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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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리 장편소설
목차
17장 반란
18장 끝은 또 다른 시작
외전1 친구의 결혼식
한참 절망하던 프레아가 울음을 그쳤다.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니었다. 프레아는 온 정신을 집중해 무의식에서 깨어나려 힘썼다. 깨어나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돌아온 기억 속에서 그레이가 마지막에 이동시킨 그 돌은 익숙한 정령석이었다. 바로 에리카에게 받았던 그 붉은 돌이었다. 일어나면 그걸 전해줘야 했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정령석이었다. 프레아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브레이크가 찾던 무엇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토토도 자유롭게 해줘야지.’
수년간 인형에서 피어싱으로 넘나들며 힘의 제약을 받았던 토토. 그가 항상 프레아에게 제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거라 했던 것을 떠올렸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자유로워진 토토가 의기양양해져 있을 것을 상상해서였다. 프레아는 깨어나기 위해 온 힘을 집중했다.
* * * * *
회오리바람은 멈출 줄 몰랐다. 브레이크가 더는 한계라고 여길 즈음 갑자기 새까만 어둠이 회오리바람을 감싸 안았다. 자세히 보니 검붉은 오러였다.
브레이크가 얼른 뒤돌자 심각한 얼굴은 한 밀리안이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열심히 막으려 해도 채 막을 수 없어 계속해서 밀려났었다. 그랬었는데, 밀리안이 힘을 쓰자마자 손쉽게 멈추었다.
이제는 바람의 영역이 더는 확장되지 못하고 오러에 막혔다.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잘못하면 인명 피해로도 이어질 일이었기에 브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괴물 같은 힘을 자랑하는 밀리안을 응시했다. 그런 브레이크를 향해 밀리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윈드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프레아 아가씨께서 마탑으로 가시는데 상태가 영 안 좋다고요.”
“뭐? ……그럼 프레아가 저 속에 있다는 거야?”
밀리안이 당장에라도 들어갈 것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브레이크가 침착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네, 프레아 아가씨가 폭주해서 만들어진 홀(Hole)입니다. 지금 매튜가 아가씨를 말리기 위해 홀에 들어간 상태고요.”
“……그가 왜?”
밀리안이 그곳에 발을 들이려다 말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밀리안은 그레이가 프레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레이가 목숨이 간당간당한 현장에 뛰어든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
시간이 없었다. 밀리안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브레이크를 뒤로한 채 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니다. 얘기는 나중에 듣겠다. 우선 내가 들어가서……!”
그 순간 바람이 점점 약해지더니 홀의 범위가 줄어들었다. 밀리안이 두 눈을 부릅뜨며 홀 안의 상황을 보려 했다. 바람은 어느새 살랑살랑 불었고 오러로 막지 않아도 더는 영역을 넓힐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매튜가 성공한 모양입니다.”
브레이크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바람결에 꽃잎이 나부꼈다. 비가 내리듯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들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매튜가 축 늘어진 프레아를 품에 안은 채 나오고 있었다.
프레아의 영류는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바람이 완전히 멈추었다. 매튜도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브레이크가 프레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프레아의 귀에 늘 걸려 있던 피어싱은 온데간데없었다. 윈드의 기운 또한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윈드가 페널티를 받고 스스로 계약을 해지한 것 같다.”
그때 매튜가 브레이크를 향해 침음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더 이상 프레아는 정령사가 아니었다. 아니, 계약한 정령이 없는 정령사라는 말이 더 알맞았다.
윈드가 받은 페널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프레아의 정령이 아니었다. 윈드는 어느 곳에도 보이질 않았다.
* * * * *
루이스는 곧 무너질지도 모를 마탑에서 에시드의 성으로 이동되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에시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프레아의 잔상에 괴로웠다. 에시드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질 않았나?”
“글쎄요. 잊어버린 기억을 억지로 회상시킨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거겠죠.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뭐, 아마도요.”
루이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남은 마법진 조각을 달라는 의미였다. 에시드가 품에서 나머지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곤 조금 메마른 목소리로 당부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마법이야.”
“그래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낫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신 뵙지 말죠, 우리.”
루이스가 잽싸게 조각을 낚아챘다. 그녀가 그간 반란군을 통해 거래한 것은 금지된 마법을 위한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마법진까지 모두 수중에 떨어졌다.
루이스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찼다. 드디어 모두 모았다. 이제는 그를 살릴 수 있었다. 순간 일그러진 윈드의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조소했다.
그래도 신이 저를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복수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동안 아예 보이지 않아 그새 소멸이라도 한 줄 알았다. 루이스가 입을 어물거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비넷 마그누스. 그는 정령 협회를 창시한 장본인이자 루이스의 자랑스러운 연인이었다. 물론 모두 루이스 안이 세리나 마그누스였을 때의 일이었다.
루이스는 이상하게도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태어났다. 아마도 죽으며 발동시킨 마법 때문이리라.
그녀는 전생인 세리나일 때 마탑과 상관없는 마법사였다. 그리고 현재의 그녀는 정령사였다. 그렇게 경멸했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정령사가 되었을 때 루이스는 기뻤다.
루이스는 비넷에게 이미 정령사에 관한 정보를 많이 들은 탓에 훈련하는 것이 용이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불의 정령과 계약하고 협회에 소속되었다.
그 뒤로 계속 윈드 샬로만데라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협회에 그에 관한 기록이 많은 이유는 순전히 루이스 덕이었다.
윈드 샬로만데라. 과거, 비넷의 정령이자 지금까지 발견된 정령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고 불리는 자. 모든 정령사들이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정령이 바로 그였다.
루이스 안은 그가 비넷이 죽은 뒤에 잠적했다고 해서 조금 기대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슬프기는 했던 모양이지, 하고. 하지만 그 오만한 정령에게 비넷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루이스는 그에 대한 기록을 살피고 경악했다. 그가 비넷을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는 내용을 발견해서였다. 물론 그 뒤로 윈드가 다시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잊어버렸다고? 그 선량한 사람을 결국 살리지 못해 죽게 했으면서 감히, 잊어버렸다고?’
루이스는 참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애도조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그가 가여웠다. 자신이 죽기를 기다린 것처럼 곧바로 기억을 지워 버린 정령인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은 비넷은 정령을 보호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며 제 평생을 바쳤다.
루이스는 몰려오는 혐오감에 정령을 속박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간을 하등 생물 취급하는 정령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확인시켜 줄 차례였다.
루이스는 다시 나타날 윈드를 기다리며 연구를 진행했다. 그랬었는데…… 그가 하필 아직 각성도 제대로 못 한 풋내기 어린아이 앞에 나타날 줄은 루이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루이스는 정령이 싫었지, 정령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혹여 질 나쁜 마탑주에게 걸릴까 염려해 어린 프레아를 숨겨주었다. 그녀에게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프레아의 앞에 윈드가 나타났을 때, 루이스는 나쁜 마음을 먹었다. 어디 한번 너도 망각이라는 고통을 느껴보라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지워 버렸다. 윈드가 비넷을 쉽게 잊어버린 것처럼.
루이스는 윈드가 제 계약자에게 속박되어 평생 고생하길 바라며 계약 과정에 개입했다. 그 결과 그 오만했던 정령이 애착 인형 따위에 봉인된 것을 알았을 때는 희열을 느꼈었다.
어차피 정령은 인간 없이는 힘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면서. 자신이 인간의 위인 척 잘난 체하는 것이 역겹고 아니꼬웠다. 비넷처럼 주인이 폭주하다 죽는 걸 또 묵인해 보라지.
루이스는 알고 있었다. 정령 쪽에서 강제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윈드는 그러지 않았고, 그 때문에 비넷은 죽어버렸다. 비넷이 폭주하여 죽어가는 순간에도 윈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영류의 폭주는 본인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예 폭주하지 못하게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하다. 폭주가 시작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으니까.
루이스는 에시드에게 거짓말을 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일이 아니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폭주라는 건 애초에 없었다. 폭주는 영류가 모두 고갈되고 생명까지 잡아먹은 뒤에야 해지되는 것이니까.
루이스는 그녀가 죽든, 윈드가 계약을 해지해서 말리든 관심 없었다. 아니, 윈드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을 테니 그녀가 죽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강제 해지할 경우 정령이 페널티 받는다고 들었으니까. 그걸 알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다. 루이스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야 윈드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은 거라 확신했다. 페널티를 받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쁜 새끼.”
루이스가 성을 완전히 빠져나오며 낮게 욕지거리했다. 어차피 마지막 임무는 프레아의 무력화였고, 루이스는 약속을 지켰다. 필요한 마법진도 받았으니 이제 제국도 안녕이었다. 루이스는 미련 없이 수도를 빠져나갔다.
17장 반란
뒤늦게 머레니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감옥이 비워진 상태였다. 머레니가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머레니뿐만이 아니었다. 성에 구금되어 있던 에시드 대공도 사라졌다. 그의 최측근인 데오 라즐리도 소리 소문 없이 없어진 상태였다.
결국 황제는 더 이상 이 일을 묵인할 수 없었다. 황실은 에시드 대공이 반란군의 수장임을 공표했다. 그에게 준 마지막 기회는 그가 사라짐으로써 완전히 박살 났으니까.
그날 이후로 황실의 경비는 강화되었다. 황실은 기사들을 풀어 갑자기 사라진 귀족들을 추적했다. 다만 아쉽게도 황제는 몰랐다. 궁 안에 있는 절반가량의 귀족이 이미 반란군에 소속되어 있음을.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황궁을 드나들었다. 그러곤 황실 안 상황을 에시드에게 매일 보고했다.
* * * * *
불사조 기사단의 대표 단장인 진 에드모어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황제 옆에서 상시 대기했다.
그다음 기수의 불사조 기사단장인 밀리안 테일러스는 현재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 잠시 작전에서 빠진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그날 폭주했던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때문이었다.
프레아가 이상했다. 의식은 곧 돌아왔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말뿐만 아니라 마치 영혼 없는 인형같이 굴었다. 누군가가 밥을 먹여줘야 먹었고 눈을 감겨줘야 잠을 잤다.
본능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의지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나에 의해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생기 없는 프레아의 모습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그 옆에서 밀리안이 미쳐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아는 다시 에드모어 성에 머물렀다. 밀리안 역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영류가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계약이 해지되어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태인 거지?’
‘아무래도 코어에 문제가 생겨 정신적 타격을 입은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스스로 이겨내지 않는 한 평생 저 상태로 지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브레이크는 프레아를 발견한 자리에서 곧바로 상태를 확인한 후 진단을 내렸다. 그 말에 밀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프레아를 안아 들고 에드모어 성으로 가버렸다.
에드모어 성에 있던 에밀리는 브레이크에게 프레아의 상태를 전해 듣곤 혼절했다. 그 뒤로 밀리안은 프레아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그녀가 깨어나기를 바랐다.
반란군 때문에 상황이 심각하니 입궁하라는 황제의 명령에도, 걱정하는 친구 클로드의 말에도 밀리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나마 에드모어 공작이 대신 황제에게 사정하여 벌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마저도 오래 끌다간 황명을 어긴 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요지부동이었다. 프레아에게만 말을 걸고, 프레아 하고만 밥을 먹고, 프레아가 잠든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밀리안까지 말라가고 있었다. 이는 반란군에게 있어 뜻밖의 호사였다. 그들은 아예 대놓고 황성을 치겠다는 경고장까지 보냈다. 수도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밀리안이 힘없이 누워 있는 프레아를 천천히 일으켰다. 프레아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밀리안을 반겼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의 뺨을 쓸며 인사했다.
“오늘은 눈도 깜박거려 주네. 내 걱정하는 거야?”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는 반응이 없었다. 눈을 깜박이던 것은 우연이라는 듯이 그녀는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밀리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식이 없는 채로 움직이는 프레아가 더 건강해 보일 지경이었다.
프레아는 오늘도 싸우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뿌연 안개가 드리운 것 같았고, 입은 단단한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기류는 사전에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프레아는 답답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눈을 정령석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가능한 것은 가벼운 깜박거림 뿐이었고, 그마저도 한두 번이 한계였다. 밀리안이 적당한 온도로 적신 물수건으로 프레아의 얼굴을 닦았다.
옆에서 시에라가 대신하려 해도 밀리안은 듣지 않았다. 결국 시에라는 항의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방을 나서야 했다. 방 안에는 밀리안과 저뿐이었다. 밀리안이 모두의 출입을 거부하는 상황. 그나마 음식과 씻을 물을 가져오는 시에라만 간간이 오갔다.
브레이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그에게 밀리안은 배신감이라도 느끼는 것 같았다. 하필 그것이 일을 더디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브레이크에게 얼른 저 정령석을 전해줘야 하는데.’
오늘도 프레아는 무거운 몸과 머릿속을 힘겹게 부여잡으며 밀리안에게 브레이크 좀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물론 입은 여전히 무겁게 닫힌 상태였다.
“이상하지. 마치 네가 뭔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 내 착각인가.”
‘아니야! 착각 아니야, 밀리안!’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근래 열심히 눈을 깜박였더니 밀리안도 무언가 눈치를 채가는 모양이었다. 프레아가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깜박였다. 착각이 아니라고 전달하기 위해. 갑자기 프레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깜박이려 애쓰는 걸 본 밀리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뒤 느릿한 움직임으로 프레아의 눈이 한 번, 두 번 깜빡여졌다. 밀리안이 놀란 얼굴로 프레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착각이 아니야?”
하지만 프레아는 더 이상 눈을 깜박일 수 없었다. 오늘 치 깜박임을 다 소진했는지 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밀리안에게 의사가 전달된 모양이다. 밀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금방 돌아올게.”
그러곤 방을 나갔다. 프레아는 그가 일으켜 앉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연하게 불어 들어왔다. 하지만 그냥 바람이었다. 토토가 아니었다.
프레아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속에 있는 프레아는 울상을 지었다. 무의식에 깊이 처박혀 있으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 이상 토토가 자신의 정령이 아니라는 것. 그날 이후로 토토가 사라졌다는 것. 강제로 계약을 해지한 탓에 토토에게 뭔가 페널티가 주어졌을 거라는 것.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 프레아는 토토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언령으로 그를 가둘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레이를 구해달라는 언령이 루이스의 방해를 받아 인형에 묶여 버린 것이었다. 원인을 알았으니 강제 해지를 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폭주하지 않았더라면.
루이스는 저가 폭주할 줄 알고 있었다. 폭주를 의도하고 일부러 한꺼번에 진실을 터뜨렸다. 토토의 말대로 조금만 진정한 뒤에 갔다면 좀 나았을까?
프레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괴로워졌다. 루이스가 토토의 풀 네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토토의 반응도 이상했다. 토토는 무언가 기억난 것처럼 그녀를 보며 경악했었다. 원래부터 아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토토는 그것을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루이스는 처음부터 그가 윈드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토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유도 루이스와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프레아가 한참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프레아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 * * * *
수장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반란군 내부. 마침내 에시드 대공이 황성을 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단 한 번의 기회만 남은 상황. 반란군들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늘 서로를 철저히 감추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을 모두 아는 것은 수장뿐이었다.
심지어 에시드도 수장이 되어서야 그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반란군은 모두 수도 안에 들어온 상황. 그들은 은신한 채 활동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전에도 갖은 변장으로 스스로를 숨긴 채 테러 행위를 일삼았다. 레이첼 소후작의 의식불명으로 황실 군사의 형편이 좋지 않은 이때, 하필 반란군 사이에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밀리안 테일러스가 전의를 상실하면서 반란군의 의견이 둘로 나뉜 것이다. 하나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황성을 쳐야 한다는 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예 방심한 틈에 그를 먼저 죽여야 한다고 했다.
후자는 이미 전부터 야금야금 황제파 귀족들을 암살하던 이들이었다. 암살에 익숙한 반란군 세력은 이때가 적기라며 성화였다. 이들 중에는 크로이드 가문도 섞여 있었다.
이와 달리 바로 황성을 쳐야 한다는 쪽에는 데오 라즐리가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맹수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고 맞섰다. 괜히 건드렸다가 그가 전의를 불태우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머레니는 그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긴 했지만 데오 라즐리 편에 기운 상태였다. 그녀는 밀리안이 얼마나 괴물인지 동생을 통해 익히 들었다.
늘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도모했던 사람들이라 그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시드는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었다.
어차피 목표는 황성. 에시드는 이왕 일으킬 반란이라면 아예 모든 반란군을 총동원해, 이와 관련된 귀족을 색출 후 무력화할 생각이었다.
수장이 되어서야 반란군의 규모가 꽤 큼을 알았다. 귀족들이 대거 섞여 있음을 알았을 때 에시드는 기함했었다. 본디 에시드는 형과 대척하는 체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황실이 피해를 입겠지만 잠정적인 위험 분자들을 그대로 두는 것보다 나았다. 쭉정이는 알맹이가 될 수 없는 법. 한 번 반란군은 언제든지 황실을 배신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최대한 알맹이의 피해는 줄이되 쭉정이는 예외 없이 불태워야 했다. 그러니 황실의 든든한 우방인 에드모어 가문의 피해는 에시드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에시드가 과열되는 대화를 만류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나도 데오 라즐리와 같은 생각이다. 그가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순 없지. 우리는 그가 잠잠한 지금을 노려 곧바로 황성을 친다.”
“이미 연회가 지난 시점부터 황실의 경계가 삼엄해졌습니다. 혹시라도 테일러스 후작이 중간에 개입하게 된다면 반란군의 피해가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빌리앙이 에시드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고 맞섰다. 사실 데오의 의견도, 빌리앙의 의견도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밀리안을 건드려서 황실에 가기도 전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고, 그를 무시한 채 황성을 쳤다가 뒤이어 참여한 밀리안으로 인해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몰살될 수도 있다.
물론 그가 참여하지 않아 큰 피해 없이 쿠데타에 성공한다는 희망적인 미래도 있다. 모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희망이 있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게 더 나은 법이다. 에시드가 제법 의연한 목소리로 빌리앙을 타일렀다.
“그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알지만 괜한 인명 피해를 갖고 황성을 치는 것보다 곧바로 황성을 쳐 수복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이 일의 책임은 모두 내가 질 것이니 더는 말리지 마라.”
“하나 이번 일은 단판에 승부가 갈립니다. 위험 분자인 테일러스 후작을 내버려 두는 것은……!”
“빌리앙 경. 당신 말대로 밀리안 테일러스를 먼저 쳐야 한다면 그 일은 누가 하나요?”
빌리앙이 계속해서 뜻을 굽히지 않자 지켜만 보던 머레니가 끼어들었다. 머레니의 말에 빌리앙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가 머레니를 여전히 의심하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아무리 마탑주의 협박을 받아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대도, 그녀는 반란군에 막대한 피해를 준 전적이 있다. 빌리앙은 그런 자를 이리 쉽게 받아준 에시드가 솔직히 이해되질 않았다. 그저 명령이기에 복종하고 있을 뿐.
“영애는 뒤늦게 들어와 모르겠지만 반란군에는 암살에 특화된 자가 많이 있습니다. 테일러스 후작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방심한 자는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빌리앙 경이야말로 테일러스 후작을 너무 얕보고 계시네요. 그 잘난 암살자가 모두 죽어야 정신을 차릴 요량이시라면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황실에서 죽으나 그의 손에 죽으나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지금 청룡 기사단을 무시하는 겁니까?”
빌리앙이 필터링 없는 머레니의 말에 버럭버럭했다. 머레니는 그런 빌리앙을 보고도 태연한 빛을 유지했다. 그녀의 동생은 망나니이긴 해도 마법 재능이 꽤 있는 아이였다. 그런 동생이 밀리안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들어와 여전히 무서워 벌벌 떤다.
그러니 고작 한두 명의 자객으로 그를 처리한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는 일반인이 아니라 에드모어 혈통을 아주 강하게 이어받은 자였다. 어릴 때 암살에 실패해 괜히 경계심만 늘어나게 한 건 반란군이었다. 그 뒤 그가 마수로 훈련하기 시작해 더 강해졌고.
게다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전해 들었기에, 차라리 이대로 가만히 있어 주길 바라며 황성을 치는 쪽이 나아 보였다. 물론 머레니가 반란군에서 쏙 빠질 예정이라 가능한 낙관이었다.
에시드 대공이 대피시킨 마법사들은 이미 새로운 마탑을 세울 계획을 짜고 있었다. 머레니는 수도의 경비가 삼엄해져 빠져나가지 못했을 뿐, 반란군이 황성을 쳐 수도의 경계가 허술해지면 곧장 수도 밖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예상보다 늦어지는 반란에 피 말리는 것은 머레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숨은 은신처로 가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시드 대공이 약속대로 마탑의 마법사들을 옭아맸던 족쇄를 해지해 주었다는 점이다.
마탑주가 된 에시드는 머레니가 프레아를 만나고 감옥을 빠져나온 순간, 마법을 해지해 주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여 계속 반란군을 도우라고 종용하면 어쩌나 했던 불안은 쉽게 풀렸다.
그는 가겠다는 마법사들을 말리지도, 압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겠다는 말을 반기는 것 같았다. 그녀로서는 사실 이제 그가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청룡 기사단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밀리안 테일러스가 강하다는 말이에요.”
“우리 청룡 기사단에도 그 못지않게 훌륭한 자가 많습니다. 아무리 그가 날고뛰었다 해도 현재는 침실에서 누이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당장 목을 따 오겠습니다.”
빌리앙이 우렁찬 목소리로 에시드에게 말했다. 에시드가 곤란한 빛을 띠자 데오가 빌리앙을 만류했다.
“자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무시할 상대가 아니네. 과거에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것을 기억하게.”
“차라리 그때 무모하더라도 다시 자객을 보내 죽였어야 했네. 지금은 너무 강하지 않은가.”
옆에 있던 다른 귀족도 데오의 말을 옹호했다. 또다시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원점이었다. 수년간 황실의 신경을 갉작갉작 잘만 긁던 반란군은 모아놓고 보니 서로 뜻이 달랐다.
물론 그들을 잘 회유하던 아네모네 황비의 부재 탓도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말솜씨를 지녔고, 반란군의 수장에 적격이었다.
“서로 뜻을 굽힐 수 없다면 과반수로 결정하도록 하겠다.”
에시드가 느릿한 말씨로 선언했다. 이때쯤이 자신이 나서야 할 타이밍임을 안 탓이었다.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수장의 뜻을 따르지요.”
에시드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도나도 동의했다. 계속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 되느니 그편이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빌리앙은 탐탁지 않아 했으나 수장의 말이니 따르겠다고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머레니는 에시드를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애초에 이렇게 쉽게 과반수로 할 거면 처음부터 그랬으면 좀 좋은가?
머레니는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냥 지도력이 없는 건지 매사에 어영부영. 그가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투표 결과는 간발의 차이로 황성을 곧바로 치자는 쪽이 뽑혔다. 빌리앙이 여전히 못마땅해했으나 투표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정말 이도 저도 안 되고 와해될 테니까.
얼마 뒤 반란군이 황성 주변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 * * * *
윈드 샬로만데라가 비넷 마그누스를 만났을 때는 꽤 젊었을 적의 일이었다. 물론 그 젊다는 것은 정령인 윈드의 기준이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죽고도 남을 나이였지만, 인간과 정령의 생리가 달라 가능한 계산법이었다.
윈드가 비넷을 만난 당시는 정령들이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희생되던 때였다. 정령 협회가 막 형성되려던 시절인지라 정령사들은 늘 숨죽이며 살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정령사로서의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 어려웠다. 혹여 눈치채더라도 훈련 방법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는 정령사들이 서로의 정체를 숨기며 살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
간혹 길드 같은 소규모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마법사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이래저래 따로 생활하는 게 익숙한 집단이었다.
물론 윈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들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의 윈드는 정령들이 마법사에게 잡히는 걸 한심하게 여겼다.
한마디로 오만했고, 윈드는 그걸 잘 알았다. 알고도 그럴 수 있던 것은 순전히 강한 능력 때문이었다. 당시의 윈드는 쉽사리 계약하지 않기로 유명한 정령이었다. 그와 계약하고 싶어 하는 정령사는 많았지만 그가 번번이 퇴짜를 맞히는 바람에 더 소문이 퍼졌다.
그를 만나는 것도 힘들뿐더러 만난다고 계약을 해주는 것도 아닌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는 세상을 혼자 사는 것처럼 재수 없게 굴었다. 하지만 오만할지언정 그럴 만한 능력을 지녔으니,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윈드는 애초부터 다른 정령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여타 바람의 정령이 산들바람이라면 그는 폭풍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법. 그래서 늘 윈드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말이 많았다. 도대체 저 재수 없는 정령이랑 계약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그런 윈드가 비넷 마그누스와 계약했을 때는 모두 놀랐었다. 비넷 마그누스는 겸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윈드와 달리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극도로 선량한 사람이었으니까.
윈드 스스로도 그와 계약한 것을 여러 번 후회할 정도의 선함이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이타심’이라 불렀으나 윈드 눈에는 그냥 호구 짓이었다.
“왜 그러고 살아?”
윈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윈드의 말에 비넷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도와주고 싶으니까.”
“도와줘 봤자 고마워하지도 않는 것들인데 뭘 도와줘.”
“고맙다고 인사받으려 한 일이 아니거든.”
“염병.”
윈드가 짤막한 단어를 툭 내뱉곤 꼬리로 탁탁 서류들을 흩어버렸다. 윈드의 심술에도 비넷은 아무 말 없이 배시시 웃으며 떨어진 서류들을 주웠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윈드가 그를 유독 답답해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도움을 받는 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도와줬으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더 도와달라 칭얼거려, 안 도와주면 욕해. 도무지 도와줄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잘해주는 것이 윈드는 못마땅했다.
그게 호구 짓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게 호구 짓이란 말인가. 물론 개중에 정말로 고마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가 태반이라는 점에서 윈드는 비넷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윈드가 보기에 그들은 그냥 갱생 불가능했다. 그런 자들을 도와주는 것은 괜한 힘만 빼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넷이 호구 짓을 할 때마다 윈드는 그를 못살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비넷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들이 사실은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생계의 위협 없이 살 수 있었다면 그들도 충분히 저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을 옹호했다.
웃기고 있네.
윈드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합리화였으니까. 비넷도 그다지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말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그는 모르는 걸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부유해져도 가난한 사람처럼 군다. 적든 많든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돕게 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비넷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다.
윈드는 그가 바보같이 굴 때마다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비넷의 일을 계속 도왔던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윈드에게 다가오는 정령사는 대개 바라는 것이 많았다.
바람의 정령에게 있는 특유의 능력, 바람의 기억을 읽는 것 때문이었다. 윈드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억을 훑을 수 있었는데, 바람의 정령 대부분이 아주 작은 양만 훑을 수 있는 것과 비교도 안 되었다.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크게 덴 윈드는 그 후 힘을 숨겼다. 굳이 알려봤자 망가지는 계약자만 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넷은 그런 힘을 알게 되고도 굳이 제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윈드가 보는 내내 답답해서 알려주는 쪽에 가까웠다.
비넷은 여태 윈드가 만났던 인간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지금껏 만난 사람 중 가장 몸과 마음이 건강했다. 그래서 윈드는 이왕이면 그와 오래오래 계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윈드의 바람은 비넷이 약혼자를 데려오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비넷이 망가질 일도 없었는데…….’
비넷이 데려온 여인은 고아에 소매치기를 일삼으며 살던 빈민가 여인이었다. 정령들은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윈드는 세리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위선에 속지 않았다. 오히려 보자마자 비넷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판단했다. 그녀의 영혼은 무척 계산적이었으니까.
“반가워요. 세리나예요.”
그것이 세리나 마그누스이자 지금은 루이스 안이 된 정령 협회장과 윈드의 첫 만남이었다.
* * *
방으로 벌컥 들어온 것은 밀리안과 브레이크였다.
‘그렇게 들여보내 달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갑작스럽게 끌려온 브레이크는 황당했다. 결국 정령사를 잘 아는 건 정령사뿐이다. 그들이 정령사에 관한 정보를 외부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니까.
프레아는 반가운 마음에 눈을 빛내려 했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뚱한 반응이었다. 소음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으나 프레아의 눈은 초점이 하나도 없었다. 브레이크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들리십니까?”
“…….”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 깜박임도 겨우 했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브레이크가 멀뚱히 프레아를 보고만 있자 밀리안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의사를 전달하는 데 제약이 많은 것 같다. 눈 깜박임도 힘겹게 하고 있어.”
“도련님의 말에 반응을 보이긴 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확실해.”
밀리안이 브레이크가 아닌 프레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브레이크는 그런 밀리안을 보며 낮게 한숨 쉬었다. 밀리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계속 싸우고 계신 것 같습니다. 좋은 조짐입니다.”
“……다행이다.”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먹먹하게 하는 음성이었다. 밀리안의 처연한 얼굴에 브레이크가 충고했다.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화내실 겁니다. 도련님이 이러고 계신 걸 누구보다 슬퍼할 분이시니까요.”
“차라리 화라도 내주었으면 좋겠어.”
밀리안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저 바보가 고집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도무지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프레아가 낑낑거리며 불만을 표시하려 했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레스트는 일종의 잠정적 휴식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영류가 스스로 정상화되지 않는 이상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잔뜩 굳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밀리안은 그런 절망적인 소견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브레이크는 이왕 프레아를 만난 김에 그녀의 영류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려 손을 대었다. 맑고 풍부했던 영류는 여전히 탁했고, 그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씩 정화가 되어가는 것 같긴 했지만 더디기만 한 속도였다. 이 상태라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럴 때 근처에 계약하지 않은 정령이라도 있다면 일시적인 동화를 이용해 속도를 높일 수 있을 텐데…….’
아예 정화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라면 모를까, 미약하지만 정화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라 해볼 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선례가 있기도 했고.
문제는 그 정령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나타나거나 발견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발견된다 한들 도와줄지도 미지수였다. 브레이크가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정령석이라도 가지고 와서 시도를 해봐야 하나.”
“지금 뭐라고 했어?”
밀리안은 브레이크가 지나가듯 내뱉은 발언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밀리안을 보더니 고개를 도리질하며 답했다.
“그냥 가설입니다. 예전에 어떤 정령이 계약하지 않은 정령사의 레스트를 직접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물론 계약하지 않은 정령이 정령사를 도와주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라, 혹시 정령석으로도 가능할까 생각한 것뿐,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네.”
밀리안이 브레이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브레이크는 그런 밀리안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는 그 정령석조차 현재 없다는 겁니다. 협회에 요청하자니 그들이 정령석에 뭔 짓을 할지 모르니 섣불리 행동하기엔 위험부담이 크고요.”
브레이크의 부정적 반응에 밀리안은 묵묵부답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브레이크는 반응 없는 밀리안에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우선 제가 수소문해서 정령석을 구해보겠습니다. 효과가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그럴 것 없어. 바로 근처에 있으니까.”
“예?”
밀리안이 브레이크의 말을 끊었다. 브레이크는 의아한 빛을 띠었다. 정령석은 그렇게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밀리안은 정령사도 아니었으니 그가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못 믿는 기색이 역력한 브레이크를 뒤로한 채 밀리안이 화장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화장대 앞에는 이미 완연한 붉은 돌이 된 정령석이 있었다. 투박하게만 보이던 돌은 어느새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 돌이 정령석이라는 걸 지난번 프레아의 방에 왔을 때 알았다. 밀리안이 붉은 돌을 손에 쥐고 브레이크에게 되돌아갔다.
“프레아가 발견해 보관해 둔 정령석이니 안전할 거야.”
“이, 이건……!”
브레이크는 붉은 돌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그냥 정령석을 보고 놀란 사람치곤 과장된 반응이었다. 하지만 프레아에게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밀리안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절박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가설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서 프레아를 되돌리고 싶었다.
“뭐해, 받지 않고?”
밀리안이 붉은 돌을 브레이크의 앞으로 쭉 내밀며 받으라고 손짓했다. 브레이크는 그것을 넋이 나간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찾았던 돌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브레이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걸까.
이미 협회장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굳이 복수하지 않아도 협회는 무너질 예정이었다. 그들이 반란군을 도왔다는 정황이 모두 나온 상태이니 당연한 결말이었다.
이미 황실에서 협회를 통제하고 나선 상황. 그러니 더는 브레이크와 그레이가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스승님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이 저 속에 담겨 있었다.
스승님의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어떤 진실을 알게 되어 숙청당해야만 했는지 이제 밝혀질 때였다. 브레이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붉은 돌을 건네받았다.
붉은 돌이 브레이크의 손에 닿자마자 웅웅 울리더니 팟 하고 붉은빛을 터뜨렸다. 스승님이 걸어둔 언령은 바로 브레이크 자신이었다.
* * * * *
어두운 수도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른 것은 늦은 저녁의 일이었다. 황성에 때아닌 화재가 발생했다.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마수인지 뭔지 모를 괴물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키메라를 앞세워 반란군이 총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반란의 시작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황성 안이었다. 황성 안에 있던 반란군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철옹성 같던 황실의 경계가 허무하게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몰아닥친 키메라 군단은 기이한 정령술을 사용하여 황궁의 기사들을 압도했다. 실패작에 가까운 그들이라 얼마 안 되어 터지기 일쑤였으나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키메라가 폭발하면서 황성에 불이 붙었고,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같이 죽어 나갔다.
에시드는 데오 라즐리와 빌리앙 크로이드의 엄호를 받으며 황성으로 곧장 들이닥쳤다. 청룡 기사단이 모두 반란군 쪽에 속한 걸 본 황궁 기사들은 기함했다.
특히 반 가문의 기사들이 배신감에 찬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청룡 기사단은 불사조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신임하는 기사단이자 명망 높은 곳이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 라즐리 가문이 대놓고 아네모네 황비 쪽임을 드러내는 편이었다면 크로이드 가문은 철저히 반란군과의 관계성을 차단한 쪽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들은 반 가문과 가장 가깝게 교류했다.
빌리앙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의 기사들을 베던 중, 저 멀리서 저를 흉흉한 기세로 노려보는 남자를 발견했다. 반 공작이었다. 현 황태자의 든든한 외척이자 크로이드와는 우호 관계에 있는 가문의 가주.
“네가 그쪽일 줄은 몰랐구나.”
반 공작이 애써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눈에는 살기가 역력했다. 그들 주변으로 기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반 공작이 냉철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기사를 단칼에 베었다. 빌리앙은 그를 향해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공작께서 그리 둔하시니 당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쪽이었으니까요.”
“네놈이 감히……!”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반 공작과 빌리앙의 검이 부딪쳤다. 둘 사이로 흉흉한 검기가 오갔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들리는 소음이 드세졌고 어느새 황성을 잔뜩 어지럽혔다.
데오 라즐리는 뒤에서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에시드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검술과는 거리가 멀었고, 무력보다는 지력을 사용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인지라 후방에 빠져 있었다.
펑, 하는 폭발음이 계속되고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역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에시드가 한껏 피바람이 불고 있는 현장을 유유히 지나쳤다. 그의 목표는 이런 조무래기가 아닌 탓이었다.
“황제는?”
“지금 찾고 있습니다!”
에시드의 물음에 옆에 있던 기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에시드는 황성을 훑으며 형이 있을 법한 곳을 생각했다. 형이라면 자신이 왔다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 그가 잰걸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그레이가 불 꺼진 방 안에서 불을 켤 생각도 않고 고뇌에 빠져 있었다. 플라리스는 그의 부탁을 받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레이가 초조한 마음으로 플라리스의 귀환을 기다렸다.
홀에 들어가 프레아를 구하려 했을 때, 그는 커다란 늑대와 마주쳤다. 평범한 정령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압도적인 힘. 같은 정령인 플라리스 역시 그 엄청난 위세에 움찔했었다.
프레아와 대련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막혔던 힘이 완전히 해지된 것처럼 윈드는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강렬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힘이라 그런지 윈드는 제힘을 제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윈드는 그레이가 프레아의 홀에 겁 없이 들어서자 낮게 말했다. 마치 귀에 대고 왕왕거리는 것처럼 웅장한 목소리였다.
‘네가 올 곳이 아니다.’
‘프레아는 어디 있습니까?’
그레이는 그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아를 찾았다. 그의 물음에 윈드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윈드가 가리킨 곳에는 프레아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아직은 가까이 가면 안 돼.’
탁하게 울리는 목소리. 윈드가 프레아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며 그레이에게 당부했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윈드가 혼잣말 같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망할 녀석 때문에 기억하고 싶지 않던 것까지 모조리 생각났어.’
‘……예?’
뜬금없는 말에 반문하자 윈드가 몸을 한 번 시원하게 털며 말했다.
‘바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 그 뒤에 옮기면 안전할 테니까.’
‘가려는 겁니까? 이대로?’
그레이가 사라지려는 윈드를 붙잡았지만 그는 가볍게 뿌리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고 얌전히 붙어 있어라.’
‘…….’
‘그래야 나도 프레아를 볼 면목이 생기거든.’
윈드가 커다란 앞발로 그레이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매만졌다. 퍽 다정한 손길에 그레이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뒤 아차 하는 사이에 윈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레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플라리스를 통해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의 흔적은 사라진 뒤였다. 때마침 수도 안은 반란군 일로 경계가 삼엄했다. 언제 터질지 모를 내란에 수도 안은 긴장감이 도사렸다.
협회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수배 중이던 간부가 대거 붙잡혔고, 협회가 마탑의 정령 실험을 도운 게 사실임이 드러났다. 이상한 점은 잡혀 온 협회 간부들이 하나같이 협회장을 욕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황실이 협회를 감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언령 연구자의 숙청 사건까지 언급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숙청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모두 스승님의 정령이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 없이 그 일까지 완벽히 밝혀낼 수는 없을 터. 그레이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거 같아 조바심이 들었다.
“그레이.”
그때 방 안에 때아닌 꽃비가 흩날렸다. 그레이 주변에 꽃잎이 모여들더니 사람 형상이 되었다. 그레이는 플라리스가 가져온 소식이 궁금해 벌떡 일어났다.
“찾았어?”
“찾긴 찾았는데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레이의 추궁에 플라리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 순간 프레아의 방 쪽에서 강한 빛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창문 틈으로 보였다. 붉은빛이 흡사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놀란 그레이가 플라리스의 뒷말을 채 듣지 않고 내달렸다. 플라리스는 그를 따라갈 생각도 않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푹 쉬며 뒤따라갔다.
그레이가 방에 도착했을 때는 빛이 아주 작은 불덩이로 변한 뒤였다. 붉은 돌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작은 불덩이에는 이상하게도 눈, 코, 입이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사이에 구멍이 뻥뻥 뚫린 형상이었다.
“블레이즈?”
그레이가 불덩이를 보자마자 낮게 읊조렸다. 블레이즈는 그레이의 몰골을 보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꼴은 또 왜 그러냐, 너.”
아닌 게 아니라 그 곱던 피부가 거무튀튀해지고 이상한 문신이 잔뜩 새겨진 것도 모자라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레이가 멋쩍었는지 뒷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찾아다녔던 정령이 갑자기 제 발로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셨어.”
“뭐?”
그레이가 뜻밖의 말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블레이즈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 프레아 주변으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비명도 못 지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정화에 대해 전해 들은 밀리안은 가만히 있었다. 그레이 역시 뒤이어 프레아의 털끝 하나도 타들어가지 않음을 확인하곤 상황 파악을 끝냈다.
“어휴,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영류가 이 모양인 거야, 얜?”
블레이즈가 프레아 주변으로 불길을 치솟게 하며 말했다. 프레아의 몸이 불길을 받아들이듯 꺼졌다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윈드의 계약자거든.”
“설마 윈드 샬로만데라가 다시 나타났다고?”
블레이즈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브레이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블레이즈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그럼 그 여잔 어딨어?”
“그 여자라니?”
“세리나 마그누스 말이야.”
“무슨 소리야? 세리나 마그누스라면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잖아.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기억에 문제 생긴 거 아니야?”
“그 세리나 마그누스가 루이스 안이라고 이 멍청아!”
블레이즈가 소리를 빽 질렀다.
‘루이스 안이 세리나 마그누스라니?’
브레이크는 블레이즈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세리나 마그누스’는 협회의 창시자인 비넷의 부인이자 그를 죽게 만든 원흉인 탓이었다.
그 사건 이후 윈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로 간간이 그를 보았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실제로 그를 만난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브레이크도 프레아를 알고 난 후에야 윈드를 만났다. 브레이크가 블레이즈에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데 에밀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밀리안!”
에밀리의 호령에 밀리안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
“황성이 공격당했다. 아무래도 반란군이 내부에 잠입했던 모양이야. 서두르지 않으면 네 아빠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
에밀리의 성화에도 밀리안의 발은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에밀리가 계속해서 잡아끌었지만 밀리안은 요지부동이었다. 프레아가 일어날 때까진 한 발짝도 떼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한참 에밀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블레이즈가 밀리안을 향해 뚱하게 말했다.
“얘가 그러는데, 너 자꾸 그런 식으로 고집부리면 결혼 안 해준대.”
“……!”
밀리안이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블레이즈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프레아가 말했다니. 밀리안의 반응에 블레이즈가 퉁명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일시적인 공명 상태라 쟤가 하는 말 다 들리거든. 아, 잠깐만. 뭐라고? ……뭐? 크큭, 너 진짜 웃긴다.”
블레이즈가 프레아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홀로 킥킥거렸다. 그에 놀란 것은 밀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에밀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프레아가 말을 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결혼이라니? 그럼 이미 둘이 좋아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정리되지 않는 것들을 갈무리하던 중 에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시선은 활활 불타고 있는 프레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내 그녀가 절규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프레아!”
* * *
프레아는 갑자기 쏟아진 불길에 놀란 얼굴을 했다. 곧이어 무의식 속으로 불덩이가 갑자기 뛰어들어 왔다. 뭔가 공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한 것이 만지면 무척 뜨거울 것 같았다.
-너 뭐야?
-초면에 반말이냐?
프레아의 물음에 블레이즈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프레아는 설마 제 목소리가 들릴 줄은 몰라서 움찔했다.
-미안, 아무도 내 목소릴 못 들어서…….
-그러면서 왜 계속 반말인데?
-갑자기 존대하면 그것도 좀 이상해서. 왜? 싫어?
-됐어. 상관없으니까.
프레아의 물음에 블레이즈가 귀찮은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존댓말을 하든 반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프레아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만난 것이 기뻤다.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답답한 것은 프레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프레아의 영혼이 헤헤거리자 블레이즈가 말했다.
-뭘 또 좋다고 쪼개.
-말 되게 험하네.
-너도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뭘.
프레아의 투덜거림에 블레이즈가 킥킥거렸다. 그러던 와중, 문이 벌컥 열리며 그레이가 들어왔다. 프레아는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에 움찔했다. 기억을 되찾고 난 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온몸에 있는 문양에 가슴이 아팠고, 얼굴을 가린 가면에 서글퍼졌다. 나중 되어서야 그가 홀에 뛰어들어 저를 구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자신의 안전에 최우선이었다.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좀 더 감격스러운 재회가 될 뻔했는데……. 그때 블레이즈가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레이?
“블레이즈.”
그레이가 불덩이의 이름을 불렀다. 프레아는 그제야 제 앞에 있는 불의 정령의 이름이 블레이즈임을 알았다. 그레이도 그렇고 브레이크도 그렇고 이 불덩이를 보며 놀라는 걸 보니 그들이 찾던 물건이 이 정령이었나 보다.
-너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야?
-아빠? 지금 그레이 보고 아빠라고 한 거냐, 너?
-응. 내 아빠야. 아직은 불러본 적 없지만.
프레아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그 모습에 블레이즈가 기함했다. 프레아가 다시금 아버지와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려는데 또다시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에밀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밀리안을 잡아끌었다. 황성이 공격당했다는 말에 프레아도 덩달아 놀라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에시드가 결국 일을 치른 모양이다. 머레니를 통해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프레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어리숙하게 행동하긴 해도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마탑에 다녀오면 에시드를 만나보려 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왜 저를 속였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만약 그가 사정이 있다면 조금 도와줄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그런 건 말짱 소용없게 되었다. 내란이 일어난 시점에서 그는 역적이 되었으니까. 프레아는 진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데 입을 꾹 다문 채 저만 보고 있는 밀리안이 답답했다.
-어휴! 저 바보가 왜 저러고 서 있어? 옆에 있어준다고 내가 빨리 낫는 것도 아니잖아! 이러다 반란이 성공하면 그게 더 문제라고!
-엄청 답답하다는 얼굴이네.
블레이즈가 재미있다는 기색을 띠며 프레아를 응시했다. 프레아가 저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 하는 블레이즈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블레이즈, 부탁 하나만 들어줘.
-언제 봤다고 이름을 부르고 그래? 친근해 보이게.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잖아.
-허어?
블레이즈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괴상한 소리를 냈다. 프레아는 그런 그에게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쟤한테 자꾸 고집 피우면 결혼이고 뭐고 눈 뜨자마자 흠씬 두들겨 주겠다고 말해줘.
-내가 볼 땐 두들기기 전에 네가 두드려 맞을 것 같은데. 쟤 엄청 세.
-밀리안은 나 못 때리거든?
프레아가 새침한 반응을 보이자 어련하겠냐는 얼굴로 블레이즈가 밀리안에게 말했다.
“얘가 그러는데, 너 자꾸 그런 식으로 고집부리면 결혼 안 해준대.”
밀리안이 블레이즈의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블레이즈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결혼 혼수로 반란군 토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아, 잠깐만. 뭐라고?”
블레이즈가 웃기지도 않는 프레아의 중얼거림에 킥킥거렸다. 프레아는 블레이즈를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당장 뒤엎고 싶은데 지금 이 상태잖아.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진짜 다 때려 부숴 버릴 거야. 너 루이스 안을 아나 본데. 그 여자는 내가 처리할 거야. 건들지 마.
“뭐? 크큭, 너 진짜 웃긴다.”
블레이즈가 재밌다는 듯이 연신 큭큭 웃어댔다. 그때 뒤늦게 프레아의 상태를 본 에밀리가 절규했다.
“프레아!”
그러곤 무턱대고 프레아에게 달려들려 했다.
-엄마!
프레아가 에밀리를 안쓰럽게 불렀다. 브레이크가 에밀리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후작님!”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내 딸이 불에 타고 있는데!”
에밀리가 잔뜩 흥분해 브레이크를 밀쳤다. 그때 그레이가 에밀리를 붙들며 달랬다.
“에밀리, 진정하고 자세히 봐봐. 프레아는 괜찮아. 오히려 치료 중인 거라고.”
“……아아.”
에밀리는 그제야 프레아가 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프레아는 전전긍긍하는 에밀리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블레이즈가 계속 말을 걸어주어 속상한 마음에 매몰되지 않아도 되었다. 한동안 프레아와 블레이즈가 티격태격하는데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괜찮은 거야?”
-나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 프레아가 밀리안을 보며 말하자 블레이즈가 통역해 주었다. 이에 밀리안이 얼굴을 환히 밝히더니 프레아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뒤 밀리안이 말했다.
“혼수라니.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너.”
-너무 앞서갔나.
프레아가 머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레이즈는 자신이 무슨 번역기냐는 얼굴로 프레아를 흘겼다. 그때 에밀리가 프레아에게 다가가 손을 붙들었다.
“혼수라니. 너 지금 무슨 말이니?”
-아!
프레아는 그제야 에밀리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얕은 탄성을 내질렀다. 실수했다. 얼른 밀리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에밀리는 생각도 못 했다.
프레아가 곤란한 기색을 띠고 있는데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의 시선이 밀리안에게로 쏠렸다.
“좋아. 네가 원하면 반란군이든 뭐든 다 내줄게.”
-휘유, 대단한 사랑꾼이네.
블레이즈가 밀리안의 말에 낄낄거렸다. 프레아는 그런 블레이즈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니?”
에밀리가 일어선 밀리안을 향해 묻자 그가 짧게 대꾸했다.
“다녀와서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대로 방을 나섰다. 에밀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심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조용히 있던 플라리스가 그레이에게 말했다.
“나 루이스 안이 어디 있는지 알아.”
“뭐? 어딘데.”
“근데, 못 가. 태풍의 눈에 있거든.”
“무슨 소리야?”
“윈드가 한발 빨랐나 보네.”
블레이즈가 플라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전후 상황을 모두 파악한 것처럼 투덜거렸다. 프레아는 윈드라는 말에 블레이즈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너 우리 토토도 알고 있어?
-큽! ……토, 뭐?
토토라는 말에 블레이즈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너 설마 윈드 샬로만데라한테 그딴 애완동물 같은 이름을 붙인 거야?
블레이즈가 충격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표정인지라 이름을 지어준 프레아는 머쓱해졌다. 곧이어 블레이즈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그는 윈드의 새로운 면을 봤다며 유쾌해 했다. 프레아는 블레이즈를 재촉했다.
-빨리 나 좀 깨워줘.
-재촉하지 마. 재촉한다고 정화가 빨리 되는 것도 아니라고. 지금 너랑 나 가계약 상태라 제약이 커.
-그럼 계약하면 되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해?
블레이즈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반문했다. 사실 블레이즈는 굳이 그녀와 계약할 이유가 없었다. 영류도 턱없이 부족한 애랑 계약해 봤자 그만 손해였다.
물론 윈드가 이 아이와 계약했다고 하니 좀 솔깃하긴 했지만 애써 감추었다. 그러자 프레아가 당당히 소리쳤다.
-지금 내 영류가 형편없다고 무시하나 본데. 나중에 다 정화하고 나서 계약해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려도 안 해줄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
-호오, 배포가 남다른데? 마치 너랑 계약하는 게 엄청난 행운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프레아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당당히 말하자 블레이즈가 히죽거렸다.
‘재밌는 인간이네.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블레이즈는 프레아의 반응이 신기해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사실 블레이즈는 그녀가 그레이의 딸이라는 걸 들었을 때부터 제대로 도울 생각이었다. 그의 죽은 계약자가 그레이를 많이 아꼈으니까. 그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좋아. 대신 너도 내 일을 도와야 해. 나도 루이스 안에게 갚아야 할 게 있거든.
-물론이지.
합의가 끝나자 블레이즈가 프레아의 영혼에 뛰어들었다. 타들어갈 것 같은 불덩이가 영혼과 연결되자 다시 한번 붉은빛이 쏟아졌다.
* * *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 그곳에선 거센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나무가 뿌리째 뽑히며 바람에 휩쓸렸다. 뿌리 깊은 나무들이 거센 바람을 견디고자 가지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정령에 의한 인위적인 태풍이었다.
그 속에는 윈드와 세리나가 있었다. 세리나가 잔뜩 벼른 칼날같이 날카롭게 윈드를 응시했다. 눈앞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뜻 모를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윈드가 세리나를 발견한 것은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는 프레아의 곁을 떠나자마자 루이스 안을 추적했다. 그녀와 만나 끝맺어야 할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괴로워서 그저 깊숙이 가둬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과 마주하는 순간, 윈드는 그 아픈 과거가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이전에 협회에서 만났을 때는 일부러 영혼이 드러나지 않도록 수를 썼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도 어렴풋이 익숙한 느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세리나가 환생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다니. 그건 저주와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건 마법의 여파로 영혼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전생은 전생일 뿐. 그것이 현생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영혼은 급속도로 타락하는 법이다. 세리나 역시 전생이 현생을 좀먹고 있었다. 윈드가 세리나를 가여운 중생 보듯 말을 걸었다.
“미련한 것. 기어이 비넷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나, 네가.”
윈드가 떠오른 과거를 갈무리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윈드의 말에 세리나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비넷을 죽인 건 너잖아! 왜 죄다 그 일이 내 탓이라고 하는 거야? 내 기억으론 다 네가 늦어서 벌어진 일이란 말야!”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어. 네 기억이 무조건 맞다 여기는 건 오만이다, 세리나 마그누스.”
“지금 네 입에서 오만이라는 단어가 나온 거야? 하! 너야말로 비넷을 깡그리 잊은 주제에.”
“때로는 망각이 살아갈 힘을 주는 법이거든.”
윈드의 얼굴에 슬픈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세리나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웃기지 마. 내 기억을 탓하기 전에 네 기억이나 탓해. 내 기억은 멀쩡하니까.”
세리나가 역린이 건드려진 것처럼 펄쩍 뛰며 난리를 쳤다.
“어차피 비넷은 살릴 수 없어. 그는 이미 영혼까지 파괴되었으니까.”
윈드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꾸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마법진을 한심하게 보면서.
* * *
비넷은 세리나를 데려온 뒤로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와 달리 세리나는 새침하니 비넷에게 늘 심드렁했다.
당시 윈드는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염세적이었다. 뜨겁게 타올랐다가 식을 때는 얼음보다도 차가워지는 것이 그가 보는 인간들의 사랑이었다.
“왜 하필 세리나야?”
“좋아하는 데 이유는 필요 없어.”
비넷의 말에 윈드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래,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는 게 맞다. 문제는 사랑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윈드는 사랑하다 망가진 인간을 여럿 보았다. 특히 인간은 쌍방이 아닌 일방적인 사랑을 할 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놈의 사랑이란 것은 인간을 추한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윈드는 비넷이 맘씨 고운 여인과 사랑하길 바랐다. 그의 선한 성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지만 세리나는 맘씨 고운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기적이고 저만 아는 못된 것이었다.
“걔 그거 연기하는 거야.”
“세리나가 겉은 쌀쌀맞아 보여도 마음씨는 고운 사람이야.”
“퍽이나. 그런 애가 옆집 남자애 빵이나 훔쳐 먹고 그래?”
“…….”
“그것뿐이야? 걔 저번에는 이간질하다가 들켜서 흠씬 두들겨 맞았어.”
“세리나가 다쳤어? 그런 얘긴 없었는데…….”
“어휴, 이 화상.”
윈드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쿵쿵 내려쳤다. 기껏 세리나가 얼마나 못 돼먹은 아이인지 말해주었더니 다쳤냐고 걱정하는 꼴이라니. 윈드가 모든 게 다 귀찮아진 것처럼 발라당 드러누웠다.
그는 세리나가 비넷을 정말 좋아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늘 퉁명스러운 반응이었고, 여간 까탈스럽게 구는 게 아니었다. 다른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망갈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남들 앞에서 비넷을 모른 척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가장 걱정되는 건 그녀가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마탑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이 없는 자래도 마법사는 마법사. 혹시라도 비넷의 연인인 걸 알고 마탑이 접근하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윈드가 보고 느낀 세리나라면 미련 없이 비넷을 배신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리고 싶었다. 마법사와 정령사의 결혼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좋지 않게 끝날 확률이 다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넷은 세리나와 결혼까지 하고 말았다. 윈드는 그 뒤로 세리나에 관해 입을 닫았다.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대신 그녀를 감시하고, 마탑의 동세를 살폈다.
그나마 비넷이 결혼했을 무렵은 어느 정도 협회가 안정되었을 때였다. 협회는 윈드 샬로만데라의 계약자인 비넷을 주축으로 숨어 있는 정령사들을 찾아서 보호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면서도 마탑의 침입에 한껏 경계했다. 당시 마탑은 호시탐탐 협회를 노렸으니까. 물론 윈드가 미리 알고 열심히 밟아준 덕에 쉽사리 협회를 침입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뭐? 걔한테 그걸 말해줬다고?”
윈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비넷을 바라보았다. 비넷이 조금 미안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차 사실을 확인한 윈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진짜 미쳐도 정도가 있지, 제 약점이 될 일을 홀라당 말해 버리다니.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아? 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윈드가 어울리지 않게 호통치자 비넷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내 아내야. 그녀가 나를 배신할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 여자 마법사야. 알고 있어?”
“마탑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야. 함부로 비밀을 발설한 사람도 아니고.”
“몰라. 네 맘대로 해.”
윈드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멍청한 놈. 한심한 놈. 여자한테 미쳐서 제 묏자리 마련하는 놈 같으니라고.’
정령사는 정령과 계약할 때 언령이라는 걸 이용해 서로의 영혼을 묶는다. 그때 사용하는 언령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혹여 다른 이가 알고 그 언령에 위해를 끼치면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건 정령사였으니까.
그런 아주 중요한 언령을 이제 막 결혼한 세리나에게 말하다니. 어리숙한 바보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윈드는 그냥 이대로 비넷과 작별하고 다시 자연으로 숨어버릴까 고심하며 허공을 배회했다.
사실 윈드는 잠시 머리를 비우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 한심하고 바보 같은 계약자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잠시 자리를 뜬 거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그가 위험하면 달려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날, 비넷은 윈드가 손 쓸 틈도 없이 폭주했다. 그의 옆에는 다 죽어가는 세리나가 있었다. 세리나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습격을 당했는지 주변이 엉망이었다.
윈드는 영류가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비넷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 멍청이가 한 말은 가관이었다.
“세리나 좀 부탁해.”
“야 이 미친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내 계약자야?”
“미안해, 윈드. 그리고 이건…… 명령이야.”
비넷이 제 목소리에 영류를 흘려 말했다. 저 멍청이는 자신이 혹시라도 세리나를 안 도와줄까 봐 폭주하는 상황에서 언령을 읊고 있었다. 그게 제 영혼에 얼마나 부담이 되는 줄도 모르고.
“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이 자식아!”
윈드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비넷은 마지막 힘을 다해 언령을 읊었고, 결국 그의 영혼은 손쓸 새 없이 망가졌다. 강제로 계약을 해지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폭주한 지는 한참이 지났고, 뒤늦게 도착한 건 제 잘못이었다.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윈드는 비넷의 마지막 명령을…… 아니,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건 그의 유언이었으니까.
하지만 비극은 그때부터였다. 얼마 뒤, 세리나가 자결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윈드는 결국 기억을 지워 버렸다.
* * *
황제는 숨어 있지 않았다.
“어서 와라.”
황제가 에시드를 향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시드가 황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옆에는 에드모어 공작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공작의 앞에는 불사조 기사단이 줄지어 대열을 맞춘 상태였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황제와 에시드 사이에는 수많은 것이 가로막고 있었다.
“형님.”
에시드가 메마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에시드를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뒤 에시드가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다.
에드모어 공작은 황제의 주변으로 몰려오는 자들을 쳐내며 그를 보호했다. 에시드를 엄호하던 크로이드 공작이 에드모어 공작의 곁에 바짝 붙어 검을 겨누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황제는 갑옷도 입지 않은 채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리는 금사가 수놓아진 붉은 옷 위로 검붉은 핏물이 간혹 튀었다.
황제는 유혈이 낭자한 곳에서도 에시드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시드 역시 황제를 응시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찰나, 곧 에시드가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에시드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목표한 순간이 목전에 와 있다. 이제 몇 번의 경합 뒤 자연스럽게 황제의 손에 죽으면 다 끝이었다.
‘내가 죽을 작정으로 이곳에 왔다는 걸 아는 이는 없겠지.’
에시드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제 뒤쪽에 물끄러미 서 있는 데오를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데오는 본래부터 반란군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장이 되겠다는 에시드의 말에, 그럼 든든한 우방이 되겠다며 따라나선 사람이었다.
에시드는 죽기 전에 황제에게 그를 살려달라고 말해볼까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살고 싶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에시드가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언젠가 한 번쯤 만져보고 싶던 연보랏빛 머리카락, 영롱한 빛을 내뿜던 푸르스름한 보랏빛 눈동자. 작은 입술이 앙증맞게 웅얼거리는 게 보고 싶어 자주 말을 걸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를 떠올릴수록 자꾸 살고 싶어졌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제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줬던 사람. 끝까지 저를 믿어주려 했던 사람에게 먼저 칼을 꽂은 건 자신이었다.
‘의식은 차렸을까.’
에시드는 프레아의 안부를 감히 걱정한 것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히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녀가 들었다면 어이없을 그런 걱정.
악역의 결말은 주인공에게 패배하는 것이다. 에시드가 계획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황제였다. 그는 사라져야 할 악역으로 남을 작정이었다.
“더는 가까이 오지 말아라.”
어느새 다시 걷기 시작한 에시드를 향해 황제가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 이에 에시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오는 기사의 목을 베자 붉은 피가 에시드의 얼굴에 튀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에드모어 공작이 황제의 곁에서 에시드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밀리안보다는 조금 맑은 붉은빛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붉은 오러가 목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가까이 가겠습니다, 폐ᅙᅡ.”
에시드가 형의 마지막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크로이드 공작이 그의 뒤를 엄호했다. 황제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마침내 황제가 검을 뽑으며 에드모어 공작에게 말했다.
“나서지 말아라.”
“예, 폐하.”
에드모어가 황명을 받고는 그의 뒤를 엄호했다. 치렁치렁한 소매가 걸리적거릴 만한데도 황제는 신경 쓰지 않고 검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에시드 역시 검을 한 번 휘두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저들은 알까, 그가 일부러 마법이 아닌 검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크로이드 공작 또한 에드모어 공작과 마찬가지로 물러서 에시드를 엄호했다. 이것은 황제와 에시드의 싸움이었다.
“에시드, 네가 나와 검을 겨루어 이겨본 적이 없다는 걸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었구나. 알고도 내게 검을 겨누고 있구나.”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황제의 시선이 에시드의 검에 꽂혔다. 실력 차이를 알고도 검을 든 에시드의 저의를 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자신은 황제였다. 역적인 동생을 처단하는 데 주저함을 보여선 안 되었다.
일순간 에시드와 황제의 검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손목이 아릿했다. 에시드가 무겁게 내리찍는 검을 겨우 피했다. 또다시 검이 맞붙자 에시드가 조용히 말했다.
“청이 있습니다.”
“이 와중에 내게 청이라.”
“데오 라즐리는 저를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뭐라고?”
황제가 역적을 살려달라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자신이 무슨 청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에시드도 본인의 청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 알았다. 알았지만, 끝까지 저와 함께하겠다고 했던 데오가 싸늘한 시체가 되는 것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이번 반란군 중에서 유일하게 새로 들어온 귀족이 바로 데오였으니까. 데오는 벤 라즐리와 달리 반란에 반대했다. 지금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황제를 갈아엎는 것은 혼란만 가중하는 일이라며 아버지와 맞섰었다.
“그는 애초에 반란군과는 거리가 먼 자였습니다. 저 때문에 억지로 한 겁니다.”
“그러는 넌, 언제부터 수장이었느냐.”
“…….”
“너도 데오 라즐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냐. 원래부터 수장이었다는 말은 하지도 말아라. 이미 들은 것이 있으니.”
“죄송합니다, 형님.”
에시드는 진실을 숨긴 채 사죄했다. 이후 잠깐 떨어져 나간 검이 다시 챙, 하고 부딪쳤다. 황제가 잔뜩 미간을 좁히며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네 목숨은 구걸하지 않느냐.”
“…….”
“살려달라고 말해라. 목숨만 살려달라 하면 내 너를……!”
황제가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외치는 찰나, 에시드가 연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형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에시드가 실수인 척 검을 놓쳤다. 에시드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황제의 검이 그대로 에시드의 어깨에 박혔다. 에시드가 칼에 찔리자 뒤에서 엄호하던 기사들이 움찔했다. 후방에 있던 데오 라즐리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그를 향해 소리쳤다.
“에시드!”
콰앙!
그 순간 난데없는 굉음이 들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기사들이 멈칫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붉은 눈이 이채를 띠며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주변을 훑었다.
이미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온 것처럼 밀리안의 옷에는 피 얼룩이 가득했다. 물론 그 피가 밀리안의 피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의 날쌘 움직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이 에시드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튀어 올랐다. 에시드는 이미 왼쪽 어깨에 검이 박힌 터라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에시드가 스스로 황제의 검을 제 어깨에 깊이 찔러 넣으려 했다. 반란군에게는 그저 황제가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황제의 뒤에 있던 에드모어 공작은 에시드가 죽으려 함을 눈치챘다.
뒤늦게 에드모어 공작이 에시드를 저지하려는데 밀리안이 한발 빨랐다. 밀리안은 에시드의 어깨에 있는 검을 간단히 뽑아버려 그의 자살행위를 막았다.
“크윽!”
에시드가 갑자기 빠져나간 검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밀리안이 그런 에시드의 어깨에 가지고 있던 포션을 콸콸 부으며 서늘히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선선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 * *
프레아와 약속하고 나온 직후, 밀리안은 망설임 없이 황성으로 향했다. 정령석에서 정령이 나온 것은 극히 행운이었다. 그 덕에 프레아의 정화 작업은 속도를 높이게 되었고, 무의식에 갇혀 있는 프레아의 의사도 대신 전달받을 수 있었다.
황성을 향하는 밀리안의 표정에는 안도감과 함께 기쁨이 차올랐다. 밀리안은 프레아가 결혼을 안 해준다고 한 것보다도 저랑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것에 흡족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반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편이 향후 레이첼 후작의 허락을 받기 용이할 터였다.
이미 황성은 이곳저곳에 난 불길과 어지러이 흩어진 아군과 적군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밀리안은 우선 불사조 기사단을 공격하는 기사들 위주로 도륙했다.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밀리안의 검에 반란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때 기괴한 형상의 괴물이 밀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밀리안이 단칼에 베자 괴물의 피가 튀면서 폭발할 것처럼 진동했다. 폭발을 예견한 그가 뒤로 물러서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키메라가 터졌다.
그 옆에 있던 애먼 기사가 폭발에 휩쓸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밀리안이 인상을 팍 쓰며 펑펑, 소리를 내며 터져대는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폭발에 휩쓸리는 상황이었다.
밀리안은 아예 키메라를 하늘로 냅다 던진 뒤 검기를 이용해 허공에서 터지도록 했다. 팟 하고 터지며 튀는 피와 살점이 어지러이 떨어졌다. 밀리안의 눈이 핏물처럼 붉디붉었다. 꼭 전장에서의 모습처럼.
황성 안은 피비린내와 탄내가 진동했고, 어지러운 금속 마찰음과 함성이 왕왕거렸다. 밀리안이 그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거침없이 적군을 베어냈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는 그의 모습에 적군들이 아연실색했다. 밀리안은 한참 반란군을 죽이다 그들 사이에 청룡 기사단이 끼어 있는 걸 알아챘다.
밀리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 멀리서 기사를 베고 있는 빌리앙에게 밀리안의 시선이 꽂혔다. 그의 갑옷 위에는 숱한 피가 묻어 있었다.
빌리앙이 눈앞에 있던 기사를 베어낸 뒤 밀리안을 발견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 밀리안이 천천히 빌리앙 쪽으로 향했다. 빌리앙도 언제 당황했냐는 듯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에시드의 뒤를 엄호하는 상황이었다. 밀리안이 에시드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면 승률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에시드가 황제를 죽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했다. 빌리앙이 검을 단단히 부여잡고 애써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칩거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서.”
밀리안이 짧게 조소를 흘리며 검을 휘휘 돌렸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빌리앙과는 달리 밀리안은 차분했다. 한눈에 봐도 여유 가득한 모습에 빌리앙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
“프레아가 보내서 온 거거든, 여기.”
“……레이첼 소후작이 깨어났다는 건가?”
“안 반가워 보이네. 후환이 두려운가 보지?”
밀리안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올라갔다. 피범벅인 얼굴에 그려진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섬뜩하기도 했다. 빌리앙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후환이 두려웠다면 이러지도 않았겠지.”
“죽이기 전에 하나만 대답해라.”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나?”
빌리앙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며 반문했다. 밀리안이 그런 빌리앙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상황에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그날 연회장에서 우연을 가장해 프레아와 마주치려 했던 이유가 뭐지?”
밀리안이 빌리앙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빌리앙이 시침을 떼며 반박했다.
“나는 그저 비비안 황녀님을 엄호했을…….”
“거짓말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계속 프레아를 주시하던 걸 봤으니까.”
밀리안은 그날 연회에서 줄곧 프레아에게만 집중했다. 그러다 빌리앙이 계속해서 그녀를 힐끗거리는 것을 알아챘고. 당시 밀리안은 프레아가 한번 다칠 뻔했던 일로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프레아가 그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의뭉스러웠다. 그런데 우연이었다고? 밀리안은 그것이 계획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다.
밀리안의 반박에 빌리앙의 입이 굳게 닫혔다.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잠시 뒤 빌리앙이 짧게 말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네.”
“뭐가 궁금했다는 거지?”
밀리안이 되묻자 빌리앙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빌리앙은 그녀가 제적당한 작은아버지의 딸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미 부하의 실수로 한 번 본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에밀리 레이첼의 진한 보라색 눈동자와 달리 푸른빛이 섞인 눈동자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저와 한 핏줄임을 증명하는 단서라니. 호기심이 드는 동시에 아버지가 더욱 무서워졌다.
빌리앙의 아버지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에다가 고지식하여 한 번 정한 일에 뜻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게 아버지였다. 그러니 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도 가차 없이 버린 거겠지.
빌리앙이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변은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해 혼란했다. 그 사이로 들리는 빌리앙의 웃음소리는 불협화음 같았다.
“사촌지간이 될 수도 있던 사이었네.”
“처음 듣는 이야긴데.”
대답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밀리안이 그를 죽이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다 멈추곤 중얼거렸다. 레이첼 후작은 아버지와 초혼이었다. 프레아가 있기는 했지만 남편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촌지간이라고? 그 말은 프레아의 아버지가 크로이드 가문이었다는 말인데…….’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빌리앙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밀리안이 그런 그를 보며 싸늘히 물었다.
“사촌이라면서 죽이려 했나?”
밀리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프레아의 아버지 가문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들이 프레아를 위협했다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생도 버리는 분이시거든.”
“크로이드 공작 탓만 하기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네도 별로 말릴 생각이 없던 거 같은데.”
“그런가.”
빌리앙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띠었다. 에둘러대며 정작 말꼬리를 늘이는 빌리앙에게 밀리안이 말했다.
“자꾸 시간을 벌려고 하네? 자네 뒤에 내가 찾는 사람이 있나 봐.”
“…….”
“프레아를 건드린 것은 아주 큰 실수였어.”
“상대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네. 후회는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야. 프레아 얘길 꺼내길래 동정심 유발이라도 하려는 건가 했거든.”
밀리안이 빌리앙에게 검을 겨누었다. 챙!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빌리앙이 뒤로 밀렸다. 밀리안이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자네 얘길 들으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래, 자네처럼 푸른 눈을 한 사내인데 이상하게 프레아에게 애착을 보였거든.”
“……!!”
빌리앙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밀리안이 동요했으면 하는 마음에 꺼낸 이야기였는데 정작 제가 당황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빌리앙의 왼쪽 다리에 날카로운 검이 스쳐 지나갔다.
“크윽!”
빌리앙이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넓혔다. 밀리안이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빌리앙과의 거리를 다시금 좁혔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네. 고마워, 하마터면 장인어른에게 못 할 짓을 할 뻔했어.”
“뭐?”
빌리앙이 장인어른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장인어른이라니?
레이첼 후작과 에드모어 공작은 재혼한 사이였다. 당연히 프레아와 밀리안은 남매지간이었고. 빌리앙이 한껏 당황한 상태로 밀리안의 검과 맞섰다.
“자네도 내게 비밀을 털어놓았으니 나도 하나 말해줄게.”
“…….”
“물론 이걸 들으면 죽일 거야.”
“안 듣는다는 선택지는 없나?”
“응, 없어.”
밀리안이 빌리앙의 나머지 오른쪽 다리에 검을 깊게 찔러 넣자 그가 휘청거렸다. 밀리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찔러 넣은 검을 빼냈다.
빌리앙이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아냈다.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아 겨우 몸을 지지한 채 서 있었다.
“자네 아버지가 남동생을 버리지 않았다면 나를 얻었을 거야.”
“…….”
“내가 그쪽 사촌 동생한테 맛이 간 상태거든.”
“……뭣!”
“잘 가.”
푸욱.
밀리안이 거침없이 빌리앙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빌리앙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검은 더욱 깊게 박혔고, 빌리앙의 눈 초점은 점점 흐트러졌다. 그가 마지막 힘을 다해 말을 뱉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걔도 참…… 불쌍하군. 자네같이 미친놈, 한테 걸리기나 하…… 고.”
“걱정 마. 자네 사촌도 나 못지않아.”
밀리안이 검을 빼내자 컥, 신음을 내뱉은 빌리앙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밀리안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 * *
결국 에시드는 죽지 못했다. 죽으려고 했으나 난입한 밀리안이 그 비싼 포션을 들이부은 덕에 죽음을 피하고 말았다. 바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밀리안이 왔다 간 흔적은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처참했다. 살아남은 반란군이 없었다. 에시드와 함께 있던 반란군을 제외하면 모조리 죽어버렸다.
크로이드 공작과 데오 라즐리는 구속구를 찬 채 감옥으로 옮겨졌다. 크로이드 공작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 죽은 아들을 보곤 고개를 돌렸다.
반란은 실패였다. 베일에 감춰진 반란군의 뿌리가 완전히 드러났다. 전란의 기세가 꺾임을 알고 미리 도망친 귀족들도 줄줄이 붙잡혔다. 레이첼 후작이 미리 그들의 도주 경로를 파악해 둔 덕이었다. 에시드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황성을 보며 침음했다.
“날 왜 살렸지? 죽이고 싶었을 텐데.”
반란군의 수장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모습. 꼭 등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사람처럼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밀리안은 그가 힘들든 힘들지 않든 상관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주에 특화된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주와 해독은 한 끗 차이라지요.”
“…….”
“그레이 크로이드가 살아 있습니다.”
“……!!”
“이제 좀 설명이 되었습니까?”
“……하하.”
에시드가 밀리안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죽은 줄 알았다. 죽은 줄 알아서 죄책감에 시달렸고, 죽은 줄 알아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다가갈 수 없다면 철저히 멀어지고 싶었고, 멀어지기 위해 그녀를 배신했다. 배신한 뒤에 도망치듯 죽으려 했고,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하였다.
에시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은 울듯 말듯 울먹울먹했다. 그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자 모두 그가 반란에 실패하여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에시드는 그대로 차가운 감옥 속에 갇혔다.
* * *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 * *
프레아는 곧바로 깨어나지 못했다. 블레이즈와 계약만 하면 벌떡 일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화는 더디기만 했다. 프레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의 영혼이 블레이즈의 영혼에 바짝 다가가 북을 치듯 두들겼다.
-계약하면 금방 깨어날 것처럼 굴더니! 속았어, 이 사기꾼!
-아얏! 이게 기껏 살려놨더니 왜 때려! 아니 내가 네 영류가 이렇게 방대한 줄 알았냐고!
블레이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억울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놈의 계약자는 미친 영류를 갖고 있었다.
윈드가 비넷 이후 처음으로 계약자를 만들었다더니, 누가 그 정령에 그 계약자 아니랄까 봐 포악하기가 윈드 저리 가라였다. 블레이즈는 아주 오래전 윈드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가 아련한 추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의 블레이즈는 갓 태어난 정령으로 호기심이 굉장했다. 당시 정령들 사이에서 윈드는 뜨거운 감자였다
다른 정령과 차원이 다른 힘에 그를 따르는 바람의 정령이 많았고, 이러다 그가 정령들의 왕이 되는 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들렸었다. 물론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소문도 쉬쉬 되었지만.
그러니 어린 블레이즈가 윈드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윈드는 비넷의 죽음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상태라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열정이 불타던 블레이즈는 열심히 그의 흔적을 추적했고, 결국 그와 마주쳤다. 블레이즈가 윈드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멋지다’였다.
당시의 윈드는 비넷과 세리나의 죽음으로 깊게 침잠하던 때였다. 오만 방자하게 굴던 태도는 사라지고 한껏 흐트러진 상태로 지내던 때이기도 했다.
윈드가 있던 곳은 길이 험난했고, 강한 바람을 휘휘 두른 탓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블레이즈는 불의 정령으로, 바람의 정령과는 꽤 상성이 좋은 축이었다.
블레이즈는 윈드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윈드에게 멀리 던져졌으나 이 집요한 정령은 계속 윈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일종의 선망이었다. 강한 자에 대한 열망이기도 했고.
‘또 왔냐.’
윈드가 정말 귀찮다는 얼굴로 블레이즈를 보았다. 블레이즈는 작은 불덩이의 모습으로 윈드 곁에서 알짱거렸다.
‘왜 이러고 있어, 자꾸?’
‘어린놈이 자꾸 반말이야.’
윈드가 바람을 후 불어 블레이즈를 멀찍이 떼어놓았다. 이제는 멀리 내쫓아도 계속 찾아내는 것에 이골이 났는지 까칠함도 덜했다. 블레이즈가 다시 윈드의 곁으로 가며 말했다.
‘계약자가 죽어서 그래?’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내가 지워줄까?’
‘뭐?’
윈드가 흔들리는 눈으로 천진난만한 블레이즈를 응시했다. 바람의 정령이 기억을 읽을 수 있다면 불의 정령은 기억을 태울 수 있었다. 불은 소멸과 생기를 모두 상징하는 원소였으므로.
블레이즈는 윈드가 원한다면 그가 슬퍼하는 기억을 태워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윈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데 힘쓰려 하지 마라.’
‘두 사람의 죽음에 네 잘못은 없어.’
‘아니, 나는 계약자를 두고 갔어. 그 자체가 잘못이었고.’
윈드가 잔뜩 메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블레이즈는 그런 윈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리나 마그누스는 이용당한 거야. 내가 알아봤어.’
‘…….’
‘근데 그녀도 나쁜 게 맞아. 그녀가 비넷에게 접근한 건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거든.’
‘……나도 알고 있어.’
윈드의 말에 블레이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근데 왜 슬퍼해? 나쁜 사람 잘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자꾸 귀찮게 굴면 소멸시켜 버린다?’
윈드가 돌풍을 만들어내며 위협하자 블레이즈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내가 슬프지 않게 해줄게.’
‘충분히 슬퍼하게 내버려 둬.’
윈드는 결국 바람으로 블레이즈를 날려 버렸다. 그러나 블레이즈가 다시 그를 찾아냈을 때, 윈드는 먼저 블레이즈에게 기억을 지워달라 요구했다. 충분히 슬퍼하였다면서.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
프레아의 목소리를 듣고 블레이즈가 회상을 멈추었다. 블레이즈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당시에 세리나 마그누스는 블레이즈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블레이즈는 그녀가 죽은 뒤에 태어난지라 그녀의 영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후 정령 협회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던 중, 그녀가 세리나 마그누스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저보다 먼저 진실을 알게 된 계약자가 그녀를 막으려다 죽임당한 뒤였다.
‘그때의 심정이란…….’
블레이즈는 그제야 윈드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냐. 그나저나 플라리스가 말한 곳에 태풍이 점점 잦아들고 있어. 우리가 안 가도 알아서 끝낼 것 같은데.
-뭐? 안 돼. 가서 물어볼 것도 있는데……!
프레아가 블레이즈를 짤래짤래 흔들며 소리쳤다. 블레이즈가 어지러운지 잔뜩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지러워, 이것아!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프레아가 블레이즈를 짤짤 흔들다 말고 다가온 밀리안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물론 몸뚱이는 전혀 환영하지 못해 요지부동이었지만.
“잘 잤어?”
-응응!
가까이 다가온 밀리안이 프레아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블레이즈가 그런 그를 보며 질색했다. 자신이 왜 이런 걸 보고 있어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프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역을 부탁했다.
-잠은 자는 거야?
“잠 좀 자라, 이 화상아.”
-야아!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프레아가 블레이즈를 퍽퍽 쳤지만 그는 샐쭉거리기만 했다. 밀리안이 블레이즈의 통역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오랜만에 미소 짓자 블레이즈를 때리던 것을 멈추었다.
-쟤 미쳤나 봐. 지 욕했는데 웃어.
블레이즈의 발언에 프레아가 눈을 흘겼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꼭 잡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내가 걱정되면 얼른 일어나.”
-나도 그러고 싶어.
프레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블레이즈가 그녀의 말을 받아 밀리안에게 대꾸했다.
“누가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줄 알아? 나도 일어나고 싶다, 이놈아!”
-야이 씨, 너 진짜 죽을래?!
프레아가 자꾸 분위기 깨는 통역을 하는 블레이즈에게 영류를 쏘았다.
“앗, 따가워!”
블레이즈가 저만치 떨어져 나갔다. 프레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자 밀리안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안쓰러운 기색이 역력했는데, 조금 시무룩한 것도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어? 말이 좀 날 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파?”
-아니야. 그거 내가 한 말 아니라고!
“아닌데. 왜 생사람을 잡아?”
-…….
프레아는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앉아 있으니 밀리안이 쪽 소리 나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열린 창틈 새로 꽃잎들이 가만가만 방 안에 들이쳤다. 상큼한 꽃향기도 함께 스며들었다. 밀리안이 고요한 시선으로 프레아를 응시하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미안. 이제부터 네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밀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반응했다. 프레아의 볼에 옅은 홍조가 띠자 밀리안이 예쁘게 웃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미소에 프레아가 넋을 놓고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몸뚱이는 홍조만 띤 채 여전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보며 다시금 속삭였다.
“일어나서 칭찬해 줘. 네 웃는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
* * *
수도는 내란의 여파로 여전히 경계가 삼엄했다. 그레이와 브레이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블레이즈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브레이크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블레이즈는 불씨를 툭툭 쏘아대며 말했다.
“내가 이런 거로 너네한테 거짓말하겠어?”
“전생의 기억이 있는 영혼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그레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블레이즈는 브레이크와 그레이의 스승인 마르크의 정령이었다. 그는 당시 마르크가 죽은 원인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에게 들은 소식은 기함할 만한 것이라 두 사람 모두 얼어버렸다. 정령 협회장의 이름도 모르던 브레이크와 달리 그레이는 그녀가 루이스 안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만 해도 그레이는 협회의 간부로 일하고 있었으니까.
“글쎄, 아예 없는 사례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그녀가 세리나 마그누스라면 스승님은 왜 죽인 건데?”
브레이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블레이즈는 세리나 마그누스가 비넷 마그누스를 살리기 위해서 마탑의 뒤를 봐주었다고 했다.
마탑에는 흑마법사가 대거 있었고, 그들이 정령석을 조건으로 루이스에게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진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의 계획을 알아챈 마르크가 그것을 저지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블레이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내가 세리나 마그누스를 알고 있었거든.”
“……!!”
“물론 그녀와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래서 나도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었고.”
“설령 네가 그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스승님을 죽이고, 언령 연구자를 줄줄이 숙청할 이유는 없었잖아.”
브레이크가 조목조목 따지듯이 맞서자 블레이즈가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 몸뚱이에서 여러 서류를 꺼내 내려놓았다.
“그래, 맞아. 그것 만으론 살인 동기가 부족하지.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야. 세리나 마그누스의 언령 연구 계획을 모두 알아버렸거든.”
“무슨 소리야?”
그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계획한 언령 연구라니?
물론 그녀도 언령에 능통한 자이기는 했지만 따로 연구하는 게 있다고 들어본 적은 없었다. 브레이크가 블레이즈가 꺼낸 서류들을 훑더니 사색이 되었다.
“이게 사실이야?”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흑마법에는 대가성 생명이 필요해. 그녀는 정령을 아예 제 몸과 동화시켜서 정령의 생명을 담보로 비넷 마그누스를 살리려 한 거야. 대가성 영혼에 인간이라는 규칙은 없으니까.”
흑마법은 시전자가 대신 저주받는데, 특히 생명과 관련된 마법은 대가성 생명이 필요했다.
“잠깐만! 정령의 영혼을 대가로 비넷 마그누스를 살리다니. 이미 몸은 다 썩어 없어졌을 텐데, 영혼만 되돌리면 소용없는 거잖아.”
브레이크가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블레이즈는 자꾸 제 말을 끊고 따져대는 브레이크를 슬쩍 째려본 뒤 이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언령 연구가 필요했던 거야. 정령을 대가로 살아난 영혼을 언령으로 다시 정령의 몸에 넣어버리려고.”
“그게 가능하다고?”
그레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누가 들어도 기괴한 계획이었다. 전생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언령을 연구하고, 정령석을 희생시키고, 정령의 몸에 옛 남편을 넣어버리려 하다니.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했다.
“그녀는 마법사였어. 마나 코어가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마 그녀가 이번 생에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나게 된 건 윈드의 영향이 커. 그가 그녀를 살린 적이 있거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잖아. 게다가 흑마법은 시전자를 불행에 빠뜨리는 마법이고.”
그레이가 머뭇거리며 낮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흑마법은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았다. 시전자의 정신을 갉아먹는 마법이니까.
그런데 이미 시전자가 멀쩡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면? 흑마법 하나가 더해져 봤자 느낌도 안 날 게 분명했다. 블레이즈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거겠지.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살아간다는 건 때론 생각을 이상한 방향으로 튀게 만들거든.”
* * *
세리나는 인적이 드문 황무지로 이동한 뒤에 준비했던 물품들을 늘어놓았다. 조각조각 받았던 마법진을 이어 붙이고 정령의 피와 제 피를 이용해 마법을 시동했다.
검은빛이 어지러이 흩어지며 마법진이 바닥에 그려졌다. 거무튀튀한 액체가 마법진을 따라 흘렀다. 이제 곧 비넷을 만날 수 있다. 세리나는 비넷을 만나게 되면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세리나는 비넷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보다 스스로를 향한 사랑이 더욱 컸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를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그런 자신에게 불만이 없기에 우리는 참 잘 어울리는 부부라고 여겨왔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실 저보다 더 나은 여자를 만났어도 좋을 만큼 멋진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세리나는 종종 불안했다. 그의 사랑을 여러 번 확인하려 들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마탑이 파고들었지만 세리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는 마법사라 마탑에 속하지 않았을지언정 마탑의 마법사들과는 제법 어울렸다. 그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세리나의 성정을 안 마탑의 마법사가 그녀를 속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는 세리나에게 정령사의 사랑을 확인하려면 그들의 비밀을 물어보면 된다고 조언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들의 약점인 그 비밀까지 말해줄 거라는 말에 세리나는 혹했다.
정령사는 워낙 비밀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언령이었다. 그들은 언령에 대해 말을 아꼈다. 마탑은 그것을 무척 궁금해했다. 세리나가 침실에서 그의 품에 파고들며 물었다.
‘날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근데 왜 말해주지 않아?’
‘그건 윈드가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
비넷이 난감한 기색을 띠며 중얼거렸다. 이에 세리나가 불퉁한 얼굴로 입을 쭉 내밀었다. 벌써 여러 차례 물어봤음에도 알려주지 않아 괜히 속이 꼬였다.
‘날 사랑한다면서 정작 못 믿는구나.’
‘세리나.’
‘오늘은 같이 있고 싶지 않아. 나가줘.’
그렇게 자꾸 다툼이 잦아지자 비넷은 결국 세리나에게 언령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정령사와 정령은 영혼을 묶는 계약을 하는데, 거기에 사용되는 것이 언령이라고. 비넷과 윈드를 연결하는 언령을 들었을 때, 세리나는 무척 기뻤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녀는 충만한 기분에 하루하루 들떠 있었다.
“괜찮아, 살리면 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세리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웅얼거렸다.
세리나는 억울했다. 그가 말한 비밀을 함부로 발설한 적도 없는데 모두 그녀 때문에 그가 폭주했다고 수군거렸다. 나중 되어서야 그녀가 친구라 생각했던, 마탑의 마법사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그 언령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세리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마법사는 그것을 엿들었고, 비넷을 죽게 만든 거였다.
세리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마법사를 죽여 버린 후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자결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을 때, 그녀는 역사에 길이 남는 쌍년이 되어 있었다.
마법진이 거의 완성될 무렵, 돌연 강풍이 불었다. 세찬 바람에 세리나가 눈을 찌푸렸다. 곧이어 거대한 늑대가 등장했다. 세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윈드가 그녀를 말렸다.
“하지 마라.”
“이미 늦었어. 한 번 시전한 마법은 무슨 수를 써도 풀리지 않아.”
세리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녀는 그가 다시 깨어난 걸 알았을 때 마법진에 다른 수를 써뒀다. 혹시 그가 기억을 찾아 저를 방해할 것을 염려해 마법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 마법까지 추가한 것이다.
아무도 그녀가 비넷을 되살리는 걸 방해할 수 없으리라. 한참 그와 말다툼을 하던 도중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련한 것. 기어이 비넷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나, 네가.”
그에게서 비넷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세리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분명 비넷에 관한 기억을 없앴다고 들었는데 도로 찾은 모양이다.
“네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비넷을 죽인 건 너잖아! 왜 죄다 그 일이 내 탓이라고 하는 거야? 내 기억으론 다 네가 늦어서 벌어진 일이란 말야!”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어. 네 기억이 무조건 맞다 여기는 건 오만이다, 세리나 마그누스.”
“오만? 지금 네 입에서 오만이라는 단어가 나온 거야? 하! 너야말로 비넷을 깡그리 잊은 주제에.”
세리나는 그에게 오만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몹시 화가 났다. 오만한 건 그였다. 늘 자신을 아랫사람 내려다보듯 한심하게 보던 건 그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힘이 좀 세다고, 비넷과 더 오래 알고 지냈다고 저를 업신여기던 자에게 저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망각이 살아갈 힘을 주는 법이거든.”
윈드가 슬픈 기색으로 얘기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역겹기 그지없었다. 세리나는 그가 망각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에 구토감이 몰려왔다.
“웃기지 마. 내 기억을 탓하기 전에 네 기억이나 탓해. 내 기억은 멀쩡하니까.”
세리나가 잔뜩 비아냥거리자 윈드가 한숨 쉬듯 말했다.
“어차피 비넷은 살릴 수 없어. 그는 이미 영혼까지 파괴되었으니까.”
그 순간, 마법진이 완성되며 검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세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쪼개어 포박했던 정령을 풀어주며 그대로 언령을 내뱉었다.
목걸이 속 정령의 영혼이 세리나와 융합되자 세리나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콜록거리며 피를 쏟아내는 세리나를 보며 윈드가 소리쳤다.
“소용없대도 기어이!”
“웃기지 마. 영혼이 파괴되었으면 이어 붙여서라도 만날 거니까.”
세리나가 피 묻은 입가를 닦아내며 광기에 찬 미소를 띠었다. 마법진이 폭발하듯 진동했다. 세리나의 몸이 타오를 듯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령은 불의 정령이었다. 그 때문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집착 어린 모습으로 마법진을 응시했다.
윈드가 낮게 욕지거리를 하며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마법진이 쩍쩍 갈라짐에도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윈드가 포효하며 마법진을 뭉개 버린 뒤 세리나를 감쌌다. 그 뒤로 강한 폭발이 이어졌다.
세리나는 저를 보호하듯 감싼 윈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법진이 점점 빛을 잃어감을 보고 절망에 찬 얼굴을 했다.
되살릴 영혼이 없게 된 마법진은 잠시 뒤 소리 없이 종료되었다. 분명 마법이 시전되는 것을 보았으나 마법은 비넷을 되살리지 못했다.
세리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해진 피부 그대로 쓰러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에 있는 눈이 여전히 마법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의 몸에 영혼이 두 개로 묶이자 육체가 견디지 못하는 상태였다.
윈드가 세리나에게 힘을 쏟아부으며 영혼을 억지로 분리시키려 했으나 언령에 묶인 영혼은 분리되지 않았다. 세리나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절한 모양이었다.
다른 정령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윈드는 그레이 역시 언령에 박학다식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대로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윈드가 그녀의 온몸을 태울 듯이 일렁이는 정령의 기운을 바람으로 잠재웠다. 그러곤 세리나를 등에 업은 채 내달렸다.
* * *
에시드는 싸늘한 감옥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조차 사라져 버린 지금, 에시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밀리안에게 그레이 크로이드가 살아 있다는 걸 들었을 때, 에시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분명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고된 실험과 속박 마법의 부작용이 몸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을 텐데도 그는 죽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정령사이기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었다. 정령사는 알려진 게 별로 없었으니까.
저가 모르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합리화할 무렵, 밀리안 테일러스가 찾아왔다. 그는 제게 저주 마법을 역으로 이용해 해독할 방법은 없냐고 자문했다. 아마 그가 자신을 살린 이유이리라.
“독을 독으로 막아보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에시드가 낮게 중얼거리며 연신 피식거렸다. 역모를 벌였으니 곧 그의 사형이 집행될 것이다. 아마 마음 약한 형은 제 마지막 부탁을 외면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황제가 데오 라즐리를 유배형으로 마무리해 줄 것이라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에시드가 시선을 옮기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에드모어 공작이었다.
“공작이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무얼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다 보았습니다. 대공께서 스스로 검을 놓는 것을요.”
“…….”
에시드가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티 나지 않게 한다고 노력했음에도 그의 눈을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에시드가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난 그날 형님께 진 거네. 날 놀리고 싶은 거라면 그만했으면 좋겠군.”
하지만 진은 에시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서 했다.
“십여 년을 넘게 반란군의 뒤를 쫓았습니다. 아무리 추적해도 잡히지 않던 반란군이 최근 들어 자꾸 단서를 흘렸죠.”
“…….”
“처음엔 함정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 따위 없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네.”
“아네모네 황비를 죽인 것도 대공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대공 성에서 마나 과부하와 비슷한 반응을 유도하는 독이 나왔으니까요.”
에드모어 공작이 거기까지 말하곤 에시드를 힐끔거렸다. 혐의가 밝혀진 죄인답지 않게 평온한 낯이었다. 에드모어 공작이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대공께서 직접 만드신 독약이라는 것도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증명됐으며, 모두 증거로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럼 내 죄는 더욱 무거워졌겠군. 어머니까지 시해했으니.”
에시드가 제 죄질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를 본 진이 얼굴을 굳히며 메마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대답을 촉구했다.
“마법사뿐 아니라 아네모네 황비와 관련되어 있거나, 반란군인 줄 몰랐던 자가 대거 이 독에 의해 죽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반란군의 수장이면서 왜 반란군이 손해 볼 일을 하셨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그저 나를 따르지 않아 버린 패일 뿐이네. 어머니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혹여 반란군을 뿌리째 뽑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신 건 아닙니까.”
“…….”
에시드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붙인 진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진이 탐색하듯 그의 의중을 살폈다. 잠시 후, 에시드가 낮게 신음하듯 대꾸했다.
“어차피 내가 죽지 않으면 언제든지 반란군은 다시 생길 거다.”
“대공 덕에 반란군이 모두 색출된 상황입니다.”
“아니, 내 몸에 황족의 피가 흐르는 이상 나는 형님의 영원한 적이 될 수밖에 없어. 이게 최선이야. 날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게.”
“대공께선 도망치고 싶으신 거군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에시드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이 삶을 다 내려놓고 싶었다. 죽음이 안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뒤이어 들리는 진의 말에 에시드는 할 말을 잃었다.
“폐하께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
“대공께선 죽으면 끝이겠지만 남은 폐하는 평생 속이 곪겠지요.”
에시드가 괴로운지 미간을 좁혔다. 진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저는 반란군에게 아내를 잃었습니다. 지금도 제 무력함에 치가 떨려 잠을 설칩니다. 그럼 폐하는 어떠실까요?”
“알고 싶지 않네.”
“아뇨, 아셔야 합니다. 아끼던 동생이 저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어 악역 행세를 했다는데 그 마음이 찢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에시드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공작의 표정은 비교적 덤덤했다.
“대공께서는 비겁하십니다.”
“…….”
“반란군의 수장을 살리는 건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월권이나 마찬가지인 일입니다.”
단호한 그의 음성에 에시드가 침음했다. 괴로웠다. 그저 삶이 힘들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 같은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냥 제 식대로 애정을 표현하면 될 거라 생각했을 뿐. 그 뒤에 남을 황제의 감정 따위는 아예 돌아보지 못했다.
“알고 있네. 황제의 자리는 공을 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지. 내가 사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아네.”
“아뇨, 틀렸습니다. 황제께서는 대공을 살리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뭐?”
에시드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진 에드모어는 그런 그를 보며 담담히 선언했다.
“사형은 그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 죽는 것은 허수아비입니다. 폐하께서 쇼를 벌이려 하신다는 말입니다.”
“잠깐만…… 이보게, 에드모어 공작.”
“대공께서는 오늘부로 모든 작위를 잃으실 것이며, 새로운 신분으로 다른 곳에서 살게 되실 겁니다.”
“하…….”
에시드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진은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는 제국에 발을 들일 수 없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도 안 됩니다. 이왕이면 평범한 여인과 만나 가정도 꾸리십시오.”
“…….”
“살아가십시오. 살아남아 당신의 인생을 살라는 것이 폐하께서 대공께 드리는 벌입니다.”
진이 황제의 뜻을 다 읊을 동안 에시드의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울먹울먹해진 눈에서 어느새 말간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에시드는 흐느끼듯 엎드려 통곡했다.
* * *
밀리안은 비밀리에 에시드에게 편지를 전해 받았다. 에시드에 대한 황제의 징벌은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벌을 내리기 전 수년간 반란군을 뒤쫓은 에드모어 가문과 레이첼 가문의 동의를 구했다.
황제에게는 사랑하는 동생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원수 같은 반란군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십여 년을 부부로 위장한 채 살면서 따랐던 명령이 반란군 토벌이었다.
황제 자신의 결정이 그들의 수고를 허무하게 하는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황제임에도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기실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후 황명으로 충분히 진행할 수 있는 일임에도.
모든 내막을 전해 들은 레이첼 후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거림에 수많은 생각이 담겨 있었으나 그저 보이는 것은 가벼운 주억거림 뿐이었다.
에드모어 공작 역시 황제의 뜻을 존중했다. 전부터 에시드가 반란 의지가 없었다는 걸 현장에서 눈치챘으므로.
자연스럽게 밀리안도 에시드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곧 사형이 집행될 거고 에시드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밀리안이 그의 편지를 뜯었다. 정갈한 글씨들이 눈에 띄었다.
[그레이 크로이드의 실험은 영류를 이용한 융합 실험이었네.
너무 많은 영류를 빼앗겨 영혼에 무리가 간 상황일 테니 섣불리 독을 쓰면 위험해.
아마 마비가 이미 진행되고 있을 거네. 그 마비가 점점 영류를 갉아먹어 죽게 만들 테지.
솔직히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조언은 하나의 가설이라 생각하고 신중히 결정했으면 하네.]
영류 분리에 관한 실험 계획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정령사는 선천적으로 영류를 갖고 태어나지만 일반인들은 영류가 없었다. 현재 그레이가 겪는 병은 영류의 이상 반응에 의한 부작용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영류만 없다면 사라질 증상이라는 것이다. 에시드가 말하고 있는 가설은 역으로 영류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계획서에는 영류가 완전히 고갈되어 영혼이 파괴되기 전에 영류 자체를 없애는 실험에 관해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방법이었고, 성공하더라도 다시는 정령사로 살지 못하게 되는 일이었다. 밀리안이 고민에 빠진 얼굴로 가볍게 책상을 두들겼다.
그때 돌연 낯익은 기운이 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쩐지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기분에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바람이 단순한 바람이 아님을 눈치챘다.
* * *
프레아가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제 그녀는 의지를 들이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상태였다. 블레이즈와 계약한 뒤로 영류는 빠르게 차올랐고, 탁해진 영류 또한 계속해서 순환시킨 덕에 많이 맑아졌다.
시에라가 환기하겠다며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였다. 따뜻한 바람에 프레아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짓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 없는 동안 그새를 못 참고 계약한 거냐.”
“……!”
프레아가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움직여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회색 털이 눈에 띄었다. 그의 금안이 몹시 못마땅한 것을 보는 듯 게슴츠레했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윈드는 강아지 정도 크기로 몸을 줄인 채 창틀에 기대어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눈에 아른거렸다.
그가 창에서 폴짝 뛰어내려 프레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앞발이 무성의하게 프레아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 순간 블레이즈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온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순식간에 영류가 차오르는 것도 모자라 정화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프레아는 놀란 나머지 입을 헤벌렸다. 기류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던 막이 뻥 하고 뚫린 기분이었다. 프레아가 성대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내었다.
“토, 토!”
오랜만에 내뱉은 목소리는 잔뜩 갈라지고 메말랐다. 성대가 울리는 느낌까지 생경했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울음 섞인 신음을 연신 내뱉었다. 울먹울먹하는 프레아를 본 토토가 움찔했다. 프레아는 몸이 완전히 가벼워짐을 느끼곤 토토를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윽.”
몸을 으스러뜨릴 듯이 껴안자 토토가 앓는 소리를 했다. 프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토토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린 토토가 정말 많이 그리웠다. 때마침 브레이크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블레이즈가 그를 보고 경악했다. 그의 얼굴빛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윈드!”
“너……?”
윈드가 놀란 눈으로 블레이즈를 바라보았다. 눈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토토의 꼬리가 바짝 곤두섰다.
프레아는 토토가 어울리지 않게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블레이즈가 반가운 얼굴로 윈드에게 냉큼 다가갔다.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네가 왜 여기 있어? 프레아, 설마 계약한 정령이 얘인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윈드가 달라붙는 불덩이를 밀쳐내며 프레아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배시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윈드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장 계약 해지해. 이 자식이 얼마나 거머리 같은 줄 알아? 이놈은 또 어디서 나온 거야? 너 또 나 추적했냐? 망할 불똥아!”
“불똥이라니. 이렇게 예쁜 불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망발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너무한 거 아니야?”
“치인구우? 네가 왜 내 친구야!”
윈드가 꽥 소리를 내지르자 불덩이가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흥! 기껏 네 계약자라고 해서 특별히 이 한 몸 희생해 정화시켜 줬더니 정말 너무하네!”
“네가 안 해줘도 어차피 내가 돌아와서 할 생각이었어!”
윈드가 블레이즈에게 으르렁거렸다. 아웅다웅하는 두 정령을 보며 프레아가 볼을 긁적였다. 친구가 아니라고 성내긴 해도 토토가 저렇게 다른 정령에게 동요하는 건 처음이었다. 마린 앞에서는 한껏 어르신 행세를 하며 여유로운 척했으니까.
‘예전에 물비린내보다 탄내가 더 낫다고 했을 때, 토토는 블레이즈를 생각한 게 아닐까?’
프레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한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 정령의 대화에 프레아가 끼어들었다.
“사실 그때 그 정령석이 블레이즈였어.”
“……젠장. 진작 버렸어야 했어.”
“헐! 너무해!”
블레이즈가 푸른 불이 되었다가 흰 불이 되었다가 다시 붉어지며 소리쳤다. 잔뜩 서운한 기색을 띤 블레이즈가 윈드와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그 둘의 대화는 프레아가 다시금 윈드를 꽉 껴안으면서 끝이 났다. 프레아는 윈드가 다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꼬옥 끌어안았다. 토토가 질색하려다 말고 가만히 안겼다. 그녀의 몸이 얕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영 사라져 버린 줄 알았다. 그렇게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 받았다는 페널티가 무엇인지 몰라서 혹시 몸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다.
“토토, 페널티를 받았다고 들었어.”
“신경 쓸 것 없어. 그깟 페널티에 휘둘릴 정도로 내가 약한 것도 아니고.”
“미안. 내가 좀 더 차분했다면 네가 강제 해지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니다. 네가 살았으니 됐어. 이번엔 늦지 않았거든.”
토토가 앞발로 프레아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 손길이 무척 다정해서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프레아의 눈가는 여전히 촉촉했지만 슬퍼서가 아니었다. 기뻐서, 다시 만난 것이 반가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프레아가 고개를 돌리자 밀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윈드는 그가 와 있음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밀리안은 넋 나간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유자재로 말하고 움직이는 프레아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그가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제야 밀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윈드는 그의 상태를 보자마자 알 만하다는 얼굴로 블레이즈를 툭툭 건드렸다. 블레이즈는 밀리안의 반응이 제법 재미있는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우린 빠지는 게 좋겠어.”
“왜? 난 여기 있을 거야. 가려면 윈드 혼자 가.”
블레이즈가 눈치 없이 거절하더니 프레아 주변에서 알짱거렸다. 게다가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며 키득거렸다. 그 순간 윈드가 몸집을 불리며 블레이즈를 앙, 하고 물었다.
“아야! 왜 이래!”
“방해 말고 따라와.”
윈드가 잠시 블레이즈를 내려놓고 말한 뒤 다시 덥석 물었다.
“싫어, 싫어!”
블레이즈가 바둥거리며 소리쳤지만 윈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프레아가 레스트 상태로 오래 있었으니 아무리 늘 여유롭기만 했던 녀석이라도 멍청하니 서 있는 건 당연하지.’
믿기지 않을 것이다. 수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 단번에 해결되었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윈드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굳이 이곳에서까지 잘난 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윈드는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서 얼마나 미련스러워지는지 잘 알았다. 밀리안 역시 예외일 리가 없었다. 윈드가 블레이즈를 문 채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다가오다 말고 멈칫했다. 프레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얕게 일그러졌다. 프레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밀리안?”
프레아의 물음에 밀리안이 움찔했다. 가까이 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신선했다. 늘 가볍게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마치 깨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오랜만에 들은 프레아의 목소리에 밀리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멈춰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가까이 와야 칭찬해 주지.”
프레아의 재촉에 밀리안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무척 느릿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춘 밀리안을 본 프레아는 결국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당겨지는 힘에 밀리안이 휘청였다. 그가 침대 매트에 손을 짚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내려다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꿈 아니지?”
밀리안이 몽롱한 어조로 물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프레아의 볼을 매만졌다. 머뭇거리는 손가락 끝이 서늘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간 미소를 지었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줄까.”
“…….”
프레아가 밀리안의 팔을 더욱 끌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상체가 프레아에게 더욱 기울어졌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건 답례고…….”
밀리안은 바닥을 짚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아서였다. 어느새 완전히 가까워진 얼굴. 프레아의 푸르스름한 보랏빛 눈동자가 생기를 띠며 밀리안을 응시했다.
숨소리가 한데 얽힐 만한 거리였다. 밀리안은 여전히 돌이 된 것처럼 멍하니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다시금 입술이 포개어졌다. 말랑말랑한 입술, 그 사이로 혀가 빼꼼 고개를 내밀곤 가볍게 입술을 훔쳤다. 밀리안이 입을 벌려 맞이하려는데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사라진 온기에 밀리안이 멍한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키스하는 줄 알았는데.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발을 쏙 빼버리다니. 넋 나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밀리안을 보며 프레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건 유혹.”
“미치겠네.”
밀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프레아의 허리를 바짝 붙들었다. 다시는 입술을 뒤로 빼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었다. 프레아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때, 꿈 아니지?”
“글쎄, 난 확인이 더 필요한데.”
밀리안이 눈을 요사스럽게 내리깔았다. 프레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그대로 프레아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베어 물었다.
* * *
진과 에밀리가 침실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곧 대대적인 반란군 숙청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랜 세월 공들여 추격하던 일이 드디어 끝맺는 순간이었다.
“이 연극도 끝이 나려 하네요.”
에밀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목표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랫동안 끌어온 일이었고, 이젠 마무리만이 남았다.
에밀리가 진을 응시했다. 이제는 이렇게 부부 행세를 하며 얼굴을 마주 볼 이유도, 함께 살 이유도 더는 없었다. 조금 후련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공작께선 이젠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요. 이것 말고는 달리 생각해 둔 것이 없어서…….”
진이 힘없이 대꾸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했다. 그러나 아무리 복수했다 한들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잡고 매달릴 무언가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을 잡고 살아야 하나.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했다. 진이 피식 웃으며 에밀리에게 되물었다.
“후작께선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저도 달리 생각해 둔 일이 없네요.”
에밀리가 쓴웃음을 내뱉었다. 뒷일을 생각하기엔 주어진 삶이 늘 바빴다. 그리고 지금은 그레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분명 숙원 사업 같던 반란군을 처리했음에도 한구석이 찝찝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병을 고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스스로도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련한 사람. 고집불통에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사람.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왜 숨어 있어서 저를 슬프게 하는지. 에밀리는 그레이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진이 사색에 잠긴 에밀리를 응시했다. 그녀가 하는 고민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에밀리는 저와 달리 사랑하는 연인이 살아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녀가 그에게 화가 나 있지만 진은 알았다. 여전히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녀는 주저했다. 아마 진과의 관계 때문이리라.
‘모든 것이 끝난 이 시점에서 곧장 그에게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거겠지.’
에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이 봤을 때 그녀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익숙함에 무뎌지는 존재다. 아무리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해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진은 그녀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실수하지 않길 바랐고,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그녀가 먼저 말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먼저 말할 차례였다. 마무리는 확실해야 좋으니까.
진이 에밀리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혼 서류였다. 정갈한 필체로 그의 사인이 기재되어 있었다. 에밀리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흐렸다.
“이렇게 빨리 이혼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직 프레아도 알지 못하는데…….”
“뒤로 미루기엔 시간이 없으니까요.”
“…….”
“당신이 고민에 빠져 있다는 건 진즉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그레이 크로이드겠지요.”
“……진. 미안해요, 나 혼자만…….”
에밀리가 뒷말을 삼켰다. 진은 같은 상처를 지닌 동료였고,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파트너였다.
그런데 이제는 처지가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연인을 잃은 상태였으나 그녀는 연인이 살아 있었다. 곧 죽는다 할지라도 살아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컸다.
“저는 괜찮습니다, 에밀리.”
“…….”
“정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주저하지 말고 가십시오.”
진이 펜을 내밀었다. 서류의 공란에 사인하라는 암시였다. 에밀리는 아무 말 없이 진을 응시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봐야 후회가 없는 법입니다.”
“고마워요, 진.”
에밀리가 연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저는 조금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해야겠습니다. 밀리안 그 녀석 문제도 있고요.”
진이 가벼워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니 밀리안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밀리안이라는 말에 에밀리가 피식 웃었다.
“이미 그 두 사람 잘되어가고 있대요.”
“예?”
“결혼하고 싶다네요.”
“……정말입니까?”
진이 얼빠진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에밀리는 이미 내란이 일어나던 당시 프레아가 블레이즈를 통해 밀리안에게 했던 말을 모두 들었다.
자신의 딸이 깜찍하게도 저를 속여왔다는 걸 눈치챘을 때, 에밀리는 황당했지만 한편으론 안심했다. 오랜 시간 가족으로 살았다. 에밀리는 프레아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공허감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그가 위장 결혼을 제안했을 때, 에밀리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잠시라도 프레아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설령 모든 일을 마치고 이혼하게 되더라도 진이 계속해서 프레아에게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밀리안이 프레아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철렁했다. 프레아가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만약 잘되지 않는다면 에드모어 공작과 서먹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이제 우리 사돈이 되겠네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 실로, 해피 엔딩이었다. 에밀리가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진이 그런 에밀리를 보며 덩달아 미소 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돈.”
* * *
“밀리안.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프레아가 저를 꼭 끌어안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그를 향해 부루퉁하게 물었다. 벌써 여러 차례 꿈같다며 제 입술을 물고 놔주질 않은 탓이었다.
입술이 따끔따끔했다. 음흉한 손길이 더한 짓을 하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때와 장소란 게 있는 거니까. 이곳은 에드모어 성이었고, 이러고 있다가 다른 사용인들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밀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귓불에 숨을 후, 하고 불었다.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행위였다. 더운 숨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읏! 하지 말라니깐. 꿈 아니라고 눈치챈 거 다 알아!”
“……들켰어?”
밀리안이 사르르 눈웃음을 흘리며 나른한 말투로 물었다. 이제야 눈치챈 거야? 하는 눈빛이었다. 어느새 여유를 갖춘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그가 프레아의 입술에 다시 한번 도장을 찍듯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밀린 칭찬 몰아서 받는다 생각해.”
“입술이 아리단 말야.”
“그럼 다른 곳에 입 맞춰도 돼?”
그가 시선을 아래로 깔며 말했다. 프레아가 흑심 가득한 밀리안의 눈길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여기 에드모어 성이야! 들키면 어쩌려고!”
“못 들어와. 문 잠갔어.”
“……언제 잠갔어?”
프레아가 한 방 먹은 얼굴로 되물었다. 분명 저와 마주치자마자 놀라서 굳었던 그였다.
눈가까지 촉촉했었는데……. 그 사이에 문까지 잠갔다고?
프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밀리안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너 움직이는 거 보자마자.”
“…….”
프레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그사이 그가 안고 있던 프레아를 침대로 확 밀쳤다. 프레아의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침대에 흐드러졌다. 밀리안 때문에 부어오른 입술이 반들거렸다. 밀리안이 잔뜩 내리깐 눈으로 프레아를 보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 허락해 줘.”
밀리안이 프레아의 어깨를 슬슬 매만졌다. 프레아는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원피스는 종아리까지 닿는 길이였는데, 그가 치마에 가려진 프레아의 무릎을 가볍게 쓸었다. 덩달아 치마가 올라가 프레아의 허벅지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밀리안이 제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툭, 하고 단추 하나가 풀어지는 걸 본 프레아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말렸다. 밀리안은 말리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프레아는 단호했다. 그녀는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보고 굳은 게 놀라서가 아니었어? 어울리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입까지 맞췄었는데!’
문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정신에 문을 잠갔다?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밀리안은 많이 놀라 보였었다.
그 상황에서 문을 잠근 행동은 치밀해도 너무 치밀했고, 수상해도 한참 수상했다.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아가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 요망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너무 예쁘게 웃는데 어떻게 해 그럼.”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의 눈이 커졌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에 슬그머니 깍지를 꼈다. 그가 손을 꽉 잡으며 애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못된 생각이 들었다. 프레아가 엄한 얼굴로 밀리안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 돼.”
“왜 안 돼?”
“여긴 에드모어 성이니까.”
“그럼 테일러스 성에 가면 돼?”
“아니. 그것도 안 돼.”
“…….”
밀리안이 뭐 하는 거냐는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그러면 언제 되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프레아가 그 모습이 우스워죽겠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밀자 그가 순순히 밀려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순순히 포기한 밀리안을 보며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밀리안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프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어깨를 붙들며 외쳤다.
“뭐 해?!”
“여자 친구가 수줍어하니 다른 데 가서 마저 하려고.”
“야아!”
프레아가 내려달라는 듯이 바둥거렸다. 말도 없이 테일러스 성에 갔다간 가족들이 걱정할 게 뻔했다.
하지만 밀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대로 뛰어내릴 것처럼 한 발을 창틀에 가져다 대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점심 드실…… 도련님?”
아가씨 납치 현장을 목격한 시에라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딱 봐도 밀리안은 당장 뛰어내릴 기세였으니까. 프레아가 당황해 밀리안을 응시했다.
“문 잠갔다며…….”
“이것도 들켜 버렸네.”
“너 진짜…….”
프레아가 허탈한 얼굴로 밀리안을 나무랐다. 어쩐지 치밀하게 문을 잠갔다고 하기엔 무척 놀라 보였었는데. 그녀가 본 게 맞았다. 평소와 달리 떨리던 손이며, 애절한 눈빛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던 거다.
밀리안이 워낙 천연덕스러워 홀라당 속아 넘어갔다. 정말 그의 말을 믿고 그대로 일이라도 치렀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프레아가 몹시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밀리안은 계획이 실패하자 조용히 프레아를 내려놓았다. 그는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시에라를 응시했다.
* * *
프레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성에 퍼졌다. 시에라는 밀리안과 멀쩡하게 대화하는 프레아를 보며 감격스러워했다. 시에라 덕에 동네방네 프레아의 상태가 알려지자 밀리안은 조금 못마땅한 기색을 띠었다.
좀 더 둘이서 오붓하게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것이 무마된 탓이었다. 에밀리와 진이 소식을 듣자마자 프레아의 방으로 찾아왔다.
에밀리는 배시시 웃는 프레아를 보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진은 안심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영영 이 미소를 못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했단다.”
에밀리가 프레아의 볼을 매만지며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프레아도 에밀리를 보자마자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마법사들을 조심하라고 주의 주었던 어머니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 대가로 벌이라도 받은 것처럼 폭주했고, 영영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을 뻔했다. 잊어버린 진실이 있었다. 에밀리가 알아야 했던, 이미 늦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심지어 에밀리가 재혼하기 이전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그레이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었다. 그 일만 마치면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저 아저씨가 저를 보고 기다려 달라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다려 달라는 부탁의 대상은 자신이 아닌 어머니였다. 결국 그날 그가 준 꽃은 영영 에밀리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기억을 잃어버렸으니까.
“엄마, 미안해요.”
‘눈치가 없었어요.’
‘아저씨가 아빠인 줄도 몰랐고, 사정상 어머니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모든 게 다 망가진 것만 같아요.’
프레아는 어느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울먹거렸다. 뒤에 있는 진에게 괜히 죄스러웠다. 그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울음을 터뜨린 프레아를 에밀리가 부드러이 안아 토닥거렸다. 진과 밀리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프레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녀가 에밀리를 향해 두서없는 말을 터뜨렸다.
“엄마, 나 어릴 때 아버지를 만났어요.”
“……!”
에밀리의 토닥거림이 멈추었다. 순간의 정적 이후 프레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내가 엄마한테 꽃 줬던 거, 그거 사실 아버지였어요. 내가 아니라.”
“…….”
“흐윽! 몰랐어요. 잊어버렸어요. 내가 고집부려서, 아빠가 마탑주한테 잡혀갔어요. 그날 토토랑, 계약하게 됐는데…… 히끅.”
“천천히…….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하렴.”
에밀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밀리안은 갑작스럽게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레아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진이 조용히 밀리안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녀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하자는 뜻이었다. 밀리안도 그 의견에 동의해 진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프레아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준 진에게 고맙고 또 죄송했다. 그레이가 낳아준 아버지라 애틋하다면, 진은 키워주고 보살펴 준 아버지라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기다려 달라고, 그 말 전해달라 했는데 내가 바보같이 잊어버렸어요.”
“……그랬구나.”
에밀리는 프레아를 다시 토닥이기 시작했다. 프레아의 눈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을 주르륵 흘려보냈다. 에밀리가 프레아의 눈가를 부드러이 닦아주었다. 엄마 앞이라서 그런지 프레아가 눈물을 계속 흘렸다. 멈출 기미가 없었다.
“사실 매튜가……!”
“이미 알고 있단다.”
“……!!”
“매튜가 아버지라고 말하려던 거지?”
“……알고 계셨어요?”
프레아가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에밀리를 응시했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버지는 얼마 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어머니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매튜와 에밀리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관계였다. 차라리 아버지가 멀쩡했다면 조금 덜 안타까울지도 몰랐다. 아버지도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상태는 심각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할뿐더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에밀리도 알고 있을 터. 혹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흔들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건 진을 배신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프레아는 너무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딸꾹질했다. 에밀리는 그런 프레아를 보며 울듯 말듯 미소 지었다.
프레아는 불안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는 몰라도 중대한 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달싹이더니 끝내 말을 이었다.
“프레아, 네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엄마…….”
“이 이야기가 네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안 돼요. 공작님이 불쌍해요.”
프레아가 에밀리의 말을 끊었다. 에밀리는 입을 다물고 잠시 무언가를 갈무리하는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미 진도 다 알고 있단다.”
“……네?”
“엄마가 얘기하려던 건 더 오래된 이야기야. 엄마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이상하지 않았니? 엄마는 늘 집과 황성만 오갔던 일벌레였잖니.”
갑자기 결혼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간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프레아는 어머니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프레아가 그때를 더듬더듬 떠올리며 대꾸했다.
“이,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일하다가 만난 사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엄마가 수도에 있는 에드모어 성으로 이사까지 했잖아요. 내가 수도에서 살자고 할 때는 안 된다 했으면서…….”
프레아가 잠시 숨을 고른 뒤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저는 엄마가 정말로 공작님을 많이 사랑해서…….”
“에드모어 성으로 온 건 너 때문이었어. 네가 안전하게 정령술을 익힐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프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 때문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에드모어 성에 온 뒤 브레이크를 소개받았다. 그와는 아공간에서만 훈련했고. 늘 브레이크가 성으로 먼저 찾아왔으며 그녀는 기다리기만 했다.
정령술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그와 만나는 것도 비밀이었다. 철저하게 성에서만 정령술을 사용했고, 외부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레이첼 성이었다면 불가능했을 비밀 훈련이었다. 레이첼 가문은 아공간을 만들 정도의 대규모 마석 보급이 불가능했으니까.
프레아가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에밀리를 응시했다. 그녀가 했던 질문이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이상하지 않았냐는 질문. 엄마의 재혼에 왜 이상함을 느껴야 하는 걸까.
어딘가 미심쩍었다. 에밀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프레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더는 너를 속이고 싶지 않아.”
“엄마,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시려는 거예요…….”
프레아가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말이 나오든 충격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에밀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엄마는 한 번도 진 에드모어를 사랑한 적 없단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야.”
“……!!”
“우리는 반란군 토벌을 위해 황명을 받아 위장 결혼을 했어.”
프레아가 몸을 휘청였다.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몰라 어지러웠다. 위장 결혼이라니? 그것도 황명을 받았다니. 그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에밀리가 그런 프레아를 꼭 붙들었다.
“놀랐겠지.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단다. 반란군에게 정말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였어야 했거든. 네가 알았다면 그게 안 되었을 테니까…….”
에밀리가 프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거렸다. 에밀리는 프레아가 한차례 몸을 휘청였을 때부터 훅 몰려온 죄책감에 어쩔 줄 몰랐다. 딸아이를 오랜 시간 속여왔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가짜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좋아했던 프레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프레아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밀리안. 밀리안은 설마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처음부터 누나였던 적이 없다는 말을 했었던 걸까.
프레아가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밀리안은 한 번도 에밀리를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냥 죽은 어머니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가 알고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밀리안도 알고 있었어요?”
“……알리려고 했던 건 아니란다. 우연히 결혼식에서 우리 이야길 들었다고 했어. 우리도 밀리안이 알고 있는 걸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야 알았단다.”
“그럼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밀리안이 누나로 안 봐준다고 속상해하고, 밀리안이 좋아져서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포기할 수 없어 자괴감에 빠지길 반복했던 거네요.”
프레아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밀리는 프레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움찔했다. 밀리안이 누나로 봐주지 않아 속상했다는 말이, 밀리안을 좋아하는 것에 괴로워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프레아는 레이첼 에드모어라는 울타리를 지키고 싶어 했을 거다. 그래서 밀리안에게 끌리면서도 계속 남동생이니까, 라는 말을 주문처럼 사용했을지도 몰랐다. 만약 위장 결혼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런 고민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프레아…….”
에밀리가 미안한 마음에 프레아의 손을 쓸었다. 프레아가 화를 낸다면 기꺼이 받겠다고 다짐했다. 화낼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프레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프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밀리안에겐 제가 계속 모르는 거로 해주세요.”
“뭐?”
“조금 괘씸해졌거든요. 맘 아프게 한 만큼 제대로 복수할 거예요. ……그렇다고 엄마한테 난 화가 아예 풀렸다는 말은 아니에요. 당분간 엄마랑 안 놀 거니까.”
“프레아…….”
생각보다 부드러운 반응에 에밀리가 애틋하게 프레아를 불렀다. 안 놀 거라는 말에 힘을 주긴 했어도 그 안에 담긴 애정을 느낀 탓이었다. 프레아가 에밀리의 손을 꼭 붙들었다.
“누가 뭐래도 공작님이 지난 십여 년간 제 아빠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맞죠?”
“당연하지.”
“그럼 그걸로 됐어요. 엄마도 제게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던 거잖아요. 덕분에 아빠 없는 설움은 없이 자랐어요.”
“프레아…….”
“그러니까 엄마, 우리 더는 빙빙 돌아가지 말아요.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없잖아요.”
에밀리는 프레아가 훌쩍 커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기엔 시간이 없다는 말이 그레이의 병을 말하는 것쯤은 단번에 알았으니까. 아마도 프레아는 속상하고 충격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낼 생각인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시집가도 되겠어.”
“안 그래도 곧 갈 거 같아요.”
프레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딸의 당돌한 말에 에밀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에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허락해 주실 거죠?”
* * *
진은 밀리안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부자 사이에는 특별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진이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밀리안을 붙잡았다.
“잠시 이야기하자꾸나.”
“예.”
짤막한 대답과 함께 밀리안이 진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진은 서재에서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반란군은 모두 토벌되었다. 이제 에시드는 곧 공개 처형을 당할 것이다. 물론 진짜 에시드는 이미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였지만.
밀리안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진은 밀리안이 처음 청혼장을 들고 와 성안을 발칵 뒤집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대로 들키는 건가 싶어 조마조마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밀리안이 꽤 많은 도움을 준 셈이었다. 당시엔 숨기는 것에 급급해서 밀리안의 제안을 넙죽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무척 간단한 내용이었다. 자신이 프레아에게 작업을 걸어도 모른 척해주는 것과 뒤에서 보조해 주는 것이었다. 사실 제안을 받으면서도 나중에 프레아에게 설명해야 할 때가 걱정되었다.
만약 프레아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이미 위장 결혼이라는 것만으로도 충격일 텐데, 밀리안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밀리안의 외사랑이었다면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는 걸 전해 듣고 안심이 되었다. 만약 밀리안의 일방적인 애정이었다면 지금의 관계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을 테니까.
“프레아에게는 언제 말할 생각이냐.”
“조금 더 안정된 뒤에 말할까 합니다.”
진의 물음에 밀리안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진과 밀리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이미 에밀리와 이혼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반란군의 처형과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는 대로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할 생각이었다.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그레이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에밀리는 그럼에도 그와 끝내 하지 못했던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니 밀리안이 프레아를 설득하도록 시간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황제에게 보고를 마치면 자연스럽게 결혼이 황명에 의한 위장이었음이 공표될 터.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 에드모어와 레이첼은 다시 남이 된다. 결혼은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다. 에밀리는 레이첼 성으로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곧 이혼이 진행될 거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밀리안이 조금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프레아가 두 사람의 위장 결혼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직 심신 안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위장 결혼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은 조금 섣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은 단호했다.
“더 미루기엔 시간이 너무 없구나.”
“시간이 없다는 말씀은…….”
“나도 널 생각해서 미루고 싶지만 정말 시간이 없구나. 그러니 하루빨리 네가 먼저…….”
“혹시 그레이 크로이드 때문입니까?”
“……!!”
진이 밀리안의 입에서 그레이라는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밀리안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 조목조목 진실들을 알아내는지 항상 한발 앞서 있는 느낌이었다. 진이 넋 나간 얼굴로 밀리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냐.”
“그가 매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허어…….”
매튜가 그레이 크로이드라는 것도 안다는 말에 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정말 제 아들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어느 틈에 그 모든 것을 알아낸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감이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이제는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이 푸념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혹여 아는 이야기가 더 있다면 숨기지 말아라. 물론 지금보다 놀랄 만한 이야기는 없겠다만.”
“사실 에시드 대공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그레이 크로이드에 관한 일입니다.”
“무슨 소리지?”
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에시드 대공이라는 이름과 그레이 크로이드가 같이 불렸기 때문이다. 밀리안이 진을 보며 담담히 설명을 이었다.
“예전에 마탑에 잠입했을 때, 그가 만든 폴리 사탕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마법 세공력이었죠. 에시드 대공이 발명 쪽으로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과 그레이 크로이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진이 쓸데없는 서론은 그만두라는 어조로 반문했다. 밀리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에시드 대공에게 그레이 크로이드를 살릴 방안을 알아내라 요구했습니다.”
“……지금 대공을 협박했다는 말이냐?”
“그럼 제가 무엇 하러 그를 살렸겠습니까.”
밀리안이 진의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진의 눈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흔들렸다. 아무리 대공이 역적이라고 해도 그는 황족이었다.
진은 밀리안이 대놓고 대공을 협박하고 왔다는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렸다. 밀리안은 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계획을 풀어냈다.
에시드 대공에게 받은 계획을 기반으로 실험을 해야 했다. 에시드 대공이 직접 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는 신분을 숨기고 타국으로 옮긴 상태였다.
그러니 에드모어 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한 본인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실험에 성공한다고 해도 더는 정령사로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이미 대공에게 얼추 실험 계획에 대해 전달받았습니다. 제가 맡아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 일은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위험한 실험은 아니겠지?”
“프레아에게 미움받을 짓을 제가 할 리 없잖습니까.”
“하아, 너란 녀석은 정말.”
진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책상을 짚었다. 잠시 뒤, 진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말해라. 다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밀리안이 사무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성공이 확실한 실험은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관계로 최대한 모든 것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저와 프레아가 결혼할 때도 그가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편이 더 프레아가 기뻐할 테니까.
* * *
윈드는 프레아에게 가기 전 그레이에게 루이스를 맡겼다. 그레이는 윈드가 데려온 루이스를 보고 경악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해진 살이 한눈에 봐도 처참했다.
그녀의 상태를 점검하자 경악은 더욱 깊어졌다. 스승님이 막았던 실험을 그녀는 기어이 제 몸에 해냈다. 그녀의 몸속에는 정령의 영혼이 융합되어 있었다.
언령으로 단단히 묶인 영혼은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온몸을 태울 듯이 기승을 부렸다. 윈드가 막아놓은 탓에 그 불이 전신에 퍼져 불타 죽는 위기는 벗어난 상태였다.
루이스 안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아직 그녀에게 갚아줄 것이 많았고, 해야 할 말도 있었다. 그레이는 윈드에게 들었던 언령을 그대로 해독하여 영혼을 분리했다.
정령은 영혼이 분리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이미 목걸이에 포박되어 있던 것도 풀린 상태라 가차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도망친 것이다. 아마도 페널티를 받는 쪽이 더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도주 위험이 있는 자였다. 하여, 그레이는 에드모어 공작에게 요청해 그녀를 성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레이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프레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장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곳에서 그는 가족이 아닌 남이었으니까. 가족들의 만남에 그레이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프레아가 건강해진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또한 윈드 덕에 도망간 루이스 안을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죽기 전에 스승님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의 정체가 세리나 마그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레이는 바로 브레이크를 통해 일을 진행했다. 이미 블레이즈에게 증거를 모두 되돌려 받았기에 서둘러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당사자인 루이스 안까지 생포했으니 복수는 더더욱 박차를 가할 터. 아마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레이.”
그때였다. 사색에 잠겨 있는 그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레이가 짐짓 몸을 떨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으니까. 에밀리였다.
그레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머뭇거렸다. 한참 대답이 없으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가버렸나 하고 아쉬워지려는데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못했다. 아니, 감히 그러질 못했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긴장해서 어쩔 줄 몰랐다. 에밀리가 그를 찾아온 건 그녀에게 정체를 들킨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 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공작부인이 된 상태였으니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라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등에 작은 손이 닿았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어깨가 들썩였다.
에밀리가 그의 팔뚝에 그려진 실험의 흔적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아래로 향하더니 그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한참 아무 말 없던 에밀리가 속삭였다. 어쩐지 목소리가 무척 젖어 있었다. 울다 온 것처럼.
“이젠 내 얼굴도 보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가만히 있지 말고 나 봐.”
에밀리의 단호한 음성에 그레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에밀리가 가만히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레이는 아니나 다를까, 눈가가 붉은 에밀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때 에밀리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가볍게 떼어냈다. 가면을 거두니 그리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에밀리가 아무 말 없이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레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에밀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레이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이미 그녀가 붙든 왼손에는 감각이 없는 상태였다.
“우린 이러면 안 돼.”
그레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어버렸으니까. 그녀가 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을 향한 애절한 눈빛이 여실히 드러나 실수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여전히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악감이 몰려왔다. 에밀리는 이미 진 에드모어의 부인이었다. 혹여 이러고 있다가 공작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저는 물론이고 에밀리까지 크게 데일지도 모를 일이다. 가뜩이나 제 형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레이는 설 곳 없는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에밀리에게 이 이상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에밀리가 멀어진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곤 담담히 선언했다.
“나 이혼해.”
“에밀리……?”
“그러니까, 그레이.”
아차 하는 사이 에밀리가 그레이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 덕에 그레이의 상체가 에밀리에게로 기울었다. 그레이가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에밀리를 응시했다.
이혼이라니? 설마 곧 죽을 자신 때문에 이혼까지 하려 한단 말인가? 왜 그렇게까지…….
그레이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에밀리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죽을 생각 그만하고 살아서 나랑 결혼해.”
“…….”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잠깐…….”
그레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두서없이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뒷말은 나올 수 없었다.
에밀리의 입술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여라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레이는 도무지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꾹 참고 눌러왔던 것이 터져 나왔다. 그레이의 오른손이 에밀리의 가는 허리를 꽉 붙들었다.
조금만 더 욕심내고 싶었다.
* * *
음침한 지하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세리나는 화상을 입은 고통보다도 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절망하여 울부짖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버렸다. 거기다 비넷을 되살리는 것까지 실패해 크게 낙심했다. 세리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윈드 샬로만데라는 또 저를 살려냈다.
살고 싶지 않다는데.
살기 싫다는데.
저를 기어이 또 살려내다니.
세리나는 이제 그와의 인연이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윈드에게 비넷의 영혼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걸 들었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령사의 폭주가 영류가 고갈되어 영혼이 파괴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걸 협회장인 세리나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희망을 품었다.
아직 파괴된 영혼까지 소생시킨 사례가 없을 뿐이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희망을 붙잡으며 살았다. 혹여 실패하면 저도 죽을 생각이었다.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
정령을 인간의 영혼에 융합하는 것은 잠시간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흑마법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아 정령의 영혼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제 영혼까지 파괴될 걸 알고도 벌인 짓이었다.
비넷을 살릴 수 없다면 삶을 다시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세리나는 도저히 그 사람을 기억한 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잊은 채 살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스 안.”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세리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죽었거나 반병신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프레아가 멀쩡히 살아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윈드가 강제로 계약 해지를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멀쩡히 서 있을 리가 없었다.
“하하…….”
세리나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비넷이 폭주했을 때는 죽도록 내버려 두었으면서. 윈드를 향한 원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세리나가 맨바닥에 짚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프레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증오가 차올랐다. 세리나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프레아를 보았다.
반면 프레아는 초라해진 그녀를 무감한 얼굴로 응시했다. 이미 블레이즈에게 모든 것을 들었다. 그녀의 정체도, 윈드와의 관계도, 모두. 참 어처구니없는 악연이었다.
다른 걸 떠나서 루이스 안은 아버지의 원수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마법사의 실험체가 되도록 종용한 자였고, 저와 윈드의 계약을 방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에밀리는 그레이의 생사도 모른 채 살아야 했고, 프레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다. 프레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방금 뱉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원래는 세리나 마그누스였죠, 당신.”
“다 들었군요. 그럼 당신이 살아 있는 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겠네요.”
세리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꼭 죽기를 바랐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프레아는 예전과 달리 그녀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윈드에게서 전후 사정을 모두 들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를 찾아온 건 윈드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프레아는 두 사람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세리나 마그누스와 윈드 샬로만데라의 일이니까.
그녀가 얘기 나누고 싶은 건 세리나 마그누스가 아닌 루이스 안과의 일이었다. 프레아는 세리나에게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조만간 재판이 시작될 겁니다. 당신은 사사로운 일로 협회를 쥐고 흔든 것도 모자라 선량한 정령사들을 숙청했습니다.”
“…….”
“나아가 정령석을 마탑에 밀반입시킨 건까지 있죠. 이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무슨 증거로 날 재판에 회부한다는 거죠? 증거는 없을 텐데.”
세리나가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불덩이에 그녀는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증거는 충분하지.”
블레이즈가 어느새 나타나 맞받아쳤다. 익숙한 불덩이에 세리나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마르크와 친한 사이였다. 마르크의 정령이었던 블레이즈를 몰라볼 리 없었다.
당시 모든 증거를 들고 도망가던 블레이즈를 정령에게 죽이라고 명했었다. 분명 제 정령이 그를 죽였다고 보고했었다.
그랬는데…… 설마 살아 있을 줄이야.
세리나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었다. 블레이즈가 돌아왔다면 분명 그 증거가 모조리 브레이크의 손에 넘어갔을 터. 여러모로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블레이즈가 잔뜩 벼른 얼굴로 화르르 타올랐다. 그녀는 그런 블레이즈를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으나 현재 세리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정령도 떠났고, 영류 상태도 엉망이었다. 어느새 프레아가 철창에 가까이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프레아가 세리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서늘히 말했다.
“당신은 불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죽이려 했지만, 나는 달라요.”
“사람을 이렇게 가둬놓고 자신은 다르다니…… 본인이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나요?”
“뭐가 모순이라는 거죠? 혐의가 있는 죄인을 붙잡아두는 건 엄연한 합법입니다만.”
“…….”
프레아의 말이 맞았다. 귀족법에는 도주 위험이 있는 죄인을 발견할 경우, 사병을 이용해 임시로 붙잡아둘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프레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세리나에게 서늘히 말했다.
“나는 합법적인 절차에 맞게 제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당신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거예요. 그러라고 있는 법이잖아요?”
“내가 잘못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요? 조금 억울하네요.”
“궤변도 참 그럴듯하게 내뱉으시네요. 설령 당신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당신의 잘못을 없애주는 건 아닐 텐데요.”
“…….”
프레아의 얼굴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저 잘못을 저지른 원수를 처단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세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하면요? 나는 정말 절박했어요.”
“사정이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프레아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세리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당신의 아버질 죽게 만든 건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저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
“제겐 당시 중요한 과업이 있었고, 본의 아니게 그걸 방해한 게 당신 아버지였어요.”
세리나는 그레이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과업을 위해 죽은 사람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비넷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프레아를 설득하려 했다.
프레아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얼마나 대단한 이유를 내세우려나 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지극히 사적이고 이기적인 변명일 뿐이었다. 잠시 뒤, 프레아가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봐요, 루이스 안. 제가 가해자의 사정까지 다 사려 깊게 이해해 줘야 하는 건가요?”
“……적어도 내겐 정말 중요한 문제였…….”
“당장에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예요.”
세리나가 억지스럽게 대꾸하려는데 프레아가 말을 끊었다. 순간적으로 불길이 세리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프레아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정 억울하면 재판관에게 호소하세요.”
프레아가 냉정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후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자 눈앞에 윈드가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프레아가 애써 미소 지었다. 윈드의 얼굴에는 한눈에 봐도 미안함이 가득했다. 프레아가 그런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윈드가 속삭였다.
“미안하다.”
“네가 왜 대신 사과해. 잘못은 저 여자가 했는데.”
“그러니까. 윈드 쟤는 너무 무르다니까.”
프레아의 말에 블레이즈가 가볍게 덧붙이자 윈드가 씁쓸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프레아는 눈치 없이 종알거리는 블레이즈를 붙들고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윈드가 온 것을 본 세리나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윈드는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 *
토토는 밤이 되어서야 되돌아왔다. 중간에 잠시 블레이즈가 불려 가기도 했으나 먼저 돌아온 블레이즈는 별말이 없었다.
“잘 얘기했어?”
프레아가 토토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세리나를 만나고 온 토토는 제법 덤덤했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토토가 기지개를 켜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뭐. 미뤄둔 일을 끝낸 것뿐이지.”
“고생했어.”
프레아가 토토의 품에 폭 안겨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표범 정도의 크기로 줄인 탓에 프레아가 토토를 안는 건지, 그에게 안긴 건지 모를 체급 차이였다.
윈드는 제게 치대는 프레아에게 그대로 기대었다. 그러고는 아까 전 일을 회상했다.
‘비넷은 폭주에 의한 영류 고갈로 죽은 게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너를 살려달라는 언령을 내뱉지만 않았어도 그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야.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렸을 테니까.’
‘거짓말하지 마! 강제 계약 해지에는 페널티가 있다고 들었어! 네가 제때 계약 해지만 했었어도 비넷은……!’
‘하! 페널티의 내용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그건…….’
세리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했다. 애초에 강제 계약 해지 페널티에 대해 아는 정령사는 드물었다. 강제로 계약을 해지할 만큼 급박한 일을 겪는 정령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윈드가 차근히 설명했다.
‘강제 계약 해지의 페널티는 같은 인간과 재계약이 어려울 뿐, 내게 크게 해가 될 건 없다. 오히려 정령사 쪽에게 부담이 가중되지.’
‘그, 그럴 리가…….’
‘영류가 바닥을 치는 때에도 비넷은 널 살려달라 언령으로 명했다. 그 여파로 영혼 소멸은 피하지 못했고.’
‘……!!’
‘나라고 네가 좋아서 살려준 건 아니라는 뜻이야. ……아무리 네가 탐탁지 않아도 넌 비넷의 부인이었어. 난 널 지킬 도의는 다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다니.’
‘…….’
‘그래. 비넷이 생명을 다해 살렸건만 너는 너무도 쉽게 자결해 버렸지. 그때 내 심정은 어땠을 것 같나?’
윈드는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세리나의 얼굴은 비참함으로 물들었다. 이날 이때껏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돌렸던 그녀는 무겁게 눌려오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윈드는 거듭 말을 이었다.
‘소중한 삶을 과거에 얽매여 무가치하게 여기지 마라. 어차피 저지른 과오…… 죽음으로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살아서 대가를 치러.’
‘…….’
‘그런 다음에 새 삶을 살아도 늦지 않아.’
‘나는 살고 싶지 않아……. 비넷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데 내가 무슨 염치로 살라는 거야?’
‘애초에 너한테 염치란 게 있었던가. 네가 비넷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의 난……!’
‘그래. 나중에 네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모든 일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어.’
‘…….’
‘난 지금 너에게 선택권을 주는 게 아니다. 세리나 마그누스.’
윈드의 엄한 경고에 세리나는 말문을 닫았다. 윈드는 잠잠해진 세리나를 두고 블레이즈를 불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언제는 귀찮게 굴지 말라더니?’
블레이즈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윈드는 그에게 과거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기억을 지워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블레이즈가 펄쩍 뛰었다.
‘미쳤어? 내가 저 여자를 도와줄 리 없잖아! 내 계약자가 쟤 때문에 죽었다고!’
‘지금 당장 기억을 지워달란 뜻이 아니다. 모든 죗값을 치른 뒤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것뿐.’
윈드는 그녀의 현생이 무너진 이유를 잘 알았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으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웠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죗값이 옅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그녀로 인해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블레이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만 약속해 줘.’
‘……무얼?’
‘난 프레아가 제법 마음에 들어.’
‘어쩌라고.’
윈드가 뚱하게 대꾸하자 블레이즈가 불똥을 튀며 이야기했다.
‘내 말은…! 네가 나를 그녀의 계약 정령으로 인정해 달라는 거야!’
‘실없기는. 이미 계약했으면서 내 인정이 필요한가.’
‘그야…… 네가 억지로 해지시키면 난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
블레이즈가 우물쭈물하며 외친 말에 윈드가 피식 웃었다. 아마도 과거에 비넷과 계약하고 싶어 하던 정령을 그가 쫓아냈듯 자신도 내쫓길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오만했던가. 계약을 하고 말고는 오롯이 계약자의 권한이었는데, 그걸 침범하려 했다니. 돌이켜 생각하니 바보 같고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윈드가 제법 다정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프레아가 괜찮다면 강제로 너를 떼어낼 생각은 없다.’
‘정말? 진짜지? 나중에 무르기 없다, 너?’
‘그래. 그러니까 시간 끌지 말고 서둘러 정리해. 오래 끌면 프레아가 걱정한다.’
윈드가 거듭 약조하자 블레이즈가 불꽃을 이용해 세리나의 앞에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 루비 같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그 반지에는 기억을 불태우는 힘이 담겨 있었다. 세리나가 망연히 반지를 보고 있자 윈드가 덤덤히 말했다.
‘모든 죗값을 다 받고 난 뒤, 그래도 그가 생각나 괴롭다면 죽으려 하지 말고 그 반지를 사용해라.’
‘나보고 너처럼 기억을 지우라고?’
세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그가 강제한다면 그녀는 거부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윈드는 선택권을 주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다. 기억을 안고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면 그대로 두어도 좋아.’
‘……너는 변했구나. 내가 알던 윈드 샬로만데라가 아닌 것 같아.’
‘정령도 사람처럼 변하게 마련이지. 너도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을 거다.’
윈드의 말에 세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후 그녀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가는 이미 촉촉해진 상태였다.
‘……혹시, 또 비넷과의 추억을 지워 버릴 거야?’
그녀의 질문에 윈드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이젠 지우지 않아. 누구 덕분에 버틸 힘이 생겼거든. 그러니 세리나, 네게도 버틸 힘이 생기길 바라.’
그렇게 안녕이었다. 지독한 악연이 되어 먼 미래인 지금에 와서까지 으르렁거렸던 세리나 마그누스와의 영원한 이별. 윈드는 조금 개운한 기분이었다.
“프레아.”
“응, 토토.”
프레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눈이 퉁퉁 부은 게 몹시 못생겨 보였다. 윈드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혀로 할짝거렸다. 주인의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동물처럼, 아주 성심성의껏. 프레아가 윈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질겁하며 물러났다.
“왜 이래!”
“그냥 계약자의 심신 건강을 위해?”
“치이, 아직 계약 다시 안 했잖아.”
프레아가 튕기듯이 말하며 입을 비쭉였다. 윈드가 그런 프레아를 앞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서 나랑 또 계약 안 해줄 거냐? 너 살린다고 페널티까지 받았는데?”
“무슨 페널티였는데?”
“그건 네가 알 거 없다니까. 어차피 금방 원상 복귀될 페널티야.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윈드가 프레아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핥으며 으르렁거렸다. 같은 정령사와 재계약할 경우 힘을 사용할 때 2배로 영류가 영향을 받는 것이 페널티였다.
말이 페널티지, 가려운 수준의 벌칙이었다. 그저 힘을 사용하는 데에 약간의 제약이 걸린다 생각하면 됐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터였다.
아마 프레아의 영류 정도면 힘이 든다는 느낌을 못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그 힘을 사용하는 저도 약간의 제약을 받아 불편하긴 하겠지만 윈드 정도의 정령이 그 정도로 힘들 리가 없었다.
괜히 이걸 말했다간 프레아가 저와 계약해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계약한 뒤에 설명할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페널티는 페널티인데, 저보다 프레아가 귀찮은 페널티였다.
프레아가 협박조로 계약을 요구하는 토토를 보며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뒤 그녀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우니까 해줄게.”
“고오맙다.”
윈드가 말꼬리를 늘이며 새침하게 반응했다. 그날 프레아와 윈드 샬로만데라는 누군가의 방해 없이,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계약을 진행했다.
* * *
프레아는 에시드의 공개 처형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조금 놀랐다. 황제가 에시드를 정말로 버릴 줄은 몰라서였다.
아마도 명백하게 드러난 역모 행위 앞에서 에시드를 두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에시드가 반란군의 수장이었으니 그의 처형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 뒤, 처형일이 다가왔다.
프레아는 귀족으로서 공개 처형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본 에시드는 조금 수척했다. 반란을 일으킨 수장이라기엔 초라한 모습이었다. 에시드는 두 손이 결박당한 채로 단상 위에 올랐다. 쏟아지는 야유와 적의가 에시드를 에워쌌다.
하지만 웅성거리는 소리와 대조적으로 에시드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프레아는 멀찍이서 에시드를 응시했다.
에시드는 프레아 쪽을 아예 보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한 얼굴로 다가올 죽음을 덤덤하게 기다렸다. 처음 황성에서 함께 반딧불이를 보았을 때처럼 무뚝뚝한 모습이었다.
에시드에게는 황족시해죄와 역모죄라는 죄목이 붙었다. 물론 아네모네 황비가 반란군의 전 수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친족살인죄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용인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개 처형은 빠르게 끝났다. 에시드는 황족이었기에 참수형이 아닌 극약을 마시는 형벌을 받았다. 에시드는 덤덤하게 독약을 모조리 삼켰다.
그를 지켜보는 데오 라즐리의 두 눈에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데오 라즐리는 반란군 중에서 유일하게 유배형에 처한 귀족이었다. 일각에서는 그 역시 마땅히 처형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황제는 기각했다.
황제는 데오 라즐리가 벤 라즐리와 달리 최근에 반란군에 참여했고, 이렇다 할 죄목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물론 그것이 에시드의 부탁이었다는 걸 아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뒤이어 줄줄이 반란을 모의한 귀족의 참수가 이어졌다. 제일 먼저 참수에 처할 사람은 크로이드 공작이었다. 프레아는 그가 목이 잘리는 장면을 피하지 않고 목도했다.
듬성듬성 올라온 수염은 지저분하였으나 덤덤한 얼굴만큼이나 눈빛 또한 차분했다. 그가 죽기 전 잠시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이 프레아를 집요히 바라보았다.
그래,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완연한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에밀리와 달리 왜 저는 푸른빛을 띠는 건지. 푸른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이 눈이 말하고 있는 의미를 이젠 알았다.
그건 프레아의 몸에 크로이드의 피가 흐른다는 증표였다. 벽안이 흔하다 해도 그 특유의 새파란 빛깔은 프레아도 어쩔 수 없는 크로이드임을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 이 눈을 볼 때마다 그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었으나 가족으로 지내본 적 없고, 오히려 남보다도 못한 원수 사이가 되어버린 저들을 말이다.
크로이드 공작의 목이 툭 떨어졌다. 붉은 핏줄기가 팟 하고 튀었다. 튀어 오르는 피에 군중은 흥분했다. 프레아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빌리앙 크로이드는 내란 도중 사망했다고 들었다. 잠시 그가 안젤리카에게 청혼하며 얼굴을 붉히던 것이 떠올랐으나 곧바로 지워 버렸다. 연이어 처형은 계속되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모조리 토벌되었다.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에드모어 공작과 레이첼 후작, 그리고 테일러스 후작은 따로 황제와 독대를 했다.
황제가 그들에게 어떤 상을 내렸는지는 그들만 알았다. 그 자리에 프레아가 불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황제의 배려였다. 황제는 프레아가 이제 막 의식을 차렸다는 것을 알았기에 추후 입궁하여 상을 받으라는 칙서를 보냈다.
그렇게 제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 * *
에시드의 죽음을 본 뒤. 프레아의 뇌리에는 에시드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강렬하게 남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보인 순전한 호의와 어두운 과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에시드는 분명한 범법자였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인 아네모네 황비조차도. 하지만 프레아는 아네모네 황비가 그에게 했던 음모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죽인 것이 단순히 반란군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였는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왠지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이렇게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그의 행동에 모순이 많아서이리라.
그가 벌인 일에는 동기가 너무 흐릿했다. 정말 반란을 하고자 한 건지 자꾸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자신을 반란군에 합류하도록 회유하는 쪽이 더 유리했을 거다.
아니면 빈틈을 노려 저를 독살하거나 없애는 방향을 선택하든가.
물론 후자가 더 적당했을 것이다. 자신이 황실을 배신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에시드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반란군과 관련 있는 마탑 사건을 알렸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빙자하여 모든 정황을 파악하도록 도왔다.
아마도 그 일을 에시드가 벌인 줄 아는 것은 데오 라즐리뿐인 것 같았다. 머레니와 데오가 여러 번 만났던 걸 감안하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키메라 실험은 반란군의 허리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반란군을 도륙하려 했다는 것치고는 반란군 쪽 피해가 심각한 일이었다. 마치 자폭과도 같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프레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에드모어와 레이첼을 완전히 적으로 돌렸다. 루이스 안이 무너지는 마탑에서 에시드를 불렀으니 그가 허락한 일임은 분명했다.
토토는 하마터면 그녀가 죽을 뻔했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저를 죽이려 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드러나는 증거들은 분명했다. 에시드가 루이스를 이용해 저를 폭주시키고 죽이려 했으니까.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심증에 불과했다. 객관적 증거도 없는 심증. 계속해서 드는 불편한 심정. 그 해답을 얻게 된 건 밀리안에게서 들은 에시드의 소식 덕분이었다.
“에시드 대공은 살아 있어.”
밀리안이 진실을 말해준 것은 프레아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도입했을 무렵이었다. 그가 뒤늦게 에시드의 생사를 설명한 것은 모두 그녀를 위함이었다. 혹여라도 프레아가 또 잘못될까 봐 걱정됐으니까.
레스트는 영류의 급격한 흐름 변동에 의한 정지 상태였다. 루이스 안이 프레아의 계약에 개입했던 것을 역으로 이용해 억지로 영류를 헤집어놓아 일어난 폭주였고, 현재도 계속 회복 중이었다.
그러니 혹여라도 또 동요하여 폭주가 일어날까 봐 노심초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뜻밖의 소식이었으니까.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곤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느릿한 입맞춤이었다. 요즘은 밀리안도 마음이 편안한지 눈 그늘이 제법 옅어진 상태였다. 무엇이 그를 편안하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잠을 꽤 잘 자는 모양이다.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알려준 거야.”
“이번에도 황명보다 나를 우선한 거야?”
“당연하지.”
“죄 많은 남자네.”
프레아가 연한 미소를 띠며 핀잔을 주었다. 밀리안이 전해준 소식은 프레아의 불편함을 가시기에 충분한 진실이었다.
에시드가 반란을 일으킨 근본적인 동기를 알게 되었으니까. 형을 위해 스스로 반란군의 수장이 되어 희생하려 했다니. 참으로 그다운 발상이었다.
“에시드는 생각보다 멍청했구나.”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거야?”
밀리안이 프레아의 턱 끝을 손으로 붙들며 말했다. 웃는 낯에는 서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프레아가 에시드 대공을 에시드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프레아는 소리 내어 깔깔거렸다. 밀리안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으나 프레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뒤, 프레아가 짧게 말했다.
“잘 살라고 전해줘. 바보같이 죽지 말고.”
“내가 죽이고 싶어지는 기분이야.”
“또 그런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너 말고 다 건어물로 보인다고.”
“흐음.”
밀리안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물론 에시드가 건어물로 보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객관적으로 그는 잘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밀리안과 비교하면 그는 그냥 훈훈한 정도였다.
물론 이건 주관적인 입장이었다. 프레아는 현재 밀리안에게 푹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프레아가 밀리안을 응시했다.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묘하게 어긋난 움직임이 있었다. 저를 쏙 빼고 쑥덕이는 사용인들 하며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마도 에밀리와 진이 곧 이혼하게 된다는 걸 제게 숨기는 동태이리라. 프레아는 착실하게 모른 척했다. 밀리안이 언제 이실직고하나 두고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역시나 밀리안은 계속해서 제게 말할 기회를 잡으려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최근 그는 이야기하다가도 계속 고민하는 낯을 띠곤 했다. 프레아는 다 알면서도 재미있어서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그동안 날 그렇게 속여먹고 혼자 일을 벌였으니 어디 한번 골머리 좀 썩여보라지.’
그런데 더 미루었다가는 이대로 이혼 사실이 공표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밀리안.”
“응.”
“어머니가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실까?”
“…….”
프레아가 시무룩한 척하며 질문하자 밀리안의 낯이 굳었다. 옆에서 현신하지 않고 둥둥 떠다니던 블레이즈가 토토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야, 쟤 좀 봐. 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어. 왜 저러는 거야?
-원래 인간들은 이상한 짓 많이 해. 굳이 왜 저러는지 생각하지 마.
윈드가 프레아의 행동을 ‘이상한 짓’으로 규명하자 블레이즈가 까르르거렸다. 밀리안은 못 듣는다 해도 그녀에겐 뻔히 다 들리는 대화였다. 결국 프레아가 공명을 통해 그들에게 말했다.
-저기, 분위기 파악 좀 해줄래? 다들 좀 나가 있어 봐.
-그래, 윈드. 재미없게 연애질하는 거 그만 보고 나랑 대련하자.
-매번 지면서 왜 자꾸 덤비는 거야, 넌.
-그야, 너랑 놀면 재미있으니까. 눈치 없이 이러고 있지 말고 피해 주자.
-내 흉내 내지 마라, 블레이즈.
블레이즈가 윈드를 톡톡 건드리며 재촉했다. 심지어 그의 말투를 따라 하며 눈치 없다고 비난까지 해대니 윈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티격태격하던 두 정령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들의 영혼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 프레아가 다시 연기에 집중했다. 밀리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향해 어두운 낯빛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 조금 시간을 뒀으면 해.”
“……뭐?”
밀리안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프레아는 그의 동요를 애써 모르는 척하며 계속 연기했다.
“사실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릴 우연히 들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 준비를 하는 것 같더라. 아마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알게 돼서인 것 같아.”
밀리안은 프레아가 위장 결혼은 모르고 이혼한다는 사실만을 알게 된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기어이 프레아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어깨를 붙들며 입을 열었다. 흐트러진 어조가 흘러나왔다.
“잠시만, 아버지와 후작님의 이혼은 우리와는 상관없어. 내가 다 설명할게.”
“왜 그렇게 확신해?”
“그건…….”
“역시 넌 뭔가 알고 있던 거구나. 그동안 알고도 거짓말한 거였어.”
“나는, 그냥…….”
밀리안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프레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자 밀리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이전에도 말할 기회는 충분했으나 밀리안은 말하지 못했다. 처음 위장 결혼임을 알았을 때는, 딱히 말할 이유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프레아가 점점 좋아지고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을 때는,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넘쳐나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밀이 하나둘 추가되었다.
밀리안은 늘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프레아에게만은 그러질 못했다. 티 내지는 않았지만 늘 초조했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에도 불안했던 건 프레아에게 알리지 않은 진실 때문이었다.
밀리안의 입술이 얕게 떨렸다. 프레아는 생각보다 밀리안이 크게 동요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으음, 뭐랄까. 왠지 울려보고 싶은 기분인데.’
뭔가 남에게 변태냐고 들을 법한 심정이었다. 프레아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선언했다.
“난 거짓말이 싫어.”
“…….”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을 떠날까 해. 결정은 다녀와서 말해줄게.”
* * *
프레아는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여행 가방을 들고 성을 나섰다. 밀리안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처연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손에 기대어 마차에 올라타자 그가 손을 느릿하게 내려놓았다. 두 눈에는 제발 가지 말라고 쓰여 있었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약 여기서 밀리안이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면 프레아는 계획을 모두 포기하고 그에게 뽀뽀 세례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밀리안은 프레아의 뜻을 존중하듯 침묵했고, 그녀는 무사히 성을 빠져나왔다.
미리 소식을 받은 에리카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입장이었지만 프레아는 굳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을 어영부영 넘어가면 그가 또 제멋대로 굴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평생 같이 살아야 할 텐데 매번 저를 속이고 일을 진행하면 곤란했다.
‘늘 비밀만 잔뜩 쌓아놓는 그 과묵한 입도 이번 기회에 가벼워졌으면 좋겠네.’
밀리안이 잠을 자지 못하는 원인도, 무섭다고 했던 이유도 어렴풋이 알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의 입으로 그동안의 행동들에 대한 이유를 모두 듣고 싶었다.
결국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셈이었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디 한번 열심히 고심하기를 바랐다.
어차피 유보해 둔 프레아의 대답은 ‘역시 네가 좋아’였지만 밀리안은 모를 테니까. 프레아가 밀리안을 좋아해서 끙끙거렸던 것처럼, 또 그가 누나로 봐주지 않는다고 속상했던 것처럼, 밀리안도 괴로워 보길 바라서 한 결정은 아니었다.
프레아가 굳이 고집스럽게 밀리안을 몰아세우는 건 순전히 그와의 관계 진척을 위함이었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밀을 만들다 보면 결국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질 테니까.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항상 프레아에게 숨기는 것이 많았다. 프레아가 마차 뒤쪽에 달린 작은 창으로 성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마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 * *
밀리안은 지옥 같은 3일을 보냈다. 프레아의 입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밀리안은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싶어 간담이 서늘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던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새 몰라볼 정도로 커져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진 상태였다. 계속해서 다음에, 다음에를 외치며 미뤄둔 진실이 결국 그와 프레아 사이에 금이 가게 한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도 그레이 크로이드의 영류 제거 실험은 차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같은 정령사인 브레이크가 실험에 참여했고, 먼 왕국에서 데려온 마법사, 마샤가 실험에 도움을 주었다. 에시드가 소개해 준 마법사였다.
사실 이 실험을 계획한 에시드가 직접 오면 더 좋았겠지만, 그는 더 이상 제국에 들어올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마탑과는 상관없는 마샤를 통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마법사가 이 일에 합류하는 것에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에시드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이라 넘어갔다. 그럼에도 실험은 생각보다 난항을 겪고 있었다.
영류를 제거하는 과정이 꽤 복잡했고, 그에 따른 합병증이 발생할 확률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플라리스와 계약한 상태로는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플라리스와 계약을 해지한다면 곧바로 죽을 거고요. 현재도 플라리스 덕에 버티고 있는 거니까요.”
“그사이를 지연시킬 무언가가 필요한데, 정령사에겐 마나 코어가 따로 없으니 조금 곤란하군요.”
브레이크와 마샤가 주거니 받거니 의견을 내놓았다. 그 사이에서 밀리안은 다른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는 예전에 윈드가 주었던 돌덩이를 손에서 주물럭거리며 괴로워했다. 얼굴빛도 좋지 못했다. 한참 실험 결과를 보고하던 브레이크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프레아 아가씨가 걱정돼서 그러십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왜 자꾸 아가씨 영류가 담긴 돌덩이를 만지작거리는 겁니까? 정신 사나우니 그만하십시오.”
“……설마 그 천재 정령사를 걱정한다고요? 아니, 그것보다 저 돌덩이에 영류가 담겨 있다고요? 그런 게 가능했어요?”
마샤가 놀라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천재 정령사는 프레아였다. 그리고 그녀가 놀란 이유는 저 평범해 보이는 돌덩이에 영류가 담겨 있다고 해서였다.
마샤가 밀리안의 손에 있는 돌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더니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얼른 돌을 채 갔다. 마샤는 한참 돌을 쳐다보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밀리안이었다면 마샤의 행동에 죽고 싶냐고 협박했겠지만 현재 그는 프레아의 생각만으로 복잡했다. 돌을 빼앗긴 것에 화도 안 내고 멍하니 서 있던 밀리안이 이내 중얼거렸다.
“찾아가면 화내겠지.”
“화내겠죠.”
“보고 싶은데.”
“어차피 내일이면 오시잖습니까.”
“내일이 얼른 왔으면 좋겠어. 아니, 안 왔으면 좋겠어. 아니…….”
브레이크가 어딜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밀리안에게 대꾸해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밀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아니, 아니를 반복하며 헛소리를 해댔다.
브레이크는 이미 프레아와 밀리안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레이를 통해 에밀리와 진이 위장 결혼이었다는 걸 듣게 된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넘어갔다.
밀리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 보러 가기 겁이 났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고, 내일이 되어 프레아가 할 말이 무서웠다.
차라리 화를 내고 저를 때리는 한이 있더라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애걸복걸하면 들어줄까?
한참 밀리안이 심각해져 있는데 난데없이 마샤가 손뼉을 치며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 그거야!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마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브레이크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른 마샤를 향해 무어라 했다. 하지만 마샤는 엄청난 발견을 한 것처럼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찾았어요. 정령과 계약을 해지하고 망가진 영류를 제거할 동안 환자를 진정시킬 방법이요. 아니, 어쩌면 영류를 아예 제거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어요.”
“뭐?”
밀리안과 브레이크가 놀라서 마샤를 쳐다보았다. 마샤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돌을 흔들었다. 마치 이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몸짓이었다. 그녀가 브레이크를 탓하듯 투덜거렸다.
“이런 게 가능하면 진작에 알려달라고요. 하여튼 정령사들은 숨기는 게 많아.”
“숨긴 게 아니라 그건 윈드라서 가능했던 일이라 말하지 않은 겁니다.”
브레이크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니, 프레아 아가씨니까 가능했던 거죠. 일반 정령사가 영류를 그렇게 분리했다간 죽거나 레스트에 걸릴 겁니다.”
“어쨌든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거잖아요. 말을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마샤는 브레이크가 억울하든 말든 그를 타박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어휴! 괜히 돌고 돌아서 환자 다 죽일 뻔했네!”
“…….”
브레이크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밀리안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덕에 브레이크와 마샤의 시선이 밀리안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보러 가야겠어.”
“이 시간에요? 지금 몇 신줄 알고 그러십니까?”
“그래요, 후작님. 지금 새벽이에요. 아가씨도 주무시고 계실걸요?”
밀리안의 말 한마디에 브레이크와 마샤가 동시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밀리안은 확고했다.
“아니. 갈 거야. 역시 다 말해야겠어.”
“아니, 뭘 말입니까? 지금 우리 중요한 얘기 중이었잖아요.”
마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따져 물었다. 밀리안이 그런 마샤를 서늘히 바라보자 마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간 저 더러운 성질머리. 진짜 힘만 안 셌어도 여러 번 결투 신청했을지도 몰랐다. 이유는 단 하나, 재수 없으니까.
마샤가 속으로 그를 흠씬 두들기는 상상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때 밀리안이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설령 프레아가 싫다고 해도 난 절대 놓아줄 생각 없어. 절대 못 놔.”
“……그건 좀 무서운데요.”
“브레이크. 도대체 후작께서 왜 저러시는 겁니까?”
“마샤는 몰라도 됩니다.”
“허 참, 기가 막혀서 나 원. 자꾸 나만 왕따시킬 거예요? 자꾸 이러면 에시한테 다 말할 거예요.”
“그 이름 금기인 거 모릅니까?”
“그래서 ‘드’ 빼고 ‘에시’라고 했잖아요!”
마샤가 자꾸 또박또박 대꾸하는 브레이크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밀리안은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말을 해야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다. 마샤가 밀리안을 겨냥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밀리안은 그 말이 가시가 되어 박히는 기분이었다.
프레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는 항상 말할 기회를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한발 뒤로 물러나서 말해주지 않은 건 밀리안이었다.
어릴 적, 프레아가 그에게 무서워하는 게 뭐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을 말했을 때 듣게 될 프레아의 대답이 무서웠으니까.
중요한 타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아는 것, 밀리안은 그게 항상 두려웠다. 밀리안이 처음 무섭다, 두렵다는 감정을 느낀 것은 어머니가 죽었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피를 뒤집어쓴 저를 두려운 얼굴로 쳐다보았었다. 저를 보며 움찔거리던 몸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제 눈을 귀신 보듯 하던 그 눈빛이, 여전히 생생해서 무서웠다.
그 눈빛은 마치 ‘이 괴물!’ 하는 것 같았다. 그 기억 때문에 힘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고, 두려워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능글맞은 태도로, 익숙한 미소로, 두려움을 숨기고 가장했다. 말을 하는 것보다 숨기는 게 더 쉬웠다. 프레아에게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녀가 그를 집요하게 추궁할 때마다 말꼬리를 돌려 대답을 회피했던 것이 여러 번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에게 늘 확신을 원했다. 그녀가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확신. 저를 사랑한다는 확신. 저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말이다.
그럼 반대로, 밀리안은 그녀에게 확신을 준 적이 있던가.
밀리안은 프레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알기 위해 뒤를 캐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맞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늘 일방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고, 뒤늦게 들키면 웃음으로 무마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는 동안 프레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러 큰 사건이 터져서 이러한 그의 태도가 문제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번 문제로 인식하니 그것 역시 중요한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이러니 프레아가 내게 질릴 만도 해.’
밀리안이 따끔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으랴, 하는 구호와 함께 말이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어스름이라 달빛만이 그를 밝게 비췄다.
브레이크에게는 그녀가 싫다 해도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저를 거부한다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냥 말하지 말자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으나 금세 흩어버렸다. 말해야 했다. 모든 걸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어차피 곧 위장 결혼이었음이 공표될 거다.
만약 프레아가 제 입이 아닌 다른 이를 통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 그렇게 밀리안은 밤새도록 달려 프레아가 떠난 왕국에 해 뜰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 * *
그날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밤 내내 뒤척이던 프레아는 결국 이제 막 해가 얼굴을 빼꼼 내밀려는 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리카는 옆에서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에리카와 단둘이 하는 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초반에는 밀리안이 좀 걱정되었지만 처음으로 스스로 계획하여 움직인 여행이었다.
여행 경험이 많은 에리카 덕에 적당한 거리의 장소를 물색할 수 있었다.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는 제법 생소해서 색달랐다.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붉은색이나 은색으로 된 물건을 보면 밀리안이 생각나 죄다 샀다.
옆에서 에리카가 과소비라며 탓했지만 프레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첫 여행을 기념할 겸, 밀리안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았으니까. 사실 다 별것 아닌 길거리 물건이라 비싸지도 않았다. 그냥 양이 좀 많았을 뿐.
그렇게 하루 이틀 재밌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슬슬 밀리안이 보고 싶었다. 밀리안 성격상 괜히 깽판 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일순 들었다.
토토를 시켜 밀리안이 어쩌고 있나 물어볼까 했지만 관두었다. 기껏 시간을 주겠다 해놓고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서였다.
프레아가 테라스로 나와 가만히 바람을 쐬고 있는데 저 멀리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 해가 느지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을 등진 은발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프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은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탓이었다. 프레아가 서둘러 숄을 어깨에 두르고 계단을 내려갔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가 저를 찾아온 것이 좀 반갑기도 했다.
밀리안은 프레아가 머무는 숙소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얇은 잠옷 차림의 프레아는 숄을 어깨에 두른 채 헐레벌떡 제 쪽으로 오고 있었다.
육안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다다르자 밀리안이 말을 멈추곤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지체 없이 프레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보며 주춤했다. 그의 얼굴이 너무 비장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밀리안이 와락 프레아를 끌어안았다. 그의 숨은 거칠었다. 마치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처럼 호흡이 가빴고, 닿은 손길에는 땀이 흥건했다.
“밀리안? 무슨 일 있어?”
“미안해.”
“……어, 뭘?”
갑작스러운 사과에 프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더욱 끌어안았다. 한껏 흐트러진 호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리지 않게 조급해 보였다.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상황을 판단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건…… 뭔가 말하겠다는 의미겠지?’
프레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물론 밀리안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프레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호흡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다, 말할게. 그러니까, 헤어지려고 하지 마. 나 놓지 마, 프레아.”
밀리안이 호흡을 고르느라 잔뜩 흐트러진 말투로 애원했다. 차마 프레아의 얼굴은 못 보겠는지 더욱 깊게 프레아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팔까지 모두 끌어안은 탓에 프레아는 차렷 자세로 안겨 있었다.
“뭘 다 말한다는 건데?”
“네가 물어보는 건 다 말할게. 숨기지 않고, 속이지도 않고, 다 말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밀리안이 프레아의 어깨에 대고 얼굴을 비볐다. 프레아는 완전히 흐트러진 밀리안을 보고 있으니 자신이 좀 짓궂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처음 보는 밀리안의 모습이라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일단 이거 놓고 말해. 땀 냄새나.”
프레아의 단호한 말에 밀리안이 움찔했다. 그가 조용히 팔을 풀었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워낙 키가 큰 탓에 그 아래에 감춰진 얼굴이 여실히 보였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쳐다보지 못했다. 아니, 쳐다보았으나 금세 시선을 피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너, 너무 귀엽잖아!’
하지만 속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아 프레아는 애써 얼굴의 웃음기를 숨기고 팔짱을 꼈다. 나아가 아주 엄격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정말 다 말할 거야?”
“응. 다 말할게. 그러니까 시간 갖자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밀리안이 한 손으로 프레아의 소매를 슬쩍 붙잡으며 애원했다. 소매를 타고 그의 손이 얕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프레아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잔뜩 올라간 입꼬리로 물었다.
“혹시 말한다는 게 부모님이 위장 결혼했던 걸 말하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 잠깐, 뭐라고?”
밀리안이 울상을 지으며 대답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 프레아를 응시했다. 프레아는 그제야 저를 제대로 쳐다봐 주는 밀리안을 보며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밀리안은 그제야 프레아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으구, 귀여운 녀석.
프레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본 건 즐거웠다. 하지만 역시 그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단 평소처럼 여유 부리는 모습이 더 좋았다.
그게 더 밀리안다우니까.
그리고 앞으론 거짓말할 때마다 아주 흠씬 때려줄 생각이었다. 정말 괘씸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건 생각보다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금세 마음이 약해지게 된다.
어느새 밀리안이 왜 그랬을까 고심하게 되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사고 회로를 돌린다. 프레아는 아무래도 밀리안이 싫지 않았다.
좋아하니까.
좋은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밉다가도 금세 다시 좋아지는데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밀리안이 한 방 먹은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잠시 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 알고 있었어?”
“응.”
“근데 시간은 왜 갖자고 했어?”
“어쨌든 네가 말 안 해줬잖아, 나한테. 내가 그동안 널 좋아하면서 얼마나 양심이 콕콕 찔린 줄 알아?”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에 당당히 대꾸하자 그가 한동안 침묵했다. 이내 밀리안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애틋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럼 나 안 싫어할 거야? 아니, 나랑 계속 연애할 거야?”
“나랑 연애만 할 거야? 나는 너랑 결혼도 할 건데.”
“…….”
“정말 안 봐주려다가 특별히 봐주는 거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읍.”
프레아가 자애로운 얼굴로 일장 연설을 하려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말랑한 것이 프레아의 입술을 집어삼킨 탓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고 잡아먹을 듯이 입안을 헤집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열린 프레아의 입안을 밀리안이 가볍게 밀고 들어왔다.
그로 인해 프레아는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평소보다도 격한 키스였다. 밀리안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계속 부딪쳤다. 호흡이 곤란해지려는 찰나면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떴을 때, 밀리안이 입술을 뗐다. 프레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도 무척 불그스름했다.
잔뜩 젖어 있는 눈으로 프레아를 응시하던 밀리안이 프레아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프레아도 그를 따라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아직도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프레아가 손으로 그것을 가만가만히 닦아냈다. 잠시 뒤 밀리안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예전에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 물었지.”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때도 말 안 해줬어.”
프레아가 밀리안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심술을 부렸다. 밀리안은 가만히 당해주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사실 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죽었던 게 잊히지 않아.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어머니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면 소름이 돋고 도망치고 싶어.”
“…….”
“그래서 괜히 다가오는 사람에게 먼저 쌀쌀맞게 굴게 돼. 그러면 적어도 그런 표정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생각보다 겁이 많았네, 밀리안은.”
프레아의 다정한 말투에 밀리안이 고개를 약간 기울여 그녀의 손에 기대었다. 그가 칭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맞아, 나 겁 많아. 그리고 최근에 무서운 게 또 생겼어.”
“……뭔데?”
“네가 나 싫다고 하는 거. 네가 아파서 누워 있는 거. 그래서 네가 웃는 걸 영영 못 보는 거. 지금은 그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
밀리안이 그 말을 끝으로 기댔던 프레아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곤 손바닥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더운 숨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밀리안이 올곧은 시선으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손이 얕게 떨렸고, 눈빛도 흔들렸다. 프레아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사실 그동안 악몽을 꾸었어. 어머니가 내게 괴물이라고 소리치는 악몽. 그래서 나, 잠을 잘 못 자. 이미 네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밀리안이 침을 꿀꺽 삼키곤 마저 말했다.
“그런데 네가 의식이 없을 때는 그 꿈도 아무 소용없더라. 네가 영영 의식을 못 차릴까 봐 두려워서 꿈 따위는 별것도 아니었어.”
“그랬구나. 내가 널 힘들게 했네.”
프레아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대꾸하자 밀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 덕에 꿈도 별것 아니라고 느끼게 된걸. 사실 이젠 그 꿈을 꿔도 전혀 무섭지가 않아. 왜 그런 줄 알아?”
“……왜?”
어쩐지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밀리안을 프레아가 의아한 빛으로 응시했다.
“요즘은 악몽을 꿀 때마다 네가 나오거든. 네가 나와서 어머니랑 막 싸워. 왜 날 괴롭히냐고. 정말 아주 열심히 싸우더라. 응원해 주고 싶을 만큼.”
“…….”
“그게 너무 웃겨서 이젠 어머니의 잔상이 무섭지가 않아졌어. ……참, 신기하지? 그렇게 거부해도 잘 안 되던 악몽인데. 너는 너무 쉽게 해결해 버려.”
프레아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의 악몽에 자신이 나온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돌아가신 공작부인께 대들며 싸운다니.
‘도대체 밀리안의 머릿속에 난 어떤 사람인 거야.’
뭔가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그게 또 싫지가 않다. 민망해 죽겠는데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나중에 저승에 가서 어머님을 만나면 면구할 수도 있는 일이 분명한데도, 그의 악몽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뻤다.
이미 클로드를 통해 어머니에 관한 악몽일 거라고 짐작했었고, 차차 치료를 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섭지 않단다. 그것도 제 덕에 말이다.
프레아는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보며 활짝 누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너무 환해서 눈이 부셨다. 비단 그의 뒤에 있는 햇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밀리안 자체가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내가 정말 널 많이 좋아하나 봐. 네가 날 거부하면 그땐 정말 못 견딜 거 같아.”
“거부 안 해. 그냥 좀 심술부린 거야.”
“응. 거부하지 마, 나.”
밀리안이 다시 프레아를 끌어안았다. 프레아도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잠시 뒤, 프레아가 비장한 말투로 속삭였다.
“앞으로도 열심히 어머님께 대들어볼게. 우리 밀리안 괴롭히지 말라고.”
“풉.”
프레아의 결연한 태도에 밀리안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진중하게 말하는데 웃어대는 그를 보고 프레아가 타박하듯 말했다.
“진심이야. 그러니까 이제 무서워하지도 말고, 아파하지도 마. 나는 절대 널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니까.”
“응.”
짤막한 대답과 함께 밀리안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포옹은 뒤늦게 일어난 에리카에게 발각될 때까지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