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친구의 결혼식
이 이야기는 밀리안과 클로드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창한 오후, 클로드는 미온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밀리안을 힐끔거렸다. 그는 고사리 같은 손에, 앳된 얼굴로 쓰디쓴 차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셨다.
클로드는 그에게 무언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쉽사리 묻지 못했다. 이 정도 눈치를 주었으면 먼저 운을 떼야 할 텐데 밀리안은 통 입을 열지 않았다. 클로드가 괜한 입술을 축이며 밀리안을 살폈다.
‘표정을 보아하니 공작의 재혼 상대가 나쁘진 않은 듯한데…….’
하긴 레이첼 후작 정도라면 그리 나쁜 재혼 처는 아니었다.
“크흠. 어제는 재미있었나?”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클로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부러 관심이 없는 척 헛기침을 하며 넌지시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미있을 게 있습니까.”
밀리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밀리안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옆구리까지 쿡쿡 찌르면서.
“그래도 엄연히 상견례인데 느낌이란 게 있을 거 아니야.”
밀리안은 가까이 다가온 클로드를 귀찮은 듯이 쳐다보곤 슬쩍 거리를 넓혔다. 클로드는 그런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도 쌀쌀맞은 성격이었으나 공작부인이 죽은 뒤로는 사람을 더 경계하던 밀리안이었다.
그나마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자신에겐 크게 선을 긋지 않았지만, 전보다 더 가시를 세운 건 사실이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마음의 상처가 깊은 듯했다.
클로드는 다시금 바짝 붙어 앉으려다 말고 질문했다. 어제 그의 아버지인 진 에드모어가 에밀리 레이첼과의 재혼 문제로 상견례를 치른 일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레이첼 후작에게 외동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때? 괜찮던가?”
“글쎄요.”
줄곧 대충 대답하던 밀리안이 처음으로 여지를 남기는 대답을 했다. 클로드는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밀리안은 클로드의 질문에 상견례에서 만났던 프레아 레이첼을 떠올렸다. 제 옷에 브로콜리를 뱉은 그 괴상한 여자애를.
그래, 그 여자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근함을 드러내며 멋대로 밀리안의 선 안으로 침범하려 들었다. 셔츠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 브로콜리처럼, 그녀는 자꾸만 제게 흔적을 남기려 했다.
“위생 관념도 없고.”
잠시 뒤,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제 접시 위에 먹던 포크로 체리를 놓던 프레아가 떠올라서였다. 소녀는 헤헤거리며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는 체리를 아낌없이 주고 싶어 했다. 기어이 새 접시에 새 포크로 체리를 올려주는 집요함까지 보였으니까.
“위생 관념?”
클로드는 레이첼의 외동딸에 대해 물어봤는데 위생 관념 얘기부터 나오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밀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돌려서 말했다지만 공격이었는데도 바보같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프레아. 분명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였는데, 그걸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니 공격한 당사자로서는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었다.
프레아는 공작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지 에드모어의 상징인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생글생글 미소 지을 때마다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게 꼭 잘 세공된 보석 같았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외모를 제법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윳빛 피부는 기분이 좋은지 홍조를 띠고 있었고, 결 좋은 머리카락은 소녀의 눈과 아주 잘 어울리는 연보라색이었다.
하지만 그뿐. 더는 친해지고 싶지도,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은 소녀였다. 밀리안은 제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깨닫곤 얼른 거두었다. 그사이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래서 괜찮다는 거야, 안 괜찮다는 거야?”
“예쁩니다. ……아, 지난번에 말씀하신 독서 토론회 말인데요.”
밀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자기가 무의식중에 프레아를 ‘예쁘다’ 말해 버린 것도 모른 채. 클로드는 괜찮냐 물으니 예쁘다 답한 밀리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쁘다고? 미인이라고 소문난 배우를 보고도 심드렁하게 반응했으면서?’
위생 관념은 없고 멍청하지만 예쁜 누이라니?
굉장히 이상한 조합이었다. 특히 후자는 밀리안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자기가 잘난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인지 남이 듣기 좋은 소릴 안 하던 친우가 누군가를 칭찬하다니.
클로드는 레이첼 소후작이 정말로 엄청난 미인인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화제를 돌렸다 해서 휘둘릴 클로드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금 상견례를 화제로 끌었다.
“그것보다 네 마음은 괜찮은 거냐? 아직 맘도 추스르지 못…….”
“안 괜찮으면 또 어떻게 한답니까. 공작께서 제 마음까지 신경 쓸 리도 만무한데.”
밀리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 전 부드럽게 미소 짓던 표정이 거짓인 것처럼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더는 그 주제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클로드는 싸해진 분위기에 입맛을 다셨다. 누이가 예쁘다는 칭찬을 하길래 잘 지낼 수 있는 건가 싶었는데, 여전히 아버지의 재혼이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특히 그는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한들 그것이 쉽사리 잊힐 리 없었다. 클로드는 그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혹시 모르지, 새로 생긴 누이와 네가 정말 잘 맞는 남매가 될지.”
“글쎄요.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그래.”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밀리안이 저렇게 딱 잘라 말할 때는 늘 한구석에 마음을 숨겨놓기 때문이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새로운 누이가 그를 여러모로 자극한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밀리안이 이렇게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테니까. 클로드는 요 며칠 우울해했던 친우가 이 기회에 좋아지길 바랐다.
* * *
세간에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의 재혼 소식이 알려졌다. 상견례를 마친 뒤 공식적으로 재혼 소식을 사교계에 밝힌 탓이었다. 세간은 떠들썩했다. 귀족들의 관심이 두 가문으로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올 줄은 몰랐는데…….’
클로드는 독서 토론회에 참석한 인원을 보며 새삼 에드모어와 레이첼의 영향력을 깨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따라 독서 토론회 인원이 눈에 띄게 많았다.
아마도 밀리안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듣고 싶어서 온 영식들 같았다. 물론 개중엔 밀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토를 달기 위해 온 이도 있었다.
클로드는 시골 가문의 귀족인 척 변장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착석하여 영식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들은 밀리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인지 마음 편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코헨가의 머제리가 말했다.
“뒤가 구리다니까. 에드모어 가문과 레이첼 가문의 재혼이라니. 딱 답이 나오지 않아?”
“하긴. 레이첼 후작이 결혼도 하지 않고 딸을 낳았으니까. 역시 그런 거겠지?”
“그런 거겠지가 아니라 그런 거지!”
머제리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내용을 보아하니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이 이전부터 불륜 관계였다는 루머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머제리는 그걸 기정사실화로 받아들이고 떠벌렸다.
‘의도적인 뒷담화인가.’
클로드가 책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화는 교묘하게 여론을 모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게다가 머제리라면 코헨가의 망나니라고 불리는 놈이다.
어릴 적부터 마법적 재능을 인정받아 마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특권을 누리며 살아와서인지 그는 말투며 행동이 오만방자했다.
‘남을 무시하길 좋아하고, 여기저기 싸움을 몰고 다니기로 유명했었지.’
그의 유명세는 ‘코헨의 망나니’라는 별명과 늘 함께였다. 가관인 것은 본인은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욕이라는 걸 알고서도 말이다.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때 머제리 옆에 있던 귀족 영식 한 명이 슬쩍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근데 레이첼 소후작은 연보라색 머리에 벽안에 가까운 보라색 눈동자라고 하지 않았어? 에드모어 공작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레이첼 후작의 딸이니 그녀를 닮은 거겠지.”
“하지만 레이첼 후작은 진한 보라색 머리카락이라고 들었는데……. 후작을 닮은 거라면 머리 색이 그렇게 나올 수 없지 않아? 그렇다고 에드모어를 닮았다고도 할 수 없고 말이야.”
“……뭐야. 지금 그 자식 편드는 거야?”
머제리는 그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톡 쏘아붙였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건만, 자기 말에 반기를 든 사실에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였다.
지적받은 귀족은 입술을 앙다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클로드는 말을 얹을까 말까 고민했다. 밀리안이 와서 이 얘기를 듣기 전에 저들을 말려야 할 것만 같았다.
결국 클로드는 친히 나서주기로 했다. 저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밀리안이 듣는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건 모두…….”
“독서 토론회가 아니라 루머 토론회였나 보군.”
‘이런. 늦어버렸군.’
클로드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밀리안이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대화에 끼어든 탓이었다. 밀리안은 형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뜻 보면 유쾌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무척 불쾌해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밀리안의 등장에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껴서였다.
하지만 머제리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는 찔리는 게 없다는 듯이 뻔뻔한 낯으로 밀리안을 응시하더니 반기기까지 했다.
“마침 주인공이 오셨군.”
그의 환대에 밀리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없는 동안 즐거우셨나. 머제리 영식.”
밀리안이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자 머제리는 실실 쪼개며 그를 자극했다.
“그럼. 네 덕에 아주 즐거웠다마다. 마침 에드모어 공작님과 네 어머니가 되실 레이첼 후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래?”
“넌 좋겠다? 레이첼이라는 날개까지 달게 되어 에드모어 공작의 기세가 더 높아질 테니까.”
“미안하지만 에드모어는 레이첼의 도움을 받기 이전에도 높았어.”
밀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하자 머제리가 욱해서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재수 없긴. 흠, 근데 네 누이 소문이 별로인 건 알아?”
머제리의 도발에 밀리안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가 다시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전보다도 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머제리의 말을 독려했다.
“더 말해봐.”
클로드는 밀리안의 미소가 제법 살벌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며 쩔쩔맸다. 이걸 말려야 할지, 아니, 말릴 수는 있는 건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안타깝게도 머제리는 멈출 줄 모르는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밀리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는지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듣기엔 네 누이, 자기 무리 사람 아니면 말도 안 건다더라. 그 여자애랑 대화하려면 라즐리 후작의 딸을 통해야 할 정도라던데?”
“…….”
“그것뿐이야? 모임의 장도 일부러 라즐리 후작의 딸을 내세워서 부려먹는다고 소문이 자자해.”
“글쎄. 내가 본 그 아이는 처음 본 사람한테도 무척 서글서글하던데.”
“그건 네가 에드모어니까 그런 거겠지. 뻔한 거 아니겠어? 밑에 애들하고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흐음.”
“거기다 그 정도 가문이 수도 밖에 머무는 걸 보면 튀고 싶어서 그러는 게 분명해.”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소문의 요지가 뭐지?”
밀리안은 그가 하는 말을 구구절절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딱 잘라 질문했다. 그러자 머제리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네 잘난 누이 나 좀 소개시켜 줘라. 내가 그런 되바라진 애들 다루는 데는 꽤 자신이 있거든.”
“머제리…… 그만해.”
곁에서 듣고 있던 한 영식이 그를 말렸다. 그의 말이 정도를 넘어선 탓이었다. 하지만 말리려면 진즉 말렸어야 했다. 클로드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사이 밀리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문에 기댔던 몸을 떼고 천천히 머제리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이미 지워진 뒤였다.
“헉!”
그때 몇몇 귀족이 몸을 덜덜 떨었다. 홀의 공기가 따끔해졌다. 머제리는 갑자기 드는 오한에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뭐야?”
머제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느새 밀리안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 붉은 오러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오러 때문에 공기가 변한 모양이다. 클로드는 다른 귀족들처럼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지켜보았다. 그 역시 두 눈으로 밀리안의 오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더니. 열이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귀족들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가 오러를 발현했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그것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드러냈기 때문이다.
거기다 웬만한 일에는 상종도 하지 않았던 밀리안이다. 한데, 처음으로 머제리의 도발에 반응한 것이다. 자연스레 주변에는 긴장감이 일었다. 클로드는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해 머제리 앞에 선 그를 막아서려 했다.
“밀리안, 진정해.”
하지만 클로드가 채 그와 머제리 사이를 막기도 전, 사태는 커지고 말았다. 밀리안이 손쓸 틈도 없이 머제리를 번쩍 들어 창 너머 분수로 던져버렸다.
쨍그랑! 풍덩.
“헉!”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영식들이 숨을 들이켰다.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난 채 흐트러졌고, 머제리는 물속에 잠겼다.
“밀리안! 안 돼!”
클로드가 크게 외쳤으나 밀리안은 듣지도 않고 도약하여 분수로 뛰어갔다. 그의 움직임은 무척 날쌔고 가벼워서 클로드가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클로드는 그가 전력으로 분수로 향하는 것을 보고 우뚝 멈추었다. 이미 자신이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밀리안은 분수에서 나오려는 머제리의 어깨를 발로 꾹 누르며 서늘히 말했다. 머제리는 여기저기 유리 파편에 찔려 생채기가 난 채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때? 말을 많이 해 목이 마를까 봐 물에 던져줬는데.”
“너…… 어푸! 너 이 자식!”
머제리가 허우적거리며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럴수록 밀리안은 발에 힘을 더욱 주었다. 머제리는 분수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어푸! ……컥!”
머제리가 물을 많이 마셨는지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잠시 뒤, 머제리가 다짜고짜 밀리안에게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결투 절차 없이 타인에게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 시 되는 일이었건만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밀리안이 오러로 선제공격을 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처한 모양이었다.
그의 공격 마법은 제법 그럴듯했다. 어린 나이에 구사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정교함. 마탑의 천재라는 말이 괜한 헛소문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천재라 불리는 밀리안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한 공격 마법이라 한들 밀리안에겐 간지러움과 같은 수준이었다. 머제리는 밀리안이 그 못지않게 막무가내라는 걸 간과했다.
게다가 밀리안은 머제리보다 영리했다. 그는 영악하게 상황을 제게 유리하게 만들어 사람을 열받게 하는 걸 특히 잘했다. 클로드 역시 초반에 그를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했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봐도 밀리안이 어떻게 행동할지 감이 왔다. 그리고 클로드의 감은 적중했다.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머제리가 쏜 회심의 공격 마법을 가뿐히 피했다. 아니, 일부러 팔이 스치도록 했다. 먼저 피를 보는 것이 싸움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밀리안에게 쌍방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게 만들어준 셈이군.’
게다가 이 싸움에서 먼저 규칙을 어긴 것은 머제리였다. 클로드는 보았다. 밀리안이 머제리를 던지기 직전 오러를 감춘 것을. 밀리안은 오러를 사용해서 머제리를 던진 게 아니었다.
오러는 그저 위협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단순한 힘으로 그를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머제리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밀리안의 재킷이 머제리의 공격에 살짝 찢기며 피가 튀었다. 그러자 머제리가 우쭐한 얼굴로 턱을 들었다. 봤지? 봤지? 하는 표정이 선연했다.
‘쯧쯧. 밀리안에게 덜미를 잡혔군.’
클로드가 안타까운 얼굴로 머제리를 응시하는 사이 그가 밀리안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었다면 당연 머제리가 우승이었다.
“너 이 새끼! 안 그래도 내가 손봐주려 했다고!”
“머저리 같긴.”
“뭐? 머저리? 이 새끼가 근데…… 악!”
머제리가 제 어깨를 짓누르는 밀리안의 발을 붙들어 마법을 사용하려다 비명을 내질렀다. 밀리안이 한발 앞서 오러로 머제리를 꽁꽁 묶은 탓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비겁한 자식아! 치사하게!”
머제리가 몸을 비틀며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치사와 비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머제리 역시 치사하게 공격 마법을 사용한 뒤였다. 밀리안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치사하다니. 네가 먼저 공격 마법을 사용했잖아. 난 그저 네게 대응한 것뿐이야.”
“무슨 개소리야! 네가 오러로 공격한 게 먼저잖아!”
“내가? 난 그냥 오러 색깔 구경하라고 잠시 보여준 것뿐이야. 널 던진 건 순전히 내 힘인걸?”
밀리안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머제리는 그런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무, 뭐?!”
“그러고 보니 젖은 상태로 있으면 춥겠다. 내가 털어줄게.”
그 말과 함께 밀리안이 머제리를 하늘 높이 올렸다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물을 털어준다기보다는 겁을 주는 쪽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머제리가 흔들리는 곳마다 물이 튀었다. 창백해지는 머제리와 달리 밀리안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너어……!”
머제리가 어지러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갈았다. 씩씩거리면서 마법으로 오러를 풀려 했지만 아직은 그 정도 실력까지 안 되는 모양이다.
“네가 먼저 때렸으니까, 이제부턴 정당방위야.”
밀리안의 눈빛에서 미소가 가셨고, 곧 그는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지금까지는 봐주었다는 듯이.
“자, 잠까아아안!!!”
머제리가 절규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밀리안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밀리안은 곧장 머제리를 감싼 오러를 터뜨렸다.
펑! 소리와 함께 분수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 위로 머제리도 함께 하늘을 번쩍 날아올랐다. 토론회에 참석한 영식들은 말리지도 못한 채 머제리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밀리안은 평온한 얼굴로 머제리를 굴렸다.
‘저거 완전히 이성을 놓았네, 놓았어.’
클로드가 마른세수하며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최근 머제리랑 자주 부딪친다 했는데 기어이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평소였다면 그저 무시했을 그가 이렇게 과민 반응한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지만, 그간 쌓인 것이 터졌다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았다.
물론 그것이 지금의 싸움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실력 차이가 심한 둘의 싸움은 밀리안의 일방적인 몰매질과 같았다. 그리고 그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클로드는 어쩔 수 없이 에드모어 공작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드님 좀 말려보라고.
에드모어 공작의 등장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밀리안은 아버지의 등장에 순순히 싸움을 멈추었다. 잠시 뒤, 연락을 받은 코헨 후작까지 독서 토론회 홀에 나타났다.
코헨 후작은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는 아들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영식들은 얼이 빠진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눈앞에서 밀리안의 막강한 힘을 보고 다들 주눅이 들어 겁에 질린 것이다.
에드모어 공작과 함께 온 의원이 머제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사이 코헨 후작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에드모어 공작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사람을 이렇게 패다니! 공작가의 영식이면 이렇게 무고한 아이를 마음껏 패도 된답니까!”
“일단 진정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봅세.”
에드모어 공작은 그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에드모어의 혈통은 강한 힘을 가지는 대신 통제하기 어려워 유년 시절부터 힘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도록 교육받는다.
거기다 밀리안은 모종의 사건으로 힘을 두려워해 병적으로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사람을 때렸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일 터.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아 우선 상황을 들어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공작이었다. 하지만 이런 뜻을 알지 못하는 코헨 후작은 그의 미온한 반응에 격분했다.
“들어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렇게 현장이 있는데! 보십시오! 제 아들이 눈도 못 뜨고 있습니다!”
코헨 후작이 들것에 실려 가는 아들을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들이 엉망이 되었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드모어 공작은 난감한 얼굴로 우선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밀리안이 기어이 코헨 후작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코헨 후작에게 선언했다. 표정은 사람 하나 죽일 뻔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누가 보면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전에 귀족 모욕죄로 제가 고소하죠.”
밀리안이 고소를 운운하자 어이가 없어진 코헨 후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라고?”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제 새어머니와 누이를 욕보였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밀리안.”
에드모어 공작이 얼굴을 굳힌 채 밀리안의 발언을 재차 확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입니다. 그가 누이에 관한 더러운 소문을 운운하며 자신이 길들여 보겠다고 그녀를 욕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투 절차도 없이 오러로 사람을 패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코헨 후작이 노발대발하며 반박하자 밀리안이 찢긴 팔뚝을 내밀며 설명했다.
“저도 참으려 했는데 머제리가 먼저 공격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후작께서도 아시겠지만 에드모어는 피에 민감합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힘을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거짓말.’
클로드가 뻔뻔하게 변명하는 밀리안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일부러 맞았다는 것도, 고작 저 정도 피를 보고 이성을 잃었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인 탓이다.
그는 저 정도 상처로 이성을 잃을 만큼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무수히 훈련했다는 걸 클로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헨 후작은 이를 알지 못했다. 코헨 후작의 눈이 눈에 띄게 흔들리며 이리저리 방황했다. 하지만 끝까지 아들을 감싸기로 한 모양인지 다시금 버럭 화를 냈다.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망나니라 소문난 녀석이라고 해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습니다!”
“저, 저희도 보았습니다.”
“…….”
그때 곁에 있던 영식들이 밀리안의 말에 긍정했다. 머제리가 당한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될까 봐 밀리안을 감싸는 듯했다. 일단 뒷담화를 한 건 그들도 머제리와 같기 때문이었다.
코헨 후작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치다 말고 그들의 옹호에 말을 멈추었다. 더는 소리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헨 후작이 속으로 끙, 신음을 내뱉었다.
아들이 저렇게 곤죽이 된 적은 처음이라 상황 파악도 없이 흥분했으나 돌아가는 사태를 보니 불리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공작가였다. 그때 잠자코 밀리안의 설명을 듣던 에드모어 공작이 굳은 낯으로 코헨 후작을 응시했다.
“우리 애가 조금 지나친 감은 있었으나 그건 댁의 아들이 먼저 도발해서지 않나.”
“……아무리 도발했다고 해도 애를 그렇게 패면…….”
“우리 애도 다쳤네.”
에드모어 공작이 밀리안의 팔을 내밀며 반박했다. 물론 밀리안의 팔은 이미 말끔히 회복된 상태였다. 코헨 후작이 허탈하게 웃으며 무어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괜히 법적으로 공방을 벌였다가 피 보는 것은 코헨 후작 쪽일 게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이 일은 에드모어 가문과 조용히 해결하는 편이 나았다.
괜히 레이첼 후작의 귀에 들어갔다간 딸을 모독했다며 그녀가 코헨 가문의 비리를 탈탈 털지도 몰랐다. 레이첼 후작은 모르는 정보가 없을 정도로 발이 넓으니까. 결국 코헨 후작은 한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사내아이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요. 제가 흥분해서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네. 아들이 저리 다쳤는데 눈이 뒤집힐 만하지. 내 아들도 고소는 그저 해본 소리일 거네. 그렇지, 밀리안?”
“아니요, 아버지.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밀리안.”
“허허허. 되었습니다. 아직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니 잘 달래서 데리고 가십시오.”
코헨 후작이 사람 좋은 얼굴로 에드모어 공작에게 말했다. 에드모어 공작은 가볍게 인사하곤 밀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밀리안은 끝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였다. 머제리가 밀리안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게 된 건. 그 후 머제리는 독서 토론회에 나오지 않았다. 겉으로는 바쁘다는 핑계였지만 뻔했다. 밀리안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다.
* * *
“과했어. 도대체 왜 그렇게 팬 거야? 적당히라는 걸 알아야지.”
클로드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투덜거렸다. 그날 이후 밀리안은 외출 금지를 당했고, 최근에야 풀렸다. 그사이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의 결혼식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내일이면 두 가문이 가족이 된다. 클로드의 타박에도 밀리안은 무척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날의 일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새어머니와 누이를 욕보였으니까라고 설명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평소보다 과하게 흥분했잖아. 네가 웃으면서 힘자랑할 때마다 소름 돋는다고.”
클로드가 제 팔을 감싸며 오들오들 떠는 척을 했다. 그러자 밀리안이 아랫입술을 꾹 다물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잠시 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자식이 감히 분수도 모르고 소개시켜 달라 운운했지 않습니까.”
“뭐? 누굴?”
클로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묻자 밀리안이 눈을 흘겼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그날의 분이 삭지 않은 눈치였다. 클로드는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그러다 머제리가 누이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던 대목을 떠올리곤 입을 벌렸다.
“하긴 소개시켜 달란 의도가 너무 불순했지. 사람이 동물도 아니고 조련하려 들었으니.”
“그것도 그거고. 그런 자식에게 프레아를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자식한텐 소개해 주고 싶은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밀리안이 클로드의 발언에 불쾌하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아무한테나 누이를 소개해 주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하긴 저라도 머제리 같은 놈한테는 누이를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도통 관심 없는 밀리안이 유독 누이의 일에는 열을 올리는 부분이었다. 클로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너 의외로 누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클로드의 물음에 밀리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반문했다.
“누가 그럽니까? 제가 프레아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그럼 아니야?”
“아닙니다!”
밀리안이 강하게 부정했다. 클로드는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는 밀리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함을 지른 탓이다.
잠시 후, 클로드는 한껏 안타깝다는 어조로 보지도 못한 프레아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밀리안이 여전히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듯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다.
물론 그 나이대 소년이 친구를 설득하려 해봤자 말도 안 되는 근거만 나열할 뿐이었다.
“누이가 들으면 섭섭하겠네. 아무리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싫어도 너도 이젠 좀 인정해라. 예쁘다며. 예쁜 누이 생겼다고 생각해 그냥.”
“그게 문제입니다.”
의외로 클로드의 근거에 밀리안이 반응했다.
“응? 무슨 문제?”
클로드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밀리안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예쁘니까 잘 지내기 싫습니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클로드는 밀리안의 과민 반응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쌀쌀맞기가 겨울처럼 매서웠다.
그냥 싫으면 싫다 할 것이지 예뻐서 싫다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클로드는 기어이 방을 나서려는 그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
“산책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밀리안은 나가 버렸고,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클로드는 그동안 밀리안의 발언을 곱씹었으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클로드가 이해하기에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변덕을 부리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물론 제 마음을 모르는 것은 밀리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 * *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의 결혼식 당일. 클로드는 빼꼼 고개를 내밀고 누군가를 찾았다. 바로 이번에 에드모어 가문과 한 식구가 된 레이첼 후작의 딸이었다.
생김새는 미리 알아두었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아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간혹 있었으나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면 다른 이였다.
‘왜 나는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거야.’
클로드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차마 밀리안에게 대놓고 소개해 달라고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소개시켜 달라던 머제리를 쥐 잡듯이 팬 걸 목격한 탓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물론 머제리와 자신은 입장이 다르니 밀리안이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클로드는 그때 본 친구의 낯선 모습에 약간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엔 그저 알아서 소개해 주겠거니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밀리안은 유독 누이에 대해 말을 아꼈다.
보통 친한 친구에겐 가족을 소개해 줄 법도 한데 밀리안은 전혀 그런 내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드가 이대로 포기할 리는 없었다.
‘밀리안이 소개해 주지 않으니 내가 친히 찾아볼 수밖에.’
클로드는 그리 생각하며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따로 그녀를 불러내면 그만이었지만, 권력을 이용해 치사하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래저래 조심스럽던 와중에 결혼식이라는 좋은 구실을 찾아 그녀와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져볼 요량이었다.
클로드는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 사력을 다해 밀리안의 누이가 된 소녀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살피던 때였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으악!”
클로드는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밀리안이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붙잡으라는 뜻이었다.
물론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오히려 얼굴에는 고작 그런 일로 놀라냐고 쓰여 있는 듯했다. 클로드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투덜댔다.
“깜짝 놀랐잖아.”
“그러게 왜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숨어 계십니까?”
밀리안의 부축으로 벌떡 일어난 클로드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눈을 흘겼다.
‘하여간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클로드는 밀리안이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척 놀랄 것 같았다. 클로드는 밀리안이 혹시라도 알까 봐 방금까지 프레아를 찾아다닌 것을 얼른 감추었다. 그리고 긴장된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다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가지고……. 그나저나 즐거워 보인다? 무슨 재미난 일 있었어?”
“아닌데요.”
클로드의 물음에 밀리안이 정색하며 반박했다. 마치 자기는 절대 즐겁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듯했다. 클로드는 긴가민가해져서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곤 화제를 돌렸다. 그저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었다.
“곧 식이 시작인데 왜 여깄어? 누이는 어쩌고?”
클로드가 누이라는 말을 하자 그가 화들짝 어깨를 들썩이더니 괜히 뒷머리를 매만졌다. 잠시 뒤 밀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 누굴 좀 피해보려다…….”
“누구를?”
“그런 게 있습니다.”
밀리안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클로드는 그런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하곤 질문했다.
“근데 너 옷 상태가 왜 그러냐? 넘어진 나보다 더 많이 구겨졌는데?”
“아…….”
밀리안이 구겨진 재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각양각색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같다가 이내 창피해하는 것도 같고, 부끄러워하는 듯했다가 또 성이 난 것 같은 이상한 반응이었다.
그와 친하게 지낸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평소보다도 밀리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가 그의 옷에 흰 가루 같은 것이 묻은 걸 발견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넘어졌나 본데? ……어라? 이거 분 아니야? 너어…… 설마……?”
클로드가 밀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흰색의 얼룩이 여자들이 화장할 때 쓰는 분이라고 확신해 나온 웃음이었다.
‘왜 나와 있나 했더니 또래 영애랑 소꿉놀이라도 한 모양인데?’
밀리안은 분이라는 말에 옷을 재빨리 털어냈다. 그러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양 클로드를 째려보며 쌀쌀맞게 말을 내뱉었다.
“괜히 돌아다니지 마시고, 귀빈석에 가십시오. 전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밀리안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누가 뒤따라가는 것도 아닌데 성급히 자리를 뜨는 모양새가 조금 의아해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운 티도 내고. 정말 여자라도 생긴 거야?”
“전하.”
그때였다. 은신한 채 클로드를 호위하던 기사 한 명이 말을 걸었다. 그가 가볍게 묵례하곤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궁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에고. 오늘은 그 누이 볼 날이 아닌가 보네.”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폐하께서 부르시면 가야지.”
클로드는 아쉬운 얼굴로 연신 결혼식장을 돌아보다 기사와 함께 황성으로 돌아갔다.
하여, 클로드는 몰랐다. 이 날이 프레아를 만날 수 있던 절호의 기회라는 걸. 이 뒤로도 오랜 세월 그녀의 뒤꽁무니 하나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걸.
그 이유가 밀리안이 막은 탓이며, 그가 쑥스러워한 대상이 바로 그 누이였다는 걸 말이다.
* * *
“요즘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놨어?”
클로드가 서둘러 짐을 챙기는 밀리안에게 뚱하게 물었다. 언제부터인가 밀리안이 성에 돌아가는 시간이 빨라졌다. 특히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시간 전엔 꼭 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전에는 같이 저녁도 먹었는데 요즘은 통 그래 본 적이 없었다. 늘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저러면 섭섭한 법이다. 역시나 클로드의 얼굴에는 ‘나 서운하다’가 드러나 있었다.
밀리안은 그를 한번 힐끔거리더니 재킷의 단추를 여미며 말했다. 은근슬쩍 시계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자꾸 기다려서요. 늦으면 걱정합니다.”
“기다리다니? 아아, 네 누이?”
클로드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대꾸하자 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들어가면 올 때까지 잠을 안 잔대서…….”
“내 누이와는 딴판이군. 내 누이는 내가 자든, 먹든, 싸든, 죽든, 관심이 없어.”
클로드는 비비안 황녀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밀리안이 말하는 누구 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러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황녀님이랑 또 싸우셨습니까?”
“몰라. 아니, 장난감 좀 가지고 논 거 가지고 악을 쓰잖아.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그거야, 황녀님은 자기 물건에 손대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까.”
“내가 뭐 그러려고 그랬나. 같이 좀 놀고 싶어서 그랬지!”
“어쨌든, 저는 가보겠습니다.”
밀리안이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인사했다. 그러곤 평소보다 걸음을 빨리했다. 클로드는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어 그를 졸졸 뒤따라가며 말했다.
“다음엔 내가 너희 성으로 갈까? 마침 네 누이도 볼 겸.”
“안 됩니다.”
순간 밀리안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클로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아니, 왜? 전에는 네 성에서도 보고 그랬잖아.”
“집에 험상궂은 요정이 살아서 안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밀리안이 다시 걸음을 뗐다. 클로드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동안 그걸 안 잡고 뭐 했어? 아니, 잠깐만. 요정이 험상궂어 봤자 뭐 얼마나 무섭다고 이래?”
“잡기엔 너무 강력해서 전하가 다칠까 염려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너 나 집에 초대하기 싫어서 일부러 핑계 대는 거지? 우리 사이에 이럴 거야?”
클로드가 추궁할수록 밀리안의 걸음은 빨라졌다. 잠시 후 밀리안은 마차 앞에 당도했다. 그때까지도 클로드는 집요하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의 성에 놀러 가고, 겸사겸사 누이도 볼 계획을 세운 탓이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대뜸 뒤를 돌며 칼같이 거절했다.
“아무튼, 안 됩니다.”
그러곤 홀랑 마차를 타더니 손으로 휘휘 인사했다. 그것마저도 건성으로 보여서 클로드는 얄궂은 밀리안의 손을 찰싹 때렸다.
“잘 가라!”
싫으면 싫다고 해, 이 자식아!
클로드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응시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요정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성에 들이지 않으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새로 생긴 누이가 밀리안을 단단히 길들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재깍재깍 집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솔직히 집에 가도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클로드가 씩씩거리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밀리안의 행동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안 하던 짓도 많이 늘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연스레 일전에 사교 모임에서 체리를 대접한 영식에게 밀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이 이렇게 큰 건 처음 보는데.’
밀리안이 체리를 눈앞으로 바싹 끌어 살펴보며 여상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체리를 가져온 영식이 반응했다.
‘아,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체린데, 맛이 좋더라고. 왜? 성으로 좀 보내줄까?’
‘에이, 밀리안이 그런 걸 달라고 할 사람…….’
‘그래, 줘. 잘 먹을게.’
‘응?’
당시 클로드는 당연히 밀리안이 거절할 줄 알고 입을 떼다 멈칫했다. 영식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곁에 있던 집사에게 성으로 체리 상자를 하나 보내라고 일렀다.
평소였다면 ‘내가 그 정도로 궁해 보여?’ 하며 톡 쏘아붙이는 게 정상인데…….
역시 어느 순간부터 밀리안이 달라지고 있었다. 클로드는 본능적으로 새로 생긴 누이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은 얼마 뒤 현실이 되었다.
오랜만에 사교 모임 영식들과 사냥을 하러 간 날이었다. 클로드는 밀리안과 사냥터로 향하다 노점상이 파는 체리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확인할 겸 큰 소리로 외쳤다.
“오! 체리다!”
“아, 뭐야. 깜짝 놀랐잖아.”
곁에 있던 영식들이 화들짝 놀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 사이에서 밀리안은 체리라는 말에 움찔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무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 체리를 파는 노점상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클로드는 속으로 쿡쿡거리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다. 클로드가 추측한 밀리안의 이상 행동의 공통점은 체리였다. 밀리안이 반응하는 건 그 동글동글하고 맛 좋은 과일밖에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리안은 노점상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체리를 한 봉지 사 들곤 시종에게 건넸다. 클로드는 슬그머니 숨어 그가 시종에게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네가 샀다고 해.”
“아가씨는 도련님이 사 오신 걸 더 좋아하실 텐데요?”
“그래, 너무 좋아해서 문제야. 매번 그렇게 좋아하면 귀찮잖아.”
“허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도련님이 아가씨를 이렇게 챙긴다는 걸 아시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됐어. 안 뭉개지게 잘 들고나 있어.”
밀리안이 퉁명스럽게 명령하곤 성큼성큼 걸어갔다. 새침하게 대꾸했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걸 보니 무척 흡족한 기색이었다.
클로드는 밀리안을 따라가지 않고 곧장 시종에게 향했다. 시종은 클로드가 밀리안과 자주 다니는 영식이라는 것을 알고는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가 체리를 좋아해?”
클로드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화 정황상 그 체리를 받게 될 주인이 그 집 아가씨, 프레아라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시종은 클로드의 질문을 듣곤 입이 귀에 걸린 채 대답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래?”
“예. 오죽하면 옷도 빨간색을 주로 입으시겠어요. 체리를 정말 좋아하시죠. 참 귀여우신 분입니다.”
시종은 굳이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술술 말하며 ‘프레아 아가씨’를 칭찬했다. 클로드는 그것을 잠자코 듣다가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밀리안이 체리를 사는 이유가 바로 그 아가씨 때문이라는 거네?”
“그렇죠. 말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매번 체리가 보일 때마다 사시니 역시 아가씨랑 잘 지내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클로드가 손으로 턱을 쓸며 웅얼거렸다. 그러곤 곧장 밀리안에게 탁탁탁 달려갔다. 좀 더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클로드는 다짜고짜 밀리안에게 선언했다.
“오늘 너희 성에 갈 거야.”
“안 됩니다.”
“그럼 다음에 네 누이도 모임에 초대할래.”
우뚝.
초대한다는 말에 밀리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매번 안 된다고만 하잖아. 그렇게 누이를 감싸기만 하면 다들 시스콤이라고 생각할걸?”
“시, 시스콤이라니……! 제가 미쳤습니까? 그런 덤벙대는 여자애를 신경 쓰게?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꾸 사고를 쳐서 챙기는 것뿐입니다!”
밀리안이 격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시스콤이 아니라고 재차 부정했다. 싫으면 싫은 거지. 지나치게 논리 정연히 변명을 하니 더욱 거짓말 같았다. 클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박했다.
“아니긴. 매번 체리를 사는 것도 다 네 누이를 위한 거라며. 저기 있는 시종한테 다 들었다고.”
클로드가 시종을 손가락질하자 밀리안이 도끼눈을 뜨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시종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클로드는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밀리안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누이를 위해 매일 체리를 사다 바치고, 누이가 잠 못 잔대서 일찍 들어가는 게 시스콤이지, 뭐야? 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
“…….”
“아아, 그래. 이번에는 누이가 사고 칠까 봐 일부러 체리로 미리 뇌물이라도 먹이는 거라고 변명해 보시지.”
“그건 그냥……!”
“그냥 뭐? 보여서 샀다, 오다 주웠다, 돈이 남아돌아서 샀다, 뭐 그런 변명을 할 생각은 아니지?”
클로드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반박하자 밀리안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싸움에서 밀리안이 말문이 막힌 건 처음이었다.
움찔하는 밀리안을 보며 클로드는 멈칫했지만, 그간 쌓인 서운함과 제 추리가 맞다는 걸 입증하고 싶어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뒤, 밀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웃으니까.”
“응? 크게 말해.”
“웃는 게 보기 좋아서 산 것뿐. ……어쨌든 시스콤은 절대 아닙니다!”
밀리안이 빽 소리를 지르곤 빠르게 뛰어갔다. 아직 어려서인지 감정 조절이 서툰 모습이었다.
“도, 도련님!”
시종은 밀리안을 부르며 뒤따라갔다. 클로드는 밀리안을 따라갈 생각도 않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린 클로드가 밀리안의 미묘한 변화의 의미를 알아챌 리 만무했다. 그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밀리안의 발언 때문이었다.
천하의 밀리안 에드모어가 고작 누이가 웃는 거 하나 보고 싶어서 체리를 사다 바친다고?
클로드는 그의 변화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누이에게 그래 본 적이 없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뒤 그가 제 누이, 비비안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뭐야, 누이랑 사이좋잖아……. 부러워, 씨.”
그리고 그날, 클로드는 큰맘 먹고 누이가 즐겨 먹는 케이크를 사 들고 그녀를 찾아갔다. 밀리안과 프레아만큼의 유대는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고맙다는 말은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클로드와 비비안은 전혀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져온 케이크를 냅다 그의 얼굴에 던지며 소리쳤다.
“넌 학습 능력이란 것도 없냐? 내가 노크하랬지!”
역시 안 하던 짓은 하면 안 된다. 괜히 한 대 얻어맞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으니. 클로드는 그날 이후 제 누이에게 뭔갈 사 들고 가는 법이 없었다.
* * *
밀리안의 이상 행동은 나날이 더해갔다. 그러다 가족 소풍을 떠났다 돌아온 뒤론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특히 자주 멍해 있거나 혼자 무어라 중얼거릴 때가 많았다.
이전에는 늘 제 감정에 당황한 듯했는데 지금은 유난히 차분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 단단히 확신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자신감까지는 가지 못했는지 유독 정신을 못 차릴 때가 많았다.
클로드는 그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휘휘 흔들었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자 넌지시 물었다.
“무슨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밀리안이 뒤늦게 그를 발견하곤 느릿하게 도리질하며 대꾸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클로드는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고는 슬슬 꼬여냈다.
“혹시 소풍 가서 무슨 일 있었어?”
“예?”
“아니, 그때부터 계속 멍한 거 같아서.”
“아…….”
밀리안은 고장 난 장난감 인형처럼 ‘아, 어, 음’ 같은 감탄사만 내뱉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귀가 살짝 붉어졌지만, 클로드는 햇빛에 비쳐 그리된 거라 여겼다.
잠시 후, 밀리안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 주저하며 말하는 걸 보니 꽤 심각한 고민인 듯했다.
“전하는 머리가 하라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흐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보통 마음이 항상 이기지 않나? 나는 배고프면 머리가 아예 안 돌아가던데.”
그가 마침 앞에 있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밀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한심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질문했다.
“왜? 요즘 고민 있어?”
“저도 전하처럼 단순했으면 좋겠습니다.”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클로드는 뭔 소리냐는 듯이 뚱하게 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단순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복잡한 거야.”
“그렇습니까?”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머리와 몸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면 결국 몸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될걸? 내 경험상 그래.”
“그게 조금 나쁜 짓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엄밀히 따지면 아예 나쁜 짓은 아니지만…… 사정상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밀리안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클로드는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레 행동하는 그가 퍽 어색했으나 그동안 너무 완벽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보기 좋았다.
클로드는 안심하라는 듯이 덕담을 덧붙였다. 물론 남이 들으면 악담에 가까웠고, 친하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지나가던 머제리가 거품 물고 화낼 소리를 하네. 네가 언제 나쁜 짓, 좋은 짓 가려가며 했었어? 나쁜 짓도 좋은 짓으로 포장하길 잘했지.”
“……그렇죠.”
밀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로 도움 안 되는 말 같았으나 밀리안은 그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았는지 몇 분 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전하 말대로 제 방식은 늘 그랬죠. 제가 어울리지 않게 망설였나 봅니다. 갖고 싶으면 제 발로 오게 만들면 되는 것을…….”
“응? 갖고 싶다니? 뭘?”
“욕심내도 되는 건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뭐 얼마나 귀한 거길래 에드모어 소공작께서 고민을 해? 나도 같이 갖…… 아아, 알았어.”
클로드가 말을 잇다 말고 형형한 밀리안의 눈빛에 깨갱, 백기를 들었다.
‘같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인 모양이네.’
클로드는 그가 갖고 싶다는 것이 뭔지 궁금했으나 깊게 물어보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당부했다.
“반란만 아니라면 내가 덮어줄 의향도 있어.”
“전 왕위에 관심 없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밀리안은 뒷말을 잇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드가 어디 가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나쁜 짓 하러 가겠습니다.”
그가 제법 비장한 얼굴로 꾸벅 인사하곤 자리를 떠났다. 클로드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누가 밀리안 에드모어 아니랄까 봐, 실행력 하나는 어마어마하지. 내가 괜한 조언을 한 건 아닌가 몰라.”
클로드의 우려대로 밀리안은 조언에 힘입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일 먼저 미친 듯이 경력을 쌓아갔다. 이전에는 관심 갖지 않던 것도 알아서 찾아 해내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로드는 그 모든 행동을 단순히 갖고 싶은 ‘무엇’을 위해서라고만 여겼다. 그 ‘무엇’이 사람이자, 여자이자, 호적상 누이가 된 프레아 레이첼이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세월이 흘러 클로드는 밀리안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 전쟁에 참전한 지 어언 5년이었고, 조금만 버티면 제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밀리안은 지치지도 않는지 차곡차곡 ‘나쁜 짓’을 쌓아갔다. 그는 걸핏하면 그 뭔지 모를 것을 갖기 위해 ‘나쁜 짓’을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클로드가 보기엔 도통 나쁜 짓이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여태껏 했던 것 중 가장 괜찮은 일을 하고 있었다.
제때 집에 들어가고,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굳이 싫은 이유를 나열하며 시스콤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누이한테 살갑게 대하기까지 했다.
그래, 특히 누이에게 유독 잘했다. 임명식 날 누이에게 망토를 씌워 아무 남자나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유별난 행보까지 보일 정도로.
“이제는 시스콤이라고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어?”
클로드가 막사에서 프레아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밀리안을 보며 히죽거렸다. 밀리안은 전쟁터에 온 이래로 일상처럼 늘 누이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곤 했다.
누이 역시 곧잘 답장이 와서 이미 그의 서랍엔 그녀의 편지가 꽉 차 있었다. 어찌나 소중히 여기는지 가까이 가려고만 해도 으르렁거렸다.
밀리안이 마지막으로 ‘곧 보자’라는 말을 적은 뒤 편지지를 접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시스콤은 아니지만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네 누이도 정말 지극정성이다. 어떻게 5년간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을 생각을 하냐. 내 누이는 편지 한 통 없는데.”
클로드는 밀리안의 ‘좋다’는 말이 이성으로서 좋다라는 말인 줄은 생각도 못 한 채 대꾸했다. 그놈의 시스콤 인정은 곧 죽어도 안 할 건가 보다, 그리 여기기만 할 뿐이었다. 밀리안이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프레아는 황녀님과 다르게 다정하니까요.”
“허이구. 다정한 누이를 둬서 좋겠다그래.”
클로드가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팍 썼다. 밀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소중하게 봉투에 담았다.
“할 말이 그렇게 많아? 난 누이한테 편지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는데.”
“노력하는 겁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어서.”
밀리안의 의미심장한 말에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디어 그가 갖고 싶다는 게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은 탓이다.
“설마 네가 갖고 싶다는 게 네 누이 물건이야? 그래서 이렇게 공들이고?”
“뭐, 그렇다고 해두죠.”
밀리안이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클로드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자신이 그를 통해 건너 아는 레이첼 소후작이라면 그냥 달라고 해도 뭐든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달라고 해. 네 누이라면 거저 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수도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전령에게 편지를 전했다. 얼마 뒤, 밀리안의 누이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밀리안은 군명을 어기고 적국 왕의 목을 따 왔다.
클로드는 밀리안의 몰골을 보고 기함했다. 얼마나 많은 군사와 대치했는지 밀리안이 걸을 때마다 붉은 발자국이 찍혔다. 저 피가 밀리안의 것인지 적국 군사들의 것인지는 몰랐으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전쟁이 끝났다. 이미 왕의 목까지 땄으니 예정보다 빠르게 전쟁이 막을 내린 셈이다. 그가 적국 왕의 목을 던지며 서늘히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전쟁터에서 봤던 그 어떤 때보다도 매섭고 날카로웠다.
“수도로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 * *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를 누비며 미친 듯이 활보하던 친구였다. 제국에 와서도 마법사의 의문사에 관해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과 결탁한 정황까지 파악하여 반란을 진압했던 그였다.
그런 그였는데…….
그사이에 연애를 했다고?
그것도 누이였던 여자랑?!
클로드는 제 앞에 청첩장을 내민 밀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어 연신 청첩장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신랑은 당연히 밀리안 에드모어 테일러스였다.
그리고 신부는…… 프레아 레이첼.
바로 밀리안이 유난히 아꼈던 그 누이였다.
“이걸 나보고 믿으라고?”
클로드가 청첩장을 흔들며 되물었다. 신랑의 이름에 ‘밀리안 에드모어 테일러스’가 있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신부의 이름이 더욱 충격을 주었다.
친구 녀석이 아무리 막무가내에 하고자 하면 끝까지 따라가서 쟁취하고 마는 저돌적인 사람이래도 이건 좀…….
“네가 미쳤구나.”
그래, 미친 거다.
미친 게 아니라면 누이였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리라. 하지만 기어이 친구는 그 미친 행위를 하려는 모양이다. 밀리안은 클로드의 반응에 새삼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언제는 제 방식대로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하자 밀리안이 담백하게 말했다.
“그동안 제가 했던 나쁜 짓 말입니다. 이게 바로 그 결과입니다.”
“……설마, 나쁜 짓이라는 게 이런 거였어?”
그 말을 끝으로 클로드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떡 벌렸다. 밀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클로드가 경악하며 외쳤다.
“말도 안 돼……. 그 여잔 네 누이였잖아!”
“제가 언제 제 입으로 프레아를 누이라고 한 적 있습니까?”
밀리안의 서늘한 말에 클로드가 멈칫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는 그녀를 누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공식적인 상황에서나 누이라고 했지, 클로드와 사적으로 대화할 때는 늘 ‘프레아’라고 지칭했었다. 클로드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질문했다.
“……너 설마 처음부터 위장 재혼인 걸 알고 있었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면 그의 미친 짓도 어느 정도 납득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쁜 짓은 아닌데, 어떻게 보면 나쁜 짓으로 보이는 일이라고요. 그때 제게 제 식대로 하라고 했던 건 전하입니다.”
밀리안이 여유롭게 다리까지 꼬며 대답했다. 할 말이 없어진 클로드는 끙, 신음만 내뱉었다. 동시에 그간 밀리안의 행동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클로드는 위장 재혼인 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두 가문이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가 단지 갖고 싶은 게 누이에게 있어서라고만 여겼다.
그녀가 정령사이니 뭐, 그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지레짐작한 적도 있었다. 한참 공을 들이기에 정말로 대단한 것인가 했는데…… 그게 누이 그 자체였다니.
그 여인의 마음을 얻고자 그렇게 오랜 시간 노력했다고?
그 밀리안 에드모어가? 진짜?
클로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답장을 받고 돌연 왕의 목을 따 왔던 바로 그 미친 짓.
전쟁이 지겨워서 그랬나 했는데 그 일이 고작 누이 결혼 하나 막으려고 벌인 짓이었다고? 이게 말이 돼?
클로드는 혼란스러워 마른세수했다. 도저히 제 머리로는 납득이 안 되는 저돌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간의 의문 속에 프레아라는 여인을 넣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다. 밀리안이 갑자기 열을 올리며 기사단장이 되려 한 것과 임명식에서 누이에게 망토를 준 것. 전쟁터에 자진해서 참전한 것도 모자라 적장 왕의 목을 따 온 것. 나아가 가문을 나갔던 것.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것까지.
모두 프레아 레이첼이라는 한 사람을 얻고자 한 일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앞뒤가 딱 맞아떨어졌다. 클로드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저를 수상쩍다는 듯 쳐다보는 밀리안에게 말했다.
“넌 정말 미친놈이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밀리안이 얄밉게 웃었다. 새신랑이 될 생각에 벌써부터 유들유들해진 것이 꼴불견이었다. 클로드는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가 갖지 못해 안달이던 것이 설마 여자일 줄은. 그것도 누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 누이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언제부터 사귄 거야? 그럴 새가 있었어?”
“사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프레아는 위장 결혼이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고요.”
“바쁜 틈에도 할 건 다 한다는 거구나. 대단하다, 정말.”
거기다 티 하나 내지 않고 비밀리에 연애했다니. 클로드는 그의 철두철미함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친우였다.
클로드가 밀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응원했다. 한 남자의 집요한 구애가 결국 빛을 발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응원에 가까웠다.
“하여튼. 축하한다. 그 오랜 시간 공들인 보람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클로드의 덕담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클로드는 그런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럼 이젠 소개해 줄 거야? 네 누…… 아니, 네 아내 될 사람.”
“이미 보았지 않습니까.”
밀리안이 ‘아내’라는 단어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에이, 그건 공적인 자리고. 너와 내가 알고 지낸 세월도 있는데 따로 자리 마련도 안 해줄 생각인 건 아니겠지?”
“눈을 감고 오신다면…….”
“야.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정말 끝까지 이럴래?”
클로드가 인상을 팍 쓰며 항의하자 밀리안이 픽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프레아가 전하와 셋이서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만간 날을 잡겠습니다.”
“오오, 좋았어. 그럼 여태 네가 했던 삽질을 밝혀야겠다.”
“그러기만 하십시오. 이럴 줄 알고 전하와 만나게 하기 싫었던 겁니다.”
“네 아내라면 네 어린 시절 이야길 듣고 좋아서 방방 뛸 것 같은데?”
클로드가 능글맞게 대응하며 얼른 자리를 만들라고 독촉했다. 훗날 프레아는 클로드에게서 밀리안의 일을 전해 듣고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좋아했다. 그 옆에서 밀리안이 쑥스러워하는 것이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 * *
프레아가 벤치에 앉은 채 발을 휘휘 저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쯤이면 밀리안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원래는 밀리안과 함께 황태자를 만나러 가려 했는데, 밀리안이 따로 조용히 말하고 싶다고 하여 허락했다.
아직 프레아와 밀리안이 결혼 약속을 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둘은 마르뎅 후작부인의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비밀리에 소식을 전했다.
반응이야, 뭐.
브레이크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눈치였고 에리카 역시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가장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 건 비숍이었다. 물론 결론적으론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통제 안 되는 두 사람이 서로 통제하며 살면 딱이라나 뭐라나.
프레아는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지인들에게 먼저 사정을 설명할 수 있어 감사했다. 잠시 후, 저 멀리 밀리안이 탄 마차가 보이자 프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밀리안을 태운 마차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성 입구에 들어섰다. 프레아는 마차에서 막 내린 밀리안에게 다다다 달려가 안겼다. 밀리안은 익숙하게 그녀를 안고선 가볍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마중 온 그녀가 사랑스러운지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곁에 있던 시에라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고, 마부 역시 못 본 척하며 마차를 끌고 사라졌다.
“환영이 격하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그럼. 보고 싶었지.”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수긍하자 밀리안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소중하게 그러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일상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프레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전하는 뭐라셔? 역시 많이 놀랐겠지?”
“나보고 미친놈이래.”
“헉. 정말? 그래서 넌 뭐라고 그랬어?”
“맞다고 했지 뭐.”
프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묻자 밀리안이 담백하게 대꾸하더니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곤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널 만난 이후로 내가 정상이었던 적이 없었어. 줄곧 너한테 미쳐 있었으니까.”
“그 덕에 네가 나한테 와버렸고.”
프레아가 해사하게 웃으며 호응하곤 생각했다.
‘만약 밀리안이 계속해서 구애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무엇을 했을까?’
아무리 고심해도 그런 가정이 상상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가 조금이라도 이것저것 따져 망설였다면 이렇게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걸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졌다.
프레아는 직진밖에 모르는 그의 성격이 누군가에겐 미친놈처럼 보일지라도 좋았다. 밀리안이 그만큼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 덕분에 자신도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미친 짓을 시도할 수 있었으니까.
“맞아. 그러니 이제 네가 가지기만 하면 돼. 날 너한테 줄게. 프레아.”
밀리안이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프레아의 시선이 그의 반짝거리는 눈에서 오뚝한 코로, 촉촉한 입술로 움직였다.
그렇게 멍하니 올려다보다 화들짝 놀라 그의 입술을 손으로 턱 막았다. 그의 뒤로 호들갑을 떠는 가신이 보인 탓이었다. 하마터면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할 뻔했다.
“뭐 해?”
밀리안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 사이 프레아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 하, 후, 하,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연신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부모님이 나와 계시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밀리안은 프레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는 프레아의 손바닥에 입술을 쪽쪽거리며 유혹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은 노골적으로 그녀만을 보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혀를 내밀어 강아지처럼 할짝대기까지 했다. 역시 프레아는 그의 바람을 아주 착실히 들어주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더듬거렸다.
“부, 부모님이 보시면 어떻게 해.”
“뭐, 어때. 부모님도 이젠 적응하셔야지.”
밀리안이 말할 때마다 손바닥에 숨이 닿았다. 습해진 손바닥을 밀리안이 가볍게 끌어 내리며 깍지를 꼈다. 프레아는 달뜬 얼굴이다가 뒤늦게 밀리안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곤 픽 웃어버렸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놀린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정말 못 말리는 동생이야.”
“프레아. 동생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해야지.”
“글쎄에.”
밀리안이 굳이 호칭을 꼬집자 프레아는 그건 두고 볼 일이라는 듯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자신을 놀려먹은 벌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밀리안에게 덜미를 주었다. 밀리안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대로 프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주 앙큼한 선언과 함께.
“으앗!”
“안 되겠다. 당장 남편이라고 시인할 때까지 예뻐해 줘야지.”
그러곤 다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프레아가 터진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지나가던 하녀들이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제 할 일을 했다.
이미 저런 패턴으로 서로의 방에 드나든 지 오래인 탓이었다. 처음엔 다들 어색해서 쭈뼛거렸으나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응원하는 분위기가 됐다.
시에라는 멀어져 가는 밀리안과 프레아를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아가씨와 도련님이 부부가 되신다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시에라는 도련님이 아가씨에게 망토를 준 게 정말 사심이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한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남이었다가, 남동생이었다가, 이제는 남편 자리까지 꿰차게 된 도련님. 쌀쌀맞고 차가운 도련님을 한 방에 녹여 버린 것도 모자라 아내가 될 예정인 아가씨. 두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시에라는 저도 모르게 히죽거렸다. 벌써부터 두 사람의 결혼식과 앞으로 이어질 결혼 생활이 무척 기대되었다. 가능한 한 두 사람 곁을 지켜 그들의 아이까지도 보고 싶었다. 분명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멋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밀리안과 프레아의 결혼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고 대망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프레아는 아침부터 치장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슬쩍 들어왔다.
“긴장되니?”
“에드모어 공작님!”
프레아가 환히 미소 지으며 그를 환대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줄곧 불러왔던 터라 에드모어 공작이라는 단어가 입에 낯설었다. 그러자 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는 아버님이라고 해야지.”
“아, 아버님?”
“듣기 좋구나.”
프레아가 어물거리며 그를 ‘아버님’이라 부르자 진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프레아는 새삼 진과 에밀리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그날도 그는 선뜻 ‘아버지’라는 호칭을 허락해 주었었다. 그것이 아버지 없이 자랐던 프레아를 위한 배려였다는 걸 큰 다음에야 알았다.
“밀리안을 제게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님.”
“글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다. 속만 썩이고 제멋대로인 아들 녀석을 받아줘서 정말 고맙구나.”
“헤헤. 뭘요.”
“프레아, 그 녀석이 조금 서툴기는 하지만 널 많이 좋아하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그럼요. 밀리안의 마음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미안하구나. 원래였다면 괜한 구설에 오를 일 없이 서로 만나 결혼할 수도 있는 사이를 위장 재혼 때문에 이렇게 돌고 돌게 만들었으니.”
진이 못내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사과하자 프레아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다 사정이 있었잖아요.”
“…….”
“생각해 보면 아버님과 어머니가 위장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밀리안을 알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두 분께 늘 감사해요.”
“이렇게 미안함을 덜어주니 더욱 고맙구나.”
진이 감동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프레아를 쭉 보아온 터라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따뜻한 면모를 잘 알고 있었다.
나쁘게 생각하면 원망할 수도 있는 일을 저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니 고맙고, 미안하고, 또 기특했다. 마치 딸과 아들을 동시에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뒤숭숭하고 오묘했다.
“행복하렴.”
“네, 분명 행복할 거예요.”
프레아가 답하며 배시시 웃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밝게 웃는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잠시 후 식이 시작됐다. 프레아는 그레이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밀리안은 제게 다가오는 프레아를 보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렇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보폭을 넓혔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앞에 당도했을 때, 그레이가 말했다.
“잘 부탁한다.”
“염려 마십시오.”
밀리안이 듬직하게 대답하곤 프레아의 손을 잡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본 에밀리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훌쩍이자 그레이가 허둥지둥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좋은 날 왜 울어.”
“좋아서, 우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그레이의 말에 눈을 흘긴 에밀리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그레이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길 잘했어.”
“살아줘서 고마워. 이대로 과부로 지내야 하나 했는데 덕분에 면했어.”
에밀리가 괜한 농담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레이도 덩달아 씨익 웃고는 프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예식은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있었다.
프레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밀리안을 응시했다. 밀리안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고, 주변에는 환호성과 함께 꽃가루가 날렸다.
그렇게 남이 된 남동생은 결국 남편이 되었다.
<외전1 친구의 결혼식 완결>
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