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끝은 또 다른 시작
밀리안이 무작정 찾아온 덕에 여행은 조금 일찍 마무리하게 되었다. 에리카는 여행지까지 방해하러 왔냐며 불만스러워했다. 곧이어 예약해 둔 마차가 도착했다.
말을 타고 새벽 내내 오느라 지친 밀리안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맡기고 마차에 함께 올랐다. 워낙 마차가 커서 3명은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사실 밀리안이 에리카에게 다른 마차를 따로 주문하겠다고 했으나 에리카가 거부했다. 밀리안은 그것이 몹시 못마땅한 것 같았다.
“에리키 양, 다른 마차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는 것도 거절하고 굳이 돌아서 가는 마차를 타려는 이유가 뭐지?”
에리카는 여전히 제 이름을 잘못 부르는 밀리안을 슬쩍 흘겼다. 저번에는 메리카더니 이제는 에리키란다. 아무래도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에리키가 아니라 에리카예요, 밀리안 후작님. 그리고 이 마차는 제가 예약한 마차랍니다.”
에리카가 슬쩍 눈치를 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 얻어 타고 계신 분은 후작님이세요. 그렇게 불편하시면 따로 오시지 그러셨어요.”
“프레아가 여기 있는데 다른 마차를 타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마차값은 따로 보내지.”
밀리안이 덤덤한 얼굴로 반박했다. 여행 도중 난입한 사람이 취할 행동치곤 너무 당당했다. 에리카는 그가 프레아와 단둘이 가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일부러 마차에 함께 탔다.
매번 제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도 고까웠고, 두 사람이 사귄다고 하니 어쩐지 프레아를 뺏긴 기분이라 더욱 못마땅했다. 프레아는 두 사람이 워낙 안 맞는다는 걸 아는 터라 사이에 끼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밀리안은 앞에서 자꾸 종알거리는 에리카를 무시한 채 팔짱을 꼈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여 잠을 청했다. 밤 내내 말을 타고 달렸으니 지칠 법도 했다.
프레아도 그걸 알기에 에리카와 목소리를 죽인 채 대화를 이었다. 밀리안이 곧바로 꾸벅꾸벅 졸더니 옆에 있던 프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프레아는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밀리안을 조심스럽게 대하며 혼자 실실거리는 프레아를 본 에리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 * *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은 공식적으로 남이 되었다. 반란군의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고 열흘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황제는 13년 전 반란군 토벌을 위해 비밀리에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에게 황명을 내렸던 것을 밝혔다.
당시 반란군의 테러 행위가 심각했고, 그 꼬리조차 추적하는 게 쉽지 않아 은밀히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귀족들은 그제야 진과 에밀리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대해 납득했다.
당시 여러 추문이 많았던 결혼이었다. 레이첼 후작은 미혼에 딸을 뒀고, 공작은 아내를 잃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아서 더욱 지저분한 소문이 많았다.
불륜을 저질렀다가 공작부인이 죽자마자 결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 같지 않은 소문을 모르는 귀족들은 없었다. 황제는 그들의 이혼 서류를 직접 수리하고 더 이상 부부가 아님을 공표했다.
이후 레이첼 후작과 그녀의 딸은 수도 밖에 있던 레이첼 성으로 옮겼다. 에드모어 성에 더는 머물 이유가 없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프레아가 정령사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어 더 이상 외곽에서 지내는 것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에밀리는 조만간 수도 안에 있는 성을 매매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한 그녀는 황제에게 그레이 크로이드에게 새로운 작위를 줄 것을 상으로 요구했다. 귀족은 귀족끼리만 혼인할 수 있는데, 그레이의 가문인 크로이드가 이미 멸문당한 탓이었다.
황제는 그레이에게 ‘아니무스’라는 백작위를 내렸다. 그리하여, 그레이 크로이드는 이제 그레이 아니무스라 불리게 되었다. 에밀리는 이혼 뒤 곧장 조촐한 결혼식을 준비했다.
* * *
“더 좋은 포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갑작스레 찾아온 그레이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밀리가 자신 때문에 좋은 기회를 날린 것 같아서였다. 곧 죽을 자신의 명예 회복보다는 영지 증원이나 사병을 충원하도록 허락받는 게 장기적으로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는 이보다 더 좋은 포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미 충분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에밀리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해?”
“그야 아직 실험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레이.”
에밀리는 또다시 나약한 소리를 하는 그레이의 말을 조용히 끊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나 같은 것 때문에 일평생 복수만을 위해 살아갈 줄은 몰랐어. 위장 결혼이라니. 에밀리, 넌 정말…….”
그레이의 눈가가 벌게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 많은 남자는 에밀리의 지난 과거가 몹시도 서글픈 모양이었다. 겉보기엔 바늘로 찔러도 울 것 같지 않은데, 그는 그녀 앞에선 늘 감정을 잘 드러내곤 했다.
“나한텐 실험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
“난 그저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의 아내로 살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프레아가 당신 딸이라는 걸 당신이 당당히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여태 그러질 못했잖아?”
에밀리의 뜻밖의 고백에 그레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간 바라왔던 일이었다. 에밀리를 아내로, 프레아를 내 딸로 온전히 드러내며 사는 삶.
“크흡…….”
결국 그레이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에밀리가 곁에서 아무리 달래도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레이는 에밀리의 남편으로, 프레아의 아버지로 살 자격이 제겐 없다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녀가 당당히 말하라 해주었다. 그게 하염없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 이제 그레이는 더 바랄 게 없었다.
* * *
결혼식은 에드모어 공작과 밀리안, 브레이크와 프레드린 가문만이 초대되었다. 레이첼 성에서 행해진 결혼식은 성대하진 않았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에밀리는 어느 때보다 환히 웃었고, 그레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신랑 단독 행진 때 레드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하여 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레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짓곤 다시 똑바로 행진했다.
결혼식에서 가장 크게 박수한 이는 프레아였다. 의식을 회복한 뒤 아버지와도 끈끈한 상봉을 마친 프레아는 감격 어린 얼굴이었다. 원래는 에밀리의 배 속에서 함께 입장했어야 할 결혼식이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프레아는 이들의 결혼식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진 에드모어가 주례를 선 것은 그 결혼식에서의 또 다른 웃음거리였다.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에밀리와 진이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음을 황제가 공증한 탓이었다.
신혼여행은 없었다. 그레이가 완전히 회복한 뒤에 가자고 결정해 미룬 탓이었다. 프레아는 이미 마샤라는 마법사에게 영류를 떼어 이식하는 실험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밀리안이 저를 위해 아버지를 살리려 노력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프레아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저 아버지의 죽을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겠다고 여겼는데…… 앞으로는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까.
에밀리와 그레이의 결혼식이 울음바다가 아닌 웃음바다가 될 수 있던 이유였다. 물론 실험이 성공할지 안 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가능성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마샤는 환자의 상태를 고려해 실험에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에드모어 성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에시드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 실험에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며, 가외 변수가 무엇인지 등을 꼼꼼히 살폈다. 마샤는 에시드에게 부탁했던 물건을 받기 위해 그를 만나러 떠났다.
* * *
에시드는 제국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왕국의 어느 작은 시골에 머물고 있었다. 워낙 먼 대륙에 있어 그런지 그가 헤로스 제국의 대공이라는 걸 아는 이는 없었다.
황족답게 여러 왕국어를 익혔던 에시드는 제법 잘 적응하며 지냈다. 마도구가 잘 발달하지 않은 나라라, 실생활에 유용한 마도구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밥벌이를 했다.
에시드는 에시라고 불렸다. 성도 없이 그저 ‘에시’였다. 에시드는 간단한 마도구를 상점에 판매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샤와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에시.”
“들어와.”
에시가 문을 열고 마샤를 맞이했다. 마샤는 과거, 유학 갔을 당시 만났던 동기였다. 그녀와 만난 곳은 리프덤 왕국에 있는 마법 학교였다.
제국에 마탑이 있다면 리프덤 왕국에는 리프덤 마법 학교가 있었다. 에시드가 마탑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도피 겸 머물렀던 마법 학교였다.
그곳에서 만난 마샤는 이름 있는 마법 가문의 사람이었다. 에시드가 마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기혼자였다. 그녀는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뒤늦게 발현해 입학하게 된 만학도였고, 에시드를 무척 잘 챙겨주었다.
워낙 에시드를 자기 가족처럼 예뻐해 에시드도 그녀를 무척 편하게 여겼다. 원래는 마샤에게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려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레이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따로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원하는 상을 말하라는 황제에게 밀리안이 에시드의 협조를 요청한 덕이었다. 그레이를 살리는 데 적합한 마법사가 에시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시드는 이 일에 참여할 수 있었고, 마샤에게도 생사를 알릴 수 있었다. 에시드는 어머니가 저지른 과오를 자신이 대신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에 감사했다.
그밖에 다른 자는 모두 에시드가 죽은 줄 알았다. 그와 가장 친한 데오 라즐리까지도. 간혹 데오가 떠오르긴 했지만 에시드는 데오에게 제 생사를 고하지 않았다.
에시드가 익숙하게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 마샤에게 대접했다. 혼자 지내기 딱 좋은 크기의 작은 집이었고, 제법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그곳엔 그를 모시는 하녀가 없었다. 평민이 하녀를 두는 건 이상해 보일 테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에시드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 마샤가 차를 후루룩 마시며 이미 편지로 보냈던 내용을 재차 확인하듯 이야기했다.
“그 집 아가씨 덕에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아. 부탁한 건 만들었어?”
“그래, 미리 준비해 뒀으니까 확인해 봐. 나중에 챙겨 가는 것도 잊지 말고.”
에시드가 구석에 있던 보따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마샤가 미리 요청했던 마도구였다. 서로 다른 영류를 이식해도 괜찮은지를 판정하는 도구와 영류를 연결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는 마도석이었다.
정령사에겐 마나 코어가 없기 때문에 마도석을 이용해 프레아의 영류를 마나 코어처럼 이을 생각이었다. 마샤가 설계를 구성했고, 제작하는 것은 에시드의 몫이었다. 마샤가 보따리를 끌러 내용물을 확인하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 정말 대단하긴 하더라. 왜 마탑이 그녀를 호시탐탐 노렸는지 좀 알 것 같아.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대랄까.”
“특별하긴 하지.”
에시드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하는 특별과 마샤가 말하는 특별은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의미였다. 에시드는 그녀의 능력뿐만 아니라, 제게 있어 그녀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특별함이었다.
사실 에시드는 떠나기 전에 프레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에 프레아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저 때문에 다친 프레아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그 작은 바람은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에시드는 조용히 제국을 떠났다. 뒤늦게 그녀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하늘에 감사하기까지 했었다.
만약 그녀가 영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에시드는 평생 죄책감을 지니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도 미약한 능력이나마 그녀의 아버지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다고 그 악연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의 짐은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레아에 대한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에시드에게 마샤가 제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입을 뗐다.
“제국 소식 궁금하지? 아무리 시골이래도 에드모어 공작이랑 레이첼 후작의 결혼이 위장이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려나.”
“응, 들었어. 그리고 곧바로 레이첼 후작이 그레이 경과 결혼했다는 것도.”
“이런 깡촌에서도 소식이 제법 일찍 도착했네. 근데 이 소식은 못 들었을걸? 아직 안 알려져서.”
마샤가 아주 재미있는 소식을 들고 왔다는 것처럼 키득거렸다. 에시드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의아한 빛을 띠었다. 마샤는 말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한쪽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밀인데, 그 집 아들이랑 딸이 지금 연애 중이래. 곧 결혼도 할 것 같더라.”
“……뭐?”
에시드가 찻잔을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이 위장 부부로 지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보다 더 충격이었다.
에시드가 프레아에게 품은 마음이 단순한 사람 간의 호의를 넘어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에시드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아니, 그녀의 상대가 밀리안이라는 것보다 그녀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에 더 놀랐다는 게 정확했다.
언젠가 그녀도 결혼하여 누군가의 아내가 될 거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미련은 생각보다 질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얼굴빛이 좋지 않아진 에시드를 보며 마샤가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까 먹은 고기가 조금 얹혔나 봐.”
에시드가 에둘러 말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 감정이 진정되려면 조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실 밀리안을 통해 프레아가 잘 살라고 전해달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기뻤었다.
당시엔 이미 그녀가 제게 완전히 돌아섰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또 쓸데없는 기대가 생겼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동요가 설명이 안 되었다.
밀리안이 부러웠다.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 염치없는 망상이었다. 그때 마샤가 낭랑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프레아 양이랑 안면 있지 않아?”
“그렇지.”
에시드는 그녀와 안면 정도의 사이로 전락한 게 몹시 서글퍼졌다. 어쩐지 시무룩한 그의 표정을 오해한 마샤가 듬직하게 말했다.
“전해줄 말 있으면 얘기해. 결혼식에 오고 싶어도 못 올 텐데. 대신 전해줄게.”
“아냐. 딱히 축하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닌걸.”
“그래? 이상하다. 그럼 왜 그 아가씨가 이걸 전해달라 했지.”
마샤가 주머니에서 작은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레이첼 문장이 밀랍으로 봉해진 봉투였다. 봉투에는 ‘프레아 레이첼’이라는 이름이 아기자기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수신인은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어서였으리라. 프레아의 편지를 본 에시드의 눈동자가 얕게 떨렸다.
마샤가 돌아간 뒤, 에시드는 침실에 누운 채 멍하니 봉투를 응시했다. 아직 뜯지도 않은 채였다. 에시드는 그 속에 들었을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녀에 대한 소식을 일절 모르고 지낼 때는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처음에는 형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죽고 싶었고,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홀로 지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금씩 슬픔이 옅어졌다.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 제 마음도 정리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예 그녀에 대한 소식을 몰랐기에 멀쩡했던 거였다. 그녀의 소식이 궁금하면서도 따로 찾거나 묻지 않은 건 이런 걸 짐작해서였을까.
에시드는 그녀의 행복한 소식이 제게 비극으로 다가오는 것이 씁쓸했다. 그는 결국 편지를 뜯지 못했다. 어차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괜한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에시드는 서랍 속에 편지를 넣어버렸다. 차마 버리지 못한 것이 미련이라는 걸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에시드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잠시 뒤 맑은 눈물이 그의 얼굴 위로 툭, 하고 흘렀다.
* * *
“아빠, 우리 꼭 다시 봐요.”
프레아가 그레이의 손을 꼭 붙들고 다짐을 받아내듯 재차 강조했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레이가 애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전과 달리 피부의 거뭇거뭇함이 약간 가신 상태였다.
온몸에 새겨 있던 속박 마법의 흔적은 마샤 덕에 점점 옅어져 본래의 피부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피부색은 마법으로 되돌릴 수 있었지만 머리색은 아니었다.
그의 금발은 여전히 얼룩덜룩했다. 머리색은 실험에 의한 부작용이 원인이라 영류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만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프레아의 영류가 그레이의 영류와 상성이 맞는다는 것을 확신했고, 오늘이 바로 실험을 시행하는 날이었다. 미리 추출한 프레아의 영류를 마도석에 넣어두었다.
이제 이 마도석을 마나 코어처럼 그레이의 몸속에 이식한 뒤에 정령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곧바로 다른 마도석을 이용해 망가져 버린 영류를 도려내야 했다.
그레이가 실험실로 들어갔다. 프레아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에밀리와 손을 붙잡았다. 밀리안과 진도 그들 옆을 지켰다.
마샤가 엄숙한 침묵 속에서 실험실을 나온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그녀는 몹시 힘든 실험을 해낸 것처럼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성공했어요. 머리색이 본래 금발로 돌아왔어요. 영류 상태도 안정적이고요. 아직 마취 마법이 풀리지 않아 잠든 상태예요.”
“아아.”
에밀리가 얕은 탄성을 내뱉으며 프레아를 꼭 끌어안았다. 넋이 나간 것 같은 에밀리와 프레아의 곁에 선 밀리안이 짤막하게 감사를 표했다.
“수고했네.”
“네, 환자는 침실로 옮겨도 좋아요.”
“제가 옮기겠습니다.”
곁에 있던 랭이 서둘러 말했다. 랭은 사용인 몇을 시켜 실험실에 있던 그레이를 들것으로 옮겼다.
에밀리가 촉촉한 눈으로 잠든 그레이를 졸졸 따라갔다. 얼룩덜룩해서 볼 때마다 마음 아프던 머리카락은 본래의 반짝거리는 금발로 돌아와 있었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프레아는 방문까지 따라갔다가 멈추었다. 어머니가 곁을 지킬 테니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에밀리는 깊이 잠든 그레이의 뺨을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여러 차례 나뉘어 이루어졌던 실험이 드디어 성공했다. 워낙 시도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절차가 복잡했는데도 그는 아주 잘 버텼다.
에밀리가 그의 손을 꼭 붙든 채 침대에 엎드렸다. 짤막한 속눈썹이 촘촘하게 나 있는 것을 지긋이 보며, 에밀리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에밀리가 그의 손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묵혀 있던 불안감이 놀라울 정도로 옅어진 날이었다.
* * *
제국의 귀족 사회는 조금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거물급의 가문이 줄줄이 멸문당하거나 작위를 잃고 영지까지 몰수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총대를 메고 활력을 불러일으키려는 사람이 있었다. 사교계의 큰손인 마르뎅 후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흔을 축하하는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마르뎅 후작부인이 딱딱해진 사교계의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애쓰는 것이 눈에 선했다. 오죽하면 그녀의 연회에 초대받지 않은 귀족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프레아도 그녀의 초대를 받았다. 밀리안 역시 에드모어 소공작이자 테일러스 후작으로서 파티에 초대되었다. 아마도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 귀족가의 자제이니 와서 힘을 실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원래는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밀리안이었지만, 경직된 귀족 문화를 풀어주기 위해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귀족이 모인 자리인 만큼 소식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 없다.
즉, 오히려 가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프레아는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붉은 장미 꽃잎 모양이 화려하게 장식된 드레스였다. 어깨 너머로 늘어진 붉은 망사는 가녀린 그녀의 팔뚝을 언뜻언뜻 비쳤다.
프레아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미 머리로 반묶음을 한 뒤, 에드모어의 가보인 아마릴리스 모양의 머리 장식을 했다. 한눈에 봐도 에드모어가 떠오르는 옷차림이었다.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에스코트하는 밀리안은 금술이 달린 제복 차림이었다. 소매와 옷깃 부분이 보랏빛을 띠는 단정한 제복이었다. 가볍게 걸친 보라색 코트는 차분한 색감을 지니고 있어 밀리안과 무척 잘 어울렸다.
딱 맞게 맞춰진 옷은 그의 풍채를 더욱 돋보이기에 충분했다. 전체적으로 보라색으로 포인트를 준 그의 스타일은 레이첼을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의 입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꽂혔다.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이 이혼했음에도 두 사람이 함께 연회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들 사이에 불화가 있어 이혼한 것이 아니기에 그 모습이 영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프레아와 밀리안을 발견한 마르뎅 후작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맞았다. 이번 파티에 응해준 것이 몹시 고마운 기색이었다.
“어서 와요.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습니다.”
“이런 기쁜 자리에 초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마르뎅 후작부인.”
“축하하오.”
프레아가 치맛자락을 살포시 올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밀리안은 팔을 가슴께에 가져가며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마르뎅 후작부인이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레이첼 소후작께선 이제 막 재판이 끝나서 몹시 피곤하실 텐데도 이렇게 와주어 고맙습니다.”
“부인의 생신 연회인데 제가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협회장이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지요? 그럼 이제 소후작께서 협회를 맡게 되시는 건가요?”
마르뎅 후작부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재판은 이번 정령석 밀반입 사건과 정령사 숙청 사건에 대한 루이스의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모든 정황과 증거 앞에서 혐의를 인정했다.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해 제법 난항을 겪었지만 끝내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루이스 안은 자연스럽게 협회장의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로 인해 현재 협회장 자리가 공석이니 후작부인의 말은 으레 하는 아부였다. 프레아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게는 이미 메샤르가 있어서요. 지금 다른 적임자를 정해둔 상태랍니다.”
“그렇겠지요.”
후작부인이 웃으며 답하자 프레아가 말을 이었다.
“그 자리는 협회를 가장 잘 아는 자가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저는 협회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현 상황에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어머, 겸손하셔라. 그래도 소후작만큼 정령술이 뛰어난 자가 협회장이 되어야 그들의 반발이 없지 않을까요?”
프레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자 후작부인이 말을 이었다.
“마탑이 붕괴된 상태에서 협회라도 굳건히 서야 제국 안정에 도움이 될 텐데요.”
“아뇨. 오히려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분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제국 안정에 이바지할 거니 지켜봐 주세요.”
“어머나, 그 말씀은 차기 협회장이 된다는 분이 혹시 아니무스 백작이신가요?”
후작부인이 아주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는 것처럼 설레발을 쳤다. 루이스의 재판에 대한 귀족들의 관심은 상당했다. 그레이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섰고, 그제야 그가 정령 협회의 간부였음이 밝혀졌다.
신원 불명이던 자가 원래는 크로이드였으며, 반란군에 의해 실험체로 고생했다는 증언은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게다가 그가 에밀리 레이첼과 결혼했고 사실은 프레아의 친부였다는 것까지 알려졌다.
그러니 후작부인이 그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프레아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부인이 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역시, 소후작께서 정령사가 된 건 다 부친에게 영향받은 모양이네요. 그럼 이제 레이첼 후작 가문에 대대로 정령사가 나오려나요?”
후작부인이 노련한 눈빛으로 프레아를 쳐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기대가 큽니다. 아니무스 백작께서 협회장이 된다면 협회에서도 반발하지 않겠군요. 호호호.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소후작.”
“부인께서 이리 저희 가문을 어여삐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백작께서 잘해내시리라고 믿어요.”
프레아가 그새 아버지의 칭찬을 참지 못하고 늘어놓으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밀리안은 옆에서 그런 프레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후작부인의 시선이 밀리안에게로 향했다.
“테일러스 후작께서도 이리 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실제로 뵈니 훨씬 미남이시군요.”
“과찬이네.”
밀리안의 짧은 대답에 후작부인이 호호거렸다. 그가 말주변이 없다는 건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잘못 건드리면 귀족이고 뭐고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로는 머제리 코헨의 일이 있었다. 지금은 잠적해 버린 가문의 이야기. 갑자기 땅으로 꺼진 것처럼 사라져 버린 마법사 가문 코헨.
코헨가는 다른 곳에 새로운 둥지라도 튼 모양이었다. 마르뎅 후작부인이 세밀한 눈치로 밀리안을 살폈다. 사실 밀리안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제외하면 그는 딸 가진 귀족가라면 다 탐내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에드모어 가문이 이번 일로 제1 공작가에 오른 것도 그렇고, 밀리안이 차기 황제에 오를 클로드 반 헤로스의 친우라는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전쟁에서 선전하여 어린 나이에 에드모어 이외에도 테일러스라는 후작위를 받았으니, 무시무시한 소문만 아니라면 사위 삼고 싶은 남자였다.
에드모어 가문은 이번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덕에 새로운 영지를 하사받았다. 본래는 크로이드 가문의 것이었던 영지로, 그 덕에 공작 가문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지를 갖게 되었다.
대척점을 두던 크로이드 공작가가 몰락했으니 자연스레 에드모어는 홀로 우뚝 선 상태였다. 일각에선 최강의 무력을 지닌 에드모어에 더 큰 힘을 주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었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큰 공을 세웠으니 영지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황제가 그러하겠다는 데 반박하고 일어설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에드모어 가문은 한동안 화젯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유일한 후계자인 밀리안에게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르뎅 후작부인 역시 그를 손주사위로 점찍어둔 귀족 중 하나였다.
그가 연회에 잘 참석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굳이 초대장을 보낸 것도 다 그의 실물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었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마르뎅 후작부인은 우려했던 것보다 예의 바르게 구는 밀리안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이 기회에 내 손녀와 인사시켜야겠어.’
후작부인이 프레아 쪽에 시선을 두었다. 두 사람이 같이 온 것이 내심 신경 쓰인 탓이었다. 이젠 남이 되었으니 같이 올 이유는 없었다. 파트너로서 온다는 건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나 있는 일이니까. 후작부인은 확실히 해두고 싶어 매끄러운 미소를 띠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밀리안 후작께서는 듣던 것보다 인물이 훤하십니다.”
“과찬이오.”
“그러고 보니 제 손녀와 나이가 엇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밀리안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마르뎅 후작부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 이곳에 있으니 소개해도 될까요? ……마릴린, 어서 이리 와서 후작께 인사드리렴.”
마르뎅 후작부인이 질문과 동시에 마릴린을 불렀다. 저 멀리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마릴린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밀리안과 프레아에게 향했다.
이내 그녀가 밀리안을 보곤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마릴린을 떠밀었다. 한눈에 봐도 오묘한 분위기였다.
프레아의 눈썹이 얕게 꿈틀거렸다. 마릴린이 다가오자 옆에 있던 귀족이 무어라 수군거렸다. 들리는 말로는 마르뎅 후작부인이 선수를 친다는 것 같았다. 어쩐지 밀리안의 팔뚝을 쥔 프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밀리안은 그저 피식 웃었다. 어느새 밀리안 앞에 선 마릴린이 잔뜩 볼을 붉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마, 마릴린 마르뎅입니다.”
수줍게 인사하는 마릴린을 보는 밀리안의 표정은 무척 건조했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일 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호호, 우리 손녀가 참 수줍음이 많답니다.”
“그러게요, 아주 어여쁘시네요.”
후작부인의 시선을 느낀 프레아가 덩달아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겉으로는 그저 웃는 낯이었지만 프레아는 몰래 마릴린을 훑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예쁘게 올려 묶은 진한 호박색의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프레아는 후작부인이 마릴린을 부르자마자 부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눈도장을 찍어둘 셈이었겠지.’
하지만 오늘 프레아와 밀리안이 이 자리에 온 건 그 도장이 이미 찍혀 있음을 공표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더 예뻐.”
그때 묵언 수행을 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툭 내뱉었다. 마르뎅 부인은 눈을 잠깐 크게 뜨더니 재빨리 눈웃음을 치며 프레아에게 말했다.
“그럼요, 소후작께 비하면 우리 마릴린은 아직도 소녀 같은걸요. 프레아 영애께서 개화한 꽃이라면 우리 마릴린은 개화를 기다리는 꽃이기도 하죠. 호호호.”
“글쎄, 프레아는 개화 전에도 예뻤는데 그대의 손녀는 아닌 모양이군.”
“예?”
“…….”
밀리안의 말에 후작부인이 넋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옆에 있던 마릴린이 쩔쩔매듯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응시하며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는 눈빛을 보냈다. 밀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호호호, 그렇지요. 이렇게 어여쁜 누님을 두었으니 그렇게 볼만도 합니다.”
후작부인이 당황한 낯으로 얼렁뚱땅 대꾸하곤 프레아에게 도움을 청하듯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프레아 영애, 이렇게 놓고 보니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리지 않나요?”
“으음, 글쎄요.”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밀리안의 눈썹이 설핏 들썩였다. 부인은 그런 밀리안의 눈치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녀는 대화를 보니 두 사람 사이가 퍽 다정해 프레아에게도 눈도장을 찍어두어야겠다 결론을 지은 상태였다.
“마릴린, 앞으로 프레아 영애와도 친하게 지내렴.”
“잘 부탁드려요, 영애.”
마릴린이 예쁘게 미소 지으며 프레아와 눈을 맞추었다. 밀리안보다 조금 어린 영애였지만 예법을 잘 갖춘 얌전한 아가씨였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슬쩍 보자 그가 눈을 맞추며 ‘너야말로 왜 가만히 있냐’는 얼굴을 했다.
“후작께서도 이제 혼기가 꽉 찼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마음에 둔 이상형이 있으신지요?”
후작부인이 밀리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프레아에게 붙어 있던 시선이 부인에게로 옮겨졌다. 밀리안이 턱 밑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있다고 하면 찾아주려는 건가?”
“호호호, 당연하지요. 제가 사교계에서는 꽤 마당발이랍니다. 원하시는 여인상이 있으시다면 제가 발 벗고 나서 도와드리지요.”
“그래, 그러면 아주 잘 알겠군.”
밀리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꾸했다. 마르뎅 후작부인은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릴린도 은근히 집중했다. 밀리안이 다시 프레아 쪽으로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이왕이면 키가 컸으면 좋겠군. 내가 커서 말이지.”
그러곤 프레아의 키를 손으로 짚어 눈짓했다. 후작부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반응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3살 정도 많으면 좋을 것 같고.”
“아…… 연상이 취향이신가요? 나이보다는 인물됨이 더 중요할 텐데요.”
후작부인이 아쉬운 기색을 띠며 되물었다. 마릴린이 밀리안보다 3살 어리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이 후작부인을 쓱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나이보다는 능력이겠지. 나는 혼자서도 마수 하나쯤은 뚝딱 해치우는 여인을 좋아하네.”
“예? ……마, 마수를요?”
후작부인이 주춤거렸다. 마수를 혼자 때려잡다니. 그건 밀리안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순간 후작부인의 시선이 프레아에게로 향했다.
부인은 이미 프레아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견고하던 마탑을 아예 가루 조각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밖에도 축하연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대규모 방어막을 세웠던 걸 본 기억이 있었다. 마침 그곳에 후작부인도 참여했으니까.
부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설마 하는 눈초리였다. 프레아는 이젠 좀 창피해져서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입꼬리는 주인의 뜻을 거부하고 내려갈 줄 몰랐다. 밀리안은 뻔뻔할 정도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이어 말했다.
“내숭보다는 솔직한 점도 좋아하네. 가끔 핀트가 어긋나는 행동으로 당황시키는 것도 좋고.”
어느새 이상형이 아니라 프레아에게 반한 점으로 변해 버린 대화였다. 당사자를 옆에 두고 좋은 점을 읊어대니 프레아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네에…….”
후작부인의 눈이 짜게 식었다. 이 정도 눈치를 주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후작부인이 프레아와 밀리안을 번갈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던 모양이다.
“붉은색을 좋아하고, 체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여자를 좋아하네. 어떤가, 찾아줄 수 있겠나 부인?”
“예예. 이미 찾은 것 같습니다. 마릴린, 돌아가도 된단다.”
“네, 할머님.”
마릴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쓸쓸히 퇴장했다. 밀리안은 그녀가 가거나 말거나 부인에게 시선을 두며 질문했다.
“호오, 벌써 말인가? 누구지, 그 여자가? 당장 혼인하고 싶군.”
“이제, 그만해. 밀리안.”
프레아가 밀리안의 팔을 꼬집으며 말렸다. 후작부인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나도 이젠 늙은 모양이군. 이렇게 한 치 앞도 예견하지 못하고 말이야.’
부인이 밀리안을 향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보기엔 이미 찾으신 것 같군요. 괜히 늙은이가 설레발을 친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부인. 미리 말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 이걸 전해 드리러 왔거든요.”
프레아가 푸근한 미소를 띠는 부인에게 연보라색 봉투에 담긴 초대장을 건넸다. 청첩장이었다.
후작부인이 청첩장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청첩장에는 선명하게 ‘신부 프레아 레이첼, 신랑 밀리안 에드모어 테일러스’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 되겠군요. 황명으로 만난 남매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니. 이 늙은이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와서 축하해 주신다면 기쁠 겁니다, 부인.”
* * *
그날 파티는 프레아와 밀리안의 결혼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우후죽순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네는 귀족들 사이에서 둘은 진이 쏙 빠졌다.
하지만 둘은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청첩장만 건네고 쏙 빠져나올 수는 없어서였다. 녹초가 된 프레아는 레이첼 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밀리안은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데 따라나섰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조는 프레아를 제게 기대게끔 했다. 마차 안으로는 달빛이 은은하게 새어들어 왔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었지만 프레아는 한창 꿈나라였다. 밀리안은 프레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는 마부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곤 곧장 성으로 들어갔다.
시에라가 귀가한 프레아를 보며 인사하려다 그녀가 잠든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프레아를 누이자 시에라가 속삭였다.
“늦었으니 자고 가실 건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나는 좀 더 지켜보다가 갈 테니 그만 가봐.”
“아, 네.”
시에라가 공손히 인사하곤 방을 나갔다. 어느새 이불을 걷어차고 쭈그려 잠든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 다리 사이에 끼워진 이불을 살며시 빼내 덮어주곤 이불을 다독였다.
그러다 채 빼지 않아 불편해 보이는 머리 장식에 시선이 갔다. 달빛에 레드 다이아몬드가 반짝였다.
‘자는 데 거추장스러워 보이는군.’
밀리안은 장식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입단식 날, 저 머리 장식을 선물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프레아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부터 작정했던 일이 어느새 현실로 다가오고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한참을 응시하던 밀리안이 머리 장식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침대맡에 턱을 괴곤 깊이 잠든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연보라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뒤 드러난 푸른빛이 섞인 보라색 눈동자가 몽롱한 빛을 띠고 밀리안을 응시했다. 프레아의 눈이 깜박였다.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밀리안의 말에도 프레아는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눈을 반쯤 감았다 떴다. 잠결에 소리를 듣고 깬 모양이었다. 프레아가 손을 들어 밀리안의 볼을 꾹 눌렀다.
“어라, 진짜…… 네.”
“그럼 가짜일까 봐?”
“헤헤.”
프레아가 흐물거리는 얼굴로 헤실헤실했다. 싱겁게 웃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밀리안이 제 볼에 닿은 손가락을 붙잡고 가볍게 쪽쪽 입을 맞추었다.
프레아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서랍 위에서 반짝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머리 장식에 시선이 옮겨졌다.
“밀리안. 저 머리 장식 선물할 때, 무슨 생각 했어?”
“……당장 입 맞추고 싶다?”
“무어?”
프레아가 괴상한 소리로 대꾸하더니 까르르 웃었다. 장난기가 묻어난 말투였다. 방 안에 프레아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손을 가볍게 붙들고 입을 열었다. 짓궂게 대꾸하던 전과 달리 제법 진지한 어투였다.
“그냥, 이런 거라도 해서 네가 나를 좀 봐줬으면 싶었어. 그때 넌 내가 뭘 해도 동생으로 봤잖아. 이렇게 손가락에 입이 닿아도 심드렁하고.”
밀리안은 그때가 떠올랐는지 프레아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웃느라 잠이 완전히 달아난 프레아가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조금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언제부터 좋았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뭐야, 그게.”
밀리안이 프레아와 눈높이를 맞추려 일어나 상체를 기울였다. 무게가 매트에 쏠리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처음엔 귀찮다고 생각했어. 자꾸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어오니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훑었다. 촉촉한 시선이 프레아에게 닿았다.
“근데 언제부터인가 자꾸 예뻐 보이잖아, 네가.”
“아깐 원래부터 예뻤다며.”
“그건 객관적인 거고. 이건 내 눈에 네가 미치도록 예뻐 보였다는 말이야.”
“아아, 그럼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객관적으로 예뻤다, 이거네? 지금은 더 예뻐 보여서 미칠 것 같고?”
프레아가 신이 나서 재차 확인했다. 밀리안은 어쩐지 들떠 있는 그녀가 귀여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시선을 재차 맞추며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우물집에서 잠시 비 피했던 거 기억해?”
“당연하지, 그날 네가 나보고 누나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진짜 진짜 상처받았다고.”
프레아가 그때를 떠올리며 씩씩거렸다.
‘그땐 너무 놀라고 실망해 한동안 정신도 못 차렸었지.’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의 입술에 가만히 도장을 찍듯 눌렀다 떨어졌다. 그로 인해 순해진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도 예뻤어, 넌.”
“응?”
“자꾸 내 눈에 예뻐 보여서, 누나라고 하기 싫었어.”
“아…….”
“아마 누가 찾으러 안 왔으면 실수했을지도. ……생각해 보니까 그때, 나 너한테 입 맞추고 싶었던 거 같아. 이렇게.”
밀리안이 프레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어느새 프레아의 얼굴에 홍조가 드리웠다. 조금 쑥스러웠다. 그때 그렇게 폭탄선언을 했던 게,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던 게, 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싶어서.
아마도 그날 10살짜리 남자아이의 마음에 심어진 씨앗은 고이고이 간직되었던 모양이다. 그게 싹을 틔우고, 기특하게도 계속 살아냈나 보다. 밀리안은 그 옆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물을 주고, 햇빛을 고르게 비춰주며 시들지 않게 보살폈나 보다.
그러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커졌나 보다. 계속해서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면서, 그렇게 꽃이 필 때를 기다렸나 보다.
바로 지금처럼.
“언제부터 널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때에도 이미 시작했던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밀리안의 담담한 고백이 마음에 와닿아 울렸다. 어쩐지 그 입에 키스하고 싶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에게 가볍게 쪽 입을 맞추었다. 밀리안도 답하듯 가볍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런 밀리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프레아가 새로운 걸 깨달은 사람처럼 말했다.
“나 의외로 집착하는 타입인 거 같아.”
“왜?”
갑작스러운 프레아의 고백에 밀리안이 되물었다. 프레아는 미간을 좁혔다 펴곤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마릴린 영애가 너한테 관심 보이니까 막 속에서 불이 확, 타오르는 것 같았거든. 마음 같아서는 네가 내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어.”
“어쩐지 지나치게 웃더라.”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프레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손에 제 손을 포개며 말을 이었다.
“너는 왜 이렇게 잘난가 싶고, 아무도 네 진가를 몰랐으면 싶고, 나만 네 모든 걸 다 알고 싶고……. 이런 생각하는 내가 좀 이상한 거 같았어. 나만 이래?”
“글쎄. 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게 너무 오래돼서.”
“응?”
프레아는 여상한 어투로 대꾸하는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글라디안이 떠오르고, 에리카가 생각나고, 게라가 떠올랐다. 밀리안도 저와 같았던 모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것. 남이 보면 지나치다 해도 서로에겐 서로가 가장 중요하길 바라는 것. 프레아는 저나 밀리안이나 둘 다 똑같이 특이한 사람들 같아서 웃음이 났다.
그때, 밀리안이 손에 깍지를 낀 채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러니 프레아. 혹여 다른 놈이 만나고 싶어지면 나보다 센 사람을 만나. 안 그러면 내가 그 새끼 죽여 버리고 너한테 매달릴 거 같거든.”
“……너보다 센 사람이 있기는 해?”
프레아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까르르 웃었다. 밀리안은 조금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꾸했다.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러니까 딴 데 눈 돌리지 말고 나만 봐.”
“글쎄, 나는 만약에 네가 다른 여자 만나는 걸 보면 그 여자보다 널 죽일 거 같은데.”
프레아가 실실 웃으며 살벌한 말을 하자 밀리안이 중얼거렸다.
“무섭네.”
“그리고 나도 슬퍼서 죽을 거야.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다른 데 눈 돌릴 생각 마.”
이어진 말에 밀리안의 두 눈이 짐짓 커졌다. 이내 그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전보다 깊어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밀리안이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다른 여자한테 반할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모르는 거지.”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너는 그냥 나만 죽여. 그리고 보란 듯이 살아. 바람난 놈 뭐가 좋다고 따라 죽어.”
“넌 나한테 매달린다며. 너는 뭐가 좋다고 바람난 날 좋다고 붙잡아?”
“난 너 아니면 안 돼서.”
밀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목소리의 고저가 적당해서, 가만가만 울리는 그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내가 말했잖아, 넌 나한테 너무 자극적이라고.”
“…….”
“그렇지만 난 네가 옆에 있어야 안정감이 들어. 넌 충분히 날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니까. 너라면 내가 피에 미쳐서 날뛰어도 구해줄 수 있고.”
“어차피 혼자서도 잘 통제하면서, 또 겁먹었나 보네. 걱정 마, 정신 못 차리면 내가 아주 혼쭐내 줄게.”
프레아가 의지를 다지듯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불끈 쥐었다.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던 것도 잠시, 두 사람의 인영이 조심스럽게 겹쳐졌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며 그녀의 윗입술을 슬며시 훔쳤다. 열린 입 사이로 달콤한 것을 한껏 맞대며 아주 천천히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프레아의 상체가 점점 뒤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완전히 포개어지고, 달빛만이 그 그림자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 서로를 얽었다. 간간이 들리는 숨소리는 무척 달뜨고 촉촉했다.
가족으로 만나 서로를 알아가기도 버거웠던 날들이, 사랑을 먼저 깨달은 한 남자의 무모한 계획들이, 한 여자의 고민 끝에 결국 인정한 사랑이, 열매를 맺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밤이었다.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두 사람의 여정은 차마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앞으로도 더 반짝거릴 날들이 그들에게 함께하길.
달이 소원을 빌기라도 하는 것처럼 힘껏 두 사람을 비추었다.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