려가지 않아야 했는데.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약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연은 어느 순간 포기했다. 그래…….

‘순순히 그러자고 할 리가 없지.’

가슴은 아프지만 좀 더 매몰차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저만치 빽빽이 주차된 차들 사이 현재의 차가 보였다. 아무래도 차 안에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딱히 손을 놓을 마음도 없는데, 놓으면 제가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되는지 아프도록 손을 꽉 잡은 현재였다. 뒷좌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수연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현재가 뒤이어 옆에 올라탄 후 곧바로 문을 닫았다. 영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납치당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만큼 정확하고도 재빠른 동작이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차 안은 캄캄했다. 수연은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부러 보란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은 알겠는데, 원래 끝날 때가 좋아야 하는 법…… 흡.”

그러나 각오를 다졌던 수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수연의 어깨를 홱 끌어안은 현재가 뜨겁게 입술을 겹쳐 왔기 때문이었다.

밤바람에 차게 식은 피부와는 달리 입 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혀는 뜨거웠다. 동그란 뒤통수를 단단히 부여잡은 현재가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말도 안 돼, 놀라 굳은 혀를 제멋대로 빨고 비벼 오는 감각에 수연은 눈앞이 아찔했다.

분명 강압적인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익숙한 그 감각에 정말 찰나 휘말릴 뻔했다. 아주 가끔 예상치도 못한 행동으로 저를 기함하게 만드는 현재라지만 이번은 정말 충격이었다. 헤어지자는데 키스를 하다니.

으으, 수연은 고개를 비틀며 벗어나려 했지만 작정한 남자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절대적인 힘의 열세에서 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저를 입 안을 제멋대로 유린하는 혀를 살짝 깨물어 버리는 것뿐이었다. 으음, 동시에 현재의 입술을 타고 낮은 신음이 흘렀다.

“……!”

너, 너무 세게 물었나? 제가 물어 놓고 놀란 수연은 퍼뜩 입술을 뗐다. 그러나 정작 깨물린 당사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더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 어둠 속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수연은 거세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대뜸 소리를 쳤다.

“왜 이래? 헤어지자는 사람 갖고 이게 뭐 하는 거야.”

“…….”

현재는 말이 없었다. 그저 치솟는 감정을 가까스로 참아 내듯, 깊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을 뿐. 수연은 떨리는 속을 부여잡고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그냥 다 짜증 난다고. 네가 나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매사 일일이 챙겨 주는 것도 다 귀찮다니까.”

“네가 싫다는 건 다 안 할게. 뭘 하면 안 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줘.”

순간 울컥 말문이 막혔지만 수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끝난 마당에.”

“…….”

“학교에서도 엄청 신경 쓰인다니까? 이번에 수업도 두 개 빼고는 다 겹치게 짰잖아. 남들 모르게 만나자고 한 건 나니까 할 말 없긴 한데, 너도 배려 많이 하는 거 아는데…… 그냥 다 숨 막혀. 참, 아까 이사 얘기 했지. 나만 보고 괜히 잘 있던 집 나온 것도 그렇고, 나랑 결혼이니 뭐니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후회한다고.”

양심이 쿡쿡 찔리다 못해 아예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몽땅 다 거짓말이다. 받아 보지 못한 챙김이 처음에는 어색해 툴툴거렸던 적도 있었지만, 살뜰하게 저를 살펴 주는 현재가 귀찮았던 때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고맙고 애틋했고, 한결같은 마음에 매번 감동했다. 아무것도 아니던 일상을 밝혀 준 유일한 대상이 현재였다.

학교에서 더 가까이 있지 못해 안달 난 건 저도 마찬가지였고, 얼른 손잡고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은 현재 못지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결혼을 말하는 그 앞에서, 현재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그와의 미래를 그렸다.

제가 뱉은 것은 온통 다 거짓말뿐이었다. 그 수많은 거짓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말을 마치고 제풀에 거친 숨을 내쉬는 수연의 귓가에 놀랄 정도로 정제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일단 1년 되면 주변에 사귀는 거 말하자고 무리하게 약속했던 건 미안해. 이런 상황이 돼서 말하는 건 정말 아니고, 아까 반지 주면서 말하려고 했었어. 네가 원치 않으면 말하지 말자고.”

“…….”

“이미 짠 수업을 지금 와서 바꿀 수는 없지만 최대한 붙어 있는 상황을 피할게. 같이 앉지도 않고 점심도 따로 먹을게. 그리고 이사는…… 정말 네가 그런 식으로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물론 너랑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에서 좀 급하게 결정 내린 건 있지만 나도 내 공간이 생겼으면 했으니까.”

직전 저를 덮치듯 키스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울림이었다. 수연은 멍하니 눈만 껌뻑이며 앉아 있었다.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 부담 줬다면 그것도 미안해.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 부담 주는 말을 많이 했었네. 앞으로 자제할게. 그러니까…….”

말을 멈춘 현재가 한숨 같은 말을 뜨겁게 뱉어 냈다.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제발.

꽉 짓눌린 목소리를 듣는데 순간 수연의 마음 안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쓰럽고 안타까운데 왜 화가 나는 걸까.

“너는 자존심도 없어?”

잘게 떨리는 수연의 목소리에 현재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좋아?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다 맞춰 주면서 나를 만난다는 건데. 누구보다 똑똑하면서 왜 이럴 때는 그렇게 바보 같은 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분 탓인지 음산했다.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뭐?”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를 잡을 수 있어? 그래?”

이랬다저랬다 확확 바뀌는 현재의 태도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소 섞인 차가운 말투에 수연이 멈칫하려니 현재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렸다. 저렇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수연이 벙쪄 있는데 현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수연아.”

“……뭘?”

“너, 내가 귀찮고 짜증 나서 헤어지는 거 아니잖아.”

“……!”

“뭐,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바보든 등신이든 될 수 있긴 한데…… 네 말이면 뭐든 할 수 있는 각오와는 별개로 나도 눈치는 있어서. 지금 네 말이 딱히 와닿지는 않아.”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꿰뚫어 보는 시선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불안하게 심장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묘하고 우울한 감각.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쁜 예감은 여과 없이 들어맞았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현재가 조용히 읊조렸다.

“형 때문에 그래?”

“……!”

내내 가면을 쓴 기분으로 임해 왔지만, 이번에는 동요하는 낯을 정말로 조금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가까스로 답하는 제 목소리가 제가 듣기에도 어색했다. 거세게 흔들리는 수연의 눈빛에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찮아, 수연아.”

뭐가 괜찮다는 건데? 수연은 제 손 위에 포개지는 커다란 손을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순간의 진심을 믿어. 그럼 됐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형을 좋아했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현재가 알고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수연을 달래듯, 느릿하게 하나하나 손가락에 깍지를 끼운 현재가 말을 이었다.

“상관없다고. 내가 괜찮으면 된 거잖아. 지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니까, 그치?”

덧붙인 말은 마치 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서늘한 차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수연이었다.

“이도재가…… 다 얘기했어?”

“아니. 형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럼 도대체, 걔가 아니면.”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내가 티를 냈나? 아닌데, 절대 아닌데…… 조각조각 흩어지던 생각의 고리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곧바로 끊겼다.

“다 좋은데 수연아.”

뭔가를 참는 듯한 얼굴로 현재가 중얼거렸다. 볼 안쪽을 혀로 쓰는 모습이 그답지 않게 불량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말을 가까스로 참는 것 같았다.

“……어?”

“네 입에서 나오는 형 이야기가 지금은 너무 듣기 힘든데.”

“…….”

“어떻게 알았는지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지금이지. 형을 좋아해서 내 옆에 있고 싶었던 갸륵한 마음은 알겠어.”

뭐? 이제는 놀란 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현재가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시작이 그랬으면 어때? 결국에 네 옆에 있는 건 난데. 나한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난 그렇게라도 너랑 엮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해.”

“……미쳤어?”

이제야 수연은 지금 상황이 확실히 이해됐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분명 알지만, 다 알고 있지는 못했다. 수연이 그저 이도재를 좋아해 제게 접근한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현재가 절대 이별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너 진짜 자존심도 없구나. 그래, 네 형 좋아했어. 그래서 너한테 뻔뻔하게 접근한 애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해? 너 갖고 논 거야, 그냥. 그래도 좋다고?”

수연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제 말에 흐리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며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형을 좋아해 제 옆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서도 제가 좋다니. 그의 진심은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웠다. 저는 이런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음과 동시에, 그 와중에도 제가 좋다고 하는 남자를 보니 아주 조금 안도하는 자신이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같았다. 결국 수연은 폭주했다.

“맞아, 귀찮다는 건 거짓말이야. 귀찮다기보다는 편하지. 네 옆에만 있으면 네가 다 해 주는데. 나한테 누가 이렇게까지 해 주겠어? 그래. 굳이 안 헤어져도 상관없어, 근데 너 생각 잘 해 봐.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괴롭잖아, 더 지치기 전에 그만두자니까? 헤어지자고.”

“그만해!”

“……!”

갑자기 현재가 언성을 높였다. 놀란 수연이 흡, 숨을 들이마셨다. 제게 어떠한 것에도 화내지 않던 남자의 눈에 어렴풋이 초점이 나가 있었다. 하, 짧은 신음을 뱉은 현재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리 지른 건 미안해.”

현재는 눈이 돈 그 와중에도 사과를 했다. 뭐라도 말할 것처럼 움찔거리던 수연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차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은은한 디퓨저의 향과 익숙한 시트의 푹신함이 완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수도 없이 키스하고 온기를 나눴었는데.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말했잖아, 내가 다 감당한다고. 상관없다고.”

“…….”

“그래, 알고 있어. 너한테는 내가 그 정도라는 거. 있으면 편하고 없으면 허전한. 그러니까 이렇게 헤어지자는 말도 할 수 있겠지. 나는 죽어도 못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나라고 이런 내가 좋은 줄 알아? 하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보고 있는데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이제는 제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도 하지 않아 보이는 남자의 가슴팍이 불안하게 들썩였다.

“네가 뭐라 하든 나는 너 못 놔. 그러니까 포기해. 네가 정말 내가 싫어서 놓지 않는 한 나는 너랑 헤어질 생각 전혀 없어. 같지도 않은 죄책감 가지지 마, 수연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시작을 했으면 안 됐지.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 있는데?”

저는 그렇게 지금까지 현재에게 아픈 말을 해 놓고, 그의 말에 상처받는 자신이 수연은 밉다 못해 절망스러웠다.

“괜찮아. 잘됐어, 차라리.”

혼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는 수연을, 현재가 천천히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힘없이 딸려오는 몸을 끌어안으며 현재는 짐짓 너그럽게 속삭였다.

“차라리 마음 편하지? 다 말하고 나니까. 나도 그래, 그냥 우리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

어떻게 그래? 난 못 하겠어. 너무 창피해. 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지금에야 너도 갑자기 헤어질 수 없으니 이러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날 보면서 내가 너한테 했던 짓을 순간순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냐고…… 현재야.

수연은 숨 막히게 익숙하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설렜던 품 안에서 숨을 골랐다.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현재가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언젠가 정도 없는 섹스 후 지쳐 잠드는 제게 나긋하게 입 맞추며 해 줬던 것처럼. 잠시 그 쓰다듬을 염치없이 받고 있던 수연의 입술을 타고 꽉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이니까 그래.”

마른 등을 찬찬히 쓸던 현재의 손이 뚝 멎었다.

“너 이렇게 하는 거 말이야. 물론 사람마다 다 처음이라고 이러는 건 아니지만…… 넌 좀 은근히 고지식하고 바보 같은 면이 있으니까.”

“…….”

“헤어지고 처음엔 힘들겠지. 하지만 곧 다른 사람 만나게 될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하다 보면, 그때 나랑 이렇게 헤어진 게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중얼거리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현재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를 안고 있던 팔이 서서히 풀렸다.

“아…… 수연아.”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에 수연은 순간적으로 옅게 소름이 돋았다. 뭐지? 하하, 기어이 기가 찬다는 듯 소리 내어 웃는 남자의 눈에는 더는 미소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래. 일리가 있네. 처음이라, 처음이라서 그렇다고.”

“…….”

처음이라 그렇다, 제가 뱉은 말을 조용히 입 안에서 굴리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자꾸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예쁜 눈에 시선을 맞춘 그가 별안간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확 가까워진 거리에 수연이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현재가 빨랐다. 그대로 입술이 부딪혔다. 혀를 밀어 넣지 않고 그저 세게 누르듯 입술을 힘주어 몇 번 비빈 현재가 이내 양팔로 수연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그래, 수연아. 네 말이 맞아. 난 다 네가 처음이었어. 그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서 돌 것 같은 감정을 느낀 게 정말 처음이니까.”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한 현재가 별안간 수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쏟아지는 숨결은 나른했지만 수연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근데, 그걸 알면 더더욱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뒤따르는 목소리는 한없이 음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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