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3)

5

방학이 되었다. 놀러도 가고 색다른 경험도 쌓을 계획인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수연의 계획은 취업 준비, 하나뿐이었다. 알바를 구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솔직히 저녁에 서너 시간 정도 하면 딱 좋을 것 같았지만 이미 자리가 없었다.

오전에는 영어 학원에 가서 특강을 듣고 오후에는 숙제와 다른 공부를 했다. 현재는 같이 다니고 싶어 했지만 이미 화려한 스펙에 네이티브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그에게는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제 일주일째이지만, 열심인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자극이 되었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구나. 졸업하고 손가락 빨고 있지 않으려면 진짜 열심히 해야겠구나.

더는 허튼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구나.

현재와 있는 동안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현실이 확 밀려드는 동시에, 무거운 자괴감에 송두리째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학원 건물 계단을 내려오며 수연은 현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끝났어, 1이 없어짐과 동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현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걸음을 빨리했다.

“수연아.”

저를 보고 웃는 얼굴에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수연은 애써 표정을 굳혔다. 당장 그녀를 덥석 안고 싶어 하는 표정이 다 보였지만 그것도 모른 척했다.

“잘 있었어?”

“어.”

일주일 만에 보는 현재는 살짝 그을렸는데 몸은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아버지 펜션 일을 도우러 겸사겸사 제주도에 내려갔다 오느라 그간 보지 못했었다.

“더운데 차에 있지 뭐 하러 왔어.”

“응?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려고 그랬지.”

눈에 띄게 냉랭한 반응에 현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한 번씩 이렇게 불퉁하게 할 때가 있어서 그러려니 하는지 별 타격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하긴, 너 더위 많이 타는데 차 갖고 와서 전화할걸 이런 소리를 해서 더 마음만 답답하게 했다. 좁은 골목길이라 차 대기 여의치 않아 다른 곳에 대 놓고 온 모양이었다.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차가 있는 학교 앞 커다란 공용 주차장으로 나란히 걸어가며 현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일주일 내내 원래대로 살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원래대로, 라고 하면 현재를 사귀기 전 허술하게 먹고 다녔던 때처럼 말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몸보신 좀 해야겠다.”

저번에 잘 먹었던 삼계탕집 갈까? 아님 다른 당기는 거 있어? 걱정스레 물으며 현재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으려 했다. 골목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그런 건지, 둘만 있을 때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습관처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

수연은 잡힌 손을 곧바로 홱 빼 버렸다. 아, 어색하게 저를 바라보는 현재의 얼굴에 마음이 날카로운 것으로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

낮은 중얼거림에도 수연은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익숙한 길을 지나가는 내내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골목을 빠져나온 둘이 듬성듬성 인파가 있는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던 순간이었다.

“어? 오빠!”

저만치서 들리는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현재 오빠! 곰살궂게도 이름을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앳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누구지?’

수연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학교에서 같이 다닐 때 선배님이라고는 해도, 현재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후배는 한 명도 없어서 의아했다. 그렇다고 현재가 저랑 사귀며 다른 여자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수연은 방글방글 웃는 낯을 저도 모르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희진아.”

여긴 어쩐 일이야? 덧붙이는 현재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 역시 자연스러웠다. 뭐지, 수연이 가만히 서 있는데 현재가 먼저 여자를 소개했다.

“얘는 형 여자 친구. 우리 학교는 아니고, 옆에 여대.”

“아…….”

이도재 여자 친구라고? 수연은 새삼스럽게 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도재가 이런 타입을 좋아했구나. 꼬리를 마구 흔들고 있는 애교 많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부터가 확실히 저랑은 달랐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살피는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현재 오빠 여자 친구분 맞으시죠? 진짜 예쁘시다……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 안녕.”

확신하는 태도에 부정도 못 한 수연은 얼떨떨하게 인사를 건넸다.

“와, 도재 오빠가 현재 오빠 여친 예쁜 거로 유명하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궁금했는데 진짜네요.”

“…….”

악의라고는 없어 보이는 반짝반짝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수연이 별 대꾸 없자 그녀는 현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빠는 언제 서울 오신 거예요? 제주도 갔다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어젯밤에. 형이 별걸 다 얘기했네.”

“네, 오빠도 갔어야 했는데 가게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못 가서 현재 오빠만 고생시킨다고 안 그래도 걱정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거리낌 없이 이것저것 얘기하는 얼굴은 천진하게까지 보였다. 발랄하고 꾸밈없어 보이는 성격까지도 저와는 180도 다른 희진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금 형 만나러 가는 거야?”

“아,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중간에 도재 오빠 오기로 했어요. 다 아는 사이라서요.”

“그랬구나, 늦지 않게 가야겠네. 재밌게 놀아.”

별말 없는 제가 신경이 쓰였는지 현재가 말을 자연스럽게 끊었다. 그래도 확실히 이도재 여자 친구라 그런지 다른 사람보다는 유한 태도인 것 같았다.

“네, 헉, 안 그래도 늦긴 했었는데 뛰어가야겠다, 암튼 오빠도 데이트 잘하시구요! 언제 이렇게 넷이 만나요.”

언니, 안녕히 가세요!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는 희진은 제가 봐도 귀여웠다. 하얀 테니스 치마를 나풀나풀 흩날리며 횡단보도를 먼저 건너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수연은 가만히 응시했다.

“공부하느라 많이 피곤하지.”

“아냐, 괜찮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현재에 수연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운전하면서도 흘깃흘깃 저를 보는 게 다 티가 났다. 일주일 만에 봐 놓고는 말도 먼저 안 걸고 묻는 말에도 단답형이니 그럴 법했다. 사실 그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오죽하면 현재가 제게 뭐 화난 일 있냐고 넌지시 물어볼 정도였다.

“네가 힘들었지, 펜션 엄청 바쁘다며.”

“아, 급하게 일손이 필요해서 그랬던 거라. 나야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 보고 좋았지.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나마 말을 길게 하니 금세 현재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현재는 웃는 게 어울렸다.

“예전엔 크게 못 느꼈는데 주변 경치가 되게 좋더라. 나중에 너랑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

“아, 꼭 아버지가 하는 데 아니더라도, 여행. 좋잖아.”

차가 잠깐 멈춘 사이 팔을 뻗은 현재가 손을 잡아 왔다. 에어컨 바람에 시원한 내부와는 다르게 저를 잡아 오는 손은 조금 뜨끈했다.

“다 좋은데 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영상 통화도 한번을 수락 안 해 주고.”

약간의 푸념과 함께, 이번 여름 가기 전에 짧게라도 여행 다녀오자며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어렴풋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연은 생각했다. 이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솔직히 슬프다고. 차창 밖 푸르게 물든 신록의 거리도 색이 죽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 수연은 오늘 현재와 이별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늘 받기만 했는데 전화나 문자로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 밥을 먹고 그 후 말할 생각이었다. 놀라고 황당해할 현재의 얼굴을 생각하면 속이 아프게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와는 미래가 없었다.

이도재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관계가 예상외로 흘러가면서, 수연은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현재에게도, 저에게도 못 할 짓이라 결론을 내렸다.

아주 만약에…… 아주 만약에 계속 이렇게 사귄다고 해도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맞았다. 이도재가 있는 한 현재와는 미래가 없으니까. 수연은 거기까지 생각을 뻗은 자신이 내심 놀라웠다. 그만큼 자신도 진지하게 현재를 생각했던 거였다.

또한 수연은 헤어지면 타격을 입을 사람은 자신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현재는 슬퍼하겠지. 제가 처음이라 하고 많이 좋아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현재는 얼마든지 곧 또 새로운 연애를 할 수 있을 거였다.

일단 누가 봐도 완벽한 남자니까. 거기에 저한테 하는 거 보니 사귀고 나면 정말 지극정성으로 잘할 타입이고, 현재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면 정말 예쁘게 사귈 것 같았다. 당장 직전에 만난 희진 같은 애만 봐도 저보다는 백배 천배 나아 보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현재는 첫인상과는 달랐다. 정말 좋은 애였다. 현재가 좋은 남자라는 것을 실감할수록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일상을 방해할 정도로 말이다.

수연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몰랐다. 힘들었다. 부정적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이 관계 역시 실패할 게 뻔했다. 지금에야 현재가 다 제게 맞춰 주지만, 점점 마음이 식어 가는 그를 보자면 괴로울 것 같았다.

수연은 제가 엄마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버림받은 거였다. 유일하게 마음을 준 상대에게도 다친 기억이 있는 그녀는 제게 조건 없는 애정을 퍼붓는 남자를 오히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래전 언젠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주는 방법도 아는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 저 같은 사람은 사랑도 못하냐고 속으로 조소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버림받을 거라면, 제가 먼저 끊는 편이 나았다. 엉킨 매듭을 시간을 들여 다시 잘 푸는 법을 모르는 그녀는 차라리 잘라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게 수연의 방식이었다.

딱히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아 현재와 언젠가 먹으러 갔던 삼계탕을 먹었다. 수연은 현재가 저와 데이트할 때 일부러 학교에서 꽤 떨어진 곳만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안 아파.”

현재는 제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잘 발라진 연한 살을 제 밥 위에 얹어 주기만 했다. 할 말이 없으니 젓가락질만 하는데, 도무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모르겠다. 차라리 전화로 할 걸 그랬나. 저를 걱정하는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이따 있을 헤어짐이 벌써 무서웠다.

“이제 어디 갈까?”

“그냥, 커피나 마시러 가. 올 때 카페 있던데.”

“응, 몸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하고.”

괜히 끌지 말고 헤어지자고 해야지, 취업 준비에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 납득은 못해도, 그간 제 행동으로 보면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았다.

*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연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곳에서 차가운 모카 라테를 먹는데 자꾸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맞은편에 앉아 제주도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현재의 눈빛에서는 뚝뚝 꿀이 떨어지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현재야.”

“응.”

“……나 할 말 있어서.”

“응, 뭔데?”

고개를 슬쩍 기울인 현재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헤어지자, 간단한 말이 왜 이렇게 나오지 않는지. 입술만 달싹이는 수연을 마주 보던 현재의 얼굴도 차츰 심각해지던 찰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왜 안 받아?”

“아, 형인데 괜찮아. 얘기해.”

“받아. 받고 나서 말해도 되니까.”

액정을 흘깃 보고는 끊으려는 눈치기에 받으라 하니, 내키지 않는 투로 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어, 어……. 뭐? 별다를 것 없이 대답하던 현재가 갑자기 수연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음…… 그게. 형이 통화 한번 하고 싶다는데.”

“뭐? 나랑?”

지금 이 상황에서? 수연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사이 현재는 됐다며 전화를 끊으려고 하고 있었다. 수연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줘 봐.”

“어?”

“줘 보라고. 통화하고 싶다고 했다며.”

현재는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수연에게 이내 제 핸드폰을 건넸다. 수연은 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현재 여자 친구분? 말씀 많이 들었어요.

핸드폰을 타고 들려오는 한 톤 높은 목소리는 능글맞음을 넘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수연은 태연히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희진이가 우연히 만났다고 반가워하더라고요. 지금 같이 있는데 마침 얘기 나온 참에 통화하고 싶어져서.

옆에서 아까 본 희진으로 추정되는 뭐라 뭐라 조잘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현재가 누구 사귄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 내가 궁금한 게 많은데. 사실 진작 한번 봤어야 됐는데 시간이 서로 안 맞았잖아요, 그렇죠?

“…….”

―방학 하면 한번 보자고 먼저 말했다고 하던데. 그럼 내일 어때요?

“내일이요?”

―네. 모레부터는 나도 가게 다시 나가야 되고, 당분간은 휴일 없이 할 예정이라 시간이 안 나서.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어요.

저도요! 옆에서 희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식 웃는 듯한 이도재의 숨소리가 들렸다. 귀여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수연이 한숨을 한번 쉬는데, 현재가 굳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줘. 내가 얘기할게.”

“아냐.”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 게, 이도재랑 저는 정말 안 맞는 모양이었다. 좀만 더 늦게 전화했으면 이미 알아서 끝냈을 텐데. 직전 이별의 결심이 무색하게 이도재의 말을 들으니 뭔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또 도발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내일은 일이 있어서 안 되겠다는 말을 막 꺼내려는데.

―나와, 차수연. 우리 할 말 있지 않아?

갑자기 톤이 변한 낮은 목소리에 옅게 소름이 돋았다. 아마 이도재가 자리를 옮긴 모양인지 더는 희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너 나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이런 짓거리 하는 거잖아. 얼굴 보여 줄 테니까 나오라고.

뭐? 미친 거 아닌가. 순간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던 수연은 제 앞의 현재의 얼굴을 보고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무튼 이도재는 저를 들쑤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직전 각오가 무색하게 수연은 대답했다. 알겠으니 시간 장소만 알려 주라고.

*

결국 헤어지자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카페를 나왔다. 할 말이 뭐였냐는 현재의 말에는 그냥 나중에 하겠다며 얼버무렸고 현재도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차에 탔을 때는 아까보다는 안정이 된 상태였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말이 딱 맞았다. 감정 소모가 극심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한 번씩 골이 빠지게 아픈 게 도졌는지, 두통에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결국 수연은 저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현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내일 굳이 안 만나도 돼.”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다. 시트에 깊이 몸을 눕히고 있던 수연은 현재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좁아터진 골목에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차를 댄 현재가 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형이랑 넷이 보는 거. 형은 원래 사람 좋아하고, 만나서 모이는 것도 좋아해. 내 여자 친구라 하니까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있기야 하겠지만. 네가 억지로 가는 건 내가 싫어.”

“……상관없어.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정말?”

“응. 뭐…… 네 형이잖아.”

수연의 말에 현재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했다. 제 말이 진심인지 살펴보려는 눈빛을 가만히 받아 주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몸이 제게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아.’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현재는 적당한 힘으로 어깨를 감싸 수연의 몸을 제게 끌어당겼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잘근잘근 물고 빨던 현재의 혀가 느리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간질이듯 혀뿌리를 빨다 점차 파고드는 혀의 감각이 선연했다. 온몸이 달콤한 설탕으로 가득 졸여지는 듯한 기분에 수연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현재가 가끔 이렇게 느릿하게 키스해 올 때면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거칠게 휩쓸려 버리면 좋을 텐데, 이렇게 제 반응을 확인하듯 섬세한 입맞춤에는 오히려 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흣…….”

귀밑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수연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말랑말랑한 감각을 즐기듯 다분히 느린 손짓과 동시에 혀가 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왔다. 예민한 귀를 만지는 동시에 물컹한 혀가 느리게 입천장을 쓸어내릴 때는 정말로 아찔했다. 이현재는 키스만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곤란했다. 뭐든 금방 배운다고 언젠가 그랬는데,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 녹아내리는 키스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혀와는 다르게,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수연의 손을 현재가 다른 손으로 지그시 깍지를 껴 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부드러웠던 키스는 조금씩 조금씩 진득해져 갔다. 제게 쏟아지는 숨결이 뜨겁고도 달았다. 조금 전 헤어지자고 생각해 놓고 이렇게 입 맞추고 있는 자신이 황당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키스했다.

“……푹 쉬고. 어디 아프면 전화하고, 응?”

입가에 묻은 제 흔적을 다정하게 닦아준 현재가 말했다. 닦아 주는 게 아니라 다시 빨았다는 게 맞긴 하지만. 그러고도 아쉬운 듯 제 얼굴 곳곳에 쪽쪽 입을 맞추는 남자에게 수연은 물었다.

“넌 이제 뭐 하려고?”

“응, 할 것도 없고 집 가긴 해야 하는데…….”

하긴, 일주일간 일하고 왔으니 피곤할 거였다. 그런데 묘하게 말끝을 늘이는 게 걸렸다. 수연은 다시 물었다.

“근데 왜?”

“지금 희진이랑 형이랑 같이 있을 거여서. 장 봐서 저녁에 뭐 만들어 먹으려고 하나 봐.”

“아…….”

집까지 데려오는 사이인가? 하긴, 사귀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형은 같이 와서 먹자는데 나도 눈치가 있으니까.”

그냥 간만에 애들이나 만날까, 덧붙이며 현재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저랑 계속 같이 있자고 하면 되는데,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제 눈치를 보는 티가 났다. 뭔가 갑갑해지는 마음에 수연은 불쑥 말해 버렸다.

“그럼 너도 우리 집 오면 되지. 우리도 뭐 만들어 먹자.”

“어? 진짜?”

“응. 근데 집에 재료가 없어서 마트 가긴 해야 할 것 같아.”

“알겠어. 음, 그럼 지금 갈까?”

고작 그 한마디에 기쁜 티를 숨기지 못하는 남자를 보는데 결국 설핏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현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알아?”

“뭘?”

“너 오늘 처음으로 웃었어.”

“…….”

“나 네가 웃는 거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수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변화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 가끔 웃을 때면 현재는 제가 생각해도 낯간지러울 정도로 저를 빤히 보고는 했다.

“너 웃으면 진짜 심장이 다 뻐근해. 너무 귀엽고 예쁘고. 애기 같아.”

제 왼쪽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며 하는 현재의 말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애기라니…… 충격적인 표현이었다. 그만해, 수연이 타박했으나 현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자주 웃어 줘. 응?”

“…….”

“내가 웃을 일 많이 만들어 줄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더 예쁘게 웃고 있다는 건 모르는 걸까? 수연이 가만히 현재를 바라보자 현재가 다시 입을 맞췄다. 예뻐 죽겠다며 입술을 댄 채 낮게 속삭이는데,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렸다. 지금 제 표정은 아마 상당히 이상할 거였다. 수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만하고 빨리 출발해.”

“하하, 알았어.”

입술에도 나오는 말은 안 예쁜 말뿐인데 현재는 또 귀엽다며 웃었다. 이내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수연은 정말 사람은 한 치 앞을 못 보는 거구나 생각했다.

“희진이가 성격이 좋아서, 같이 있으면 불편하진 않을 거야. 걔도 형처럼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내가 여자 친구 있다는 거 알고부터는 걔도 계속 궁금하다고 했었어.”

근처 대형 마트에 가는 길에 현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근히 내일 만남을 기대하는 티가 났다.

“……둘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우리보다 적지. 한 달 좀 넘었나?”

“그거밖에 안 됐어?”

“응.”

말하는 거로는 꽤 오래된 사이 같았는데. 수연은 눈을 깜빡이다 다시 물었다.

“그래? 둘이 어떻게 만난 거래?”

“희진이 친구가 우리 학교라, 형 가게에서 술 먹다가 계산해 주는 형 보고 반해서 계속 왔었어. 봄부터 그랬는데 지난달부터는 사귀고 있더라.”

“그…… 형이 되게 귀여운 타입 좋아하나 봐.”

“음, 꼭 그렇지는 않아. 연하 만난 적도 이번이 처음이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수연에게, 현재는 제 형이 주로 쌀쌀맞은 느낌의 동갑이나 연상을 만났으며 최장 6개월을 넘긴 적이 없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도재는 훤칠한 외모와 붙임성 좋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어딜 가나 인기가 좋았으나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 타입이었다. 좋게 말하면 깔끔했고 나쁘게 말하면 가벼웠다. 처음에는 그런 그에게 반했던 여자들도 애인보다 친구나 일, 특히 동생을 우선시하고 몸은 섞지만 딱히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지 않는 그에게 금세 지치곤 했다.

“가게는 모레부터 다시 여나 봐?”

“응, 마무리되었는데 내일까지는 쉬고 일요일부터 연대.”

아까 들은 이도재의 말을 떠올리며 물으니 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안 쉰다며.”

“응, 2주에 한 번씩 쉬었었는데 방학 때는 쭉 할 생각인가 봐.”

잘 대답해 주던 현재가 갑자기 눈을 찡그렸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너무 형 얘기만 하는 거 아냐?”

“어?”

“나한테도 그렇게 궁금한 것 좀 많이 물어봐. 응?”

애교 부리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안 어울릴 듯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이따 밥 먹고 진실 게임이라도 해야겠어. 그러면 좀 물어 보려나.”

“뭐야, 그게. 둘이서.”

“우리 둘이니까 재밌는 거지.”

뭘 생각하는지 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진짜 가끔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수연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초록색이었다.

*

“……어쩐지 배신감 느껴지는데.”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노란색 카트 안을 보며 현재가 중얼거렸다. 수연은 모르는 척 뭐가, 말을 붙였다.

“난 네가 재료를 뭘 사야 할 줄도 모를 줄 알았거든.”

“날 너무 과소평가한 거 아니야?”

“아니, 요리를 잘 하면서 안 해 먹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컵라면이나 과자 같은 거나 있지,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고 기본적인 조미료도 없는데 어떻게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아.”

지난번 집에 왔을 때 참 꼼꼼히도 보고 간 모양이었다.

“너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카트를 밀며 현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가다가 싱싱해 보이는 오이를 담아 카트에 마저 넣었다. 날이 더우니 간단하게 막국수와 바삭바삭한 감자전을 해 먹기로 했다. 썩은 부분이 없나 꼼꼼하지만 빠르게 확인하며 야무지게 감자를 고를 때는 현재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나 진짜 속았어.

“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와, 나 오늘 진짜 호강하는 날이네.”

카트에 올려진 수연의 한 손 위에 마디 하나는 큰 손이 은근하게 겹쳐졌다. 나란히 카트를 밀고 가자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어쨌든 제가 제집에서 요리를 해 주는 거고, 현재에게 받은 것도 많으니 오늘은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할 생각이었다. 수연은 혼자 먹겠다고 요리를 하는 게 싫어서 안 먹는 거지,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엄마의 밥을 챙기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좀 더 어릴 때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도 그렇게 싫다고 난리를 치던 엄마였지만, 수연이 언젠가 만든 김치볶음밥을 상당히 맛있게 먹은 후로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녀가 차린 밥상을 받아 들었다.

“근데 오랜만이라 좀 자신은 없어. 맛없어도 그냥 먹어 줘.”

“네가 해 주는 거면 뭐든 좋아.”

말이 끝나자마자 현재가 곧바로 덧붙였다. 설익은 감자도 씹어 먹을 기세였다. 귀여워, 수연은 피식 웃었다.

점점 카트 안 내용물이 늘어났다. 중간에 맥주 몇 캔을 사긴 했지만 현재가 목 축일 정도만 사자고 해서 많이는 사지 않았다. 스낵 코너를 지나치지 못하고 이것저것 집어넣는 수연을 탐탁잖게 보던 현재가 슬그머니 초콜릿과 젤리 몇 개를 빼서 다시 매대에 돌려놨지만, 현재에게 또 뭐 해 줄 게 없나 생각하면서 한발 앞서 걷던 수연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온 지 거의 한 시간 된 거 알아?”

“그래? 몰랐네.”

시간을 확인한 수연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마트에서 오래 있었다. 잡화 코너에서 현재는 어차피 하나 사려고 했다며 편하게 입을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샀다. 하긴 지금 차림으로 집에 있기에는 좀 불편해 보이긴 했다.

자고 가도 되냐고 능청스럽게 묻는 말에 수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는 않았지만, 면도기며 이것저것 담는 현재를 말리지는 않았다. 희진인가 그 애도 이도재 집에서 자고 갈까. 문득 떠오르는 장면에 부정한 생각을 한 것 같아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계산대로 가는데 와중에 또 뭔가를 지나치지 못한 현재가 말을 걸어왔다.

“이거 너 닮았다.”

그치, 웃음소리는 무해했지만 수연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가? 민트색 앞치마에 프린트된 하얀 고양이는 작고 귀여웠지만 어쩐지 앙칼져 보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앞치마를 카트에 담는 게 아닌가.

“뭐야, 안 사.”

곧바로 빼려 했지만 현재에 의해 저지당했다.

“너 닮았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가. 그러고 보니 집에 앞치마 없던 것 같던데 내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너는 내가 주는 거 다 안 받으려고 하잖아.”

방학 전 현재가 곧 있을 어머니 생신 선물을 산다고 백화점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은근슬쩍 옷이며 고가의 액세서리 등을 제게도 권유하는 현재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수연이었다. 솔직히 어머니 생신이 핑계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현재는 어머니 드릴 것은 뒷전이고 수연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만 열심히 골랐던 터였다.

이미 여러모로 받고 있다면 할 말은 없지만 대놓고 그런 비싼 것을 받을 수 없었다. 저는 현재에게 똑같이 돌려줄 능력이 되지 않을뿐더러, 현재가 제게 해 주는 것들은 지금도 충분히 과했다.

“그런 선물 필요 없어.”

“이거 입고 요리하면 진짜 귀엽겠다. 사진 찍어도 되지.”

“누구 맘대로?”

눈을 흘겼지만 현재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수연의 어깨에 팔을 휘감았다. 못 이긴 척 다시 걸음을 옮기며 수연은 힐긋 앞치마 속 고양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현재 눈에는 제가 이렇게 비치나 싶었다.

*

집에 가서 손만 씻은 후 수연은 곧바로 요리 모드에 들어갔다.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정리하던 현재가 불쑥 앞치마를 입히고 허리에 리본까지 매 주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대놓고 눈앞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도 알았지만 무시했다. 이런 게 취향인가 보지, 하면서.

간단한 요리기는 했지만 시간도 꽤 흘러 있었고 현재가 있으니 마음이 급했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현재가 재료 손질 등 재빠르게 보조한 덕에 제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맛있다고 어찌나 말을 하는지 솔직히 흐뭇했다. 이렇게 반응이 좋아서야, 저 얼굴 보려고 매번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와, 정말 잘 먹었어.”

그릇을 싹 비운 현재가 엄지를 세웠다. 평소보다 많이 먹은 건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혼자 먹을 때와 같이 먹을 때는 느낌이 달랐다. 시원하고 배가 부르니 노곤해졌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도 있을 거였다. 벽에 등을 기대는데 갑자기 현재가 벌떡 일어나더니 먹은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버려 둬. 이따 하게.”

“아냐,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내가 얼른 할게. 쉬고 있어.”

만류했으나 현재는 바지런히 움직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수연이 일어나려 하자 번쩍 들어 저를 아예 매트 위에 올려놓았다. 설거지를 하는 널찍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찌나 꼼꼼한지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 위에는 물 한 방울 없었다.

“……집에서도 이렇게 해?”

“응? 응. 그냥 내가 깔끔한 걸 좋아해서. 집안일 하는 것도 좋아해. 깔끔한 거 보면 기분 좋아지잖아, 요리도 워낙 좋아해서 하는 거라.”

그렇구나,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빠지는 게 없는 남자랑 사귀자니 가끔 허탈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 없는 법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무장갑에서 손을 빼던 현재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같이 살면 되게 편할 거 같지 않아?”

갑자기? 수연은 커다란 눈만 깜빡이자 다가온 현재가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팔을 벌리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결혼해도 손에 물 한 방울 진짜 안 묻히게 해 줄 수 있어.”

너무 옛날 멘트인가? 덧붙인 현재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뭔가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서 수연도 덧붙여 주었다.

“응, 나중에 너랑 결혼할 사람은 되게 좋을 것 같아.”

진심으로 한 말인데 갑자기 현재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음? 수연도 멈칫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의아해진 수연은 천천히 현재에게서 몸을 뗐다. 마주한 얼굴은 어쩐지 서운해 보였다. 왜 그러냐고 묻기 전, 모양 좋은 입술이 먼저 떼어졌다.

“……꼭 남 얘기 하듯 하네.”

아……. 잠시 멍해져 있던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설마 그게 나일 리는 없잖아.”

“뭐?”

현재가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상처받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순간 가슴이 지끈했지만, 현재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렇잖아. 우리가 결혼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그게 확률의 문제야?”

현재의 표정이 굳어 갔다.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에 수연은 내심 놀랐다. 사실 확률을 따질 것도 없는 0에 가까운 명제지만 그래도 나름 돌려 말한 건데. 어쨌든 사귀면서 현재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한 한편 갑자기 억울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말 만약 저도 현재를 순수하게 좋아해서 사귀는 거라 쳐도 꼭 결혼까지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세상 모든 연인들이 처음 좋은 감정으로만 쭉 이어진다면 이별을 다룬 그 수많은 창작물들이 쏟아지는 일은 없을 거였다. 수연은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나랑 설마…… 결혼 생각해?”

“…….”

“정말?”

“왜. 그러면 안 돼?”

당혹스럽다는 듯 흔들리는 수연의 눈빛에 현재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렸다. 얼핏 화가 난 듯하면서도 상처받은 눈에 수연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생각은 할 수 있잖아. 꼭 기간의 문제는 아니니까. 10년씩 사귀면서도 결혼 생각 없다는 커플도 있고, 일주일 만나고 혼인 신고 해 버리는 커플도 있지.”

너무 극단적인 예만 드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데 제 머리를 쓸어 넘긴 현재가 한숨을 쉬었다. 기분 나쁜 것을 티 낸다기보다는, 어쩐지 측은함을 자아내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결혼보다는, 그냥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봤어. 옆에 두고 계속 보고 싶으니까.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기도 하고.”

“…….”

“물론 너는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할 것 같긴 했는데. 막상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처럼 얘기하니까…….”

입이 마르는 듯 입술을 혀로 슬쩍 훔친 현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화났어?”

“아니, 전혀.”

“화난 것 같은데, 나한테.”

“진짜 아니야.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거지.”

딱딱한 말투가 제가 알던 현재가 아닌 것 같았다. 약속을 갑자기 펑크내거나, 읽고도 메시지에 답을 안 한 다던가 등등 화낼 포인트는 평소 곳곳에 널렸는데도 그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현재가 어떤 핀트에서 마음이 상했는지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달래 주기도 애매했다. 수연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분위기에 취해서라도 성급하게 내뱉고 싶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찰나, 갑자기 몸을 일으킨 현재가 바지 주머니에서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어디 가게?”

“응, 요 앞 편의점에서 맥주 좀 사 오려고. 조금만 더 먹게.”

딱 두 캔 사 온 맥주는 이미 다 마신 터였다.

“옷 갈아입고 편하게 있어. 천천히 갔다 올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현재는 한번 싱긋 웃고는 현관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도 잠시 가만히 있던 수연은 욕실로 향했다. 나갔다 오면 곧바로 샤워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찝찝하긴 했던 터였다. 갑자기 불쑥 들어올 리는 없지만 문을 잠그고 샤워를 마쳤는데도 현재는 온 기미가 없었다. 화나서 집 간 건 아니겠지, 하긴 핸드폰도 놓고 갔으니 그럴 리는 없었다.

‘벌써 다 썼네.’

샤워를 마치고 로션을 바르려는데 동이 나 있었다. 새것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는데, 작은 찬장 안에 가득 늘어선 로션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이 그것만 쓴다고 말한 지 며칠 안 되어 현재가 한 박스 사다 준 것이었다. 혹시 다 못 쓰면 나중에 제가 쓴다며 웃던 얼굴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수연은 뜨끈한 김이 퍼지는 욕실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

샤워를 마친 수연이 박스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을 때 현재가 돌아왔다. 편의점은 코앞이니 꽤 시간이 소요된 셈이었다.

“별로 안 샀네?”

“응, 그냥 한두 캔만 더 마시게.”

편의점 봉투 안에서 맥주를 꺼내는 현재는 여느 때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 방 안이 추우면 감기 걸린다고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는 세심함이나, 수연이 넌 안 마시는 게 좋겠다고 단속하는 것도 여전했다.

“내일 형이랑 만나는 건 저녁이 좋겠지? 아무래도 점심은 마음이 급하니까.”

“응.”

별다를 거 없이 말을 꺼내는 현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하게 따가운 눈빛을 모른 척 맥주 캔을 땄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에 속은 시원했지만 마음은 당연히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 한마디만 딱 해 놓고 현재는 말없이 술만 마셨으니까. 원래라면 이것저것 먼저 말을 걸어 올 텐데.

“현재야.”

“응?”

“화났어?”

“진짜 아니야.”

캔을 내려놓으며 현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백을 호소하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화나도 나 자신한테 난 거지, 절대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래…….”

그렇다 치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 둘 다 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현재 앞에서 수연은 커다란 눈동자만 깜빡였다. 그러다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입을 열었다.

“우리 그거 할까? 진실 게임?”

마트에서 장난식으로 말하던 현재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지금?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던 현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응, 그럼 지금 하자. 어떻게 하면 되지?”

어쨌든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던 수연은 냉큼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현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이 한 번씩 질문 주고받는 거로. 대답은 꼭 진실을 말해야 하고 말하기 곤란할 때는 벌칙 받는 거로 하자.”

고저 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 같았다. 수연은 재차 물었다.

“벌칙은 벌주? 술 별로 안 남긴 했는데 내가 사 올까?”

“아니. 술은 그만.”

“그럼?”

설마 꿀밤 때리기? 아님 손목 맞기? 수연이 머릿속에서 얄팍한 상상을 동원하는데 현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가락으로 툭툭 제 입술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뽀뽀하라고?”

“뽀뽀든 키스든. 대답 못 한 미안함을 담아서 하면 돼.”

“……알았어.”

아무튼 얘도 은근히 뻔뻔한 면이 있었다. 화나도 할 건 다 한다 이거지,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현재가 덧붙였다.

“참, 거짓말로 대답하면 2학기 시험은 되게 못 볼 거야. 어쩌다 쓴 한 줄이 교수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든지, 나처럼 범위를 착각했다든지 하는 이유로…….”

“…….”

“원래 사람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거든.”

“그걸 이런 데다 써?”

딱히 미신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적에 목매는 수연으로는 상당히 찝찝했다.

‘하긴, 거짓말을 안 하면 되지.’

솔직히 뽀뽀도 먼저 하는 게 낯간지러워서 그렇지 싫은 건 아니었다. 수연은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현재가 먼저 하라고 해서 질문은 수연이 먼저였다.

“자, 솔직히 말해. 너 진짜 화났지?”

“음, 우리 수연이가 은근 집요하네.”

먹다 마신 맥주 캔을 두고 맞은편에 앉은 현재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답은 산뜻했다.

“아니.”

“……거짓말하면 시험 못 보는 거 너도 해당이야, 알지?”

“응. 근데 화 안 난 걸 어떡해. 뭐, 좀 서운하기는 해도.”

현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자연스럽게 쓸어 넘겼다. 딱히 매만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마른 머리도 소년같이 잘 어울렸다. 흐음. 그게 비슷한 맥락 아닌가. 좀 찝찝했지만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번에는 현재의 차례였다. 뭘 물어볼까 좀 긴장하고 있는데…….

“최윤성이 너한테 고백한 적 있어?”

“어?”

갑자기 확 들어온 질문에 수연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우리 과 최윤성?”

“응.”

저만 보면 어쩔 줄 모르는 게 티가 나는 윤성의 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위로 언젠가 저와 윤성이 같이 있는 걸 보고 굳어 있던 현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수연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걔가 너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

“……뭐야, 질문 두 개야.”

“뭐 어때, 우리 과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던데.”

자, 네 차례야. 현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번 눈을 흘긴 수연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누구 사귄 거 처음이라는 거, 진짜야?”

“응.”

“…….”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다음에는 좀 타격감이 있을 질문을 해야지, 미리 고민하는데 현재가 쓰게 웃었다.

“어째 나를 다 못 믿는 기분이네. 질문들이 다.”

“그건 아니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연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현재가 또 기분이 안 좋아지면 곤란했다. 다른 사람 기분을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닌데, 그래도 현재가 저 때문에 시무룩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너한테 대시하는 여자들 많을 거 아니야. 예전에도 그, 선밴가 너한테 고백했는데 찼다며.”

“어떻게 알았어?”

“응? 아니, 그냥 건너 건너 들었어. 암튼 그 선배도 내가 봤을 때 괜찮은 것 같던데.”

“…….”

“아니, 이런 얘길 하려던 게 아니라.”

갑자기 갈증이 났다. 수연은 남은 맥주를 단번에 비웠다.

“못 믿고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네가 처음부터 뭔가 능숙하다고 느꼈어. 나 챙겨 주는 것만 봐도 되게 다정하고 스킨십도 자연스럽고. 연애 많이 해 본 사람 같잖아. 나는 처음이라 그런가 다 어색한데 너는…….”

“잠깐만. 처음이라고?”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재가 말을 잘랐다. 응? 수연이 눈만 깜박이자 현재가 다시 물었다.

“나 만나기 전에 만난 남자 없어?”

“없어.”

“……왜?”

“뭐? 왜라니.”

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물론 대놓고 현재처럼 나도 네가 첫 연애 상대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현재가 어색하게 답했다.

“아니,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아무도 안 만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너는 그런 멘트가 능숙해 보인다는 거야.”

수연은 괜히 눈앞의 맥주 캔에만 시선을 주었다. 외모로 관심을 받은 적은 많지만 진지하게 고백을 받은 적은 많지 않았다. 물론 받더라도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냉정하게 잘라 내었다. 그러고도 달라붙는다 싶으면 수연의 기준 조금 신랄한 말로 떼어 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욕을 들어먹은 적도 꽤 있었다.

“그럼 손잡은 것도 내가 처음이겠네.”

“그래.”

“데이트한 사람도? 이렇게 집에 데려온 사람도?”

“어.”

“키스도 내가 처음…….”

“그렇다니까……!”

홱 고개를 들던 수연은 멈칫했다. 눈앞의 남자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취할 리도 없는데. 약간은 당황스러운 듯하면서도 좋은 것을 숨기지 못하는 그 모습에 또 안에서 뭔가가 비틀렸다.

“왜, 네가 다 처음이라니까 좀 더 좋아지기라도 해?”

“그런 게 아닌 거 알잖아.”

현재가 답답하다는 듯한 손짓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이 마주쳤다.

“네가 전에 누굴 만났건, 몇십 명이든 몇백 명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네 옆에 있는 건 나잖아.”

아무튼 현재는 예를 들 때 좀 극단적인 면이 있었다. 수연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

“그걸로 더 좋아지고, 덜 좋아지고 하는 건 아냐. 단지……그냥, 좀 더 책임감이 생긴달까. 더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지금도 충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해 주고 있으니까 그러지 마.”

“뭘 잘해 준다는 건지, 진짜 난 모르겠는데.”

“아침마다 알람 전화 해 주고, 매일 밥 먹었냐고 묻고 챙겨 주고. 좀만 표정 안 좋아도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 내가 기분대로 말하고 해도 화 한 번 안 냈잖아.”

“그게 잘해 주는 거라고? 당연한 거잖아. 좋아하는데.”

“…….”

“넌 내가 되게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난 내가 해 주고 싶은 거 반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뭐? 뭘 더 하고 싶은데?”

여기서 더 챙겨 준다고? 수연이 눈을 치켜뜨자 현재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가 나올까 두려워 수연은 게임이나 계속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몇 번의 질문이 더 오갔다. 언제부터 저를 좋아했냐는 질문에는 예전에 수연이 자취방 근처 카페에서 알바하던 당시 들렀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와 수연은 충격을 받았다. 정작 수연은 현재가 거길 온 것도 기억 못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카운터는 다른 애가 맡고 주로 음료 제조만 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몰랐다는 게 저도 이해가 안 갔다.

뒤이어 현재가 아까 카페에서 하려던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는 결국 뽀뽀를 해야만 했다. 헤어지자 하려 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몇 번을 주고받아 다시 수연의 차례였다. 분명 처음에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센 거 뭐 없나, 고민하던 수연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랑 자고 싶어?”

“…….”

내내 곧바로 대답하며 여유 있는 얼굴을 유지하던 현재의 표정이 미세하게 어그러졌다. 그렇다고 말하면 될 텐데, 그는 의외로 침묵했다. 이내 천천히 허리를 감싸 오는 팔이 느껴졌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가 수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촉 하고 아주 약간, 젖은 소리가 났다. 그대로 떨어질 줄 알았던 숨결이 다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마치 봄날 길가에 핀 강아지풀이 살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깃털같이 가벼운 입맞춤이 몇 번 더 이어지는 동안 현재의 손은 수연이 입고 있는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맨살을 만지고 있었다. 시원한 방 안과는 다르게 손끝엔 열기가 배어 있었다. 허리를 지분대는 손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와락 움켜쥘 것 같았다. 간지러우면서도 은근히 애타는 기분에 수연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현재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살짝 까진, 도톰하고 말랑한 아랫입술을 힘주어 빨아들인 현재가 기어이 혀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입 안을 한번 혀로 질척하게 휘감은 현재가 수연의 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던 수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야에 알 수 없는 표정의 남자가 담겼다.

“왜 깨물어…….”

살살 깨물었어도 깨문 건 깨문 거였다. 항의하는 수연에게 현재는 말없이 그저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수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어?”

“음, 네가 답을 알면서 물어보는 것 같아서 그냥 뽀뽀했는데.”

씩 웃는 낯에 할 말이 없었다.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네 차례야. 마지막인 거 알지?”

직전 이것만 하고 자자고 말을 해 놓은 터였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지만, 현재랑 지금 놀면서 시간을 까먹은 만큼 열심히 해야 했다. 거기다 내일 저녁도 이도재 커플이랑 만나려면 시간을 많이 까먹을 테니까. 수연의 말에 현재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음, 좀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뭔데?”

지금껏 기다렸다는 듯 이것저것 묻던 현재가 머뭇거리자 불안해졌다. 뭘 물어보려고 그러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돼.”

“알았어.”

똑바로 눈을 맞춰 오는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수연이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너 나 정말 좋아해?”

“…….”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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