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드러나는 진실 (17/20)

16장 드러나는 진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축하연이 열렸다. 내막을 모르는 귀족들은 그저 마탑이라는 조직이 불법을 저질러 처분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 안에 반란군과 정령 협회가 맞물려 있다는 건 이번 사건을 다룬 사람들만이 알았다.

홀 안에 있는 귀족들은 저마다 프레아와 밀리안과 연을 이어볼 요량으로 말을 걸어왔다. 프레아는 찬사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받았다.

반면 밀리안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다며 구석에서 형형한 기운을 풍겼다. 한 눈에 봐도 귀찮으니까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분위기였다. 귀족들은 눈치껏 밀리안이 아닌 프레아에게 몰렸다.

‘사람들이 밀리안 다룰 줄 모르네.’

프레아는 밀리안을 힐끔거리며 피식 웃었다. 사실 밀리안은 옆에서 치대야 친해지는 성격이었다. 낯을 가리기도 하고 워낙 경계심이 많아서였다.

‘그래도 살살 달래다 보면 얼마나 온순해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다들 밀리안이 무섭다고 다가가질 못하니.’

프레아의 눈에 밀리안은 조금 까칠한 고양이일 뿐이었다. 물론 이 속마음을 클로드에게 말했다면 그의 차게 식은 표정을 보았으리라.

그때 밀리안이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나갔다. 보아하니 눈치 없이 옆에서 말을 건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유유히 사라지는 밀리안을 눈으로 좇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또 뵙네요?”

“아, 황녀님.”

프레아가 비비안을 보자마자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비비안 역시 프레아를 향해 드레스 자락을 살짝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황녀의 등장으로 프레아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슬쩍 자리를 내주었다.

비비안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호위 기사로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낯이 무척 익숙한 남자였다. 프레아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 그때 그 프러포즈……!”

“빌리앙 크로이드입니다.”

“그래요! 빌리앙…… 네? 크로이드라고요?”

프레아는 밀리안의 입단식 날 만났던 빌리앙에게 반색하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그가 빌리앙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의 가문이 크로이드인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냥 웃지 못할 사건이라고 여겼던 일에 묘한 인연이 숨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빌리앙은 묘하게 굳은 프레아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제 부하가 실수했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드리죠.”

“아, 괜찮습니다.”

“뭐야, 빌리앙과도 아는 사이였어요?”

비비안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빌리앙과 프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빌리앙이 비비안에게 예전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설명하자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듣고 보니 밀리안과 빌리앙이 비슷하게 들리긴 하네요.”

“막 입단한 기사라 실수한 거지요.”

빌리앙이 비비안의 말을 받았다. 프레아는 그 사이에서 웃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크로이드라서. 아버지의 가문이자 아버지를 버린 가문. 프레아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비비안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령사라고 들었어요. 그럼 무척 세겠죠?”

“네?”

“사실 제가 영애 뒷조사 좀 해봤거든요. 잘해줄 테니까 내 호위 기사 해주면 안 돼요?”

“황녀님, 저를 옆에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

빌리앙이 비비안의 말에 넉살스레 대꾸했다. 뒷조사했다는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하다니. 프레아는 놀라울 정도로 제멋대로인 비비안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자 비비안이 말을 이었다.

“혹시 벌써 내 동생 놈 밑에 가기로 했어요?”

“네? 아, 아뇨. 클로드 전하께는 제 동생이…….”

“잘해줄게요, 내가! 그놈은 검밖에 모르는 무지렁이예요!”

비비안은 프레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황태자를 ‘동생 놈’이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무식하다고 욕까지……. 등줄기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고 답해도 불경죄이리라. 프레아가 우물쭈물하자 빌리앙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황녀님, 그런 발언은 혼자 조용히 하시는 겁니다. 소후작께서 당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이런. 아까 샴페인을 좀 마셨더니 헛소리가 나왔어요. 클로드 여기 없죠?”

비비안이 그제야 제 발언이 불경했다는 걸 알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뒤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누님.”

“……왜 몰래 듣고 그래.”

비비안이 새침하게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보아 앞선 얘기를 다 들은 모양이다. 프레아가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예를 갖췄다. 클로드의 옆에는 밀리안도 함께 있었다.

“황녀님이 조금 취한 모양입니다.”

“빌리앙. 자꾸 감싸주지 말게. 자네가 자꾸 허허거리니 누님이 저러는 거 아닌가.”

“내 기사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언제 너한테 피해 준 적 있어?”

비비안의 앙칼진 목소리에 클로드가 우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님은 도대체 왜 제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리십니까.”

“그럼 내 취향으로 태어나지 그랬어. 아! 밀리안 경, 잘 지냈어요?”

클로드에게 쌀쌀맞게 굴던 비비안이 밀리안에게는 사근사근한 말씨로 말했다. 이에 클로드는 질린다는 얼굴로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비비안은 개성이 뚜렷한 여인 같았다. 대충 대화를 들어보니 클로드와는 자주 티격태격하는 모양이고. 클로드는 프레아와 눈이 마주치자 비비안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누님, 아직도 포기를 못 했습니까? 이미 빌리앙 경이 있지 않습니까.”

“빌리앙은 빌리앙이고 그녀는 그녀지. 그리고 아바마마가 정 갖고 싶으면 허락받고 데려가라 했단 말야.”

“그 말은 결국 안 된다는 말이잖습니까. 이제 억지 그만 부리십시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안은 감사하나 하는 일이 있어 황녀님을 보필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프레아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냉큼 거절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비비안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밀리안은 비비안이 갖겠다고 하는 상대가 프레아인 걸 눈치챘다. 밀리안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누구 보고 갖겠다 말겠다 하는 거냐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는 유려하게 올린 입꼬리로 본심을 애써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예전에도 자신이 누이에게 관심을 가지자 눈을 뽑겠다는 둥 불경한 말을 입에 올린 밀리안이다.

‘누이를 끔찍이 아끼니 그녀를 물건 취급한 것이 언짢나 보군.’

밀리안은 말을 딱히 가려 하는 타입이 아니라 비비안과 크게 부딪칠 수도 있었다. 클로드가 비비안을 얼른 붙들었다.

“누님, 취한 것 같으니 테라스에서 동생과 덕담이나 합시다.”

“이거 왜 이래? 너랑 놀면 재미없단 말야.”

“자자, 어서.”

클로드가 비비안을 질질 끌다시피 테라스로 데려갔다. 빌리앙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따라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밀리안이 빌리앙에게 시선을 두며 물었다.

“고우 경이 자네의 휘하로 옮겼다고 들었네.”

“아아, 그랬지.”

빌리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로이드 가문은 대대로 청룡 기사단 라인으로, 빌리앙은 청룡 기사단의 계보를 잇고 있어 밀리안과도 일면식이 있었다. 밀리안이 빌리앙을 떠보듯 말했다.

“부인이 갑자기 수도를 떠났던데.”

“자네가 내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 처음이군.”

빌리앙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행동하던 밀리안이 갑자기 제게 관심을 보여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밀리안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자네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 텐데.”

“형님의 일이라면 유감이네. 안젤리카도 그 때문에 크게 상심한 상태고…….”

밀리안의 의중을 파악한 빌리앙이 해명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를 믿는 기색이 하나도 없는 눈빛이군.’

일순간 빌리앙의 입가가 딱딱히 굳었다. 프레아는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고 가는 시선 속에 저가 모르는 말들이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로서는 밀리안이 안젤리카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에 굳어버린 빌리앙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단 빌리앙의 등장만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자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우리 가문은 결백하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빌리앙의 얼굴을 살폈다. 빌리앙도 이에 질세라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이만 황녀님께 가보겠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레이첼 후작.”

“네, 저도요.”

프레아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빌리앙의 시선이 밀리안에게 향했다가 프레아에게 고정되었다.

“다음에 또 뵙길 바랍니다.”

빌리앙의 말에 일순간 밀리안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빌리앙은 그대로 비비안이 있는 테라스로 자리를 피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밀리안이 빌리앙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크로이드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거야?”

프레아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눈에 띄는 동요였다. 아랫입술을 짓이기고 있는 프레아를 밀리안이 응시했다.

“그냥 떠본 거야. 이번에 잡힌 정령사가 저자의 형님이라.”

“그랬구나.”

프레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여전히 지워질 생각이 없었다. 밀리안이 걱정 어린 얼굴로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왜 그래?”

“아니야. 지금 머레니에게 가려는데 가능해?”

“따라와.”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 * *

비비안에게로 간다던 빌리앙이 은근슬쩍 방향을 틀었다. 그러곤 기둥 뒤에 숨어 홀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곧 안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전서구에 부쳤다.

* * *

프레아는 밀리안의 뒤를 따라 머레니가 갇혀 있다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나는 약속 시간이 다 돼서.”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밝게 답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정한 눈빛이 프레아를 향했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벌어졌다.

“다녀와서 말해줄게.”

“나도.”

그렇게 잡혀 있던 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밀리안이 그대로 뒤를 돌아 가버리자 프레아도 계단을 하나둘 내려갔다. 머레니가 있다는 감옥 앞에 도착했다.

프레아가 미리 받아 둔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힘없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다만 철창으로 되어 있어 다가오는 이가 누구인지 머레니도 알 수 있었다. 이중으로 단단히 닫아두어 머레니와 프레아의 사이는 무척 멀었다.

“늦었네요.”

머레니는 프레아가 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히 반겼다. 그녀의 몰골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입고 있는 옷이 초라하기도 했지만 구속구로 사지를 결박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귀족이라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는지 고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가 철창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원하는 게 뭐예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프레아의 말에 머레니가 실실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녀는 프레아가 온 것이 반가운 것 같았다. 프레아가 한숨을 푹 쉬곤 입을 열었다.

“분명 마탑을 유지하고 싶다고 찾아왔었잖아요. 근데 영애가 벌인 일은 마탑이 망했으면 하는 것 같거든요.”

“제 마음은 여전해요. 저는 마탑의 존속을 원해요.”

머레니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자기 손으로 마탑을 해체 직전까지 끌고 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정말 존속을 원했다면 그 정보를 황실에 주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프레아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머레니는 한결 편안한 미소를 띠며 차근히 이어 말했다.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말한 마탑은 지금의 마탑과 다르답니다.”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뿌리까지 썩은 나무에 멀쩡한 나무를 접붙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요. 차라리 불태워 거름으로 쓰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녀의 미소가 한층 서늘해졌다. 지금의 마탑을 아예 없애 버리고 새로 마탑을 세우겠다니. 결국 이렇게 될 걸 알고도 벌인 짓이라는 뜻이었다. 프레아는 머레니가 저를 이용해 마탑을 부수려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탑의 마법사 중 절반이 죽었어요. 알고 있나요?”

“네. 알아요.”

“그럼 알고도 그랬다는 말이군요.”

프레아가 경멸 어린 눈으로 머레니를 바라보았다. 머레니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거렸다.

“어차피 그들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었는걸요?”

“지금 당신 가족들도 사라진 상태예요. 본인 목숨만 부지하면 상관없어요? 처음부터 당신의 계획이 이런 거였다면 전 돕지 않았을 거예요.”

마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다 죽었으면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탑을 무력화만 시킬 생각이었다.

‘어쩐지 뒤가 찜찜한 결말이네.’

프레아의 표정이 풀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머레니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제 가족은 안전할 거예요. 그에게 그렇게 약속받았으니까요.”

프레아가 시선을 머레니에게 붙박았다. 그녀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는 누구죠?”

“지금의 마탑주죠.”

마탑주라는 말에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에시드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됐다. 그가 반란군과 연관되어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데 마탑의 사건에까지 관여되었다면 실망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어쩐지 에시드 대공이 어떠냐고 물어왔던 황제가 떠올랐다. 안심하는 프레아를 머레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그런 머레니를 향해 프레아가 다시금 추궁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마탑주와 손이라도 잡았다는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이미 이전의 마탑주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영애도 고마워해야 할걸요? 그 사람은 진짜 인간쓰레기거든요.”

이 세상에 없다니? 그럼 마탑주가 죽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황성도 그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만약 머레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없는 사람을 찾으려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프레아가 정확한 사실을 위해 물었다.

“지금 그 말은 마탑주가 죽었다는 뜻인가요?”

머레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미 시체가 된 지 오래죠.”

맙소사. 프레아는 혼란스러워 이마를 짚었다.

‘게다가 뭐? 내가 현 마탑주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니? 전 마탑주가 죽든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닌가?’

그때 머레니가 말을 뱉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머레니는 마치 그가 구원자인 양 말했다. 지금의 마탑주가 누구인지도 아는 얼굴이었다. 미리 마탑에 첩자라도 심어둔 걸까. 프레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당신은 누가 마탑주가 된 건지 알고 있군요?”

“그럼요.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누가 마탑주에게 대항하겠어요? 마탑의 마법사라면 그가 죽이려는 마음만 먹어도 죽는 판에.”

머레니가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벌였던 일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잠깐. 지금 본인이 하는 말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뭘 말이죠?”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탑주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면서요. 그럼 지금의 마탑주는 어떻게 마탑주가 된 거죠?”

프레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묻자 머레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 순간, 프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탑의 마법사이면서 마탑주를 자유롭게 죽일 수 있는 존재.

“설마…….”

“맞아요. 당신은 그에게 속은 거예요.”

머레니는 그가 누구인지 딱히 설명하지 않았다. 프레아의 눈빛만으로도 누굴 떠올렸는지 짐작했으니까. 프레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에시드 안 헤로스. 마탑의 마법사였던 아네모네 황비의 아들. 마탑의 야심작이었으나 마탑을 배신한 마법사. 그에게도 있는 마탑의 문양.

프레아가 휘청거렸다. 이제야 모든 실타래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머레니는 에시드의 편이었다. 에시드는……. 프레아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하하하. 뭐야, 이게?”

프레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완벽히 속았다. 마지막까지 믿어보려 했는데 남은 건 음모와 모략뿐이었다. 프레아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자 머레니가 움찔했다.

프레아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저를 이용해서 마탑을 통째로 없애고 마법사를 몰살한 게 에시드라고? 제 앞에서 선한 미소를 짓고 숙맥처럼 행동하던 그 사람이? 그게 다 연기였다고?

한참 일렁거리던 프레아의 눈빛이 싸늘히 식었다. 정령 실험을 미끼로 저를 꼬여내려 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잘못 선택한 것이다.

프레아는 저를 이용한 자를 마냥 넘어가 줄 사람이 아니었다. 프레아가 역한 기분에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나려 하자 머레니가 그녀를 붙잡듯 말했다.

“잠깐만요. 마탑 최상층의 열세 번째 방에서 G-110이라고 쓰인 상자를 찾아보세요. 제가 은닉 마법으로 숨겨놨거든요. 영애가 모르는 비밀이 그곳에 있어요.”

프레아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왜요? 또 이용할 게 남았나 봐요?”

그러곤 머레니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그녀의 주변에 잔잔한 바람이 일렁거렸다. 눈빛은 얼음처럼 시리기만 했다. 머레니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지막 임무를 완수해야 해.’

“영애는 전 마탑주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알려주려고요.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 궁금하지 않아요?”

아버지라는 말에 프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차가웠던 분위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프레아는 돌아서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머레니 앞으로 다가갔다. 프레아의 목소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당신…… 정체가 뭐야?”

얼굴을 잔뜩 구긴 프레아가 철창을 손에 쥐었다. 머레니는 주변에서 몰아치는 거친 바람이 자신을 날카롭게 위협하는 것을 느꼈다. 프레아가 힘 조절도 없이 머레니의 주변에 매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구속구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살해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머레니는 다시금 여유를 찾고 미소 지었다. 진실을 알기 전에 저를 죽이지 못할 걸 알아서였다. 프레아가 동요한 순간 승기는 머레니에게 향했다.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어요. 영애의 눈이 묘하게 그를 닮았거든.”

“머레니 코헨.”

프레아가 에둘러 말하지 말라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것이 꽤 위협적이었지만 머레니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참 끈질긴 사내였죠. 그렇게 오랜 시간 자아가 분열되지도 않고 버티는 정령사는 처음 봤어요. 도망치지 않았다면 정령 실험은 벌써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머레니가 말할수록 프레아의 표정은 굳어갔다. 머레니가 말을 이었다.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 실험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제 윗선에서 했던 실험이고 이미 십여 년 전에 중단된 거니까.”

“본론만 말해. 만약 날 잡아보려는 헛소리였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친부에 대한 정보를 아는 건 어머니와 나뿐이니까.”

“어머, 제가 증거도 없이 이렇게 말하겠어요? 하도 찜찜해서 따로 보관해 둔 실험체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 검사를 했어요.”

“…….”

“영애의 머리카락을 몰래 사용한 건 미안해요. 마침 영애가 우리 성에 떨어뜨리고 가서 사용했을 뿐이랍니다.”

머릿속이 왕왕 울렸다. 도대체 저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다. 아버지가 정말 실험체로 있었다는 말인 건가.

아버지는 협회를 찾아갔다가 사라졌다고 들었다. 그럼 협회에서 아버지를 마탑으로 넘겼다는 말인데…….

순간 마탑에서 본 실험체들을 떠올리자 이성을 차리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프레아가 동요를 숨기려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

하지만 철창에 기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 영류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때 머릿속에서 토토가 말했다.

-동요할 것 없어. 도발하려는 거야.

“알아.”

프레아가 겨우겨우 짤막한 단어를 내뱉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영류가 매서운 기세로 프레아를 뒤흔들었다. 마치 알려고 하지 말라고 요동치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 전보다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야.

토토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언령으로 제한되었던 힘이 미세하지만 느슨해졌다. 어쩌면 프레아가 무의식적으로 계약 당시의 언령을 인지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프레아는 그런 토토의 발언을 일일이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머레니가 애써 진정하려는 프레아에게 말했다.

“그레이 크로이드. 이래도 아니라고 할 건가요?”

“…….”

머레니의 입에서 결국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프레아가 망연한 눈으로 머레니를 바라보았다. 도발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선택은 영애가 하세요. 그걸 찾아볼지 말지는 영애의 선택이랍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해주는 충고예요.”

* * *

꽃잎들이 매튜의 주변에 나부꼈다. 매튜가 조용히 신음을 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거칠었던 호흡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들썩거리는 등의 움직임도 멎어갔다. 잠시 뒤 그가 떨리는 손끝으로 플라리스를 매만졌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다.”

“아프지 마, 그레이.”

플라리스가 그레이 주변을 가볍게 날아다니며 말했다. 플라리스가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 몸. 매튜가 씁쓸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날 이후 에밀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를 찾아와서 원망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행동했다. 아니, 괜찮은 척하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차리라 오지 말걸.

브레이크가 아무리 붙들어도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할걸.

그 뒤로 에드모어 공작이 저를 찾아왔다. 에밀리에게 다 듣고 왔다며 제게 의원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병은 마법에 의한 저주라 일반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에드모어 공작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하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조금 연장하는 수준이었다. 그레이가 피식 웃으며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점점 왼손의 감각이 없어져 갔다.

‘이러다 왼손은 더 이상 못쓰게 될 테고, 그다음엔 어디일까.’

머리부터 마비되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괜찮아?”

방 안에 들어온 브레이크가 기진맥진한 그레이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레이는 브레이크를 보곤 피식 웃으며 왼손을 가리켰다.

“감각이 없어.”

“왼손부터 시작됐나 보네.”

브레이크가 침착하게 그레이의 왼손을 붙잡았다. 제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는 브레이크를 그레이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에드모어 공작이 알았다면 더는 그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 남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 제게 듣는 것이 나으리라. 그레이가 메마른 목소리로 브레이크를 불렀다.

“레이.”

“듣고 있으니까, 말해.”

“스승님의 정령을 찾은 뒤에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긴. 정령 협회에 복수해야지. ……왜? 겁나?”

“아니. 그냥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나약한 소리 하는 걸 보니 이제야 죽는 게 무섭나 보네.”

브레이크가 그레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죽는 게 무섭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살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실험실에서 도망쳐 나왔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다닌 것도 다 살고 싶어서였다.

살아서 딸아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살아서 스승님이 부탁한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다행히 붙잡히기 전 스승님의 정령을 정령석에 봉인해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하지만 협회에 붙잡혀 버린 탓에 그 뒤의 일을 해내지 못하고 동료를 잃었다. 그러다 뒤늦게 브레이크와 재회했고, 이젠 스승님의 정령을 찾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숙원 사업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몰래 빼돌린 곳을 아무리 뒤져도 누군가 옮겼는지 정령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때부터 상황은 꼬여만 갔다.

스승님이 부탁한 일을 끝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멀찍이서 프레아와 에밀리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죽는 게 소원이었는데. 정령석은 찾지도 못했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짐만 될 뿐인 몸뚱이만 남았다.

염치도 없이 모녀와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두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레이가 울상을 지었다.

“레이, 나 아무래도 이 성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는 거 잘 알잖아?”

“그녀가 알아버렸어.”

“그녀라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브레이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레이는 입을 달싹였다. 그에게 하지 못한 말. 왜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워가며 에드모어 성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진실.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그레이의 진지한 어투에 브레이크가 시선을 맞췄다. 그레이가 숨겨왔던 연인과 딸에 관해 이야기했다. 왜 그날 그렇게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하다 동료들을 사지로 몰았는지.

처음 브레이크와 재회했을 때, 그는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레이를 독려했었다. 오히려 그 일에 대한 단서를 지닌 자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했었다.

그가 벌하지 않아도 그레이가 곧 죽을 운명이어서 그랬으리라. 그랬기에 브레이크는 몰랐다. 그날 일이 그렇게 틀어진 건 그레이가 울며불며 매달리는 딸을 차마 떼지 못해 달래느라 그랬다는 걸. 아버지 자격도 없는 미련한 사내가 결국 동료 자격도 잃었다는 걸.

* * *

밀리안은 다 허물어져 가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에는 주인장과 데오 라즐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밀리안이 들어오는 걸 본 주인장이 주점의 문을 닫았다.

“이리 앉게.”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그럴 리가. 그냥 조용한 곳을 찾았을 뿐이야.”

데오가 제 옆에 의자를 끌며 눈짓하자 밀리안이 그의 옆에 앉았다. 둘은 딱히 친분이 없는 사이였다. 데오는 검술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고, 그와 밀리안은 업무적으로 마주칠 일도 없었으므로.

주인장이 붉은빛이 도는 칵테일 한 잔을 밀리안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마시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데오가 나직이 물었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런가?”

“그냥 먹고 싶지 않을 뿐, 다른 이유는 없어.”

밀리안이 서늘하게 대꾸했다. 애당초 밀리안은 그가 어떤 수작을 부리든 두려울 게 없었다. 그깟 독이 저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사내가 저보다 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다.

밀리안의 차가운 반응에 데오가 피식 웃었다. 반란군을 앞에 두고도 두려운 기색 없는 그가 재미있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 저를 업신여기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데오는 주인장이 새로 내온 칵테일을 입안에 머금었다. 조금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밀리안이 그런 데오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날 부른 이유는 뭐지?”

“황실은 그냥 덮을 모양이지.”

“그걸 내가 자네에게 답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나도 자네의 답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니야.”

동문서답 같은 그의 대꾸에 밀리안이 뭐 하자는 거냐는 얼굴로 데오를 쳐다보았다. 비밀리에 만나자고 해서 왔다. 그래서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일 거라 생각했다.

근데 정작 말장난만 하니 어이가 없었다. 밀리안은 지금이라도 당장 데오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 그는 수배 중인 남자였다. 수틀리면 죽인 후 반항이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데오는 태연자약했다. 마치 밀리안은 절대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웠다. 그때 데오가 남아 있는 술을 입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일순간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술이 독해서가 아니었다. 알코올이라곤 거의 없는 술이었으니까. 데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자네는 왜 반란군을 뒤쫓지?”

“이유랄 게 있을 리가. 나는 그냥 주어진 일을 할 뿐이네, 라즐리 후작.”

밀리안이 데오를 라즐리 후작이라고 부르자 그의 눈이 가볍게 일렁였다. 라즐리 후작. 이전에는 벤 라즐리가 들었던 호칭이었고, 지금은 데오 라즐리를 지칭하는 말. 데오 라즐리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틀렸네. 자네는 무의식적으로 느낀 거야. 원수를 잡아야 한다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밀리안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데오를 무미건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설명이 필요했다. 반란군이 거슬린 것은 맞지만 원수라고 여길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 일에 관여한 건 순전히 진과 에밀리와 했던 거래 때문이었다.

‘남매라는 이유로 네가 프레아를 좋아하는 것을 더는 막지 않으마. 단, 당분간은 조용히 있거라.’

‘반란군 때문입니까?’

‘그래.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황명으로 위장 결혼까지 하며 그들을 추적했어. 반란군만 모조리 처리하면 그때는 우리도 이혼할 거란다.’

레이첼 후작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밀리안이 미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굳이 반란군을 잡기 위해 위장 부부로 사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황명 때문이라기엔 그들은 반란군의 처단을 숙원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정말 이유가 그게 다입니까?’

‘황명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에드모어 공작은 지나치게 단언했고.

‘그래, 밀리안. 네가 우리 일을 돕는 건 괜찮지만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렴.’

레이첼 후작은 시선을 피했다.

회상을 멈춘 밀리안은 가볍게 상념을 떨쳐냈다. 상대의 도발에 교란당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데오는 밀리안을 계속해서 흔들려 했다.

“역시 아직 몰랐나 보군. 하긴 그러니 그렇게 태평할 테지.”

데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전히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밀리안이 그런 그를 쓱 흘겨보며 말했다.

“자꾸 헛소리만 할 거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난 그쪽 한풀이를 들어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글쎄,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자네가 그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데오가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눈으로 밀리안을 응시했다. 밀리안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그때였다.

“전 공작부인의 사고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뭐?”

“그날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네.”

데오가 단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화제가 어머니로 향하자 밀리안이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사고 당시 밀리안은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는 걸 봐야 했다. 그것도 폭주한 자신 때문에 죽은 어머니였다. 두 눈으로 본 광경은 여전히 생생해, 밀리안을 옥죄고 있었다. 밀리안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데오 라즐리. 그날 사건 현장에 나도 함께 있었다는 걸 알고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나?”

“그날 마수가 마차를 덮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반란군은 이미 자네가 피에 면역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래서 자네를 이용해 어머니를 죽게 만든 거고. 에드모어 공작도 이를 이미 알고 있어.”

“…….”

밀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사건 당시, 갑자기 들이닥친 마수로 인해 함께 외출했던 기사가 몰살당했다. 난생처음으로 피가 낭자한 장면을 본 밀리안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넝마가 된 마수와 피를 잔뜩 흘린 채 저를 두려워하는 어머니뿐이었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것이 밀리안을 흠뻑 적셨다.

뒤늦게 온 진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공작부인을 안고 울부짖었다. 밀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대로 내리 3일을 앓았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다.

‘내가 폭주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살았을 텐데.’

‘힘만 조절할 줄 알았다면 어머니가 살았을 텐데.’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그렇게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간간이 의식을 차렸을 때 보이는 건 싸늘한 천장과 바삐 움직이는 시종들뿐. 그 3일간 밀리안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 뒤로도 밀리안은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이 증폭제가 되어 밀리안은 제 마음을 할퀴며 난도질했다. 자신의 힘이 두려워 다른 이가 제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를 세웠다. 그러고도 부족해 목숨이 위태로운 훈련까지 강행했다.

‘내일부터 마수로 훈련하겠다.’

‘안 됩니다. 아직 휴식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지금 공작님께선…….’

‘걱정 마. 아버지는 내가 죽든 말든 관심 없을 테니.’

당시의 밀리안을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그 뒤, 밀리안은 마수를 잡아 와 훈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그랬던 건가.’

밀리안은 몇 달 뒤 갑자기 저를 붙들며 미안하다고 울었던 진을 떠올렸다. 그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였지만 밀리안의 가슴엔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상황이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고,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밀리안이 한동안 말이 없자 데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밀리안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를 붙들었다.

“그냥 놓아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자네야말로 한가하게 날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무슨 뜻이지?”

밀리안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반란군이 어머니의 원수였다면 더더욱 그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날 사건과 관련 있는 작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여 버리고 싶었다. 살의 가득한 눈을 본 데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누님이 오늘 머레니를 만난다지.”

“……!!”

“자네처럼 미쳐 날뛰는 누님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얼른 말리는 게 좋을 거야. 장소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어.”

데오가 거칠게 밀리안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 순간 환한 빛과 함께 데오 라즐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낮게 욕지거리를 했다.

처음부터 자신과 만난 사람은 데오 라즐리 본인이 아니었다. 허수아비였다. 밀리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프레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예감이 안 좋았다. 밀리안이 주점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프레아가 휘청거리며 감옥을 빠져나왔다. 정처 없이 걷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탑 앞이었다. 프레아가 멍한 눈으로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머레니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 그녀가 어떻게 아버지에 대해 안 건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그녀와는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안 된다고 왕왕 경고가 울렸다. 위험을 직감하는 것처럼 영류는 여전히 용솟음쳤다.

“가서 뭘 어쩌려고?”

토토가 프레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프레아의 영류가 무척 거칠었다. 몸이 먼저 위험하다며 반응하는 상황이었다. 토토는 직감적으로 이 일을 프레아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비켜.”

프레아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토토를 밀치지는 않았다. 토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정일 수도 있어.”

“알아.”

“일단은 조금 진정한 뒤에…….”

“아니, 난 지금 확인할 거야. 정말로 아버지가 그 실험에 이용당했다면 이 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 난 진실을 알고 싶어. 알 권리도 있고.”

프레아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토토를 응시했다. 영류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지만 그녀는 애써 경고해 오는 몸 상태를 무시했다. 토토는 슬며시 자리를 비키며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이미 가겠다고 마음을 정한 계약자를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라도 위험할지 모르니까 브레이크나 매튜에게 연락을 취할게. 이건 괜찮지?”

“고마워, 토토.”

프레아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토토가 입김을 불자 휭 하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토토와 비슷한 동물 형상이 되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프레아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은 텅 빈 채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전에 왔을 때는 이미 황실이 모든 정보를 압수한 상태라 건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히 필요한 정보의 위치를 알았고 마법을 해제할 암호도 전해 들은 상태였다.

프레아가 천천히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혹시 모를 함정을 대비해 바람 막으로 전신을 휘감았다. 머레니가 말한 열세 번째 방에 도착했다. 프레아가 암호를 대자 허공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졌다. 그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낯선 상자가 눈에 띄었다.

[G-110]

프레아는 조심스럽게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몰라 상자 주변에 함정이 있나 확인해 보았으나 평범한 상자였다.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연구 자료가 잔뜩 들어 있었다.

첫 장에 떡하니 ‘G-110: 그레이 크로이드’라고 실험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편의상 G-110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담당자는 마탑주인 ‘알프레도 빈센트’였다.

아버지의 이름 옆에 그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는 모습에 프레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떨리는 호흡을 애써 진정시키며 연구 내용을 훑었다.

[xxx년 xx월 xx일

G-110을 인근 숲에서 결박하여 실험을 시작했다.

그와 정령을 격리하고 영류를 채집했다.

정령의 힘과 영류를 배합하여 실험 쥐에 주입한 결과, 힘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강한 개체가 필요하다.]

[xxx년 xx월 xx일

G-110의 동료들이 실험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이제 남은 정령사 표본은 G-110 하나이니 신중해야 한다.]

[xxx년 xx월 xx일

G-110이 도주하려다 실패했다.

혹시 모를 도주를 대비해 온몸에 속박 마법을 새겨놓았다.

이미 실험으로 엉망이 된 몸이라 그 이상의 마법을 새기는 것은 위험하다.

그나마 G-110이 뛰어난 정령사여서 제법 버티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키메라 군단 양성의 시기가 앞당겨질 듯하다.]

[xxx년 xx월 xx일

아무래도 실험이 혹독했던 모양이다.

G-110의 금발이 얼룩덜룩하니 갈색에 가까워졌다.

피부도 탁하게 변색되었다.

마지막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천하를 얻을 것이다.]

[xxx년 xx월 xx일

G-110에게 마지막 실험을 시도했다.

아무래도 부작용이 심각하다. 오늘이 고비일 듯하다.

실험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앞서 걸어둔 속박 마법과 상성이 맞지 않아 그런 듯해 마법을 몰래 해지해 두었다.]

[xxx년 xx월 xx일

G-110이 도주했다. 속박 마법이 풀린 것을 용케 알아낸 모양이다.

이미 마지막 실험이 실패했으므로 폐기할 예정이었다.

머지않아 죽을 테니 그가 남겨둔 샘플과 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겠다.

아쉽지만 그는 좋은 실험체였다.]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앞선 내용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령사와 정령을 융합하는 실험을 시도하다니. 그건 미친 짓이었다.

연구 일지를 휙휙 넘기니 아버지에게 걸어두었다는 속박 마법 문양의 그림과 사진이 나왔다. 프레아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 속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흐릿했던 꿈이 또렷해졌다. 도무지 기억나지 않던 꿈속의 얼굴 또한 분명해졌다. 프레아가 자료를 떨구었다.

아버지와 만난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숲, 그곳에서 만난 남자가 물밀듯 밀려와 머릿속을 휘저었다. 프레아가 천천히 주저앉아 사진 속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금발이었으나 본래 색을 잃은 탁한 갈색 머리, 익숙한 벽안, 커다란 덩치.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프레아가 막 그 사람의 이름을 웅얼거리려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다 본 소감은 어때요?”

“……!!”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리니 루이스 안이 언제 들어왔는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토토, 자료 숨겨.”

프레아가 낮게 명령하자 토토가 바람을 일으켜 자료를 모두 삼켰다. 이상하게도 루이스 안은 말리지 않고 그저 지켜봤다. 애초에 빼앗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랜만이에요, 윈드 샬로만데라.”

루이스가 여상한 말씨로 토토를 불렀다. 마치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토토는 제 이름을 그녀가 친근하게 부르자 으르렁거리며 프레아의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어느새 루이스의 주변에는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목걸이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불꽃은 마탑을 모두 태울 것처럼 활활 불타올랐으나 어느 것도 태우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협회장.”

프레아가 차가운 눈으로 루이스를 노려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맞춰 마탑으로 찾아온 그녀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때 루이스가 소리 내어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기묘했다. 그녀가 불꽃으로 이상한 마법진을 그렸다.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레이첼 대표, 혹시 이거 기억나요?”

저를 기절시켰던 그 마법진이었다. 프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저 여자가 저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날 저 마법진을 본 것은 밀리안과 저뿐이었다.

“알프레도가 참 조심성이 없어요. 하필 써도 이 마법을 썼나 몰라. 하마터면 그대로 정체가 탄로 날 뻔했어요.”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협회장.”

프레아가 서늘한 눈초리로 말했다. 아무런 마나가 실려 있지 않은 마법진이라 그런지, 아니면 더 이상 그것이 제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아서인지 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를 향해 날 선 바람 칼을 만들어 겨냥하려는데 바람이 훅 하고 꺼져버렸다. 프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토토를 쳐다보았다. 그때 토토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잠깐 너……!”

“이제야 알아본 거야?”

루이스가 서늘한 미소를 띠며 토토에게 대꾸했다. 어쩐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프레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는 사이야?”

“…….”

토토가 충격받은 것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얼른 대답하라고 재촉하려는데 루이스가 엄지와 검지를 맞대더니 딱 소리 나게 튕겼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프레아의 머리가 쩍 하고 갈라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윽……!”

프레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머리가 왕왕 울렸다. 속은 울렁거리고 영류가 세차게 흔들렸다. 무언가 막혀 있던 구멍이 뻥 뚫리며 물밀듯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토토도 프레아의 상태를 느꼈는지 루이스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만해!”

콰앙,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루이스가 벽에 처박혔다. 동시에 프레아가 울컥 피를 쏟아냈다.

“왜? 다시 기억나게 도와준다잖아. 방해하지 말라고.”

루이스가 비아냥거렸다. 주변에 감도는 불꽃이 그녀를 보호했는지 벽에 박힌 것치고 멀쩡했다.

“이봐요, 레이첼 대표. 내 말 들리죠? 잘 들어요. 당신도 그날 그 숲에 있었어요. 그레이가 잡혀가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잖아요?”

“뭐, 라고요?”

프레아가 깨질 듯한 머리의 통증을 견디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날 그 숲에 있었다니.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토토가 얼른 프레아의 두 귀를 막으며 도리질했다. 아무 기억이 없는 저와 달리 그는 무언가 기억난 모양이었다.

“안 돼. 듣지 마.”

“하! 당신이 누군가를 아끼는 일이 올 줄이야! 이거 비넷이 하늘에서 통곡하겠어.”

“닥쳐. 네 입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다. 어쩐지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더니, 네 녀석이 술수를 썼어!”

토토가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스친 루이스의 살갗에 피가 고였다. 아까보다 매서운 바람이라 루이스의 화염 막이 크게 진동했다. 바람과 불이 마구 뒤섞여 온 일대가 엉망이었다.

프레아는 그들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프레아가 피를 울컥 쏟아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무치는 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프레아의 두 눈에서 뜻 모를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토가 강하게 말리는 상황에도 루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당신은 그레이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당신 때문에 그레이가 알프레도에게 잡힌 거니까. 당신 아버지, 당신 때문에 죽은 거라고. 알아?!”

“죽여 버리기 전에 입 닥치라고 했어.”

토토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며 루이스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루이스를 물어뜯을 듯이 입을 벌렸다. 루이스는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에시드!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빼내줘!”

동시에 그녀의 주변이 하얗게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루이스가 사라졌다. 간발의 차이로 물어뜯을 대상을 놓친 토토가 하릴없이 허공에 입질했다.

그의 날카로운 이빨이 바닥을 뭉갰다. 곧 분한지 벽을 쿵 내려치며 이를 갈았다. 마지막에 그녀가 읊은 이름이 에시드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프레아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토, 토.”

프레아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없이 토토를 불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토토가 얼른 그녀의 곁에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펑! 하는 소음과 함께 그녀의 주변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아, 안 돼!”

토토가 망연한 얼굴을 한 채 프레아 주변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프레아의 몸에서 시작된 파동이 영역을 넓혔다. 마탑이 무너질 듯 진동하더니 이내 파삭하고 무너져 내렸다.

* * *

폐허가 된 마탑에 뒤늦게 도착한 그레이와 브레이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레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프레아!”

이미 먼지가 자욱한 마탑의 주변엔 생기가 없었다. 그레이가 프레아의 흔적을 찾아 마탑 주변을 배회했다. 그때 과거 마탑이었을 잿더미 가운데서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강한 회오리바람이 건물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무척 매서워서 까딱하면 휩쓸릴 것 같았다. 그레이가 플라리스의 보호를 받으며 뒤로 밀려났다.

“폭주인 것 같아.”

브레이크가 강한 바람에 인상을 팍 쓴 채 말했다. 그들은 이미 한 번 폭주할 뻔한 프레아의 영류를 잠재운 적이 있었다. 그때 온전히 가라앉지 않아 여전히 불안정했을 영류가 한꺼번에 터지듯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폭주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이미 손쓸 타이밍을 놓친 상태였다. 바람이 거센 것을 보니 윈드가 폭주한 프레아에게 뛰어든 모양이었다. 바람이 확산되려는 영류의 폭주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가서 도와줘, 플라리스.”

그레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꽃잎들이 만발하며 바람 주변을 휘감았다. 더 이상 폭주의 면적이 넓어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 브레이크 역시 마린을 소환해 힘을 보탰다.

윈드의 연락을 받기 직전. 브레이크는 프레아가 그레이의 딸이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윈드의 전령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상태였다. 마린이 신음하며 소리쳤다.

“무리야! 레이 이러다가 너도 다칠 거야!”

마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브레이크가 침음했다. 마린의 말이 맞았다. 프레아의 폭주를 말리기에는 그녀의 영류가 너무 방대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영류를 막아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강제로 계약을 끊어내지 않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때 그레이가 바람의 근원지로 발을 옮기려 했다. 이를 브레이크가 막아서며 외쳤다.

“미쳤어?!”

“이대로 가다가는 프레아가 잘못될 수도 있어.”

“형이 간다고 될 일도 아니잖아!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성적? ……딸이 죽어가는데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그레이가 브레이크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가 아차 하는 사이에 그레이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들어갔다. 바람 주변으로 꽃잎이 나부꼈다.

물의 정령과 꽃의 정령이 바람의 정령 하나를 말리지 못해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 멀리서 보면 장관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울지 몰라도 막는 입장에서는 고역이었다.

“젠장,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브레이크가 온 힘을 다해 막으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 * *

눈을 뜨니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숲이었다. 프레아는 정처 없이 숲을 헤맸다. 그때와 달리 어린 프레아도, 금발의 사내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나무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나무가 저를 비웃듯 바람에 나부꼈다.

한참 돌아다니니 어린 프레아가 보였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 프레아의 앞에는 금발의 사내가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는 프레아를 안심시키듯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사내의 앞에는 낯익은 남자가 있었다. 알프레도 빈센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익숙한 마법진으로 그레이를 겁박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혼절했을 때 보았던 마법진이었다. 혼절한 이유를 알고 나니 허무해졌다.

저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기절했던 모양이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프레아가 본능적으로 그들을 막아섰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허상에 불과했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돌이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지없이 아버지는 마탑주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제야 확실해졌다.

그날 본 것은 꿈이 아니었다. 이곳은 프레아의 무의식에 잠재워진 기억의 편린이었다. 조각조각 난 기억들이 어떤 계기로 다시 모여지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다시금 한자리로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프레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털썩 주저앉은 채 그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알프레도는 어린 프레아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알프레도 옆에는 루이스 안도 있었다. 루이스 안은 정확히 프레아를 보았으나 못 본 척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령을 이용해 알프레도 몰래 프레아가 보이지 않도록 막을 형성했다. 어린 프레아는 그레이가 밭은기침을 내뱉는 것을 보며 파르르 떨었다.

그때 한차례 부는 강한 바람과 함께 프레아의 주변에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늑대에 알프레도가 경악했고, 옆에 있던 루이스 역시 놀란 것처럼 입을 헤벌렸다.

프레아를 보지 못한 알프레도는 얼른 그레이를 데리고 순간 이동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루이스는 그와 같이 이동하지 않고 늑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제 막 서로를 확인하여 계약하고 있는 어린 프레아와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빛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미 알던 사이에서나 가질 법한 선연한 분노에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순간, 기억이 다시 파사삭하며 부서졌다. 그제야 프레아는 토토와 계약한 그 순간이 잊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과 토토의 기억을 조작해 토토를 인형 따위에 갇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계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프레아와 이제 막 눈을 떠 몽롱한 토토의 빈틈을 노린 것이다.

프레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해서 재생되는 잊어버린 기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실험체가 된 건 프레아 때문이었다.

작별 인사를 한 그레이에게 가지 말라고, 같이 있자고 그가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말렸다. 그레이는 그런 프레아를 차마 두고 가지 못했다. 미련한 아버지는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마탑주에게 걸리고 만 것이다.

“당신이 아빠였어?”

프레아가 울부짖듯 대답해 줄 수 없는 상대에게 소리쳤다. 그냥 저와 놀아주는 친절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가끔 엄마에게 꽃을 전해주라고 해서 에밀리에게 관심 있는 남자라고 짐작했다.

당시의 프레아는 아버지가 무척 갖고 싶었고 그래서 그가 아빠가 되길 바랐었다. 어떻게 그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이렇게 제게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매튜…….”

루이스의 등장으로 내뱉지 못한 이름이었다. 프레아의 두 눈에는 이제 이유 있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이스만 아니었어도 매튜를 보는 순간 그가 그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 엄마에게 그레이 크로이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가 살아 있다고 엄마에게 알릴 수 있었으리라.

프레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폭주했음을 느꼈다.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기억의 저편으로 의식이 쓸려온 기분이었다. 프레아는 얼른 이 무의식에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나가지질 않았다.

누구 하나 저를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눈앞에선 그레이가 잡혀가는 장면이 계속 반복됐다. 루이스가 갑자기 기억을 찾게 해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프레아가 매튜를 떠올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도 그는 그레이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를 보자마자 쉽게 동요했으리라. 아버지가 정체를 숨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재혼한 몸이니까.

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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