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살면서 가장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던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었다. 과장 좀 보태서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하루가 훌쩍 간 기분이었다. 일주일이, 한 달이 어찌나 쏜살같이 흘러가는지.
은근한 늦더위가 남아 있던 가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다. 그간 두 번의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렀고, 무사히 종강을 했다. 스물넷이 된 지는 일주일 정도.
‘……올 때가 됐는데.’
어둠이 새까맣게 내린 밤, 꼭 닫아 놓은 창문 틈으로 매섭게 부는 바람 소리가 났다. 수연은 자격증 공부 책을 펴 놓고 현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는 연말부터 지금까지 각종 모임이며 술자리에 정신없이 바쁜 제 형을 도와 매일같이 저녁에 호프집으로 갔다. 알바를 충분히 뽑으면 될 텐데, 꼭 애를 부려 먹어야 하나? 이도재를 속으로 타박하는 것도 이제 포기했다. 다 제 애인이 너무 착하고 배려심이 많아서 그런 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만 나가기로 했고, 손님이 많지 않아 곧 출발할 거라고 했던 게 한 시간 전이었다.
‘밥은 먹고 일했으려나.’
이도재가 어련히 알아서 챙겼으랴 싶지만, 늘 제 끼니를 살뜰히 챙기는 현재에게 물들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수연은 반쯤 남은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에 현재랑 잡화점에서 커플로 사서 집에 놓아둔 것이었다. 현재가 골랐는데 색감도 예쁘고 크기도 적당했다. 은근슬쩍 한쪽에 아기 고양이가 프린트되어 있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했다.
커피 생각나면 대신 마시라고 코코아며 각종 차를 한가득 사다 놓은 현재 덕분에 커피 믹스를 마시는 횟수가 확실히 많이 줄었다. 하루에 심하면 커피를 여덟 잔 이상 마시는 수연을 알고 싸늘하게 굳던 현재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했다.
‘보고 싶다.’
문득 든 생각에 수연은 내심 놀랐다. 며칠 못 본 것도 아니고, 당장 점심때 만나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실컷 데이트하고 왔는데. 고작 두어 시간 만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제 현재와 헤어진다는 가정은 제 머릿속에는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솟구치는 감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수연이 괜히 핸드폰 액정을 켰다 껐다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현재다! 수연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앞의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현재가 환하게 웃었다.
“마중 나왔어?”
“바로 앞인데 마중은…… 이게 뭐야?”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설렌 것도 잠시, 이내 제게 안겨지는 커다란 꽃다발에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응, 오다가 너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까 꽃 한 번 사 준 적이 없더라고, 덧붙이는 소리에 문 닫히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수연은 눈을 깜빡이며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물론 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긴 했는데 은은한 향기가 나는 파스텔 톤 색감이 참 예쁘긴 했다.
“무슨 날도 아닌데 웬 꽃다발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수연을 보며 현재가 흐뭇하게 말했다.
“진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누가 꽃인 줄 모르겠다.”
“됐고 얼른 들어오기나 해.”
그제야 꽃에서 잠깐 시선을 떼고 현재를 바라보는데 현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사실 지금 가 봐야 해서.”
“어? 왜?”
이 시간에? 갑자기 약속이라도 잡혔나, 수연이 반문하는데 손을 뻗은 현재가 수연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애틋하게까지 보이는 섬세한 손길이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일 있어서 잠깐 올라오셨는데, 생각보다 늦어진 김에 집에 들르셨나 봐. 우리 둘 다 가게인 걸 알고 일 도와주러 오신다는 걸 형이 말려서, 나 먼저 들어가 보기로 했어.”
“아…….”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가 없었다. 순간 숨기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실망의 빛에 현재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신다고 하니까 공항까지 모셔다드리고 바로 올게. 응?”
“바로 안 와도 돼. 천천히 와.”
강렬한 아쉬움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수연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수연을 현재가 와락 끌어안았다. 꽃다발이 눌릴 만큼 세게.
“왜, 나 바로 가서 서운해?”
“이거 놔, 꽃 다 망가지거든?”
내 건데, 수연은 숨 막히게 저를 끌어안는 남자의 등을 퍽퍽 쳤다. 그때야 살짝 몸을 뗀 현재와 눈이 마주쳤다. 올라가 있던 현재의 입꼬리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입술이 맞물린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준 꽃다발과 그의 품 안에 파묻힌 채, 현관에 서서 나누는 키스는 로맨틱했다.
“진짜 얼른 가. 아버지 기다리셔.”
“……응.”
공부 조금만 하고 일찍 자라며 현재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애 다루듯 하지 말라고 한 마디 했을 테지만 수연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저를 만지는 남자에게서는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그렇게 현재가 가고 수연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가기 전에 현재가 뭐라 뭐라 꽃의 종류를 알려 주고 갔는데, 꽃말을 말해 주는 자상한 얼굴만 바라보고 있느라 그새 까먹었다. 그나저나 시들면 진짜 아까울 것 같은데.
‘사진 찍어 놔야지.’
현재가 하도 꽉 끌어안아 조금 뭉개진 것 같은 꽃잎을 살살 펴고 있는데 하얀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안쪽에 숨겨져 있던 조그마한 카드를 발견한 수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암튼 이현재. 조심스럽게 펴 보니 정갈한 글씨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메모가 보였다.
[꽃보다 더 예쁜 수연아. 사랑해.]
짧은 메시지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쓰는 것도 재주였다. 향기를 타고 현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연은 그 한 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유난히 포근한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후부터 많은 눈이 내린다더니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다. 수연은 원룸 건물 앞에 찾아온 현재의 심각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밥 꼬박꼬박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뭘 먹었는지 사진으로 보내면 더 좋아.”
“식단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왜, 그럴 때 한 번 더 내 생각 하는 거지.”
자신도 식사 때마다 보내겠다고 덧붙인 현재가 불퉁한 입술에 짧게 뽀뽀를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 없는 골목이라지만 대담했다.
“……귀찮으면 안 해도 되고. 알잖아, 걱정돼서 그러는 거.”
또, 또. 마음 약해지게 하는 저 순진한 눈빛. 거기에 알면서도 속아 주는 제가 요즘은 가장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귀찮다기보다는 까먹을 것 같은데. 암튼 생각나면 보낼게.”
“응.”
고작 그 말 한마디에 현재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참, 밤새우지 말고 열두 시 전에는 꼭 자.”
“어린애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을 테니까 이제 얼른 가.”
“응.”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현재를 보고 있자니 제가 다 초조해졌다. 지금 가도 촉박할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수연 역시 짙은 아쉬움에 더 재촉하지는 못했다.
그랬다. 오늘은 현재가 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2주간의 여행을 다녀오는 날이었다. 원래는 지인들도 만나고 어머니와 시간도 보내며 족히 한 달은 머물렀다 하니 확 짧아진 기간이지만, 서로에게 푹 빠진 연인들에게는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얼른 가. 늦겠어.”
“……응, 연락할게.”
누가 보면 군대라도 다시 보내는 줄 알 거였다. 수연은 아쉬움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까지 오는 그레이색 코트에 짙은 차콜색 슬랙스, 깔끔한 디자인의 워커가 들어왔다. 옷도 참 저처럼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입고 다녔다.
“두고 가려니까 미치겠네.”
가라앉은 저음에 고개를 드니, 심란하다 못해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남자가 눈에 담겼다. 문득 수연은 이 상황이 씁쓸해졌다. 물론 결이 다른 감정이겠지만, 어린 저를 두고 며칠씩 외박하던 엄마는 현재 같은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했던 적이 있었을까?
미적거리던 현재는 결국 저를 차까지 떠미는 수연에 의해 운전석에 앉았다. 이제 진짜 가나 싶었는데 운전석 창이 열렸다. 이리 오라는 듯한 손짓에 가까이 다가가니 팔을 뻗은 현재가 그대로 수연의 어깨를 끌어당겨 짧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골목길을 느리게 빠져나가는 차를 바라보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벌써 허한 마음이 드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수연은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게 현재가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허전할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빈자리가 실감이 나서 내심 놀랐다. 아주 조금은 옆에서 계속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편하기도 할 거라 생각했는데.
습관이 무섭다고, 수연은 현재가 없어도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있었다. 뭐, 잘 때 괜히 옆이 허전해 한참 뒤척이다 잠들긴 했지만.
때를 조금 넘긴 늦은 저녁. 현재가 냉장고에 채워주고 간 밀키트 중 하나를 뜯어 냄비에 담으며 수연은 조금 전 현재가 보낸 사진을 다시금 확인했다. 어머니와 아침 산책을 나왔다 들렀다는 샌드위치 가게 안, 모락모락 김이 나는 치킨 수프와 커피, 뭔가로 꽉꽉 들어찬 샌드위치 사진은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연이 봐도 맛있어 보였다.
[이제 5일만 버티면 되네 ㅠㅠ]
[저녁 먹고 있는 거지? 보고 싶다 우리 냥이]
이제 냥이라는 표현도 익숙해져 그러려니 했다. 시간의 힘은 무서웠다.
아무튼, 버틴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가게의 노란 벽을 바탕으로 씩 웃고 있는 얼굴은 반질반질 좋아 보이기만 했다. 어머니랑 나왔다면서 저렇게 티 나게 셀카랑 음식 사진을 찍다니. 현재가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 어머니도 제 존재를 알고 계실 것 같았다. 통화도 엄청 하고 영상 통화도 꼭 하고 자니까.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재의 어머니는 현지에서 로펌 변호사로 재직 중인 재원이셨다. 현재가 있는 동안은 연차를 내신 모양이었다.
‘현재 어머니는 어떤 분이실까?’
현재가 언젠가 말해 주었던 현재 부모님의 이야기는 마치 드라마 같았다.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어머니는 대학 생활을 하던 중, 홀로 배낭여행을 온 아버지와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 후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애를 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곧바로 두 형제를 가지셨다고.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결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현재는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지만, 수연은 어렴풋이 이도재가 했던 말로 과실이 아버지 쪽에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어머니는 현재가 중학생일 때 미국으로 다시 가서 못다 한 공부를 시작하셨고, 몇 년 후 아버지와 이혼했다.
‘되게 멋진 분이실 것 같아.’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까지 생각하던 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보았다. 이건 너무 앞서간 생각이었다. 만날 일도 없겠지만 만나도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실 것 같았다.
‘맞다. 사진.’
간단하게 차린 상을 앞에 놓고 수연도 사진을 찍었다. 찌개 하나만 덜렁 놓기에는 좀 그래서 귀찮지만 계란말이도 하고 밑반찬도 구색 맞춰 좀 꺼내 놓은 터였다. 그냥 밥 한 끼만 잘 챙겨 먹어도 엄지 척에, 잘했다고 이모티콘을 어찌나 보내는지……. 한 번이라도 넘어가면 득달같이 영상 통화를 걸어오는 덕에 안 보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보내고, 어머니가 옆에 계실 때는 좀 연락을 자제하라는 말까지 쓴 후 수연은 식사를 시작했다. TV 하나 없는 작은 방 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식사 시간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현재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오후에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분 초대를 받아 갈 계획이라고 했다. 홈 파티 같은 개념인 모양이었다.
“재밌게 잘 지내고 있네.”
―글쎄…… 종일 네 생각만 하는데.
“연락 좀 그만해. 어머니가 뭐라 안 하셔?”
―보고 싶은데 어떡해? 어차피 안 온다는 거 억지로 온 거 다 아시니까 아무 말도 안 하셔.
보고 싶어 죽겠다며 나직하게 한숨 쉬는 것에서도 진심이 느껴지긴 했으나 어쩐지 조금 심통이 났다. 암튼 수연이 생각해도 제 성격은 좀 이상했다.
사실 현재는 수연과 같이 가기를 원했다. 정확히는 어머니를 만난 후 한국에 바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단 며칠만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과외는 사정을 말하고 일주일만 빠질 수도 있는 거겠지만…….
‘그건 오버지.’
경비며 숙소며 제가 다 알아서 할 거니 걱정 말고 몸만 오라는 말에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수연은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뻔뻔하게 그가 주는 것들을 다 받고 있었다. 100일이라고 받은 목걸이, 200일이라고 받은 시계와 명품 원피스. 나날이 커지는 스케일에 다음번에는 뭘 줄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100일 때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받을 때만 해도, 부담스럽고 나는 이렇게 너한테 못 해 주니 너도 적당히 하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포기했다. 현재와 저랑은 환경 자체가 달랐다. 당장 이도재만 봐도 일은 열심히 했지만, 차고 다니는 시계나 옷 브랜드만 봐도 잘사는 집 아들이 취미로 하는 사업 같았다. 그는 그런 걸 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걸 굳이 안 받고 자존심 챙기는 게 수연의 기준에서는 더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현재 입장에서는 나름 자제하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그러면서도 가끔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질이 다가 아니란 건 안다. 그래도 제가 준 것은 현재가 준 것에 비하면 가격대가 너무 차이가 났다. 그 차이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 빠듯한 생활비에서도 돈을 조금씩 틈틈이 모으고는 있었다. 곧 만난 지 1주년에 현재 생일도 있으니 겸사겸사 커플링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현재는 사실 진작 맞추고 싶어 했고, 디자인을 다르게 하면 되지 않겠냐며 수연을 설득했지만. 커플로 뭘 한다는 것에 수연이 워낙 단호해 없던 일이 되었던 터였다. 아마 제가 먼저 건네주면 엄청 기뻐하지 않을까.
암튼 언제까지 현재와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수연은 제가 좀 여유가 생기면 보란 듯이 현재에게 이것저것 해 주고 싶었다. 제가 받은 그 이상으로 말이다.
‘언제까지라.’
내내 현재랑 붙어 있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할 틈이 없는데, 혼자 남겨지니 상념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은 이 남자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현재가 좋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솔직하고 꾸밈없이 전부를 내어 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인을 불신하고 경계하는 저였지만 현재만큼은 유일한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를 깊이 믿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늘 불안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이도재가 언제 급발진할지 몰라 불안했고, 사실을 알게 된 현재가 제게 깊이 실망하고 충격받을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백번 양보해서 현재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저를 만난다고 해도, 절대 그의 마음이 처음과 같을 수는 없으리라. 그도 사람이니까.
그러기 전에 제가 먼저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것 역시 수연은 잘 알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떨치며 수연은 살짝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확 끼쳤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 아침에 살짝 내린 눈이 곳곳에 얼어붙어 있는 풍경을 잠시 내다보다 창문을 닫고 일어났다. 충동적으로 옷장을 열고 두툼한 패딩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딱 세 캔만 마시고 자자.’
편의점에서 맥주와 초콜릿을 사서 돌아오기. 일탈이라면 일탈이었다. 현재는 수연이 아주 가끔 혼자 술을 먹고 잠드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때문에 이번에 출국할 때도 절대 혼자 술 먹고 자지 말라며, 정 먹고 싶으면 제게 전화하라는 말까지 했다.
‘홈 파티 가서 정신없을 텐데 어떻게 전화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며 수연은 주머니 속 지갑을 확인했다. 아직 파티를 갈 시간도 아니라는 것은 걸으면서 뒤늦게 났다. 약속을 어겨서 좀 미안하지만…… 생각이 많은 밤에는 마시고 자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희미한 가로등만 드문드문 깜빡대는 겨울밤은 조용했다. 방학이라 그런지 골목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보이는 편의점 불빛만이 밝았다. 얼른 갔다 와야지, 수연이 걸음을 빨리하던 순간이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빙판 위,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외투를 걸친 마른 몸이 휘청였다. 넘어지지 않으려 순간적으로 힘을 줬지만 이미 몸은 중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
몸이 기우뚱 넘어가는 순간, 그 짧은 찰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했다.’
*
붕대를 감은 수연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현재가 한숨같이 말했다.
“너를 놔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째야.”
중얼거리며 수연은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따뜻한 침구 위에서 노닥이는 게 너무나 안락해서, 아직 초저녁인데도 잠이 솔솔 쏟아질 것 같았다. 사실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직전 그와의 섹스 때문임이 크겠지만. 손이 이러니 무조건 제가 씻겨 준다고 해 놓고서는 욕실에서 한 번 더 일을 치렀다.
“대체 왜 그 밤에 편의점은 가서.”
“……라면이 먹고 싶었다니까? 밥 다 먹었는데도 계속 출출하고 그래서.”
“정말로?”
“그래.”
수연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가 제 표정을 못 봐서 다행이었다.
그랬다. 사흘 전 밤, 수연은 빙판길에 넘어져 손목을 다쳤다. 넘어지면서 손목을 바닥에 짚은 바람에 무게가 쏠려 인대에 손상이 왔다고 했다. 다행히 골절까지는 아니었지만 붕대를 감고 한동안 물리 치료를 병행해야만 했다.
“라면도 사다 놨어야 했는데……그 생각을 못했네, 내가.”
“…….”
그 와중에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현재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밥하기 귀찮을 때는 밀키트라도 꼭 챙겨 먹으라고 작은 냉장고를 꽉 채우고 갔던 현재였다. 알아서 잘 먹고 사니 그럴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럴 때는 귀를 닫아 버려서 쇠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었다. 거기에 혹시나 했는지 평소에는 자제시키는 간식도 잔뜩 사놓고 갔다. 비록 말린 과일 칩이나 유기농 스낵 같은, 수연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건강한 것들이었지만 어쨌든 정성이었는데…….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 붕대를 매만지는 커다란 손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 받는 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맥주랑 초콜릿 사 먹으러 가다가 그 사달이 났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수연은 현재가 더 캐묻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어머니가 진짜 뭐라 안 하셔? 많이 서운해하셨을 것 같은데.”
그날 밤, 잘 먹고 마시고 자다 손목이 아파서 잠을 깼던 수연은 결국 일어나자마자 병원에 갔다. 현재가 알면 당연히 걱정할 테니 잘 숨기려 했는데, 순간적으로 수락을 눌러 버린 영상 통화에서 현재는 아주 살짝 스친 붕대 형상을 발견했다. 놀란 현재의 추궁에 결국 말해 버렸다. 그리고 현재는 바로 다음 날 귀국했다.
“잘 말씀드리고 온 거니까 걱정 마.”
“……내 얘기 한 건 아니지?”
“괜찮아. 좀 아쉬워하시긴 했는데, 그래도 얼굴 봐서 좋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수연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데 다친 손목을 지분대던 손이 자연스럽게 허벅지로 옮겨 갔다. 설마 또 하자는 건 아니겠지, 수연은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초리를 해 보였다. 하하, 현재가 도톰한 입술에 쪽쪽 뽀뽀를 했다.
“너 그런 표정 할 때마다 진짜 심장 철렁하는 거 알아? 너무 귀여워.”
“너는 귀여움의 기준이 일반 사람하고 다른 것 같아.”
“그런 말투도 귀여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
말을 말자. 하긴 모든 게 완벽하니 취향 정도 좀 특이해도 할 말은 없었다. 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현재가 결 좋은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조금만 쉬다가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참. 수연아.”
“응.”
“나 슬슬 나가 살 집 알아보려고.”
“어?”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옅은 미소를 띤 현재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한번 말했었잖아, 형하고도 얘기 끝났고. 너 팔 다친 거 나으면 집 보러 돌아다니려고. 여기저기 봐 둔 데도 있고 해서.”
“이도재가…… 그러래?”
“뭐, 좀 의견 충돌이 있긴 했는데.”
현재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솔직한 말로 나도 너랑 편하게 있을 공간이 필요해. 내가 가자 안 하면 넌 우리 집 오려고도 안 하잖아. 차로 다니면 금방이니까 학교랑 좀 떨어진 곳으로 구하려고.”
“…….”
웬만하면 유하게 돌려 말하는 현재였다. 의견 충돌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라면 이도재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오늘도 현재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준다고 집에 오라고 했을 때 망설였던 건 사실이니까. 예전 이도재가 집을 비웠을 때 흐름에 휘말려 섹스했던 이후로 괜히 더 가기 민망해졌던 터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나랑 둘만 있는 공간 좋지 않아?”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말이 그렇지 너도 혼자 살면 외로울 수도 있어.”
현재와 둘만. 솔직히 좋긴 했지만 조금 부담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잠잠하던 이도재가 이것을 계기로 또 수틀릴까 무서웠다. 수연은 열심히 혼자 사는 것의 단점을 어필했다.
“개강하면 나 졸업반이야. 알지? 진짜 열심히 해야 해. 졸업하면 바로 취직해야 한다고. 솔직히 이렇게 매일은 못 만나. 너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을 거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도재랑 있을 때랑은 많이 다를걸, 그때 가서 괜히 나왔다고 후회해도 난 모른다.”
잠자코 듣던 현재는 열변을 토하는 수연의 몸을 돌려 안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형하고 평생 살 건 아니니까.”
“…….”
“안 그래도 졸업 후에 대해서 너랑 이런저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얘기가 나왔으니까 할게.”
무슨 말을 하려고? 살짝 긴장하는 수연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은 현재가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살까, 수연아?”
“……뭐?”
“꼭 졸업까지 안 기다려도 괜찮고. 어차피 우리 사귀는 거 주위에도 곧 말할 거잖아. 1년 약속. 안 잊었지?”
“아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현재가 쓰게 웃었다.
“사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어. 이제는 나도 확신이 있거든. 네가 날 좋아한다는 확신. 물론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만.”
“…….”
“네가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현재가 수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곧은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네 모든 미래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수연아.”
모든 미래라.
“알아? 졸업 후 계획을 말할 때 너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 좋은 곳에 취직하고, 힘들겠지만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크지는 않아도 혼자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집을 구하고 가끔 여행도 가는……. 그래. 이해해, 이해하면서도 좀 서운해. 그 꿈 안에 나는 없는 것 같아서. 나만 너무 앞서 나가나 싶다가도,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네가 따라오지 않을까 봐 불안해.”
불안. 수연은 현재가 말한 단어를 조용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지금도 저를 다정히 끌어안고 있는 남자와 알콩달콩 행복하게 연애하면서도 필연적으로 늘 저를 따라다니는 그 감정. 수연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현재의 눈빛을 마주하다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불안해할 거 없는데.”
“……응?”
“말을 굳이 안 했다 뿐이지, 나도 너랑 미래 생각해.”
“…….”
“근데 동거는 아니야. 학교 다니면서 같이 살아 봐. 어디 과제나 제대로 하겠어? 취직하고 좀 자리 잡히면 몰라도. 그렇다고 내가 너랑 살기 싫다는 얘기는 아니고, 나도 너랑 있으면…… 당연히 좋으니까. 네가 표현을 너무 잘하는 편이라 그렇지, 나도 아마 네 생각보다 더 널 좋아할 거……아……!”
갑자기 으스러지게 끌어안기는 탓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현재가 뜨겁게 속삭였다. 사실 결론적으로는 그의 말을 거절한 거였는데 현재에게는 수연이 자신과 있으면 당연히 좋다는 말만 들린 것 같았다.
“사랑해. 정말 엄청 사랑해. 알지, 수연아.”
“……안다고.”
“너를 안 만났더라면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만으로 끔찍해.”
“그런 말은 좀 부담스럽다.”
떨떠름한 말에도 현재는 듣기 좋은 소리로 웃었다.
그 후로 둘이 꽤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놓고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현재는 졸업하면 바로 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진 것 같았다. 놀라웠지만, 현재가 하는 것을 보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원체 신중하고 계획적인 현재가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지 차마 다 물어볼 엄두가 안 나기는 했지만.
화제가 들쭉날쭉 튀었다. 말하다 보니 서로의 가족 이야기도 나왔고,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왔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단 이야기를 들으니, 왜 형제애가 깊어졌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어찌 보면 민감한 주제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흘렀다. 수연 역시 남들에게는 절대 말한 적도 없고 말할 일도 없었던, 엄마에게 상처받았던 날들을 꺼냈다. 예전 호텔에서 했던 것보다 더 깊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수연의 말을 들으며 현재는 때로는 억눌린 듯한 한숨을 쉬기도 했고, 낮게 신음하기도 했으며 꽉 안아 주기도 했다. 그 자체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이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이사 갈 집에 네 방을 만들고 싶다며, 나중에 같이 이런저런 가구나 용품을 사러 가자는 현재의 잔잔한 목소리를 듣는데 자꾸 근거 없는 긍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서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면 그거야말로 환상 속의 로맨스겠지. 하지만 현재의 진지한 표정과 말을 듣고 있으면 환상이 현실이 될 것만 같다. 복잡한 현실은 지워지고 자꾸 설익은 꿈을 꾸게 된다.
함께 있는 계절이 또 한 번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
그리고, 다시 현재.
떠밀리듯 참여한 개강 뒤풀이의 끝은 폭주한 애인이었다. 수연은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남자의 품 안에서 색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심사가 완전히 뒤틀린 그는 오늘따라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조금은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섹스를 했다. 배려보다는 욕망을 더 드러내는 노골적인 관계가 연거푸 이어지는 동안 몇 번이나 절정을 맞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좋은 만큼 힘들었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수연은 자꾸 감기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화는 안 내도 물어는 봐야지.
“왜 그런 거야?”
“응? 뭐가?”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냐고.”
으음, 수연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현재가 곤란하다는 듯 소리를 내더니 허리를 토닥였다.
“그런 건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그냥, 갑자기 엄청 안고 싶은데 못 하는 게 좀 짜증 났어.”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수연은 더 이상의 대거리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만 누워 있다 씻으러 가야지. 절대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겠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같이 움직이자. 응?”
혹시나 제가 또 집에 간다고 할까 걱정됐는지 현재가 말을 걸어왔다. 그간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꼬박꼬박 집에 갔지만, 이도재가 여행을 갔다 하니 더 받아칠 말이 없었다.
그새 집을 구하고 계약까지 마친 현재는 2주 후 이사하기로 했다. 밀리지 않으면 학교에서 차로 15분 정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걸어 다니기는 힘든 거리에 위치한 오피스텔이었다. 지난번 같이 가 본 바로는 이도재와 같이 사는 것보다는 당연히 작았지만, 직장인들이 주로 사는 곳답게 더 조용하고 깔끔했다.
웬만한 것들이 빌트인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살 게 많아서, 내일 둘이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사기로 했다. 요즘 현재는 묘하게 들떠 있어서 수연까지 괜히 기분이 좋았는데, 아까 술자리에서 좀 뭔가 기분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씻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모르겠다. 현재가 알아서 하겠지. 가끔 이렇게 잠들면 현재가 알아서 뒤처리를 해 주고 옷까지 입혀 놓고는 했다. 수연은 무방비한 상태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주말 내내 현재와 같이 있었다. 토요일은 쇼핑하다 보니 훌쩍 지나갔고, 일요일은 갑자기 연락 온 현지와 셋이서 같이 만나 점심도 먹고 카페도 갔다.
현지는 휴학을 하고 잠시 언니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워낙 친화력 좋은 만큼 쉬지 않고 호들갑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통에 어색할 틈이 없었다. 현재는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은 정도의, 적당한 친절함을 유지하며 현지의 이런저런 질문에 답했다. 어쨌든 무난한 분위기로 잘 흘러간다 생각했는데.
“참, 둘이 중고등학교 친구라고 했었지. 그럼 우리 형하고도 알겠네.”
“아…… 이도재? 알지…….”
내내 묻는 말에 대답만 하다 갑자기 현재가 꺼낸 화제에 현지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형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
“어? 어, 뭐, 친구도 많고 인기 많았던 것 같은데…… 여자애들한테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남자애들도 다 좋아했었고.”
“그랬구나.”
그 후로 딱히 다른 것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순간 식은땀이 다 났다. 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황급히 화제를 돌렸는데 그게 더 어색했다.
그래도 다행히 별다른 일 없이 자리가 파할 때쯤. 현재가 누군가와 잠깐 통화하러 나간 사이, 현지가 거의 다 마신 아이스티를 홀짝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사람 일 모르는구나. 네가 이도재 동생이랑 이렇게 오래 사귈 줄이야.”
“1년인데 뭐.”
“1년이면 오래 가는 거지. 너 기억 안 나? 너 헤어진다고 해서 내가 뜯어말렸던 거?”
“…….”
“암튼 네 남친, 너 진짜 좋아하는 거 티 엄청나게 난다. 그냥 뭘 하든 다 너만 쳐다보는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까 너 화장실 갔을 때는 얼마나 싸했는지…… 아, 아니다.”
“어?”
뭐가 싸하다는 거야? 뭔가를 말하려다 말기에 채근해 봤으나 현지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수연이 있을 때는 그래도 곧잘 웃고 말도 하더니, 수연이 자리를 뜨자마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현재에 괜히 어색해 미치는 줄 알았던 현지였다. 본래 사교성이 좋은 저라지만, 아까처럼 혹 이도재 얘기를 꺼낼까 봐 먼저 말 걸기도 애매했다.
“아냐, 어쨌든 진짜 누가 보면 1년이 아니라 한 달 만나서 지금 막 끓어오르는 커플인 줄 알겠어.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그런가…….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수연이 좀 머쓱해하니 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알아? 너 예전하고 뭔가 많이 달라졌어.”
“내가?”
“응. 뭐라고 딱 집어서 말은 못 하겠는데 좀 부드러워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사랑이 좋긴 좋다니까.”
자신도 누굴 좀 진득하게 만나 보고 싶다며 현지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사실 수연은 현지에게 은근슬쩍 엄마 얘기를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현지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그럴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카페부터 정리했겠지. 현지가 서울로 올라온 게 몇 주 전이니, 엄마는 역시 별다른 일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
그렇게 이틀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주말의 끝자락, 오늘은 이도재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현재는 차 안에서 헤어지기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했으나 나름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옛날엔 할 일을 미룬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는데, 현재와 있다 보니 만성화된 느낌이었다. 씻고 나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책상 앞에 앉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진짜 같이 사는 게 나으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는 제가 정말 마음먹고 뭘 하려고 하면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일단 제 눈앞에 보이는 데 수연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 집에 간다고 하면 일부러 더 버거운 섹스를 하는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물론 그건 제 생각에도 너무 간 착각 같았지만…….
암튼 무슨 분리 불안도 아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헤어지는 것을 갈수록 더 힘들어하는데. 이럴 바에 계속 같이 있는 편이 더 시간 절약일 것 같았다.
‘아냐, 말도 안 되지.’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집을 알아보고 물건을 채워 넣는 과정에서도 현재가 비슷한 맥락의 말을 많이 했었는데, 은근하게 세뇌당하는 기분이었다.
잡념을 떨치고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자격증 시험공부를 위해 두꺼운 책을 펼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잘 때 빼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연은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액정에 찍힌 번호는 현재가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인데, 묘하게 낯이 익는 것은 왜일까?
“여보세요?”
―차수연?
뒤의 번호가 현재와 같아서라는 생각은 한 발짝 늦게 났다. 이 약간 시건방진 목소리는…… 부정하고 싶지만 귀에 익은 느낌에 수연의 미간이 좁아졌다.
―차수연 맞지? 나야, 이도재.
“……뭐야? 네가 나한테 왜 전화해?”
날이 선 목소리에도 이도재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왜 하긴, 용건 있으니까 했겠지.
“뭔데.”
심장이 불안하게 마구 뛰었다.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고, 집 앞이니까 잠깐 나와.
“뭐?”
집 앞이라고?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대체 집은 또 어떻게 알아서?
―편의점 옆에 카페 있더라? 거기 들어가 있을 테니까 바로 나와.
기다릴 테니까.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전화는 곧바로 뚝 끊겼다. 뭐 이런……. 황당함에 핸드폰을 든 채로 굳어 있던 수연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