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데 예쁜 1권 ♥
1
비밀번호를 성급하게 누르는 소리가 아득했다. 그 와중에도 저를 한쪽 팔로 품에 꽉 끌어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멍한 동시에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 씨발.”
실수로 번호를 틀리게 눌렀는지 작게 욕설을 내뱉는 저음이 들렸다. 그가 욕을 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키패드가 눌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나고서야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수연을 안에 밀어 넣는 남자의 움직임은 무섭도록 빨랐다. 기다렸다는 듯 제게 달려드는 커다란 몸을 채 저지할 새도 없었다. 문이 잠겼음을 알리는 알람음이 작게 울려 퍼졌다.
“잠, 잠깐……읍…….”
딱딱한 벽에 등이 닿는 감각이 선연했다. 현재야, 채 뱉지 못한 말은 더운 숨결과 함께 그대로 삼켜졌다. 놀라 벌어진 입 안에 혀를 밀어 넣는 움직임이 사뭇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취하는 듯 당당했다.
“아…….”
맞닿아 뒤엉킨 점막이 질척하게 비벼졌다. 잠시 켜졌던 현관 등마저 암전하자 완전한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기분 좋을 정도의 몽롱한 취기 속에서 수연은 남자를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저를 가둔 단단한 가슴팍을 무의식적으로 부여잡았을 뿐.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아주 잠깐 멈칫했던 남자는 이내 커다란 손으로 수연의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한 채 다시금 짙은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의 코트 자락에 묻은 찬 바람 내음과 약간의 술 냄새, 그리고 은은하게 나는 조금은 묵직하고 남성적인 향까지도 어쩐지 다분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지난여름 수연이 사 준 향수를 받은 이후, 그는 몇 년간 습관처럼 써 왔다던 것을 버리고 굳이 이 향만을 고집했다.
“으응…….”
쉼 없이 비벼지던 혀가 예민한 입천장을 느릿하게 긁어 내리자 결국 수연의 입술을 타고 젖은 비음이 흘러 나왔다. 딱히 비교 대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남자는 키스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현재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서로의 숨결을 아낌없이 나누는 행위가 깊어질수록 밤바람에 차게 식었던 몸에 은근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 아찔한 늪에 기꺼이 말려들던 수연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얘가 왜 이러지.’
사귄 지 어느덧 1년여가 다 되어 가는 지금이지만, 수연은 현재와 닿는 감각에 그들이 만난 시간만큼 익숙해진 한편, 모순적이게도 절대로 익숙해질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이현재라서 그럴까. 그와 닿아 있는 이 순간이 지극히 현실임을 인지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부유하는 느낌은 언제고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의 현재는 이상했다. 동기들에게 들키지 않게 짧은 시차를 두고 시끌벅적한 술집을 나왔을 때부터 그의 오피스텔로 갈 때까지, 그는 제게 말 한마디 먼저 걸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수연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였다. 도중 수연이 은근슬쩍 손을 빼려고 했으나 오히려 더 꼭 잡아 오는 바람에 가다가 혹 아는 사람을 만날까 괜히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현재야. 혹시 취했어?’
‘…….’
‘뭐 화난 거 있어?’
‘…….’
수연이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물어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걷기만 했다. 그 역시 제게만은 유난일 정도로 다정한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도 그랬다. 원래도 스킨십할 때면 평소의 단정하고 어쩐지 초연한 느낌과는 다르게 집요한 면이 있는 남자였지만, 이렇게 현관에서부터 허겁지겁 자신을 삼켜 오는 행동은 절대로 현재답지 않았다.
“……!”
그러나 야릇한 쾌감에 휩싸이며 얄팍하게 확장되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허리께를 은근하게 쓰다듬던 남자의 손이 짧은 스커트 안으로 불쑥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얇은 스타킹에 휘감긴 허벅지를 저속하게 주무르는 손길에 당황한 수연이 고개를 조금 비틀었다.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왜.”
귓가에 낮게 흩뿌려지는 저음에 순간적으로 옅게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엉덩이까지 침입한 손을 제지하려 힘겹게 손을 뻗으며 수연은 중얼거렸다.
“너 오늘 이상해.”
“그래?”
건성으로까지 들리는 대답 후 잘게 내리는 입맞춤이 수연의 얼굴 곳곳에 흩뿌려졌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조금 미간을 찌푸렸지만 눈앞의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에는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도리어 이제는 아주 속옷 안으로까지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스타킹과 속옷이 확 끌어 내려질 것 같은 느낌에, 수연은 몸을 비틀며 단단한 품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러다 진짜 여기서 일 칠 것 같았다.
“너 취했어, 그만해.”
“내가?”
수연의 말에 처음으로 현재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였다. 저를 지분대던 손길이 뚝 멎자 수연은 조금 안도했으나 과장된 어조로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자니 다시 초조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올 시간 되지 않았어?”
“형 말이야?”
하, 얼버무린 말도 단번에 알아들은 그의 말끝에 채 숨기지 못한 한숨이 배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습관 때문인지 이란성 쌍둥이인 제 형을 그는 꼬박꼬박 형, 이라고 불렀다. 수연은 멍하니 눈앞의 현재를 바라봤다.
“취한 건 수연이 너 같은데.”
“…….”
“형은 여행 갔다고 했잖아. 이틀 후에나 돌아와.”
아, 맞다. 아까 술자리에서 그가 스치듯 했던 말을 기억해 낸 수연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데, 별안간 엉덩이를 세게 쥐어오는 악력이 느껴졌다. 어느새 훤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남자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또?”
“어?”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나 해서.”
그게 무슨……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수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몇 시간 전, 개강 총회 뒤풀이였다. 후배 하나가 둘은 정말 사귀는 것 같다는 말에 정색하며 진짜 친구라고 말했던 제 모습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짚이는 데가 있는 수연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현재가 미미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아아.”
“…….”
“친구랑 이런 거 하면 안 돼서 그런가?”
제 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한 말에 수연은 굳어 버렸다.
처음부터 과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던 연애였다. 현재야 물론 싫은 티를 내긴 했으나 수연이 하도 간곡히 말해 수긍했었다. 뻔히 옆에 있는 애인을 친구라고 말하는 제 모습에 속이 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하긴. 너무 문란하다, 친구끼리 이런 일 하는 건.”
그치? 짐짓 나긋하게 덧붙이는 남자의 말에 수연은 확신했다.
‘화났구나.’
화났네. 화났어. 왜 오늘따라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이런 때는 가만히 받아 주는 게 상책이었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수연이 제 허리를 쓸어 올리는 진득한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
순식간에 발이 땅에서 떼어지는 느낌에 놀란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툭, 툭. 신고 있던 단화가 차례로 현관에 나뒹굴었다. 가뿐하게 저를 안아 든 채 맨 안쪽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품에서 수연은 불안하게 눈만 깜빡였다.
“흣…….”
그는 거침이 없었다. 침대 위 수연을 타고 오른 현재가 헐렁한 카디건을 벗겨 내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농밀한 키스와 함께 이루어져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말아 올려진 치마 아래가 휑했다. 진득한 키스에 휩쓸려 있던 수연은 설핏 눈을 떴다.
‘언제 여기까지 벗겨 놨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옷 벗기기 대회가 있다면 현재가 1등일 것 같았다. 미쳤나 봐, 술에 취한 건지 자꾸 들쭉날쭉 튀는 제 생각에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현재가 마뜩잖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딴생각 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고……으응, 잠깐만.”
순순히 혀를 마주 얽다 갑자기 고개를 비트는 수연이었다. 흐물흐물 풀어져 미약한 힘이었지만 현재는 기꺼이 휩쓸려 주며 제 아래 아찔한 곡선을 그리는 여체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느 틈에 훅을 푼 브래지어가 반쯤 흘러내려 뽀얗게 살 오른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고, 잘록한 허리 아래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스타킹 안에는 제 손에 의해 곧 끌어 내려질 앙증맞은 레이스 팬티가 보였다. 진한 톤 색감의 속옷 덕분에 하얀 속살이 더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왜?”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에 새삼스럽게 저절로 아래에 피가 몰렸다. 반쯤 잠긴 제 목소리에 수연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게 다 보였다. 당장이라도 품 안의 부드럽고 따끈한 몸을 취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가까스로 누르며 현재는 숨을 골랐다.
늘 새침하게 정돈되어 있던 그녀가 제 아래서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모습은 색정적이다. 취해서 그런지 키스의 여파인지 달아오른 양 뺨. 살짝 젖어 있는 눈가는 처연한 맛이 있는 동시에 애를 닳게 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하긴, 수연에게 애가 다는 게 어디 지금뿐인가.
현재의 입가에 비뚜름한 조소가 걸렸다. 이렇게 제 품 안에 있어도 제 것 같지 않은 모순적인 감각. 그것이 너무나 불쾌하면서도 정작 제게 그런 감정을 들게 하는 애인을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불안하니까.
혹시나 제 말이나 행동 하나에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못 견디게 불안해서, 현재는 수연과 있으면 자꾸 초조해졌다. 지금도 그랬다. 다시금 입 안에 혀를 밀어 넣고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게 벗긴 몸을 엉망으로 탐하고 싶은 들끓는 욕망을 한 줄기 실낱같은 이성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그래도, 문이라도, 잠그고…….”
불 꺼진 방 안,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형형한 눈빛에 조금 기가 죽은 수연이 말끝을 흐렸다. 이도재가 여행을 갔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분위기상 이런 애무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노파심에 한 말이었는데.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구나.”
씩 웃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들 정도로 근사했지만 어쩐지 싸늘했다. 수연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또, 씻지도 않았고.”
하, 수연의 말에 옅은 한숨을 한번 내쉰 현재가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만하려나……? 안도와 동시에 염치없게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는데, 현재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신과는 다르게 현재는 코트조차도 그대로 입은 멀끔한 모습이었다. 팔을 교차해 안에 입고 있던 니트까지 벗어 내자 보기 좋은 근육들이 빼곡히 들어찬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홀린 듯 그를 보고 있던 수연은 다시금 저를 안아 드는 현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 눈으로 물으니 현재가 다시금 쪽, 입을 맞춰 왔다.
“그럼 문 잠그고 같이 씻지 뭐. 됐지?”
묘하게 핀트를 비껴가는 말에 토를 달 새도 없었다. 엎어지면 코앞일 욕실까지 저를 안아 들고 가는 남자의 단단한 품 안에서 수연은 생각했다.
아아,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모든 것은 명백히 제 탓이었으니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
1년 전.
그날도 별다르지 않게 시작한 하루였다.
찬 공기가 가득한 방 안에서 눈을 뜬 수연은 씻고 난 후, 대충 잡히는 대로 옷을 입고 원룸 밖으로 나섰다.
‘아직 춥네.’
일교차가 큰 날들이 이어지는지라 얼굴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매섭게만 느껴졌다. 수연은 외투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지만 돌아가기 귀찮아 그냥 걸었다.
개강 첫 주의 학교는 늘 그렇듯 은근하게 들뜬 느낌이 있었다. 적당히 왁자지껄한 그 풍경 안에 물 흐르듯 섞여 들어가며 수연은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꼈다.
내가 이 학교에 다니다니. 스물한 살에 입학해 지금이 스물셋이었지만 수연은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제 처지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수연은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기특했다. 대견했고.
그리고 조금은 허망하기도 했다.
‘배불렀네, 아주.’
허망하다니,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어이가 없어 수연은 조금 웃었다. 추운 날씨에도 벌써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나무 아래서 잠깐 감상에 젖었던 수연은 그렇게 자신을 타박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봄이라도 타는 모양이었다.
“수연아! 여기!”
강의실에 들어선 수연은 제게 손을 흔드는 낯익은 얼굴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안 추워?”
완전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다미의 옆에 앉으며 수연이 물었다. 딱 봐도 얇아 보이는 트렌치코트 안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 차림이 예쁘긴 했는데, 수연의 눈에는 솔직히 좀 추워 보이기도 했다.
“봄인데 뭐. 좀 화사하게 입어야지.”
다미는 졸업반이라고 칙칙할 필요 있냐며 열을 올렸다. 삭막한 학교생활을 하는 수연이 그나마 편하게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개총 뒤풀이 있잖아.”
은근하게 덧붙은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다미도 매번 저처럼 편하게 입고 오는 타입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했다.
“예뻐. 잘 어울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다미가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얼굴색을 확 바꿨다.
“고맙긴 한데 너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어도 와닿지 않거든?”
“…….”
“내가 이렇게 꾸미면 뭐 하냐, 자다 일어나서 내추럴하게 온 차수연이 백배 천배 예쁜데.”
갑작스러운 푸념에 수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외모 칭찬을 듣는 덴 익숙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 오는 상대에게 어떻게 대꾸할지 모르는 것은 여전했다.
“안 가려고 했는데 이현재도 온다고 하니까 또 가야지. 걔는 복학하면서는 이런 자리도 잘 안 나오고 과방에도 없더라. 파릇한 신입생들 눈에 또 하트 뿅뿅 하겠네. 근데 또 그거 보는 재미가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빠르게 말을 잇는 다미에게 수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미가 말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나, 그간 다미가 하도 옆에서 얘기한 덕에 알게 모르게 정보가 쌓여 가는 중이었다.
‘걔 군대 가기 전에, 그니까 신입생 때 개총 뒤풀이에서 나도 딱 보고 충격받았다니까? 진짜 너무 잘생기면 감탄하기 전에 약간 멍 때리게 되는 거 있잖아.’
다미의 말에 따르면, 처음 이현재가 입학했을 때는 그를 보러 졸업한 선배들까지 과 행사에 참여했단다. 그 정도로 유명했으며 고등학생 때는 유명 기획사에서 캐스팅을 받았다는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소문도 돌았다고 했다.
수연 역시 그와 지난 학기 같은 수업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같은 학부다 보니 몇 번 오며 가며 마주친 적도 있었으나 소문대로 잘생겼다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평면적인 느낌을 받았을 뿐. 그는 수연의 기억 속에 깊게 자리하지는 못했다.
원체 수연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눈 호강 좀 하려 했더니 어째 나는 걔랑 수업 겹치는 게 하나밖에 없냐. 암튼 이따 수연이 너도 같이 가면 좋은데.”
덧붙이는 다미의 말에 수연은 전날 강의실 뒤편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이현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걔, 저번 학기에 과탑 했지?”
“엉? 어, 그럴걸? 걔 1학년 때도 줄곧 과탑이었잖아. 그렇다고 막 도서관 틀어박혀 있는 타입도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사람이 이 정도로 완벽하면 반칙 아니냐. 뭐, 솔직히 좀 까칠한 면도 없지 않아 있는데 그래도 애가 기본적으로 성격은 좋아. 눈치 없게 들이대면서 귀찮게만 안 하면 나름 친절해.”
갑작스러운 수연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찬사를 쏟아냈다. 한 귀로 흘려듣던 수연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할까.’
그거 하나는 진짜 부러웠다. 수연은 자신이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장학금도 받아 가며 공부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과외며 알바며 쉬지 않고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 잠을 쪼개 가며 공부했지만 당연하게도 장학금을 매번 받진 못했다. 노력이 무조건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과탑을 놓친 적이 없다는 이현재는 아마도 머리가 비상할 것이 분명했다. 이내 교수님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연은 꾹 입을 다물고 열심히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공간 하나를 통째로 빌린 주점 안은 시끌벅적했다. 이 정도면 출석률 100%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참여 인원이 많았다. 학부생 전체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꽉 들어차,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적당히 어둑한 조명 아래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 커다란 대화 소리 들이 제멋대로 엉켜 있었다.
“와, 선배 이런 자리 나오신 거 처음 봐요! 대박.”
“그니까, 차수연이 웬일이래?”
그중에서도 수연을 향한 관심은 뜨거웠다. 수연은 주점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솔직히 뭐라 대꾸할지 잘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입학 때부터 눈에 띄게 예쁜 외모로 유명했던 수연이지만 자발적으로 아싸를 자처하는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친한 사람이라 봐야 옆에 앉은 다미 정도. 그 또한 겹치는 수업을 듣고 시간이 맞으면 학식을 같이 먹는 정도였지 따로 밖에서 만나 논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미는 가끔 놀러 가자고 졸랐으나 수연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자, 자. 여기 잠깐 주목 부탁드립니다!”
정신없는 와중 굵직한 목소리가 홀 안을 메웠다.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 형식적인 말을 빠르게 쏟아 낸 회장이 건배사를 하자 다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짠! 거기에 맞춰 수연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사람들도 잔을 맞부딪쳤다.
“오늘 현재 선배는 못 오신대서 슬펐는데 수연 선배님 보니까 너무 좋아요.”
“야, 나는?”
앞자리 여자애의 말에 다미가 장난스럽게 발끈했다. 에이, 선배님은 당연한 거고요, 능청맞게 덧붙이는 말에 테이블 위 웃음이 터졌다. 수연은 반쯤 남아 있던 맥주잔을 비우며 핸드폰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술집에 들어온 지 어느덧 한 시간 반 정도가 넘어 있었다.
“근데 진짜 현재 선배님은 안 오시나 봐요.”
“그니까. 애들 실망 좀 했겠네. 모르긴 몰라도 여기 반은 이현재 얼굴 보려고 왔을 텐데. 설마 참석률 높이려고 이름 판 거 아냐? 안 오는 애 온다고 하면서?”
신입생으로 보이는 후배의 말에 다미가 즉각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열 오른 얼굴로 샐쭉 웃어 보인다.
“대신 우리 수연이가 딱 앉아 있으니까 남자애들은 다 여기만 본다. 그치?”
얘 또 시작이네, 다미의 말에 수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써 취기 오른 얼굴인 다미와는 다르게, 수연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원 상태 그대로였다.
“……근데 선배님은, 남자친구 없으……시죠?”
“응.”
내내 별말도 없이 저만 바라보던, 맞은편 남자 후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수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안주로 나온 마른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다미가 건수 잡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뭐야, 수연이 애인 없다는데 왜 네가 안도하는데?”
“아, 아뇨. 그냥…….”
“최윤성 원래도 수연 언니 팬이에요, 이번에도 같은 수업 두 개나 있다고 저한테 자랑을 얼마나 했는데요!”
“야! 내가 언제.”
“오늘도 언니 온다는 얘기 듣고 과외 알바까지 다른 날로 제치고 달려온 거라니까요?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세상을 FM대로 살아가는 이 성실한 애가 말이에요! 대박이죠?”
여자 후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성이란 후배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수연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잔을 비웠다. 최윤성이라, 수업이 겹치는 게 있긴 했던 듯 곱상한 얼굴이 얼핏 낯이 익기는 한데 이름은 처음 들었다.
“헐, 진짜? 얘 진심이네.”
“…….”
“근데 아무리 윤성이 너라도 수연이는 힘들걸. 우리 수연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너 모르지? 차수연 딱 입학했을 때…….”
“그만해.”
딱히 반박도 못 하고 당황해하는 윤성의 표정에 마음이 불편해진 수연이 제지했다. 아 왜,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을 더 이으려던 다미였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연에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벌써 가려는 건 아니지? 너라도 있어야 내가 상큼이들 사이에 껴 있지!”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예 수연의 가방을 꼭 붙잡고 있는 다미를 보고 얕게 한숨을 쉰 수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시끌벅적한 홀 안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을 가려면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구조라 조금 불편하긴 했다. 그러나 딱히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다. 수연은 괜히 찬물에 손을 한번 씻고 멀쩡해 보이는 제 얼굴을 거울에 한번 쓱 비춰 본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헉,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 앞을 서성이던 커다란 남자의 인사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경영학부 입학한 김우형이라고 합니다, 그게, 저도 화장실 다녀오다가…….”
실제로 남자 화장실이 몇 걸음 떨어진 옆에 위치하긴 했지만, 어쩐지 찝찝한 기분에 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아, 저…….”
수연의 앞을 가로막은 우형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과하게 뜸을 들이는 태도가 불안했다. 수연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
“아! 다른 의도는 정말 아니고요, 그냥, 선후배 사이에 잘 지내고 싶어서요. 음. 선배님이 늘 장학금 받으신다고 해서 좀 여러모로 여쭈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쩔쩔매며 저를 바라보는 김우형은 운동깨나 했는지 덩치도 크고 키도 컸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수연은 감흥 없이 답했다.
“뭔가 잘못 안 것 같은데 나 늘 장학금 받지 않아.”
“아? 아……그게, 꼭 그런 것만은.”
“그리고 과 활동도 안 하는 편이라 나한테 도움 받을 건 없을 거야.”
미안, 짧게 덧붙인 수연은 망설임 없이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에게서 멋쩍은 빛이 돌았다.
‘그만 가야겠다.’
가자마자 가방을 챙겨서 바로 나올 요량으로 수연은 걸음을 빨리했다. 방금 전 우형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게 조금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히기엔 충분했다. 그냥 집에서 혼자 마시고 잘걸. 계단을 올라가는 수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연은 남자가 불편했다.
물론 그것은 아예 싫다는 것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었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좀, 불편했다. 누군가는 재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 외모에 눈을 번쩍이는 시선들을 마주할 때마다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외모 빼면 제게는 딱히 장점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머리가 탁월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친화력 있고 사근사근한 편도 아니고…….
조금 더 파고들어 가면 남자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딱히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인 흐름도 부담스러웠고 타인이 제 영역에 들어오는 것도 싫었다.
수연은 그 모든 것들이 제 가정환경에서 기인한 자격지심에서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딘가 뒤틀리고 어그러진 내면을 딱히 바로잡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았고 사실 딱히 돌이킬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이 좋았다.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혼자인. 분명 외롭지만 번거롭거나 상처받을 일은 없는, 비참하지는 않은 현재가 좋았다.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돼.’
사실 오늘은 수연의 생일이었다. 매년 혼자 보내는 생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왜인지 집에 있고 싶지 않아 왔던 술자리는 역시나 끝 맛이 좋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소란스러워진 술집 안, 제 테이블을 찾아가던 수연의 눈이 어느 순간 크게 뜨였다.
‘뭐지.’
다미의 옆, 그러니까 제 자리였던 곳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당황한 것이었다.
얘가 왜 여기에 있지? 생각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다. 수연아! 저를 부르는 다미의 한 톤 올라간 목소리에 뒤이어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아, 미안. 여기 앉아.”
씩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는 남자는 오늘 뒤풀이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이현재였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는 아까 보지도 못했던 얼굴들이 여럿 더 앉아 있었다. 수연은 멈칫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어차피 이제 가려고 해서.”
“벌써?”
“어.”
갈 때 가더라도 가방은 갖고 가야 했다. 살짝 당황한 표정인 현재를 내버려 두고 제 백팩이 있는 곳으로 팔을 뻗는데, 갑자기 다미가 백팩을 꽉 끌어안았다.
“안 돼! 못 줘.”
“…….”
“내가 너 오늘 꼭 끝까지 데리고 있을 거야!”
얘 왜 이래, 살짝 눈이 풀린 다미를 보며 수연이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는데 얼핏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래. 좀 더 있다 가.”
수연아, 동기지만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어조는 지나치게 친숙했다. 그러고 보니 이현재 역시 저 때문에 아직 앉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옆에 서 있는 터였다.
잠깐 자신들에게 집중된 주위의 시선을 잊은 채,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저보다 한참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
가까이서 본 이현재는 생각보다 더 키가 컸고 어깨가 딱 벌어진 게 체격도 좋았다. 그리고 비약이겠지만 저를 보며 상당히 낯간지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간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칠 때 보았던 것은 분명 무표정이 전부였는데. 아무래도 상당히 잘 웃는 편인 모양이었다.
수연이 처음으로 제대로 본 이현재의 인상은, 그게 다였다.
*
어째 시간이 흐를수록 인원이 줄기는커녕 더 많아지고 시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할 남자와 다미의 사이에 끼어 앉은 채 수연은 술잔만 기울였다.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냐?”
“어?”
그러다 갑자기 제게 말을 거는 현재 때문에 수연은 흠칫했다. 한 번에 다 비운 맥주잔을 쥔 채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저를 보고 설핏 웃는 얼굴이 담겼다.
“술 잘 마셔?”
“그냥. 맥준데 뭐.”
“그래도, 나 오기 전에도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수연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대답 대신 빤히 현재를 바라보았다. 명백히 불만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자 현재 역시 말없이 수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왁자지껄한 풍경 안 아주 잠깐, 두 남녀의 시선이 빠듯하게 맞물렸다.
“근데 진짜 너, 이런 자리에서는 진짜 처음 본 거 같네. 반갑다.”
애매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여전히 그의 입꼬리는 슬쩍 위를 향해 있었다.
“응.”
수연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티 안 나게 살짝 몸을 옆으로 뗐다. 시끄러운 소리에 말이 묻힐까 그랬는지 아님 기분 탓인지. 제 쪽으로 고개를 살짝 비튼 채 말을 거는 남자가 너무 밀착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벽에 붙어 있는 긴 의자 위, 그와 제 허벅지가 붙을 듯 말 듯 지나치게 가까웠다. 인원이 많다 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수연에게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얘가 원래 이런 타입이었나.’
다미에게 들은 말에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인 이현재의 이미지는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긴 해도 분명 과묵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판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데 말이다.
여전히 제게 은근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고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만 하염없이 집어 먹던 수연이 별생각 없이 앞에 놓인 얼음물 잔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근데 현재 선배님은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어디 들렀다 오셨어요?”
“저희 엄청 기다렸는데! 지윤이도 잠깐 선배님 얼굴만 보고 간다고 왔다가, 안 오시니까 되게 실망하고 갔거든요!”
한층 톤이 올라간 앳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여자들이었다. 옆의 다미와 맞은편의 윤성을 제외하면 거의 인원이 바뀌었다고 할 수준이었다.
어쨌든 제게 쏟아지던, 조금은 부담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하던 관심이 이현재에게 쏟아지는 것만은 상당히 달가웠다. 그러나.
“여기, 물 좀 주세요.”
“네!”
“…….”
자연스럽게 수연의 손에서 얼음물이 든 잔을 가져간 현재가 지나가던 알바생에게 새 물을 요청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현재는 얼음은 빼고 주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선 아르바이트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을 붙여 왔다.
“이 사람 저 사람 마셨던 것 같아서.”
“……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의자에 반쯤 널브러져 있다시피 하던 다미가 눈을 크게 떴다.
“야, 근데 너희 원래 친했어? 왜 이렇게 둘이서만 속닥거려?”
다미의 괄괄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다들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어, 저도 아까부터 느꼈어요. 두 분 원래 친하셨어요? 몰랐는데.”
“아니야.”
수연은 곧바로 부정했으나 이미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근데 선배님들 나란히 있으니까 진짜 그림 같긴 해요. 와, 이 투 샷 언제 또 보냐. 사진 찍어 놔도 돼요?”
“맞다 맞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다 같이 사진 한번 찍어요!”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단체로 사진까지 몇 번이나 찍혀야 했다. 그 와중 다른 테이블에서도 수줍게 다가온 신입생들 몇몇이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하고, 중간중간 현재의 번호를 물어보기도 했다.
이현재는 사진은 잘 찍어 줬으면서, SNS에 올린다는 것까지도 그러라고 했으면서도 정작 번호를 물어보는 말에는 어찌어찌 에둘러 좋게 거절했다. 나중에 학교에서 만나면 밥 사 주겠다는 식으로, 얼핏 다정한 듯 보이면서도 칼같이 자르는데 스킬이 보통이 아니었다.
‘오늘은 진짜 안 취하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수연은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옆에서 왜 혼자 마시냐며 잔을 채워 주는 다미의 핀잔을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던 남자 하나가 현재에게 말을 건 거였다.
“너 언제 왔냐? 네 형은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만.”
“어, 바빠서 주방에서 나올 틈이 없나 봐.”
“웬일이냐. 도우러 안 가고. 난 또 너도 거기 있는 줄 알고 아까 인사하러 갔었잖아.”
처음에는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종전까지 술자리에서 들은 말을 떠올리니 이해가 갔다. 이 가게는 현재의 형이 지난 학기부터 오픈한 호프집이라고 했다.
“근데 현재 너는 형이라고 꼬박꼬박 잘도 부르더라? 솔직히 쌍둥이들 형 동생 잘 안 하지 않아? 특히 동생 쪽이.”
형이라고 하고 이런 가게도 운영한다 해서 막연히 나이 차가 좀 날 거라고 짐작했는데 쌍둥이였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끼어든 다미의 물음에 현재가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우린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서.”
“그럼 둘이 있을 때도 형이라고 꼬박꼬박 불러?”
“어. 그게 편해. 가끔 이름도 부르고 하긴 한데, 사실 호칭은 별 의미 없고 가장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이라.”
“와, 부럽다. 나는 외동이라 사이좋은 형제나 자매 보면 그렇게 부럽더라?”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데, 아까부터 현재의 얼굴만 바라보던 신입생들이 하나둘씩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 선배님 쌍둥이세요? 그럼 선배님이랑 똑같이 생기신 분이 또 계신 거예요?”
“아니. 이란성이라 닮진 않았어.”
“헐, 대박! 안 그래도 선배님들한테 아까 살짝 얘기 듣긴 했거든요, 현재 선배님 형제분이 여기 사장님이시라고. 그래서 학부에서 모임 있을 때는 웬만하면 여기로 장소 잡는다고요! 당연히 나이 차 좀 나실 줄 알았는데 쌍둥이라니, 신기해요.”
“지금 그럼 주방에 계신 거예요? 보고 싶다! 궁금해요.”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들에 파묻힌 수연은 정신이 없었다. 아, 얘는 왜 내 옆에 앉아 가지고……. 물론 그도 별생각 없이 빈자리에 앉은 거겠지만 수연은 속으로 괜히 죄 없는 현재를 타박했다.
어쨌든 이만하면 슬슬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눈치껏 가방을 챙기는데 옆에서 누군가 팔을 덥석 잡아 왔다.
“뭐야, 가려고?”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언제 일으킨 건지 다미가 몸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어. 좀 피곤하기도 하고.”
“에이, 끝까지 같이 있기로 해 놓고서느은!”
“그런 말 한 적은 없잖아.”
“흠흠, 하긴, 너 많이 마시긴 하더라……. 안 취했어?”
누구보다 취해 보이는 사람이 묻고 있는 말에 수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응. 넌 집에 잘 들어갈 수 있겠어?”
“나야 뭐어…….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인데.”
“헉,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이제 시작인데!”
수연이 일어나려 하자 아까부터 살갑게 말을 붙여 오던 여자 후배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응, 난 많이 마신 것 같아서. 재밌게 놀아.”
사실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마신 정도였지만 그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일어나려는데, 불현듯 남자의 목소리가 수연을 잡아 세웠다.
“집은 어딘데? 멀어?”
“……아니. 엄청 가까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야, 굳이 뒷말을 덧붙인 것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아주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데려다줄게.”
“…….”
데려다줄까, 묻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산뜻하게 말하는 얼굴에 수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디선가 새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방금 오셨으면서.”
“수연 선배님 데려다주시고 다시 오시는 거 맞죠? 아니, 저희도 그냥 같이 갈까요, 그럼?”
“와, 그렇게 해요! 아, 근데 갑자기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오는 길에 같이 먹어요, 선배님. 이 앞에 새로 생긴 데 있잖아요.”
“됐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취한 것도 아니고.”
저들끼리 죽이 맞아 신나게 떠드는 와중 수연은 이번에는 명백하게 얼굴을 굳혔다. 도대체 오늘 처음 제대로 대화라는 것을 해 본, 그것도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이현재가 제게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원래 이렇게 동기든 후배든 잘 챙겨 주는 타입이라 해도, 어쨌든 자신은 그 호의가 달갑지 않았다. 수연의 싸늘한 반응에 다들 움찔 입을 다무는데 현재가 타이르듯 말을 덧붙여 왔다.
“안 취했어도 밤길인데 위험하잖아. 난 수연이 데려다주고 바로 올 테니까 너희들은 그냥 여기서 마시고 있어.”
“아…… 네.”
얼핏 나긋한 어조였지만 딱 떨어지는 말투에 후배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수연의 안에서 점점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의사는?
“아니, 진짜……!”
됐다니까? 먼저 몸을 일으키는 현재에게 결국 수연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을 붙잡았다.
“왜. 어디 가냐?”
“어. 형.”
형? 아직 앉아 있는 데다 현재가 제 앞을 가로막은 탓에, 수연은 그가 형이라고 부르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고.
“어! 선배님 형이 이분이세요?”
“안녕하세요!”
그러나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잠시 정적이 흘렀던 테이블을 다시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좀 나와 보지. 벌떡 일어난 수연은 제 앞을 가로막다시피 한 현재의 널찍한 등 뒤에 섰다.
그리고 주방에서 막 나온 듯, 반소매 차림의 눈앞의 남자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수연의 몸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닮은 사람일 거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으니까. 설마 여기서 이렇게…….
“……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찰나 간절하게 바랐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연을 발견한 남자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나 소란스러운 와중 조금 거리를 두고 마주한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오, 이도재! 왔냐?”
“어휴, 이 자식 땀 흘리는 것 봐. 좀 앉았다 가라. 엉?”
‘아.’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허물없이 말을 거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수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도재. 한때는 그렇게 지워 버리려 애썼던 남자가 제 눈앞에 나타나 버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마구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동시에.
‘좆같네, 씨발.’
‘그거 다 너네 엄마가 더럽게 번 돈으로 산 거 아냐?’
순간적으로 등골이 다 서늘했다. 다 나은 척, 애써 잊고 살았던 가슴속 깊은 흉터가 벼려진 칼날에 다시금 난도질당하는 선연한 느낌에.
*
“와, 진짜 어떻게 창업하실 생각을 다 하셨어요? 대단해요.”
“이것저것 다 끌어모아서 한 건데, 뭘.”
어느새 화제의 중심은 이현재의 형이자 이 가게의 주인인 이도재가 되어 있었다. 딱히 불친절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은근히 단답형에 딱 떨어지는 면이 있는 현재와는 다르게, 시원시원하고 호탕하게 대화를 주도하는 이도재에게 다들 흥미와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이도재는 원래 그랬다.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하던, 순진하기 그지없는 시절이 분명 제게도 있었다.
“…….”
수연은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단번에 비워 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술이 물같이 달았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5년, 아니. 6년 만인가?’
그 일이 있었던 때가 열일곱, 고등학생이었으니. 시간이 참 많이 지났다 싶은데 또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느껴졌다. 동시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순간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버릴 만큼 놀란 자기 자신에게도 환멸감이 들었다.
“처음에 도재가 여기 오픈한다 했을 때 솔직히 우리 반신반의했거든? 아, 얘네 형제랑 성혁이랑 나랑 해서는 고등학교 동창이라. 어쨌든 이렇게 현재는 떡하니 대학 잘 다니는데, 이 자식 혼자 맘 못 잡고 돌아다닐 때만 해도 걱정 많이 했었는데…… 갑자기 장사한다니까 당연히 염려되잖아. 말아먹으면 어떡하나 우리끼리 전전긍긍했다니까.”
“근데 이도재가 여기 진심인 거야. 인건비 아낀다고 이 큰 홀에 처음에는 알바도 두 명인가 그랬어. 혼자 주방에 홀에, 진짜 막 뛰어다니면서 했는데. 지금은 봐 봐. 알바도 세 배로 늘었잖아. 그래도 늘 바빠.”
대단한 놈이야 암튼, 열심히 말을 잇던 남자 동기 하나가 이도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도재가 착석한 후 테이블에 사람이 더 늘었던 탓에, 따로 떨어져 있던 긴 테이블을 둘을 붙여 둘러앉은 상태였다. 시간이 늦어 어느 정도 빠질 인원은 빠진 터였지만 안은 여전히 복작복작했다.
“현재가 많이 도와줬지. 휴가 나와서도 쉬지도 못하고 나랑 자리 보러 다니고……. 지난 학기에도 수업 끝나면 허구한 날 와서 홀 보고. 전에 그것 때문에 처음으로 한번 싸웠다. 나는 공부하느라 바쁜데 뭐 하러 오냐고 하고, 현재는 그럼 형제끼리 이런 거도 못 해 주냐 하고.”
“싸운 건가. 그게.”
내내 별 말이 없던 현재가 제 형의 말에 그제야 툭 한번 말을 던졌다. 하하, 이도재가 사람 좋게 웃으며 현재를 바라봤다.
……분명 그렇게 느껴야 하는데,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에 수연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 맞아, 싸운 건 아니지.”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이도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아주 살짝 옅어졌다.
“지난 학기 때 현재 휴학한다고 했다가 너 난리 친 거 얘기하는 거지? 암튼 사이좋다니까. 형제가 이렇게 애틋한 건 처음 봤다, 내가 진짜.”
“근데 정말 안 닮으셨어요! 어, 뭐라 하지? 두 분 다 진짜 완전 잘생기신 건 맞는데 느낌이 다르다고 할까?”
“그래? 난 뭔가 묘하게 닮은 느낌은 있는 것 같은데?”
왁자지껄 흘러가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수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워낙 술이 세기도 하고, 여러모로 경황이 없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연은 꽤 많이 마신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놀랐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는 한편, 뱃속 깊은 곳에서 자글자글 열이 끓으며 반감이 들었다.
‘생긴 건 여전히 번드르르하네.’
짜증 나게, 수연은 괜히 입 안 연한 살만 잘근잘근 깨물며 이도재를 속으로 씹었다.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거침없는 태도를 보고 있자니 달갑지 않은 옛 기억이 하나둘씩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일단 이도재가 저를 알아본 건 확실했다. 물론 당연히 아는 체할 마음은 없는 것 같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애꿎은 빈 잔만 노려보는 수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던 찰나.
“근데 못 보던 얼굴이 있네.”
“……!”
별안간 제게 꽂힌 이도재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래진 동공에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무심한 얼굴이 담겼다.
“아, 도재 너는 처음 보지? 내가 예전부터 얘기했던 우리 과에서, 아니 학교에서 제일 예쁜데 개도도한…… 아, 음. 수연아. 미안, 칭찬이야. 알지.”
이도재의 말에 신나게 대답하던 성혁이 문득 어설프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칭찬이냐? 수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눈앞의 죄 없는 땅콩만 신경질적으로 씹었다.
“수연…….”
이도재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수연의 이름을 뇌까렸다. 웃음기를 쫙 뺀 현재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한번 감겼다, 다시 떨어졌다.
“원래 이런 자리 안 나오는데, 오랜만에 나와서 우리도 반가워하던 차였어. 참, 재수해서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야. 그치, 수연아?”
“……어.”
성혁의 말에 수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고 남들 눈에도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지만, 사실 수연의 심장은 엄청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뭐야, 이도재. 암튼 보는 눈은 다 똑같다고. 네가 언제 우리 멤버 바뀐 거 신경이나 썼어? 네가 봐도 수연이 엄청 이쁘지?”
갑작스러운 다미의 말에 당황한 수연은 저도 모르게 슬쩍 이도재의 눈치를 봤다. 다미는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잠깐 자더니 그새 술이 깬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갑자기 아는 척이지? 그냥 이렇게 술 먹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라져 주면 좋았을 텐데.
“뭐…….”
말끝을 흐린 이도재가 그런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눈빛에 수연은 애써 부여잡았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머리를 치켜드는 동시에…….
‘내가 왜 불안해해야 해?’
나쁜 건 저 쪽인데.
아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들끓는 감정이 전신으로 확 퍼졌다. 자신은 잘못이 없었다.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언행으로 자신을 상처 준 것은 상대였다. 사과를 받았으면 받았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휘둘릴 이유가 없는 거였다.
‘나쁜 새끼.’
수연은 눈에 힘을 주고 저를 바라보는 이도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방금까지 사람 좋게 웃고 떠들던 게 거짓말처럼, 이도재의 눈빛은 시릴 정도로 무감했다. 얼핏 무관심해 보이면서도…… 희미한 경멸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꼭 저렇게 저를 바라봤던 것 같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던 과거의 자신을 쫓아가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리고 싶은 거센 충동이 들었다.
그런 수연을 마주 보던 이도재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막 벌어지던 순간이었다.
“야, 뭐야? 너 진짜 반하기라도 했냐? 왜 이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봐?”
“그러니까. 너무 티 내는 거 아니냐? 뭐,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건가.”
둘 사이 묘한 기류에 몇몇이 농담을 건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이도재의 입은 다시 굳게 다물렸다.
그 와중 누군가는 장난식으로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뭐야……. 수연은 대놓고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도재를 저와 그런 식으로 엮는 것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수연이 잔에 가득 찬 술을 입에 털어 넣으려던 순간.
“그만 마셔.”
제 손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 수연은 흠칫했다. 기본 체온이 낮은 편이지만 특히 손발이 찬 수연에게 커다랗고 따뜻한 감촉은 유독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많이 마셨잖아.”
얼떨떨한 표정이 된 수연에게 현재가 덧붙였다. 설핏 닿았던 온기는 금세 떨어졌으나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기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제일 먼저 다미가 끼어들었다.
“와, 근데 진짜 너희 아까부터 이상하다? 이현재 너 왜 이렇게 수연이를 챙겨줘?”
“맞아요. 아까도 막, 데려다준다고 그러시고.”
다미의 말에 아까부터 유독 현재에게 말을 걸던 신입생 하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여기저기서 말들이 새어 나왔다.
“데려다준다고 했다고? 대박. 나 얘가 술 마셨다고 누구 데려다주고 그런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헉, 진짜? 뭐냐, 이현재? 그러고 보니까 둘이 딱 붙어 앉은 것도 수상해. 차수연 이런데 안 나오다 갑자기 온 것도 좀 그렇고?”
“근데 얘네 평소에 친하다는 느낌은 없지 않았어?”
“수상하긴 뭐가.”
점차 구체적이 되어 가는 의문에 현재가 먼저 말을 잘랐다. 수연은 그사이 한 잔을 또 금세 비워 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미 옮겨 간 관심은 꺼질 줄 몰랐다.
“아니, 아까 현재 없어서 내가 딱 전화를 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뭐라 했더라? 급하게 일 생겨서 못 온다고 했거든. 그래서 차수연도 왔는데 너까지 와야 우리 과 완성된다고 했더니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오더라?”
그때부터 좀 요상하다 싶더니, 하하. 눈치 없는 성혁이 사람 좋게 웃으며 커지는 의혹에 적극적으로 살을 붙였다. 아까 나갔어야 했는데. 수연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도재까지 있다. 갑자기 나가는 것도 괜히 그를 의식하는 양 비칠까 봐 싫었다. 하,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은 수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해.”
“아…… 응.”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성혁은 다시금 미안, 하고 사과를 했다.
아주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급속도로 냉각되었던 분위기는 누군가 건배를 제안하면서 다시 풀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지던 와중 화제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동기 하나가 이도재의 전 여자 친구 얘기를 꺼낸 것부터가 화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현재 너는 연애 안 하냐? 너 좋다는 여자애들 천진데. 송지서 기억나? 왜, 옆에 여대 무용과 애 있잖아. 작년 축제 때 주점에서 너 본 후로 나 만날 때마다 너 소개해 달라고 난리다, 난리. 개피곤해.”
직전까지 제 과거 연애사를 입에 올리는데도 별다른 제지 없이 쿨한 태도를 유지하던 이도재는 제 동생을 향해 던져진 물음에 갑자기 발끈했다.
“송지서는 또 누군데? 그리고. 좋다는 애들 많다고 다 만나냐? 우리 현재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뭐 또 눈이 높아.”
현재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도재의 과민 반응은 계속되었다. 정말 웃긴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너같이 괜찮은 놈이 어딨냐는 이도재의 찬양에 가까운 말이 이어지자, 결국 현재는 포기한 듯 혼자 맥주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도재의 입은 쉬지 않았다.
“현재는 이대로 졸업 잘 해서 지가 원하는 데 취직하고, 그러다 자리 잡고 하면 연애도 조금씩 하다가 좋은 여자 만나서 때 되면 결혼하고 그럼 되지. 아직은 뭐…….”
“와, 이 자식 진짜 웃긴 놈이네. 네가 뭔데 현재 연애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냐?”
“내버려 둬. 얘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도재 원래 브라더 콤플렉스 쩔잖아.”
황당하다는 듯 던진 남자 동기의 말에 성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아주 익숙하단 투였다. 성혁의 말에 옆에 앉은 여자애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브라더 콤플렉스요?”
“응. 어찌나 현재를 챙기는지. 우리끼리도 이현재 여친 생기면, 아니, 결혼하면 걔는 시집살이가 아니라 시숙살이? 할 거라고 그랬다니까.”
“네에? 진짜요?”
성혁의 농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지만 수연은 웃을 수가 없었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새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때도 이도재는 유난이었다.
‘야, 조용히 좀 해 봐. 동생 전화 받잖아.’
그 언젠가, 무리에 섞여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교복 입은 이도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생 아니고 서울에 숨겨 놓은 여친 아니냐며 옆에서 킥킥대던 남자애들의 목소리까지.
그 유난을 떨며 챙기던 동생이 지금 제 옆에 앉아있는 남자라니. 정말 세상은 좁은 모양이었다. 수연이 새삼스러운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데 이도재가 불만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오버 떨지 마라.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 당연하지.”
“오버는 무슨. 세상에 이런 형제가 어디 있냐? 너 고등학교 때 기억 안 나냐? 너네 전학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동생 기다린다고 집에 빨리 가야 한다 해서, 우린 또 엄청 나이 차 나는 동생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였잖아. 알고 나니 어찌나 황당하던지.”
“맞아. 기억나. 한 번씩 놀러 가면 항상 현재는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하고 있고. 애 공부하니까 좀 닥치고 있으라 해서 우린 집에도 얼마 못 있고 쫓겨났잖아. 아니, 차라리 여동생이면 그나마 아주 조금 이해가 될 텐데?”
제 동창들의 생생한 증언에 이도재는 눈썹을 씰룩이면서도 부정은 안 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리는 투로 한 마디씩 보탰다.
“야, 이도재 진짜 찐이구나. 근데 난 여동생이 더 현실감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여동생이 있어서 그런가, 막 이입되네.”
“와, 진짜 대박! 이 정도면 TV 나와야 되는 수준 아니에요?”
진짜 웃기는 애네, 살짝 열 오른 얼굴을 하고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였단 말이지. 그렇게 동생 예뻐할 정도로 정이 넘치면서, 자신한테는 그렇게 모진 말을…….
“그럼 넌, 현재한테 어떤 여자가 어울릴 것 같은데?”
“뭐?”
“아니, 나중에 얘가 여친 데려오면 어느 정도 되어야 네 눈에 찰 것 같으냐고. 네가 하도 유난스럽게 구니까 별걸 다 묻게 되는 거잖아.”
누군가 웃으며 타박한 말에 이도재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뭘 또 심각하냐.”
현재가 그만하라는 투로 이도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수연은 안 보는 척 그 몸짓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잠깐이지만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현재도 이도재에게 잘 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도재가 좀 유난인 것 같긴 했다.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연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연이 정도면 진짜 잘 어울리지 않냐? 나도 오늘 처음 이 투 샷 보긴 했는데 진짜 선남선녀다. 이쁘고 잘생기고.”
가볍게 던진 성혁의 말에 이도재의 얼굴이 명백하게 일그러졌다. 남자답게 선이 짙은 얼굴에 불쾌함이 퍼지자 상당히 험악하게까지 느껴졌다. 괜히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러게, 여기만 조명 켠 느낌. 야, 이 기회에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때?”
장난스럽게 동조하는 목소리에 이도재의 표정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잠깐의 텀을 두고 그에게서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외모가 뭐가 중요해.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어, 하하. 그렇긴 한데…….”
그냥 농담하는 거잖아, 성혁이 덧붙인 변명 같은 말에도 이도재의 굳어진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정 환경이 제일 중요하지.”
‘…….’
갑자기 확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태연하게 말을 잇는 이도재를 저도 모르게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냥 어디서 봤는데, 결국은 부모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 하더라고. 보고 자란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지. 물론 일반화하는 건 아니고. 그냥 웬만하면 평범한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애면 좋겠다, 뭐 그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암튼 그래. 사실 따지자면 우리 집도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절대 못 되니까. 그래서 더 그러는지도…….”
말끝을 흐린 이도재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얼굴만 반반해 갖고 생각 없이 사는 애들은 딱 질색이야. 왜, 이쁘면 다 되는 줄 아는 애들 있잖아?”
수연은 자꾸 불규칙적으로 뛰는 제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분명 이도재가 저를 겨냥해서 한 말은 아닐 거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 현재가 아주 혹시라도 그런 애랑 엮이면 진짜 존나, 빡칠 것 같아. 그럴 리도 없지만 내가 가만 안 있지.”
하지만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눈이 마주친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닐 터였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대충 감이 왔다. 지금 이도재는 종전의 단편적인 몇 모습을 보고 제게 경고를 하는 거였다. 혹시라도 제 동생이랑 어떻게 해 볼 마음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고.
도대체 나에 대해서 알면 뭘 안다고.
‘그보다 얘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견제하는 꼴을 보자니 기도 차지 않았다. 까놓고 말하면 술집에 들어와서도 이것저것 말을 걸었던 쪽은 현재지 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제가 현재를 꼬시려 혈안이 된 것처럼 혼자 오해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러나 명백하게 담긴 의도를 알아차릴 리 없는 동기와 후배들은 이도재의 이런 반응을 오히려 재밌어하는 듯했다.
“야, 무서워서 어디 생기기나 하겠냐? 왜 이현재가 여친 없는지 이제야 알겠네, 알겠어.”
“왜요, 전 그만큼 두 분 사이좋은 거 같아서 보기 좋은데요?”
“맞아. 이런 사이 진짜 드물잖아요. 전 우리 오빠가 나중에 저 데려가는 사람한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큰절 한다고 했다니까요? 데려가 주셔서 감사하다고.”
“에이,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진짜라니까요? 억울하다는 듯한 여자애의 표정에 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다들 얼큰하게 취해 있어 그런지 웃음이 헤펐다. 하지만 수연은 웃을 수 없었다.
‘왜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데?’
심지가 죽지 않은 파르스름한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자리가 파했다. 여기저기 반짝이는 불빛과 사람들 소리에 섞여 다들 얼큰하게 취기 오른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잘들 들어가라!”
그 혼란한 사이에 수연도 있었다. 마지막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털어 넣은 술의 영향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수연아아, 나 먼저 간다아? 조심히, 가?”
혹시 안에 놓고 온 건 없나 손에 들린 핸드폰과 가방을 다시금 확인하는데, 다미가 앞에서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인사를 나눈 수연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다미와 후배들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저, 선배님은 어떻게 가세요?”
누군가 했더니 아까 테이블에 있던 윤성이었다. 내내 조용해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끝까지 남았던 모양이다.
“난 근처라. 걸어가면 돼.”
“아……네. 그런데, 선배님.”
“…….”
뭐지?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며 수연은 무심한 얼굴로 윤성을 응시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윤성의 순진한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 때였다.
“수연아.”
별안간 그들 곁에 다가온 훌쩍 큰 인영에 흠칫한 수연은 옆을 올려다봤다.
“먼저 간 줄 알았네. 가자.”
“……어?”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수연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인 현재가 제 앞에서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윤성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윤성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눈짐작으로 봐도 19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현재와는 눈높이가 차이가 났다.
“윤성이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고. 수연이는 내가 잘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 마.”
“……아, 네. 선배님.”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던 윤성은 결국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돌았다. 수연은 황당한 얼굴로 저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너 되게, 좀 그렇다.”
“응?”
“아까부터 싫다는데 데려다준다 어쩐다……. 술도 너무 많이 마신다니 어쩐다니, 오지랖인 거 알아?”
“……아.”
여과 없이 쏘아붙였는데도 현재는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얘 진짜 뭐지? 울화가 치민 수연이 한 마디 더 하려던 찰나.
“미안해. 그런데 정말 걱정돼서 그런 거야.”
“…….”
“지금도, 시간이 늦었는데 아무리 가까워도 혼자 간다면 당연히 걱정되잖아. 더군다나…….”
뒷말을 맺지 않은 현재가 한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얘는 왜 말을 하다 말아? 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걱정해 준 건 고마운데, 네가 상관 안 해도 돼.”
“이현재! 간다!”
“도재랑 언제 또 같이 마시자!”
제 말에 섞여 현재를 향해 손을 흔들고 가는 남자애들 무리가 보였다. 도재. 그 이름을 들으니 저절로 기분이 땅 끝까지 내려앉았다.
“기분 나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시간도 너무 늦고, 술도 마셨으니까 아무래도 걱정되어서. 정 그러면 내가 조금 뒤에서 걸어갈게.”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말을 무시하듯, 대외적인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시금 말을 걸어오는 단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우리 현재가 아주 혹시라도 그런 애랑 엮이면 진짜 존나, 빡칠 것 같아.’
왜 갑자기 그 말을 하던 이도재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수연은 방금 이현재가 쉬었던 것보다 더 깊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마음대로 하든가.”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입 밖에서 튀어나왔을 때는 놀라 흡, 숨을 들이마셨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제 태도에 환하게 풀어진 남자의 얼굴을 봤을 때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바람이 차네. 춥진 않아?”
“하나도 안 추워.”
“여긴 밤에 혼자 걷긴 좀 무섭겠다.”
“……별로.”
나직한 목소리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수연은 괜히 툭, 툭 발장난을 하며 걸었다.
데려다준다는 말이 듣기 싫어 대충 엎어지면 닿을 코앞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수연이 사는 원룸은 주변의 신축 원룸과 오피스텔가를 벗어나 학교까지 빠른 걸음으로도 20분은 걸리는 곳이었다. 가끔 시간 맞으면 버스를 탈 때도 있는데 걸어가는 때가 더 많긴 했다. 최대한 보증금이 싼 데를 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피곤해.’
알게 모르게 내내 긴장을 했던 모양인지, 지금은 몸도 축축 처지고 무거운 게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었다. 술이 늦게 올라오는지 자꾸 우울한 마음도 들고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가끔 피부를 스치고 가는 적당히 차가운 밤바람만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걷던 수연은 뒤이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잠깐 멈칫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
아무튼 은근히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는 타입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간 혼자 이 골목을 걸었던 적은 없었기에 내심 옆에 있는 남자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좁은 골목길을 낮에 다닐 땐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한밤중인 지금은 유독 어둡고 조용해 괜히 무섬증이 들었다. 솔직히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금 비틀거리며 제 앞으로 다가오는 누가 봐도 술에 잔뜩 취한 남자라던가…….
‘뭐야. 왜 내 쪽으로…….’
홧김에 들이부은 술의 영향으로 수연의 행동은 그녀의 의지보다는 한 발짝 느렸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물리던 수연은 순간 멈칫했다.
“……!”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온 현재가 남자에게서 그녀를 보호했다. 수연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술 취한 남자는 어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파드득 몸을 떼는 수연에게 현재가 머쓱하게 말을 붙였다.
“미안. 근데 이 길 진짜 마음에 안 들기는 한다.”
“…….”
좀 놀라긴 했지만 아주 잠시 커다란 품 안에 싸인 게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수연은 침묵했다. 찰나 마땅히 들어야 할 불쾌함보다 안정감을 느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제가 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긴, 취했으니까 집에 데려다준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절대 이도재 따위의 말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네가 맘에 안 들면 뭐.”
“……뭐, 그렇지.”
대신 삐뚤게 나가는 말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현재도 참 성격 좋은 게 제가 뭔 말을 해도 일단 받아 주고 수긍하기는 했다. 어쩌면 대충 흘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든 찰나 집 앞에 도착했다.
“여기야.”
“아.”
현관 비밀번호조차도 키패드 옆에 대놓고 적혀 있는 낡은 건물 앞에 설 때는 조금 민망했으나,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
“…….”
그러나 담담한 표정으로 건물을 한번 훑어본 현재는 별다른 말 없이 수연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수연은 이제 가 보라는 듯한 눈빛을 마구 쏘며 말을 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너도 조심히 들어가.”
그래도 어쨌든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니까. 조금은 떨떠름한 어조로 말을 잇는 수연 앞에서 현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수연은 미묘한 낯으로 마주했다.
지금까지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그 얼굴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생각되던 순간.
“……!”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단번에 깬 전화벨 소리에 수연은 흠칫했다. 아, 잠깐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은 현재의 표정이 묘했다.
“어. 어…… 잠깐 앞에. 아니.”
곧 가, 어, 형이랑 같이 가려고, 짧게 덧붙이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과보호 이도재의 전화인 모양이었다. 진짜 병이네, 병이야. 수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핸드폰 너머로도 이도재의 목소리가 다 쩌렁쩌렁 들렸다.
“미안. 형이 잠깐 어디냐고 전화 와서.”
“어……. 근데 미안할 건 아니고.”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현재 쪽에서 곧 가겠다고 대답하며 끊은 거였다. 샐쭉하게 대답한 수연은 똑바로 현재를 응시했다. 어쩐지 이도재와 닮은 듯 안 닮은 듯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얘가 이도재가 그렇게 싸고도는 동생이라 이거지.’
짧은 생각의 끝, 잠시 다물렸던 수연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현재.”
“응?”
“번호 좀 알려 줘.”
“어? 나?”
“그럼 너 말고 누가 있어.”
태연하게 덧붙이면서도 수연은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취기와 분노, 억울함 같은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엉뚱한 대상한테 화풀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럴 리도 없지만 내가 가만 안 있지.’
그때만 해도 그렇게 말하던 이도재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 수 있다면, 그냥 그 정도의 억하심정이었던 것 같다. 하필 눈앞에 이현재가 있었고, 이도재는 이현재에게 과할 정도로 집착하고. 너무너무 화가 나고 따지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 하고 돌아섰던 그때의 억울함을 순간적인 치기와 충동으로 잘못 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정도를 넘어 마신 술과 불필요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새까만 밤의 조합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었다.
사실 그 내면에는 설마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제게 과한 친절을 베풀고 있긴 한데 조금 전까지 후배들이 번호를 알려 달라는 말을 칼같이 거절했던 현재니까. 하지만.
“핸드폰 줘 봐.”
“어? 어…….”
호기롭게 물어봐 놓고 수연은 평소답지 않게 버벅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비번을 풀고 핸드폰을 건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연락할게.”
그새 제 핸드폰에 전화까지 건 후, 눈을 슬쩍 접으며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히 홀린 것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