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7(2)화 (7/13)

♥ 나쁜데 예쁜 2권 ♥

7 ⑵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의류 매장으로 향한 수연은 평소에는 살 일 없고 구경도 할 일 없는 가격대의 옷을 샀다.

민소매 블라우스에 언밸런스한 랩 디자인의 짧은 스커트를 입은 거울 속 자신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되게 화려하다는 생각과 함께, 은근슬쩍 들뜨는 마음에 어쩌면 자신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자신에게 엄청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잘 어울린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 직원을 뒤로하고 매장을 나왔다. 입고 온 옷은 쇼핑백에 고이 담긴 채였다. 제가 봐도 신고 온 신발과는 매치가 안 돼서, 내친 김에 꽤 굽이 있는 힐을 사서 갈아 신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었는데 계속 걷다 보니 걸을 만했다. 그러다 거의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가 신경 쓰여 미용실로 들어갔다.

‘한 번 자를 때도 됐지.’

머리 한번 자르는 데에 굳이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를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안 해 봤지만. 집을 나온 순간부터 수연의 모든 행동은 지극히 충동적이고 즉각적이었다.

“어떤 스타일로 해 드릴까요?”

수연을 보자마자 반색하던 미용사가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더워 죽겠는데 그냥 확 단발로 자를까, 또 다른 충동이 들던 찰나 갑자기 현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긴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이 좋다며, 가끔 같이 잠드는 밤이면 한동안 계속 쓸어내리던 그 다정한 손길이. 수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만 다듬어 주세요.”

드라이까지 마치고 시간을 봤을 때는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오면서 1층 화장품 매장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조금 더 소요했던 탓이었다.

화장이야 워낙 기본만 하고, 입술이 건조해 잘 트는 편이라 립밤 정도만 바르고 다니는 수연이었다. 하지만 지금 의상에는 조금 포인트 되는 립스틱을 사고 싶은 마음에 갔던 차에, 직원의 추천으로 이번에 새로 나왔다는 제품들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더 구매해 버렸다.

신인 배우인 줄 알았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 누구와 닮았다, 찬사를 내내 너무 많이 들어서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나오는데 한숨이 나왔다. 과연 이걸 다 쓰기나 할지가 의문이었다. 하긴, 현지에게 그간 이것저것 받은 게 많으니 아예 다 선물로 줘도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백 단위의 돈을 두어 시간 만에 다 썼다는 게 좀 실감이 안 났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백화점을 나오는데 후덥지근한 공기가 확 밀려옴과 함께 저를 힐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제야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도 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수연은 그대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제 신발과 옷이 담긴 쇼핑백을 보는데 허물을 벗은 듯 후련하면서도 공허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커피를 다 마시면 수연은 집을 나오기 전 예약해 놨던 호텔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당일 예약이 가능한 룸 중에서도 혼자 자기에는 턱없이 좋은 곳을 예약한 몇 시간 전의 제 모습이 바보 같으면서도 잘했다 싶었다. 저녁은 그 안에서 해결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을 적당히 골라 마신 후 잠들면 완벽하겠지.

알고 있다. 그렇게 자고 나면 내일 후회할 것을.

하긴 후회야 집을 나온 순간부터 내내 하고 있었으니까. 미친 거라고, 그렇게 힘들게 벌어 놓고 하룻밤에 탕진한 자신을 조소하면서도 마음은 후련할 거였다. 엄마에게 돈을 줄 일은 절대 없어진 셈이니까.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이나 괜한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지금껏 팍팍하게 살아왔으니 이 정도 사치를 자신에게 줘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거의 다 비운 컵을 들고 일어서려던 수연은 가방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에 멈칫했다. 현재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찰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쁘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여보세요.”

―수연아. 어디야?

“……밖인데. 왜?”

―보고 싶어서 왔는데 집에 없네.

“가게 아니야?”

―응, 예약이 직전에 취소돼서 그냥 나왔어…… 얼굴만 보고 갈게.

학원을 쉬는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진작 말해 놓은 게 있어서 그럴까, 어물어물 말을 흐리는 현재의 목소리에 갈등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찰나 고민했던 것은 지금 이 상황을 현재에게 보여 주기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저조차도 어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이 알아주겠는가.

―수연아? 어딘데.

다시금 걱정과 의아함이 묻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 답하지 못한 수연은 창밖 아직 환한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현재가 나타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체크인은 9시가 다 된 시간에 했다. 원래라면 곧바로 호텔로 직행할 거였지만 카페로 온 현재와 함께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갔던 터였다. 룸서비스로 과일과 무알코올 와인을 주문하는 현재에게 왜 그러냐고 말해 봤으나 곧바로 저지당했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자.”

“왜?”

“그냥. 할 얘기도 있고.”

웬만한 건 다 수연의 기호와 기분에 맞춰 주면서 현재는 단호할 때는 단호했다. 중요한 말을 하고 싶을 때는 술을 안 마시는 것도 그다웠다. 예전에 제게 고백할 때, 맥주 한 잔도 안 마시고 싶어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나 잠깐 손 좀 씻고 올게.”

“응.”

생전 처음 와 본 공간을 즐길 여유도 없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은은한 조명이 밝히는 욕실을 나오는데, 창가 테이블에 앉아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야경을 바라보는 현재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냥 원래 이런 데서 사는 사람같이 잘 어울리는 와중에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에 괜히 긴장감이 들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몇 시간 전, 카페 앞으로 수연을 데리러 온 현재는 수연을 본 순간 얼떨떨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사람이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꾸민 채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그냥, 오늘은 나한테 주는 선물? 보상? 뭐 그런 하루야.’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현재는 수연이 제지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차에 실었다. 입고 왔던 옷과 신발이 담긴 게 왜 이렇게 낯 뜨거운지. 어울리지 않는 공주 옷을 빼앗아 입은 심보 나쁜 새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익숙한 조수석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벨트를 매 주며 현재가 저를 한번 지그시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 있을 땐 그럭저럭 짧았던 치마가 앉으니 왜 이렇게 짧게만 느껴지는지. 언밸런스한 길이라 그런지 왼쪽 허벅지는 아예 거의 다 훤히 드러났다. 그렇다고 가리는 건 더 이상해 보였다. 수연은 부러 더 태연하게 말했다.

‘저녁은 너 먹고 싶은 대로 가. 내가 살게.’

‘우리 사이에 누가 사고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요즘 계속 네가 냈잖아.’

갈수록 몰래 계산하는 스킬만 느는 현재에게 안 그래도 한번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려던 터였다. 물론 현재와 제 주머니 형편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리 애인 사이라도 오고 가는 게 어느 정도는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라 더 말할 듯하던 현재가 그럼 근처 아는 한식당이 있으니 가자고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 수연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보던 현재는 다시금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일은 무슨. 그냥 기분 전환이라니까.’

그렇게 식당으로 이동해 조금 늦은 저녁을 먹었다. 평소처럼 살뜰히 수연을 챙겨 주면서도 현재는 어쩐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내가 연락 안 했으면 따로 누구 만나려고 했어?’

‘뭐? 아냐. 나 현지 말고 친구 없는 거 몰라?’

척박한 인간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게 좀 없어 보이긴 했으나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따로 누굴 만나다니.

‘그럼 이렇게 예쁘게 입고 혼자 뭐 하려고 했는데?’

‘그냥, 호텔 가서 쉬려고 했는데.’

‘……호텔?’

‘응. 좀 충동적으로 예약하긴 했는데…… 그냥 하루쯤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왜 있잖아, 호캉스 같은 거. 호텔이란 단어에 순간 굳는 현재의 얼굴을 보고 덧붙인 말에 현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몇 마디 말이 오가지 않았다. 더운 날씨라든지, 음식에 대한 평이라든지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식사하는 도중 수연은 평소와 다르게 자꾸 현재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현재는 딱히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 진짜 뭐 하냐.’

욕실 앞에 잠깐 멍하니 서 있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역시 대충 둘러대고 현재를 부르지 말걸 그랬나. 현지 만나서 놀고 들어온다 했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왕 온 거 기분 좋게 있다 가면 좋겠다, 까지 생각하는데 현재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해? 이리 와.”

“……응.”

뭔가 꾸중을 듣는 아이가 된 심정으로 우물쭈물 다가간 수연은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으려 했다. 그러나.

“거기 말고.”

“어?”

뭐지, 현재를 바라보는데 그가 제 허벅지를 툭툭 치는 게 아닌가.

“거기 앉으라고?”

“어.”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못 앉을 것도 없었다. 수연은 말없이 다가가 현재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뒤에서 제 허리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자, 이제 얘기해 봐.”

수연의 어깨에 얼굴을 올린 현재가 말했다. 까맣게 내려앉은 창밖 밤의 풍경은 좁은 원룸에서 매번 보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뭘?”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왜 갑자기 이런 행동들을 하고 싶어졌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이러고 얘기해야 하는 거야?”

“응. 나 지금 화났거든. 풀리면 내려가도 돼.”

“…….”

잠시 망설이던 수연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별거 아닌데.”

“응, 얘기해 봐.”

“그럼 다 듣고도 어이없어하거나 한심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가? 그럴 일 없는 거 알잖아.”

놀란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기울인 현재가 쪽, 입을 맞췄다. 수연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하긴, 뭐 거창한 얘기도 아니었다.

“아까 공부하는데 엄마가 전화가 온 거야. 3년 만에.”

“그랬어?”

“응. 전화 와서 하는 말이…….”

돈 빌려 달래, 재혼하는 아저씨랑 만나는 자리에도 나오라더라. 별다를 것 없이 얘기하는데 저를 안은 현재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룸서비스가 들어와 수연은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는 은근히 팔에 힘을 주는 것으로 가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모른 척했다.

반짝이는 연노랑 빛깔을 담은 잔이 부딪치고, 중간중간 과일을 입에 넣어 주는 현재의 손길을 못 이긴 척 받아먹으며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현재가 중간중간 이것저것 물어 왔기 때문이다. 결국 하다 보니 예전 어렸을 때 이야기까지 다 나와 버렸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혼자 떠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현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하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계속 고개를 끄덕여 주고, 눈을 맞추고, 수연이 감정이 격해져 잠시 말을 멈추거나 한숨을 쉬면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어쩌고 보면 다 핑계였을지도 몰라. 내가 한 번쯤 이렇게 제멋대로 하고 싶었나 봐.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살고 싶다는 건 아니고.”

말을 하고 나니 목이 말랐다. 수연은 잔을 들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탄산은 적당히 달짝지근하고 맛있었지만 들끓는 속을 채 다 식혀 주지는 못했다.

어려웠다. 현재가 저를 너무 철없게 보거나, 혹은 너무 안쓰럽게 보면 어떡하지. 둘 다 싫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가슴 한구석에 묵직하게 들어 있던 바윗돌을 들어낸 것처럼 속이 후련해졌다는 거였다.

어쩌면 자신은 내내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 참.”

수연은 괜히 크게 동작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쇼핑백을 뒤적이는데 등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후련함과 다르게, 말을 끊고 나니 머쓱함과 동시에 괜한 어색함이 밀려들던 터였다.

“이거, 선물.”

“선물?”

예쁘게 포장된 작은 쇼핑백을 건네니 현재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향수야?”

“응.”

“나 원래 향수 뿌리는 거 별로였어?”

“아니, 내가 좋다고 뭐냐고까지 물어봤잖아.”

현재가 가끔 뿌리고 오는 향수의 향이 좋아 매일 뿌리라는 말까지 했던 수연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은근히 묵직한 느낌이 있는 게, 현재랑 잘 어울렸다.

“여름이니까 기분 전환도 하고. 그냥 뭐, 가끔 써.”

실컷 돈을 쓰고 나서 현재 생각이 나중에 났다는 게 문제였다. 진작 생각했으면 좀 더 좋은 선물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그 와중에도 어쩌면 그렇게 제 생각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마워, 잘 쓸게.”

얼떨떨하게 답하던 현재가 이내 쓰게 웃었다.

“밥도 얻어먹고, 방도 네가 예약하고, 선물까지 받고 오늘 나는 해 준 게 하나도 없네, 어떡하지?”

“무슨 소리야. 평소엔 네가 거의 다 내잖아. 그리고 내 재미없는 얘기도 다 들어 줬으면서.”

“내가 말 안 했으면, 아니, 전화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린 같이 있지 않았겠지.”

“…….”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얼른 내일이 돼서 널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잠들었겠고. 너는 여기서 혼자…….”

말을 하던 현재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둑하게 깊어지는 눈빛을 보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수연아. 난 너한테 뭐야?”

“뭐냐니.”

“애인이잖아. 이럴 때 필요한 게 나 아니야?”

할 말이 없어진 수연이 침묵하는데 현재가 낮은 한숨을 터뜨렸다.

“네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속상해서 그래. 오늘 마음이 너무 안 좋았을 텐데…… 자칫하면 혼자 뒀을 것 같아서.”

“…….”

“알아. 물론 난 네가 아니니까, 네 마음 전부를 다 알고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 줘서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아. 수연이 네가 왜 나한테 오늘 전화하지 못했는지. 아니, 아예 할 생각을 못했는지.”

저조차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안다고 하니 혼란스러웠다. 한없이 크게만 느껴지는 공간 안에서, 현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평소에 그런 말을 많이 해. 너 귀찮게 뭐 하러, 너 신경 쓰이게 왜…….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사소하고, 솔직히 이 정도면 애인 아니어도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느껴지는 것에도 너는 그렇게 말해. 처음에는 그게 싫었어. 나한테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원체 독립적인 성향인가 생각하면서 존중하려고도 해 봤어. 결국은 잘 안 되긴 했지만.”

내가 그런가. 이상하게 속이 쓰렸다.

“넌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아. 되게 똑 부러져 보이는데 막상 네 감정을 표현하는 건 한없이 서툴러. 알아? 밤새워서 공부하고, 학원 다니고 알바 하다 아팠을 때도 너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했어, 나한테. 열이 펄펄 끓는데도 나한테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앓았잖아. 난 그게 솔직히 이해가 안 됐어. 내가 의지가 안 되는 건가 서운하기도 했고.”

그랬구나, 현재의 말을 듣는데 뜨끔하면서 조금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근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네가 왜 그랬는지. 네가 나를 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넌…….”

깊은 숨을 한번 내쉰 현재가 조용히 덧붙였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

“그래서, 오늘같이 슬프고, 속상하고, 마음이 괴로울 때 누군가를 찾는 게 아니라 혼자 견뎌 내려고 했겠지. 너만의 방식으로. 그래서 네가 정말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기분이 풀리고, 편안해졌다면 괜찮아. 하지만 수연아.”

제게는 한없이 다정한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행동해서…… 기분이 어땠어? 정말 마음이 풀리고, 후련해졌어?”

말문이 턱 막혔다. 수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오늘 행동으로 마음이 풀렸냐고? 후련해졌냐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전혀 아니다. 커피 한 잔도 마음껏 못 마시고, 데이트 비용에 쓰는 그 얼마 안 되는 돈을 위해서 무리해서 알바까지 하면서, 궁상까지는 아니어도 아등바등 모은 돈을 두어 시간 만에 탕진하면서 계속 생각했다. 후회할 짓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경험에서 순간적으로 드는 그 해방감, 만족감으로 깊은 실망과 절망을 덮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혼자 있다가는 질식해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나는 왜 현재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수연아.”

갑자기 현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앉아 있던 수연은 저를 안아 오는 남자의 품 안에서 뜨겁게 터져 나오는 숨을 골랐다. 현재에게는 방금 전 제가 사 준 향수의 시원하면서도 약간은 서늘한 향이 났다.

가슴이 눌릴 정도로 수연을 꽉 끌어안은 현재가 이내 천천히 저를 안은 팔을 풀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저와 눈높이를 맞춘 남자가 애틋하게 말해 왔다.

“울지 마.”

그가 저를 안은 팔을 너무 빨리 푸른 탓에, 볼썽사납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울지 말라는 그 말에 가슴속 깊은 곳 꾹꾹 숨겨 놓았던 울컥한 감정이 와락 터져 버렸다. 마치 울까 말까 입술을 삐죽삐죽하던 아이가 울지 말라는 말에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것처럼.

미쳤나? 왜 울지? 전혀 울 상황이 아닌데? 자신이 정말 황당했지만…… 이미 터져 나온 눈물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흑…….”

우는 수연을 현재가 품에 당겨 안았다. 작은 얼굴이 안쓰럽게 흠뻑 젖도록 우는데도 수연은 크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뭔가를 참는 듯한 미약한 흐느낌과 함께 그의 셔츠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잘게 떨리는 몸을 보듬어 안은 현재가 입 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흑…… 엄마를, 절대, 안 보려고…… 생각했어. 지금도 변함없는데, 흐…… 차라리, 전화를 안 받았으면, 생각하다가도, 막상 그러면 또 신경이 쓰였을 것, 흑, 같아서…….”

“응, 그렇지.”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연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현재가 말했다.

“엄마가, 싫은데…… 흐윽, 싫은데.”

그래도 유일한 가족이라 신경이 쓰인다. 그 돈 제게 안 받아도 어떻게든 구할 것을 알고 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제 감정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겠다. 수연은 더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제게 아낌없이 품을 내어 주는 남자에게 안겨 좀 더 울었다.

정말 눈물이 없는 자신인데, 그동안 쌓아 둔 게 한 번에 터져 나오기라도 하는 건지 멈추지 않아 곤란했다. 술을 먹지 말자던 현재는 아주 선견지명이 있었다. 완전히 술주정으로 치부당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 후 뭐라 제가 더 말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눈물이 완전히 멎었을 때는 의도치 않게 보이게 된 모습에 민망하고 창피한 한편, 동시에 가슴속에 깊이 고여 있던 탁한 물들을 모조리 흘려보낸 것과 같은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울고 났는데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않은 감정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마음껏 운 것의 여파로 조금 훌쩍이는데.

“이렇게 내 앞에서 우는 건 언제든 환영이긴 한데.”

약간 쉰 듯한, 탁한 목소리에 수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모양 예쁜 손가락이 수연의 눈과 뺨, 입술 언저리를 천천히 쓸었다. 어쩐지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네가 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

“네가 울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덧붙여진 말에 수연은 찰나 고민했다. 내가 오늘 말고 현재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었나?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어렸을 때도 수연은 운 기억이 거의 없다. 우는 것도 통할 사람이 있어야 우는 법이다. 엄마는 수연이 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시끄러운 데서 일하다 집에 왔으면 좀 조용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컸으니 우는 게 익숙할 리 없다. 저도 사람이니 정말 힘들 때는 눈가가 시큰해질 때도 있지만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은 정말로 손에 꼽는다. 의아함을 담은, 아직 물기가 어린 눈으로 수연이 현재를 바라보던 찰나.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졌다. 조금 도톰하게 그려진 입술 선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혀가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 은근했다. 립스틱을 지워 낼 기세로 한동안 입술만 물고 빨던 현재의 것이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어 작은 혀를 휘감았다. 마치 위로하듯 천천히 숨결을 전하는 행위는 순간 맥이 탁 풀릴 정도로 눅진하고도 축축했다. 수연은 천천히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연은 현재와 키스하는 순간이 좋았다. 제 등과 허리를 단단히 받쳐 주는 손, 한없이 밀착된 자세, 들리는 것은 서로의 불규칙해져 가는 호흡과 예민한 점막끼리 부딪치는 젖은 소리뿐이다. 끊임없이 혀를 섞고 호흡을 얽는, 그 얼핏 단순한 듯하면서도 본능적이고 제멋대로인 행위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필연적으로 저를 휘감고 있는 모든 상념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하얗고 푹신한 시트 위에 눕혀졌다. 묵직하게 제 몸을 점령하는 남자의 무게가 기분 좋았다. 저도 모르게 슬쩍 열린 시야에 눈을 감고 키스에 집중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 그래도 거세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아예 견디기 힘들 정도로 펄떡대기 시작했다. 수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씩 조금씩 짙어지던 키스는 자리를 옮긴 후부터 대놓고 노골적으로 변해 있었다.

절대로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공간, 예상치 못한 상황,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저를 탐하는 남자. 지금을 이루는 모든 것이 수연에게는 지나친 자극으로 다가왔다. 현재와 이런 식으로 키스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본능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그와 어떠한 선을 넘으리라는 것을.

딱 붙는 상의 안으로 침입한 현재의 손이 매끈한 허리를 몇 번 지분대다 곧바로 가슴으로 올라왔다. 냉방이 잘 되어 조금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방 온도와는 다르게, 저를 만지는 남자의 손길은 무섭도록 뜨거웠다. 브래지어 위로 뽀얗게 드러난 가슴을 움켜쥔 현재의 숨소리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유독 큰 손에도 모자람 없이 잡히는 가슴을 적당히 힘을 주어 주무르던 그가 자극에 솟아오른 정점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집중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읏, 아직 틈 없이 맞물린 입술을 타고 비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는 그마저도 게걸스러운 키스로 다시 삼켜 버렸다. 정신없이 혀를 놀리던 그가 점점 입술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턱을 따라 아찔하게 떨어지는 목선을 자극이 남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능숙하게 빨아 대던 남자가 얇은 상의를 아예 홱 들췄다. 이미 반쯤 올라갔던 블라우스가 완전히 위로 젖혀졌다. 드러난 가슴을 무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던 현재가 그대로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흣……!”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가슴골을 타고 흩뿌려지는 숨이 뜨거웠다. 수연이 몸을 비틀었지만 그마저도 제 위를 누르고 있는 남자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수연의 등 뒤로 한 손을 넣어 성마른 손길로 훅을 풀려 하던 현재였지만, 잘 되지 않자 그냥 아예 브래지어도 위로 젖혀 버렸다. 조금은 신경질적인 손짓이 낯설었다.

거칠 것이 없어진 그가 입술로 베어 물듯 가슴을 힘주어 빨기 시작했다. 아아, 수연의 고개가 절로 비틀렸다. 당연히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힘주어 빨아 대는 감각에 눈앞이 하얘졌다. 지금껏 현재가 가슴을 만진 적은 꽤 있었어도 이렇게 빤 적은 없었다. 도착적일 정도로 가슴을 애무하던 현재가 이를 세워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

“아……!”

놀란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아픈데, 마냥 아프다고만은 할 수 없는 묘한 감각에 혼란스럽기도 잠시. 당황한 그녀를 달래기라도 하는 듯 혀를 뾰족하게 세운 현재가 유두를 입 안에 넣고 굴리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설탕으로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작은 무언가들이 기어 다니는 감각이 들었다. 간지럽고 미치겠고…… 수연은 밭은 숨을 내쉬며 헐떡였다. 어느 순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주어지는 자극이 너무 세서 어떠한 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연이 정신없는 그 와중에도 그의 다른 손은 쉬지 않고 있었다. 한 뼘인 스커트 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착착 감기는 말랑한 허벅지를 제멋대로 만끽했다. 수연 역시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제 아래에 와 닿는 남자의 손이 느껴진 순간.

“……!”

눈이 번쩍 뜨였다. 얇은 천 위를 노니는 남자의 손을 제어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다만…….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다. 손으로 음부를 완전히 감싸다, 중심부를 뭉근하게 원을 굴리듯 살살 비벼 오는 손끝에, 다리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가슴을 애무하는 혀와 입술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갈라진 틈과 천이 계속 마찰하는 감각이 선연했다. 생경한 감각에 미칠 것 같았다. 내내 얼굴을 묻고 있던 가슴에서 고개를 슬쩍 뗀 현재가 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젖었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평소의 또렷하고 곧은 시선이 아닌, 어쩐지 초점이 슬쩍 나가 있는 눈에.

얘가 저런 눈빛을 지을 수 있었나. 정욕으로 흠뻑 물들어 어둑해진 눈빛은 제가 알던 남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도망갈 수 없게끔 옭아매는 진득한 시선. 단정하게만 보이던 수려한 이목구비가 한없이 색정적으로 보였다. 뭐라 대답할 수 없어 수연이 잔뜩 열 오른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현재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괜찮아. 나도 지금 밑에 터질 것 같거든.”

한껏 상냥한 말투였지만, 표현은 순간 수연이 숨을 들이마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결국 얄팍한 속옷을 비집고 손이 들어오려던 때. 수연은 재빨리 입술을 열었다.

“할 거야?”

“…….”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였으나 현재는 곧바로 행동을 멈췄다. 무섭게 궤도를 타고 오르는 흥분을 제어하려는 듯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쉰 현재가 조용히 물었다.

“넌 어떤데? 하고 싶어?”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지긋한 열에 달뜬 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겹쳤다. 둘을 둘러싼 공기는 숨 막히게 덥고, 지나치게 팽팽했다.

대답 없는 저를 바라보는 현재를 가만히 응시하는데 새삼 제가 참 성격 나쁘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바라보는 이 순간이 솔직히 짜릿했다. 그리고 수연에 한정해서는 한없이 얄팍한 인내심과 이유 모를 불안함을 내내 지니는 현재가 먼저 입을 떼려는 찰나.

“응, 하고 싶어.”

“…….”

수연은 그가 하도 물고 빨아 부은 느낌이 나는 제 입술을 천천히 혀로 축였다. 제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저를 다정하게 안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를 보니 이상하게 자꾸 목이 탔다.

“진작부터 너랑 하고 싶었어.”

“……하.”

속삭이는 목소리에 현재가 깊게 탄식했다. 입 모양으로 봐서는 말끝에 욕도 좀 한 것 같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넘어가 주기로 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현재가 불현듯 입을 맞춰 왔다.

“정말?”

“응.”

“분위기에 그냥 하는 말 아니지.”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진심이었다. 단지…… 끝이 뻔한 관계이기에 망설였을 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외로움이 터져 버린 밤, 저를 힘껏 끌어안아 주는 남자의 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수연의 답에 현재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팔을 교차해 벗어 던졌다. 군살 하나 없는, 크고 작은 근육들이 보기 좋게 들어찬 탄탄한 몸에 순간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수연은 그대로 저를 집어삼킬 듯 다가오는 남자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잠깐, 씻고…… 씻고 해.”

내내 에어컨 틀어진 곳만 다녔다지만 그래도 밖에 오래 있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현재는 슬쩍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순순히 몸을 떼고 일어났다.

“나 먼저 씻고 올게.”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며 일어나는데 제게 머무르는 현재의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괜히 뒤통수가 따가운 것을 느끼며 욕실 쪽으로 몇 발짝 떼기도 전, 현재가 갑자기 저를 뒤에서 끌어안아 왔다. 멈칫한 수연의 어깨에 슬쩍 턱을 괸 현재가 다정하게 말했다.

“같이 씻어.”

“어?”

놀란 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쪽, 고개를 숙여 가볍게 키스한 현재가 덧붙였다.

“씻겨 줄게.”

“…….”

꼭, 당연한 일을 한다는 것처럼 평온한 어조였다. 씻겨 준다고? 수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직 그런 부분의 마음의 준비는 안 됐는데……. 섹스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이 샤워하는 게 관계 그 자체보다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냐, 나 혼자 할…… 아!”

그건 좀 아니지, 수연이 고개를 젓던 그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갑자기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놀란 수연은 반사적으로 현재의 목을 감싸 안았다. 현재가 빙긋 웃었다.

“내가 해 준다니까 왜.”

타박에 미미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욕실까지 안고 가는 그 짧은 와중에도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흩뿌리는 현재 때문에 수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물 온도 어때?”

몸에 묻은 거품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끼며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금 뜨거운 것 같은데, 괜찮아?”

“난 원래 그렇게 해서. 더운 건 싫은데 씻을 때는 그게 좋아.”

그렇구나, 중얼거린 현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수연의 몸을 마저 씻기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거품을 따라 가냘픈 목선, 봉긋한 가슴과 이어지는 판판한 배, 그리고 그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는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수연의 시선은 한없이 방황했다.

‘얘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들어오자마자 다정한 듯 재빠른 손길에 의해 속옷까지 벗겨졌다. 손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훅을 풀며 현재는 으음, 소리와 함께 간단하네, 라는 감상을 곁들였다. 아까 한 번에 못 풀고 버벅댔던 것을 마음에 담아 놓았던 모양이었다.

현재는 그리 익숙해 보이지는 않지만 섬세한 손길로 공들여 드라이한 제 머리를 감겨 주었다. 샤워 볼로 제 몸을 구석구석 문지를 때는 한계를 초과한 민망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연은 제 옷은 망설임 없이 벗겼으면서 정작 저는 드로어즈 차림인 현재를 약간의 원망을 담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너 진짜 하얘. 알지?”

수연을 욕조 턱에 걸터앉힌 현재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 앞에 앉았다. 매끈한 다리에 엉겨 붙은 거품을 그가 샤워기로 씻어 내기 시작했다. 한 손에 너끈히 잡히는 가냘픈 발목의 색은 창백할 정도로 희어 더 연약하게만 보였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현재가 나른한 숨을 흘려보냈다.

“어떻게 이렇게 하얗지.”

“…….”

발까지 구석구석 씻겨 주는 통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양 허벅지를 꼭 붙이고 있었다. 발가락을 지분대던 현재는 계속해서 감탄했다.

“넌 진짜 안 예쁜 데가 없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만해.”

“왜, 진심인데.”

씩 웃는 얼굴을 보는데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수연은 현재가 빠르게 저를 씻겨 주고 나갈 줄 알았다. 안달 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누가 봐도 급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머리를 감겨 주고 몸을 씻겨 주는 내내 현재는 마치 조금만 잘못하면 깨지는 것을 만지는 양 저를 한없이 느리고도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다리 사이 은밀한 부분에 손을 닿을 듯 말 듯했을 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오히려 혼자 씻을 때보다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현재가 저를 일으키려는 듯 팔을 뻗는 게 보였다.

“자, 닦고 나가자.”

으응? 수연은 수건을 가져오려는 현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를 씻겨 주느라 물이 조금 튄 듬직한 상체 아래 드로어즈를 뚫고 나올 듯 발기한 묵직한 윤곽이 보였다.

“너는?”

“응? 난 금방 해.”

감기 걸리니 얼른 닦자며 수건을 들고 오는 현재를 보며 수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몸을 부지런히 닦아 주는 남자를 보며 수연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하고 너는 혼자 씻는다고?”

“그럼?”

“벗어 봐. 너도 내가 씻겨 줄 테니까.”

“…….”

호기로운 말에 현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모름지기 모든 건 공평해야 하는 법이다. 솔직히 좋긴 했지만 민망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리라 생각하는데.

“응, 알았어.”

그 대신 추우니 가운은 입고 있으라며, 현재가 욕실에 비치된 커다란 가운을 수연의 몸에 둘러 주었다. 언제 망설였냐는 듯 현재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드로어즈를 벗었다. 동시에 튕기듯 모습을 드러내는 흉흉한 성기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

‘이건 좀…….’

어렴풋이 짐작하고 각오했던 것과 눈앞에서 보는 것은 또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휘어짐 하나 없이 곧게 뻗은 페니스는 무섭게 길고, 무섭게 굵었다. 가지런한 이목구비와 대비되는 바람에 하체가 더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저게 곧 내 안에 들어온다는 거지.

“뭐해. 씻겨 준다며.”

빳빳이 세우고 있으면서도 현재는 자신처럼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당했다.

“알았어, 이리 와 봐.”

잠시 생각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던 수연은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샤워기를 들었다. 현재가 했던 것처럼 그의 몸 위에 먼저 물을 끼얹는데, 현재가 샤워기 위에 올려진 수연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왔다.

“난 좀 시원한 게 좋아.”

“……응.”

순순히 온도를 조절하고 물을 뿌리는데 안 보려고 해도 아래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샤워 볼에 바디 워시를 묻힌 수연은 냅다 넓은 가슴부터 문질렀다. 현재가 살짝 몸을 굽혀 주자 그제야 어깨도 마저 할 수 있었다. 어색함이 담뿍 묻은 손길에 현재가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몸 진짜 좋네, 탄탄하고 두꺼운 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있는 몸을 만지는데 어쩔 수 없는 감상이 들었다. 옷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남체는 다 벗었을 때가 확실히 완벽했다. 관리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원체 타고난 유전자가 좋은 것 같았다. 수연이 속으로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이 현재가 나긋하게 채근했다. 어쩐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너무 위에만 하는 거 아냐?”

“……아래도 할 거야.”

정곡을 찔린 수연은 몸을 굽히며 손을 내렸다. 사이클을 타고 와서 그런가, 더 돌같이 느껴지는 딱딱한 허벅지에 볼을 가져다 대는데 배에 닿을 듯 곧추선 기둥에 움찔했다. 하긴 여기도 씻어 줘야겠지.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살살……. 샤워 볼을 가져다 대는데.

“거기는 손으로 하는 건데.”

“……!”

손으로? 놀란 수연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남자는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그래진 눈동자를 보던 현재가 픽 웃더니 수연의 목을 끌어당겨 짧게 입을 맞췄다.

“먼저 나가 있어. 내가 마무리하고 갈게.”

마치 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한 모습에 심기가 뒤틀렸다.

“몰라서 그랬어.”

수연은 샤워 볼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볼에 묻어 있던 거품이 손에 남아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될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기둥을 잡자 순간 현재의 몸이 경직되는 게 맞닿은 피부로 정확하게 느껴졌다. 우둘투둘 툭툭 돋은 핏줄이 느껴지는 성기는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단단했다.

‘이게 맞나.’

요령 없이 살살 만져 대는데 위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하, 낮게 퍼지는 탁한 숨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긴 한데 어쩐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기분 탓인지 제 손안에서 더 커져만 가는 그것을 열심히 쓸려니, 현재가 갑자기 손을 겹쳐 왔다.

“지금도 너무 좋긴 한데…….”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현재가 겹쳐진 손 위로 힘을 주었다. 반대로 하고 있었는데 방향이 틀린 모양이었다. 당황하면서도 제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손을 쓰는 수연에게 현재가 진득한 시선을 주었다.

평소와 다르게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조막만 한 얼굴이 보기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 것을 쥔 손가락이 오늘따라 더 유난히 가늘고 예뻐 보였다. 가운 사이로 반쯤 드러난 가슴을 당장 빨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현재는 입 안 연한 살을 지그시 깨물며 참았다. 종전 얄팍하게 맛본 살결이 얼마나 부드럽고 탐스러운지는 이미 알고 있어 더 참기 힘들었다. 욕실 안에는 피부끼리 마찰되는 소리만이 외설스럽게 울렸다.

사실 수연을 씻겨 주는 내내 현재는 욕실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던 걸 후회했다. 분명히 부끄러워하면서도 순순히 제게 몸을 맡기는 수연을 보자니 이성을 잃고 여기서 일 치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곡선을 그리는 몸을 겉으로는 담담한 손길로 만지며 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도리어 무표정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이런 행위를 시킬 생각은 절대 없었는데. 슬쩍 제 눈치를 보는 수연의 크고 예쁜 눈을 보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시각적 자극이 이미 너무 강렬했다. 이쯤에서 그만두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수연의 손을 붙잡고 있는 현재의 손이 점점 더 빨라지며 무섭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현재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

제 손에 튄 끈적한 액체에 수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군살 하나 없는 배 위에도 행위의 흔적이 번졌다. 눅진한 숨을 길게 뱉어 낸 현재가 눈을 찡그렸다. 수연이 제 안에 나름대로 만들어 놓았던 남자의 이미지가 깨졌다. 욕망을 터뜨린 직후,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를 품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은 지독하게 야해 보였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 게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펼쳐졌다.

“……미안.”

아니라고 할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열 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감싼 현재가 뜨겁게 입을 맞춰 왔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만큼 습하고 축축한 키스가 이어졌다.

다시 시트에 눕혀졌을 때는 헐겁게 걸쳐져 있던 가운이 이미 벗겨진 상태였다. 종전 욕실에서의 진한 패팅으로 이미 달아오른 몸은 더 큰 자극을 원했다. 아래에서 맞닿는 현재의 것이 또다시 발기해 무섭게 곧추선 지 오래였다.

콘돔 포장을 이로 뜯은 그가 그것을 발기한 성기에 끼워 넣는 광경을 수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좀 빠듯하네, 살짝 곤란한 투로 중얼거린 그가 수연을 안으며 몸을 겹쳤다. 수연은 달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은은한 빛만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 제 위에 올라탄 남자의 모습이 유독 크게만 보였다. 분위기와 육체에 압도되는 느낌이랄까. 새삼 느끼지만 현재는 타고난 골격 자체가 컸다.

“진짜 예뻐, 너.”

귓가에 쏟아지는 달큼한 숨에 옅게 소름이 돋았다. 다리 사이를 벌리고 들어가는 손끝에 절로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힘 빼고.”

달래듯 속삭인 현재가 허벅지 깊숙한 곳 연한 살을 지분댔다. 흣, 저도 모르게 앙다문 입술 새로 숨이 터져 나왔다. 제가 느끼기에도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음부 위를 현재가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으…….”

이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못 견디게 홧홧하고 짜릿하면서, 한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운데 또 멈추라고 하기는 싫은. 찌걱대는 소리에 맞춰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 손짓에 수연의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하, 쾌락에 한없이 예민하고 순순하게 흐트러지는 몸에 현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래에서 현재의 손이 쑥 빠졌다. 커다란 손이 날씬한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남자가 성급한 손길로 꺼떡대는 성기 끝을 아래에 맞췄다. 맞닿는 생생한 감각에 수연은 몸을 굳혔다. 그런 수연의 뺨을 현재가 혀로 핥으며 뜨겁게 속삭였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천천히 할 테니까…… 덧붙이는 중얼거림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그 다감한 목소리에 수연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한계에 다다른 기둥이 수연의 안을 단번에 꿰뚫어 왔다.

“아……!”

수연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굳어 버렸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풀어져 있는 안이었으나 파고드는 성기는 지나치게 두툼하고 또 길었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꾹 주었다. 현재가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뻣뻣하게 경직된 몸을 풀어 주려 했지만 몸속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생경한 느낌은 당연히도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갑자기 앞으로 있을 모든 과정들이 막연하게 두려워졌다. 수연은 입술을 깨물며 다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흐…… 다 들어갔어?”

“……아니.”

“얼마나, 들어갔는데?”

“반……도 안 된 것 같은데.”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이 남자는 이 순간에도 정직했다. 반도 아니라고? 정말로? 갑자기 서러워진 수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파…….”

“많이 아파?”

“응.”

제 말에 어쩔 줄 모르는 현재를 보고 있자니 더 답답해졌다. 원래 처음엔 다 이런 건가? 다들 이런 아픔을 참고 하는 건가? 아니, 그래도 너무 심한데. 엄살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정말 그랬다. 나긋하게 풀렸던 게 거짓말처럼 굳어 가는 몸에,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현재가 어느 순간 결심한 듯 허리를 뒤로 확 물렸다.

“아니…… 으, 빼라는 건 아니…….”

당황해 몸을 조금 일으키던 수연이 망설임 없이 제 아래에 얼굴을 묻는 현재에 경악했다.

“뭐 하는…… 흐읏…….”

말릴 새도 없이 게걸스럽게 제 아래를 빨기 시작하는 남자에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말도 안 돼!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원체 이런 쪽으로는 그간 관심이 없었던 수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원초적인 자극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며 몸을 반쯤 일으킨 수연이 잡히는 대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지만 현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진득하게 빨아 대, 힘이 풀린 수연이 다시 침대에 머리를 대게 만들었다.

“응…… 흣, 그, 그만……!”

혀를 뾰족하게 세워 민감한 안을 들쑤시는 짙은 애무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혀끝으로 표면을 살살 굴리다, 외설스러운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핥다 다시 넓게 혀를 쓰다가…….

안 돼, 안 돼. 제발, 아니야, 뭐라 하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말이 초점을 잃은 수연의 입술을 타고 드문드문 흘렀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롤러코스터를 탄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쩔 줄 모르고 가쁜 숨만 색색 몰아쉬던 수연의 몸에서 어느 순간 힘이 쭉 빠졌다.

“미안.”

제발 거기서 얘기하지 마. 여전히 혀를 붙인 채 말을 잇는 현재의 목소리에 또다시 밑이 저릿했다. 아직 여운이 남은 쾌감에 잘게 몸을 떠는 수연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현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진작 이렇게 해 줬어야 하는데…… 여유가 없었네.”

흐려진 시야에 쓰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어스름하게 너울대는 빛을 삼킨 수려한 이목구비에 짙은 음영이 졌다. 도색적이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그 모습이 지금껏 제가 알던 남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수연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냥 해…….

“그만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알았지?”

다정하게 속삭이며 설핏 입꼬리를 끌어 올린 현재가 다시 커다란 몸을 쭉 폈다. 그대로 제 위를 타고 오르는 몸을 받고 있자니 끝도 없는 커다란 동굴에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이내 뭉툭한 성기 끝이 젖은 입구에 닿았다. 수연은 종전과 달리 최대한 힘에 몸을 빼려 애썼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 다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어렵지 않았다. 이미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

힘 있게 제 안을 파고드는 살덩이에 순간 숨이 턱 멎었다. 고개를 숙인 현재가 벌어진 수연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흐…… 맞닿은 부드러운 입술 새로 다시 신음이 흘렀다. 여전히 아팠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수연은 떨리는 팔로 현재의 목을 감싸 안았다. 최대한 키스에만 집중하며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각을 잊으려 했다. 현재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수연의 반응을 살피며 그저 조금씩 조금씩 허릿짓을 할 뿐. 무언가가 끝도 없이 밀려오는 느낌에 끙끙대는 수연을 달래듯 혀를 섞던 현재가 입술을 붙인 채 말했다.

“힘들면…… 후, 그만해도 돼.”

“……읏.”

생리적인 눈물이 맺힌 시야에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다. 순간 울컥한 감정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숨길 수 없는 욕망에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 눈빛에서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수연은 대답 대신 현재의 허리에 방황하던 제 다리를 감았다. 재촉하듯 은근히 힘주어 누르니 현재의 몸이 순간 굳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 입술을 지그시 깨문 현재가 그대로 허리를 뒤로 물렸다 거세게 박아 넣었다. 아……! 수연의 고개가 빠듯하게 꺾였다. 몇 번 더 몸을 쓰던 현재에게서 나긋한 탄성이 샜다.

“……다 들어갔어.”

“으으…….”

“후…… 진짜…….”

말을 채 잇지 못한 현재가 고개를 숙여 예민한 귓불을 한번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안을 꽉꽉 채우는 부피감에 헐떡이는 수연의 얼굴 곳곳에도 정신없이 입술을 눌렀다 뗐다. 눈물을 가득 담고 저를 응시하는 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다 지끈했다. 안쓰러운데 예쁘고. 예쁜데 안쓰럽고.

따뜻하고 좁은 내벽이 제 것을 빠듯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농담 아니고 뿌리까지 다 넣는 순간은 정말 녹아 버리는 줄 알았다. 행위가 계속될수록 점점 더 풀려 가는 아래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뒷골이 띵할 정도로 야하고 자극적인 소리였다.

뭐에 홀린 듯한 얼굴로 현재가 허릿짓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자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미 이성을 놓아 버린 허리 아래의 움직임은 점점 더 거칠고 난잡해지기만 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그사이 수연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신음이 터졌다.

“아…… 아! 하윽……! 아!”

“하…… 씨발, 수연아…….”

기어이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수연은 제대로 알아차릴 겨를도 없는 듯했다. 제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제게는 한없이 연약하게만 보이는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흐트러져 엉겨 붙은 머리칼과 자극에 달아오른 두 뺨, 제가 하도 빨아 부어오른 도톰한 입술과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그녀를 이루고 있는 어느 것 하나 제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게 없었다. 힘겨워하면서도 저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미칠 것 같았다.

‘젠장.’

왈칵 치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현재가 고개를 숙여 수연에게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그 와중에도 무섭게 빨라지는 추삽질은 쉬지 않았다. 그런 그와 무의식적으로 혀를 섞으며 수연은 어느 순간 아픔 대신 깊은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모락모락 희미하게 피어나는 쾌감을 느꼈다. 본격적인 삽입의 순간부터 제게 취해 완전히 폭주하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며 느꼈던 정신적인 충족감과는 결이 다른 감각이었다.

묘하게 비음이 섞여 가는 교성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그는 그나마 잡고 있던 한 줄기 얄팍한 줄을 가차 없이 놓아 버렸다.

“아……! 아…… 현재야……흣!”

왜 부르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수연은 현재만 계속 불렀다. 그러나 평소 아주 작은 중얼거림에도 곧바로 반응해 주던 제 애인에게서 지금만큼은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딱히 수연도 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저, 더웠다. 너무 더웠다. 서늘한 온도에 헐벗고 있는데도 현재와 저를 둘러싼 뜨거운 공기에 기분 좋게 숨이 막혔다.

모든 것은 다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가차 없이 치받으면서도 저를 집요하게 좇는 새까만 눈동자, 쾌감에 살짝 일그러뜨려져 도리어 더 섹시하게 보이는 입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보기 좋게 들썩대는 탄탄한 근육들과 행위에 무섭게 집중했음을 알리는 그의 거친 숨소리까지.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이 끈적하게 맞물려 머릿속을 하얗게 휘발시켰다.

‘이상해.’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벽부터 치는 성향처럼, 수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행위에 완전히 몰두해 있던 남자가 그때만큼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안 돼, 늘 차분한 저음이 매력적인 그에게서 지금은 쇳소리가 났다.

“가리지 마…… 얼굴 보여 줘.”

그대로 손목이 잡혀 버렸다. 딱히 세게 쥔 것 같지도 않은데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허물어지는 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저를 간단하게 저지시킨 그 행위 자체에서조차 희미하게 쾌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듯 완전히 저를 압도하는 남자에게 삼켜지는 기분이 짜릿했다.

지독하게 합이 잘 맞았다.

비교 대상이 없는 둘이지만, 서로가 무의식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완전히 긴장을 푼 나긋하고 부드러운 여체를 단단한 몸이 완전히 덮었다. 퍽, 퍽, 무섭게 박아 올리는 소리가 수연의 끊어질 듯한 간헐적인 신음과 함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완전히 풀린 몸이라지만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몸짓에 작은 턱이 덜덜 떨렸다. 내벽을 들쑤시는 그의 것이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 왈칵 무섭다고 느끼는 순간.

“……흑……!”

찌릿하게 전기가 흐르는 선연함에 수연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던 현재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까맣게 번득였다.

“……여기가 좋아? 응?”

“아니…… 읏…… 아!”

대답과 동시에 아예 작정한 듯 깊숙이 퍽퍽 쳐 대는 움직임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수연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쥔 현재가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날씬한 다리가 넓게 벌려지고, 뽀얗게 살 오른 가슴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정없이 흔들렸다. 극점을 정확하게 눌러대는 자극에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수연은 그의 아래에서 정신없이 꺽꺽댔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안 그래도 인정사정없던 현재의 허릿짓이 무섭게 빨라졌다. 체력도, 쾌락도. 제가 느낄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버린 수연의 몸에서 맥없이 힘이 풀린 찰나. 뜨거운 숨과 함께 현재가 허옇게 드러난 목덜미에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끝난 건가……, 수연은 기력이 다 빠진 얼굴로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아직 심지가 죽지 않은 그의 것이 제 안을 뭉근하게 휘젓는 감각이 얼얼했다. 후희를 즐기듯 현재가 수연의 입술과 볼, 젖은 눈가를 두서없이 혀로 핥았다. 정말 끝난 거구나, 깨닫자마자 엄청나게 나른해지는데. 귓가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자제를 못 했네.”

“……됐어.”

너무 까칠했나? 수연은 얼른 다시 덧붙였다.

“좋았어, 나는.”

그 말에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탐색하듯 저를 찬찬히 살펴보는 남자의 눈빛에 괜히 입술이 마르는데.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 너무 빨리 끝낸 건 아니지?”

“뭐? 당연히 아니지 않……아?”

이 질문은 좀 곤란했다. 기본적으로 남들이 얼마나 하는지는 모르니까. 그래도 절대 빨리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더 했다면 진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극이 셌다. 처음인데 이만큼 느껴 버린 자신이 오히려 그간 욕구 불만이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순진하게까지 느끼는 반응에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던 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수연아.”

“응.”

“사랑해.”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랑해. 사랑해. 수연은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마음속에 새겨 보았다. 분명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단순히 섹스 후 분위기를 타서 한 말이 아니라는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를 만지는 애틋한 손길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저 눈빛까지. 모두 다 순수한 진짜라는 것을.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남자에게 수연은 결국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했다. 숨만 색색 몰아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현재가 몸을 들어 그녀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다. 콘돔을 묶어 뒤처리를 하는 것을 눈을 깜빡이며 보던 수연이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현재야.”

“응.”

들려오는 대답이 여전히 다정해, 수연은 조금 안심했다. 염치없게도.

“나도 너 좋아해.”

“응, 알아.”

“알아?”

“응.”

씩 웃은 현재가 맨살을 부딪쳐 왔다. 부드러운 시트 안에서 둘은 한 몸처럼 뒤엉켰다. 정신없이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마음껏 만졌다. 가슴이 꽉 잡히고, 허리와 엉덩이가 사정없이 주물러졌다. 수연도 현실감 없이 완벽한 그의 몸을 내키는 대로 더듬고 얼굴에 아무렇게나 뽀뽀를 했다. 씻을 때만 해도 그렇게 부끄러웠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키스를 받고 있는데 맞닿은 피부를 타고 또다시 발기한 그의 것이 느껴졌다. 설마 했는데 몸을 뗀 현재가 어색하게 웃더니 한 번만 더, 라는 믿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콘돔을 뜯었다. 싫으면 말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서.

눈을 크게 떴지만 수연은 딱히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간사한 모양이었다. 저를 원하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구름 위를 타는 듯 둥둥 떴다. 수연에게서 승낙의 기색을 발견한 남자가 아까보다 훨씬 더 익숙한 손길로 성기 위에 막을 씌웠다.

“흣…….”

방금까지 잘 받아먹어 놓고서는, 그새 비좁게 다물린 아래에 현재의 것이 조심스럽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안을 침범하는 크고 긴 기둥에 또다시 시야가 아득해졌다. 처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버거웠다. 할딱이는 수연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현재가 못 참겠다는 듯 다시 입을 맞췄다.

긴 밤을 예고하는 척척하고 질척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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