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

6

‘뭐지.’

왜 이런 걸 묻지?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했지?

그런 걸 왜 물어봐. 곧바로 그렇게 되물었어야 했는데 당황해 타이밍을 놓쳤다. 심장이 쿵, 쿵 거세게 요동쳤다.

“…….”

이건 시험인 걸까.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것은 끝이 나겠지. 물론 지금 와서 전부 고백할 그럴 용기는 없으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맞다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 해도 시험을 망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목구멍에 뭐가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을 발견한 순간. 그때만큼은 어느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팔을 뻗어 천천히 현재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순히 딸려 와 주는 몸에 심장이 지끈하게 아렸다. 지금 현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안해.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속으로 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던 순간.

“흣…….”

목덜미를 강하게 휘감는 손이 느껴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돌적으로 입을 맞춰 오는 남자에 놀란 수연의 신음은 뜨거운 숨결 안으로 삼켜져 버렸다. 혀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허겁지겁,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두서없고 노골적인 키스였다.

틈 없이 밀어붙이는 현재 때문에 자꾸 숨이 모자랐다. 진득하면서도 달콤하게 키스해 오는 여느 때와 다르게 현재는 한 줌의 여유 없이 굴었다. 혀를 쭉쭉 빨다가도 갑자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기도 했고, 으으, 수연이 호소하면 달래는 듯 부드럽게 혀를 놀리기도 했다. 물론 그건 잠시였고 다시 집요하게 몰아붙이긴 했지만.

일부러 춥춥 소리를 낸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난잡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할딱이며 그를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마음이 자꾸 가라앉았다. 현재가 이런 식으로 감정을 터뜨린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키스했다.

“…….”

수연의 입 안을 양껏 헤집은 후에야 그는 입술을 천천히 뗐다. 입술이 부어오를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빨았으면서도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라고는 없었다. 수연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현재의 목을 감싸던 수연의 팔은 풀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날씬한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마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던 현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널 잘 모르겠어.”

“…….”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 또 저만치 가 있고.”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과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이 힘들어, 수연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잘빠진 턱선을 타고 내려가 벌어진 가슴팍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다물었다.

“의도한 거야?”

“뭘……?”

“아니, 왜 있잖아. 밀당 같은 거.”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나직한 중얼거림에 이어 볼에 닿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수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남자의 표정에 복잡한 빛이 들어차 있었다. 까맣게 침잠하는 눈빛을 받고 있자니 심장이 지끈했다.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정말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변명해 봤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수연은 끝을 낼 순간이 또 한 번 두려워졌다.

누구를 위한 것일지 모를 진실 게임이 끝났다. 먹은 것을 치우고 번갈아 양치를 하고 온 뒤 불을 끄고 누웠다. 두 사람이 눕기에는 확실히 좁은 매트 위에서 몸이 겹쳐졌다.

습관처럼 벽을 보고 뒤돌아 눕던 수연은 아차, 했지만 이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팔에 가만히 있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현재가 중얼거렸다.

“너 좁으면 나 밑에서 자도 되는데.”

“불편하면 그렇게 해.”

곧바로 덧붙인 말에 현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술이 닿은 곳이 괜히 홧홧했다.

“싫어.”

“…….”

역시 그냥 해 본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어둠 속 수연은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가슴 바로 밑에 둘린 남자의 팔이 솔직히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잘 때 당연히 브래지어를 벗고 자는데 현재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뭐, 이미 만질 거 다 만진 사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 브라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보다 현재가 불편할 것 같은데.’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 새벽 되면 알아서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미리 얇은 이불이라도 깔아 놓을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악, 하고 커다란 남자의 괴성이 들렸다. 가다가 불시의 공격이라도 받은 듯한 외마디 비명이었다.

뭐지? 수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또 다른 남자의 걸쭉한 욕설과 함께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남자들이 앞을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잠깐 경직되었던 수연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수연은 제 배 위를 휘감은 단단한 팔 위에 슬쩍 손을 올리며 말했다.

“취한 사람들인가 봐.”

“바깥 소리가 너무 다 들린다. 1층이라 그런가, 이런 일 자주 있어?”

손을 맞잡는 커다란 손의 온기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멀어져 가는 남자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수연은 대답했다.

“방학 되고는 좀 나은데 어쩔 수 없지. 원룸은 거의 다 그러지 않아?”

“글쎄……. 저번에도 좀 위험했잖아.”

“어? 언제?”

“뒤풀이 끝나고 내가 너 처음으로 집에 데려다줬을 때.”

아……. 순간 수연의 눈앞에 그날의 잔상이 지나갔다. 그날 밤만 하더라도 이렇게 현재와 같이 잠드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게 뭐 위험한가. 그냥 부딪칠 뻔했던 건데.”

“위험하지. 취한 남자가 뭔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이 골목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상관없어. 별일 없으면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오니까.”

“혹시 집 계약 언제까지야?”

“반년은 더 남았지. 2월에 갱신했으니까.”

“다른 데로 옮길 생각은 없고?”

“…….”

이사를 가라는 걸까, 수연은 조금 울컥했다. 물론 현재가 저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알고, 저라고 낡은 이 집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만 조건이 좋아져도 당장 보증금 자체가 몇백이 뛰는데 굳이 거기에 돈을 부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기실 그럴 여유도 없고 말이다. 취업하면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나은 곳으로 옮길 수 있겠지. 수연은 그 생각만 하며 하루하루 나름대로 잘살고 있었다.

“없어.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여기서 3년째인데 잘만 살아.”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수연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저를 마주 보는 현재가 담겼다. 그새를 못 참고 짧게 입을 맞춘 현재가 말했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알지?”

입술이 다시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제가 화가 났나 살피는 듯한 표정을 바라보던 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

“술 마셨더니 졸려, 나 잘게.”

할 말을 마친 수연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벽이 보이자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제 표정이 읽히지 않으니까.

괜한 자격지심에 심통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같이 지내면서 수연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집이 꽤 잘 사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쪽도 그렇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혼자 사신다는 어머니는 유독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신 모양이었다. 이도재가 아득바득 장사하는 것은 딱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거였다. 집안도 좋고, 타고난 머리도 좋고,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한 현재가 전액 장학금을 받아 가며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다 현재의 복이고 능력이었다.

“수연아.”

“응.”

있잖아, 수연은 뭔가 말할 듯 뜸을 들이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너 그냥 나랑…….”

갑자기 현재가 말을 끊었다. 목덜미에 부서지는 한숨 같은 숨결이 나른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조금 긴장하는데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잘 자.”

“……응, 너도.”

토닥이는 손길을 받으며 벽과 현재 사이에 갇혀 있는데 조금씩 잠이 쏟아졌다. 기분 좋게 밀려드는 수마 속에서 수연은 문득 생각했다.

‘아직 열두 시도 안 됐는데 왜 졸리지?’

늘 새벽에 잠들기 일상이라 아직 쌩쌩할 시간인데. 그간의 피곤이 몰려왔던 탓일까? 언젠가부터 느껴지는, 엉덩이에 와 닿는 묵직한 양감 때문이라도 바로 잠 못 들 줄 알았는데…….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미약하게 나는 방 안,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체온이 솔직히 기꺼웠다. 어쩐지 든든하기도 했다. 부드럽게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던 수연에게서 어느샌가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

다음 날, 현재가 없는 방 안이 휑했다. 정오가 다 되어 눈을 뜬 수연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잘 자고 있어 깨울 수가 없었다며, 집에 잠깐 들렀다 오겠다는 현재의 메모를 발견했을 때는 조금 충격이었다.

[도시락 사다 놨어, 일어나면 바로 꼭 먹어.]

[전화하고.]

현재가 들락날락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실 자면서도 몇 번씩 깨는 게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 어떡하지.’

저녁에 볼 그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안 나간다고 하면 그만인데 도발에 흔들린 건 자신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리 없었다. 핸드폰만 손에 쥐고 있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오, 웬일. 한 번에 전화를 딱 받고?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현지의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학을 맞아 이틀 전 서울에 올라온 현지는 언니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아직도 언니의 애인과는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만 자매간의 우애는 여전히 돈독한 모양이었다.

“폰 갖고 있었어. 뭐 해?”

―난 그냥 놀아. 언니는 일 가고. 어제까지는 나도 가게 나가서 돕고 했는데 그것도 못 할 짓이네. 엄청 힘들어.

현지의 언니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작년부터 작은 옷가게를 낸 터였다. 어제 가게에서 있던 일을 말하며 조금 더 푸념하던 현지가 이내 물어 왔다.

―넌 뭐 해? 오늘은 학원도 안 가잖아. 저녁에 만날까?

“저녁은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이 있어서.”

―으응? 누구? 설마 이현재?

아직 안 헤어졌냐며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멋쩍게 얼버무린 수연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현지에게 말했다. 자꾸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조언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이도재랑 걔 여친까지 본다는 거지?

“응. 역시 안 나가는 게 맞겠지?”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아니, 나가야지.

“…….”

―나가서 말해. 너 따위는 관심 없고 지금 네 동생이랑 너무 사이좋고 행복하니까 괜한 훼방 놓지 말라고! 차라리 잘됐네, 이 기회에 다 털고 가자.

격양된 목소리에 수연은 침묵했다. 잠깐의 정적도 참지 못한 현지가 또다시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만나는데? 근데 너 뭐 입고 갈 거야? 설마 면 티에 반바지나, 편의점 갈 때 입는 그 헐렁한 회색 원피스 입고 가는 건 아니지?

“……그게 중요해? 그리고 딱히 꾸밀 필요는 없지 않아?”

물론 편의점 가는 옷차림까진 아니겠지만 뭘 입고 갈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거기에 신경 쓴 티 내고 가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당당한 말에 곧바로 하, 기가 찬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았어. 나 지금 너희 집 갈 테니까 좀만 기다려. 한 시간?

“갑자기?”

―왜, 남친이랑 있어? 나 인사시켜 주기 싫은 건 아니지?

“그건 아닌데,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

수연의 말에 현지는 그럼 됐다며,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어쩐지 상당히 불안해졌다.

*

“이게 뭐야, 무채색 파티하는 거야?”

정확히 한 시간 후, 옷장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장 안의 옷들을 보고 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색, 검은색, 아주 가끔 하얀색과 다른 색. 거의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옷들이었다.

“취향이야.”

“그런 취향 내다 버려라. 자기 장점을 잘 살리는 것도 능력인 거 알지?”

“그럼 이건 어때?”

현재와 데이트할 때 종종 입는, 가지고 있는 원피스 중 나름 가장 화사한 옷을 들이밀었는데도 너무 무난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옷장 속에 처박혔다. 내가 네 얼굴과 몸매였으면 절대 이러지 않을 거라는, 늘 듣다못해 인이 박인 말을 기어이 또 한 현지가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 안에서 잘 개켜진 옷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건 다 뭐야?”

“어제 언니 가게 갔다 했잖아, 마침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 예쁜 거 몇 벌 챙겼지. 너 맘에 드는 거 골라 봐.”

현지가 펼친 옷들은 여름용 얇은 블라우스와 치마, 원피스 등이었는데 죄다 여성스럽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야, 그러지 말고 골라. 보세라도 예쁘기만 하면 되지.”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알아, 근데 수연아. 네 평소 취향을 떠나서 이럴 때는 TPO라는 게 있다고, 아마 이도재 여친도 엄청 꾸미고 나올걸.”

“상관없어. 걔가 꾸미고 나오든 말든.”

“아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너도 한 번쯤은 기분 전환 할 수도 있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니?”

그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결국 한참 실랑이를 하다 입어만 보라는 말에 개중 그나마 무난해 보이는 자잘한 플라워 패턴의 시폰 원피스를 입어 보았다. 넥 라인이 시원하게 패여 있는, 수연에게는 조금 짧은 감이 있는 미니 원피스였다. 하늘하늘한 천이 다리에 감기는 감촉이 괜히 어색했다. 욕실에서 갈아입고 나오니 현지가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호했다.

“야, 딱 네 거야. 여신이다, 여신. 맨날 이렇게 입고 다녀라, 좀.”

“바람 불면 그냥 치마 뒤집힐 것 같은데.”

“오늘 바람 하나도 안 불더라. 날씨가 엄청 좋아서? 속바지 잘 입으면 되지.”

신난 현지가 다시 앉아 보라며 손으로 팡팡 바닥을 쳤다. 짧긴 짧네, 수연이 고개를 갸웃대며 앉으려는데 현지가 그새 바닥에 늘어놓은 화장품과 메이크업 도구들이 보였다.

“화장도 해야 해?”

“그럼 안 하려고? 와, 진짜 예쁜 애들의 자신감은 이런 거구나.”

부러 과장된 어투로 말하는 현지를 보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했다.

“아니, 그냥 기본만 하면 되잖아.”

“그래, 그 기본이 중요한 거라니까? 너 내 실력 못 믿어? 중학생 때부터 내가 애들 꾸며 줬던 거 기억하지? 너는 얼굴이 이미 화려하니까 많이 건드릴 것도 없어. 과하게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현지는 원래도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다니는 틈틈이 관련 블로그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저를 생각해서 와 줬으니까. 수연은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하고 현지의 손에 저를 맡겼다. 대박, 잠도 별로 안 자는 애가 피부는 왜 이렇게 좋아, 손을 움직이는 내내 이런 저런 말을 쉬지 않던 현지는 화장을 마치고 미리 예열해 놓은 고데기로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 난다. 왜, 우리 중학교 마지막 축제 때. 너 하늘색 원피스 입고 나타난 거 보고 다들 놀랐잖아, 우리 학교에 연예인 뜬 줄 알고.”

농을 섞은 현지의 말에 굳이 꺼내기 싫은 예전 생각이 났다. 그 축제에서 이도재한테 고백했었다. 엄마가 사 준 예쁜 옷은 결국 제 손으로 찢어 버렸지만. 수연은 조용히 물었다.

“……엄마 카페는 아직 있지?”

“응. 지난달에 한 번 갔었는데 어머니 계시더라. 나 보면 뭘 계산하느냐고, 직원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알아서 마시고 가라고 하셔. 그래서 오히려 더 못 가겠다니까.”

끝에 살짝 컬만 준다며 능숙하게 머리를 손질하던 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연은 조금 씁쓸해졌다. 기분파인 엄마는 남들에게는 원래 잘했다. 정작 자식에게는 매정했지만.

수연은 엄마가 카페에 있다는 말에 아주 조금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항상 훌쩍 어딘가로 문득 떠나 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갑자기 조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현지야.”

“응.”

“고마워.”

“……뭐가?”

“그냥, 다.”

“……흐응, 연락이나 잘 받아! 너는 연락 없으면 불안하다고, 밥도 잘 안 챙겨 먹고 공부하다가 혼자 끙끙 앓고 있나 싶어서. 전에 너 쓰러져서 입원했다는 말에 내가 다 죄책감 들어서 진짜.”

꿍얼대는 소리를 듣는데 웃음이 나왔다. 현지는 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저와는 극점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주 가끔은 못 견디게 부러울 때도 있지만 부러워해 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현지가 없었으면 중고등학교 때는 더 암울했을 거다.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평소답지 않게 머뭇대던 현지가 물었다.

“어머니랑은 연락 진짜 안 해?”

“안 해. 너한테도 엄마가 내 얘기 물은 적 없다며.”

“그거는…… 뭐, 그래도 당연히 걱정하실 거야.”

얼버무리던 현지가 다 됐다, 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울 속 비친 제 모습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이도재를 만날 때만 꾸미게 되는구나.

*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봄에 오픈했다는 캐주얼한 와인 바였다. 오픈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SNS에서 입소문을 타 예약하지 않으면 못 올 정도로 꽤 유명한 곳인 모양이었다. 1층은 바와 홀이었고 2층은 룸들만 있는 구조였는데, 이도재와 안면이 있는 사장이 친근하게 직접 룸까지 안내해 주었다.

“근데 여기 사장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오빠?”

“건너 건너. 몇 번 같이 술 먹다 친해졌어.”

“진짜 오빠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 그거 알아요, 언니? 길 가다 보면 오빠 아는 사람 하루에 꼭 한 명씩은 만난다니까요.”

애교 섞인 말투의 희진은 마냥 귀엽게만 보이던 첫 만남과 달리 화장도, 옷도 다 성숙한 느낌이었다.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리는 그럭저럭 흘러가고 있었다. 사장이 추천해 준 요리는 모두 다 맛있었고, 술이 약하다는 희진을 배려한 와인은 도수 높은 것을 선호하는 수연에게는 술 같지도 않긴 했지만 달콤하니 마실 만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잘 먹고 있는데?”

나름대로 다 잘 먹고 있는데 현재에게는 양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방금 나온 따끈한 파스타를 접시에 덜어 주는 것을 보던 이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난 내 동생이 연애하면 저렇게 다정할 줄 몰랐다니까.”

“…….”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가게에서 봤을 때는 매번 티셔츠에 진이더니, 짙은 색 셔츠를 입고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이도재는 확실히 또래보다는 성숙한 느낌이 있었다. 비슷한 디자인의 셔츠를 입어도 차분한 느낌인 현재와는 다르게 묘하게 불량스러웠는데, 원래 갖고 있는 분위기 차이인 건가 싶었다.

“하긴, 저도 현재 오빠 처음 봤을 때는 좀 차가운 이미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오빠. 그냥 딱 첫인상만 갖고 한 얘기니까 오해하지 말구요?”

현재를 바라보며 희진이 웃었다. 참 웃음도 많고 애교도 많은 게, 다시금 느끼지만 저와는 많이 달랐다. 딱히 엄마가 아니었어도 이도재에게는 어차피 차였을 모양이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참, 같은 과라고 하셨잖아요, 친구에서 애인. 뭐 그런 건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호감 있어서 먼저 다가갔는데 같은 마음이었어.”

“와, 고백은 누가 먼저 하셨는데요?”

“내가.”

별다를 거 없는 말에도 희진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했냐는 말에는 현재는 그건 둘만의 추억이라며 말을 아꼈다. 수연은 현재의 그런 면이 좋았다.

“히잉, 뭔가 부러워요, 언니. 그거 아세요? 저는 제가 좋아서 도재 오빠 엄청 따라다녔거든요. 오빠가 부담스러워할 것 알면서도 매일같이 가게 가서 술 마셨어요.”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수연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희진이 이내 다시 웃었다. 술이 약하다 하더니, 화장을 곱게 한 얼굴에 열이 올라 있었다.

“멋있잖아요, 도재 오빠. 같이 있으면 든든하고 진짜 어른 같다는 느낌? 이런 말 하면 다들 웃던데 제가 예전부터 생활력 있는 남자가 로망이거든요. 아, 아는 사람 너무 많은 건 장점이자 단점이긴 해요.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아는 여자도 많다는 말이라. 그건 잘난 남친 있는 제가 감수해야죠.”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하는 희진의 투정에 이도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할 말 없을 때는 마셔야 한다며, 건배를 제안하는 게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자, 우리 얘기는 그만하고. 나도 좀 궁금한 것 좀 묻게.”

술잔을 내려놓은 서서히 이도재의 눈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현재 말만 들으면 쌍방 호감이었던 것 같은데. 둘이 팍 터지는 계기가 있었나? 수연이가 좀 말해 줘 봐.”

술자리가 시작할 무렵, 동갑인데 말 놓자고 했던 이도재였다. 이제 시작인 건가. 수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

“현재가 좋아한대서 별생각 없이 받아 준 건 아니지?”

“아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한 발짝 늦은 대답은 거의 동시에 나왔다. 현재의 반응에 이도재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장난, 장난.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한 이도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현재한테, 너는 연애해도 진짜 목석같이 할 것 같다고 했었거든.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얘가 그런 쪽으론 좀 순진한 면이 있어서. 현재는 여자 쪽에서 더 좋아해서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현재가 너한테 푹 빠진 것 같더라.”

이런 얘기를 하는 의도가 뭐지? 수연이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희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오빠들은 왜 이렇게 사이가 좋은 거예요?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는데 도재 오빠가 형제 사이에 그럼 사이가 좋지 안 좋냐고만 해서. 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영양가 있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간 현재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거였기도 했다. 수연은 의식적으로 현재 앞에서 이도재를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렸다.

으음, 희진의 말에 이도재가 잠시 침묵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손가락을 테이블에 툭툭 찧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거의 할아버지가 우리 둘 키워 주셨거든. 초등학교 때까지. 부모님이 두 분 다 바쁘셔서. 뭐…… 바쁜 이유는 각자 달랐지만. 그래서 우리 둘이 의지를 많이 했어.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곧잘 싸우기도 했던 것 같아. 주로 내가 현재를 먼저 건드렸던 것 같긴 해.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은 잘은 안 나지만.”

이도재가 피식 웃었다. 수연은 슬쩍 옆의 현재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이렇다 할 표정은 없었다. 밖에 나와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지만 현재는 말수가 적었다. 저랑 있을 때만 수다쟁이가 되는 모양이었다.

“현재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몸이 좀 약했거든. 지금은 나보다 체격도 좋지만 그때는 키는 컸어도 마른 편이었어. 딱히 무슨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곧잘 열이 나고 감기도 많이 걸리고, 잔병치레를 좀 했어. 종종 내가 간호해야 하는 때도 있었지. 사실 간호라기보다는 동생이 아픈데 어딜 놀러 가냐고 할아버지가 잡아서 불퉁한 얼굴로 방에서 놀긴 했지만.”

이도재의 얘기에 집중하며 수연은 잔을 들어 천천히 목을 축였다. 아까부터 자꾸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열 살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 현재 데리고 병원 다녀온 할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 동생 잘 보고 있으랬는데……자는 현재 물수건 갈아 주다 내가 그냥 나가 버렸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놀다가 저녁쯤 들어온 것 같아. 기억에 점점 어두워지는 길가 풍경이 있거든. 근데 집에 난리가 나 있더라.”

“어머, 왜요?”

“나 없는 새 열경련이 난 걸 할아버지가 발견하셨나 봐. 119 부르고 난리가 났었는데 난 하나도 모르고 놀고 있었던 거지.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뇌에 손상 갔을지도 모른다고 어른들이 했던 말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해. 충격이었거든.”

헉, 희진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럼 그때부터 더 잘 챙겨 줘야겠다, 그런 생각한 건가?”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계기는 되었겠지.”

성실하게 답해 주던 이도재가 별안간 수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수연이 너도 잘 알겠지만 지금은 현재가 누구보다 건강하니까 혹시라도 걱정은 말고. 봐, 키도 체격도 다 나보다 크고 체력도 좋아. 건강 그 자체야.”

수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옆에서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이네. 이런 얘기 잘 안 하잖아.”

현재의 말에 이도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그새 더 취기가 오른 듯한 얼굴로 희진이 감동했다는 얼굴을 했다.

“어, 오빠. 설마 내가 물어본 거라 말해 준 거예요?”

“음, 그렇지.”

한 박자 늦게 나온 이도재의 대답이 어쩐지 시원찮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계속 이도재는 수연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현재는 집에서 책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여행 다니는 것도 좋아하거든. 사이클도 맘 맞는 애들끼리 모여서 가끔 타는데 요새는 너 만나느라 그런가 아예 안 가던데. 어때, 좀 비슷한 성향인가?”

“아니, 난 밖에 돌아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취미가 같아야 오래 갈 텐데…….”

말을 흐리던 이도재의 눈이 갑자기 어둡게 빛났다.

“혹시 현재가 첫사랑이야?”

아, 이런 질문 실례인가. 뻔뻔하게 말하는 이도재에 수연의 입가가 비틀렸다. 뭐라 대답하기 전에 옆에서 곧바로 대꾸가 들려왔다. 어, 실례야.

“근데 너는 다 처음이니까, 형으로서 좀 걱정될 수도 있잖아. 원래 남자한테 첫사랑이 특별한 법이거든.”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는 이도재에게 수연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남자든 여자든 똑같지. 첫사랑이 특별한 의미인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거고. 누군가한테는 끔찍한 기억일 수도 있잖아.”

처음으로 이도재의 입이 다물렸다. 수연은 이도재에게만 집중하느라 옆의 현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너랑 나이도 같고 다 큰 동생 뭘 걱정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도 현재가 첫사랑이야. 그럼 돼?”

날 서게 나온 말에 테이블 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하하, 정적을 깬 건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미안, 미안. 내가 오지랖을 너무 부렸다. 그치. 사과할게.”

“…….”

“근데 외모가, 솔직히 튀잖아. 너. 그래서 솔직히 네 말이 믿기지는 않아.”

그의 눈은 아직 웃고 있었다. 그만해. 벌써 취했어? 현재가 언짢다는 듯 말하기 전까지는.

“알았어, 알았어. 나 진짜 취했나 보다.”

능구렁이 같은 이도재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내일 리오픈하는 자신의 가게 얘기, 지난여름 현재와 같이 사이클 갔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 등등.

현재는 처음 넷이 만나기로 했을 때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계속 말이 없었다. 혹시나 이도재 때문에 제가 기분 나빠졌다고 생각할까 봐 이도재의 말에 대충 맞춰 주다 보니, 어느새 둘이 주로 대화하는 형국이 되었다.

설마 중고등학교 때 얘기를 꺼내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다행히 이도재는 그때 얘기는 화두에 올리지 않았다. 그사이 와인의 종류도 두 번 더 바뀌었다. 이도재의 옆에 찰싹 붙어 졸기 시작하는 희진을 내버려 두고 셋이 연신 잔을 부딪쳤다.

“슬슬 일어날까?”

그러다 어느 순간, 희진에게 시선을 주며 하는 현재의 말에 이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이 데려다주고 2차 해야지. 수연이까지 셋이 해서 우리끼리.”

“2차?”

현재가 탐탁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이도재가 씩 웃었다.

“아직 9시밖에 안 됐잖아, 솔직히 이런 가게는 내 취향 아냐. 희진이가 원해서 온 거지.”

이도재가 제게 엉겨 붙은 희진의 몸을 흔들었지만 희진은 으음,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정말 술이 약하긴 한 모양이었다.

“우리 집 앞 포차에서 간단하게 소주나 한잔하고 헤어지게.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

어때? 싫으면 강요는 안 하겠다는 가벼운 투로 이도재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수연에게 붙박여 있었다.

“무리하지 마.”

잠시 멈칫한 수연에게 현재가 조용히 말했다. 과보호라는 이도재의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순간 제가 엄청나게 한심해진 기분이었다.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 아니야, 좋아.”

이대로 가면 정말 이도재 얼굴 보러 나온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연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

잠시 후 희진은 눈을 뜨긴 했지만 머리가 무겁다는 등, 졸린다는 등 이도재에게 붙어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이도재의 말에 현재와 1층으로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어머, 현재 아니야?”

여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반가운 기색으로 현재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여자 친구냐, 너무 잘 어울린다 등등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는데 문득 손이 허전했다.

“잠깐만 나 다시 갔다 올게.”

“왜?”

“핸드폰 놓고 왔어.”

가방에 없는 걸 보면 테이블에 놓고 온 모양이었다. 같이 가자는 현재에게 고개를 저은 수연은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되짚어 올라갔다. 원래 이런 실수 안 하는데 오늘 정신이 없긴 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에 있는 건가.’

빈티지함이 물씬 풍기는 어둑한 복도를 지나 룸과 복도를 구분하는 휘장을 걷어 올리던 순간.

“……!”

시야에 들어오는 예상 못한 장면에 수연은 잠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몇 발짝 앞에서 이도재와 희진이 진하게 키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옆 선 채로 희진의 뒤통수를 감싼 팔이 보였다. 한 손으로 희진을 끌어안은 그의 손목에는 작은 여자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그래도 딱히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놀라 눈이 커진 수연과는 다르게 정작 눈이 마주친 이도재는 태연했다. 놀란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은 당당하기까지 했다. 행위를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눈앞의 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여유 있게 키스를 이어 나갔다.

가느스름해진 남자의 눈빛에 담긴 명백한 흥미를 발견한 순간 묘한 불쾌함이 들었다. 제게 등을 돌리고 있는 희진이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미친 새끼.’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상스러운 말이 이도재와 있으면 자꾸 흘러나온다. 물론 마음속으로기는 하지만. 수연은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걸어가 테이블 위 올려진 제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

테이블이 몇 개 없는 포차 안은 시끌벅적했다. 먼저 도착한 현재와 수연이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들어오자마자 이도재는 소주 두 병과 파전을 추가로 주문했다. 여기서는 이게 제일 맛있다는 말과 함께. 이곳 주인과도 친한지 너스레를 떠는 이도재에게 현재가 핀잔을 줬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켜. 누가 마신다고.”

“내가.”

“내일부터 가게 나가잖아, 한 병만 주세요.”

이도재의 의사를 가볍게 무시한 현재가 주문을 수정했다. 이도재는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딱히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희진이는 잘 데려다줬어?”

“어, 택시 타고 집 앞까지 태워다 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걔네 언니가 나와서 데리고 가더라.”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아까부터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현재가 신경 쓰이는 와중, 여전히 수연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눈앞에 아까 보았던 키스 장면이 어른거리는 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이 거의 비워져 가는데 테이블 위 놓아둔 현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 시간에 누구야?”

곧바로 물어본 것은 역시나 이도재였다. 액정을 흘깃 본 현재가 고저 없이 대답했다.

“어머니.”

“……왜 안 받고.”

“이따 하면 돼.”

“왜, 지금 나가서 받고 와. 내가 안 받으니까 너한테 하신 것 같은데. 이 시간에 전화하시는 일 드물잖아.”

“형한테 하셨다고?”

“어, 안 받았지만.”

하, 현재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 이내 수연에게 부드럽게 말한 현재가 테이블 아래 늘어뜨린 수연의 손을 한번 꼭 잡았다 놓았다. 그렇게 둘만 남은 테이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짠 할까?”

수연은 잔을 내미는 이도재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이도재가 혼자 잔을 비웠다.

“씨발, 난 네가 진짜 싫어.”

입가를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하는 말투는 험악했다. 수연은 옅게 조소했다.

“너 입 진짜 험하다.”

“생각해 봐. 너랑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사이좋게 술 마시고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냐? 커플끼리 짝짜꿍할 사이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오늘은 네가 나오라고 해서 나온 거고. 잘난 얼굴 보여 준다고 멋대로 말한 건 너잖아?”

표정 없는 수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도재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날카롭게 빠진 그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래, 순진한 애 갖고 노는 기분은 어때?”

“…….”

“설마 양심이 있으면 좋아한다 어쩐다 소리는 안 하겠지. 아까 네가 현재가 첫사랑이라고 하는데 나 그대로 자리 엎을 뻔했잖아, 존나 뻔뻔하더라, 너.”

“틀린 말 아닌데. 나 누구랑 사귄 거 현재가 처음이야.”

“하하, 그래?”

이도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로 재밌다는 듯 박수까지 치는 게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우리 여기까지 와서 돌려 말하지 말자, 수연아. 너 나한테 앙심 품고 현재 건드린 거잖아.”

“…….”

“내내 아무 관심 없다가 뒤풀이에 딱 눈 맞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야? 아무 잘못 없는 애 그만 데리고 놀고 제자리에 갖다 둬. 지금도 확 엎고 싶은 거 현재 봐서 참고 있으니까.”

“……좋아한다면?”

“뭐?”

씩씩대던 이도재의 입가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수연은 죄 없는 애꿎은 치맛자락만 테이블 아래에서 손으로 잘근잘근 쥐어뜯었다.

“현재한테 진심이라면 네가 어쩔 건데. 솔직히 난 너한테 사과받아야 하는 입장이야. 네가 우리 엄마한테 했던 막말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그냥 내가 싫다고 하면 되지 그딴 식으로 말할 이유가 있었어? 그때는 나도 너무 놀라고 충격 받아서 너한테 아무 말도 못 했던 게 계속 가슴속에 박혀 있다고.”

조용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수연을 바라보는 이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연은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사과해. 우리 엄마한테 그렇게 모욕적인 말 했던 거. 진심이든 아니든 나는 사과 꼭 받아야겠으니까.”

말을 맺고 나자 후련함이 밀려들었다. 몇 년 동안 묵혀 놨었던, 하고 싶은 말을 드디어 다 했다는 생각에. 하지만 동시에 당시 느꼈던 생생한 감정이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가 또 한 번 울컥한 마음도 들었다. 흐음, 수연의 말에 이도재가 크게 호흡하며 비스듬히 팔짱을 꼈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솔직히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대충 상황은 기억나. 뭐,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해.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

맥 빠지는 사과에 몸에 힘이 턱 풀렸다. 이도재가 잘 기억 안 난다는 것도 솔직히 충격이었다. 토씨 하나 한 틀리고 그가 한 말을 기억하는 저와는 다르게, 이도재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잊어버렸던 거였다. 수연이 대답 없이 이도재를 노려보는데, 빈 잔에 홀로 술을 채우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알지? 우리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 가게 뻔질나게 갔던 거. 솔직히 그 가게 그냥 술집 아니잖아. 촌구석 공무원들 돈으로 입막음해서 이것저것 안에서 다 하는 가게지.”

“뭐?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정말 몰라? 아버지는 네 이름도 알고 있던데. 엄마 닮아서 예쁘다는 말도 했어.”

“모른다고.”

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이도재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됐어. 따지고 보면 네 잘못도 아닌데 내가 오버했지. 아버지가 그런 가게 들락날락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이혼당한 것도 아닌데. 그땐 나도 어려서 좀 화풀이를 다른 데다 했던 것 같아.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미안하다.”

여전히 가벼운 말투였으나 사과는 사과였다. 수연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어렴풋이 그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자신이 짜증 났다.

‘기분이 왜 이렇지?’

작은 잔에 채워진 소주만 말없이 내려다보려니 뭔가 허망해졌다. 사실 이도재가 이렇게 즉각 사과해 올 줄은 몰랐던 것도 같다. 어쨌든 사과받았는데, 그 이상 바랄 것도 없는데 왜일까. 제 마음이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현재랑은 그만 정리해. 정리라는 말도 웃기긴 하지만.”

그러나 이어지는 이도재의 말에는 번쩍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이도재는 웃음기라고는 하나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많이 마셨는데도, 여름내 살짝 그을린 듯한 얼굴에는 취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너랑 만나고 현재 진짜 이상해졌어.”

“……뭐가.”

“처음이니까 감안하더라도 과해. 핸드폰 잘 보지도 않는 놈이 종일 폰만 들여다보고 있고. 뭔 생각 하는지 멍하니 있을 때가 많고. 저번에 내 생일 때 아침에 차린 생일상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이도재의 말에 지난번 형 생일이라 하는 김에 했다며 음식을 가득 해 왔던 현재가 생각났다. 말이 없어진 수연을 보고 이도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 둘이 사는데 누가 그렇게 거하게 해? 해 봤자 번갈아 미역국 끓이는 정도지. 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전날 밤 현재가 부엌에서 너 줄 게 뻔한 갈비찜 재우고 있는 거 보는데 뒷골이 다 띵했잖아. 네가 부담스러워할 까봐 내 핑계 댄 모양인데, 난 이용당한 거라고.”

“…….”

“이번 방학 때 미국 들어가기로 했는데 것도 안 간대. 어머니가 자기만 기다리는 거 뻔히 알면서 말이야. 뭐겠어? 뻔하지. 지금도 그 문제로 통화하고 있을 거야.”

“나 때문이라는 거야?”

“그 말이 꼭 듣고 싶어? 그래, 너 때문이지. 한 번은 진지하게 네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거든. 외모가 이상형이라면 다른 여자 소개해 줄까 싶어서. 근데…….”

말을 흐리는 이도재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심장이 자꾸 불안정하게 뛰었다.

“그러더라,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대. 네가 그런 게 있대. 자꾸 마음에 걸리고, 혼자 내버려 두면 신경 쓰인다더라. 내가 진짜 티는 못 냈는데 웃겨 가지고…… 너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말 들어 보면 얄미울 정도로 자기 할 일 척척 해내는 거 나도 기억나는데 말이야. 그래서 생각했지, 얼마나 내숭을 깠으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아아, 미안.”

이건 진짜 미안. 이도재가 과장된 어조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암튼 그만하자. 너도 오늘 끝장 보려고 나왔을 거 아냐. 난 사과했고, 너도 더는 나한테 뭘 바라는 건 없을 거고. 뭐, 부족하면 무릎이라도 꿇을까?”

덧붙이는 목소리는 음산하도록 낮았다. 진짜 진심같이 들려서 소름이 돋았다. 수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싫으면, 네가 현재한테 말해 버리지 그랬어?”

옆자리에서 걸쭉한 욕설과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연신 흘러나왔지만 수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현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너 하는 거 보면 더한 일도 충분히 할 것 같은데 왜 말 안 하고 있냐고.”

물론 절대 그런 상황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연은 이도재에게 괜한 미움을 받는 것에는 화가 났지만, 현재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생각만으로 슬펐다. 뻔뻔하다 비난받아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으니 이도재가 느릿한 한숨을 토해 냈다.

“마음 같아서야 당연히 그러고 싶었지. 근데 내가 알게 됐을 때는 시간이 좀 지나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 현재가 완전히 너한테 마음을 줬더라고. 너 좋아 죽는 티를 온 몸으로 내고 있는데 입이 안 떨어지는데 어떡하냐?”

말미에 기어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도재가 술잔을 비웠다. 어쨌든 아직 얘기는 안 하려나 보구나. 수연은 내심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러나.

“근데 네가 오늘 이후에도 계속 만나겠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

“그래, 현재가 사실을 안대도 바로 너랑 헤어진다는 말은 안 할 거야. 현재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한번 정한 건 잘 바꾸지도 않고 고집도 세. 그땐 나도 못 말리니까.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

“너랑 현재의 신뢰의 문제지.”

신뢰. 그 당연한 단어에 가슴속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흔들리는 수연의 눈빛을 이도재가 똑바로 마주했다.

“미리 말 안 한 걸 알면 나한테도 배신감 느끼겠지. 그래도 난 가족이고, 평생 볼 사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그냥 좋게 좋게 서로 마음 식어서 헤어졌다는 게 낫지. 너도 현재한테 그딴 식으로 남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어느새 격양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잇던 이도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현재 온다, 수연은 차마 뒤돌아볼 생각도 못 하고 침묵했다.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어?”

다시 자리에 앉은 현재가 제 형과 수연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그냥. 이런저런 거. 네가 수연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잘 지내라 뭐 그런 말?”

언제 서슬 퍼랬냐는 듯, 웃는 낯으로 이도재가 너스레를 떨었다. 헤어짐을 종용해 놓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은 참 잘했다.

“그래?”

현재가 수연에게 시선을 주며 살짝 웃었다. 오늘만큼은 그 예쁜 미소에도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

술자리가 파했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간이었다. 집까지는 현재와 걸어가기로 했다. 현재야 운동 삼아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고는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어림잡아 30분은 걸릴 것 같은 거리였다.

현재는 수연을 생각해 택시를 같이 타려 했으나 걷고 싶다는 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터였다. 헤어지기 전, 이도재는 현재에게 외박하지 말라 하며 수연에게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인적 드문 밤거리를 둘이 나란히 걸었다. 한낮에는 그렇게 덥더니 밤에는 확실히 좀 살 만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붙잡아 두고 있을 줄 몰랐네.”

“괜찮아.”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아까부터.”

취했어? 현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수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 술 세다는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백번은 될 것 같은데.”

“세긴. 너 술 많이 마시면 확실히 좀 달라지는 거 있어.”

“내가? 어떤데?”

“음, 좀 더 귀여워져.”

고개를 숙인 현재가 살짝 열이 오른 수연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마주친 눈빛에서 제가 정말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 여실히 보였다. 누가 나를 이렇게 바라봐 줄 수 있을까. 처음에는 못내 어색하기만 했던 그것에 자꾸 욕심이 생겼다.

기어이 걸음을 멈춰 수연을 한번 꼭 끌어안은 그는 밖이야, 라는 수연의 말에 아쉽다는 듯 천천히 손을 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왔어? 딱 봤을 때 진짜 요정인 줄 알았잖아.”

“그냥, 현지가 입어 보라고 해서.”

요정이라니. 커다란 몸과 어울리지 않는 동화 같은 단어 선택이었다.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수연은 말없이 저를 끌어안은 몸에 조금 더 몸을 기댔다. 허리에 감긴 그의 손에 은근하게 힘이 들어갔다.

남들이 알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수연에게 이런 늦은 시간 누군가와 걷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생경한 경험이다. 어릴 때야 당연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수연은 학교와 알바, 제 조그만 원룸만을 알고 살았다. 천천히 걷고 있던 와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랑 통화 자주 해?”

“음, 그렇게 자주는 아니야. 워낙 바쁘시기도 하고…… 차라리 아버지와 연락하는 게 더 많을걸. 지금은 그나마 펜션 하셔서 뜸해진 편이지.”

“네가 방학 때마다 미국 가는데 안 가서 서운하신 거 아냐?”

“형이 그런 것도 말했어?”

현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참 의외인 일이 많네. 형은 가족 얘기 남한테는 절대 안 하거든. 아무리 작은 거라도 하기 싫어해.”

“……그래서, 어머니 뵈러 왜 안 가는데?”

“너랑 데이트해야지.”

“전에 아버지 펜션은 다녀왔잖아.”

“그건 길어 봤자 일주일이지만 미국 가면 방학 내내 있게 될 거라.”

대화를 나누며 대학가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사람이 많아졌다. 어느새 둘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참, 수연이 너는 집에 안 가?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안 하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에 잠시 멈칫하던 수연은 입을 열었다.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아서. 갈 일 없어.”

“어…… 많이 안 좋아?”

“응. 대학 들어오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전화나 문자도 아예 안 해?”

“안 해.”

그런 건 원래도 한 적 없다.

“……아버지하고는?”

“돌아가셨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

그렇구나, 잠시 침묵하던 현재가 답했다. 가끔 현재가 부모님 얘기를 할 때마다 대충 둘러댔는데, 술김이라지만 솔직히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방학이지만 자정을 넘은 시간에도 먹자골목은 사람들과 불빛들로 반짝반짝하고 시끄러웠다. 고작 몇 분 거리인데 골목을 돌아 제 원룸 쪽으로 가면 어두워지고 조용해지긴 하지만. 인적 드문 거리에 들어서며 수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괜한 것을 물어봤나 고민하고 있을 착한 애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근데 난 지금이 제일 편하고 행복해.”

“……왜?”

“나만 신경 쓰면 되니까. 내가 없었으면 엄마가 더 행복했을 텐데, 이런 생각 같은 거 안 해도 되고. 결론만 보면 엄마는 나 때문에 발목이 잡혔던 거니까. 엄마는 혼자 일하면서 나를 다 키웠거든.”

사실은 좀 더 노골적으로, 이것저것 다 현재에게 얘기해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자신도 재미없고 구질구질한 얘기라면 듣는 타인에게는 더 그런 법이다. 많은 것을 뭉뚱그려 한 말을 말없이 들어 주던 현재에게서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 외로웠겠네.”

“내가? 글쎄.”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렸을 때야 그런 감정을 느낀 것도 같지만 지금은 크게 느껴 본 적 없는데. 물론 생일이나 명절 같은 때면 좀 쓸쓸하긴 하지만, 타지에서 살다 보면 별다를 것도 없이 느끼는 감정 아닐까.

“너를 보면 뭐랄까, 되게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거든. 저번에 나한테 그랬잖아.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돈 벌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나는 너만큼 머리가 좋지 않으니까 놀러 다닐 시간 없다고 쏘아붙였던 게 생각나자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그때는 현재가 저를 차 줬으면 해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했었다.

“맞아. 나도 졸업하고 뭔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환상은 있어. 여기보다는 더 좋은 집으로 갈 거고, 돈도 많이 벌 거고. 음, 사실 나는 결혼 같은 것도 아예 생각 없었거든. 나는 원래 변수가 생기는 걸 싫어해. 행복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형으로 말한 것은 전에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속상해했던 현재를 배려해서였다. 다행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에 별다른 대꾸는 없었다. 꼭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이런 말을 덧붙이긴 했어도.

그 뒤로 조금 더 얘기했다. 수연은 제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 얘기를 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늘 무심한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조금 높아져 있었다. 그런 제 모습을 가만히 눈에 새기는 현재를 수연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제게 숨겨진 술주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을 뿐.

그렇게 혼자 열심히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현재가 살짝 상기된 수연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지금도 충분히 대단해. 혼자 모든 걸 알아서 하는 거, 쉬운 일 아냐.”

조용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따뜻한 눈빛이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싫은 건 아닌데 확실히 어색했다. 제 말에 이렇게 공감해 주고 관심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연은 이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어졌다. 제가 만들어 놓고도 말이다.

“설마 갑자기 나한테 동정심 생기고 그런 건 아니지? 그건 좀 별론데.”

“동정이라니.”

농담조로 한 말에 현재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수연이 순간 움찔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수연은 곧바로 저를 당기는 커다란 몸에 끌어안겼다. 얼굴이 눌릴 정도로 꽉, 팔 힘이 어찌나 센지 살짝 아프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그냥 난 네가, 나를 좀 더 의지해 줬으면 해. 하고 싶은 말이나 마음속에 담아 놨던 것들이 있다면 지금처럼 얘기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어떤 거여도 괜찮으니까 너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싶어. 너랑 만날 때마다 즐겁고 행복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았어. 너랑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어서.”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말할 수 있지?

너른 품 안에서 눈을 깜박이며 수연은 생각했다. 연애를 하면 다들 현재처럼 이렇게 말해 주는 걸까? 그렇다면 적당한 사람을 골라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체 사람을 믿지 않는 자신이다. 하물며 현지에게도 제 깊은 마음을 모두 드러낸단 생각은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남자는 자꾸 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연은 저를 안은 품에서 슬쩍 벗어났다. 여전히 제게만 고정되어 있는 까만 눈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이제 집에 갈 거야?”

“응?”

“형이 외박하지 말라고 했잖아.”

“…….”

말과는 달리, 곧바로 다시 제 품에 안겨 오는 수연에 잠시 멈칫하던 현재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아니, 안 가.

*

들어오자마자 수연은 욕실로 직행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샤워 후 자는 건 습관이어서, 오히려 강박적일 정도로 더 깨끗이 씻는 편이었다. 수연은 흐트러졌다는 느낌이 싫었다. 열심히 씻고 나오니 바닥에 앉아 있던 현재가 한 소리 했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네.”

“물이랑 음료수는 있잖아.”

“장 봐서 요리해 먹기로 약속했으면서.”

수연은 대꾸 없이 덜 마른 머리만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이런 게 잔소리인가?

“이리 앉아 봐.”

제 앞에 수연을 앉힌 현재가 수건을 뺏어 가서 꼼꼼하게 머리를 말려 주었다. 드라이기를 쓰려고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꺼내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물기 없이 한참을 말려 준 현재가 저도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이부자리 위에 눕자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짜증 나는 이도재.’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도재는 아무래도 저를 너무 순진하게 본 것 같았다.

현재에게 제가 다 말하기 전에 정리하라는 협박 따위는 오히려 저를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걸 모르는 걸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데.

아무튼 둘이 안 맞긴 한 모양이었다. 이도재가 만나자는 입방정만 안 떨었어도 분명 헤어졌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때를 놓쳐 버린 거다. 이도재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마음은 더 확실해졌다. 제가 현재를 놓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 본 온기를 포기하기 싫었다. 어차피 나중에 미움받을 거라면……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좀 더 유예하고 싶었다.

“자?”

달칵, 욕실 문이 열리고 현재가 나왔다. 습관처럼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던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잔다고 생각했는지 불을 끈 현재가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할 거 하고 불 꺼도 되는데,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가 뒤에서 저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나 보고 자면 안 돼?”

……안 자는 걸 들킨 모양이었다. 수연은 슬쩍 고개만 돌려 현재를 바라보았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입술이 겹쳐졌다. 평소보다 느리고 섬세하게 혀를 놀리는 행위가 괜히 더 자극적인 느낌이었다. 솔직히 수연은 그대로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전처럼 가슴을 만진다거나, 엉덩이를 주무른다거나. 요즘 과감해진 만큼 좀 더 깊은 애무를 한다거나 하는. 사실 내심 각오했던 바도 있었다. 술도 취했고, 제가 먼저 자고 가라고 꼬셨고.

이대로 섹스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자.”

그리 길지 않은 키스 후, 입술을 붙인 채 하는 인사는 다정하고도 담백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수연은 어느샌가 겹쳐져 있는 다리 사이 발기된 그의 것을 느꼈다. 저렇게 되면 힘들지 않나? 얘 이러다 욕구 불만 되는 거 아닌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수연은 토닥임 몇 번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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