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

4

수연아.

수연아…… 일어나야지.

단잠에 곤히 빠져 있는데 자꾸 누가 저를 불렀다. 뭐야,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던 수연은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

시야에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그득 담겼다.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다, 왔어?”

“응. 너무 잘 자서 깨우기 미안하긴 했는데…….”

말을 흐리는 현재를 멍하니 바라보던 수연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반이 걸릴 거라고 했는데 세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아무리 차가 밀린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 제가 정말 많이 잔 거였다.

“바로 깨우지. 언제 도착했어?”

“시내 빠져나가니까 그렇게 안 밀려서. 예정대로 왔어.”

언제 봐도 참 솔직한 답이 돌아왔다. 수연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넘기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나 자는 동안 기다린 거야?”

“응. 근데 지금쯤은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진짜 너도 참. 눈빛으로 무언의 말을 전한 수연은 얼른 내리자며 제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널찍한 주차장은 벌써 차들로 만석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광활한 터를 휘휘 둘러보는데 뒤따라 내린 현재가 알려 주었다.

“수목원이야. 지금 오면 딱 절정이라고 해서.”

“그래?”

수목원이라. 정말 건전하고 풋풋한 데이트라고 속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현재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가 보였다.

“그건 뭐야?”

“일단 뭐부터 먹고 움직여야지.”

“여기서?”

“어, 안에 간단하게 도시락 먹을 수 있는 곳 있더라고. 아, 이건 만든 거 아니고 오다 산 거.”

도시락을 말하는 순간 미묘해지는 낯에 현재가 얼른 덧붙였다. 아, 진짜. 수연은 최대한 웃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네가 너무 다 준비하는 것 같은데.”

“어?”

“장소도 네가 고르고, 운전도 네가 하고. 밥도 다 사면 좀 그렇잖아.”

“…….”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

“알았어.”

씩 웃은 현재가 수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매표소까지 걸어가는데, 자꾸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제 어깨를 감싼 단단한 팔이 신경 쓰였다.

‘이거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두 시간 푹 잤더니 몸이 한결 개운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괜히 들뜨는 기분을 자제하려 노력하며 수연은 저와 보폭을 맞추는 현재를 따라 걸었다.

팸플릿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식사 장소라고 표시되어 있는 공간이 나왔다. 일반 공원을 연상시키는 꽤 널찍한 공간은 커다란 나무 아래 나무 벤치와 테이블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커플이나 가족들이 꽤 많이 앉아 있었다. 현재와 수연 역시 그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너 배고프겠다.”

종이봉투 안에서 포장된 샌드위치를 제게 먼저 건네주는 현재에게 수연이 멋쩍게 말을 건넸다. 저야 자느라 그랬지만 현재는 3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 셈이었다.

“아냐, 나도 아침 평소보다 늦게 먹어서. 원래 먼저 먹고 학교 가는데 오늘은 형이랑 같이 먹었거든.”

“아…… 그랬구나.”

“응, 형은 점심쯤 일어나거든. 아무래도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니까.”

그렇구나, 기계적으로 대답하는데 괜히 찔렸다. 수연은 말없이 손안에 들린 큼직한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먹을 만해? 너 자고 있어서 내가 대충 골라서 사 오긴 했는데.”

“어, 맛있어.”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바깥에 나와서 먹어서 그런가 또 잘만 들어갔다. 둘이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무슨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나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학교에서 밥 먹을 때는 괜히 다른 사람 눈치도 보여 얘기하는 주제도 시험이나 과제 위주였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좀 더 편한 일상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늦은 점심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현재가 물었다.

“수연이 넌 본가가 어디야?”

“멀어. 지방이라.”

“부모님 다 거기 계시고?”

“……응.”

거짓말을 하는 게 좀 찔리긴 했지만 현재에게 이것저것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호구 조사하듯 형제는 있느냐, 부모님은 자주 오시냐 등등 묻는 입을 막으려 수연이 질문했다.

“너는? 언제부터 형이랑 독립해서 살기 시작한 거야? 대학 들어오면서?”

“아니, 부모님 이혼하시고부터. 지금 아버지는 제주도에 계시고 어머니는 미국에 계시거든.”

“…….”

“우리 둘만 온전히 살게 된 건 고등학생 때부터야.”

“고등학생? 그렇게 일찍?”

“응, 정확히는 열여덟 살 겨울 때부터.”

이도재의 전학은 열일곱이었다. 그럼 그때도 그런 이유로 다시 전학을 간 거였을까? 그리고 1년 만에 동생과 둘만 살게 되고?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 얘기를 제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현재가 수연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대충 넘겨도 되는 얘기인데. 괜히 미안해진 수연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 왜 근데 계속 형이라고 해? 쌍둥이라도 그렇게 꼬박꼬박 안 하잖아.”

예전 술자리에서 다미가 같은 것을 물었던 듯도 한데, 그때는 딱히 관심이 없어 흘려들었더니 내내 궁금했던 것이었다. 수연의 물음에 현재가 곧바로 답했다.

“아, 정말 그건 습관이야.”

정도의 차이일 뿐 브라더 콤플렉스는 이도재에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웃음기가 빠졌던 날렵한 얼굴이 형이라는 말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다 바쁘셔서, 할아버지가 우릴 거의 키워 주다시피 하셨어. 좋은 분이신데 엄하셔서 형 동생 구분을 확실히 시키셨거든. 쌍둥이라도 호칭은 정확히 해야 한다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꽤 오래 습관이 되다 보니까 나도 그게 편해.”

“형이 너를 되게 아끼는 것 같던데.”

“응, 진짜 서로 의지가 되는 친구고 가족이고. 그래.”

하긴, 그러니까 제가 이런 짓도 하고 있는 거였다. 갑자기 현실감이 밀려온 수연은 얼른 들어가자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은 것을 정리하고 당연한 듯 제 손을 잡아 오는 현재와 함께, 색색의 꽃들이 저를 반겨 주는 안으로 들어갔다.

*

수목원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더 컸다. 참나무 숲길과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는데 선명한 푸르름을 직접 보니 사진이나 책 속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절정일 때 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여기저기서 만개한 꽃들에 어딜 봐도 경치가 근사했다.

온실 속도 들어가 보고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호숫가도 거닐며 한참 꽃구경을 했다. 6시까지만 문을 열어 구경할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 종류가 더 많았는데, 수연이 스치듯 이게 뭐지, 하는 말에도 현재는 표지판을 보거나 직접 핸드폰으로 검색까지 해 가며 일일이 다 말해 주었다.

‘어차피 다 까먹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수연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현재의 손을 잡고 따라 걸었다. 가족 단위도 많았지만 확실히 커플들이 많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거나 팔짱을 꼭 끼고 다니는 다정한 모습을 보며 수연은 현재와 저도 그렇게 보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날이 진짜 좋다.”

“그니까.”

감탄하는 현재의 말에 수연은 동조하며 문득 위를 올려다봤다. 높고 푸른 하늘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좋다, 예쁘다란 말을 계속 달고 다녔던 것 같다. 과장 좀 보태서 1년 치 할 좋다는 말을 다 한 느낌이었다. 피곤해도 재밌는 척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몇 시간 전 자신이 다 무색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현재와 함께 바깥바람을 쐬는 지금이 순수하게 정말 즐겁고 재밌었다. 묘하게 들뜨는 기분과 어딜 봐도 아름다운 풍경. 어느 인공적인 향과도 댈 수 없는, 코끝을 스치는 진한 꽃과 풀 향기와 누구 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는 그림 속 들어온 기분이 생경하면서도 괜히 좀 설렜다.

“사진 찍을까? 여기 너무 예쁜데.”

나무다리를 건너니 파란 히아신스가 잔뜩 피어 있었다. 먼저 한번 찍어 준다며 앞 저를 앞에 세우는 현재를 마주 보다 수연은 문득 제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만 여기서 제일 칙칙하게 입고 온 듯했다. 사실 수연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찍을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찍어야지.’

수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포즈까지 알려 주며 몇 장을 연달아 찍던 현재가 수연에게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느새 셀카 모드로 전환된 화면에 저와 현재의 얼굴이 담겼다. 제게 얼굴을 붙이며 싱긋 웃는 남자 옆에서, 수연은 최선을 다해 자연스럽게 웃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문득 시계를 확인한 현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제는 슬슬 입구 쪽으로 돌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같이도 찍고, 또 걷다가 수연이 현재를 찍어 주기도 하면서 가는 길에 갑자기 사진을 엄청나게 찍었다.

그렇게 한바탕 사진을 찍고 나서 결과물을 확인했다.

“누가 꽃인지 모르겠네.”

“…….”

수연의 독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현재는 수연이 경악할 만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진심 같아 보여서 더 문제였다. 수연은 말없이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현재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찍은 사진은 얼굴을 거의 맞대고 둘이 같이 찍은 거였다. 으음, 현재가 만족스럽다는 소리를 냈다.

“잘 나왔다.”

“그러게.”

“이거 메신저 배경 화면으로 하고 싶은데.”

“…….”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힐긋 현재를 올려다봤다. 현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냥, 말만 그렇다고. 안 해.”

“……꽃 사진 올려. 예쁜 거 많이 찍었잖아.”

“그래야겠다.”

현재의 말에 수연은 늘 아무 사진 하나 걸려 있지 않았던 제 메신저 사진을 오늘 찍은 꽃나무로 하려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오늘의 추억을 저만의 소소하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려 했는데, 현재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던 찰나, 옆에서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그럼 우리 언제 밝힐 수 있어?”

“사귀는 거?”

“어, 난 솔직히 지금도 티가 많이 난다고 생각하는데…….”

수연의 의견을 묻는 듯한 표정으로 현재가 말을 흐렸다. 할 말이 없어진 수연은 침묵했다. 하긴 티가 나긴 날 거였다. 현재야 그렇다 쳐도 과 사람들과 교류도 없고 특히 남자 동기나 선후배와는 말도 거의 안 하는 제가 현재랑 최근 가깝게 다녔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좋다는 티를 저렇게 내는 현재인데 말이다.

사실 안 그래도 오늘 그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계획이긴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수연은 저처럼 들떠 보이는 남자의 기분을 지금은 망치고 싶지 않았다. 생일이라고까지 하고.

그 얘긴 좀 이따 하자고 말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수연의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한 발짝 늦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현지였다.

―수연아! 어디?

늘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나 잠깐 밖인데.”

―왜, 편의점이라도 갔어?

하긴, 자다가도 일어날 시간이긴 하다며 현지가 웃었다. 몇 시간 전, 시험 들어가기 직전에 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현지가 으레 하는 말처럼 곧 한번 또 얼굴 보러 가겠다는 말에 그러라고 답했고. 현지는 못해도 계절에 한 번씩은 수연의 원룸을 찾았는데,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제 언니를 보러 오는 김에 들르는 거였다.

“아니, 그냥.”

말을 흐리는데 현지가 갑자기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나 지금 너한테 가려고! 지금 터미널이야. 완전 깜짝이지?

“뭐?”

놀라 저절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핸드폰 너머 현지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언니 안 보고 너만 보고 내일 내려 갈 거야! 요새 우리 언니 남친 생겼다고 나 신경도 안 쓰는 거 완전 짜증 나. 그 남자가 글쎄 또……어휴, 그건 이따 얘기해 줄게. 암튼 나 가도 되지?

“아니…… 그게.”

―왜? 안 돼? 나 지금 다시 집 가?

히잉, 이미 집 나왔는뎅. 덧붙이는 애교 섞인 말투에 수연은 난감해졌다.

사실 막무가내라고도 할 수 없는 게, 현지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주말에 와서 하루 자고 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 주로 시험이 끝난 때나 방학 때였는데,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다 잠드는 일이 팍팍한 일상에서 가끔의 즐거움과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딱히 친구라고 잘해 주는 것도 없는데 현지는 예전부터 먼저 제게 다가와 줬던 유일한 친구였다. 수연은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야, 와. 그럼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그럴 줄 알고 이미 표도 예약해 놨지, 음. 한 세 시간 후면 너희 집 비번 누르고 있겠다. 근데 너 어디야?

“어? 나 그냥 밖이라니까.”

―밖에 어디?

오늘따라 참 집요하게도 물어봤다. 수연은 이따 보자는 말로 대충 통화를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

어느덧 입구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며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고등학교 동창인데, 현지라고. 가끔 우리 집 놀러 와서 자고 가거든. 지금 온다고.”

“지금?”

“어…… 원래 전날에는 말하고 오는데 오늘은 좀 갑작스럽긴 하네. 근데 이미 터미널 왔다고 하니까.”

“엄청 친한 친군가 봐?”

“응, 거의 뭐. 유일하지.”

친구 없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았으나 어차피 제 학교생활은 현재도 다 알 거였다. 이제 집에 가는구나, 수연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차에 올라탔다. 몇 번 탔다고 그새 익숙해진 것 같은 시트에 몸을 묻는데 갑자기 제게 팔을 뻗어오는 현재 때문에 순간 놀란 수연이었다.

“…….”

몸을 기울여 제게 벨트를 매 주는 손짓은 담백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벨트를 매 준 게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이내 제 것도 매는 현재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연의 머릿속에 순간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수연은 곧바로 현재에게 물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시간은 좀 빠듯했지만 저녁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밥만 먹고 최대한 빨리 들어가겠지만 좀 늦으면 현지한테 집에 있으라고 해도 되었다. 아마 알아서 치킨 시켜 놓고 기다릴 애였다.

“아냐, 친구 온다며. 너 집 데려다주고 난 갈게.”

“어? 그래도.”

“괜찮아. 멀리서 오는데 친구랑 시간 보내야지.”

고저 없는 대답과 함께 이내 차가 출발했다. 아직 밖이 환했다. 수연은 운전에 집중하는 현재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다봤다. 어째 좀 감이 싸한 것도 같고…….

“그럼 너는 저녁 어떻게 하려고?”

“나야 뭐, 집에서 먹으면 되지.”

그러지 말고 너도 친구 만나서, 까지 말하려던 수연의 입은 굳게 다물렸다. 하마터면 눈치 없는 말을 할 뻔했다. 이런 상황에는 통상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일 거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자고 해야지, 결론을 내린 수연이 입술을 막 떼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근데 그 친구한테도 비밀이야?”

“응?”

“현지라는 그 친구는 우리 사귀는 거 알고 있나 해서. 유일한 친구라며.”

눈이 마주쳤다. 수연은 현재가 웃지 않고 있을 때는 상당히 서늘해 보이는 인상이란 것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제 앞에서 늘 서글서글한 얼굴이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현재는 어느 면에선 이도재보다 더 냉정한 이미지였다.

“아, 그게. 아직 말은 안 했는데.”

물론 통화하면서 슬쩍 이것저것 물어볼 요량이긴 했지만…….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듯한 느낌이었다. 수연의 말에 현재는 별다른 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핸들을 돌렸다.

‘화났나.’

부드럽게 코너를 돌아 빠져나가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차창 밖 풍경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음악 하나 나오지 않는 차 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거의 먼저 말을 거는 편인 현재가 입을 닫아 버리니 숨 막히게 조용했다. 제가 뭐라 하면 더 실수할 것 같아 수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론 그런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비밀로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금방 깨질 것 같아서야?”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그는 여전히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었다. 수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날이 더워 걷어붙인 소매에 힘줄이 툭툭 불거진 팔이 들어왔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 꼭 그렇다기보단, 대부분 CC하면 끝이 좋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무난한 대답이었을까? 수연의 말에 현재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렇구나.”

“…….”

“그럼 내가 확신을 줘야겠네.”

확신이라. 수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현재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적막한 분위기에서 차는 계속 달렸다. 중간에 현재가 라디오를 틀긴 했으나 왜인지 축축 처지는 이별 노래만 나왔다. 약간 짜증 난 듯한 손짓으로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던 현재는 어느 순간 라디오도 꺼 버렸다. 다시 차 안이 삭막해졌다. 수연은 어느새 어둠이 조금씩 깔리는 차창 밖만 말없이 내다보았다.

익숙한 골목에 차가 진입했을 때는 완전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좁아터진 골목은 차 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가로등 밑 용케 빈자리를 찾아 차를 대는 현재 옆에서 수연은 슬쩍 핸드폰을 확인했다. 현지가 오려면 한 시간은 족히 있어야 할 터였다.

‘이러다가 헤어지는 거 금방이겠네.’

무표정한 얼굴로 시동을 끄는 현재를 보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까지의 행동이 무색하게 이도재에게 알콩달콩 사귄다는 거 알리지도 못하고 차일 위기를 맞은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때 현재는 말이 없어지는 편이었으나, 그와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은 수연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현재야.”

“응?”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부른 이름에 평소처럼 다정하게 대답해 주는 얼굴에 수연은 눈에 띄게 안심했다. 무의식적으로 환하게 펴지는 하얀 얼굴을 마주한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안해. 오늘.”

“…….”

“현지가 진짜 갑자기 연락 올 줄은 몰랐는데, 걔가 되게 좋은 친구여서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어. 암튼 오늘 너 생일인데 내가 챙겨 준 것도 없고…… 오히려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해서, 내일이라도 너 시간 괜찮으면 꼭 만나자.”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녀답지 않게 구구절절 길게 말한 수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현재와 눈을 맞췄다. 말하다 보니 뭔가 더 미안해지는 기분에 가슴을 졸이는데 갑자기 현재가 한숨을 쉬는 게 아닌가. 어……. 수연이 긴장하는데 갑자기 몸을 기울인 현재가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진짜 안 미안해도 돼, 수연아.”

“…….”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거리에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리려 해도 그와 너무 밀착해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 화 안 났어, 정말로. 그냥…….”

다시금 짧은 숨을 내뱉은 현재가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상한 것 같아서.”

“……어?”

무슨 말이지, 의아했지만 더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냘픈 어깨를 안은 채 결 좋은 긴 머리칼을 지분거리던 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품으로 끌어 당겨진 수연은 현재의 어깨에서 눈만 깜박였다.

“시간 괜찮아.”

“…….”

“내일도, 모레도. 언제든지 좋으니까 수연이 너랑 이렇게 계속 있고 싶어.”

귓가로 흘러오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조용한 차 안에서 정확하게 들렸다. 수연은 그새 익숙해진 체향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조심히 기대 보았다.

*

집이 바로 코앞인데 현재는 굳이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건물 앞에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 만나면 뭐 해?”

“아마 치킨 시켜 먹고 간단하게 맥주나 한잔하다 자지 않을까?”

“밖에서 마시진 않고?”

“음, 그럴 때도 있긴 한데.”

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 계획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현재가 빨랐다.

“밖에서 마실 거면 연락해. 이따 데리러 갈게.”

“어?”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응……. 수연은 당당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현재 앞,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럼…… 조심히 가. 오늘 재밌었어.”

“응, 내일 봐.”

그렇게 인사를 나눴는데도 현재는 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시 저를 꼭 끌어안는 품에서 수연은 왜인지 모르게 안도했다.

이내 현재가 아쉬운 듯 저를 천천히 품에서 뗐다. 바람 하나 불지 않아 잘 정돈된 제 제 머리카락을 괜히 귀로 넘기는 그의 차분한 손길을 느끼면서도 수연은 가만히 있었다. 그저 시선을 살짝 내려, 그의 잘빠진 턱선 밑으로 떨어지는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 사이 어디쯤에만 시선을 줄 뿐.

귓가를 지분대고, 뺨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끝과 저를 바라보는 지긋한 시선에 열기가 배어 있는 것을 애써 모른 척했다. 한숨 같은 나른한 숨이 터지고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물론 무서울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까지는 어찌하지 못했지만.

“……연락해.”

그러나 지레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가깝게 와 닿았던 숨결은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수연은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고 나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현지였다. 그러고 보니 거의 도착할 시간이긴 했다.

―수연아!

“어, 어디야?”

곧바로 묻는데 어쩐지 잔뜩 미안함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 거의 다 도착하긴 했는데.

“어.”

―언니가 남친이랑 터미널에 와 있다지 뭐야?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는데 엄마가 언니한테 말했나 봐. 그게, 내가 언니 남친을 좀 반대하고 있거든. 무슨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결혼 얘기하는 게 기가 차서. 암튼 같이 저녁 먹으면서 얘기 좀 하자네.

“아…… 그럼 만나야지.”

―진짜 미안해, 그래서 오늘은 언니 집에서 자고 내일 만나도 되나 해서.

그러라고 선선히 말하려던 수연은 순간 멈칫했다. 내일은 현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근데 나 내일은 약속 있어서 시간을 정확하게 못 정하겠어.”

―약속? 누구랑?

네가? 듣지 않아도 뒷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수연은 멋쩍게 말을 붙였다.

“그냥, 친구.”

―수연이 너 나 말고 친구 또 만들었어? 대박, 웬일?

“어째 좀 말투가 그렇다?”

―티 났어? 아니, 뭐, 잘한 거긴 한데…….

“그건 아니고 암튼 나도 만나서 얘기해 줄게. 너 내일 내려갈 거야?”

―아니, 일요일에 가도 상관없어! 흠, 근데 너 수상하다.

“뭐가?”

―너 진짜 애인 생겼어?

“…….”

말문이 턱 막혔다. 수연은 암튼 내일 연락하자며 대충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짙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괜히 일찍 왔네.’

물론 현지를 탓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좀 그랬다. 평소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핸드폰을 괜히 손에 계속 쥐고 있던 수연은 문득 갤러리를 들여다봤다. 온통 꽃과 풍경 사진 중 현재와 얼굴을 붙이고 찍은 사진도 몇 장 있었다. 그렇게 오늘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던 중이었다.

‘왜 이러지?’

미쳤나 봐, 수연은 순간 그 환하게 웃는 얼굴이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놀라웠다. 가끔 배우들 보면 극에 몰입해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상대를 정말 사랑하게 된다는데 제가 딱 그런 상황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수연은 현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주 질 나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쓰레기 같아.’

새삼스럽게 자괴감이 쓰리게 밀려왔다. 사실 현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현재의 마음이 가볍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쨌든 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갖고 놀고 있었다.

진짜 그만할까, 종일 즐거우면서도 문득문득 치솟던 생각에 수연이 입술을 꾹 깨물던 순간.

“……!”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액정에 뜨는 낯익은 이름에 잠깐 망설이던 수연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현재야.”

―친구는 잘 만났어?

“아니.”

―응? 아직 안 왔어?

“일이 좀 생겨서, 오늘은 못 온대.”

아, 짧게 목소리를 낸 핸드폰 너머 현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수연은 먼저 물었다.

“넌 집에 잘 갔고?”

―응.

현재도 씻고 나와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잠깐 나누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해졌다. 딱히 감정의 변화가 많지 않은 자신인데 현재랑 있으면 이런저런 수많은 감정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게 싫었던 수연은 일부러 일찍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운전 많이 해서 피곤할 텐데 푹 쉬고.”

―넌 뭐 하려고?

“나? 음…… 그냥 책 좀 보다가 자지 뭐. 인강 밀린 것도 있고 해서.”

―……그래.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일찍 전화를 끊고도 수연은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제가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자꾸 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잘못 끼워진 단추가 바라만 본다고 저절로 제 자리를 찾아갈 리 만무했다.

‘공부나 하자.’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쉰 수연이 막 일어나던 찰나였다. 손안에 쥔 핸드폰이 다시금 울렸다. 별생각 없이 시선을 내려 메시지를 확인하던 수연의 눈이 커졌다.

[잠깐 나올 수 있어?]

[나 지금 집 앞인데.]

*

옷차림을 점검할 새도 없이 헐레벌떡 나온 집 앞에 훌쩍 큰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아까와 차를 댄 위치도 같아 한 시간 전쯤으로 되돌아간 기시감이 들었다.

“수연아.”

수연을 발견한 현재가 웃으며 다가왔다. 아까와는 달리 편한 느낌의 스웨트셔츠와 팬츠 차림인데도 갖춰 입은 듯 훤칠하게만 보였다.

“웬일이야?”

반가운 마음과는 다르게 얼떨떨한 목소리가 나왔다. 씩 웃은 현재가 수연의 말랑한 볼을 손으로 한번 쓱 쓸었다.

“왜긴, 보고 싶어서 왔지.”

종일 같이 있었던 게 무색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공부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

“아니, 괜찮아.”

공부는 무슨. 태블릿도 켜지 않고 있었다. 수연이 고개를 젓는데 현재가 잠깐, 하더니 차 뒷좌석에서 뭘 꺼내 오는 게 보였다.

“이게 뭐야?”

“아, 공부하면서 먹으라고.”

“…….”

카페 마크가 찍혀 있는 큼직한 종이봉투 안에는 음료와 조각 케이크, 다쿠아즈와 마카롱 등이 종류별로 가득 담겨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냉장고에 넣어 두면 되지.”

“그래도 너무 많은데.”

아까 반찬을 받을 때도 느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로 손이 참 컸다. 무해하게 웃고 있는 현재를 앞에 두고 수연은 잠깐 고민했다.

‘들어갔다 가라고 해야 하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것만 받고 바로 돌려보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속이 너무 보이는 게 아닐까, 꼬시겠다고 맘먹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보이는 것도 싫었다. 아니, 그래도 들어가서 같이 먹자고 하면…….

“그럼 난 가 볼게.”

으응? 생각지도 못한 담백한 인사에 수연은 잠깐 숙이고 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여전히 웃는 낯의 현재가 다정한 손길로 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오늘 시험 끝났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쉬라고 하고 싶은데.”

“진짜 지금 가려고?”

“응?”

툭 튀어나온 말에 현재의 눈이 커졌다. 수연은 멋쩍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좀 더 있다 가던가.”

“…….”

잠시 놀란 듯했던 현재의 표정이 이내 밝아지는 것에, 수연은 괜히 슬리퍼를 신은 제 맨발만 바라보았다.

*

“이거 맛있다.”

차 뒷좌석에서 레모네이드를 쭉쭉 빨던 수연의 말에 현재가 반색했다.

“그래? 다음엔 같이 가자. 우리 집 바로 옆 카페야.”

“자주 가?”

“응, 나는 주로 커피만 테이크아웃 하는데 사실 디저트 카페로 유명하더라.”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수연의 시야에 조수석에 놓인 커다란 봉투가 들어왔다. 다 마신 컵을 제가 갖고 갈 간식 봉투 안에 슬쩍 넣어놓으려는데, 현재가 쓰레긴데 왜 다시 넣느냐며 빼앗아 갔다.

조금 전, 그럼 차에서 좀 얘기나 하다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건 현재였다. 내심 수연은 집에 들어온다는 말은 안 한 현재가 마음에 들었다. 안이 딱히 어질러져 있진 않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우니까. 사실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할까도 했는데 저를 한번 쓱 훑어본 후 그냥 차에 있자고 하는 말로 봐서는 아무래도 제가 너무 가볍게 입고 나간 것 같기는 했다. 집에서 입는 낙낙한 티셔츠에, 한 뼘인 얇은 반바지 차림이었으니까.

“내일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내내 수연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현재가 물었다. 이제는 저 시선에도 어느 정도 적응된 터였다. 현재는 수연과 있을 때는 세상에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음. 그럼 네가 지금 말한 그 카페 갈까.”

“그래, 몇 시에 데리러 올까?”

“아무 때나 상관없어. 나는 일찍 일어나니까 너 시간 맞춰서 연락해.”

알았어, 수연의 말에 현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잠시 머뭇대던 수연은 어렵게 입을 뗐다.

“참, 그리고 학교에서 말인데.”

“응.”

“수업 같이 듣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우리가 너무 티 나게 붙어 다니는 거 아닌가 해서. 밥 먹는 것도 그렇고. 학교에서는 좀 거리를 두면 어떨까 하고.”

제 말에 서서히 굳어 가는 현재의 얼굴을 보자니 염치가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전 다미와 나눈 메시지가 원인이었다. 다미는 수연과 현재가 사귀는 것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었냐는 등, 이현재는 사귀면 어떤 타입이냐는 등 쏟아지는 메시지에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진땀이 다 났다.

“거리를 둔다는 게, 밥도 같이 못 먹는다는 거야? 얘기도 하면 안 되고?”

“아니, 어쩌다는 괜찮은데. 계속 종일 같이 있는 건 아무래도 그렇지.”

“…….”

“미안해. 잘 이해 안 되지…….”

조그맣게 움직이는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던 현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한다면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어.”

“…….”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너는 그렇게 숨기는 거 괜찮아?”

응? 되묻는 말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아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 씻고 나온 티가 나는 말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재가 긴 숨을 흘려보냈다.

“좀 억울해. 잠깐만 안 봐도 보고 싶어 죽겠는 건 나뿐인가 해서.”

“…….”

수연은 새까만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억울하다니……. 수연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 돌아오는 차에서도 느꼈지만, 늘 제게 다정한 현재가 이렇게 나올 때면 더 어쩔 줄 모르겠다. 이런 경우에는 달래 줘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정말로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오가는 사람 없는 구석진 골목, 밀폐된 공간 안 서로 다른 생각의 남녀의 눈빛이 복잡하게 엉키던 순간.

숨 막히는 적막을 깬 것은 현재의 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 소리였다. 어, 어, 금방 가. 무심한 어조로 통화하는 상대는 안 봐도 이도재였다.

“……가게 가려고?”

일 도우러 오라는 건가, 짐작하며 묻는데 현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형 오늘 일 안 갔어. 어머니가 오랜만에 오셔서.”

“아…….”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아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고 말하던 현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것 같은데…….

“그럼 어서 가 봐야지, 너도.”

“어, 안 그래도 형이 어색한가 봐. 어머니랑 둘만 있으려니까.”

그런 시간이 거의 없었거든, 덧붙인 현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쩐지 많은 감정이 녹아 있는 듯한 그 미소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좀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든 생각에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이혼하셨다 뿐이지 부모님 다 계시고 우애 좋은 형도 있는 현재에게 그런 생각이 들다니.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현재가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피곤할 텐데 일찍 자고.”

참, 이거 가져가야지. 종이봉투로 팔을 뻗는 현재의 손목을 붙든 것은 정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수연아……? 의아한 듯 저를 부르는 현재의 품 안으로 와락 안긴 것 또한 모두 다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

잠시 놀란 듯 현재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늘 현재가 먼저 안아 줬지 제가 안긴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내 제 허리를 마주 안아 오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수연은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그의 품에 고개를 푹 묻은 채 중얼거렸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오늘 진짜 재밌었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

나도 학교에서는 조심할게, 속삭이는 목소리 너머 맞닿은 얇은 천 사이로 고동치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신다는데 그만 보내 줘야지, 생각하면서도 수연은 현재를 안은 팔을 풀기가 힘들었다. 기분이 조금 상한 듯한 현재를 달래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미 달성한 듯싶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안고 있었다. 이제 진짜 가야지, 수연은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얼굴을 살짝 뗐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숨이 턱 막히던 순간.

‘아.’

저도 모르게 그에게 입 맞춘 것은 정말, 머리가 돌아 버린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충동적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정확히 입술이라기보다는 살짝 비켜난 그 언저리였고, 뽀뽀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새털같이 가벼운 접촉이기는 했지만. 제가 해 놓고 놀란 수연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 그냥…… 그래도 사귀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일 축하해.”

어색함에 괜히 말을 붙이면서도 뒤늦은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놀란 듯 멍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미쳤어.’

그러나 수연에게 저조차 예상치 못한 발칙한 행위를 더 후회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

갑자기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 얄팍하기 그지없는 짧은 입맞춤에 아주 잠시 굳어 있던 남자가 그대로 수연을 덮쳐 온 것이었다. 순간적인 힘에 놀란 마른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지만,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은 남자의 팔 덕분에 창에 머리를 찧는 일은 없었다. 저항 없이 벌어진 입 안에 뜨겁고 축축한 혀가 파고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가득 찬 상념들이 깨끗하게 증발했다.

첫 키스였다.

거칠게 달려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혀끝을 살살 간지럽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더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비벼대고 빠는 입맞춤은 녹아내릴 듯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긴장해 그대로 얼어 버린 수연을 달래듯 천천하고 부드럽던 키스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몸에 힘을 빼는 수연에 맞춰 점점 더 눅진하게 짙어져만 갔다. 수연은 나름대로 열심히 현재를 따라 혀를 놀렸지만 당연히도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어설픔에 오히려 자극받은 듯, 현재는 수연이 숨 쉴 틈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몰아붙였다.

제게 체중을 실어 오는 남자의 힘에 점점 뒤로 밀리던 수연은 어느새 널찍한 조수석 시트에 등을 대고 누운 채였다. 입 안에서 젖은 살덩이끼리 비벼지며 나는 질척한 소리가 귓가를 아득하게 울렸다.

흐…….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중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가냘픈 비음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뜨겁고, 꽉 들어차고, 간지러운 듯하면서도 뒷골이 띵할 정도로 자극적이고…….

너무나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짜릿하게 흐르는 와중 모순적으로 모든 게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타액이 꿀떡꿀떡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도, 잠시라도 입술이 떨어질 만하면 못 참겠다는 듯 다시금 파고드는 집요한 혀의 움직임도, 제 어깨와 허리를 매만지던 그의 손이 엉덩이를 닿을 듯 말 듯 스치다 희게 드러난 허벅지를 빠듯하게 움켜쥐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하…….”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입술이 떼어진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여전히 현재의 밑에 깔린 채 수연은 색색 숨만 몰아쉬었다. 제 위를 올라탄 남자의 체중이 기분 좋게 묵직했다. 촉, 지금까지 몰아붙였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짧은 베이비 키스를 남긴 남자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저를 불렀다.

“수연아.”

살짝 잠긴 목소리 너머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둡게 반짝였다. 수연은 밭은 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응.”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제 아래 흐트러진 모습을 찬찬히 훑던 남자의 눈빛이 점점 더 깊게 침잠했다.

“난 아직 널 잘 모르겠어.”

“…….”

“그런데 그거 하나는 확실해, 갈수록 네가 더 좋아진다는 거.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말 하는 거 가볍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난 진심이야.”

벗어날 수 없게 제 시선 안에 그녀를 온전히 가둔 현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내가 너를 더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네가 날 더 그렇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어. 종일 네 생각만 하는 내 모습이 어떤 때는 좀 무섭기도 해.”

녹아 흐를 것 같은 감미로운 고백을 듣는데 턱턱 심장이 막혀 왔다. 무거웠다. 현재의 진심은 정말 너무 무거웠다.

“내가 누굴 사귀는 게 처음이라, 좀 서툴 수도 있는데. 어쨌든…….”

“……뭐?”

갑자기 머릿속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현재의 말을 잘랐다.

“사귀는 게…… 처음이라고?”

“어? 어.”

놀란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수연을 보고 현재는 더 당황한 듯했다. 수연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다시 물었다.

“내가 진짜 처음이야? 그 전에 누구 사귄 사람 없어?”

“없어.”

결백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표정은 진지했다. 망연자실하게 그를 보던 수연의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남은 양심의 썩은 동아줄마저 매몰차게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

“미쳤구나.”

언제나 그렇듯 직설적인 현지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와, 진짜 이건 뭐……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말이야, 엉?”

반쯤 남은 잔을 마저 비우며 현지가 열을 올렸다. 수연은 조용히 현지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현지를 만난 것은 다음 날 늦은 저녁이었다. 종일 현재와 데이트하다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오는데, 수연을 데려다주며 포옹하는 현재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오던 현지가 딱 목격해 버렸다.

‘야, 역시 내 감은 못 속이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그냥 존잘이던데? 어디 모델 아님?’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현지의 양손 가득 맥주가 들려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온 듯했다. 언니 얘기를 한다는 것도 잠시, 수연의 연애로 모든 포커스가 몰렸다.

‘어떻게 만났어? 소개팅? 아니, 그럴 리는 없고. 걔가 너한테 먼저 고백했지? 그치?’

보자마자 달려가서 인사하려다 일단은 참았다며, 현지는 연신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망설이던 수연은 술잔을 기울이며 현재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사실 다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잔 두잔 마시며 말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만두려고.”

“어엉? 헤어지려고?”

전혀 예상 못했던 답변인지 현지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수연은 진심이었다. 현재와 첫 키스를 하고 들어온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를 사귀는 게 처음이라며 제게 말하던 목소리는 진한 키스의 여운으로 탁해져 있었으나, 수연은 그 안에서 숨길 수 없는 풋풋하고도 깊은 애정을 느꼈다.

순간, 죄책감을 동반한 어마어마한 부담스러움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뭐 어때. 너도 연애 처음이잖아. 그리고 남자 말을 다 어떻게 믿어? 그냥 해 본 말일 수도. 그 외모에 여자 처음 만난다는 게 말이 되냐?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을 텐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걘 그런 걸 거짓말할 타입은 아니라.”

“얼씨구, 한 달도 안 만나 놓고 많이도 아셔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현지를 머쓱하게 바라보는데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자? 아님 아직 마시는 중?]

메시지를 누르지 않고 알림 창에 뜬 내용만 확인하는데, 벌써 새벽 1시를 넘어 있었다.

[난 이제 자려고. 내일 일어나면 연락해.]

[잘 자, 수연아.]

착실히 마지막 인사까지 하는 메시지를 노려보는데 마음이 심란해졌다. 연애학이 있다면 이현재는 거기서도 최고 학점을 받을 거였다. 마신 알코올의 양만큼 심란함이 더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그새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워 한 번에 비워 냈다. 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친이야? 뭐래?”

“그냥. 잘 자라고.”

“와, 근데 진짜 곱씹을수록 안 믿긴다. 아무리 세상이 좁다 해도 이도재를 여기서 딱 만나 버리고, 거기다가 걔 동생이랑 너랑…… 아, 머리 아파. 근데 헤어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아? 어제까지 좋아 죽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걔가 납득이 가겠냐고.”

“…….”

그렇긴 했다. 거기다 어제 키스까지 한 마당에…… 하물며 제가 먼저 시작한 행위기도 했다. 이러고 나서 하루아침에 헤어지자고 하면 정말 황당함을 넘어 제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고민하는 수연을 향해 현지가 명쾌하게 말했다.

“됐어, 간단하게 생각해.”

“어떻게?”

“아니, 뭐. 너도 싫지 않다면 그냥 사귀어. 너도 어느 정도 걔가 괜찮으니까 사귀었겠지. 정말 아니었으면 만났겠냐? 어차피 네 남친은 알지도 못할 거 아냐. 그냥 잘 연애하면 안 돼? 이도재가 알고 말고는 나중 문제지, 서로 좋아서 사귄다는데 걔도 어쩔 거야.”

뭐? 쏟아지는 현지의 말에 수연은 멍해졌다. 그냥 사귀라니. 역시 현지답게 생각지도 못한 접근법이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앉아 있던 수연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나 현재 안 좋아하는데.”

“허…….”

현지가 대놓고 혀를 찼다.

“방금 진짜 쌍욕 하려다 안 했다.”

“…….”

“됐어, 현재한테는 당연히 사죄해야 할 일이고 너 진짜 진짜 아닌데, 어떡하냐? 차수연 편에 나라도 있어야지. 암튼 이도재가 참 애가 못됐긴 하다. 나도 걔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돈데 넌 오죽하겠어.”

건배나 하자며 현지가 잔을 흔들었다. 몇 번일지 모를 잔이 다시 부딪쳤다. 수연은 고개를 떨궜다. 인제 그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현지는 사귀라는 소리만 계속했다.

“그냥 사귀어. 괜한 머리 쓰지 말고, 뭐 어때, 동기는 불순했지만 앞으로가 중요하지. 싹 없던 일로 하고 사귀라고. 외모 출중하지, 머리 좋지, 몸도 좋지, 네가 다 처음이라고 하지. 아,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현타 오네, 그런 남자 찾으래도 못 찾겠다!”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현지가 갑자기 무릎걸음으로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또 맥주를 꺼내 오려는 모양이었다.

“참. 이게 뭐야? 아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치킨도 거의 다 먹었는데 나 이거 먹어도 됨?”

워낙 양이 많아 거의 그대로인 반찬을 보며 현지가 의아한 소리를 냈다. 늘 텅텅 비어 있는 냉장고가 차 있으니 신기했을 거다. 이것저것 사 먹는 타입도 아니고 반찬 해 줄 사람도 없는 거 뻔히 아는데.

“현재가.”

“이현재가? 이걸 직접 했다고?”

“응, 밥 챙겨 먹고 가라고. 아침에 문 앞에 놓고 갔던데.”

“…….”

잠깐 굳어 있던 현지가 냉장고 문을 퍽 소리 나게 닫았다. 그래, 다 부숴라. 부숴. 수연이 체념하며 혼자 잔을 비우는데, 현지가 다시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그녀 앞에 다가왔다. 술에 취해 얼굴도 엄청 달아올라서 좀 무서웠다. 왜 이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현지가 갑자기 손을 덥석 잡았다.

“수연아. 걔 꼭 잡아라. 엉?”

“취했어?”

“어, 취했어. 취했는데 이건 진심이야. 어디 방생하지 말고 그냥 꼭 잡고 네 것 해, 내 촉이 말하고 있다니까? 얘 놓치면 너 평생 후회한다. 경험상 해 주는 말이니까 꼭 들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작고 귀여운 외모에 활달한 현지는 연애사가 화려했다. 오래 못 간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아무튼 모든 게 정반대인데 저랑 친구 하는 게 신기했다. 언젠가 물어봤더니 너는 똑똑하고 새침해서 좀 재수 없이 보여도 은근히 사람 마음 쓰이게 하는 데가 있다고 했던가. 약간 욕 같기는 했는데 제 환경이나 처지를 아는 애니 안쓰럽게 생각했나 싶었다.

그 후에도 현지는 한참을 혼자 얘기하다 어느 순간 이불도 펴지 않은 바닥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낑낑대며 현지를 매트 위에 올려 주고, 먹은 것을 치우고 씻고 온 수연은 얇은 이불만 깐 바닥 위에 덜렁 누워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액정에 괜히 이것저것 번호를 눌러 보기도 했다.

‘이래서 술 많이 안 마시려고 하는데.’

딱히 다른 술버릇은 없는데, 정도를 넘어 마시면 가끔 강한 충동이 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충동이. 그럴 리도 없지만 엄마가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날 거면서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다. 아까 현지에게 슬쩍 물은 바로는 엄마의 카페는 그대로 있다고 했다. 가끔 가는데 지난달에도 엄마는 가게에 있었다고.

통화 목록을 쭉쭉 넘겨 보는데 최근 현지와 통화한 것을 빼면 현재만 즐비했다. 현재가 많이 했다기보다는 그만큼 연락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엄마.”

입 밖으로 내 보니 새삼스러웠다. 유일한 가족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 내가 정말 싫어하고 생각만으로 지긋지긋한 대상.

엄마, 잘 살긴 하지? 하긴, 엄마는 원래 잘 살았지. 그래도 전화 한 통을 안 하네. 뭐, 했어도 난 안 받을 거지만. 코까지 골며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는 현지는 어차피 들을 리도 없었다. 주정 아닌 주정을 하던 수연은 핸드폰을 그대로 둔 채 잠에 빠져 버렸다.

*

“이현재 여친 있다며?”

“어?”

나란히 앉아 학식을 먹던 다미의 말에 지레 놀란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다미의 옆에 앉아 있던 윤성 역시 멈칫했다.

“아까 과방 갔는데 박성혁이 그러는 거야, 현재 요새 여친 생겨서 바쁘다고. 주말에 불러도 나오지도 않는대. 궁금해서 캐물어도 절대로 대답 안 해 준다더라.”

“와, 대박!”

윤성의 앞에 있던 여자 후배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신나게 둘이 대화하는 것을 두고 묵묵히 밥만 먹는데 문득 다미가 물었다.

“수연이 넌 뭐 아는 거 없어? 현재랑 친하잖아.”

“글쎄, 모르겠는데.”

짧게 대꾸하는데 괜히 속이 시끄러웠다. 여친이라…….

그간 학교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수연의 말을 현재는 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수업은 같이 듣지만 그뿐이고, 다른 이가 보기에 과하게 붙어 있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필요한 말만 하는 현재가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초반 현재와 저를 의심하던 이들도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을 거둔 듯했다. 연상이니 직장인이니, 옆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우린 이쪽으로 갈게! 내일 봐!”

손을 흔들며 가는 다미와 후배를 뒤로하고 수연은 윤성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수업은 윤성도 같이 들었다. 저를 향한 윤성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지라 내심 어색했지만 따로 가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이제는 날이 꽤 덥네요.”

“그러네.”

윤성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벌써 6월이었다. 올해는 여름이 일찍 온다더니 낮에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았다. 추위도 많이 타지만 더위도 많이 타는 수연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선배님은 이번 방학 때 따로 계획 있으세요? 여행이라던가?”

“아니, 딱히 그런 건 없고…….”

당장 기말고사 준비가 문제였다. 수연은 걸으면서 입고 있던 얇은 여름용 카디건을 벗어 팔에 뀄다. 무난한 디자인의 원피스 위, 희고 가느다란 팔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왜 이렇게 더워.’

내친 김에 수연은 가방에서 머리끈을 꺼내 치렁치렁한 머리칼도 하나로 높이 묶어 버렸다. 오늘 나름대로 머리도 풀고 신경 쓰고 온 건 끝나고 현재와 데이트를 하기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제가 더워 죽겠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던 윤성이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머리에…….”

“어? 머리?”

“아니, 머리가 아니고 머리끈에 뭐가 묻어서요.”

수연은 대충 손으로 검은 머리끈을 털어 보았다. 먼지라도 붙었나?

“됐어?”

“아뇨, 거기가 아니고…….”

제게 팔을 뻗는 윤성의 행동에 당황한 수연이 그대로 우뚝 멈췄을 때였다.

“어, 최윤성!”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수연의 눈이 커졌다.

“안녕, 수연아.”

“근데 뭐냐, 이 좋은 분위기는?”

윤성에 이어 수연에게 인사를 나누는 시시덕대는 성혁과 또 다른 남자 옆 현재가 있었다.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어깨도 더 딱 벌어지고 몸도 더 좋아 보이는 게, 아예 혼자 다른 세상 사는 사람 같았다. 수연은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끼며 현재를 올려다보다 멈칫했다.

“혹시 우리가 방해한 건 아니지?”

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농을 섞어 묻는 성혁과는 다르게 현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수업 가?”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묻는 현재에 수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시선이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감했다. 이 정도면 둘이 사귀는 거냐는 소리는 앞으로도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갈수록 온오프가 잘 되는 모양이었다. 수연과 윤성을 번갈아 보던 성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둘이 같은 수업?”

“네.”

“야, 뒤에서 보는데 진짜 너희 커플인가 했잖아. 엄청 알콩달콩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멋쩍게 대답하는 윤성에게 성혁은 요즘 운동 시작했냐며, 몸이 더 좋아진 것 같다는 덕담을 이어 건넸다.

“아, 나도 진짜 운동해야지. 이현재도 그렇고 옆에 몸 좋은 놈들밖에 없으니 비교돼서 말이야. 현재 이 자식은 안 그래도 골격 큰 놈이 요새 애인 생겨서 그런지 웨이트까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김지철 너만이 내 위안이다. 진짜.”

“왜 또 날 걸고넘어지냐?”

갑자기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보던 현재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수업 늦겠다, 가자.”

“어? 어, 그래. 암튼 우린 가 볼게. 좋은 소식 있으면 형한테 연락해야 한다? 엉?”

윤성을 장난스럽게 툭툭 친 성혁이 끝까지 주접을 떨며 손을 흔들었다. 윤성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아웅다웅하며 한 발짝 앞서가는 성혁과 지철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제 어깨를 부드럽게 감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

“수업 잘 들어.”

저를 보며 말하는 현재의 얼굴은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어깨와 등을 은근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명백히 의도를 품고 있었다. 만약 뒤에서 누가 봤으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노골적인 스킨십이었다. 속옷 끈에 닿을 듯 말 듯, 그의 손이 만지고 쓸어내리고 간 부분이 괜히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어. 너도.”

미세하게 떨리는 수연의 눈빛을 잠시 마주하던 현재는 이내 윤성에게도 다음에 보자는 말을 건넸다. 뭔가 상당히 성의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

“네, 선배님.”

그에 깍듯하게 답하는 윤성의 얼굴을 한번 쓱 훑은 그는, 이내 제 친구들을 따라 앞서갔다.

*

그렇게 윤성과 나란히 앉아 두 시간짜리 수업을 들었다.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책과 가방을 챙기는데 옆에서 윤성이 말을 걸었다.

“이제 집 가세요?”

“아니, 잠깐 도서관.”

현재는 다음 수업이 하나 있었다. 주로 오전에 빡빡한 수연과는 달리 현재는 수업이 오후에 몰려 있는 편이었다. 어차피 빌릴 책도 있으니 도서관에 들른 후에 집에 갈 예정이었다. 오늘은 저녁에 잠깐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집 앞으로 현재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저도 도서관 갈 건데, 같이 가요. 선배님. 제가 가면서 시원한 커피 사 드릴게요.”

“…….”

호쾌한 말투와는 다르게 윤성은 정작 제대로 수연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큰 용기를 내서 말했음이 분명할, 순진하게만 보이는 얼굴에 긴장한 티가 다 났다. 두 살 차이인데 깍듯하게 매번 선배님 호칭을 해서 그런지 윤성은 훌쩍 큰 키와는 다르게 어리게만 보였다. 수연이 막 입을 열려던 차,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현재였다.

[중도 뒤에 차로 와]

[수업 끝나면 바로]

딱딱 끊어지는 메시지는 어딘가 급하면서도 묘하게 명령조였다. 뭐지? 슬쩍 눈을 찌푸리던 수연은 고개를 들어 초조한 낯의 윤성에게 답했다. 미안, 지금 가 볼 데가 생겨서.

‘근데 얘 수업 하나 더 있지 않나?’

괜찮다며 어색하게 웃는 윤성을 뒤로하고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온 수연은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바로 오라는 말도 있었지만 혹시나 윤성이 바로 뒤따라오면 상황이 어색해지기 때문이었다.

‘휴강이라도 됐나 보네.’

저만치 보이는 건물로 다가가며 수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껏 현재가 학교에서 저를 은밀히 부른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점심을 거른 수연에게 직접 만들어 온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기 위해서였는데, 수연이 신경 쓰인다고 대놓고 말한 후로는 연락은 자주 해도 부르지는 않았다.

사실 현재의 차가 뭔지 그와 친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기도 했고, 운동 겸 원래는 걸어 다녔다는 현재가 저랑 데이트가 있는 날에는 차를 끌고 오다 보니 오늘 여친 만나러 가냐고 옆에서 농을 거는 것도 알아서였다.

어쨌든 이런 메시지는 아무리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좀 갑작스러웠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지, 다짐하며 뒤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차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야?’

열심히 걷고 있는데 주차된 차들 끝 저만치 커다란 나무 아래 현재의 차가 보였다. 날도 더운데, 속으로 불평하며 수연은 좀 더 걸음을 빨리했다. 누가 볼까 한번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왜 갑자기 불렀어?”

에어컨을 틀어 놨는지 차 안은 냉할 정도로 시원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시트에 앉으며 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던 순간.

“흡……!”

곧바로 커다란 몸을 기울여 오며 제 목덜미를 낚아채는 손길에 놀란 수연의 눈이 커졌다. 당황해 놓아 버린 차 문이 어정쩡하게 닫혔다. 그 소리는 입술을 겹쳐 오는 거친 숨결에 묻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벌어진 입 안을 성급하게 얽어 오는 혀는 서늘한 차 안 공기와 대조되게 뜨거웠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쩐지 굳은 얼굴의 남자였다.

왜 이러지? 아주 찰나 들었던 의문은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는 살덩이에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몰아붙이는 성급한 키스를 버겁게 받아 내는데 어느 순간 몸이 뒤로 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시트를 눕힌 현재가 빠르게 그 위를 타고 올랐다. 수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물리려 했으나 뒤통수를 단단히 움켜쥐며 몸을 고정하는 남자의 힘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솔직히 키스야 이제 세는 것이 큰 의미 없을 정도로 잦은 일이었다. 그는 평소 깔끔하고 배려 있는 것과는 다르게 스킨십할 때는 집요한 편이었으나 오늘은 정도가 과했다.

코로 숨 쉬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정도로 옭아매는 듯 척척했던 키스는 수연이 온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서야 겨우 끝이 났다.

“……여기 학교야.”

헐떡이는 숨을 겨우 내쉬며 수연은 여전히 제 몸 위에 올라탄 남자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늘 키스 후면 저만 숨이 찬 것 같아서 좀 그랬다. 하긴, 연애를 안 해 봤지 키스가 처음이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수연은 의심이 많은 편이었다.

“알아.”

쪽, 키스의 흔적이 남은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며 현재가 답했다. 마주친 눈에 완전히 채우지 못한 갈증이 배어 있었다.

“밖에서 전혀 안 보이니까 걱정 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설핏 미간을 찌푸리던 수연의 머릿속을 뭔가 스쳐 지나갔다. 종전의 키스로 아직 젖어 있는 입술이 다시 열렸다. 설마.

“수업 있지 않았어?”

“쨌어.”

“뭐? 왜?”

휴강한 게 아니고? 경악한 수연을 보며 현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냥, 너무 보고 싶어서.”

“…….”

갑자기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밀려나 주며 운전석에 앉는 현재를 보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두 시간 후면 보잖아.”

“어.”

“과 탑이라서 한 번 수업 빼 먹어도 괜찮다는 거야? 시험 기간인데?”

“그런 게 아니야.”

현재가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연은 정말로 현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성실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하고 와서 형과 먹을 아침상을 차리고 학교에 가는 남자다. 수연과 만나지 않을 때는 집에서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고, 그것도 아니면 알아서 형을 도와주러 간다. 그런 성실한 애가 이러고 있는 거였다.

키스는 두 시간 후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수연은 지금 저를 보고 싶어서 수업을 빠졌다는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 후, 모양 예쁜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질투했어?”

“……내가 왜?”

많은 것이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역시나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수연의 말에 현재의 잘빠진 눈썹이 씰룩였다.

“너랑 사귀는 사람은 난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 가지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여유 있는 말투와는 달리 수연을 훑는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제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는 남자를 볼 때면 뱃속이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끼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현재는 제 외모에만 집중하는 다른 이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순진한 윤성하고도 또 달랐다. 뭐가 다르냐 물으면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좀 아쉬울 뿐이야. 너랑 나랑 사귄다는 걸 우리 둘밖에 모른다는 게.”

“…….”

“이러다가 네가 나 차고 가 버리면 나중에 내가 너랑 사귀었다고 떠들어 대도 아무도 안 믿어 줄 것 같아.”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올리며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간 조금은 그것을 의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현지는 그대로 잘 만나 보라고 조언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수연은 불분명한 것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걸고 싶지 않았다. 끝이 보이는 관계에 에너지와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재와 별 탈 없이 만나면서 수연은 자신의 크나큰 과오를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이도재가 저를 도발했어도 그냥 그 자리에서 털고 나왔으면 됐을 일이었는데,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저였다.

그래서 그간 잘 보이려고 나름 노력했던 것을 접었다.

현재의 생일을 기점으로부터 그냥 내키는 대로, 정말로 제멋대로 했다. 제게 진심인 현재를 먼저 차는 것은 제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못 할 짓이어서, 차라리 현재가 제게 정떨어져 차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같았다. 그리고 그 한결같음이 오히려 더 수연을 괴롭게 했다.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박혀 있는데도, 예민하게 굴고 말 붙이지 말라는 티를 팍팍 내는데도 왜 짜증이냐고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저도 공부했다. 그마저도 수연의 눈치에 바로 옆에는 앉지도 못했다. 단지 은근슬쩍 제게 커피를 놓고 갔을 뿐.

모닝콜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왜 이렇게 일찍 깨우느냐고 짜증을 내도 피곤하지, 하며 오히려 저를 다독였고, 알아서 밥 챙겨 먹으니 그만 신경 쓰라고 까칠하게 말해도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꼬박꼬박 챙겼다. 예민하고 손 많이 가는 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도 변함없이 따뜻했다.

그러나 저는 어떤가. 익숙해지는 것은 무섭다.

짜증을 내면서도 모닝콜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문제인 거였다. 연락 잘 안 된다고 하는 주변 반응과는 다르게 현재에게는 바로바로 답을 보내 주는 자신이 문제였다. 당장 어제만 해도, 시험이 코앞인데 그간 제대로 어디 가지도 못했는데 오늘 저녁만 잠깐 시간 낼 수 있냐는 조심스러운 문자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제 모습은 제가 봐도 모순적이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고 걱정해 주는 게 아무리 처음이라 하더라도, 현재가 제게 예외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한 명은 제외.”

“한 명?”

갑작스러운 말에 수연이 조금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다시 올렸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나풀대는 것을 가만히 보던 현재가 입을 열었다.

“응, 우리 형.”

“…….”

빠르게 굳어지는 수연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현재가 초조한 낯으로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살다 보니까 티가 나서, 여친 생겼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어.”

“나인 줄은 모르지?”

제 눈치를 보는 듯한 현재가 걸리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날 선 말투는 어찌하지 못했다.

“그게…… 알아.”

“안다고?”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솔직히 현재가 이도재한테 여친 유무를 얘기했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던 터였다. 유난한 형제 사이고, 실제 같이 있을 때도 이도재에게 종종 연락이 오기도 했었으니까. 현재가 달라진 점을 이도재는 눈치챘을 거였다. 하지만.

“원래는 얘기 안 했는데 형이 하도 캐물어서. 혹시 개총 뒤풀이 때 네 옆에 있던 애 아니냐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했어.”

미안해, 덧붙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그가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사실 현재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래서, 형이 뭐래?”

“어?”

“나랑 사귄다니까 형이 뭐라고 했냐고. 너네 형 너한테 엄청 집착…… 아니, 되게 챙기잖아, 너.”

자꾸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이 미친 짓을 한 게 아닌가. 화를 냈을까? 아니, 갑자기 그건 이상하지. 그래도 싫고 좋음을 숨기지 않는 애니까 어쨌든 싫은 티를 냈을 거다. 아니면 최악의 상황에는 제 얘기를 현재에게 안 좋게 전했다던가.

그러나 이어지는 현재의 말은 지나치게 의외인 것이었다.

“그러냐고, 잘 만나 보라고 하던데.”

뭐? 수연은 찰나 현재가 제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는 제가 현재를 꼬신다고 생각한 데다, 굳이 따로 불러 으름장까지 놨던 남자가 아닌가.

“……정말?”

그런 애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고? 혼란스러운 수연의 눈동자를 현재가 집요하게 좇았다. 그녀의 감정을 파악하려는 듯 다분히 신중하고도 꼼꼼한 태도였지만 수연에게는 그것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응, 언제 한번 제대로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 아무래도 처음 누굴 만난다고 얘기한 거라 형도 궁금한 게 많은가 봐.”

어쩐지 물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수연은 어느새 제 손을 잡아 오는 남자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화났어? 형한테 얘기해서?”

“……아냐.”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에 현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수연의 손바닥을 살살 쓸었다. 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어쩐지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수연은 채 내쉬지 못한 긴 한숨을 속으로 간신히 흘려보냈다.

그날, 간만에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언젠가 현재가 말했던 디저트 카페를 가는 와중에도 수연은 순간순간 멍해졌다. 결국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예매해 놓은 영화도 보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냐, 좀 피곤한가 봐.”

푹 쉬라며, 제가 건물 안까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는 모습에 죄책감이 물씬 밀려왔다.

“그, 형하고 만나는 거 말이야.”

“어? 어.”

“시험 끝나고…… 한번 보게. 같이.”

일단 이도재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한 번은 만나야 확실히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의 계획이라면 어쩌면 이미 달성한 것도 같으니까.

마무리라, 수연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재와의 끝을 순간 상상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새 익숙해진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마냥 후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 말에 살짝 당황한 듯하던 현재가 이내 웃었다.

“그러자. 형도 좋아하겠다.”

“…….”

“고마워.”

형 정말 좋은 사람이라며, 친해지면 재밌고 잘 챙겨 준다는 말을 덧붙이는 현재의 말을 듣는데 헛웃음이 났다. 이내 저를 끌어안는 온기를 느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운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뻔뻔한 감각이었다.

*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던 수연은 홀가분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깊은 피곤을 느꼈다. 현재는 내일 오전 전공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어젯밤 통화할 때 웬일로 범위를 착각했다며 오늘 밤은 새워야겠다는 자신 없는 소리를 했었다.

‘더워.’

푹푹 찌는 날에 조금 걸었는데도 땀이 났다. 여름만 되면 살이 쭉쭉 빠지는 저였다. 수연은 언젠가부터 꼭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시험 끝났어?]

수연은 걸음을 조금 늦추며 답했다, 응. 지금 집 가는 중. 메시지 옆 1이 없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응.”

―지금 어딘데?

“집 가는 중이야. 거의 다 왔어.”

―아아.

아쉽다는 듯 끝을 끄는 목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잠깐이라도 보러 가려고 했지, 나 지금 집에서 나왔거든.

“어디 가려고?”

수연은 오늘 시험이 끝난지라 현재는 잠깐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현재가 남은 시험 범위를 착각했던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일 보게 되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수연의 말에 시무룩하던 현재였는데.

―아, 가게에. 너무 바쁜데 주방 이모님이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쉬신다고, 형 혼자 할 수가 없는 상황인가 봐.

“공부는 어떡하려고?”

―좀 해 주다가 들어와서 해야지.

현재는 속 좋게 웃었지만 수연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아마도 밤새울 게 뻔했다. 암튼 도움 안 된다니까,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며 수연은 이도재를 속으로 씹었다. 물론 학기가 마무리되며 여기저기 술자리가 많겠지만 그래도 아직 시험 보는 동생을 꼭 불러내야 하나. 일한 값이나 제대로 챙겨주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얘기를 주고받고 통화는 끊겼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수연이 집에 와서 푹 자겠다고 말하고 끊은 거였다. 그러나 그녀가 향한 곳은 집 앞 편의점이었다.

‘이제 좀 살겠네.’

씻고 나오자마자 수연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가득 사 온 과자와 캔 맥주를 땄다. 현재가 알면 싫어할까 말 안 했지만, 오늘은 도저히 밥이 안 당겼다. 가끔 주말이나, 시험이 끝난 직후에만 했던 유일한 소박한 일탈이었다.

핸드폰도 끄고 잔다고 했으니 어차피 현재는 연락하지 않을 거였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렇게 남 눈치를 보게 됐지, 문득 의아했지만 어차피 오래 갈 일은 아니었다.

‘좀 살겠다.’

조금 들뜬 얼굴로 수연은 태블릿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현지가 얼마 전 꼭 보라고 추천한 드라마였다. 솔직히 영상물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혼자 가만히 술 마시는 건 좀 쓸쓸하니까.

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방 안에 있으니 술술 술도 잘 들어갔다. 좁아서 내내 틀어도 전기세도 얼마 나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개강하는 영어 학원도 끊어 놨는데, 알바를 구해야 할지 말지 정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제외하면 마음이 편안했다.

‘뭐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홀가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라면 한없이 행복할 시간인데 자꾸 뭔가 빈 기분이 들었다. 수연은 태블릿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는데 아직도 창밖은 환했다. 오늘따라 시끌벅적한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수연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확 쳐 버렸다. 방 안이 어둑해지자 묘한 안정감이 드는 동시에…….

조금 외로워졌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수연은 자신을 타박했다. 내가 이게 좋아서 그러는 건데, 혼자가 편해서 그러는 건데. 남들처럼 할 거 다 하고 다녔으면 돈도 절대 이만큼 못 모았을 거다. 갑자기 든 생각에 수연은 진심으로 조금 억울해졌다. 자신은 지금 엄청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인데 말이다.

한 캔을 더 따며 수연은 씻고 나오자마자 껐던 핸드폰을 다시 켰다. 당연하게도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지금쯤 현재는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도재를 도와 안주를 만들고 있을 거였다. 아니면 서빙을 할 수도.

‘바보 같은 이현재.’

암튼 현재도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문득 예전 뒤풀이에서 현재가 서빙하면 매출이 달라진다고 말하던 이도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캔을 비워 냈다. 비우고, 또 비우고. 다 먹은 캔은 바로바로 찌그러뜨리며 옆 비닐봉지에 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조금 흐려진 눈빛이 봉지 안 그득한 캔의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평소보다 빠르게 먹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차피 집에서 혼자 마시는 거니 상관없었다. 기계적으로 캔을 비워 내던 수연의 몸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지러워진 상을 앞에 두고 어느 순간 수연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몇 시지, 가물가물 눈을 깜빡이던 수연은 또다시 밀려드는 수마에 다시 잠들려 했다. 에어컨을 끄고 자지 않아 몸이 찬 게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끄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감으려던 그 순간. 마음속에서 어떠한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고요한 자취방 안, 싸늘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따뜻한 무언가를 끼얹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충동 말이다.

수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원래라면 망설였을 행동이 취기가 오르니 거침이 없었다.

‘안 받나…….’

그러나 호기롭게 통화 버튼을 누른 것과는 다르게 신호음은 길게 이어졌다. 평소 제가 전화하면 정말 세 번 안에 연결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에 조금씩 잠이 깼다.

흐릿한 시야에 확인한 시각은 11시 20분, 예상대로라면 현재도 아마 집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거기에 저도 핸드폰 꺼 놓는다고 했고, 수연이 먼저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였다. 아는데 취해서 그런지 괜한 서운함이 울컥 치밀던 찰나.

―수연아?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수연은 침묵했다. 수연아, 다시금 저를 부르는 현재의 목소리는 시끌벅적한 주변에 섞여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수연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집 아니야?”

―응. 아직 가게. 일이 너무 많아서 갈 수가 없네. 여기 전쟁터야, 완전.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현재의 목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다. 수연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공부는 어떻게 해?”

―마감까지 같이 할 것 같아서. 집 가서 쪽잠 자고 좀 하다 가야지.

“…….”

―자고 있었어?

요란하던 주위의 감이 점점 멀어졌다. 현재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수연은 느리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중간에 깨서 전화한 거야?

그 와중에도 현재는 계속 말을 걸어 왔다. 제가 먼저 전화를 걸어 좋아하는 티가 다 났다. 아무튼 투명했다. 응, 수연은 현재가 보고 있지 않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

핸드폰 너머 말이 끊겼다. 수연은 다시금 속살거렸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말로 하니까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헤어져야 한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모순임을 알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외로움에 질식되어서인지 치솟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단정한 듯 서늘하게 빠진 눈매가 저만 보면 사르르 풀어지는 남자를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은 길게 이어지는 침묵을 인지한 순간.

‘아.’

수연은 착한 그를 시험에 들게 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냥 해 본 얘기라고 덧붙이려는데.

―……지금 갈게.

아,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조금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에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괜찮아. 너 지금 바쁘다며.”

―아냐, 하던 거만 마무리하고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있어. 집이지?

“괜찮다니까. 오지 말라고.”

몇 번 더 만류했으나 현재는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중에 현재가 먼저 끊은 적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연은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빈 캔이 담긴 봉투며 여기저기 과자 봉지가 널브러진 방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괜히 제 머리카락과 옷을 킁킁대던 수연은 뛰듯 욕실로 들어갔다.

*

세수와 양치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샤워를 했다.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것 같아서였다. 아무리 곧 정리할 사이라고는 해도 현재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싶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온다고 하면 빨라도 여기까지 30분은 걸리지 않을까, 오는 시간도 있으니까.

‘잠깐 얼굴만 보고 가겠지?’

아니면 으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갈 수도 있었다. 집 앞까지는 매번 데려다줘도 당연히 현재가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머리까지 감는 건 오버였나, 얼른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욕실을 나오는데 저만치 핸드폰이 울렸다. 아직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대충 싸매고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벌써 왔어?”

―응, 집 앞이야.

“잠깐만, 바로 나갈게.”

이렇게 빨리 왔다고? 마음이 급해진 수연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제거하고 얇은 원피스를 꿰어 입었다. 슬리퍼에 발을 넣으며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보는데 창밖을 거세게 때리는 빗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소나기인가, 수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잰걸음으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저기 있네.’

두꺼운 유리문 사이에 두고 훌쩍 큰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데 반가움이 확 올라왔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긴 한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감정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수연은 두꺼운 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그리고.

“수연아.”

저를 보며 활짝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다 뻐근했다.

‘아.’

동시에 수연은 제 안에 뭔가가 분명히 비틀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를 잔뜩 맞아 젖은 머리와 옷을 하고도 뭐가 좋은지 사르르 풀어지는 남자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묘한 쾌감을 가져다줬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걸로 그의 마음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끼다니. 자신은 생각보다도 더 질이 나쁜 모양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싫어져 수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비를 다 맞았어?”

“아, 오다가 갑자기 막 쏟아져서. 진짜 잠깐 맞았는데 이렇게 됐네.”

수연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현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바로 앞 편의점 빼고는 오는데 우산 살 데도 없었을 거였다. 그 와중에도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하필 소나기가 올 게 뭐냐며,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는 현재의 얼굴이 기분 탓인지 핼쑥해 보였다. 미안해진 수연은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현재는 여느 때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지만 푹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차 갖고 온 거 아니었어?”

“응, 일하면서 맥주 한 잔 마셨거든. 형 예전 은사님이 학생들이랑 온 김에 권하시는 거라 안 마실 수가 없어서. 사실 한 잔도 아니고 한 모금이긴 한데…….”

그래도 운전할 수는 없잖아, 멋쩍게 덧붙이는 모습조차도 참 이현재다웠다. 안 그래도 피곤하고 바쁜 애를 불러 의도한 건 아니지만 비까지 맞게 한 수연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숙여졌다.

“미안해. 괜히 불러서.”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오겠다고 한 건데.”

수연의 말에 현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한 발짝 더 밀착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휘감으려던 그의 손은 닿기도 전에 문득 떨어졌다.

“안아주고 싶은데 젖어서 안 되겠네.”

촉, 제 입술을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깃털 같은 키스에 수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온통 어둑한 배경 안에 저와 키를 맞추려 조금 고개를 숙인 현재의 얼굴만이 환했다.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장면으로 기억될 거라는 감이 들었다.

쏴아아, 더위를 날리듯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여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보고 싶다고 해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

“나도 엄청 보고 싶었어, 수연아.”

달콤하게 속삭이던 현재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수연은 못 이긴 척 가만히 입을 벌리고 그와 혀를 섞었다.

불도 꺼져 온통 껌껌한데다 비바람까지 불어 아무도 오가지 않는 늦은 거리였지만 밖이었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수연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키스도 제법 익숙해진 수연이었다. 저도 모르게 부여잡은 단단한 팔뚝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혹 제가 젖을까 최대한 닿는 면적을 줄이려는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진짜 이현재…….’

술을 마셔서일까, 상황이 이래서일까, 정신없이 혀를 얽고 있는데 안에서 자꾸 울컥울컥 뭔가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바보 같은 이현재. 왜 이렇게 착하고 다정해서 더 죄책감만 들게 하는지. 수연은 괜한 현재만 속으로 탓했다. 그간 그렇게 제멋대로 까칠하게 대했는데도, 보고 싶다는 제 말 한마디에 곧바로 달려오다니. 거기에 비를 잔뜩 맞고도 뭐가 좋다고 웃는 남자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세상 누가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 줄까. 그 사실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사무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갖고 싶다고.

잠시 제 곁에 머물다 날아가는 존재가 아닌, 좀 더 온전한 제 소유로.

‘미쳤어.’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었다. 순간 든 부정한 생각을 지우려 수연은 행위에만 더더욱 집중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습한 키스 후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입술을 뗀 현재가 몸을 떼며 어깨를 폈다. 밀려드는 아쉬움에 수연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저녁은 먹고 잔 거지?”

“응.”

이 와중에도 제 끼니를 챙기는 걸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현재가 무해하게 웃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푹 좀 더 자, 잠깐이라도 얼굴 보니까 좋다.”

“넌 어떻게 가려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이대로 가게에 가긴 좀 그렇고.”

“형한테는 말하고 왔어?”

“아니, 그냥 나왔어. 뭐, 일 힘들어서 도망갔나 하겠지.”

현재는 멋쩍게 웃었지만 눈치 빠른 이도재가 과연 그렇게 순순히 생각할지 의문이었다.

“너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는 끄떡없어.”

씩 웃은 현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나게 날카로운 무언가가 마음 구석구석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건이라도 갖고 나와서 닦아 줬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 수연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들어갔다 갈래?”

*

“누가 왔다 갔어?”

“어? 아니. 나 혼자 마신 건데.”

좁은 현관에 들어서던 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신발을 빠르게 벗었다. 봉투 안 수북한 맥주 캔들로 손을 뻗는데 뒤이어 들어온 현재는 이미 다 본 후였다. 대충 밀어 놓은 상 위 과자들까지 빠르게 확인한 현재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을 보자 후회가 막심해졌다. 들어오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차마 그대로 보낼 수 없어서 집 안 상황을 잠깐 잊었다.

“이걸 혼자? 저번에 그 친구 온 건 아니고?”

“응. 나 술 세잖아. 그보다 일단 좀 닦아.”

마른 수건을 건네주자 현재가 말없이 머리와 얼굴을 쓱쓱 닦았다. 어쩐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시험 끝나고 먹고 자 버리려고 한 거지, 머쓱하게 덧붙이는데 현재의 젖은 티셔츠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 씻을래? 비도 맞고 찝찝할 텐데. 갈아입을 옷 줄게.”

“…….”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던 현재의 손짓이 뚝 멎었다. 전에 사 놓고 너무 커서 못 입은 박스티를 주면 맞으려나, 바지는 얼마 안 젖었으니까 그냥 입으라고 하고……. 생각하는데 뭔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연의 눈빛을 잠시 바라보던 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쓸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재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사이 제가 먹은 것을 치워 놓은 수연은 괜히 앉았다 섰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일하느라 땀도 흘렸을 테고 비도 맞았으니, 정말 순수한 의도로 말한 거였는데. 현재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 박자 늦게 났다. 이래서야 공부만 잘하지 다른 것은 헛똑똑이라는 현지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었다.

뚝, 욕실에서 물소리가 끊기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미 깨끗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재가 나왔다.

“이거 좀 많이 작은데.”

“……그러네.”

현재를 바라보며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골격 자체가 다르니 작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워낙 떡 벌어진 어깨와 몸통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달라붙긴 했다. 마치 운동복처럼 타이트했는데 그게 우스꽝스럽기보다는 좋은 몸이 도드라져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답답한데 그냥 벗고 있어도 돼?”

“어?”

“농담.”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얼굴로 말해 놓고는 현재는 태연하게 수연의 옆에 앉았다. 그새 비가 그친 모양인지 바깥은 조용했다.

내내 에어컨을 틀어 놓아 더위가 가신지라, 약하게 선풍기만 틀어 놓았다. 밤중에도 가끔 소란스럽기도 한데 오늘따라 원룸 건물 안은 적막했다.

“뭐 좀 마실래?”

“응. 고맙지.”

커피와 맥주 중 냉장고에 남아 있던 캔 맥주를 선택한 현재가 단번에 캔을 따고 꿀꺽꿀꺽 마셨다. 늘 단정한 모습에서 막 씻고 나와 풀어진 남자의 모습은 확실히 또 다른 느슨한 매력이 있었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팔이라던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칼.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어디 가?”

“엉? 나도 마실까 하고.”

“안 돼. 너 너무 많이 마셨어.”

수연은 은근슬쩍 막 떼려던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그러고 보니 원피스 안에 속바지를 따로 입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조심해야지, 앉고 나니 무릎 위로 자꾸 올라가는 천을 끌어 내리며 수연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캔을 바닥에 내려놓던 현재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지갑이며 핸드폰도 다 가게에 놓고 왔어.”

“뭐?”

“정신없이 오느라.”

“그럼 어떡해?”

“형이 알아서 집 갖고 가겠지. 뭐, 나야 비 좀 그치면 걸어가면 되고.”

갑자기 사라진 현재를 알고 황당해할 이도재의 얼굴이 그려졌다. 혼자 고생 좀 해 보라며 속이 시원해야 되는데 어쩐지 찝찝했다. 수연의 속을 모르는 현재는 태평할 뿐이었다.

“처음 왔는데 욕실부터 써 버렸네, 안에 로션 있기에 그냥 썼는데 괜찮아?”

“어? 어, 당연히 괜찮지.”

“너 안으면 항상 애기 냄새 같은 거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거였어. 난 향수인 줄 알았거든.”

그런 향 좋아하는구나, 현재가 설핏 웃었다. 현재가 집에 들어온 후로 내내 괜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편하게 있는 듯한 현재를 보니 수연도 조금씩 마음이 풀어졌다.

“딱히 그거 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피부가 예민해서 사는 것만 사서 쓰게 됐어.”

“그래? 얼마나 예민한데?”

“바꾸면 바로 트러블 나. 그래도 저게 제일 순하다고 소문난 거라서, 저것만 쟁여 놓고 써.”

“그 정도야?”

제 말에 절로 심각한 표정이 되는 현재를 보는데 조금 씁쓸해졌다. 현재는 제 말에 늘 반응이 좋았다. 아주 작은 혼잣말이라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일일이 대답해 줬고, 평소 좋고 싫은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수연의 미세한 감정 변화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수연은 불쑥 치미는 감정을 숨기려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내일 시험 어떡해.”

“대충 책 보다 오긴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 시간이니까 시간 있어. 수업은 열심히 들었으니까.”

제 말에 재깍 대답하는 말끔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피곤이 보였다. 답이 없는 수연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현재가 마저 캔을 비우더니 말했다.

“이것만 얼른 마시고 갈게. 너도 쉬어야지.”

“어? 난 괜찮은데…….”

수연이 말끝을 흐렸다. 캔을 든 채 현재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이었다.

“수연아.”

“응?”

“너 지금 취한 상태야?”

“아닌데.”

수연은 곧바로 부정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맥주를 저만큼 먹었다고 해서 취하지는 않는다. 소맥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도 머리도 하나도 안 무겁고 오히려 자고 났더니 쌩쌩해진 기분이었다.

“솔직히 아깐 좀 취하긴 했겠지, 그래도 자고 나니까 깼어.”

그래도 너무 잘 먹는 티를 내나 싶어서 대충 얼버무리는데 현재가 갑자기 제 옆을 툭툭 쳤다.

“그럼 이리 와 봐.”

“…….”

잠깐 머뭇대던 수연은 이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현재의 옆에 앉았다. 늘 혼자이던 방 안에 들어찬 남자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큰 동시에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현재가 하는 대로 앉아 있었다. 제 옷을 입은 팔이 어깨를 휘감고, 볼을 지분대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팔에 지그시 힘을 준 현재가 제 무릎 위에 저를 올려 앉힐 때도 알아서 엉덩이를 들었다.

“취한 거 맞네.”

“아니라니까.”

“이렇게 순순하게 안겨 주는데?”

“원래도 그랬는데.”

조금 억울한 기분에 입술을 삐죽이자 현재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안긴 자세 때문에 현재를 조금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직 미소가 남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연은 손을 뻗었다.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손끝으로 살살 쓰니 현재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빠졌다. 제 등을 감싼 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수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는 피부도 좋네, 단단한 눈썹 뼈를 지나 매끈하게 빠진 눈매와 생각보다 더 긴 속눈썹, 이마를 따라 볼을 매만졌다. 얼굴에 살은 없는데 피부가 좋아서 만질 맛이 났다. 가끔 현재가 저한테 하는 것처럼 볼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니 재밌었다.

“……수연아.”

그러다 손이 붙잡혔다. 제 손바닥에 짧게 키스하는 현재의 입술이 느껴졌다. 마주한 눈동자가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되게 인내심이 좋거든.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자신 있어.”

“…….”

수연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현재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지금은 좀 힘들다.”

수연의 손을 잡고 있던 현재의 손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한 손에 너끈히 잡히고도 남는 가냘픈 손목을 지나 팔을 쓸어내리는 느릿한 손길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얇디얇은 천 사이 잘록한 허리를 지분대던 손이 엉덩이를 지그시 움켜쥐자 발끝까지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방황하던 수연은 제 다리로 향한 남자의 뜨거운 눈빛을 느꼈다. 안이 보일까 꼭 붙이고 있는 무릎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저 커다란 손이 파고들 것 같았다.

“의도한 거야?”

“어?”

“나 이렇게 만들려고 의도한 거냐고.”

대답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뭔가 꾹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사이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직전까지 시원하게만 느껴졌던 방 안에 지글지글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만이 하염없이 울리는 방 안, 수연은 제 엉덩이에 와닿는 묵직한 양감을 느꼈다.

세상에는 학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딱딱한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저를 만지는 손길은 분명 느릿한데 자꾸 숨이 찼다. 호흡이 턱턱 막히고 현재의 손끝에만 모든 감각이 집중되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흰 목덜미에 현재가 푹 고개를 묻었다. 목 언저리 연한 살에 닿는 숨이 간지러우면서 야릇했다.

“나 자고 갈까?”

늘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많은 것이 함축된 문장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대답을 얻지 못한 현재가 쇄골 윗부분을 이를 세우지 않고 빨기 시작했다. 자극에 면역 없는 몸은 순진할 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다. 흣,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자 어느새 원피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현재가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꽉 잡았다. 얘도 날 시험하는 건가? 분명 직전 그의 말에 동요했지만,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수연은 입술을 달싹이다 제멋대로 말을 뱉었다.

“……마음대로.”

“…….”

순간, 현재의 행동이 뚝 멎었다. 수연은 여전히 제게 얼굴을 묻고 있는 남자의 품 안에서 색색 숨만 골랐다. 서로의 호흡만이 울리는 방 안, 침묵이 이렇게 더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목덜미에 와 닿는 그의 숨결이 사뭇 거칠어졌다고 느끼던 찰나.

“아……!”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벌어진 입 안으로 정신없이 혀가 파고들었다. 찌릿하게 파고드는 숨결에 알싸한 맥주 향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등이 닿고 제 뒷머리를 단단히 고정한 현재의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최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재는 어떤 때면 힘 조절을 잘 하지 못했다. 진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안길 때도 있었고 언젠가는 키스하다 입술이 깨물려 한동안 얼얼하기도 했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수연은 매번 그것이 못내 달가웠다. 늘 담백하다 못해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건조하다고까지 평가받는 남자가 제 앞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보면 트램펄린 위에서 정도를 모르고 높이 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그것이 성적인 자극에 미숙한 남자라서 그렇다 할지라도.

수연은 가끔 난잡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외모가 눈길을 끄니 그런 오해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겪어 본바 그는 상당한 벽을 치고 있었다. 철저히 제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어쨌든 저만 보면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그 단어 안에 안타깝게 갇힌다 하더라도…….

“흣…….”

상관없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쨌든 그가 지금 욕정하는 대상은 제가 아니던가.

남자의 성마른 손길에 의해 말려 올라간 원피스 아래가 휑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현재의 몸이 뜨거웠다. 목에 팔 감아야지, 혼잡한 키스 도중 그가 입술을 붙인 채 다정하게 명령했다. 수연은 기꺼이 수긍하며 이미 한 몸처럼 엉켜 있는 그를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다시 혀가 휘감겼다. 믿을 수 없이 뜨겁고 달콤했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유일한 남자는 그 역시 수연이 처음이라고 말했었다. 처음, 처음. 처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사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은 현재가 처음 알게 해 주었다.

정신없이 입 안의 자극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몸이 들렸다. 작은 방에서 모든 것은 손만 뻗으면 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딱딱하던 바닥에서 작지만 푹신한 매트 위로 옮겨진 수연의 몸 위로 남자의 무게가 쏟아졌다. 입술이 떨어지는 그 잠깐의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허겁지겁 달려들던 현재가 나른한 숨과 함께 수연의 목에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널 어떻게 하면 좋지?”

“……뭐가, 아…….”

현재가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완전히 물 듯 말 듯 간질간질한 게, 분명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냥 확 물어 줬으면 싶었다.

“술 먹고 사람 홀리기나 하고. 너 진짜 나쁜 거 알지?”

“…….”

그런 게 아니라고 다시금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 진짜 나쁜 거 알지. 뒷말이 심장을 잡아 오는 착각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의미는 다르다 할지라도 알고 있는 사실을 현재의 입에서 들으니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축축하게 젖은 밤처럼 물기 어린 까만 눈동자와 마주하던 현재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렸다.

“내가 처음이라서 여러모로 서툴 수는 있는데……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거든.”

젖어 있는 입술이 자꾸 마르는 느낌에 수연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바짝바짝 목이 탔다. 몇 시간 전 정도를 모르고 마셔댔던 시원한 맥주가 못 견디게 당겼다.

“진짜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배까지 끌어 올려진 원피스 안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쪽 연한 살을 뭉근히 쓰다듬는 손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는 걸까? 이대로 끝까지?’

싫으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마지막 한 걸음이 걸렸다. 첫 경험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흘려보낸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이 현재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보면 도리어 현재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거겠지.

“응? 수연아…… 대답해 봐.”

저를 짓누르고 있는 무게에 섞여 무섭게 발기한 그의 것이 옷감 사이로도 정확하게 느껴졌다. 수연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정욕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너머 저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궁금했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수연은 현재가 저를 타고 오를 때가 좋았다. 키도, 덩치도, 손도 발도 저보다 큰 남자가 제 위에 있을 때면 압도되는 느낌에서 오히려 안정이 되었다.

“응.”

분명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는데. 현재의 표정이 흐려졌다.

“응, 은 무슨.”

“…….”

“덜덜 떨면서 그런 말 해 봤자야.”

“……덜덜 안 떨었어.”

수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빳빳하게 굳었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티가 나게 떨진 않았다. 허벅지에서 손을 뗀 현재가 픽 웃으며 수연의 볼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아, 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강아지도 아니고 왜 이렇게 물어 대는지…….

“술 안 마신 날 꼬시면 넘어갈게.”

맞닿은 아래에서 열감이 느껴지는데도 그는 태연히 말했다. 아래와 위가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정작 안달 난 것은 자신이면서, 봐준다는 태도에 괜한 호승심이 들었다. 수연은 현재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그를 더 끌어당겼다. 하체를 은근히 비벼 대니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너 나 술 센 거 알잖아.”

“어차피 콘돔도 없어.”

목덜미에 쏟아지는 숨이 뜨거웠다. 정말 할 마음이 있긴 하구나, 당연한 사실에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그러나 현재가 끝까지 갈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자꾸 도발하게 되었다. 성격을 한 번에 고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야. 알지?”

“지갑 안 갖고 왔는데.”

“내 거 갖고 가.”

“너랑 처음으로 섹스하는 건데, 없어 보이게 애인 지갑에서 돈 빼서 사 올 수는 없지.”

노골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진지한 얼굴에 결국 풋, 웃음이 터졌다. 아아, 정말……. 이현재는 가끔 수연의 상상을 뛰어넘는 면이 있었다. 수연은 더 이상의 대거리를 포기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현재는 괜찮을까?’

왜 이렇게 거부감이 없을까. 남자든 여자든 가까워지는 것은 불편한데. 가끔은 현지조차도 너무 깊은 영역으로 들어올 때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처음 시작부터 꼬셔야 한다는 강박감에 익숙해져서일까? 섹스를 한 것도 아니니 벌써 몸 정이 든 것도 아니고, 저를 잘 챙겨 주고 다정하게 대해 준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허물어져 버린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흐려지는 수연의 눈빛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있던 현재가 이내 고개를 비틀며 부드럽게 키스해 왔다. 얽힌 다리 사이 점점 더 부푸는 듯한 그의 것이 신경 쓰이긴 했으나. 저를 소중하게 끌어안는 남자와 질척하게 입 맞추는 사이, 모든 것들은 차츰 희미해져 버렸다.

결국 수연은 매트에, 현재는 그 아래 누운 채 잠을 청하게 되었다. 솔직히 자고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현재는 고개를 저었던 터였다. 하긴, 옷도 그렇고 현재가 불편할 것 같긴 했다. 그럼 그대로 갈 줄 알았는데 굳이 또 제가 자는 걸 보고 간다고 했다.

“그럼 위에 올라와 있던가.”

얇은 이불이 깔려 있긴 했지만 딱딱한 바닥이 신경 쓰여 한 말에 현재가 또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입은 옷 입고 거기 누우면 안 되지.”

아까 키스할 때 이미 누운 것 같은데. 수연은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바로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현재의 시선 때문에 잠이 잘 안 들 줄 알았는데 웬걸, 솔솔 밀려오기만 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수연은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현재야.”

“응.”

“나한테 화나는 때 없어? 짜증 난다거나.”

“없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지…….”

“왜 있을 거라고 생각해?”

팔을 뻗은 현재가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뒷말은 모른 척 넘기며 수연은 다시 물었다.

“너도 내 얼굴 좋아해?”

“…….”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좋은 거야?”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수연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저를 안은 남자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현재는 꽤 오래 답이 없었다. 정곡을 찔린 걸까? 그러나 수연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술주정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면 다시는 술도 먹지 말라고 할 것 같았다. 노곤하게 풀어진 몸이 기꺼이 수마로 밀려드는데.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네.”

들릴 듯 말 듯, 한숨 같은 말이 나직하게 귓가에 감겼다. 수연은 잠결에 얼굴을 찌푸렸다. 뭔 말이지? 그러나 저를 토닥이는 커다란 손에 이내 저항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현재의 숨소리 안에서 잠드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포근하고,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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