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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수연은 요즘 그 말의 의미를 사무치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직전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시트 위, 헐벗은 채 현재에게 엉겨 붙은 제 모습에 벌써 익숙해진 게 좀 무서웠다. 절정을 몇 번이나 맞은 여파였다.
“졸려?”
가물가물한 시야에 저를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조차도 의도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만족감에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은 나른했다. 수연은 대답 없이 그의 어깨를 왁 깨물었다. 한 번만 한다고 해 놓고는 몇 배로 어긴 데 대한 얄팍한 복수였다. 자국이 살짝 날 만큼 꽤 아프게 물었는데도 현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아, 하고 신음을 뱉긴 했는데 연기 톤이었다. 오히려 귀여운 장난을 본다는 듯 큼직한 손으로 제 엉덩이를 토닥이기까지 해서 보람이 없었다.
“자도 돼.”
“씻어야지…… 좀만 있다가.”
“응.”
등과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수연은 못 이긴 척 저를 지분대는 남자의 손길을 받아 주었다. 하긴 저도 좋아서 한 거니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아무래도 체력을 더 키워야 할 것 같았다. 깡다구는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장마 끝, 더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뜨거웠던 바깥을 닮았던 정사 직후. 한 김 식은 호텔방 안의 온도는 선선하고 쾌적했다. 씻고 자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개강을 3일 앞두고 학원도, 알바도 마무리가 되었던 터였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다시 일을 구해야 하나 복잡하던 터에 그저께 연락 한 통이 왔다.
‘원래 의대생이 맡고 있었는데 애도 잘 따르고 좋아했거든. 그런데 이번에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다는 바람에 구하느라 애 좀 먹는 모양이에요. 걔가 은근히 사람 가려서.’
작년까지 과외를 맡았던 학생의 학부모가 이번에 사촌 동생을 소개해 준 거였다. 기본 테스트도 할 겸 알바 끝나자마자 다녀왔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고등학생 여자애가 수연을 잘 따랐다. 더욱이 보수가 좋았다. 물론 그만큼 결과를 바란다는 거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안도는 들었다.
그 김에 오늘은 잠만 내리 자려 했는데 현재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꼬셔서 따라 나왔다. 좌식으로 된 한정식 집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식사 중 눈이 맞았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수연이 무심코 현재의 종아리 안쪽을 발끝으로 건드린 것부터가 시초였던 것 같다.
‘진짜 그냥 밥 먹으러 왔던 건데.’
무섭게 말이 없어진 남자와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친 후, 당연한 듯 차를 돌리는 현재와 근처 호텔로 직행했다. 대낮부터 섹스한다는 명제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고 살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체크인을 마치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없이 몸을 섞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할 거 다 한 후에만 찾아오는 생각이 염치없었다. 쏜살같이 지나간 그간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와 몸을 겹친 다음 날, 수연은 제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지 못했다. 새벽까지 그의 아래에서 시달리다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절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뭐 좀 먹고 자야 한다며 저를 깨운 현재가 시킨 룸서비스를 반쯤 눈을 감은 채 먹고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늦은 오후에야 푹 가라앉은 몸으로 호텔을 나갈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짐도 싸고 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하마터면 제주도 여행도 못 갈 뻔했다.
그러나 고대했던 여행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일부러 타이트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은 탓도 있지만, 둘이 이틀 내내 방 안에서만 뒹굴었던 것 같다. 손만 잡아도 찌릿했다. 눈만 마주쳐도 뱃속 깊은 곳이 울렁거렸다.
결국 현재의 제안으로 하루를 더 머물렀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파란 하늘과 더 파란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감탄했을 아름다운 배경이 제 옆의 남자의 존재감에 가려졌다.
또 다른 세상을 알아 버린 느낌이었다. 저도 이런데 현재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그래도 어둠이 슬슬 내려앉는 밤, 해안가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의 해방감은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남들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경험이라도 수연에게는 다 처음이었다. 그만큼 소중했다. 어디 멀리 외국에 나간 것도 아닌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때는 뭔가 다 업이 되어 있었다. 늘 이런저런 상념으로 무거웠던 머릿속이 잠시나마 깨끗이 비워질 만큼.
‘너무 좋다.’
‘조만간 또 오자.’
‘여기?’
‘너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드물게 박수까지 치며, 눈이 접히도록 환하게 웃는 저를 보던 현재의 얼굴이 가슴속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잠시 차를 대 놓고 산책하던 중 현재가 머뭇대며 꺼낸 말만 아니면 완벽했을 것이다.
‘그 돈 있잖아.’
‘돈?’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하셨던 돈.’
‘…….’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줬으면 해.’
다 듣지도 않았는데 이미 오해할 것 같은 기분에 불안해졌다.
‘내가 그걸 드리면 네 마음이 편해질까 해서.’
수연은 무의식중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들떴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으나, 현재에게 괜한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도대체 얼마만큼 잘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돈을 얼마 만나지 않은 여친에게 턱턱 준다는 건지……. 수연은 다시금 치솟는 울컥한 마음을 조용히 추슬렀다. 아니, 그러니까 굳이 자격지심에 화낼 필요가 없었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저를 사랑한다 하고. 지금껏 제가 보아 온 현재라면 저를 걱정해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수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더 불편해져.’
‘…….’
‘말했잖아. 엄마랑은 정말 연 끊었어. 하긴, 그래 놓고 안 하던 짓을 했으니까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그녀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현재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수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해해, 그런 와닿지 않는 말을 속삭이던 그와 밤바람이 묻은 키스를 했었다.
그렇게 꿈같았던 짧은 여행 후 집으로 돌아왔다. 수연은 그제야 내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어차피 사진은 현재의 핸드폰과 현재가 가져온 카메라로 다 찍어 놓았다. 예상대로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삭제할까 하다가 결국 확인했다.
아저씨 도움으로 돈을 마련했으니 걱정 말라며, 다음 달 초순쯤 자리를 마련할 테니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싫어도 한 번은 나오라는 덧붙임과 함께.
수연은 그대로 메시지를 삭제하고 엄마를 차단했다. 번호를 바꾸지는 못했다. 차단과 번호 바꾸는 것의 차이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결국 아저씨한테 돈을 받을 거면서 왜 저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 생각을 하니 좀 잠이 깼지만 무기력함은 여전했다. 진짜 5분만 더 있다 일어나야지. 땀과 체액으로 엉겨 있는데도 그 나른한 뜨끈함이 좋게만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절제 없이 흘러갔던 여름도 끝이 나고 있었다. 곧 학교에 간다 생각하니 현실로 떠밀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수연은 참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몸을 혹사하다 한계에 다다르면 방전되는 것처럼, 평소 완벽주의에 가깝고 저를 몰아치는 편인 수연은 어느 기준점을 넘어가면 드물게 모든 것을 될 대로 되라 식으로 놓아 버리기도 했다. 그게 딱 지금이었다.
그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학원과 알바는 책임감으로 갔지만 그 외의 시간은 공부는 뒷전이고 현재하고만 만났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는데 몸은 따로 놀았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정신 차려 보면 현재의 품에 안겨 키스하고 있었다. 꼭 행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피부가 맞닿아 있지 않으면 괜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트 중 잠깐 들렀던, 이도재가 없는 현재의 집 안에서 일을 치를 뻔할 때는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있잖아.”
“응.”
“너 학교에서 티 안 낼 수 있겠어? 이번에 수업도 한 개 빼고 다 겹치게 짰잖아.”
수강 신청 전, 이미 들었던 과목도 또 들을 기세로 시간표를 짜던 현재의 집중하는 표정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수연은 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한시도 가만 못 있고 만지면서.”
“…….”
실상 저도 그러면서 뻔뻔하게 물으니 현재가 침묵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저를 사납게 탐했으면서, 지금은 순진한 척 깜빡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냥 말하면 안 돼? 안 그래도 박성혁이랑 애들 엄청 집요한데.”
“안 돼.”
“아직도 확신이 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둘러댈 말도 없어진 수연은 말을 흐렸다. 다른 때면 이쯤에서 물러날 현재였는데 이번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기간을 정해 봐.”
“기간?”
“처음에 금방 깨질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잖아. 사실 반년도 안 만난 건 사실이니까.”
그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섹스를 많이 했구나. 잠깐 현실을 자각하는데 현재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1년이면 어떨까.”
“뭐?”
“그래도 계절을 한번 다 겪어 보면 확신이 생기지 않겠어?”
그럼 내년 봄인가. 저도 모르게 생각하던 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까지 내가 얘랑 사귀고 있을까?’
“안 돼?”
의미 없는 약속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초조하게 저를 바라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수연은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더는 현재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기쁜 낯을 숨기지 못하던 현재가 이내 느릿한 숨을 토해 냈다.
“근데 나도 걱정이야.”
“왜?”
“개강하면 이렇게 볼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학교에서는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하고 과외도 하고. 주말에나 제대로 겨우 보겠네.”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는 안 했어.”
“손잡고 뽀뽀도 못 하잖아. 그게 그거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던 현재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얇은 이불과 커다란 몸에 싸인 채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음…… 그거 있잖아.”
“그거 뭐?”
망설이는 게 의아해 채근하니 현재가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여자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거 있잖아.”
“생리?”
“어…….”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하긴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사실 수연의 주기는 불안정한 편이었다. 꼬박꼬박 하다가도 어떤 때는 두세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었다. 생리통도 심할 때는 방을 구를 정도로 심할 때도 있고 아예 없을 때도 있고. 아무튼 들쭉날쭉했다.
“나 원래 주기가 규칙적이지가 않아서. 곧 오겠지.”
“원래 그렇다고?”
“어…… 처음에는 아니었겠지? 근데 어쩌다 보니까, 달마다 할 때도 있는데 좀 텀이 길어질 때도 있고.”
“괜찮은 거야, 그래도?”
“왜. 실수했을까 봐 무서워?”
수연이 픽 웃었다. 물론 현재는 모르는 일이지만 자신은 그날 이후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 콘돔을 끼고 해도 혹시 모를 불안함이 있으니 미연의 방지를 한 거였다. 철저하게 이중으로 피임을 하고 있으니 괜찮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현재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답하니 현재가 반듯한 미간을 좁혔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하기까지 했다.
“그런 게 아니라, 걱정되니까.”
“…….”
“뭐든 규칙적인 게 좋잖아.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안심하면 안 되는 거고.”
맞는 말이라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현재가 몸을 일으켰다. 씻으려나? 수연도 따라 일어나는데 현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씻고 병원 가자.”
*
“봐, 먹는 게 이렇게 중요해. 스트레스는……최대한 안 받게 나도 옆에서 많이 도와줄게. 잠도 좀 일찍 자고, 응?”
차 안, 당연한 듯 벨트를 매 주며 현재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푹 자기는커녕 오후 내내 여기저기 시달린 끝에 대꾸할 기력도 없는 수연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전, 갑자기 산부인과에 가자는 현재에 수연은 기겁했다. 심한 것도 아니고 이런 경우도 나름 흔하다고 우겼는데도 현재는 예의 그 꺾기 어려운 고집으로 수연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병원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활기찬 한낮의 풍경에도 마음이 엄청나게 심란했다.
차마 같이 들어가기는 그래서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현재는 굳이 같이 갔다. 이것저것 문진도 하고 검사도 받았다. 인상 좋게 생긴 여의사는 자궁과 난소 기능에는 이상이 없다며 다만 잘못된 식습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카페인 과다 섭취 등등 비단 수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요소들을 생리 불순 원인으로 콕콕 집어냈다. 정작 수연은 별생각 없이 앉아 있는데 현재가 심각했다.
“당분간은 커피도 좀 줄이자.”
“그건 싫어. 얼마나 마신다고.”
“물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시잖아. 커피 믹스를 하루에 몇 잔을 마시는 거야. 이번 기회에 전반적으로 생활 습관을 좀 개선해 보게. 힘들겠지만 시간 날 때 나랑 가볍게 운동도 하고.”
반항해 봤지만 약봉지를 든 진지한 얼굴의 현재에게 또다시 훈계만 들었다. 살뜰하다 못해 유난스럽게 저를 챙기는 현재와 있다 보면 제 일상이 그렇게 팍팍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밥부터 먹자.”
“나 밥보다 자고 싶은데.”
“먹고 자.”
현재가 다정하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분명 그림같이 근사한 미소인데 어쩐지 압박감이 들었다. 앞으로 교정해야 할 생활 습관들을 또다시 읊고 있는 현재를 두고 수연은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다.
*
저녁은 현재의 오피스텔 근처 쌀국숫집에서 먹었다. 아무래도 학교 근처는 불안해서, 멀리 가서 먹을 게 아니면 그나마 학교와 좀 떨어진 현재 집 근처에서 먹는 편이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을 만났던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밥 먹었으면 좋겠는데 또 면이네.”
“먹고 싶은 걸 먹어야 입맛이 도는 거야.”
당당하게 대꾸하며 수연은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다. 안 그래도 여름을 타는데 요즘은 더 기력이 쇠한 느낌이었다. 현재가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고 뭐라 할 만도 했다.
‘원인 제공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현재가 제 몫의 얇은 고기를 연신 덜어 주며 말했다.
“많이 좀 먹어. 깨작거리지 말고.”
막상 먹다 보니 술술 들어가서 평소보다 빠르게 먹고 있는데도 현재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수연은 제가 잘 먹는 것을 확인하고야 젓가락을 드는 현재를 보며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오늘부터는 진짜 정신 차려야겠어.’
현재는 오늘 이도재 가게에 간다고 했다. 이도재가 또 공짜로 애를 부리려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형이 어제 물건을 옮기다 손을 삐끗해서 꼭 가야 한다는 현재를 붙잡을 순 없었다.
현재가 가면 집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서 밀린 공부를 해야지. 어차피 개강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아마도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 거였다. 거기에 안도하면서도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차 댈 데가 마땅치 않아 옆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잠깐 걸어왔던 터였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도 언제나처럼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데.
짝!
‘……뭐지?’
조용한 길 끝자락,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신랄한 소리에 수연과 현재, 둘 다 멈칫했다. 분명 뭔가를 후려친 소리에 뒤이어 미미하게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싸움이라도 났나? 조금 긴장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뒤이어 타닥타닥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울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수연은 정말로 놀랐다.
‘저 애는…….’
‘안녕하세요, 현재 오빠 여자 친구분 맞으시죠?’
활짝 웃으며 제게 인사하던, 귀여운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여희진. 저랑 현재와 함께 술도 먹었던, 이도재의 스무 살짜리 여자 친구.
당황한 수연만큼 상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슨…… 삽시간에 닥친 상황에 수연이 멍해 있는데, 담배를 불량하게 꼬나문 남자가 이쪽으로 설렁설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도재였다.
“형.”
“……이런.”
짜증이 섞여 있던 남자의 얼굴이 둘을 발견하고 미묘하게 어그러졌다. 아직 남은 장초를 미련 없이 발로 밟아 끈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데이트 하는 중? 안녕, 수연아.”
“……안녕.”
정황상 뺨을 얻어맞은 것 같은데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무섭기까지 했다. 미친 거야 알고 있었는데 정말 미친놈 같았다. 언제나처럼 편해 보이는 옷차림인 그의 오른쪽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걸 수연은 뒤늦게 발견했다. 뭔가 정말 다 불량해 보였다.
“못 볼 꼴 보였네. 다 봤어?”
쯧, 이도재가 뻔뻔한 낯으로 혀를 한번 찼다. 현재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가게 안 갔어?”
“진작 출발했는데 누구 때문에 늦어져서.”
그나마 뺨 처맞는 건 안 보여 줘서 다행이네, 이도재가 질 나쁜 투로 말을 이었다.
“수연이 데려다주고 가게 가려고 한 거지? 나도 좀 태워 가. 걸어가려고 했는데 늦었다.”
운전대를 잡은 현재 옆은 당당하게도 이도재가 차지했다. 사실 혼자 걸어가고 싶었지만 현재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그러지 못하고, 수연은 뒷자리에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조그만 애가 손은 엄청 매워. 알바 애들이 놀리겠네. 안 그래도 요즘 맞먹으려고 하는데.”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뒤에서 듣고 있자니 절로 눈시울이 찌푸려졌다. 분명 둘이 서로 되게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담하게 저 있는 앞에서 키스까지 할 정도면 말이다. 그래 놓고 저렇게 가볍게 말하는 이도재가 수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희진이가 여기로 찾아온 거야?”
핸들을 돌리는 현재의 목소리가 기분 탓인지 좀 서늘했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현재의 눈치를 봤다. 웃음기가 쫙 빠진 옆얼굴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어. 알잖아, 진작에 끝난 거. 확실하게 딱 끝냈는데도 계속 연락 오고 가게에도 왔던 걸, 내가 좋게 말해서 돌려보냈거든. 근데 며칠 잠잠하다가 결국 집까지 찾아오니까 내가 화가 나, 안 나. 일 가야 한다고 무시하고 가는데도 계속 따라오잖아. 진짜 이런 애는 또 처음이다.”
“…….”
“있는 정까지 다 떨어지게 하지 말라고 했더니 울더라? 하, 가게 가서도 할 일은 밀어 터졌는데, 손 이래 가지고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데 걔까지 그러니까 존나 빡치잖아. 이거 스토커 짓 아니냐고, 진작 딴 여자 생겼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했더니 갑자기 뺨을 때리는데…… 참 나. 그래도 이제 완전히 끊어졌겠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그가 뒤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왜 헤어졌는데?”
“…….”
핸들을 잡고 있던 현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수연은 제가 말해 놓고 놀랐지만 태연한 척 앉아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본 이도재가 예의 그 악당처럼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씩 웃는 반반한 낯은 솔직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매력적일 미소였지만 수연에게는 그렇게만 보였다. 잠깐 차가 멈춘 사이 그렇게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궁금해?”
“……그냥.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기간이 중요한가, 그래도 꽤 오래 만난 편인데.”
수연은 ‘오래’라는 단어의 뜻을 이도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잠시 생각했다.
“이유가 있어? 그냥 맘 뜬 거지. 어차피 좋아서 만난 것도 아니었고.”
“좋아서 만난 게 아니라고?”
“너도 알잖아? 걔가 매달려서 만났어. 난 분명히 말했거든. 만나 보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고. 확실히 하고 만났는데 헤어지자니까 딴소리한 쪽은 희진이야.”
“진짜 벌써 지금 다른 여자 만나고 있는 거고?”
“뭐, 그거야 그냥 한 말이지만…… 맘먹으면 오늘 밤부터도 가능한 일이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
‘문란한 자식.’
수연은 현재만 없었으면 대놓고 뱉었을 욕을 속으로 했다. 내내 앞을 보고 답하던 이도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 희진이가 불쌍하게라도 보여? 아님 같은 여자 편들어 주는 건가.”
“둘 다 아닌데.”
“그럼?”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몇 번 보지도 않은 희진이 안쓰럽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었다. 이도재가 정말 좋다며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던 게 생각보다 깊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는 저인데 이렇게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좀 더 좋은 말로 끝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널 엄청 좋아했던 것 같으니까.”
하하, 수연의 말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기냐? 애는 그렇게 울려 놓고? 마음속으로 씹고 있는데 그사이 차가 다시 출발했다. 저만치 학교가 보였다. 현재는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재도 제 형이 희진에게 좀 너무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이도재가 답했다.
“그렇게 하면 더 안 떨어지지. 당연한 거 아냐?”
“…….”
“미련을 주는 게 더 나쁜 거야. 넌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래, 사람 뗄 때 독한 말 하는 건 너도 만만치 않잖아. 왜, 고딩 때 기억 안 나? 나 그때 네가 강진욱한테 하는 거 보고…….”
“…….”
“…….”
쯧, 신나게 말을 잇던 이도재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동시에 수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어이 이도재가 일을 쳤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차 안,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제발.’
운전에 집중한 현재가 못 들었기를. 말도 안 되는 것을 절실히 빌고 있는 찰나, 호프집 주차장에 능숙하게 차를 댄 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딴청을 피우고 있는 제 형 얼굴 한번 보고,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낮게 깔리는 저음이 그렇게 오싹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아, 현재야. 그게.”
멋쩍게 말문을 열던 이도재가 에이 씨, 이런 무책임한 말과 함께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걸 바라보던 현재가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
“고딩 때라니. 둘이 아는 사이였어?”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굳어 버린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현재의 얼굴이 무섭게 딱딱해졌다.
“그게…… 어, 나 얘랑 중고등 동창이야. 그래 봤자 1년 좀 넘었던 기간이라 동창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긴 한데. 알잖아, 나 잠깐 아빠랑 살았을 때 깡촌 갔던 거.”
엄연히 도시를 깡촌이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 새도 없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 숨쉬기도 곤란했다. 이도재가 부디 잘 둘러대 주길 바랄 뿐이었다.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수연의 얼굴을 응시하던 현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서 이도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근데 서로 안 지는 얼마 안 됐어. 왜 그때, 희진이랑 만났을 때 말하다가 생각난 거야.”
“말이 돼? 같은 학교인데 몰랐다고?”
한숨을 내쉰 현재가 수연의 생각을 그대로 읊은 듯한 말을 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처음 봤을 때 뒤풀이에서는 나도 취해서 가물가물했고. 아마 수연이도 그랬을 거야. 둘 다 서로한테 관심 없으니까 몰랐지. 너도 동창 다 기억해? 아니잖아.”
“그거랑은 다른 문제 같은데. 수연이가 존재감 없는 편도 아니고.”
날카로운 현재의 말에도 그새 페이스를 되찾은 이도재가 웃는 낯으로 답했다.
“너야 애인이니까 그렇지만, 모두한테 그런 건 아니니까. 수연이가 재수했다는 거 나는 몰랐으니까, 당연히 신입생인 줄 알고 그쪽으로 생각 자체를 안 했지. 나이가 안 맞잖아.”
“…….”
“그리고 시간도 꽤 흘렀고. 얼굴은 생각날 듯 말 듯했는데 이름까지는 기억 못 했어. 수연이도 그랬겠지. 지난번 희진이랑 만났을 때 둘이 잠깐 얘기하다 보니까 알게 됐는데…… 별일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동안 나한테 말 안 했는데?”
별일도 아닌 걸 말이야, 나직하게 읊조리는 현재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아아.”
이도재가 말을 길게 끌었다. 딱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조하게 앉아 있는데 정말로 피가 다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수연이 친구랑 사귀다가 차였거든. 좀 많이 더럽게 헤어져서 수연이가 날 안 좋아해. 말하다 보니 되게 이것저것 다 나오더라. 서로 좋은 기억도 없는데 내가 너한테 그냥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쪽팔리잖아. 어차피 우리 둘 다 말만 동창이지 말 한 번 제대로 섞은 적도 없으니까 상관없기도 하고.”
어째 이도재가 말하면 말할수록 더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궁지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달리 둘러댈 방안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암튼 뭐, 별것도 아닌데 말하니까 속은 시원하다. 수연이 데려다주고 천천히 와.”
별것도 아닌데, 에 힘주어 말한 이도재가 수연에게 한번 손을 흔들고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저러고 홱 빠지다니, 아무튼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졸지에 둘이 남아 버린 차 안은 고요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형이 말한 게 다 맞는 말이야?”
“어? 어…….”
“친구 누구랑 사귀었는데? 혹시 그 현지라는 애?”
“아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수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다른 애 있었는데 걔랑도 친했었거든. 솔직히 그때 일이 나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좋은 기억이 없는 건 맞아. 서로 감정 안 좋으니까 이도재가 너한테는 굳이 말하지 말자고 해서.”
거짓말이 힘들어 식은땀이 절로 났다. 망할 이도재. 입 안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현재가 다시 물었다.
“나한테 더 할 말은 없고?”
“어……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 더듬더듬 말을 잇자 현재가 깊은 숨을 흘려보냈다. 무섭게 밀려오는 죄책감과 현재가 더 캐물으면 할 말이 없다는 생각에 수연이 시선을 떨구는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
다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어쩐지 냉정한 목소리에 수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차를 출발시키는 현재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을 뿐.
그날, 현재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일하는 중간 짬을 내어 문자를 했고, 일 끝나고 돌아가는 길 수연을 보러 집 앞에 다시 왔다. 종일 보고 나서도 잠깐 떨어지는 것을 못 참는 여느 때처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잘 자.”
“……응. 너도.”
언제나처럼 저를 끌어안는 품은 따뜻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달랐다. 그냥 찔리는 게 많은 제가 괜히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지만. 수연은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저를 끌어안은 현재에게서는 언젠가 제가 선물한 향수 향이 났다.
*
그렇게 개강을 했다. 빡빡한 일상 가운데에서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당장 주말을 보내고 나면 명절 연휴의 시작이었는데, 황금연휴라고 벌써 다들 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바뀐 게 없는 것 같은 일상에서 수연은 조용히 변화한 많은 것을 느꼈다. 수연은 더는 외롭다거나, 팍팍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매번 당당히 제 옆에서 수업을 듣는 현재 때문이라도 말이다.
대신 늘 아슬아슬한 느낌은 필연적으로 따라붙긴 했지만. 비밀 연애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도 함께 오후 수업을 마친 둘은 현재가 차를 대 둔 건물 뒤편으로 나란히 향하고 있었다. 아예 친하다는 식으로 말을 맞춰 놓으니 차라리 움직이기가 편했다. 둘 사이를 의심스러워하는 동기나 선후배들은 아직도 많긴 했지만.
“배고프지, 가면 맛있는 거부터 해 먹자.”
차 안, 벨트에 손을 뻗기도 전 현재가 먼저 매 주었다. 과외가 없는 날이면 현재의 집에서 저녁도 먹고 과제도 하다 밤늦게 돌아가는 게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이도재야 한 달에 두 번, 가게가 쉬는 월요일이 아니면 그 시간대는 집에 있을 일이 없었고, 둘이 늘 도서관에 붙어 있을 수도 없으니 데이트하기 가장 만만한 곳은 현재의 집이었다. 저녁은 배달시켜 먹을 때도 있었고 같이 만들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현재가 수연은 쉬라 해 놓고 혼자 뚝딱뚝딱 만들어 주긴 했지만.
이제는 일교차가 꽤 커져 차 안이 기분 좋게 서늘했다. 익숙한 캠퍼스를 빠져나가며 수연은 문득 물었다.
“명절 때는 어디 가?”
저야 갈 곳이 없지만 현재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묻는데 현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너랑 있을 건데?”
“왜?”
“원래 명절 때 그렇게 보냈어. 어머니야 멀리 계시고, 아버지 펜션은 그때가 성수기고. 펜션 안 할 때도 아버지는 워낙 바쁜 분이셔서. 아, 지난번에는 아버지 일 도와드리러 가긴 했는데, 이번에는 오지 말고 푹 쉬라고 하시네.”
“…….”
저도 모르게 조금 안도했던 수연은 이내 슬쩍, 현재의 눈치를 살폈다.
‘이쯤이면 이도재 얘기를 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호프집도 그때가 대목일 테니 정말 가족이 모이기는 쉽지 않을 거였다. 하긴, 거기에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지도 꽤 되셨다고 했으니까 그럴 법도 하다 싶었다. 수연이 신경 쓰는 것은 그 부분보다는, 자연스럽게 나왔던 ‘형’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현재에게 있었다.
한 달 전쯤, 이도재의 입방정으로 둘이 아는 사이였다는 것을 들켰다. 수연은 내심 현재가 좀 더 캐묻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는 정말 그 뒤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둘러댈 말이 없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찝찝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신경 쓰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의식적으로 이도재 얘기를 아예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워낙 좋은 형제 사이라 과하다고까지는 아니어도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이도재 얘기가 종종 나왔는데, 최근엔 아예 없어졌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현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대놓고 왜 요즘은 형 얘기 안 하냐고 물을 수도 없으니까.
“가서 좀 쉬고 있어, 오늘은 내가 해 줄 테니까. 어제 먹고 싶다던 그 연어구이 해서 먹을까?”
매일 제가 해 주면서 오늘은, 을 꼭 붙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순간 어떠한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상당히 단순하고도 유아적인 충동이. 수연은 잠시 차를 멈추고 있는 현재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
살짝 미소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내 제 손을 다정히 감싸 쥐는 커다란 손의 온기에 수연은 생각했다. 역시 놓치고 싶지 않다고.
“왜 그렇게 봐.”
“…….”
말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를 응시하던 현재는 결국 웃어 버렸다. 제 속을 알면 수연은 분명 뚱한 얼굴을 하겠지만, 가끔 그는 눈앞의 애인이 너무 귀여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윽고 신호를 받은 차가 다시 출발했다.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현재가 가볍게 물었다. 여전히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로.
“왜, 뽀뽀하고 싶어?”
“응.”
“…….”
잘빠진 입매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흐음, 현재가 어깨를 크게 펴며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잡고 있던 손도 냉정히 놓아 버렸다. 운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던 찰나.
“……집에 가서 많이 하자.”
뒤이어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는 결국 조금 웃음이 났다.
*
현재가 직접 소스까지 만들어 구워 준 연어 스테이크를 먹고 수연은 현재의 방으로 과제를 하러 갔다. 현재 덕에 요즘 잘 먹고 다니니 체력은 확실히 좋아진 기분이었다. 당장 아까 학교에서 마주친 다미만 해도 제게 요새 생기 있어 보인다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 말은 살면서 처음 들어서 상당히 신선했다.
“뭐 마실 거 줄까? 커피?”
“아니. 배불러서 아무 생각도 안 나.”
방에 들어서며 하는 현재의 말에 수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두 형제가 사는 오피스텔은 방만 셋에 복층까지 있어 꽤 큰 편이었는데, 거실 바로 앞 방은 이도재가 썼고 옆에는 같이 쓰는 옷방, 가장 안쪽에는 현재의 방이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복층 공간이 나온다. 예전 현재 말로는 이도재는 술을 많이 마시면 꼭 이 위에서 이불도 없이 잠드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 현재가 집에 가자고 했을 때만 해도 수연은 다음을 기약하며 거절했다. 이도재가 집에 없는 것은 알지만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도재가 없는 시간대면 자연스럽게 여기를 드나들고 있었다. 할 게 많아 마음껏 놀러 다닐 수도 없는 처지인데, 현재가 집에서 같이 편하게 하자는 말을 계속해서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새 제 것 같은,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가방을 뒤적이는데 현재가 마뜩잖은 소리를 냈다.
“바로 하려고?”
“응? 당연하지.”
넌 다 썼지만 난 아니거든, 수연은 새침하게 답하며 가방에 갖고 온 조그마한 태블릿을 꺼냈다. 현재는 매번 제 노트북을 쓰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뭐랄까, 좀 염치가 없었다. 화면이 작아서 좀 불편하긴 해도 엄연히 제 것이 있으니까.
“밥 먹고 뭐 빼먹은 거 없어?”
빼먹은 거? 패드 전원을 켜던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치라면 지금 방에 딸린 욕실에서 나란히 하고 왔는데. 하도 왔다 갔다 하니 현재가 아예 수연의 칫솔까지 나란히 걸어 놓았다. 그뿐인가, 현재의 방 안에 있는 수납함 맨 아래에는 수연이 입을 만한 편한 옷가지들로 가득했다. 혹시 몰라서 사 놨다고 하던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고, 과하게 비싼 감이 있었다. 쓸데없다며 환불하라는 말에 현재는 태그를 다 떼서 그럴 수가 없다는 말로 응수했지만.
“뭔데?”
“뽀뽀.”
한 손을 허리에 짚은 남자가, 비딱하게 선 것과는 사뭇 다른 귀여운 단어를 당당히 입에 올렸다.
“집 가서 많이 하자고 했잖아. 아까는 밥 먹고 하자며.”
먼저 꼬셔 놓고 이러기냐며 현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맞다. 수연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서도 딱히 먼저 뭔가를 하진 않았다.
“암튼, 애태우는 데 뭐 있지.”
씩 웃은 현재가 짐짓 느긋한 척 손을 뻗었다. 앉아 있는 수연과 키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약간 숙인 채, 볼을 가볍게 쓰다듬던 손이 자연스럽게 귀로 향했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아.’
……또.
현재가 제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수연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그런 행동이 조금 위험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모양 예쁜 손가락이 제 귓불을 지그시 비벼 대는 것을 느끼고 있노라면 기분이 한없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묘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발끝까지 곱아드는 듯한 야릇한 감각 끝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서일까.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뭐랄까, 은근하게 개발되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혼자 집에서도 만져 보았는데 전혀 감흥이 없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귓불을 잠시 매만지던 손이 등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입술 새로 삼켜졌다. 수연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축축한 혀가 비벼지고, 더운 숨결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응…….”
입천장을 건드릴 때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가냘픈 소리에 자극받은 듯, 허리를 감은 현재의 손에 순간 울컥 힘이 들어갔다. 알싸한 치약 맛이 살짝 전해지는 키스는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지만 수연은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종일 붙어 다니던 방학과는 다르게 개강한 후로 현재와는 이렇게 저녁 시간을 제외하면 만질 수 없었다. 과외라도 하고 오는 날에는 더 시간이 줄었고.
차라리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게 낫지, 옆에 있는데도 만질 수 없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이 마주치고 찌릿한 순간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그냥 넘기고 넘기다 보니 어떤 때는 좀 짜증이 났다. 얼마 전 그런 얘기를 했을 때 현재는 말이라도 떨어져 있는 게 낫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뭐라 하긴 했지만.
암튼 저도 이런데 현재라고 다를 리 없었다.
‘안 되는데…….’
호흡을 점점 빼앗아 가는 끈적한 키스에 휘말리던 중, 수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턱 끝을 타고 내려가는 그의 입술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만.”
적당한 힘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만스럽다는 뜻이었다.
“나 진짜 리포트 써야 돼. 너도 빨리 앉아서 뭐라도 해.”
“도와줄까?”
“뭘 도와줘. 자기 생각 쓰는 건데.”
“주제 어렵다고 했었잖아. 내가 쓴 거 한번 볼래?”
“…….”
어젯밤 저를 데려다주고 썼다던 리포트. 직접 노트북을 켜고 파일을 열어 주는 손길을 말릴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수연은 빠르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과제를 훑어보았다. 내용을 다 확인하고 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완벽하네.’
제가 교수님은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얼핏 양립하기 쉽지 않은 개념인데, 현재는 논리적이면서도 창의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많이 다니고 다양한 경험도 많이 해서 그런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잡다한 지식의 깊이가 있었다. 그런 게 일상에서도 알게 모르게 티가 나는 편이었고.
‘괜히 봤다.’
현재의 리포트를 보고 나니 더 쓸 자신이 없어졌다. 다른 데 자격지심이 드는 게 아니라, 수연은 이럴 때 현재에게 자격지심이 들었다. 열심히 필기하고 외워서 되는 게 아니었다. 진짜 그 안에 든 알맹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정말 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재가 얄밉기도 했다. 왜 이렇게 완벽해 가지고. 다 가진 남자랑 연애하는 것은 생각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어때?”
“전혀 도움 안 돼.”
“…….”
“이렇게 잘 쓴 거 보여 주면 더 하기 싫어지잖아. 그냥 이름 바꿔서 내가 내게 해 줘.”
“그래, 그럼.”
뭐야, 얘? 수연은 저도 모르게 현재를 매섭게 째려봤다.
“진심이야?”
“응. 나는 괜찮은데.”
“그럼 넌 어떡하려고?”
“다시 써야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진심인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좀 화가 나려고 했다. 수연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종전 생각한 완벽하다는 말은 취소였다. 제 애인은 어떤 때는 눈치가 너무 없었다.
“너 이럴 때 진짜 별로야, 알아?”
“……미안.”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 더 짜증 나.”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고 하는 말일 게 분명했다. 수연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젓고 현재에게서 등을 돌렸다. 중간고사를 리포트로 대체하는 거여서 진짜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키패드로 손을 뻗는데 현재가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아 왔다.
“왜 이렇게 화났어, 응?”
“몰라. 저리 가.”
볼과 입술에 이리저리 뽀뽀를 퍼붓는 것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쓰다 만 과제 창을 열었다. 수연아, 자기야, 옆에서 이리저리 불러도 대답도 안 했다. 어차피 수연은 집중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럴까. 우리 냥이가.”
“……그만해, 진짜.”
낯간지러운 소리에는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냥이라니, 얕게 소름이 돋았다. 얼마 전부터 현재는 저를 이렇게 한 번씩 부르곤 했다, 화를 내는 모습이 새끼 고양이 같다는, 수연이 절대로 납득하지 못할 이유에서였다.
‘고양이 앞치마를 사 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싫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애칭이라기에는 오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낯간지러웠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집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제 핸드폰을 집어 들던 현재가 멈칫했다.
“왜?”
“음, 아니.”
어깨를 한번 으쓱한 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이어지는 목소리에 괜히 뜨끔한 수연은 다시 등을 돌리고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만 열심히 읽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현재가 다가오는데도 수연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아.”
“……응?”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현재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인데 혼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오늘 자고 갈래?”
“오늘?”
“응. 아침에 데려다줄게. 열한 시 수업이니까 그래도 여유 있잖아. 음, 뭣하면 여기서 씻고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면 되니까.”
“……갑자기 왜? 이도재도 있는데.”
말끝에 나온 이름에는 제가 말해 놓고 흠칫했지만 이 정도는 언급할 수 있는 거니까. 제가 여기 드나드는 것을 이도재도 어렴풋이 눈치챘으리라 생각하지만…… 자고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형은 오늘 안 들어온대.”
“아…….”
왜? 저도 모르게 또다시 묻게 되었다. 현재가 이불 위에 털썩 걸터앉으며 말했다.
“여친 집에서 자고 온다고.”
“…….”
“거기서 내일까지 있다 가게 갈 거니까, 너랑 걱정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하더라.”
덧붙이는 말에는 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얘는 헤어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렇게 헤어지라고 난리를 쳐 놓고 이런다고? 황당하다 못해 의도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이제 아주 포기한 건가? 언젠간 알아서 깨질 거 아니까.’
문득 든 생각을 수연은 곧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 없지. 이도재의 동생을 향한 집착은 아주 대단하다 못해 무시무시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잠잠할 리 없는데.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대처할 방안이 없어 문제였다. 이도재를 생각하던 수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도재와 제가 동창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현재가 보인 지독한 무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연히 엄청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이지만, 단순히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만약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자신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이도재가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수연은 현재가 평생 몰랐으면 했으나, 어떤 식으로든 다가오는 끝에 대한 불안감과 제 행동에 대한 부채감을 항상 갖고 있었다.
“……뭐야, 벌써 여자 친구 생겼대?”
수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끝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무겁다 못해 무기력해져, 준비 따위는 할 수도 없게 만든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제가 현재를 속이고 기만했다는 것.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였다.
“응. 형이 원래 알던 누나.”
“아…… 몇 살 차이 나는데?”
“세 살? 아니, 네 살인가.”
“그럼 직장인이겠다.”
“응.”
“걔는 진짜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관심도 없지만 대충 대화를 이어 가고 있는데 문득 울면서 골목길을 지나가던 희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때 그 장면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지금 같은 때에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원래 이도재 연애할 때 오래 못 가는 편이야?”
“왜?”
별생각 없이 물어본 말에 오히려 질문이 돌아왔다. 어…… 수연은 말을 멈추고 저를 빤히 보는 현재를 마주 보았다.
“왜냐니…….”
“아니, 왜 이렇게 형한테 관심이 많은가 해서.”
“뭐? 절대 아니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은 한 박자 늦게 났다. 고개까지 저어 가며 강력하게 부정하는 수연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현재가 갑자기 양팔을 쫙 벌렸다.
“이리 와.”
무슨 강아지 부르듯 하는 태도였다. 저 침대는 위험한데, 이미 몇 번 일을 치를 뻔한 적이 있는 장소라 경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연은 눈썹을 씰룩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순순히 일어나 주었다.
선 채로 어정쩡하게 현재의 어깨를 안으려는데 현재가 수연의 허리에 손을 감고 홱 끌어당겼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앉게 되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다리를 쫙 벌린 셈이 된, 상당히 노골적인 구도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키스해 올 줄 알았는데 현재는 미동이 없었다. 코끝을 한번 콩, 맞댄 후 예의 그 차분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마음속까지 꿰뚫을 듯한 맑고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던 수연은 결국 제가 먼저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왜 눈 피해.”
“응? 안 피했는데.”
수연은 퍼뜩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상냥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뜨끔뜨끔했다. 잠자코 어루만짐을 받고 있는데 현재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나, 나가서 살면 어떨 것 같아?”
“어?”
따로 산다고? 놀라 조금 커진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하던 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즘 좀 생각해 보고 있어서.”
“너 나가면 이 큰집에 이도재 혼자 사는 거잖아. 너무 과한데?”
지금도 서너 명은 살아도 될 정도로 널찍한데. 수연의 말에 현재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형이야 뭐, 지인이랑 셰어해도 되는 거고. 물론 상의를 해 봐야겠지만 난 근처에 따로 방 구해서 나가 살아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서로 각자 생활도 있으니까.”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갑자기 이러니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수연의 말에 현재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역시 똑똑하네, 우리 냥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발끈하며 몸을 비틀자 현재가 웃으며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아 왔다. 청량한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은 저속했다. 비벼진 하체에 힘을 얻은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수연은 애써 모른 척했다.
*
결국 현재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리포트를 끝냈을 때에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아…….”
뻐근한 몸을 쫙 펴니 두꺼운 전공 책을 펴 놓고 앉아 있던 현재가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다 했어?”
“응.”
씩 웃은 현재가 수고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 끝냈다는 생각에 후련해지며 때늦은 피로가 밀려왔다.
몇 시간 전 약간의 위기가 있었으나, 현재에게 이제 진짜 건드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수연은 그때부터 내내 태블릿만 보고 있었다. 만약 현재가 계속 치대는 타입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매번 집에 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아무리 현재가 좋아도 할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현재는 어느 선을 잘 알았다. 지금도 집중해 책상에만 앉아 있는 수연을 혼자 두고, 옆에서 말 한 번 걸지 않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필요할 때 수연이 부르면 그때야 도와줄 뿐 그 외에는 먼저 말도 걸지 않았다. 물론 도중에 슬쩍 일어나 수연이 좋아하는 주스를 옆에 놓아주고 가긴 했지만.
“출출하지 않아?”
“음……좀 그렇긴 한데.”
현재의 말을 듣고 나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근데 곧 잘 텐데. 수연이 고민하는데 현재가 쐐기를 박았다.
“치킨 먹을까? 이 앞에 포장 받아 오면 얼마 안 걸리는데.”
“이 시간에?”
“이 시간에 먹어야 맛있지.”
묻지도 않았는데 현재는 집 앞 간장 치킨 맛집의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을 굳이 설명해 주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머리로는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군침이 돌았다. 결국 수연은 유혹에 지고 말았다.
“……그럼 먹든가.”
“알았어.”
씩 웃은 현재가 전화로 주문을 했다. 수연은 침대에 그대로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나 너랑 있으니까 점점 살찌는 기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침대에 비스듬하게 몸을 눕힌 현재가 엎어진 수연의 등을 쓸며 미간을 찌푸렸다. 배 나오는 거 같다고, 수연은 괜한 볼멘소리를 했다. 현재가 지나치게 다 받아 줘서 그런지 쓸데없는 투정이나 실없는 소리도 현재 앞에서는 곧잘 하게 된 편이었다. 역시나 현재는 곧바로 반응했다.
“배 나왔다고? 어디?”
“아, 만지지 마……!”
맨투맨 안으로 쑥 들어오는 손에 기겁한 수연이 몸을 비틀었지만 헛수고였다.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현재가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아까 많이 먹였는데 왜 또 홀쭉해졌냐. 다시 보충 좀 시켜야지.”
“뭐야, 사육하는 것도 아니고.”
벗어나려 낑낑댔지만 저를 타고 오른 현재의 몸에 완전히 짓눌려 무의미한 일이었다. 수연의 말에 현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사육이라니, 사랑이지.”
“……말이나 못 하면 진짜.”
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재가 슬쩍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 표정 봐. 너무 귀여워.”
“…….”
도대체 뭐가 귀엽다는 건지…….
수연은 가끔 정말로 현재의 취향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제가 멋대로 해도 좋다고 만나는 거겠지만. 심드렁한 얼굴에 현재가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허리와 엉덩이도 마음대로 쓰다듬고, 예뻐 죽겠다며 목덜미를 쭉쭉 빨기도 했다. 그러다 자국 남겠다며 수연이 등짝을 한 대 매섭게 때렸는데도 하나도 안 아프다는 표정으로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맞고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잠시 노닥이다 보니 치킨집에서 찾으러 가라는 전화가 왔다. 현재랑 나란히 가서 치킨을 받아 와서 거실에서 TV를 보며 포장을 뜯었다. 어쩌다 보니 화면에는 여행 다큐멘터리 채널이 틀어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에 현재가 감탄했다.
“물 색깔 봐. 어떻게 저렇게 진하게 파랗냐.”
“그러네.”
“저런 데 한번 가 보면 어떨 것 같아?”
“음……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현재가 발라 준 살을 우물대며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푸른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강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렘과 낭만이 묻어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답다고는 느껴졌으나, 어차피 제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그런지 현실감 없게만 느껴졌다. 현재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같이 가자. 당장 겨울방학도 괜찮고…… 제주도는 너무 짧았잖아.”
“…….”
여행 경비는? 멀리 다녀오는 동안 알바나 과외는 어쩌고? 당장 저는 여권조차도 없다. 수연은 현재가 가볍게 던진 말에도 이것저것 팍팍한 현실이 먼저 떠오르는 자신이 싫었다. 아주 가끔은 모든 것이 여유롭게만 보이는 그를 질투하기도 한다. 질투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그것 외에는 다른 정의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험 기간 끝나면 짧게라도 어디 다녀올까? 저번처럼.”
“……마음대로 해.”
하지만 수연은 괜한 말로 좋아 보이는 현재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왜, 싫어?”
“아니, 좋아.”
태연하게 답하면서도 수연은 내내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흥미를 느껴서 그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현재의 입은 이내 다물렸다.
*
먹은 것을 정리하고, 번갈아 샤워까지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널찍한 침대에 현재와 둘이 누워 있는데 기분이 묘했다. 제 자취방에 누워 있는 거나, 호텔 방에 있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어쨌든 현재 집에서 자게 된 건 처음이니까.
베개와 시트, 덮고 있는 부드러운 이불에서는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과 더불어 수연이 좋아하는 현재의 냄새가 났다. 하물며 입고 있는 품이 넉넉한 현재의 커다란 티셔츠에서도 말이다. 대 봤을 때는 크긴 해도 입을 만할 것 같았는데, 막상 입고 나니 품도 생각보다 더 넉넉하고 길이도 길어서 하나만 입어도 원피스 느낌이 났다. 제게서 현재와 같은 향이 나는 기분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피곤하지, 얼른 자자.”
“응.”
현재를 마주 보고 누운 자세로 수연은 눈을 감았다. 언제인가부터는 이런 자세로 자는 것도 익숙해졌다. 눕자마자 자연스럽게 팔베개를 해 주려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던 터였다. 현재는 하나도 팔 안 아프다고 했지만 제가 부담스러워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자상함을 거부당한 현재가 아쉬운 듯 조금 전 본인 손으로 꼼꼼히 말려 준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또 꽤 길어 있었다.
“내일 과외 있지?”
“응.”
“데리러 갈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
“밖에서 먹을 거야?”
“왜, 집에서 먹을까?”
“아니…… 아무 데나 상관없어.”
중얼거리며 수연은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수연은 현재랑 같이 있다는 게 중요했지 장소나 메뉴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주말은 진짜 나가지 말고 공부만 해야지.’
현재도 시험 기간이니 딱히 어디 나가자고는 안 할 거였다. 내일 할 일의 계획까지 머릿속으로 세운 후에야 수연은 잠을 청했다. 딱 맞는 온도와 소음 하나 없는 조용한 방 안, 제 등을 토닥이는 남자의 품.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나면 할 거 많으니까 지금은 자야 하는데. 어느 순간 수연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왜. 잠 안 와?”
“어…… 피곤하긴 한데.”
나긋한 목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는데 현재도 깨어 있던 모양이었다.
“너도 피곤하다며, 왜 안 자?”
“글쎄, 나도 이상하게 잠이 안 오네.”
흐음, 느긋한 숨을 한번 뱉은 현재가 다시 수연의 허리를 고쳐 끌어안았다. 적당히 힘이 실린 손길이었다.
“너도 그래?”
“응.”
“왜 그러지.”
일부러 커피도 안 마셨는데.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현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기 전에 뭐 빼먹은 게 있어서 그런가.”
“뭐?”
이번엔 진짜로 빼먹은 게 없는데. 씻고 나서 머리를 말려 주던 현재와 자연스럽게 뽀뽀…… 아니, 키스도 했고. 졸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까맣고 큰 눈동자를 바라보던 현재가 설핏 미소 지었다.
“뭔데. 말해 봐.”
반문하는데 그대로 엉덩이가 붙잡혔다. 얇은 천 사이 전해지는 감각을 즐기듯, 멋대로 주무르는 불순한 움직임에서 명백한 의도가 느껴졌다.
“……안 돼.”
불쑥 튀어나온 수연의 말에 현재가 짐짓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어둠 속에서도 오차 없이 완벽한 이목구비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가?”
“뭐든, 네가 생각하는 거 다.”
“흠, 너무하네.”
난 그냥 좀 만지려고만 했는데, 뻔뻔하게 뇌까린 현재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힘주어 빨지는 않고 혀끝으로 쇄골 위와 목선을 간지럽혔다. 반응하지 않으려 하는데 절로 몸이 뒤틀렸다.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꾹 참고 있는데, 허술해진 틈을 타 티셔츠 안으로 손이 깊숙이 들어왔다. 허리를 은근하게 쓰다듬고, 허벅지를 훑어 내릴 때까지만 해도 어찌어찌 버텼는데, 손이 속옷을 비집고 은밀한 곳으로 침범하자 결국 어깨를 와락 물어 버렸다. 일단 급한 와중 보이는 게 그거라 하지 말라는 뜻으로 문 건데, 생각보다 세게 문 것 같아 좀 미안해지려는 찰나. 쓰읍, 혀를 찬 현재가 전혀 위엄 있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물면 안 돼.”
얘는 진짜 무슨 나를 애완동물로 아나. 수연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고개를 든 현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꾹꾹 펴 주며 말했다.
“하지 말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하면 더 흥분돼.”
“나 내일 할 거 많거든? 오늘은 안 돼.”
솔직히 아까부터 조금 ‘그럴’ 기분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지만 자제해야 했다. 그간 몸을 겹치며 느꼈는데, 현재는 제 말이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구는 평소와는 달리 섹스할 때는 은근히 자기 페이스인 면이 있었다. 배려가 없다거나, 제 욕구만 채운다던가 하는 뜻은 아니었다. 안 된다고 마음먹은 수연을 살살 어르고 달래 결국은 현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거랄까.
“알아. 애인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지. 아는데.”
하아, 현재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침대에 네가 누워 있으니까 자제가 안 돼. 좀 신기하기도 하고.”
“…….”
“나 좀 들떴나 봐. 어떡하지?”
순진하게 물어오는 것치고는 한 뼘인 속옷을 끌어 내릴 듯, 말 듯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슬아슬했다.
‘아, 진짜…….’
수연은 입 안 연한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로 이런 때가 문제였다. 어차피 제가 진심으로 싫다고 하면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재울 거면서, 지금 저도 슬슬 동한다는 것을 알고 저런다. 아주 앙큼하기 짝이 없었다.
“으응…….”
결국 틈을 비집고 들어온 손이 살짝 젖어 있는 입구에 닿자 억눌린 비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동시에 현재의 눈이 새까맣게 반짝였다. 내내 굶주렸다 먹이를 발견한 짐승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 못 참겠는데. 밑에 한 번만 빨아 주고 자면 안 돼?”
“아, 너 진짜……!”
거침없는 발언에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단정하다 못해 가끔은 금욕적으로 보이는 얼굴로 저런 말을 내뱉을 때면 아찔했다.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현재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 소곤거렸다.
“넣진 않을 거야. 약속.”
“…….”
“잠 안 온다며. 한번 기분 좋게 가면…… 푹 잘 거야.”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 끝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몇 번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아래가 저도 느껴졌다. 수연은 이성과 따로 노는 제 몸이 야속해 입술을 꾹 물어 봤지만, 자꾸 흘러나오는 신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래도 현재가 한 번 갈 때 몇 번씩 가는 수연이었다. 현재는 늘 너무 잘 느껴서 예뻐 죽겠다고 하지만, 덕분에 체력 소모가 극심해 평일에는 자제하다 보니 며칠 삽입 섹스를 하지는 않았다. 이미 쾌감을 알아버린 몸은 고작 그 정도의 기간도 참지 못하고 더 큰 자극을 원했다. 손쓸 새도 없이 이불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속옷이 무릎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망설임 없이 제 아래에 얼굴을 묻으려는 남자의 어깨를 수연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응?”
시선만 살짝 올린 현재의 남자의 눈빛에 이미 홧홧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심장이 기분 좋을 정도로 빨리 뛰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수연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해 줄게.”
“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되묻는 현재에게 수연은 다시 정확히 말해 주었다.
“내가 네 거…… 빨아 준다고.”
일부러 현재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온통 새까만 방 안에서도 정확히 보였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안 돼.”
“왜?”
자기는 맨날 섹스 전에 정신없이 하면서. 관계 직후 기절하듯 잠드는 데에는 그 탓도 큰 것 같았다. 삽입 전부터 이미 눅진눅진하게 절여진 몸으로 그를 받아들이게 되니까. 뭐든 잘하는 현재는 섹스도 잘했다. 처음 몸을 겹칠 때보다 여러모로 더 능숙해져 제 몸을 아주 갖고 노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제가 정말 잘 느끼는 편인지 현재가 그렇게 만든 건지 헷갈렸다.
“이렇게 세워 놓고 왜 안 된다는 건데?”
수연은 은근슬쩍 아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굳이 유심히 보지 않아도 트레이닝팬츠 위로 꼿꼿이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안 돼. 더러워.”
“뭐? 뭐가 더러워. 너는 맨날 하면서.”
“아무튼 안 돼. 너는 그런 거 할 필요 없어.”
“…….”
처음에는 그냥 튕기는 건 줄 알았는데 반응이 너무 단호했다. 이러면 더 하고 싶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으음, 잠깐 입술을 삐죽이던 수연은 이내 슬슬 다시 제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현재의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럼 나 이제 너랑 안 할 거야.”
“뭘?”
“뭐긴 뭐야. 그거……지.”
막상 입에 올리려니 좀 민망해서 에둘러 말했지만 당연히 현재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의아하다는 듯, 현재가 반문했다.
“그렇게 내 거 빨고 싶어?”
“아니…… 응.”
그게 그렇게 되나. 살짝 망설이던 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까놓고 얘기하면, 현재가 밑을 애무해 줄 때마다 저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그러니 반대로 현재가 저로 인해 안달복달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뭘 해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가 이럴 때에도 발동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굳이 사양하진 않을게, 씩 웃은 현재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티셔츠와 팬츠를 가볍게 벗어 던진 그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앉은 수연의 시야에 오늘따라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탄탄한 몸이 들어왔다. 매일 같이 다니며 먹는 것도 같은데 왜 이렇게 갈수록 혼자 몸이 좋아지는지. 과하거나 인위적인 느낌 없이 보기 좋은 근육이 꽉꽉 들어찬 남체는 언제 봐도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이내 군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복부 밑으로 자연스럽게 수연의 시선이 이동했다. 아직 브리프는 벗지 않은 채였지만 예상대로 잔뜩 커진 모양새를 보니 살짝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충동적으로 한 말이기는 하니까.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힘들걸. 그냥 손으로 해 줘도 되는데.”
여유롭게 저를 보며 하는 말에 잠깐의 망설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됐으니까 벗어 봐.”
아니, 내가 벗겨 줄까?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수연이 화사하게 웃었다. 현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으응? 그 동요하는 모습에 갑자기 더 확 흥미가 당겼다. 수연이 브리프로 손을 뻗자 현재는 정말로 당황한 듯 말이 없었다. 아아…… 수연은 몸을 겹칠 때마다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낯 뜨거운 말로 저를 경악시키는 현재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마음대로.”
한 발짝 늦게 떨어진 허락에 수연은 조심스럽게 브리프로 손을 뻗었다. 현재가 몸을 살짝 들어 수연을 도왔다. 한껏 성난 페니스가 튕기듯 밖으로 나왔다. 생으로 볼 때마다 아직도 가끔 움찔거리고는 하는데, 막상 코앞에서 보니 종전의 각오가 무색하게 심란해졌다.
“무리하지 마.”
수연과는 다르게 정작 현재는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빨기 편하게 다리를 더 넓게 벌려 주기까지 했다. 나신에 꼿꼿이 성기를 세우고 있는데도 당당한 남자 앞 수연은 각오를 다졌다.
“무리 아니거든.”
짧게 심호흡을 한 수연은 천천히 몸을 굽혔다. 꺼떡대는 성기의 밑동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싸고, 흉흉한 기둥 끝에 망설임 없이 입술을 가져갔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막상 입에 바로 담을 자신이 없어 혀를 내밀어 맛보듯 살짝살짝 귀두를 핥았다. 으음, 고작 그것만으로 위에서 낮게 신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용기가 생긴 수연은 완전히 발기해 무섭게 커진 그것을 와락 입 안에 넣어 보았다.
“하…….”
현재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두껍고 긴 페니스에 작은 입 안이 꽉 들어찼다. 버거웠지만 수연은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려 노력하며 조금 더 깊숙이 그의 것을 삼켰다. 기분 탓인지 뜨끈하게 느껴지는 성기에서는 옅은 비누 향과 더불어 날것의 냄새가 났다.
미끈거리는 액체 탓일까. 그래도 현재 거라서 그런지, 잔뜩 기립해 핏줄이 툭툭 불거진,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성기에도 딱히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수연은 본능적으로 최대한 이를 세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기둥을 힘주어 빨아 올렸다. 물론 끝까지 다 삼키지는 못했다. 몇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니 현재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더는 커질 수 없을 것 같은 살덩이가 입 안에서 점점 더 부푸는 기분에 힘들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상당히 서툰 행위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반응에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을 함께 쓴다거나, 옆으로 핥아 올린다거나, 굳이 입에 다 넣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요령을 수연은 몰랐다. 그저 정직하게 위아래로 고개만 움직일 뿐.
‘근데 입 아파…….’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크게 벌어진 입이 벌써 조금 아렸다. 그래도 이왕 한 거 끝을 봐야 하니까 열심히 혀를 굴리는데.
“……인제 그만.”
제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올리는 손에 입 안에서 성기가 쑥 빠졌다. 왜 그러지? 수연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상기된 얼굴로 현재를 올려다봤다. 미치겠네, 혼잣말처럼 뇌까린 현재가 예의 그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는 듯 아닌 듯, 기분이 좋은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에 순간 멍해지는데.
“……!”
허리를 잡아 누르는 거센 힘에 그대로 몸이 엎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자세를 바꾼 현재가 뒤에서 수연의 몸을 덮더니, 무릎에 팔을 끼워 넣어 가냘픈 몸을 일으키게 했다. 덕분에 졸지에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가 되었다. 망설임 없는 손길로 현재가 수연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뭔가를 넣기 좋게 적당히 벌려진 다리 사이가 휑했다. 지금껏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자세에 민망함을 느끼기도 잠시, 골반을 움켜쥔 현재가 동그란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아 쫙 벌렸다.
“뭐…… 뭐 해!”
당황한 수연은 말까지 더듬었다. 대답 없이 나른한 숨을 한번 내쉰 현재가 그대로 엉덩이를 몇 번 주무르더니, 한 손을 뗐다. 의심할 여지 없는 삽입 직전의 순간이었다, 이미 쾌감을 아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무의식적으로 밀려오는 기대감에 등줄기를 타고 옅게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어.’
곧바로 제 안으로 파고들어 올 거라 생각했지만, 현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벌어진 하얀 허벅지 사이 발기한 성기를 끼워 넣었다. 다리에 힘 줘 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미 까끌까끌하게 갈라져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수연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타액과 체액으로 뒤덮여 미끌미끌해진 페니스가 자리를 잡았다. 크고 뜨거운 기둥이 실제로 내벽을 들쑤시듯 앞뒤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느낌 이상해.’
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은 손, 등 뒤에 흩뿌려지는 뜨거운 숨, 앞뒤로 크게 움직이며 점점 속도를 얻기 시작하는 피스톤질이 마치 정말 섹스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아무리 유사 행위라지만 뒤에서 움직이는 힘이 실제 삽입하는 것처럼 워낙 세, 수연은 제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매달리듯 버텨야 했다.
착착 감기는 연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들쑤시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멎었다. 동시에 뜨끈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쪽, 쪽, 고개를 숙인 현재가 수연의 볼에 입을 맞추며 가슴을 부드럽게 쥐어 왔다. 후희와도 닮은 그 달콤한 몸짓에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딱히 뭘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왜, 안 했어?”
“응?”
되묻던 현재가 이내 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약속했잖아. 안 넣는다고.”
애교 부리듯 코끝을 비빈 현재가 닦아 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벗겨졌는지 모를 옷이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엎드린 채 그것을 바라보던 수연이 중얼거렸다.
“그런 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데.”
“어?”
“그런 말은 지키지 말라고.”
“……하하.”
새침한 말에 현재가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민망한지 저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있는 수연이었다. 뽀얀 엉덩이를 잠시 응시하던 현재가 들고 있던 티슈를 내려놓고 대신 침대 옆 수납함 맨 아래에서 콘돔을 꺼냈다. 전에 마트에서 산 게 불편하다며 아예 직구해 버린 사이즈의 콘돔이었다.
몇 번 손으로 쓱쓱 쓰는 행위만으로 금세 다시 발기한 그것에 익숙하게 콘돔을 끼우는 남자를 수연은 안 보는 듯 다 보고 있었다. 그 단순한 행동이 왜 이렇게 야하게 보이는 건지. 안 그래도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아주 널을 뛰기 시작했다. 미안, 수연의 등을 타고 오른 현재가 짧게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눈치가 좀 없었지.”
“…….”
“얼굴 보면…… 또 바로 쌀 것 같으니까 이렇게 하자.”
나 오늘 좀 이상하거든, 자조 섞인 말을 흘린 현재가 뒤이어 꺼떡대는 성기를 아래에 맞췄다. 힘 빼, 현재가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쳤다. 몸을 지탱하던 수연의 두 팔이 선연한 감각에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대로 꿰뚫렸다.
“흐읏……!”
입이 절로 벌어졌다. 단단한 성기가 제 안을 파고드는 감각은 언제라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무릎에 힘을 꽉 주었다.
“응…… 괜찮아, 천천히 할게.”
달래듯 허리를 쓸어 주던 현재가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다시 깊게 처박았다. 읏, 수연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입 안으로 간신히 삼켰다. 동시에 위에서 만족스러움을 표하는 뜨거운 숨이 터졌다. 반쯤 들어가 있던 성기가 완전히 뿌리 끝까지 들어온 게 느껴졌다. 적응할 시간을 주듯 느릿하게 허리를 앞뒤로 짧게 움직이던 현재가 점점 몸을 크게 쓰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느껴지는 것은 빠듯하게 벌어지는 아래의 이물감인데, 성기가 앞뒤로 들락날락하는 그 단순한 행위에 뒷골까지 뻐근해지는 쾌감이 찾아왔다. 온몸이 잠식되는 감각에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계속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좋아……. 수연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절로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조이지 마, 응?”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수연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신음했다.
“으…… 흣……!”
“어떡하냐. 잘 때마다 이제, 후, 이 모습 생각날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아까 제가 성기를 빨아 주던 모습인 건지 지금 엉덩이만 치켜들고 그의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깊게 생각할 여유 따위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퍽, 퍽, 자세 때문인지 뒤에서 박아 대는 소리가 유난히 노골적으로 들렸다. 어느 순간 팔에 힘이 완전히 풀린 수연이 앞으로 엎어졌지만 안을 치받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현재에 의해 가볍게 다시 일으켜진 몸이 마구잡이로 저를 탐하는 남자의 품 안에서 계속해서 흔들렸다.
“으응…… 응…… 흐윽…….”
깊은 곳까지 꽉꽉 들어차는 기둥은 어딜 쑤셔 주면 수연이 유달리 좋아하는지, 자지러지는지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헐떡이는 수연에게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휘감겼다.
“소리 내도, 돼.”
“흣……으으……!”
“나밖에 안 들으니까……응?”
의식하지 못했는데 평소보다 신음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도재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지도. 어쨌든 여긴 이도재와 현재가 같이 사는 공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말에도 수연은 터지는 소리를 연신 삼키기만 했다. 나긋하고 따끈한 몸에 취해 있던 남자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아…… 안 되겠네.”
알 수 없는 뇌까림과 함께 현재가 한번 크게 몸을 뒤로 물렸다, 다시 깊숙이 처박았다.
“아……!”
고집스레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지며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현재가 속도를 빠르게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겠다던 말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듯했다. 수연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벌어진 입술 새로 교성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안 되는데……. 수연이 입술을 꾹 깨물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정신없이 치받는 와중에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현재가 제 손을 수연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수연은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쪽쪽 빨았다. 하, 낮은 한숨이 터졌지만 이미 정신없는 수연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넌 진짜…….”
차마 내뱉지 못한 날것의 감정을 일말의 이성으로 가까스로 삼켜 낸 그는 대신 무섭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어느 순간 입 안에서 손가락이 빠졌지만 수연도 더는 소리를 삼킬 수 없었다.
“어떻게 우는 소리도, 후우, 예쁘냐…….”
한숨처럼 뇌까리는 소리는 얼핏 애틋했지만 쉼 없이 안을 헤집는 추삽질에는 가차가 없었다. 삽입한 채로 몸이 돌려졌다. 역시 얼굴 보고 가고 싶다고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수연에게는 꿈속에서처럼 아득하게만 들렸다. 귀로는 분명히 듣고 있는데,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조각조각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버린 눈가와 엉망으로 달라붙은 머리칼에 다정하게 키스를 흩뿌리던 현재가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수연의 양 다리를 벌린 채 휘어잡고, 힘 있게 들이받는 움직임을 따라 그의 잘빠진 몸의 근육들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수연에게는 단 하나만이 보였다.
어두운 방 안.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도 똑바로 제 눈을 응시하는 집요한 시선만큼은 선명했다.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진 채로, 열에 달뜬 남자의 눈이 향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것에는 무심할 정도로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제게만 매달린다. 평소 크게 인지하지 않는 그 사실이 섹스할 때는 유독 더 상기되는 것은 왜일까. 기묘한 쾌감이 전신을 빠듯하게 감싸던 순간.
“흣……!”
절정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커다랗고 딱딱한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잘게 떠는 제 몸을 기분 좋은 정도의 힘으로 짓누른 현재가 허겁지겁 입술을 겹쳐 왔다. 정사 후 나누는 느긋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끈적한 키스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이 늘어져 쏟아지는 입맞춤을 멍한 정신으로 받아 내고 있는데, 잠시 입술을 뗀 현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랑해, 수연아.”
“……으응.”
다디단 고백에도 자꾸 눈이 감겼다. 지금 잠들면 아무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러다가 섹스하고 잠드는 나쁜 버릇이 생겨 버리면 어떡하지. 실없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건, 앞으로도 나하고만 해. 알았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목소리에는 스르르 감기던 눈꺼풀을 힘겹게 다시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그럼 누구랑 해?”
참 나, 어이가 없었다.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도 현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붙였다.
“응, 약속.”
“아니, 약속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졸려 죽겠네, 말을 흐리는데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어쩐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 대화를 이어 갈 기력이 없었다.
“알았어.”
수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은 현재랑 사귀고 있는데 도대체 누구랑 섹스를 한다는 건지…….
“응. 평생 나랑만 하는 거야.”
으응? 지나치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긋하게 귓가를 휘감았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 그가 말한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평생이라.
상당히 로맨틱한 단어였다. 물론 현재야 지금의 감정에 취해 한 말이겠지만, 알면서도 순간 조금 찡했다.
‘바보 같은 이현재.’
잠시 눈썹을 씰룩이던 수연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저를 떠미는 심연 속에 잠겨 들었다. 잠결에도 저를 꽉 끌어안는 품이 느껴졌다. 달콤한 약속 뒤에 숨은 끈적하고도 집요한 애정을 알아차리기에는,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