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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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작 10분 전, 강의실에 도착한 수연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가 짜긴 했지만 금요일을 제외하면 이렇게 오전 첫 수업으로 채워진 시간표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커피나 뽑아 와야지.’

책을 올려놓고 잠깐 일어나려던 수연은 뒷자리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멈칫했다.

“그렇다니까, 이거 족보 엄청 타는 수업이라 그것만 봐도 시험 친대. 두혁 오빠도 그래서 에이쁠 받았다더라.”

“진짜? 왜 난 몰랐지, 그럼 족보만 구하면 완전 꿀 아냐?”

“그니까 내가 꼭 듣자고 했잖아. 출석도 무작위라던데?”

아……. 수연은 습관처럼 입 안 연한 살을 잘근 깨물었다. 나름대로 정보를 알아보고 짠 시간표였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나 보다. 지난주 첫 수업부터 시간 꽉 채워 수업을 하시기에 성실하게 수업만 잘 듣고 시험을 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수연은 예전 족보가 도는 수업에서 그리 좋지 못한 학점을 받은 이후로 족보라면 학을 뗐다. 친한 동기 하나 없고 선후배도 없는 저로서는 곤란했다. 다미도 학년이 다르다 보니 저랑 듣는 수업이 거의 겹치지 않았고.

‘이번에는 어떻게든 구해야 하나.’

막막함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딱히 이용하지 않을 뿐이지, 저를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수연도 잘 알았다. 밥 한번 사 준다고 하며 사근사근하게 물으면 아마 대개는 물어 물어서라도 구해다 줄 거였다.

수연은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 거였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며칠 전 술자리에서 봤던 윤성인가, 그 후배만 해도 상당히 아는 선배도 많고 친화력이 좋은 것 같던데…….

‘걔도 이 수업 듣는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를 스치듯 들었던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물론 윤성이 있다 해도 실제로 먼저 다가갈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심각해진 표정의 수연이 어느새 꽉꽉 채워져 가는 강의실을 둘러보기 위해 막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귓가에 듣기 좋은 저음이 내려앉았다.

“안녕.”

“……!”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수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양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이현재가 저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얼떨떨해진 수연의 옆을 당연하다는 듯이 차지한 남자가 그녀에게 컵을 건넸다.

“마셔.”

“……어.”

고마워, 한 템포 늦게 대답한 수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얘도 이 수업 듣는 건가? 첫날엔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왜 두 개 사 온 거지.’

제가 아무리 뻔뻔해도 저를 위해 사 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앞에 놓인 컵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연하게 백팩 안에서 전공 책을 꺼내는 이현재 뒤에서 수군대는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번호 좀 알려 줘.’

차가운 밤공기에 섞인 제 목소리가 환영처럼 들려왔다. 주말 내내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던 밤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밤, 원룸 안으로 들어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씻고 그대로 잠들었다. 깨고 나니 다음 날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잔 건 정말 처음이었다. 멍한 정신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안녕 수연아. 나야, 현재.]

[속은 괜찮아?]

순간 비몽사몽이던 정신이 확 들면서 그날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이도재와의 재회에서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이현재의 모습까지.

미쳤구나, 미쳤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현실을 잠시 부정하던 수연은 안 하던 일을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새기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그 술집에 가는 일도 없을 테니, 이현재와의 일도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난 거라 생각했는데.

“따뜻할 때 마시지.”

“어? 어.”

분명 그랬는데……. 불쑥 들어온 현재의 말에 수연은 당황했다. 기계적으로 한 모금 넘기는데 맛이 익숙했다.

‘…….’

제가 가끔 학교 안 카페에 갈 때마다 먹는 모카 라테였다. 사실 커피값도 만만치 않으니 학교에서는 자판기 커피나 집에서 커피 믹스를 애용했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씩 당길 때 가면 꼭 이것만 사 먹었는데, 현재가 딱 사 온 거였다.

‘우연이지.’

너무나 당연하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수연이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는 라테를 한 모금 마시던 때였다.

“그때 숙취 심했어?”

“응?”

컵을 손에 든 채 고개를 돌리니 현재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붙였다.

“아니, 답이 없길래.”

아……. 순간 수연은 침묵했다. 읽기만 하고 답을 보내지 않았다. 좀 황당하긴 했을 거였다. 번호를 먼저 물어봐 놓고, 기껏 현재가 먼저 한 연락을 그대로 읽고 무시했으니까.

“미안. 보낸다는 걸 깜빡했네.”

무심한 대꾸에 현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열렸던 그의 입술은 이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수의 등장에 다시 닫혔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수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보통 번호 따인 사람이 먼저 연락을 하나?’

그리고 얘는 왜 이렇게 친절할까?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졌다.

이현재는 제게 호감이 있었다.

찬찬히 생각해 봐도 그날 유독 제게 잘해 줬다. 어쨌든 이도재에게 화가 나 앞뒤 생각 안 하고 번호를 물어보는 실수를 한 건 제 잘못이었다.

‘……어쩔 수 없지.’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처럼 냉랭하게 대하면 눈치가 있으면 더는 다가오지 않을 거였다. 집중하자, 집중. 교수의 얼굴을 뚫을 것처럼 바라보며 열심히 필기하는 수연의 옆모습에 진득한 시선이 한번 감겼다, 천천히 떨어졌다.

*

그렇게 분명 더 엮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자, 그럼 역할 분배는 다 된 거네요? 진짜 이번 수업 조 저 완전 계 탔어요! 과탑 다투는 선배님들이랑 같은 조라니……아, 행복해.”

“민폐 안 되게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톤 올라간 쾌활한 목소리에 이어 남자 후배 한 명은 경례까지 해 보였다. 다들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수연은 따라 웃지 못했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계획에 어긋나는 게 많지.’

마지막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첫 수업이 끝나고, 커피까지 얻어먹은 게 무색하게도 현재가 무슨 말을 걸 틈도 없이 쌩하니 강의실을 빠져나왔던 수연은 꽉꽉 들어찬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오후의 마지막 수업은 서른 명 남짓의 전공 수업이었는데 이 역시 이현재와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뒤쪽에 앉아 있는 훌쩍 큰 남자를 모른 척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눈인사 한 번 건네지 않고 들어가 맨 앞에 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괜찮았는데…….

중간고사는 조별 발표로 대체한다며 강의 계획서에도 없던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진 교수님은, 어떤 식으로 해도 불만이 나오니 출석부대로 조를 짰다는 말과 함께 발표 주제와 조를 말해 주고 수업을 시작했다.

‘……이현재, 임하윤, 차수연.’

교수님의 무심한 목소리에 잠시 멍해졌던 수연이었다. 이렇게 또 엮이다니. 세상일은 늘 그랬듯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게 조가 짜이고, 만나게 된 조원들끼리 인사도 하고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한다는 명목상 곧바로 모이게 되었다. 원래라면 알바 때문에 나중에 결정된 것을 전달해 달라고 하고 못 가거나 일정을 조정했겠지만, 수연은 사실 지난달부로 빡빡하게 해 왔던 과외와 주말 카페 알바를 모두 다 그만뒀던 차였다. 벌써 3학년이니 그간 아등바등 모은 돈을 최대한 절약해서 쓰며 취업 준비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필 후배들이 이끌고 간 카페가 이도재의 호프집 바로 건너편이었다. 어차피 마주칠 일은 없겠으나 그냥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우리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네?”

이제 이 골목은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 아까부터 계속 목소리가 높았던 여자 후배 하나가 수연 옆에 앉아 있는 현재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하윤이라 했던가? 주제에만 집중하느라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수연은 종이에 쓰인 이름을 다시금 쓱 훑었다. 구성된 조의 총인원은 수연까지 해서 다섯이었다는데, 수연만 3학년이었고 현재를 포함한 나머지는 다 2학년이었다.

“글쎄, 저녁?”

“네! 슬슬 배고프기도 하고, 밥 먹으면서 또 얘기할 거 있으면 하고 좋잖아요. 그치? 진한아!”

심드렁한 현재의 대꾸에, 하윤은 그가 탐탁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는지 옆의 제 동기들을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옆의 여자애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좋은데 선배님들은 어떠세요?”

남자 후배 진한 역시 예의 바르게 말하며 현재와 수연을 번갈아 보았다. 수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작 주제에 대해서는 별 고민 없다는 티를 대놓고 내며 내내 현재에게만 사적인 주제로 말을 거는 하윤이라는 애가 솔직히 한심하게 보였다. 다른 건 제 알 바 아니었으나 과제와 상관없는 딴소리를 자꾸 하는 건 짜증 났다. 얘만 아니었어도 30분은 더 단축했을 수 있었다.

어쨌든 당연히 안 간다는 얘기를 막 입에 올리려는데…….

“난 수연이 가면 갈게.”

“……!”

얘 왜 이래? 수연은 경악하며 옆의 현재를 바라보았다. 물론 표정으로는 그리 놀란 게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

현재의 말에 하윤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수연은 재빨리 대답했다.

“난 못 가. 일이 있어서.”

“…….”

빠른 거절에 지금까지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테이블 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하윤은 반색했다. 어쩐지 수연이 안 간다는 것을 더 반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안 그래도 수연 선배님은 이렇게 꼭 모여야 하는 자리 아니고서야 잘 못 뵌다고 들었었어요! 그래도 현재 선배님은 잘 나오시는 편이라고 했는데……. 같이 가요, 선배님. 이 앞에 새로 생긴 이탈리안 레스토랑, 저도 추천받은 곳인데 엄청 맛있대요!”

그러나 후배의 간절한 시선에도 현재는 음, 하는 시큰둥한 반응만 흘렸다. 갑자기 피로감을 느낀 수연은 제 짐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암튼 일단 할 건 다 끝났으니까 난 가 볼게. 학점 잘 나왔으면 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일 테니까 서로 분담한 건 기한 지켜서 잘 하도록 하자.”

“네!”

“네! 선배님!”

믿음직스러운 대답이 차례로 들려오는 와중 수연은 가장 못 미더운 하윤을 한번 지그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쉬운 역할을 부담해 주긴 했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하윤이 생긋 웃었다.

“네, 선배님.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어째 얼른 가라는 것 같았지만 수연은 개의치 않고 일어나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을 건너뛰었더니 배도 고팠다. 집 가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공부하면 될 것 같았다.

“수연아!”

수연은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저를 쫓아 나온 것으로 보이는 현재가 카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수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아……그게.”

제가 불러 놓고 현재는 곤란한 듯 살짝 웃었다. 고작 한두 번 본 것 가지고 속단하기는 일렀지만,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는 것은 어색할 때마다 보이는 그만의 습관 같기도 했다. 뭐 하자는 거야, 수연은 퉁명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할 말 없으면 갈게.”

“아니, 할 말 있어.”

“…….”

생각과 달리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현재를 바라보던 수연은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번호 왜 물어봤냐고 하려나? 그래, 그게 맞겠지. 그래도 수연은 저를 보는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커, 지난번에도 느꼈던 새삼스러운 감상을 떠올리면서. 168센티미터인 자신도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는데 이현재는 어림잡아 짐작했던 키보다 더 큰 듯했다. 얼굴은 작고 어깨는 딱 벌어져 비율이 좋으니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같이 밥 먹으러 갈래? 맛있는 걸로.”

저도 모르는 사이 현재를 관찰하고 있던 수연은 돌아온 말에 맥이 풀렸다. 그녀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한숨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까 말했잖아. 일 있다고.”

“그래?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가기 싫어서.”

“뭐?”

얘는 눈치가 빠른 거야, 무례한 거야? 수연은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래. 싫어.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나랑 둘이 가는 건데?”

“…….”

그게 뭐? 수연은 울컥 튀어나오려던 말을 그냥 집어삼켰다. 올려다본 현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저와만 가는 거니 괜찮지 않느냐는 투로 뻔뻔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턱에서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가자, 수연아. 아, 이 근처는 어딜 가나 시끄럽긴 하니까 차 타고 좀 먼 데로 빠질까? 학교 안에 대 놨으니까 조금만 걸으면 돼.”

여전히 침묵하는 수연 위로 사근사근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웃긴 게, 내용만 따지면 구질구질할 이야기가 워낙 정제되고 차분한 어조다 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들렸다. 솔직히 목소리는 듣기 좋네, 수연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따로 할 말도 있고.”

따로 할 말? 갑작스러운 말에 수연이 움찔하던 순간이었다.

“이현재!”

저만치서 굵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놀란 수연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현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프집 앞, 술병을 뒤에 가득 실은 트럭 옆에 이쪽을 흉흉하게 노려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아…….’

이도재였다. 이래서 이 근처는 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날이 풀렸다지만 쌀쌀한 저녁인데, 티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험악한 표정의 이도재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기서 뭐 해?”

불량한 어조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본 이도재는 기분 안 좋다는 티를 대놓고 팍팍 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사이 현재는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 수연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어.”

“밥?”

“응. 이 앞 카페에서 조모임 한 김에.”

“야, 내가 언제…….”

태연하게 말하는 현재의 말을 수연이 반박하려는데 갑자기 뒤가 시끄러워졌다. 후배들이 둘을 뒤따라 나온 거였다.

“어, 안녕하세요, 오빠!”

“형, 오랜만에 뵙네요.”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하윤을 필두로 진한도 이도재에게 아는 티를 냈다. 이도재가 하는 호프집을 학부생들이 많이 찾는다더니, 정말 나름대로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다.

“어, 하윤이. 진한이. 오랜만이다? 옆에 후배는 못 보던 친구네?”

직전까지 사람 하나 잡을 기세이던 이도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글서글한 투로 답해 주었다. 아주 무시무시한 이중인격이 따로 없었다.

“참, 밥 먹으러 간다며?”

“네? 아, 그게.”

하윤이 어색하게 웃는데 이도재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뭐 하러 멀리 가. 우리 가게로 와, 술안주 말고도 할 줄 아는 건 많으니까 밥 먹고 편하게 놀다 가.”

“헉, 진짜요?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현재 친구가 내 친구고 현재 후배가 내 후밴걸.”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멋모르는 후배들이야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지만,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황당한 것은 수연뿐만이 아닌 듯했다.

“아니, 잠깐. 형.”

현재가 제멋대로 그들을 이끄는 남자를 제지하려는데, 갑자기 이도재가 턱짓으로 트럭 쪽을 가리켰다.

“아, 맞다. 현재야. 미안한데 잠깐 물건 내리는 것 좀 봐줘. 잠깐 요 앞에 볼일 좀 보고 올게.”

“지금?”

“어, 어. 급해.”

현재의 어깨를 툭, 두드린 그는 수연을 스쳐 지나가며 낮게 속삭였다. 오토바이 소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가운데서도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음성의 울림은 정확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수연의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급한 일은 저인 모양인 듯해서.

*

창고로 쓰이는 듯한 컨테이너가 위치한 호프집 뒤편은 공용 주차장 부지로 널찍했다. 결국 수연은 할 말이 있다는 이도재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사실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다는 것이 컸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과 현재는 수연이 잠시 전화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고만 알고 있을 거였다. 가게에 들어가기 전 현재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그냥 호프집에서 다 같이 먹자는 수연의 말에 결국 수긍했던 터였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초저녁, 어스름한 풍경에 비친 남자는 여전히 뻔뻔했다. 수연은 몇 발짝 앞에서 담배를 꺼내는 이도재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망설임 하나 없는 손짓으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곤 기어이 담배 연기를 뿜은 이도재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잘 지냈나 보네. 이렇게 좋은 학교도 다니고.”

그치? 명백히 비꼬는 듯한 말투에 수연의 이가 악물렸다. 기껏 사람 불러 놓고 한다는 첫 마디가…….

“너도 잘 지냈나 보네. 벌써 사장님 소리 듣고.”

“하하, 그래?”

수연의 말에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 보인다면 다행인가?”

길다면 꽤 긴 시간이겠지만, 6년 만에 다시 본 이도재는 수연이 보기에는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여러모로 고생을 한 듯 또래 동기들하고는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하긴 예전부터 그랬었다. 얼핏 어른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반항적인 느낌이 든달까. 그는 사람들 사이에 두면 확실히 이질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뭔데? 그런 안부 물으려고 부른 거야?”

자꾸 요란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고자 수연은 부러 더 냉정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딱히 기가 약한 타입은 절대 아니라 생각하는데 왜 이도재 앞에서만은 자꾸 주눅이 드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

수연의 말에 이도재는 아직 반도 더 남은 장초를 바닥에 짓이겨 껐다. 한 발짝 앞에 다가온 그에게서는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래. 우리가 안부 타령할 사이는 아니지.”

그렇다고 무슨 원수처럼 볼 사이도 아니지 않나?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이 남자에게 수줍게 고백했던 과거는 자신에게도 흑역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차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도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가 자신에게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게 모순이긴 했지만.

복잡한 감정이 들어찬 작은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이도재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그럼 본론만 말할게. 혹시나 현재랑 어떻게 해 볼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라.”

“뭐?”

이건 무슨 헛소리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장난하나? 그러나 이도재의 표정은 심각했다.

“저번에 가게에서 봤을 때도 딱 붙어 앉아 있더니, 오늘도 뭐? 밥 먹으러 간다며. 왜 자꾸 현재랑 엮이려고 하는데? 걔 내 동생인 거 몰라?”

기가 막히면 말도 안 나온다는 게 이런 거였나, 수연은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이도재의 불량한 태도에서 고운 말이 안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여기까지 따라왔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주 혹시라도 제게 그때 일을 사과할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너 지금……나한테 그딴 말 하려고 부른 거였어?”

“그럼 내가 널 굳이 왜 불렀겠냐?”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아니꼬운 말투에 수연은 화를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는…….”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하, 수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도재의 반반한 얼굴만 노려보았다. 아직도 저만 과거에 매달리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날 그렇게 싫어할까, 정말 우리 엄마 때문인 걸까, 연좌제야? 연좌제냐고.

“어차피 네가 치대도 넘어갈 애도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말한 거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고.”

굳어 있는 수연의 마음속을 알 리 없는 이도재는 또 한 번 속을 긁어 놓았다.

“알아들었으면 간다.”

산뜻하게 덧붙인 후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등을 돌린 뒷모습에 수연의 속이 뒤집혔다. 치대? 언감생심? 어쩌면 그렇게 사람 감정 밑바닥으로 처박는 말만 하는지.

“네 동생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

짓씹는 목소리에 이도재가 멈칫했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수연은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었다.

“이현재가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딴 식으로 지껄이냐고. 뭐, 언감생심? 무슨 급 따지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분노를 쏟아내는 수연에게 삐딱하게 선 이도재가 같잖다는 듯 픽 웃어 보였다.

“그래, 너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적어도 현재가 너랑 어울릴 군번은 아니지. 사람 사이에 급은 없는데, 노는 물은 다른 거잖아.”

“뭐?”

“내 말은 왜 하필 내 동생이냐, 이거야.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현재 진짜 반듯하고 좋은 애야. 그런 애가 너랑 어울리는 거 싫다고.”

이 정도면 브라더 콤플렉스를 넘어 병 아닌가?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수연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도재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솔직히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 널렸을 거 아냐? 사실 가끔 네 얘기 듣긴 했는데……이름이야 동명이인이라 쳐도 눈 돌아가게 예쁜 애라고 하니까 반신반의하긴 했지. 너 외모 하나는 나도 인정하니까. 그래도 설마설마 그 촌구석에서 여기까지 대학 왔을까 했는데 정말 너더라.”

“…….”

“암튼, 그 반반한 낯짝으로 다 꼬셔도 되니까 현재는 내버려 두라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한 남자는 더는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았다. 쾅! 주방과 연결된 철제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서도 수연은 미동도 없이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고 지나갔다.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네 동생이 오히려 나한테 호감 있거든?’

이 말을 해 줬어야 됐는데, 너무 황당하고 불쾌해 말하는 것도 잊은 그거 하나가 사무쳤다. 왜 자신은 이도재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으면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이 정리가 안 되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과거에 이어 지금도 속 시원하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뒤이어 후회하는 제 모습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수연의 입가가 비틀렸다. 뭔가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틀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은 상대였다. 제가 발버둥 쳐 봤자 이도재는 제가 느낀 감정의 백 분의 일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열이 뻗쳐 난리 치는 꼴을 볼 수는 있겠지.

사실 마음속에는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생각이 제일 컸다. 하지만 저 뻔뻔한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게 느껴졌다. 과거의 지독한 장면에 얽매인 건 자신뿐이었고, 지금 이도재의 머릿속에는 수연과 제 동생만 안 엮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수연은 어느새 제 눈가가 시큰하게 젖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만일 알았대도 그저 분노에 휩싸여 나온 생리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조용하지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수연은 이미 사라진 그의 뒤를 따라 호프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개강 초라서 그런가, 호프집 안은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주방 바로 앞의 룸으로 들어가려던 수연은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던 하윤과 마주쳤다. 입꼬리만 끌어 올린 하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언니. 진짜 다시 오셨네요.”

저를 반기지 않는 티가 고스란히 나는 투였다. 수연은 별 대꾸 없이 입구를 대충 가려 놓은 커튼을 젖혔다.

“수연아.”

“와, 선배님!”

들어가자마자 현재와 후배들이 수연을 반겼다.

수연은 빠르게 안을 훑었다. 벽을 등지고 가운데에 앉은 현재 왼쪽에 진한이 앉아 있었고, 오른쪽에는 하윤의 가방으로 추정되는 백팩과 함께 빈자리가 보였다. 수연은 말없이 벽을 등지고 앉은 현재 옆에 다가가 덥석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누가 봐도 자리가 있다는 티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뒤에서 황당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언니, 거기 제 자린데…….”

눈앞에서 현재의 옆자리를 뺏긴 하윤이 말끝을 흐렸다. 수연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미안, 난 허리가 안 좋아서 등 대고 앉는 데가 좋거든. 자리 좀 바꾸자.”

“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하윤이 여전히 선 채 뭐 이런 년이 다 있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수연은 요지부동이었다.

“아, 혹시 현재 옆에 앉고 싶어서 그래? 그럼 진한이가 자리 좀 바꿔 줄래?”

“……어, 네! 선배님!”

“아니에요. 괜찮아요.”

수연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나던 진한이 하윤의 새된 목소리에 다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제 가방을 홱 가져가 맞은편에 착석한 하윤의 굳은 낯을 보니 좀 마음에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허리가 안 좋아?”

“……응.”

이 와중에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듯한 현재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기함할 텐데 말이다. 잠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면서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긴 했으나 현재가 있어서 그런지 기분 안 좋은 티를 대놓고 내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사이 뭐가 상당히 푸짐하게 들어간 것 같은 냄비를 가져온 아르바이트생이 현재가 세팅한 버너 위에 그것을 조심히 올려놓았다. 동시에 진한이 탄성을 뱉었다.

“와, 곱창전골! 전에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었는데.”

“어. 형이 이걸 제일 잘하거든.”

“대박, 진짜 맛있겠다! 아, 밥도 주셨네. 벌써 침 고여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영 역시 맛있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다 술안주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골고루 차려진 상을 보니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쓴 걸로 보이기는 했다. 다들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바라보는 와중 수연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아까는 그렇게 배고팠는데 거짓말처럼 허기가 사라졌다.

“아, 제가 담아 드릴게요!”

냄비가 충분히 다 끓자 자연스럽게 손을 뻗는 현재를 제지한 하윤이 싹싹하게 말한 후 앞접시에 전골을 가득 담아 건넸다. 현재가 난감한 듯 살짝 웃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해 줄게.”

그렇게 말한 그는 하윤이 제게 건넨 접시를 수연에게 자연스럽게 건넸다. 수연이 멀뚱히 그것을 바라보자 현재는 다정하게 어서 먹어, 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하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후 그는 퍽 능숙한 몸짓으로 후배들의 몫을 차례차례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 먹을게요.”

인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점점 사람들이 더 밀려오는지 음악 소리에 섞인 바깥이 시끌벅적했다. 그제야 조금 덥다고 느낀 수연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3월에는 조금 두툼한 감이 있는 얇은 패딩을 벗자 넥 라인이 적당히 패인 니트 티가 드러났다. 깨끗하고 흰 피부와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니트는 수연의 여리여리한 이미지와 잘 어울리면서도, 은근히 달라붙어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연이 별생각 없이 조금 긴 듯한 소매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현재가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나 했는데 몇 발짝 앞에 있는 옷걸이에서 앞치마를 갖고 온 거였다.

“……고마워.”

들어오자마자 이현재만 신경 쓰느라 저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뒤이어 차례로 맞은편의 여자애들에게도 앞치마가 갔다.

“아, 선배님 매너 진짜 좋으시네요.”

그걸 바라보며 멀뚱히 앉아 있던 진한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엄지를 세웠다.

“아니, 난 그냥 뭐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현재의 얼른 먹자는 말을 시작으로 다들 수저를 들었다.

“와, 국물 대박.”

“진짜 맛있어요!”

다들 배고팠는지 일단 식사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는데, 수연은 내키지 않아 국물만 조금 떠먹었다. 곱창전골이라니. 이도재는 아무튼 제일 잘하는 요리조차도 제 취향과 반대였다. 수연은 곱창을 싫어해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뭘 갖다줘도 맛을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입맛에 안 맞아?”

멍하니 앉아 있던 수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니, 맛있어. 그냥 생각이 별로 없어서.”

“뭐 다른 거 시켜도 되는데. 나도 요리 웬만한 건 다 하거든, 만들어 줄게.”

“정말요?”

현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하윤이 끼어들었다. 뭘 제일 잘하냐는 등, 자신은 요리에 영 소질이 없다는 등 하소연이 내려앉았다. 거기에 진한과 나영이 한마디씩 보태면서 어느덧 화제는 요리로 흘러갔다. 수연은 기본 안주로 나온 치즈가 가득 뿌려진 옥수수 콘을 조금씩 떠먹으며 조용히 현재를 관찰했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듣는 상대가 호응을 잘 해 주는 것 같긴 했지만 농담도 한 번씩 했고, 남녀를 불문하고 매너 좋고 배려심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걸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문제였다. 수연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현재가 제게 호감이 있을 거라고 알게 모르게 확신했는데, 후배들에게도 생각보다도 더 잘 해 주는 것을 보니 혹시 그냥 누구한테나 이런 식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저만의 상념에 빠진 수연이 깨작대는 사이, 다들 어느새 다 밥 한 공기를 다들 뚝딱 비워 냈다. 그사이 진한은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지면 안 된다며 모두의 동의를 얻어 술을 시킨 터였다.

“그런데 두 분은…… 되게 친해 보이시는데 원래 친하신 거였어요?”

“같은 학부끼리 두루두루 친해지면 좋지.”

뭉뚱그린 현재의 말은 제가 듣기에도 석연치 않게 들렸다. 알바생이 소주와 맥주 한 병씩을 들고 들어오자 하윤이 애교 섞인 투로 입술을 삐죽였다.

“어떡하지, 월요일부터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임하윤 너 현재 선배님 있다고 너무 이미지 관리한다. 네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냐?”

“뭐? 아니거든?”

코웃음 치는 진한을 보며 하윤이 눈을 부라리는데 현재가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그래, 하윤이 말이 맞지. 내일 수업도 있고 하니까 술은 지금 시킨 것만 먹자.”

“네…….”

대답은 잘 하면서도 진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현재는 차를 가져와서 안 된다며 기분만 내겠다고 술잔만 받아 놨다. 집이 머냐는 하윤의 물음에는 원래 학교와 집이 가까운 거리라 차를 타고 올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럼 오늘은 왜 가지고 왔지, 생각하는데 현재가 제 잔에 맥주를 따라줬다. 기분 탓인지 유독 제 잔에 담긴 술의 양이 적었다. 짠, 소리와 함께 건배 후 잔을 비우는데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오늘따라 썼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수연은 기분이 나쁠 때 빨리 취하는 편이었다.

“저, 그런데 선배님.”

제 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진한에게 수연이 눈을 맞췄다. 하하, 진한이 어색한 듯 이마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혹시……김우종 교수님 수업 들으셨어요? 아까 현재 선배님은 안 들으셨다고 하셔서.”

“응, 지난 학기에 들었는데.”

“아, 정말요? 저 지금 그 수업 때문에 좀 골치 아파서요, 진짜 매시간 퀴즈 내세요? 리포트 쓰는 것도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취향이 있다면서요.”

수연은 계속되는 진한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솔직히 교수가 좀 까다롭고 괴짜인 면이 있긴 했지만 성적이 잘 나왔던 과목이었다. 나름대로 팁 같은 것도 알려 주자 진한이 감동한 표정을 했다.

“와, 진짜 감사해요. 솔직히 수강 신청 잘못했다 생각했는데 좀 안심돼요. 교수님이 첫날부터 표정 이렇게 하시면서,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데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풋, 교수 특유의 제스처를 따라 하는 얼굴에 순간 수연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재밌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이었다. 그런데 웃겼던 것은 저 혼자였던 모양이다. 아…… 민망해진 수연이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는데 약간 멍한 얼굴이 된 진한이 말을 이었다.

“선배님 웃으시니까 완전…… 음, 또 다른 분위기이시네요.”

“뭐야, 너. 예쁘시다는 얘기 돌려 하는 거지?”

“어? 아니, 뭐…….”

나영의 말에 진한이 멋쩍게 웃었다. 그것을 보고 재밌다고 웃던 나영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더니 수연에게 말을 이었다.

“근데 저 오늘 수연 선배님이랑 이렇게 같이 밥 먹어서 너무 좋아요, 저 사실 선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왜?”

“어, 그냥 엄청 예쁘시고……. 저희 사이에서는 선배님 진짜 연예인이에요.”

“…….”

연예인이라, 수연의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영이 손사래를 쳤다.

“아, 진짜 진짜 좋은 뜻이에요. 솔직히 저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선배님이 더 예쁘신 것 같거든요, 거기에 성적도 매번 좋으시니까 더 멋있어 보이고……. 근데 조금 다가가기는 어려운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제가 혼자 착각했던 것 같아요.”

“완전 인정.”

나영의 말에 진한이 동조하며 갑자기 또 건배를 권했다. 훈훈하게 흘러가는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수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벌써 술병이 바닥을 보이는 게, 역시 말이 그렇지 가볍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일단 앉아는 있는데.

‘……!’

갑자기 현재가 제 쪽으로 살짝 붙었다. 딱딱한 어깨가 저와 맞닿는 느낌에 수연이 움찔하려니 그가 턱짓으로 수연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연락 오는데?”

연락? 수연은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 내려놓은 제 핸드폰에 새 메시지 팝업이 뜬 게 보였다. 딱히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보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던 수연은 멈칫했다.

[슬슬 나갈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얘 이거 선수 아닌가. 제가 보내 놓고 태연한 낯으로 후배들과 사담을 나누고 있는 이현재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수연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금 먹었잖아.]

아, 이게 아닌데. 전송을 누름과 동시에 평소의 무심한 어투라는 것이 떠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현재한테 잘 보이려면 그러자고 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한 생각인데도 자괴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현재 역시 테이블 밑으로 슬쩍 제 핸드폰을 보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 내려놓은 수연이 다시 핸드폰이 진동하는 순간이었다.

“잘 먹고 있어?”

얄팍한 커튼이 확 젖혀지고 딱 봐도 바빠 보이는 이도재가 등장했다. 아직 확인 못 한 핸드폰을 쥔 수연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후배들이 경쾌하게 답했다.

“네, 저희 이거만 마저 마시고 가려고요!”

“진짜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아까 이도재가 혹시라도 계산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고 엄포를 준지라, 다들 얼른 자리를 비워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깍듯한 인사에 이도재가 손을 저으며 사람 좋게 웃었다.

“감사는. 월요일이니까 자제해서 마시고 주말쯤 해서 또 와. 다들 자주 보겠네.”

어찌나 시원스럽게 잘도 웃는지. 태연자약한 얼굴이 현재 옆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이도 있네. 전에 뒤풀이 때 봤었지?”

한 시간 전에 봤었지. 네가 불러서.

수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주 연기가 수준급이라 술집 사장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배우로 데뷔해야 할 것 같았다.

“어, 또 만났네. 반가워.”

물론 저도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이도재의 뻔뻔함에 화답해 주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 자주 보자. 참, 현재야. 오늘은 나 좀 도와줘야겠다. 끝나고 같이 가게.”

“오늘?”

내내 별말 없던 현재가 마뜩잖은 소리를 냈다. 수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도재의 속내가 너무 티 나게 읽혔기 때문이었다.

“어, 단체 예약도 꽤 있고. 알바 하나 빠져서 대타 오라고 했는데 올지 모르겠다. 암튼 이따 자리 파하면 주방으로 좀 와줘.”

“……알았어.”

그리고 허무하게 이어지는 현재의 대답에 수연은 순간 조급해졌다.

“와, 진짜 바쁘시네요. 우리도 얼른 먹고 일어나야겠다.”

“괜찮아, 천천히 마셔.”

진한의 말에 현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왕 깐 소주는 마저 마시자는 말에 현재를 제외한 세 명의 잔에 다시금 찰랑거리는 술이 채워졌다.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수연은 곧바로 소주를 한입에 들이켰다. 당연히 쓰게 느껴지기는 해도 이 몇 잔에 취할 제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그새 익숙해진 잔소리가 옆에서 내려앉았다. 정말 누가 보면 엄청 친한 줄 알겠네, 수연은 별 대꾸 없이 혼자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아, 제가 따라 드릴……까지 말하던 진한이 감탄했다.

“와, 선배님 술 세신가 봐요.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나도 잘 몰라, 취하기 전에 알아서 잘 끊어서.”

그렇게 또 한동안 대화가 오갔다. 술은 금방 비워졌다. 거의 파할 시점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하윤과 나영은 자리를 비웠고, 진한은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쩔쩔매며 받고 있었다.

“아, 미안. 미안. 까먹었어. 진짜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나름 조용히 말하는 거 같은데 들리는 내용으로 봐서는 여자 친구인 듯했다. 수연은 막잔을 마시려 했지만 이현재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제는 아예 말도 안 하고 잔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을 보며, 왜 이러냐고 짜증을 내는 대신 수연은 느릿하게 긴 숨을 뱉었다.

“…….”

그리고 천천히, 제 옆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얼핏 평온한 듯하지만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가라앉은 눈빛에서 수연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그날 밤도 꼭 이런 시선이었다. 비약이라 느껴도 할 수 없지만 꼭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는 사람처럼.

사실 그때 처음 마주친 것도 아닌데 그가 그랬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거 하나만큼은 앞으로 제가 할 행동 중 유일하게 진심을 담은 것이 될 거였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여전히 통화에 정신이 팔린 진한에게 등을 돌린 채, 현재가 말했다.

“내일은 정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답이 없는 수연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 섬세하게 예쁜 얼굴이다. 분명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인공적인 면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힐 정도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에서 현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괜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맑고 새까만 눈동자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달까.

수연이 느리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자연스럽게 팔랑거렸다. 딱히 니트가 깊게 팬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선이 예쁜 몸이라 자꾸 의식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는, 조금 젖어 있는 도톰한 입술에서 남자는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 장점을 잘 아는 여자는 필연적으로 위험한 법이었다. 그걸 이용할 마음을 먹었다면 더 그렇겠고.

“내일은 내가 바쁜데. 맛있는 거라면 지금 다 먹었고.”

“…….”

고저 없는 수연의 목소리에 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제 말에 타격을 입은 듯한 남자의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을 바라보자니…… 뭐랄까, 순간 저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수연은 복잡한 감정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딱히 의식하진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앉아 있는 무릎이 조금 맞닿아 있었다.

“그 대신.”

이상하게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말문을 연 수연은 다시 그와 시선을 맞췄다. 기분 탓일까, 여전히 제게 향한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수연은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슬쩍 그의 어깨에 제 무게를 실었다. 사실 기댔다기보다는 조금 닿았다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고작 그 정도의 접촉에 맞닿은 몸이 단단히 굳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수연은 깊이 탄식했다.

이도재도 이렇게 쉽게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상당히 나쁜 비교라는 인식은 있었으나 이미 수연은 제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느꼈다.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속삭였다. 제 숨결 하나에도 집중하는 듯한 남자에게만 들리도록.

“오늘도 데려다줄 수 있어?”

시간이 좀 늦은 것 같아서, 그쪽 골목 무섭긴 하더라. 조곤조곤하게 덧붙인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는 간지러움을 넘어 가증스럽기까지 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표정이 확 펴지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응. 걱정 마.”

언제 초조했냐는 듯, 다시 본래의 산뜻한 얼굴로 돌아온 현재를 가만히 바라다보던 수연은 붙어 있던 몸을 천천히 뗐다. 괜히 바닥에 놓인 제 핸드폰을 매만지는데 액정에 뜬 시간은 고작 8시를 살짝 넘어 있었다. 늦었다고 말하는 게 우스울 정도였지만 당연하게도 현재는 그 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집에 같이 갈 약속을 잡은 지금은 굳이 신경 쓸 게 아니긴 했지만.

나쁜 짓을 몰래 하는 애처럼 가슴이 불안하게 계속 뛰었다.

*

꿈에 오랜만에 엄마가 나왔다.

엄마가 나올 때의 배경은 언제나 똑같다. 낡은 건물 3층,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그곳. 남루한 벽지와 바닥재. 방음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을뿐더러 치워도 치워도 어쩐지 어지럽게만 보이던 그 공간 안에 엄마는 별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수연이 제일 많이 기억나는 모습은 술에 취해 잠든 엄마의 마른 등이나 진탕 취한 날 부엌에 쭈그려 앉아 신세 한탄을 하던 표정 같은 것들이었다.

1층은 주인이 하는 슈퍼, 2층은 엄마가 운영하는 주점, 그리고 3층에 집이 있었다. 전체가 아니라 맨 구석에. 3층에는 그 외에도 다른 공간들이 있어서 수연은 어릴 때에는 거기도 사람이 살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간혹 마주치거나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거기서 웬 아저씨랑 나오는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쁜 년 위에 팔자 좋은 년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다니까.”

엄마는 질릴 정도로 그 말을 달고 살았다. 일 끝나고 새벽에 지친 얼굴로 올라온 엄마는 일하는 동안 술을 마셨으면서 또 소주를 까며 하던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서 본 용한 점쟁이 말로는 엄마는 모 아니면 도 팔자라 했단다. 연예인 되어서 이름 날리고 돈도 엄청 벌거나, 아니면 밑바닥 인생이라고.

……그 말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결론적으로 보면 엄마는 안타깝게도 후자였던 거였다.

수연이 보기에도 제 엄마는 예뻤다. 흐릿한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합격해 그 집을 나오기 전까지 외적으로는 예쁘지 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또래 엄마들에 비해 나이가 젊은 편이기도 했지만 워낙 동안이고 화려한 미인이었다. 철모르는 어릴 때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엄마 예뻐서 좋겠다, 우리 엄마랑 바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뭐가 좋으냐고 입술을 삐죽이던 수연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예쁘기만 하면 뭐 해, 밥도 안 차려 주고 숙제도 안 도와주는데.’

그마저도 좀 크고 나서는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엄마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는지 조금씩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분명 술을 팔고 웃음을 팔았지만 다른 것도 팔아서 돈을 벌었다. 대놓고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렇다는 걸 수연은 어느 순간 깨달아 버렸다. 가끔 씩씩대며 엄마를 찾아오는 아줌마나, 엄마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고 다른 방에서 나오는 돈 많게 생긴 아저씨를 볼 때 말이다.

‘그냥 서울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엄마도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지방에 땅 부자라던 그 놈 말에 홀랑 속았지 뭐니. 의사니 변호사니 줄줄 들어오던 선 자리에 비하면 그마저도 턱도 없었지만 원래 눈에 뭐 씌면 보이는 게 없잖아. 이래서 겉껍데기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솔직히 그 사기꾼, 얼굴은 진짜 남자답고 반반했거든. 뭐, 연애할 때는 완전 공주 다루듯이 소중히 해 주기도 했고. 그래서 엄마가 그 좋은 기회 다 걷어차고 결혼하겠다고 이 촌구석까지 내려온 거지. 전에 얘기했지? 엄청 유명한 기획사에서 엄마 데려가려고 매일같이 찾아왔다니까. 그랬으면 지금 여기서 이 고생이 웬 말이니, 강남에 건물 사서 떵떵거리고 살았을 텐데.’

여기서 그 사기꾼은 수연의 아빠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철이 일찍 들어 학교 끝나고 오면 어디 놀러 가지도 않고 방에 틀어박혀 밤중까지 공부하는 수연을 붙잡고 엄마는 푸념을 쏟아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얘기만큼은 수없이 들은 아빠는 늘 엄마가 분노를 쏟아내는 대상이었다. 좋은 술안주이기도 했고.

‘그렇게 좋아서 사기까지 쳤으면 곱게 모시고 살기라도 했어야지? 홀랑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라고? 배불러서 장례 치를 때 엄마 심정,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아빠는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고속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크게 나 즉사했다고 했다. 식을 올리기도 전 이미 배 속에 수연이 있었던 엄마에겐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얼굴만 예뻤지 사치도 심하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혼자 수연을 낳고, 보험금으로 세를 얻어 카페를 차렸는데 가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점으로 변했다.

수연은 어릴 때부터 그 좁은 집 안에서 정말 조용히 지냈다.

학교를 다녀오면 밤낮이 바뀐 엄마는 집에서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온 수연은 오늘 배운 것을 복습하고 다음 것까지 예습하고, 어지러운 집 안을 치우다 배고프면 엄마가 식탁에 올려놓은 돈으로 빵이나 김밥을 사 먹었다.

그마저 엄마가 깜빡할 때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간장에 밥을 대충 비벼 먹기도 했다. 예민한 엄마는 자다 깨면 엄청나게 화를 내기 일쑤여서 요리를 해서 먹는다던가 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식사라고는 할 수도 없는 밥상을 제 방에 차린 후 수연은 늘 방문을 닫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맛을 느끼기보다는 그저 먹고 살려고 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가끔 엄마가 가게 문을 닫는 날이면 수연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햄버거나 치킨 상자가 올려져 있기도 했다. 초등학생 용돈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액수의 돈과 함께.

하지만 수연은 그것들이 기껍지 않았다. 식어 빠진 그것을 먹으며 수연은 그날은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겠구나, 혼자 생각했다.

‘너만 없었어도 여기 떴지. 진작 떴지. 근데 어떡해? 집에서는 아예 없는 딸 되어 버렸고, 애 딸린 여자 누가 받아 주냐고. 고아를 만났으니 두고 갈 시댁도 없고 말이야. 보육원 앞까지 갔다가 돌아오길 몇 번 했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지.’

수연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버렸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후회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이렇게 힘들게 키우는 거니까 감사하라는 걸까?

하지만 감사나 동정을 느끼기에는 엄마는 수연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주었다. 그리고 딱히 자신 때문에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는 수연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으니까.

너무 어렸을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제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도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엄마 말대로 보육원에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만 수연도 자신이 불쌍하다는 건 알았다. 남들과 좀 다른 환경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공부했다. 벗어나고 싶어서. 아직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꿈이 수연을 살게 했다.

그리고 열여섯 가을, 그를 만났다.

*

“쟤 진짜 잘생겼다. 그치?”

“누구?”

“몰라? 이도재. 어제 전학 왔잖아. 서울에서.”

2학기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다. 복도에서 지나가는 키 큰 남자애를 보고 유일한 단짝 친구인 현지가 속삭였다.

수연은 현지 말고는 친구가 없다 해도 무방했지만 여러모로 학교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었다. 시작이 질투였는지 호기심이었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서 험담이나 근거 없는 소문을 부풀리는 아이들은 늘 있었으나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못했다.

어쨌든 수연은 옆 학교 애들이 찾아와 구경하고 갈 정도로 객관적으로 지나치게 예쁘고, 성적도 늘 상위권이라 선생님들도 대놓고 편애했으며, 살짝 까칠한 성격에 제게 부당한 일이 생길 때는 참지 않고 항의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왔구나,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뒤돌아 남자애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어디 외국도 아닌데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괜히 더 멋져 보였다. 남들이 들으면 안 믿겠지만 여행 한 번 안 가 본 수연에게는 그가 별나라 사람 같았다.

이도재를 보고 온 날, 하교하고 집에서 언제나처럼 공부를 하고 있는데 딱 한 번 본 그 남자애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엄마의 술주정을 듣는데도, 지친 몸을 바닥 위 펼쳐진 이부자리에 눕는데도 계속 떠올랐다.

열병 같은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수연은 처음으로 사는 게 조금 재밌어졌다. 공부하러 간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 없던 학교 가는 길이 괜히 설렜고, 잘 들여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제가 생각해도 많이 보게 되었다.

바로 옆 반이다 보니 이도재와 마주칠 기회는 많았다. 화장실을 가면서, 체육 수업을 받으러 운동장에 나가면서, 수연은 괜히 한 번씩 옆 반 맨 끝 자리를 훑었다. 키가 큰 그의 자리는 당연한 것처럼 처음부터 그곳이었다.

좋아한다, 그 감정을 사무치게 깨달은 적이 언제였더라.

돌이켜 보면 계기를 찾을 수도 없이 너무 당연한 듯한 순서로 이미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며 수연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도재에 대한 정보를 꿸 수 있었다. 그만큼 그가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알음알음 알게 된 바로는 지방 발령을 받은 아버지와 둘이서만 산다고 했다. 처음에는 저처럼 부모님 한 분이 없으신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사정상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동생이 있는데, 쌍둥이래! 이란성이라 얼굴은 다른데 사진 보니까 걔도 존잘이라더라.”

“사진도 봤어?”

“어,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러던데? 그런데 동생 엄청 싸고도나 봐. 맨날 동생하고 통화한대, 대박이지.”

또한 소문에 민감한 현지가 이도재에 대한 모든 것들을 옆에서 다 말해 준 덕이기도 했다. 사실 현지가 유난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여자애들은 언젠가부터 모이면 이도재 얘기만 했다. 비단 여자애들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었다. 이도재는 언제나 무리의 중심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시원시원하니 호방한 성격, 축구 선수를 목표로 해 서울에서도 유망주였을 정도로 운동을 잘한다는 점 등은 남자애들에게도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수연은 또 한 번 그가 좋아졌다. 동생과 매일 통화할 정도라면 가족과도 사이가 좋다는 얘기였다. 날카롭게 생긴 것과는 반대로 좀 몰랑거리는 이미지도 추가되어 더 멋지게만 보였다.

저런 애는 결혼해서도 좋은 남편, 아빠가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수연이 너무 갔다는 생각에 혼자 뜨끔하던 찰나였다.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제 유일한 취미가 아무리 공상이라지만…….

“야, 너 이도재 좋아하지?”

“뭐?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현지의 돌직구에 놀란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들을까 교실을 휘휘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런 수연을 보고 현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흐응, 딱 보이는데 뭐. 너 다른 얘기할 때는 관심도 없는데 이도재 얘기할 때는 완전 표정부터 바뀌어. 알아?”

“…….”

차마 반박도 못 하고 침묵하는 수연을 보며 현지는 비밀로 해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웃었다. 그렇게 티가 나나 생각하다 수연은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이제 제법 날이 추운데 하복 체육복 하나 덜렁 입고 축구를 하는 이도재는 오늘도 멋있었다.

그렇게 정처 없는 마음만 커지던 중이었다. 오며 가며 마주치긴 했지만 그간 한 번도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이도재와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였다. 현지 옷 사는 데 따라갔다 오느라 그날따라 조금 늦게 집에 돌아온 수연은 건물 앞을 서성이는 인영에 우뚝 멈춰 섰다.

‘아…….’

인적 드문 골목의 슈퍼 앞, 핸드폰을 보며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인 교복 차림의 옆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엄청나게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

“…….”

눈이 마주친 순간, 주위의 소음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연은 찰나 고민했다.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 말하고 싶다.

하지만 수연의 입은 굳게 다물려 버렸다. 어떤 식으로든 말 한번 섞어 보고 싶었던 이도재를 막상 이렇게 가까이 보니 심장이 너무 뛰어서 말 걸 엄두조차도 나지 않았던 거였다. 결국 시선을 먼저 피한 수연이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빠르게 향하던 순간이었다.

“야.”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수연은 흠칫해 고개를 돌렸다. 표정 없는 얼굴의 이도재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차수연 맞지?”

“……어.”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일단 수연은 이도재가 제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멍하니 저만 보는 조막만 한 얼굴을 표정 없이 응시하던 이도재가 다시 물었다.

“너 여기 살아?”

“어? 어…….”

순간 속이 뜨끔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드는 느낌이랄까. 턱짓으로 건물 위층을 가리키며 묻는 그 행동에 치부가 다 까발려진 느낌이었다.

이도재도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걸까. 아빠는 없고, 엄마가 주점을 하는데 그렇게 남자관계가 복잡하더라 하는, 못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딱히 틀린 건 없는 그 말들을.

‘그래서 내 이름도 정확히 아는 건가.’

순간 가슴속 뭔가가 뒤틀렸다. 수연은 똑바로 이도재의 눈을 마주하며 반문했다.

“왜?”

지금까지 머뭇거렸던 것과 사뭇 다르게 반항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어투에 이도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짝다리를 짚은 비딱한 자세로, 열여섯이라고 보이지 않는 크고 단단한 체구의 남자가 제 앞의 동급생을 느릿하게 훑었다.

유독 동공이 크고 까만 예쁜 눈, 매끄럽게 뻗은 높은 콧대와 살짝 까진 도톰한 아랫입술. 그 아래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덜미와 단정히 차려입은 교복으로도 다 가려지지 못하는 상체의 여성스러운 곡선, 치마 아래 날씬하게 뻗은 다리까지.

분명 탐색하듯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시선이었지만 짝사랑하는 남자애 앞에 선 수연은 쉴 새 없이 방망이질하는 심장 박동 외에 다른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잠깐의 정적 후, 이도재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니, 그냥. 여기로 들어가니까.”

“…….”

“올라갈 거면 위에 주점밖에 더 있어? 그러니까 집이 여긴가 했지.”

으응,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던 수연의 시선이 흐트러졌다. 그럼 몰랐던 건가…… 하긴, 모를 수도 있지. 근데 몰랐다면 계속 몰라 줘도 괜찮았는데.

좋아하는 애한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니까.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이도재는 그 흔한 인사 한마디 없이 그대로 뒤돌았다. 어……. 수연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그 후로 수연은 이도재가 더 좋아졌다.

그가 제 이름을 불러 주던 그 순간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더 좋아할 이유는 없는데도 대화를 나눈 후로 그렇게 되었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날부로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이도재가 딱히 인사는 안 해도 제 얼굴을 좀 오래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만 가진 채 졸업을 맞았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오지 않은 졸업식 날, 아쉬운 마음에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연의 시야에 꽃다발을 든 이도재가 들어왔다.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 앞에서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이었다.

졸업장 하나를 품에 끼고, 남들 다 하는 외식 한 끼 못 하고 엄마가 자고 있을 집에 돌아가면서도 수연은 별로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사진으로 남길 수는 없었지만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열일곱 이도재의 모습은 수연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무렵은 수연이 엄마와 잡음이 잦았던 시기였다. 수연은 조금씩만 아끼고 살면 떳떳이 살 수 있는데도, 정도를 넘은 물욕과 사치로 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엄마가 싫었다.

솔직히 조그맣게 술집 하는 것까지는 불법도 아니고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구질구질한 집에 살면서 눈뜨면 늘어나 있는 명품 가방이나 척 봐도 비싼 옷들, 액세서리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엄마가 팔짱 끼고 다니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남자들 대부분이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서 더 그랬다.

“이거 또 샀어?”

“어머 얘는, 엄마가 돈이 어딨니? 선물 받은 거지.”

“그러니까 손님이 왜 이런 선물을 주냐고.”

“줄 수도 있지! 그럼 너 다 키워 놓고 엄마가 연애도 못 하고 다녀?”

그게 그냥 연애가 맞으면 이러지 않았겠지. 거기다 엄마 말대로라면, 제가 어릴 때도 엄마는 그런 ‘연애’를 꾸준히 했었다. 수연은 서글프고 화가 나는 와중에도 차마 거기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이렇게 외로우면 차라리 떳떳하게 재혼을 하라고 해도, 엄마는 두 번 실수는 안 한다며 오히려 성질을 냈다.

조금씩 조금씩, 엄마가 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혼자 문을 걸어 잠그고 자고 있으면 애도 아닌데 덜컥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에도 무서웠지만 나이를 먹어도 그건 변하지 않나 보였다.

그래서 수연은 엄마가 없는 밤에는 불을 다 켜 놓고 늦게까지 공부하다 책상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한 일상에서 단 하나 유일한 즐거움은 학교에 가서 이도재를 만나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없었으면 정말 안 그래도 팍팍했던 삶이 더 무료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에 나란히 진학해 같은 반까지 되었을 때 얼마나 속으로 기뻤는지 모른다. 이도재는 여전히 쾌활했고 어딜 가나 분위기를 주도했다. 여자애들에게 딱히 다정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선들선들한 편이었는데 저 좋다는 여자애들이 그렇게 많아도 누구랑 사귀지는 않았다.

기분 탓이라면…… 저한테는 조금 냉정한 것 같긴 했지만.

꼭 필요한 대화를 할 때에도 무표정이었고, 잘 웃고 있다가도 수연이 지나가면 얼굴이 굳었다. 처음엔 제가 과민한 거라 생각했는데, 늘 제 옆에 있는 현지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어느 날 이렇게 말해 오는 게 아닌가.

“이도재 백 퍼 너 좋아한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남자애들 좋아하는 애 앞에서는 괜히 더 마음 표현 못 하는 애들 있잖아! 딱 그런다니까, 웃다가도 너 보면 표정 관리 안 되고. 내 감은 못 속이지.”

“날 싫어하는 건 아니고?”

“널? 네가 이도재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싫어해?”

“…….”

이어지는 말로는 어제는 옆 반 콧대 높은 여자애가 이도재에게 고백했는데 그 자리에서 까였단다. 현지랑 사이가 안 좋은 애였는지, 꼴좋다고 신나게 떠드는 현지를 보며 수연은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지금처럼 저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나이만 됐어도 절대 그런 착각 안 했을 거다. 주제 파악을 했을 거란 소리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도 더 어렸다. 물론 그때도 매사에 비관적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순진한 면이 있는 고등학생이었단 말이다.

또한 제가 생각해도 이도재에게 밉보일 짓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 조금 많이 쳐다봤을 수는 있어도…… 다른 여자애들도 많이 하는 거니까 별다를 건 없을 거였고.

하긴, 저도 이도재 앞에 서면 괜히 더 긴장해 말투도 딱딱해지니까.

‘정말 날 좋아할까?’

정처 없이 크기를 불려만 가는 마음은 방향을 찾지 못했다. 얄팍한 기대가 근거 없는 확신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마음은 처음으로 느낀 타인을 향한 애정이라는 감정을 아득바득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감정의 종말은 늘 그렇듯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둔 그날은 학교 축제였다.

딱히 참여하는 것은 없었고 늘 이런 행사가 달갑지 않은 수연이었지만, 그날따라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단장을 했다. 교복과 편한 옷 몇 벌이 다인 단출한 옷장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 입는데 심장이 들썩거렸다. 어제 일을 가기 전 엄마가 주고 간 옷이었다.

‘내일 축제라며? 엄마가 하나 샀으니까 이거 입고 가서 놀아.’

브랜드는 잘 알지 못하는 수연이었지만 엄마가 건네주는 큼직한 쇼핑백 안의 옷이 딱 봐도 비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손에 스치는 옷감의 촉감 자체가 달랐다. 엄마는 자신은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녀도 수연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축제인 건 어떻게 알았지.’

졸업식 날도 몰랐으면서. 암튼 그때나 지금이나 주목받는 것은 딱 질색인 수연이다. 원래라면 뭐 하러 샀냐고 핀잔을 주고 입지도 않았을 거였다. 축제 때는 교복을 입어도 되었고, 사복을 입어도 되었다. 당연히 말이 그렇지 거의 다 사복을 입고 오겠지만 딱히 입을 옷이 없으니 그냥 교복을 입고 갈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저도 좀 꾸며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가 되는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늘 질끈 올려 묶던 머리도 풀어 내리고, 교복 치마보다 조금 짧은 감이 있는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제가 봐도 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날 당연하게도 수연은 모두의 집중을 받았다.

그간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무섭게 풍기는 그녀에게 말도 잘 못 걸던 남자애들도 괜히 주위를 힐끔대며 관심을 끌려 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옆 반 여자애들이 같이 놀러 가자고 팔을 붙잡기도 했고, 아이돌 누구보다 더 예쁘다는 찬사까지 들었다.

그리고 수연은 정말로, 착각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를 그날 계속 바라보는 이도재의 시선을 느꼈다. 분명 다정하거나 따뜻한 눈빛은 지금 생각해도 아니었지만, 그가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사실에 수연의 마음은 축제 내내 붕 떠 있었다.

그렇게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축제가 파했다.

다른 때라면 귀찮았을 뒷정리도 그날따라 즐겁기만 했다. 커다란 운동장 끝에 위치한 쓰레기장에 제 가슴께까지 오는 묵직하고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놓고 돌아서다, 수연은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이도재와 마주쳤다. 그냥 깔끔한 셔츠에 진 차림인데 체격도 좋고 분위기가 성숙해 대학생 같은 이도재는 오늘도 멋있었다.

늦은 오후의 고요한 운동장 뒤편에서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양손에 든 쓰레기봉투를 가볍게 던져 놓은 채, 언제나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저를 스쳐 지나가려던 남자를 수연은 결국 잡아 세웠다.

“……저, 잠깐만!”

“…….”

지금도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어쩌면 분위기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축제 끝 둘만 남은 듯한 후미진 공간, 한낮의 열기를 식혀 주듯 어디선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 그리고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남자까지.

강렬한 충동에 그를 불러 세워 놓고 막상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잠시 멈칫하던 이도재가 이내 제게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같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

“아니, 할 말이……있어서.”

“……말해.”

이도재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저보다 한참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수연은 심장이 빨리 뛰면 마치 멈춘 것 같음을 처음 알았다. 어쩌면 거기서 멈추는 게 가장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꾹꾹 눌러 왔던 마음은 결국 적정량을 넘어 터져 버렸다.

“……좋아해.”

“…….”

가냘프지만 확실하게 튀어나온 말에 이도재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수연은 티가 날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차마 그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수연은 흙먼지투성이의 바닥에만 시선을 떨궜다. 그래서 고백을 받은 남자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 생각만 미친 듯이 되뇌는 와중에도 어렴풋이 자신은 뭔가 긍정의 대답을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러했기에 돌아오는 대답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수연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같이 뛰는데 이도재는 언제나처럼 평온해 보였다.

“좋아해서 뭐, 사귀자고?”

“어? 아니…… 나는 그냥 말하고 싶어서.”

수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와 이도재가 사귀는 모습을 상상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지만, 오늘의 고백이 정말로 충동적이었던 만큼 그저 제 마음을 알아주기만 해도 좋다는 것 역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그런데.

“아아.”

수연의 말에 이도재가 코웃음을 쳤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패를 다 까 보인 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도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래, 네가 나 좋아한다고.”

제 고백을 다시 한번 되짚는 고저 없는 어투에 수연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

“근데 어떡하냐? 난 너 존나 싫은데.”

“……!”

띵, 골이 울렸다.

발끝부터 온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충격에 굳어 버린 수연을 바라보는 이도재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차라리 거기서 돌아섰어야 했는데,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멍한 가운데도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도재는 정말 제가 싫어서 그간 그렇게 반응한 거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너무너무 무안하고 창피해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수연에게 이도재는 기어이 한 마디를 더 했다.

“아, 눈 돌아가게 혹하게 예쁜 건 인정. 나도 보는 눈은 있으니까. 오늘따라 입고 있는 옷도 예쁘네. 잘 어울려. 근데…….”

이미 반쯤 나간 정신에 그의 말을 흘려듣고 있는데 갑자기 이도재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리고.

“그거 다 너네 엄마가 더럽게 번 돈으로 산 거 아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도재가 제가 싫다고 말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가슴을 관통했다. 거세게 흔들리는 수연의 눈빛에도 담담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이도재는 시선을 돌리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좆같네, 씨발.”

분명 작게 뇌까렸지만, 수연은 똑똑히 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도재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운동장을 벗어나 건물 쪽으로 점점 작아지는 인영을 보며 수연은 한참 동안을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수연은 몰랐다. 축구 유망주였던 이도재가 이 시골 도시까지 오게 된 이유는 원래부터 여자관계가 난잡했던 그의 아버지가 결국 직장 내에서 불륜을 일으키는 바람에 좌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부모님의 이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와중 수연의 엄마가 하는 주점을 잦게 드나들다 종업원과 몰래 2차를 나간 그의 아버지를 본 게 바로 축제 전날이었다는 것. 여기까지 와서도 그 모양 그 꼴인 제 아버지를 보고 내내 분노로 들끓었던 이도재가 그 마음을 제게 풀었다는 것 등.

당사자인 이도재마저 수연을 보고 느끼는 들쭉날쭉하기 그지없는 제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수연이라고 그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없었다. 잠깐 머리 식히러 여행을 다녀온다는, 메모지에 휘갈겨 쓴 글씨만 저를 기다릴 뿐이었다.

주말 내내 수연은 지독하게 아파 혼자 앓았다. 짝사랑의 끝이 이렇게 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눈앞이 흐릿할 정도로 온몸에 열이 펄펄 나는데 자꾸 오한이 들었다. 달뜬 와중에도 이도재의 목소리가 계속 맴돌아 괴로웠다.

좆같다니, 처음으로 마음을 준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아픈 몸보다 무참하게 짓밟힌 마음의 상처가 컸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집 안에 있는 상비약과 물만 먹고 이틀을 버티다 월요일이 되었어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이미 점심시간이라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야 했다. 병자 같은 몰골로 교복을 주워 입으며 수연은 허옇게 부르튼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쁜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엄마와 저는 다른 사람 아닌가. 그리고 이도재가 제 엄마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도 다 모욕적이었다.

어쨌든 정말, 만약 그런 이유로 제가 싫대도…… 그냥 싫다고 하면 되지 꼭 그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그런 나쁜 이도재를 좋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멋있다고 생각하며 혼자 가슴 설레던 제 모습을 돌아다보니 너무 비참했다. 그리고…….

슬펐다.

‘꼭 사과받을 거야.’

절대 이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가자마자 이도재를 불러내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냐고 따질 거다. 그렇게 굳게 다짐한 수연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제 얼굴을 보고 놀라 입을 떡 벌린 현지를 내버려 두고 교실을 훑었다.

“야, 너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아파?”

“……이도재 어딨어?”

“어? 갑자기 이도재를 왜 찾아, 헉, 너 열이…….”

수연의 이마를 짚어 보던 현지가 이도재를 찾는 그녀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도재 전학 갔대.”

“뭐?”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던데, 아까 오전에 와서 짐 챙기면서 인사만 하고 갔어. 제일 친했던 애한테만 말하고 그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나 봐. 글쎄 우는 애도 있더라니까?”

“…….”

수연이 너도 충격이지, 덧붙이는 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 놓고 가 버렸다고? 나는 아직 할 말이 넘쳐흐르는데?

양호실이라도 같이 가자며 저를 이끌고 나오는 현지에게 반쯤 끌려가면서도 수연의 눈은 초점이 나가 있었다.

*

그날 늦은 오후,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엄마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엄마는 눈에 띄게 핼쑥해진 수연의 얼굴을 볼 경황이 없는 것 같았다. 다녀온 기념으로 사 왔다는 초콜릿 상자를 제게 주는 엄마의 곱게 화장한 얼굴을 보는 순간 뱃속이 자글자글 끓었다.

“너는 엄마 보고 잘 다녀왔냐는 말을 못 할망정 표정이 그게 뭐야, 어머……!”

제게 인상을 쓰는 엄마를 밀치고 일어난 수연은 부엌에 가서 가위를 꺼내 왔다. 씩씩대며 제 방에 들어와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 둔 하늘색 원피스를 찾아 손에 쥐었다. 놀라 달려온 엄마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가위로 쫙쫙 찢었다. 성에 차게 찢기질 않아, 나중에는 그냥 가위를 집어 던지고 손으로 걸레짝을 만들어 버렸다.

“왜 이래, 너 미쳤어!”

당황해 수연의 팔을 잡던 엄마는 자신에게는 눈길도 안 준 채 매섭게 옷만을 찢고 있는 수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손을 거뒀다.

“얘가 진짜!”

미친년이 옷을 사 줬더니 정신 나간 모양이라고 씩씩대면서도, 사춘기 어쩌고 하며 엄마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렸다.

“으흑…… 흐…….”

수연은 제가 어느 순간부터 엉엉 울고 있는 것도 몰랐다.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찢어질 것 같은데 저는 또 이 작은 방에 혼자 있었다.

넝마가 되어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도 없게 된 예쁜 옷만이 제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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