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3)

3

‘할 게 많은데.’

수연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몇 잔 안 마셨는데, 씻고 나오니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눕는다는 게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엄마가 꿈에 나오면 꼭 이렇게 뒷맛이 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엄마인데 말이다.

연락 안 한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중고장터에서 산 조그마한 태블릿을 둔 책상에 앉으며 수연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내일도 오전 수업이니 강의 하나만 듣고 다시 자야 할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식은 수연 혼자 맞지 않았다. 당연히 엄마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웬 정장을 입은 아저씨와 꽃다발을 든 채 찾아왔다.

‘엄마, 결혼하려고.’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뱉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엄마의 재혼 상대는 의사였다. 서울에서 나서 자라 명문대 의대를 나오고 거기서 개인 병원을 낸 지 꽤 된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엄마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구구절절 묻지도 않았다.

둘은 사정상 식은 안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하고 산다고 했다. 그것도 주말 부부로. 남자 쪽에서 일단은 1, 2년 그렇게 살아 보다가 서울에서 살림을 합치자고 했던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화했다. 엄마는 더는 술집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도 학교 근처 아파트로 옮겨졌다. 남자는 엄마가 그렇게 원했던 예쁜 카페를 차려 주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어, 어디든 성적에 맞춰 가려고 했던 수연의 계획은 덩달아 변경되었다.

‘아저씨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XX대 지원했다면서.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혼자 공부해서 이 성적 나온 것도 대단한 거야.’

그때만큼은 엄마도 내내 치맛바람을 휘날렸던 사람처럼 마냥 수연의 편을 들었다. 집에서 지원만 잘 해 줬으면 벌써 여기 떴을 거라고 눈물까지 훔치기도 했다. 물론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으므로 술주정이었을 것이다.

‘어때, 공부 한 번 더 해 볼래?’

수연이 그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수연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를 믿지 않았지만 당장 서울에 기숙 학원을 끊어 주고 다달이 통장에 용돈을 두둑이 넣어 주는 남자의 재력은 믿었다. 늘 미웠던 엄마가 이번만큼은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했고, 동시에 언제 끊길지 모르는 지원을 최대한 활용해 꼭 목표한 대학에 합격해야겠다는 각오도 했다. 염치없고 뻔뻔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용할 건 다 이용해서라도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게 제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 같았다.

그렇게 1년여가 훌쩍 흘렀다. 집 한 번 내려오지 않고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렸던 수연은 기대보다 훨씬 시험을 잘 치렀다. 부푼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합격자 발표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곳에 엄마는 혼자였다. 남자는 알고 보니 두 집 살림이었다고 했다.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정리한대, 정리하고 내려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려야지.’

수연과는 달리 소식을 전하는 엄마는 태연했다. 따지고 보면 엄마로서도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수연은 엄마가 크게 충격받았으리란 생각에, 혹시나 합격하면 혼자 서울로 가는 것에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쓰였던 자신이 멍청해 보였다.

아저씨가 차려 준 카페는 조금만 성실했어도 잘됐을 목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수연의 엄마는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알바생에게 일을 맡겨 놓고 놀러만 다녔다. 그런 엄마의 일을 돕던 수연은 또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카페에 들어오는 엄마를 보고 즉시 앞치마를 집어 던진 후, 카페에서 뛰쳐나왔다. 울화통이 터지는 속을 말할 사람이 없어 혼자 길거리를 배회하다 밤늦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연결된 통화에서 수연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을 던졌다.

‘나 이제 엄마 얼굴 안 보고 살 거야.’

진심이야, 덧붙이는 수연의 말에 핸드폰 너머 잠시 침묵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만하면 홀몸으로 나도 너 잘 키웠지. 공부도 다 시켜 놨고 얼굴도 엄마 닮아 이쁘니까 잘 살 거야.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다음 날, 수연은 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을 낡은 캐리어에 쑤셔 넣고 집을 나왔다. 매달 아저씨가 줬던 용돈은 거의 그대로 통장에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객기였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었는데. 어쨌든 그 돈으로 일단 목표한 학교 주변 제일 싼 원룸을 구했고, 곧바로 알바를 구해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벌기로 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 날, 그 작은 방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질렀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고 안 되면 어떡하지 너무 걱정되고 심란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숨죽여 울었다. 저를 축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는 것도 잠시, 다시 돈을 벌러 알바를 갔다.

수연은 제가 독한 건지 엄마가 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명절 때도, 생일 때도, 아플 때도 외로울 때도 수연은 혼자 이 방에서 지냈다. 그 후 정말 한 번도 엄마와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엄마의 생일 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가 없는 것처럼 살던 엄마였으니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였다.

어쨌든 수연은 지금 이 상황에 자신이 만족한다고 믿었다. 혼자일 때는 억울하지 않다. 남자랑 뒹구는 엄마를 많이 봐서, 남자로 인해 좋은 꼴을 못 보는 거 많이 봐서, 무심한 엄마에게 상처받아서. 뭐 그런 거창한 이유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냥, 더는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혼자 있으면 그럴 일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끔 마음에 사무치는 고독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고 나면 행복할까?’

하지만 오늘, 그토록 원했던 저만의 공간인 조그마한 방 안에 혼자 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까.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돈 벌며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게 제 목표라고 내내 생각했는데.

아무튼 이도재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다 그의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날 이후로 자꾸 마음이 흐트러지는 건 사실이니까.

수연은 결국 보고 있던 영상을 일시 정지하고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현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수연은 세 개의 메시지를 연달아 읽었다. 발신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오늘 맛있는 거 못 먹으러 갔네, 내가 먼저 말해 놓고 미안.]

[잘 자고 내일 보자.]

누가 보면 알콩달콩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네, 무심하게 내려가던 수연의 시선이 멈칫했다. 채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였다.

[넌 거의 안 먹었잖아.]

스크롤을 올려보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는 그의 말에 지금 먹지 않았냐는 퉁명스러운 제 메시지가 있었다. 곱창전골을 거의 먹지 않은 저를 보고 보냈던 모양이었다.

‘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보다 지금 늦은 시간인데. 살짝 고민하던 수연은 결국 또 답을 보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도저히 뭐라 보낼지 알 수가 없어서.

*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한 수연은 쏟아지는 졸음을 찬물 세수로 쫓고 학교에 갔다. 어찌어찌 첫 수업을 마치고 다음 수업으로 이동했다. 기억에 따르면 이것도 같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현재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뭐라고 보내야 하지.’

그래도 읽고 씹는 걸 두 번이나 하긴 그래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이미 텀이 생기니 보내기가 껄끄러웠다. 그래도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쯤에서 제가 먼저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옆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옆에 자리 없으면 앉아도 될까요?”

“응.”

솔직히 잘 모르는 여후배였는데, 개강 총회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 말하는 거 보니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거기 한번 갔다 왔다고 제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저 너무 졸려서 커피 안 먹는데 뽑아 왔거든요, 선배님 것도 하나 뽑아 올까요?”

“아니, 괜찮아.”

들고 있던 캔 음료를 책상 위에 놓은 그녀는 상당히 친화력이 좋은지 제 옆에 딱 앉아 이것저것 말을 걸어 왔다. 대강 대답해 주는데 옆에서 낮은 탄성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말하는 톤은 여전히 높았지만, 어쩐지 저를 봤을 때와는 어감 자체가 달랐다. 안녕, 짧게 답한 현재는 수연을 보고는 딱히 다른 인사 없이 눈만 슬쩍 휘어 웃어 보이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제게 보였던 얼굴과 확연히 다른, 친밀하게 느껴지는 모습에 여자 후배가 멈칫했다.

혼자 긴장해 그를 알 리 없던 수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조금 민망해졌다. 그래도 해야지, 수연은 뻣뻣하게 말을 걸었다.

“……자서, 못 했어.”

“응?”

웅얼대듯 중얼거린 말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현재가 고개를 조금 더 가까이 숙였다. 아, 진짜.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려니 참 힘들었다. 수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찍 자서 메시지에 답 못 했다고.”

“아아.”

수연의 말에 현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솔직히 별다른 말도 아니었는데 상당히 기분 좋아 보였다.

“괜찮아.”

다정하게 덧붙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문득 그에게서 지난번 느꼈던 좋은 향이 났다. 시원하면서도 성숙한 느낌의 향이 그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후각에 예민한 편인 수연이 무슨 향수 쓰나 나중에 물어볼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저, 선배님……앗!”

“……!”

갑자기 들이닥친 날벼락에 수연은 외마디 탄식조차 뱉지 못했다. 현재에게 뭔가 말을 걸 모양이었는지 고개를 쭉 빼던 여자 후배가 실수로 테이블 위 캔 커피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후배의 얼굴에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아, 어떡해!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어떡하지…….”

“…….”

하얀 블라우스에 번진 갈색 얼룩을 내려다보는데 난감함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새까맣거나 짙은 회색 맨투맨이나 입고 올걸. 나름대로 현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나마 여성스러운 느낌의 옷을 골랐던 거였는데……. 안 그래도 묘하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꽂혔다.

“이걸로 일단 닦으세요! 아, 진짜 죄송해요. 선배님…….”

어떡하느냐며 황급히 제게 가방 안 물티슈를 건네는 후배는 아주 울기 직전이었다. 솔직히 짜증 난 건 사실이었지만 수연은 별말 없이 그걸 받아 들고 일단 제 옷을 벅벅 문질렀다. 물론 그 정도로 얼룩이 지워질 리 없고 오히려 더 번지는 느낌이었다. 하필 가슴께에 정통으로 튀어서 더 민망했다.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돼.’

카디건이라도 입고 올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사이 현재는 바닥에 나뒹굴어진 캔을 줍고 후배에게 물티슈를 받아 의자와 바닥에 흘린 액체를 수습했다.

“죄송해요, 흰 옷인데…….”

“괜찮아. 모르고 그런 건데.”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수에 따지고 들 수도 없지 않은가. 일단 머리카락으로 대충 가리고 버티다 수업 끝나면 잠깐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이 느슨하게 묶고 있던 머리를 풀려 하던 찰나.

“조심했어야지.”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딱 떨어지는 말투에 후배도 수연도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아……네! 진짜 죄송해요.”

“아니, 인제 그만 사과해도 돼.”

울상이 된 후배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절로 그 말이 나왔다. 현재가 까칠하게 반응하니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다시금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재가 입고 있던 집업 점퍼를 벗더니 수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동시에 뒤에서 들리던 수군거림이 뚝 멈췄다.

“이거라도 입고 있어.”

“어…….”

무심결에 걸치게 된 옷에 수연의 입에서 어색한 소리가 나왔다. 점퍼를 벗은 현재는 그 안에 비슷한 색이 짙은 네이비색 니트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만약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됐다고 하고 곧바로 돌려줬겠지만.

‘입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은 수연은 조심스럽게 그 안에 팔을 꿰어 보았다. 워낙 체격 차이가 나는지라 당연히 소매도 길고 품도 커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입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긴 했다. 그사이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수연은 길게 늘어진 소매를 접어 올리며 수업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입고 있는 옷에서 직전까지 좋다고 생각했던 현재의 향이 났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눈 깜짝할 새 달이 바뀌고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수연은 점심 대용으로 편의점에서 산 초코바를 우물거리며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후 첫 수업이 도서관 바로 앞 건물이니 공부하다 이동하면 될 것 같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단맛으로 피곤함을 달래는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수업 끝났어?]

[점심 같이 먹을까?]

“…….”

친근하기 그지없는 메시지에 수연은 잠시 멈칫했다. 발신인은 당연히도 현재였다. 제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연락 오는 사람은 가끔 다미가 전부였으나, 그마저도 다미에게 최근 남친이 생기고서는 아예 끊겼다.

그동안 수연은 현재와 계속 연락하고 있었지만, 딱히 관계에 큰 변화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두어 번 정도 학식을 같이 먹은 게 전부랄까. 그래도 지난주 금요일에는 밖에서 둘만 만나긴 했다.

현재의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한적한 교외의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을 해 놓은 덕에 호수가 보이는 탁 트이는 경관을 바라보며 오붓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유명 호텔에 있었다던 셰프가 내놓은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었고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하니 분위기도 좋았다. 정말 딱 데이트의 정석 같은 코스였다.

자기가 가자고 해 놓고 정작 현재는 식사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수연을 잘 챙겨 주긴 했지만, 오히려 맨 처음 만났던 술자리에서보다 더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내일 주말인데 뭐 해?’

식사가 끝날 때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수연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계속 과외 있어.’

‘아…….’

그렇구나,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연은 침묵했다. 내가 왜 그랬지. 꼬셔야겠다고 생각해 놓고서는 있지도 않은 과외를 말하다니. 꼬셔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미끼를 주는데도 못 먹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맞는 걸까. 별다를 바 없이 이어지는 현재와의 일상에서도 문득문득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선을 긋는 자신을 눈치 빠른 현재가 은연중에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지도.

‘할 거 많은데.’

잠깐 회상에 잠겼던 수연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배도 좀 고프고 해서 현재랑 학식이라도 갈까, 생각했지만 다시 왔다 갔다 하면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 같았다. 시험 기간과 매번 맞물리는 과제 폭탄이 날아온지라 시간을 유의미하게 써야 했다. 마음을 정한 수연이 키패드를 누르던 순간이었다.

“……!”

별안간 뒤에서 제 어깨를 턱 잡아 오는 손에 놀란 수연은 홱 뒤를 돌았다. 동그랗게 된 커다란 눈동자에 저를 보며 씩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담겼다.

“여기 있었네.”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덧붙인 현재가 수연의 어깨에 올린 제 손을 자연스럽게 뗐다. 수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놀랐잖아.”

현재 앞에서는 나름대로 사근사근하게 말하려고 하는데 매번 그게 쉽지는 않았다. 수연은 최대한 목소리를 다듬으며 물었다.

“너 여기 왜 있어?”

“응? 나 수업 인문대여서. 건물 나오는데 저만치 너 오는 거 보이더라.”

“…….”

눈도 좋네,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현재가 갑자기 조금 인상을 썼다.

“뭐야, 설마 그게 점심?”

눈짓으로 제 초코바를 가리키며 하는 말투는 명확히 불만스럽다는 투였다. 수연은 반쯤 남은 초코바를 대충 껍질에 싸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냥 먹는 건데, 먹고 싶어서.”

“밥은?”

“별로 생각 없어서. 도서관에서 과제 좀 하다가 수업 가려고.”

“…….”

대수롭지 않게 뱉은 제 말에 현재의 입이 꾹 다물렸다. 뭐야……. 수연은 어느새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이 된 현재를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최근 하게 된 생각이지만 현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도재보다 어려웠다. 차라리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저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이도재는 투명해서 알기 쉬운데, 제가 좋다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은 이 남자는 가끔 속을 알 수 없어 곤란했다.

“그래도 뭘 먹어야지, 자꾸 그러면 속 버려.”

잠깐의 정적 후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왁자지껄한 캠퍼스 안에서 저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유독 선명하게만 들렸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수연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대답했다.

“시간 없단 말이야. 나 진짜 과제 급해, 당장 전필 수업이 다음 주 제출인데 아직 시작도 못 했어.”

이건 사실이었다. 밤잠 아껴 가며 매달렸어도 과제는 끊임없이 솟아났고, 당장 2주 후로 닥친 중간고사도 문제였다. 족보 탄다는 과목의 족보는 구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끝낸 건 현재와 같이 하는 조별 과제 정도였다. 그나마 현재가 일당백을 한 덕분에 일찍 끝난 거였다.

“내가 도와줄게. 박재연 교수님 거 듣는다고 했었지?”

“어, 그렇긴 한데.”

내가 그것까지 말했던가?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현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밥 먹고 같이 도서관 가자. 어차피 다음 수업 같이 듣는 거니까 거기서 같이 이동하면 되고. 나 그 수업 직전 학기에 들었거든.”

“너 그거 성적 어떻게 받았는데?”

“에이쁠.”

“…….”

당당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수연은 문득 정말 제가 계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는 곁에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연락은 해도 귀찮을 정도는 아니었고, 바쁘다고 하면 깔끔하게 물러날 줄도 알았다. 언젠가 다미가 넘겨짚었던 것처럼 연애 경험이 많은 것 같다고 할까, 아님 눈치가 빠르다고 할까. 물론 지금처럼 틈이 생기면 잘 파고드는 걸 보면 전자에 가까운 듯하지만.

어쨌든 수연은 혼자 도서관에서 씨름하는 것보다 눈앞의 남자와 밥을 먹고 그의 도움을 받아 과제를 같이 하는 게 일거양득이라는 결론을 빠르게 내렸다.

“알았어. 빨리 먹고 오자.”

“그래.”

언제 표정이 굳었었냐는 듯, 또다시 현재가 환하게 웃었다. 수연은 저를 보고 웃는 남자의 얼굴을 잠시 빤히 응시했다. 도대체 이현재보고 무심하다는 평을 내리는 애들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잘만 웃는데.

어느새 완연한 봄이 되어 버린 캠퍼스를 그렇게 둘이 같이 걸었다. 현재는 수연과 보폭을 맞추려는 건지 조금 느리게 걷고 있었다. 눈앞에 흐드러지게 핀 노랗고 하얀 꽃들과 살랑살랑 뺨을 스치는 봄바람이 그제야 느껴지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현재는 수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꽃 완전히 다 폈네, 예쁘다. 그치?”

“어.”

“꽃 좋아해?”

“……뭐, 꽃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지 않아?”

“하하, 그렇지.”

사방에 핀 꽃나무로 몽글몽글한 봄기운에 시원한 웃음소리가 묻어 들렸다. 뭐가 웃기지? 수연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제가 딱히 재밌는 말을 하거나 호응을 잘해 주는 것도 아닌데 현재는 꼭 저렇게 잘 웃어 줬다. 그냥 툭툭 말을 뱉어도 알아서 대꾸를 잘 해 주니 편하긴 했다.

“아, 그거 줘 봐.”

“어?”

식당 건물 앞, 갑자기 이현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지, 수연이 의아하게 묻자 현재가 수연의 주머니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대는 것을 꺼내는데 현재가 빠른 손놀림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이건 압수.”

“…….”

“주머니에 있으면 녹을 것 같아서. 낮에 덥잖아.”

이걸 세심하다고 해야 하나? 수연이 황당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초코바를 제 가방에 대충 넣은 이현재가 말을 붙였다. 그건 왜 또 거기 넣는 건지……. 눈앞에서 간식을 빼앗긴 수연이 입술만 달싹이는데 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밥 먹고 너 좋아하는 모카 라테 먹자. 나도 요즘엔 그게 맛있더라고.”

“……그래.”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목표가 있어 그런다지만, 요즘 자신은 현재의 말에 상당히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딱히 괴롭지 않다는 거였다.

‘진짜 뭐 하는 건지.’

속으로 한숨을 한번 쉰 수연은 현재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후문에 위치한 널찍한 가맥집은 빈 테이블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점심 장사도 해서 학생들이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가거나 가볍게 술을 마실 때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3년째 학교를 다니면서도 수연은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자, 짠 할게요! 경쾌하게 맞부딪히는 잔을 든 채 수연은 생각했다. 정말 이현재 때문에 안 하던 짓 많이 하네.

“먹지 마.”

바로 제 옆에 앉은 현재가 슬쩍 제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나직하게 덧붙이며 맥주가 든 잔을 내려놓자 현재가 잘했다는 듯 설핏 웃었다.

‘암튼 유난이라니까.’

정확하게는 몰라도 그간 이현재가 만나 왔을 여자들은 꽤 피곤했겠다 싶었다. 사귀지도 않는데 이 정도면 사귀고 나서는 엄청나게 단속할 타입이었다. 어쨌든 현재 역시 잔만 만지작대는 게 역시 딱히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야, 너는 곧 군대 갈 놈이 그래도 낯빛은 좋다?”

“아, 몰라. 말도 꺼내지 마. 솔직히 아직 실감 안 나니까.”

“당장 다음 주인데 실감이 안 나? 너도 참 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테이블 위 둘러앉은 사람들에게서 쉬지 않고 대화가 흘러나왔다. 오기 전 이미 마시고 있었는지 벌써 술병이 꽤 되었다. 벽 끝에 붙어 앉은 수연 옆에는 현재만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이제는 만나면 인사도 하는 사이가 된 윤성과 하윤이 앉아 있었다.

원래 곧바로 집에 가려던 계획은 현재가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바뀌었다. 현재가 실제로 자료 조사에 필요한 책도 꼭꼭 집어 주고 어떤 식으로 주제를 풀어 나가면 좋을지 전반적인 방향을 알려 주기까지 해서 마음이 편해진 수연은 승낙했다. 현재는 근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냥 학식으로 해결하자는 수연의 말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나오는데 현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 그게 오늘이었나? 어색한 목소리를 내던 현재는 수연에게 군대 가는 동기를 위한 자리에 잠깐 얼굴을 비치고 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현재가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내가? 왜?’

‘아니…… 그냥. 정말 한 30분? 정도만 앉아 있다 오게. 네 시간 정말 많이 안 뺏을게.’

너도 아는 애일걸, 박한수라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의 이름을 말하는 현재는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그냥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게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가 저러고 있으면 참 뭐랄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연은 못 이기는 척 답을 내주었다.

‘딱 30분만 있을 거야.’

‘알았어.’

‘나 갑자기 가서 거기 있는 애들이 싫어하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엄청 좋아할걸?’

후문에 있는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평소보다 조금 더 불퉁대는 수연에게 현재는 언제나처럼 잘 맞춰 주었다. 도착했을 때는 예상대로 다들 놀라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반겨 주는 분위기였다. 의자까지 빼 주는 과한 친절을 베푸는 현재의 옆에 앉으며 수연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원은 현재와 수연까지 포함해 열 명 남짓이었다. 낯익은 얼굴도 있지만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국수는 참 맛있네.’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 수연은 막 나온 따뜻한 잔치국수에만 집중했다. 일단 30분이라고 했으니까 칼같이 시간을 지키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중간중간 대화에 섞여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듯한 장난스러운 말들이 귓가에 흘러들어 오긴 했지만 신경도 안 쓰고 무시했다. 현재도 딱히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고.

“근데 이현재 너는 왜 술 안 마시냐? 곧 시험이라도 자제해야 되는 건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도 한수 가는데 한잔해야지.”

누군가의 말에 현재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 오늘은 술 마시면 안 돼서.”

“왜? 차 갖고 왔어?”

“어.”

“에이, 대리 부르면 되지.”

“그냥 오늘은 안 되는 날이야.”

그게 뭐냐? 싱거운 답에 여기저기서 야유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왜 그러냐고 꼬치꼬치 묻는 말에도 현재는 대충 답을 흐렸다. 인원이 꽤 있다 보니 다들 한 마디씩만 해도 소란스러워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대충 노닥이는 거 듣다 갈 생각이었는데.

“우리 게임 해요!”

불쑥 들이밀어진 누군가의 제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연은 술자리 게임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하게 되면 자리가 길어질 것 같았다. 와중 어떤 게임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들은 어느새 착착 룰을 정하기 시작했다.

“음, 걸리는 사람한테 질문하고 대답하기 곤란할 때는 원샷하기!”

“야, 야. 시험 기간인데 소맥은 좀 그렇다. 맥주로 퉁쳐.”

“그럼 빼지 말고 그냥 대답하면 되잖아.”

“참나, 그건 그렇네.”

게임은 병뚜껑을 돌려 가리킨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는 상당한 아날로그식이었다. 수연은 감흥 없는 얼굴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어 번 다른 사람에게 질문이 갔다. 수연이 생각할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재밌는지 다들 웃고 난리가 났다. 세 번째는 윤성이었다.

“오, 윤성이. 또 센 거 하나 가야지.”

한수 옆에 있던 성혁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수연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성혁과 현재, 이도재까지 같이 고등학교 동창이라 했었다.

‘쟤가 이도재한테 말할 것도 같고.’

되게 친한 사이 같았는데 어쩌면 저와 현재가 이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을 성혁이 이도재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말했을 수도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속 좀 끓여 보라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현재 옆에 몸을 조금 붙였다. 강한 마음속 의지가 만들어 낸, 정말로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

어깨가 맞닿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저를 응시하는 현재의 눈빛에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수연은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지목된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조금 상기된 표정의 윤성이 보였다.

“지금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 없다. 딱 이것만 시원하게 대답해.”

“야, 센데?”

성혁의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초조하게 방황하던 윤성의 시선이 얼핏 수연에게 닿던 찰나.

“…….”

침묵하던 윤성이 그대로 눈앞의 소맥 잔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그 많은 것을 한 번에 꿀꺽꿀꺽 넘기는 것을 보고 옆에서 난리가 났다. 조금 전 걸렸던 두 명은 곤란한 기색을 띠면서도 답을 했지, 술을 마시지는 않았었다.

“와 씨, 야. 이건 그냥 인정하는 거 아니냐?”

“그니까. 있다고 하고 말지 왜 마셔. 암튼 최윤성 순진해 빠져 가지고. 괜찮아? 존나 빨리 마시더만.”

“음. 근데 난 왜 누군지 알 거 같냐? 어? 나만 그래?”

잔에 있는 술을 다 비우고 손등으로 입을 닦는 윤성을 보며 다들 한 마디씩 보탰다. 수연이 보기에도 윤성은 그냥 맞다 대답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나저나…….

‘30분 된 거 같은데.’

주머니 속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던 순간이었다.

“……!”

그대로 제 손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의 온기에 수연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평소 잘 놀라지도 않는 수연이지만 순간 턱 숨이 막힐 정도였다. 눈이 커진 수연이 옆을 흘끗했으나 현재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자, 자. 이거 걸리라는 사람은 안 걸리네. 잘 좀 돌려 봐, 성혁아.”

테이블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눈치챈 사람은 당연히도 아무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채근에 다시금 술을 제조하던 성혁이 오케이, 소리와 함께 병뚜껑을 돌렸다. 슬슬 고조되는 분위기에 다들 신이 난 분위기였다. 그러나 수연은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현재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미약하게 바르작거려 봤지만 현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힘주어 손을 빼기도 애매했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졌다.

그간 현재와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스킨십은 없었다. 아까처럼 어깨를 잡거나, 뭘 건네줄 때 자연스럽게 손이 스친다거나. 그 정도야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건 없었단 말이다. 솔직히 손잡을 거라면 교외로 빠져 단둘이 식사를 할 때가 더 나은 타이밍 아니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렇지, 차수연!”

“오, 대박!”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놀란 수연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다들 먹잇감을 눈앞에 둔 사람들처럼 저를 보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아, 질문 뭐하지. 수연이 너 진짜 솔직하게 대답해 줘야 한다?”

“혹시 모르니까 흑기사 금지.”

샐쭉한 여자의 목소리 너머 성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현재를 쓱 바라본 성혁이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자, 윤성이한테 했던 질문 그대로 할게. 이 안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 없다?”

성혁의 말에 다들 맥 빠진 소리를 뱉어 냈다.

“뭐야, 질문 개별로.”

“맞아요, 오빠. 핵심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냥 현재랑 사귄다, 안 사귄다. 이거로 했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껏 별말도 없는 사람들까지 말을 보태는 것을 보면 확실히 과열된 분위기였다. 수연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암튼 왜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건지. 그 와중 누군가에 의해서 벌주가 아예 없어졌다. 어떻게든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수연은 길게 한번 숨을 뱉어 내고 입을 열었다.

“없어.”

“…….”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나온 말이었다. 일순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수연이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아…… 진짜로?”

“어.”

“그, 렇구나. 그렇지, 그럴 수 있지.”

뭐 문제 있냐는 듯한 당당한 표정에 성혁이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 와중에 하윤이 그거 보라며 제 말이 맞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수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현재에게는 좀 그랬지만 따지고 보면 딱히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응, 이라고 대답했을 때 난리 날 분위기가 뻔히 보여 그게 싫었을 뿐. 그 반발심이 현재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이겼다.

다들 뭐라 뭐라 한 마디씩 보태는 와중 수연은 현재에게 잡힌 손을 빼려 슬쩍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 계속 손을 잡고 있기는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

빼기는커녕 더 지그시 힘을 주어 오는 통에 수연은 당황했다. 아플 정도는 아니어도 악력을 주어 오는 남자의 힘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새 돌아가던 병뚜껑이 현재를 가리켰다. 한수가 포효했다.

“오케이!”

“좋아, 좋아. 이번 질문할 사람 누구야, 하윤이?”

“현재 너는 진짜 대답 제대로 안 하면 안 된다. 알지? 남자답게 딱 진실만을 말해라.”

“아, 또 우리 현재가 거짓말하는 타입은 아니지.”

아까 현재가 술은 안 마신다고 한 탓에 테이블 중앙에 놓인 술잔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대신 한수와 성혁이 대놓고 압박을 주는 추임새를 넣었다. 사뭇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까 수연이 걸렸을 때와 같은 듯하면서도 분명히 또 다른 분위기였다.

“어, 그럼 질문할게요? 걸린 건 걸린 거니까 진짜 진짜 솔직하게 말하기.”

애교 섞인 말투로 씩 웃은 하윤이 수연을 한번 보고 다시 현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오빠, 수연 언니 좋아하세요?”

“그렇지!”

“오, 좋다.”

“야, 이거 완전 돌직구 아니냐?”

하윤의 질문에 왁자지껄한 탄성이 터졌다. 누군가는 아예 박수까지 치기도 했다. 저절로 꼴깍 침이 넘어가며 손이 꼼지락거렸다. 내내 별다른 반응이 없던 현재가 하윤을 바라보며 느리게 입술을 뗐다.

“질문이 참 노골적이네.”

“아…… 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얼핏 평온한 말투였지만 탐탁지 않은 게 드러났다. 그런 기색을 느낀 것은 수연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윤이 얼굴을 굳히는 사이,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다른 이들은 얼른 대답하라고 난리였다.

“우리 이거 보려고 게임 한 거 아니냐.”

“그래. 여기서 탁 털고 가자.”

“뭘 털어, 털긴…… 어?”

별안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제야 수연은 내내 잡고 있던 현재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현재가 먼저 놓은 거였지만.

“…….”

다들 제게 집중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벌주를 깔끔하게 마신 현재가 탁, 잔을 내려놓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한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야……너 술 오늘 마시면 안 된다며?”

“그랬지.”

“이 자식, 뻥이었냐?”

“아니. 진짜였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된 것 같은데?”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는 한수를 보던 현재가 피식 웃었다.

“됐어. 한 잔인데 뭐. 그 대신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뭐? 벌써?”

“어, 진짜 미안. 지금 수연이랑 과제 하고 있다 온 거라, 대신 주말쯤 한 번 더 보자.”

“야, 나 내일 지방 내려간다니까? 부모님 뵈러 갔다가 바로 간다고. 아까 너 오자마자 얘기했는데 너 안 듣고 있었지.”

억울함이 가득 담긴 한수의 목소리에 결국 다들 웃음이 터졌다. 현재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꼈는지 다들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과제 핑계를 대고 현재와 같이 자리를 일어나는데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이래서야 정말 사귀는 거라고 광고를 하는 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 현재는 제게 고백도 안 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어정쩡한 건 좀 그런데.’

얘는 원래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하나?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는 현재를 따라 가게를 나오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현재는 애들한테 말도 안 하고, 열 명이 먹은 테이블을 자기가 혼자 다 계산하고 가는 거였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미안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긴, 상관없지.’

제가 보고 싶은 그림은 딱 하나였다. 누가 봐도 알콩달콩한 모습을 이도재 앞에서 보여 주는 것. 물론 대부분의 캠퍼스 커플이 그렇듯 얼마 안 가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만……. 그것 이외에는 딱히 뒷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최대한 그 과정을 과 사람들이 몰랐으면 했다.

어쨌든 이도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할 바에는 코라도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지긋지긋한 장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구질구질하고 나쁘다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는 화병에 걸릴 것 같았으니까. 이도재를 만나고 온 후부터 한동안 고생했던 불면증이 다시 도진 수연이었다.

“30분보다 훨씬 더 썼네, 미안.”

“……됐어. 어쩔 수 없지.”

이미 바깥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도서관이 나온다.

‘빨리 고백해 주면 좋을 텐데.’

학생들로 가득했던 몇 시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길을 나란히 걸으며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짓도 오래 못 할 일이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빨리 보고 싶었다.

“…….”

“…….”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늘 먼저 말을 거는 쪽인 현재도 침묵했고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 수연 역시 입을 다물었다. 미풍에 흩날리는 꽃잎으로 물든 거리는 실로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 폭의 그림 같았으나, 정작 그 장면 속의 주인공들은 냉랭했다.

‘왜 이러지.’

갑자기 가파르게 가라앉는 기분에 당황스러운 것은 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남들 몰래 대담하게 제 손을 잡은 현재 때문에 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를수록 묘했다. 뭐라 딱 잘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암튼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역시 연애 엄청 해 본 것 같아.’

그 언젠가 다미가 했던 말로는 그랬다. 물론 소문이지만, 이현재 여자관계가 화려하다는 말이었다.

‘그거 근거 있는 얘기야? 고백하는 애들 칼같이 잘 자른다며.’

대충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심드렁하게 묻자 다미는 건너 건너 들은 얘기라 확실치는 않다고 말을 흐렸다. 그러다 그럼 그 외모에 그럼 아무도 안 만나고 다녔겠다는 말을 하며 갑자기 열을 올렸다. 눈이 높아서 그렇게 웬만한 여자로는 차지도 않는 거며, 얼마 전에도 스무 살짜리 엄청 예쁘고 귀여운 애가 고백했는데 만나는 사람 있단 말로 찼다 했다고. 물론 이현재가 누굴 만나든 알 바 아니었던 수연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뒤의 이야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이도재도 현재가 눈 높다고 그랬었지.’

술집에서 이도재가 한 말까지 생각나자 어쩐지 더 기분이 땅속 깊은 곳까지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진짜 이상해.’

수연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잘되고 있지 않은가. 수연은 처음부터 제게 자연스럽게 어필하는 현재가 딱 봐도 능숙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가끔은 그래 보이지 않게 순진하게 굴 때도 있지만, 그조차 의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마음이 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적을 위해 현재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만약 현재가 윤성처럼, 누가 봐도 정말 순진하고 제가 좋아 죽겠다는 것을 힘겹지만 분명하게 표현하는 타입이었다면 글쎄…… 아무리 저라도 정말 못 할 짓이었을 것이다.

‘근데 얘는 아니니까.’

수연은 진심으로, 현재가 제게 가벼운 마음이라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뒤풀이 때 처음으로 말을 섞었는데 갑작스럽게 제게 호감을 부딪쳐 왔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딱히 자의식 과잉은 아니지만 수연은 현재 역시 제게 호기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혁의 말대로 개도도한,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좀 짜증 난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저니까. 어쩌면 한번은 넘어 보고 싶다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손도 아무렇지 않게 잡았겠지.

‘짜증 나.’

그래, 그 기분이 맞았다. 그냥 정말 다 짜증 났다. 손 한번 잡힌 것 가지고 화들짝 놀랐던 종전의 제 모습도 짜증 났고, 은연중 그것을 싫다고 느끼지 않았던 자신에게도 환멸이 들었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것 같은 현재도 지금은 꼴 보기 싫었고, 무엇보다 이 미친 짓의 원흉이 된 이도재를 생각하면 제일 열받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 없던 일로 할 수도 없고.

수연의 하얀 얼굴에 수심이 감돌았다. 제 생각에 갇혀 있는 수연은 옆에서 저를 지그시 주시하는 남자의 눈빛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걷고, 또 걸었을 뿐.

어느새 커다란 도서관 건물 앞에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진동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 잠깐만.”

양해를 구한 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굳이 말 안 하고 받아도 되는데. 비뚤어진 생각을 하며 수연이 그를 따라 잠시 멈춰 서는데 핸드폰을 타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 말하는지까지는 몰랐지만 워낙 목소리가 커, 차분한 현재의 목소리와 대조되었다.

“응. 형, 나 지금 학굔데?”

형? 이도재?

발신인을 알아챈 순간 수연은 엄청나게 집중했다. 별다를 것 없이 전화를 받던 현재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뭐? 아니…… 그럼 잠깐 나 좀, 어?”

벌써 갔다고? 덧붙이며 수연을 흘낏 바라보는 현재에게서 난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러지? 평소 늘 여유로워 보이는 평소와 다른 모습에 의아해진 수연은 멀뚱멀뚱 그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알았어, 응, 어쩔 수 없지. 아냐,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말투로 통화를 종료한 현재가 긴 숨을 한번 뱉었다.

“왜?”

뭐 심각한 일인가, 수연이 묻자 현재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형이 차를 가져갔다고 해서.”

“차? 네 거?”

“응. 형 차 지금 수리 맡겼거든, 급하게 쓸 일이 있다고 아까 와서 가져갔나 봐. 예비 키를 형이 갖고 다니니까.”

아주 키도 사이좋게 갖고 다니는구나, 또 한 번 속으로 혀를 차던 수연은 다시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근데 차 갖고 가면 안 돼?”

그렇게 죽고 못 사는 형제 사이에 차 좀 가져갔다고 그렇게 당황할 건 없어 보이는데. 어차피 술 먹어서 운전도 못 할 테고 말이다. 수연의 돌직구에 잠시 멈칫하던 현재가 이내 흐리게 웃었다.

“아니, 갖고 간 거 자체는 전혀 상관없는데 그냥…….”

“그냥?”

“그 안에 뭐가 좀 있었거든.”

얼버무리는 말투가 석연치 않았지만 수연은 그러려니, 그냥 흘려 넘겼다. 별일은 아닌 것 같고, 아주 잠깐 귓가에 들렸던 이도재 목소리에 다시금 기분이 가라앉기만 했다.

아주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미 완전한 어둠이 깔린 주변을 희미한 불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뭔가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말로 뱉으려니 할 말이 없는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 수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오늘은 먼저 갈게. 시간도 늦었고, 그냥 집에서 하려고.”

“어?”

예상하지 못했는지 현재가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간다니 그럴 만도 했다.

“미안해. 아까 거기서 시간 너무 잡아먹었지.”

곧바로 또다시 사과해 오는 단정한 낯을 바라보며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집에서 편하게 하려고.”

“…….”

수연의 말에 현재의 입이 다물렸다.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수연은 왜인지 초조해졌다. 이상하게, 늘 제게 먼저 살갑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현재가 가끔 이런 식으로 입을 닫을 때면 자신이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하는 느낌이었다.

“참, 안 데려다줘도 돼. 가다가 들를 데도 있고 해서 암튼 먼저 갈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기분으로 현재와 계속 있다가는 뭔가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집 가서 잡생각 지우고 공부나 해야지. 안 그래도 시간도 없는데 요새 현재랑 다니느라 너무 놀았던 느낌이었다.

“내일 봐.”

빠르게 말을 덧붙인 수연이 그대로 뒤돌던 순간이었다.

“수연아.”

제 팔목을 잡아 오는 손에 수연은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짧은 물음에서 수연은 배어 나오는 귀찮음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현재가 뭐라 붙잡아도 집에 갈 요량이었다. 무심하다 못해 냉랭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에 잠시 멈칫하던 현재가 한쪽 눈을 슬쩍 찡그렸다. 어색하거나, 곤란할 때 그가 그런 표정을 한다는 것을 그간 같이 다니며 알아 버린 수연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응, 잠깐만 시간 내 줄 수 있을까.”

장소가 도서관 앞이다 보니 밤인데도 지나가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수연은 괜히 그들이 신경 쓰여 주위를 살피는데, 현재는 오직 저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지금인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자신이지만 느낌이 왔다. 이건 고백의 타이밍이었다.

“알았어.”

수연은 제가 생각해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중앙 도서관 뒤쪽은 한창 피어난 봄꽃들의 향연이었다. 멀찍이 있는 벤치에 사람이 있는 것도 같았으나 가로등이 있어도 원체 어둑한 곳인지라, 딱히 현재와 수연이 있는 곳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

“…….”

말없이 걷던 현재가 커다란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란히 걷던 수연 역시 그를 따라 섰다. 어스름한 빛만이 새어 나오는 등 아래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긴장하는 건가.’

종일 같이 있었으면서도 딱히 깨닫지 못했는데, 현재는 평소보다 신경을 쓴 차림이었다. 워낙 기본 비율이 좋은지라 대충 입어도 모델 같긴 했지만 그래도 깔끔하면서도 편하게 잘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뭔가 좀 더 힘준 티가 났다. 평소보다 손질 잘 된 것 같은 머리도 그렇고…….

딱 벌어진 어깨에 연한 색감의 셔츠, 슬랙스를 입은 남자는 봄을 흠뻑 머금은 밤의 풍경과 그림 같이 잘 어울렸다.

“사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

수연이 그를 새삼스럽게 관찰하는 사이 먼저 운을 뗀 현재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만개한 하얀 목련 아래 단정한 얼굴에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하게도……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눈빛을 오롯이 받던 수연 역시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뭐지? 조금씩 속도를 빨리하는 심장에 당황스러웠던 수연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간지러운 바람과 코끝을 은은하게 스치고 지나는 달콤한 향 때문일까,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나도 내 감정을 깨달은 게 사실은 꽤 최근이라, 좀 더 시간을 두고 만나다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나직했고 담백한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굳이 왜 그래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현재가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잠시 허공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다시 수연에게로 꽂혔다. 직전까지 티 나게 긴장했던 것을 숨기지 못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뭇 무언가를 결심하기라도 한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좋아해, 수연아.”

“…….”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미쳤나 봐.

제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남자 앞, 그 순간만큼은 수연은 잠시 제 목적을 잊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현재를 보는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고백을 받아 본 게 처음도 아니고, 이미 이런 상황이 될 줄 예상했는데도.

“우린 알고 지낸 지도 별로 얼마 안 되는데.”

머릿속을 거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 차리자, 차수연. 순간적으로 가슴을 관통했던 강렬한 무언가를 부정이라도 하듯, 현재에게서 시선을 살짝 돌린 수연은 절정을 맞아 만개한 꽃들만을 바라보며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좀 빠르긴 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 알아. 사실 우리가 밖에서 따로 만난 것도 딱 한 번이고, 속 얘기를 많이 해 본 것도 아니니까.”

중얼거림과도 같은 말에 현재는 곧바로 반응했다. 직전 목소리까지 떨었던 사람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사실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야기를 나눌수록 시간을 같이 보낼수록 점점 좋아져. 예전부터 너를 봐 오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연은 당황해 그의 말을 잘랐다.

“예전부터?”

놀라 동그래진 수연의 커다란 눈과 마주하던 현재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괜히 시선이 갔거든. 처음엔 그냥 예뻐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거만이 아니었다는 걸 저번 뒤풀이 때 확실히 깨달았어. 뭐라고 해야 하지, 자꾸 신경 쓰이고, 챙겨 주고 싶고. 방금 봤는데 뒤돌아서면 또 생각나고……보고 싶고.”

“…….”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는 거 알면 불안하고 초조해져.”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다르게 말하는 내용은 이미 짙어져 버린 남자의 감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사실 현재가 그가 느끼는 것이 과해 보일까 최대한 자제해 말하고 있음을 수연이 알 리 없었다. 단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채 숨기지 못한 희미한 열기가 배어 있는 것을 느꼈을 뿐. 순간 아까 술집에서 제 손을 꽉 잡아 오던 현재의 행동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한다고?’

홀린 듯 그 눈빛에 스며들던 수연은 순간적으로 기시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저렇게 되는 거였다. 서툴지만 못 견디게 진심이고, 그 진심을 받아 줬으면 하는 상대 앞 어쩔 줄 모르면서도 상대의 반응을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게 된다. 일단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거니까.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결국은 관계의 진전을 바라는 것일 테니까.

“이런 건 절대 한 번에 생길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 생각보다도 오래전부터 나는 너한테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아.”

‘아.’

현재의 목소리를 듣는데 뭔가 심장에 돌덩어리가 얹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현재도 가벼운 마음이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던 탓이다. 거기다 예전부터였다니.

분명 제가 기다렸던 상황이었지만 수연은 뭔가가 미묘하게 틀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작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현재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던 찰나.

“그래서…… 나랑 사귀고 싶어?”

“너만 좋다면 당연히.”

억눌리듯 뱉어진 수연의 말에 현재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지나치게 빠른 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데 그가 멋쩍게 덧붙였다.

“원래는 꽃다발 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하필 형이 딱 차를 가져가 버려서.”

“아…….”

그게 그 말이었나. 곤란해하던 현재의 모습이 지금 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보다 꽃다발을 주면서 고백이라니. 좀 오버 아닌가.

‘그냥 서로 좋아한다고 하고 사귀는 거 아닌가?’

현재가 유난인 건지 원래 다들 이런 건지 수연으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수연 앞 갑자기 현재가 한 발짝 다가왔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확 좁혀지자 순간적으로 긴장한 수연이 몸을 굳히던 때.

“나랑 사귀자, 수연아.”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늘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지만 오늘따라 더 감미롭게만 들리는 그 목소리에 수연은 문득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다고.

싫다거나,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단순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뭐랄까, 제가 생각했던 것과 묘하게 달라지는 상황과 제 생각보다 진지한 현재의 감정 앞에 서니……. 그저 이도재를 향한 치기 어린 복수심에 이런 장면까지 이끌어 버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갑자기 몸집을 불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입을 꾹 다문 남자를 바라보던 수연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잖아.’

이제 와서 다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정말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이지만 현재 정도면 괜찮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남자를 진지하게 만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지만, 그래도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누군가 한 번쯤 연애 상대로 경험해 봐야 한다면. 이현재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단 외모나 성적 같은 객관적인 지표를 떠나서라도, 일단 다정하고 눈치 빠르고. 나중에 귀찮게 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솔직히 별일 없지 않는 이상 차여도 제가 차일 것 같았다. 처음에야 콩깍지 씐 현재도 제게 잘해 주겠지만, 남들이 말하는 반반한 외모 빼면 장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제게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점점 정이 떨어질 테니까. 이도재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볼 때쯤이면 현재도 자연스럽게 정리되겠지.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수연은 입술을 뗐다.

“그래. 사귀자.”

제 말에 세차게 흔들리는 남자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내키지 않는 말을 붙였다. 제 말에 감동한 듯한 현재의 생생한 반응을 보자 뭐라도 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도 너…… 좋아해.”

마지막 말은 굳이 안 덧붙이는 게 나았나, 그렇게 때늦은 후회를 하던 때였다.

“……!”

갑자기 저를 꽉 끌어안는 커다란 몸에 수연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놀란 정도를 얘기하자면 이도재와 재회한 순간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 정도는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만큼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고마워.”

“…….”

놀라 그대로 굳어 버린 수연을 제 품 안에 끌어당기며 현재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정말, 뭐라고 표현 못 할 정도로 좋다.”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남자의 품 안에서 수연은 눈만 깜박이며 안겨 있었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꽉 끌어 안겨 본 적이 있었나?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아주 따뜻하고, 든든한 커다란 안에 싸인 느낌은 언젠가 어렴풋이 상상해 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남자의 몸은 저와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말랑말랑, 근육이라고는 없는 저와는 다르게 맞닿은 얇은 천 사이 느껴지는 감각은 생각보다 더 강하고 단단했다.

“내가 정말 잘할게.”

잘해 줄게, 다짐하듯 다시금 덧붙이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설렘과 각오가 그대로 묻어났다. 순간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죄책감에 수연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키를 맞추기 위해 몸을 살짝 굽혀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현재와는 다르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엉거주춤하게 두 팔을 늘어뜨린 제가 보였다. 그 와중에도 서툴러 보이는 게 싫었던 수연은 나름의 용기를 내어 그의 등에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저도 현재처럼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이고 싶었던 거였다.

그러자 그 얄팍한 호응에 화답하듯, 제 허리를 감은 손에 지그시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맞닿은 품 안에서 그가 가끔 뿌리는 향수의 시원한 향이 났다. 워낙 주변에 꽃이 많은 탓인지, 오늘따라 그게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다. 가슴 한쪽이 못 견디게 간질간질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널뛰는 심장 박동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쨌든 누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막 연애를 시작한 알콩달콩한 커플일 거였다.

‘모르겠다.’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수연은 여전히 저를 안고 있는 남자의 품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생전 처음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은 안타깝게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의도가 무색하게도.

*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수연의 단잠을 깨운 것은 요란한 전화벨 소리였다. 아 진짜…… 잠결에 혼자 신경질을 내던 수연은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번뜩 눈을 떴다. 침대 매트 아래 굴러다니는 제 핸드폰을 얼른 주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 갈라진 목소리는 제가 들어도 피곤함에 찌든 사람 같았다. 아, 죽겠다. 한 손으로 눈을 벅벅 비빈 수연은 이부자리 위에 다시 몸을 눕혔다. 잠이 너무 부족했다.

―일어났어?

“응…….”

다정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넌 좋겠다. 시험 끝나서.”

하하, 핸드폰 너머 현재가 소리 내어 웃는 게 들렸다.

―힘내,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잖아. 어제 몇 시에 잤어?

“몰라, 마지막으로 시계 봤던 게 두 시 좀 넘었던 것 같은데.”

어림짐작으로 대충 서너 시간 잔 것 같긴 했다. 금요일인 오늘은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이 있는 날이라, 늦게까지 전공 책을 붙잡고 씨름하다 잠이 들었다.

―뭐 좀 먹고 학교 가야지.

“됐어, 어차피 들어가지도 않아,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던 수연은 멈칫했다. 아침을 커피 믹스로 대신하고 학교에 가는 제 모습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현재를 알아서였다. 역시나 잠깐의 침묵 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밥 먹어야지.

“……어.”

―지금이 일곱 시니까, 밥 먹고 씻고 책 좀 보다 음, 열 시 반쯤 나가면 되겠다. 그리고 시험 끝나고 보면 되지.

그치? 마치 개인 비서처럼 스케줄을 읊어 주는 목소리는 어째 아침에도 잠기지 않고 듣기만 좋았다. 시험도 끝났으니 늦게까지 자도 되는데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얘는 참 체력도 좋아.’

어느새 잠이 깬 수연은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자신도 상당히 계획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랑 같이 있으면 알아서 다 하루를 짜 주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번 시험에도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긴 했다. 걱정했던 수업의 족보도 묻지도 않았는데 구해다 줬고…….

“알았어. 넌 오늘 수업 없지?”

―응. 오늘은 완전 프리.

어제 시험이 끝난 현재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수연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씻고 한 자라도 더 보다가 가야지. 밥 꼭 먹고 가라는 현재에게는 대충 그러겠다고 둘러댔지만, 입맛도 없었고 냉장고 안에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 끝나고 봐. 그럼.”

―응. 참, 씻기 전에 문 앞 확인해 봐.

“문 앞?”

갑작스러운 말에 수연은 멈칫했다. 뭐지?

“왜?”

―그냥, 뭘 좀 놓고 왔거든.

“네가? 뭘?”

되물었지만 현재는 암튼 시험 잘 보라며 화제를 돌렸다. 의아했지만 일단 전화를 끊었다. 헤어질 때 현재가 집까지 꼬박꼬박 데려다주는 탓에 그는 제 방이 1층 맨 끝 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관 비번이야 원래 문 앞에 쓰여 있었고.

궁금함에 곧바로 일어나려는데 핸드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 현지였다. 수연은 다시 매트 위에 주저앉았다.

[차수연! 요새 왜 이렇게 연락 뜸해? 톡은 왜 씹음??]

[시험 기간이라 그래?? 난 다 끝났는뎅^^ 부럽지!]

[혹시 연애하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ㅋㅋㅋ]

글자가 시끄럽다는 게 이런 걸까? 뭐라 답을 쓸 새도 없이 알림창에 쏟아지는 메시지와 이모티콘에서 카랑카랑한 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연은 차마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시험 끝나고 전화해야지. 현지와의 통화는 즐겁긴 하지만 그만큼 오래 걸린다.

‘근데 나도 연애하는데.’

원래라면 신경도 안 쓰고 넘겼을 마지막 메시지에는 괜히 답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랬다. 수연은 지금 연애를 하고 있었다. 봄꽃 아래에서 현재가 고백한 지도 어느덧 3주가 넘어갔다.

‘근데 원래 연애하면 다 이런 건가?’

수연은 씻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이부자리 위에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연애 초반에는 원래 다 좋다지만, 상대가 뭘 해도 다 좋아 보이고 안 하던 행동도 하게 된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는 좀 유난인 면이 많았다.

일단 그는 제게 밥 먹이는 데 진심이었다. 아침은 커피, 점심은 학식이나 초콜릿, 저녁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으로 때우는 수연을 알고 경악한 그는 제게 엄격한 눈으로 경고했다.

‘이렇게 먹으면 몸 다 망가져.’

‘아니…… 대부분 이렇게 먹지 않아? 그리고 난 맛있는데.’

‘대부분 이렇게 안 먹어. 만약 그렇대도 난 그런 거 못 보고.’

‘…….’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사귀며 알게 된 것 중의 중 하나. 현재는 웬만한 건 다 맞춰 주면서도 절대 안 져 주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밥 먹이는 데 진심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나란히 학식을 먹고, 점심 역시 학교 근처 식당에서 든든히 먹었으며, 저녁은 현재의 차를 타고 근교로 가거나 조금 멀리 떨어진 맛집까지 가서 먹었다.

거기에 일주일에 4일 아침 수업이 있는 저를 알아 직접 모닝콜까지 해 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기도 피곤한데 얼마나 가겠어,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어서 이제는 수연도 알람 맞추는 것을 깜빡하고 잘 정도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학교에서 만났지만 이번 주는 솔직히 거의 얼굴을 못 보긴 했다. 시험 기간이라 엄청나게 예민해진 수연이 잠시만 만나지 말자고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저를 챙겨 먹이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시험이 들이닥치니 제 페이스대로 가고 싶었다.

현재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수긍하면서도 연락은 꼬박꼬박 받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역시나 사귀기 전부터 예상했던 대로 은근히 집착적인 면이 있었다.

어쨌든 오늘 시험이 끝나면 데이트하자고 했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수연도 아무 생각 없이 놀 생각이었다.

그간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와서 종일 자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는데, 만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진짜 연애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물론 진짜 연애긴 한데.

‘맞다.’

잠시 멍해 있던 수연은 그때야 현재가 말한 게 떠올라 몸을 일으켰다. 뭘 갖다 놨다는 거야? 설마 문 열었더니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나름의 얄팍한 상상을 펼치며 수연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

문 앞에 놓인 커다란 쇼핑백을 발견한 수연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게 뭐지?

상황 파악을 위해 잠시 눈을 껌벅이던 수연은 일단 안으로 들여놓아야겠다는 마음에 쇼핑백을 들었다. 상당히 무거워서 한 손으로 들기도 여의치 않았다.

탁, 문이 닫힌 후에도 수연은 안을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는 것 같은, 크기별로 차곡차곡 쌓인 용기가 부담스러웠다. 밥 꼭 먹고 가라던 현재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그래도 열어는 봐야지, 수연은 마치 폭탄 상자라도 받는 듯한 얼굴로 위에서부터 용기를 하나씩 꺼내 안을 열었다. 맨 위는 제철 과일이 종류별로 참 가지런하게도 썰려 있었다. 그 옆은 나물이었는데 자그마치 세 종류였다. 먹으면 속이 편해질 것 같은 포슬포슬한 두부 샐러드와 안에 뭘 많이 넣어 빵빵해진 계란말이, 손 많이 간다고 알고 있는 잡채를 지나니 버터를 잔뜩 바른 전복구이와 노릇하게 구워진 굴전이 나왔다. 그 아래 중간 크기에는 고기를 넣지 않은 맑은 미역국이 담겨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끝도 없이 나오는 용기 뚜껑을 차례로 열어 보는데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누가 아침부터 갈비찜을 먹는단 말인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많은데. 일주일도 더 먹을 것 같았다.

진수성찬을 눈앞에 둔 수연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어디서 사 왔다고 마크라도 붙어 있었음 싶어 괜히 쇼핑백을 둘러봤지만, 누가 봐도 정성스럽게 직접 한 반찬이란 티가 모락모락 났다. 심지어 아직 뜨끈뜨끈하기까지 했다.

‘아니, 뭐, 어머니가 해 주신 반찬을 다 들고 왔다거나 그런 쪽이 더 신빙성 있지.’

설마 하던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요리를 잘하는 현재라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집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근데 그건 좀 많이 괘씸한 아들이네.’

나름의 결론을 내린 수연은 결국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래도 통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응, 수연아.

신호가 두 번도 가기 전에 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수연은 곧바로 따지듯 물었다.

“이거 다 뭐야?”

―어?

“무슨 반찬을 이렇게 해 와. 이거 어머니가 해 주신 거야?”

―아니. 내가 다 한 건데.

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수연은 눈 앞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며 다시 떨떠름하게 물었다.

“네가 다 했다고?”

―응. 그러니까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이걸 언제 다 했어?”

―아……그게.

갈비는 어제 재워 논 거며 그 밖의 것들은 새벽 운동을 거르고 조금 일찍 일어나 만들었다는 답에 수연은 할 말이 없어졌다.

“대단하다…… 진짜.”

진심을 담아 중얼거리니 핸드폰 너머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더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오늘은 네가 한식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해 봤는데, 나 한식도 잘하고 양식도 잘해.

“…….”

얘는 공부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네, 이제 3주 차지만 갈수록 더 완벽해서 무서웠다.

―원래 형이랑 나랑 집에서도 잘해 먹어서, 별거 아냐. 진짜로.

아. 이도재.

잠깐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절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오늘은 일단 먹는데 이제 이렇게 하지 마.”

―왜?

“왜긴, 부담스러워. 누가 이렇게까지 해, 진짜 네가 내 엄마도 아니고.”

―아, 미안. 난 시험 기간이라 밥도 잘 못 먹고 다닐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다. 암튼 사람 마음 쓰이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현재와 있으면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수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새벽부터 이 반찬을 다 만들려면 정말 힘들었을 것임을.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할 마음은 절대 아니었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수연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어, 형. 현재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도재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암튼 잘 먹을게.”

―응, 이따 봐.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다정한 목소리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씻고 나온 수연은 조그마한 상 위에 현재가 해 준 음식들을 펼쳐 놓았다. 그릇을 이렇게 많이 써 본 적은 처음이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생일 때에도 이런 밥상은 결코,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었다. 방금 현재에게는 네가 내 엄마냐고 말했지만 실상 엄마는 제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얘는 원래 연애하면 이런 타입인가?’

아무리 제가 경험치가 부족해도 현재가 지나치게 다정하고 섬세하다는 것은 느껴졌다. 제가 어쩌다 하는 메시지에는 내내 핸드폰만 들고 사는 사람처럼 빠르게 답이 오고, 못 만나는 날에는 전화도 최소 네다섯 통은 한다.

처음엔 다 그런 걸까? 나중에 현지에게 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저를 들었다.

‘……맛있네.’

갈비찜은 아주 입에서 살살 녹았고 잡채도 간이 딱 맞았다. 원래 채식은 안 좋아하는 편인데 정성이 있으니 나물도 먹어 봤는데 다 맛있었다. 어떻게 된 게 반찬 한 번, 밥 한 먹다 보니 평소 반 공기도 먹을까 말까 한 양을 이미 훌쩍 넘겨 먹고 있었다. 얼른 먹고 책 좀 보다 가야지,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어떻게 지낼까?’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저도 사람이니 엄마 생각이 가끔 난다.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이 나는 걸 어쩔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건 생일이나 명절 때 혼자 있을 때지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다.

암튼 이현재, 왜 괜한 짓은 해서. 수연은 공연히 죄 없는 현재 탓을 했다. 엄청 맛있는데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짜증이 났다. 지나치게 다정한 임시 애인 때문에 수연은 훌쩍이며 밥을 먹었다.

*

마지막 시험까지 잘 본 것 같아 마음이 후련했다.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오며 수연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경영대 뒤편 주차장에 있을게]

바로 만나지 않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학교 내에 둘의 연애를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수업 들을 때마다 옆에 앉고 학식도 같이 먹으러 가면서 이러는 게 웃겼지만, 친한 사이라는 거랑 사귄다고 명확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고백받고 사귀기로 한 첫날, 집까지 저를 데려다주는 현재에게 수연은 말을 꺼냈다.

‘근데 우리 사귀는 거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어.’

‘어? 왜?’

인적 드문 골목길을 싱글벙글한 얼굴로 걷고 있던 현재가 곧바로 반문했다. 분명 처음부터 손을 잡고 있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손을 잡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수연은 괜히 잡힌 손을 꼼지락대며 대답했다.

‘그냥. 괜히 이러쿵저러쿵 얘기 듣는 것도 싫고.’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현재가 으음, 소리를 냈다.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 명확했지만 수연은 얼마 안 가 끝날 연애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거기다 상대는 가만히 있어도 소문의 근원이 되는 이현재가 아닌가.

‘마음은 알겠는데 내가 싫다면?’

뭐? 예상치 못한 비뚤어진 답변에 수연은 힐끗 현재를 올려다봤다. 솔직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는데. 잠깐 고민하다 수연은 이내 말을 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냥 친한 친구 정도로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단호한 수연의 말에 현재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 일단 알았어.’

‘응.’

일단이라는 조건을 붙인 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현재가 장난스럽게 물어 왔다.

‘그럼 우리 형은 괜찮지?’

‘어?’

‘학교 사람들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 현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그러나 수연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응? 왜?’

‘그냥. 나중에.’

‘나중에?’

‘응.’

오늘 사귀기로 시작했는데 말하면 이도재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괜한 과거를 들쑤시며 현재에게 제 안 좋은 말을 전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물론 딱히 잘못 살아온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도재는 그냥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니까. 아직 현재도 저를 파악하기도 전인데 괜히 차일 수도 있었다. 그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형이랑 그런 거 막 다 얘기해? 연애 같은 거.’

‘음, 주로 내가 들어 주긴 하는데.’

‘아.’

이도재도 연애 많이 해 봤겠지. 정작 수연은 그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법도 까먹은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집 앞이었다. 현재는 잘 자라며 다시금 저를 끌어안더니 수연의 생각보다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쉽다는 듯 놓아주었다. 그 과정이 아주 물 흐르듯 매끄럽고 사뭇 애틋하기까지 해, 수연은 현재의 화려한 과거를 다시금 의심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었다.

‘저기 있네.’

차를 발견한 수연은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시험이 끝났을 캠퍼스 안은 조용했지만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 불안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수연이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현재가 반겨 주었다.

“왔어?”

수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시트에 앉았다. 사실 피곤이 누적된 몸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잠을 원했다. 그렇지만 한 말이 있으니 데이트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많이 만나야 내가 더 좋아지든 말든 하겠지.’

“시험은 잘 봤고?”

“뭐, 그냥…….”

늘 과 탑을 놓치지 않는다는 현재 앞에서 잘 봤다고 하긴 민망해 수연은 말을 흐렸다.

“배는 안 고파?”

“전혀.”

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과장이 아니라 하루에 먹는 양을 아침에 이미 다 먹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해도 되겠다. 가다 중간에 먹어도 되고 하니까.”

현재가 덧붙이며 씩 웃었다. 차창 너머 풍경과 상큼한 미소가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현재는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에 진을 입고 있었다. 딱히 신경 쓴 듯 안 쓴 듯 깔끔한 느낌이었는데, 얇은 맨투맨 티에 편한 치마 레깅스를 입고 나온 저와는 여러모로 많이 달라 보였다.

“우리 어디 가는데?”

“음, 바람 쐬러? 시험도 끝났는데 마음 놓고 꽃구경하러 가게.”

꽃구경이라……. 꽃보다 잠이 시급했지만 수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현재에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참…… 잘 먹었어.”

“응?”

멋쩍은 마음에 웅얼거렸더니 현재가 조금 더 몸을 기울여 왔다. 저를 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순간 조금 심장이 들썩거렸다.

“네가 해 준 거, 잘 먹었다고. 맛있었어.”

엄청 양이 많아서 며칠 먹겠더라, 의도한 건 아닌데 뭔가 투덜거림처럼 들렸다. 진짜 난 말투 고쳐야겠다, 생각하는데 현재가 환하게 웃었다.

“응, 다음에 또 해 줄게.”

하지 말라니까, 곧바로 튀어나오려던 말은 순진하게까지 보이는 남자의 웃음에 먹혀 버렸다. 화창한 캠퍼스처럼 차 안 분위기가 몽글몽글했다. 수연이 괜히 맨투맨 끝자락만 손으로 잡았다 폈다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났다. 으음,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아니…… 나 지금 학교 아닌데. 뻔히 학교면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핸드폰 너머 남자의 축하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뭘 축하하지?’

고맙다고 말하며 통화를 마무리하는 현재를 보는데 그 와중에도 진동이 계속 울렸다. 메시지가 오는 모양이었다. 얘는 진짜 인기 많네,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퍽 성의 없는 손길로 쓱쓱 확인한 현재가 이내 전원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끄는 것까지를 바라보던 수연이 물었다.

“핸드폰 왜 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별다를 것 없다는 듯 말한 그가 이내 자연스럽게 핸들에 손을 얹었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차 안 수연은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찝찝했다.

“너 뭐 축하받을 일 있어?”

“아, 뭐.”

별거 아냐, 두리뭉실하게 말을 돌리는 현재를 보며 수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너 생일이야?”

“…….”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한 현재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은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미역국 끓인 거야?”

“……음, 꼭 그런 거라기보다는 형 거 끓였는데 맛있어서. 아침에 부담도 안 가고 좋을 것 같아서 같이 넣었어.”

그렇지, 현재 생일이면 이도재도 생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이도재 생일이며 칠판에 케이크를 그려 놓던 애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도 했다. 그때도 봄이었나, 이미 애써 지운 기억을 떠올려 보던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근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괜히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

덧붙인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시험 본다고 일주일 만나지도 말자고 해 놓았는데 거기다 생일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을 거였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말은 했어야지. 사귀는 사이에.”

불쑥 나온 말에 핸들을 잡고 있던 현재가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말은 안 붙이는 게 나았나, 머쓱해지는데 현재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러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 선물도 준비 못 했잖아.”

거창한 건 못 해 줘도 생일이라는데 뭐라도 해 줬을 거다. 잠시 차가 정차한 사이 불만스러운 표정의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현재가 말했다.

“선물? 그런 건 정말 필요 없는데.”

“…….”

허벅지에 올려진 제 손을 슬쩍 잡아 오는 커다란 손에 내심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희고 마른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를 껴 잡은 현재가 한번 지그시 힘을 주었다 다시 놓았다.

“이렇게 같이 놀러 가는 게 선물이지.”

수연은 말없이 저보다 한참 큰 손안에 잡힌 제 손만 내려다봤다. 손은 큰데 손가락은 또 길게 쭉쭉 뻗은 게, 손도 잘생겼다. 이렇게 스킨십을 할 때면 확 와닿는 것 같다. 제가 눈앞의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게 말이다. 과제를 도와줄 때나 밥을 같이 먹을 때, 사소한 연락을 나눌 때는 마음 잘 맞는 친구처럼 느껴지는데.

이내 차가 출발했다. 여전히 현재는 손을 놓지 않았지만 수연은 운전에 집중하라며 제가 먼저 손을 뺐다. 되게 좀 기분 나쁠 정도로 확 잡아 뺐는데도 현재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아무튼 성격 참 좋았다.

“피곤하지? 좀 자도 돼.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하니까.”

“어? 그렇게 멀리?”

기껏해야 주변 공원이나 가겠거니 했는데 교외로 빠질 모양이었다. 수연의 말에 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정도 예상했는데 좀 밀릴 것도 같네.”

아닌 게 아니라 수연이 봐도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날이 워낙 좋은 금요일이니 이동량이 많은 모양이었다. 차창 밖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꽃나무를 바라보는데 문득 새삼스러웠다. 집에 가서 잤으면 생각도 못 할 풍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경치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면 좋지.”

“……그렇지.”

현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연은 시트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래, 뭐.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말고 진짜 잘해 주기만 하자.’

원래도 잘할 예정이긴 했지만 생일이라니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였다. 좀 피곤하기도 했고 솔직히 꽃구경이 그리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나 시험도 잘 봤겠다, 밥도 얻어먹었겠다. 퉁명스럽게 하지 말고 진짜 재밌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평화롭다 못해 나른하게까지 느껴지는 창밖을 바라보다 보니 자꾸 눈이 가물가물했다. 운전하는 사람 두고 자는 거 예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수연은 눈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으나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 놓은 차 안은 온도가 딱 맞게 시원했고 거슬릴 것 하나 없는 현재의 운전은 매끄러웠다. 결국 수연은 저를 덮쳐 오는 수마에 어느 순간 휩쓸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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