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
그 이후 클로드와 프레아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클로드는 이번에 머레니가 제출한 서류의 사본을 프레아에게 넘겼다. 정령 협회가 정령석을 제공했던 정황이 담긴 서류였다. 이상하게도 자료에는 그들이 정령석을 제공하는 대신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 빠져 있었다.
머레니의 고발 이후 마탑이 반란군과 관련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협회도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니 그들이 마탑에서 무엇을 받았는지가 제법 중요한 화두였다. 클로드가 한창 서류를 뒤적거리는 프레아를 향해 제안했다.
“나는 자네가 이걸 알아내 주었으면 해. 협회 쪽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니까.”
“확실히 협회의 선택이 좀 의아하긴 하네요. 앙숙 관계였던 마탑의 실험을 이렇게 장기적으로 도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게 의문이네. 머레니 코헨을 심문했지만 말할 수 없다고 하더군.”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턱을 쓸었다. 프레아는 머레니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의 가슴께에 있던 문양 때문이겠지. 프레아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마 말하는 순간 죽을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태어나는 순간 모두 심장에 마법을 새겨 마탑주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고 해요.”
“……처음 듣는 소린데.”
클로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탑의 존속이 고작 서로에게 시한폭탄을 심어두는 거라는 걸 외부에서 알면 비웃을 테니까. 그들은 철저히 신의라는 위선으로 그것을 가렸다.
“저도 최근에 머레니 영애를 통해 들었어요. 이미 확인도 했고요. 아마 그걸 말하면 마법이 발동되도록 해둔 것 같아요.”
“설마 그럼 이번 집단 자살과 순간 이동도……?”
클로드가 조금 경악 어린 얼굴로 뒷말을 흐렸다. 프레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추측이지만 마탑주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요. 구속구를 찬 마법사들을 멀리서 죽게 만들 수 있는 건 몸에 새겨진 마법뿐일 테니까요.”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갑자기 다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으니까. 예전 마법사들의 의문사와는 조금 달라서 이건 또 무슨 징조인가 했지.”
클로드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프레아는 마법사의 의문사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떠오른 한 사람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죽은 마법사 중에 아네모네 황비와 친하게 지내던 자들이 많아요. 황비 본인도 죽었고요.’
‘다들 자연사라고 생각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분명 타살이에요. 죽은 마법사들의 마나 코어 상태가 엉망이었으니까요. 뭔가 중독된 것처럼요.’
머레니는 그것이 에시드가 한 짓이라고 했었다. 죽은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아네모네 황비의 측근이었으니까. 밀리안 역시 합리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라 했고.
“전하께서는 이번 일이 마법사의 의문사와는 다르단 걸 어떻게 아셨어요?”
“의문사한 마법사들은 모두 왼쪽 귀 뒤에 붉은 반점이 세 개 찍혀 있었네. 이번 사건에선 그게 없었고.”
왼쪽 귀 뒤에 붉은 반점 세 개.
프레아가 그가 말한 단서를 곱씹었다. 라즐리 후작은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아네모네 황비의 측근이었다. 마나의 과부하로 보이는 의문사가 사실은 다른 것이 원인일 가능성은?
마법사들의 죽음이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그들의 죽음만 부각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나의 과부하와는 증상이 비슷하지만, 그것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붉은 반점 세 개.
순간 에시드가 폴리 사탕을 보여주며 자신이 발명한 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는 건 우연일까. 에시드는 무언가를 발명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폴리 사탕이라는 독특한 약을 만들었고, 그밖에도 만든 것이 많다고 자랑했었다. 그럼 그가 마나의 과부하로 위장할 만한 독약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리라.
또한 그 반점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독살에 의해 생긴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애초부터 그런 반점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쇄살인일 수도 있으니까.
이를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라즐리 후작에게도 그러한 반점이 있었느냐다. 대외적으론 지병이 있었다고 했지만 확실한 병명은 그의 아들 데오 라즐리만 알고 있었다. 라즐리 후작에게도 반점이 있다면 더 이상 마법사들만의 의문사가 아닐 터.
클로드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프레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할 말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프레아가 막 말을 꺼내려 한 순간이었다.
“그…….”
“혹시 자네도 밀리안처럼 에시드 대공을 의심하나?”
“네?”
프레아는 막 반점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밝히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 때문이었다. 클로드는 프레아가 되묻자 말을 이었다.
“밀리안은 에시드 대공이 그 일과 관련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공은 누군가를 죽일 위인이 못 되네. 본인 죽을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모를까.”
“……대공님에 관한 믿음이 대단하시네요.”
프레아가 뒷말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용의자를 크게 신임하는 상대에게 제 추측을 말해보았자 반박만 당할 게 뻔했다. 사실 프레아도 에시드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를 믿기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무리 보이는 모습이 선하다고 해도 사람 속까지 선할지는 모르는 법이다. 겉과 속이 똑같다고 믿는 건 순진한 일이기도 하고.
“글쎄,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프레아의 말에 클로드가 씁쓸히 답했다. 그의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길었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의 주체가 클로드 본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애매하게 들렸다. 프레아는 그것을 전자로 해석했다.
아무래도 반점에 관해서는 확실해지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수사가 필요하다면 밀리안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다.
“대공님은 든든하겠네요. 이렇게 자길 믿어주는 가족도 있고.”
“그래, 가족이지.”
“저도 대공님이 이번 일과 관련이 없길 바라요.”
프레아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제 바람을 이야기했다. 프레아가 단서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증거를 더 캐내야 했다. 그가 정말 아니라면 증거들이 그것을 증명해 줄 테니까.
“그럼 알아내는 대로 보고드릴게요.”
프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프레아를 향해 물었다.
“아, 자네. 요즘도 체리를 즐겨 먹나?”
“네?”
뜻밖의 말에 프레아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체리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클로드는 조금 짓궂은 얼굴로 생글거리며 말했다.
“밀리안 그 녀석 체리만 보면 자네 얘길 했거든. 이젠 나도 체리만 보면 자네가 떠오를 정도지.”
“어…….”
“마침 좋은 품종의 체리가 떠올라서 물어본 거네. 여전히 좋아하나?”
클로드의 말에 프레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체리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건 사실이니까. 오죽하면 밀리안도 제게 체리 얘기 좀 그만하라고 구박했겠는가. 근데 그런 밀리안이 체리를 볼 때마다 제 이야기를 했다니…….
이건 좀 기쁜데?
프레아가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꾹 참았다. 흑역사는 둘째 치고 밀리안이 친구에게 제 얘길 자주 했다는 게 더 기뻤다. 프레아가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홍조를 띤 얼굴을 한 건 꿈에도 모른 채.
“네, 좋아해요.”
클로드가 볼을 붉히며 좋아하는 프레아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체리를 좋아하는구나.
“다행이군. 마침 왕국에서 수입해 온 체리가 있으니 들려 보내겠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하곤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 *
밀리안이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서슬 퍼런 검날이 사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목에 박힐 듯 매서운 칼날이었다.
사내는 끽소리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밀리안이 종이 하나를 꺼내 들어 사내의 얼굴과 비교했다. 밀리안의 손에 들린 것은 이번에 지명수배를 내린 협회 간부들의 몽타주였다.
사내의 얼굴과 종이의 인물이 정확히 일치했다. 밀리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가만 올라간 냉소에 가까웠다. 사내가 두려움에 와들와들 떨었다.
“맞군.”
“사, 살려주게.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하지만 밀리안은 그를 한 치의 자비도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밀리안이 검날을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목을 칠 것 같은 동작에 그가 세차게 바르작거렸다. 밀리안이 그런 사내를 손잡이를 이용해 기절시키려다 말고 멈추었다.
사내가 제풀에 지쳐 기절한 탓이었다. 사내는 사색이 돼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자신의 모습이 무척 위협적이었다는 걸 모르는 밀리안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겁도 많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기사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단장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검을 검집에 도로 넣으며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를 끌고 갔다.
도망 다니는 줄 알았더니 도박장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수배령을 뒤늦게 안 모양이다. 아직도 수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뭐, 그 덕에 수고를 덜었다는 점에서 이쪽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기사단 내 감옥에 가두고 아는 거 다 토해낼 때까지 패.”
“예.”
“내가 갈 때까지 말 안 하고 버티면 쓸데없이 달린 혀를 잘라 버릴 거라고도 전해.”
“예, 단장님!”
살벌한 말을 일상 대화처럼 말하는 밀리안에게 기사가 잔뜩 군기가 잡힌 얼굴로 답했다. 밀리안은 그들을 뒤로한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테일러스 성으로 돌아온 밀리안이 가볍게 씻고 나왔다. 이제 막 저녁을 먹으려는데 뜻밖의 손님이 성으로 찾아왔다.
“프레아?”
밀리안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양손에 든 가방이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 보여서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사 온 사람 같았다. 옆집에 놀러 온 행색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프레아가 당황한 밀리안을 향해 해맑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게라가 옆에서 놀란 기색을 띠며 멈춰 있었다. 프레아는 두 사람을 향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봤으면 이것 좀 받아줘. 무거워.”
“아! 제게 주십시오, 아가씨.”
게라가 프레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며 얼른 가방을 받았다. 잠깐 방문한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크기의 캐리어. 이를 본 밀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눈빛이었다. 밀리안이 제 성으로 다짜고짜 찾아온 프레아에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한테 우리 사이 말했어?”
“아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는 얼굴로 그녀가 반문했다. 밀리안은 더욱더 눈을 가늘게 뜨며 가방을 가리켰다.
“그럼, 집 나온 것 같은 이 가방은 뭐야?”
밀리안이 설명을 요구하자 프레아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 당분간 네 성에서 신세 좀 지려고.”
표정이 너무 밝아서 서로 논의가 끝난 일인 줄 알았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밀리안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얼빠진 얼굴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나 네 집에서 살래!’라니. 생각지도 못한 한 방에 밀리안은 맥을 추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즉흥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터에서 편지를 받고 흥분해서 전쟁을 끝내 버린 자신이나,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집으로 덜컥 찾아오는 프레아나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밀리안이 당혹감에 도리질했다.
이렇게 제 발로 맹수의 소굴로 들어오다니. 분명 그날 밤, 참으려는 자신을 자극한 건 프레아였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일부러 조심조심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경계 없이 제 영역으로 침범했다.
이젠 아예 같이 살면서 제 온 신경을 마비시킬 생각인 걸까. 누굴 피 말려 죽이려고.
밀리안이 마른세수를 하며 프레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녀가 한 번 하기로 한 건 철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더욱 난감했다.
아니, 난감하다니?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
밀리안이 움찔했다. 꼬리를 문 생각의 종착점이 어딘지 안 탓이다. 테일러스 성은 온전히 자신의 영역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는 안전한 밀실. 이곳엔 진도 에밀리도 없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손에 가려진 채라 프레아는 그 미소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왜? 싫어?”
“아니…… 싫다기보단 갑작스러워서.”
“그럼 좋다는 거네.”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을 제 식대로 해석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어쩐지 익숙한 화법.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했던 수법이었다. 밀리안은 어느새 저와 같은 수작을 부리는 프레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프레아는 그런 그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녀는 새삼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클로드에게 밀리안이 불면에 시달리고 악몽을 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를 성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으면 더 우울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일단 무작정 짐을 싸고 나왔다. 한데, 막상 이유를 설명하자니 어려웠다. 다짜고짜 너 잠 못 잔다고 해서 왔어!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일단 막무가내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어차피 평소에도 제멋대로였으니 크게 의심하지 않으리라. 예상과 마찬가지로 기색을 보아하니 밀리안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게라에게 프레아의 저녁까지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프레아는 저녁이라는 말에 아차 하며 게라를 불러 세웠다.
“아, 게라. 오늘부턴 이 명단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요리해 달라고 주방장에게 말해줘.”
“이건 뭡니까, 아가씨?”
게라가 프레아가 건넨 종이를 받으며 물었다. 종이에는 식재료 명단이 적혀 있었다. 게라의 의문 가득한 얼굴에 프레아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냥, 요즘 내가 즐겨 먹는 재료들이야.”
“알겠습니다. 이걸로 요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게라가 수긍하며 종이를 옆에 있던 시녀에게 전달했다. 시녀는 눈치껏 주방장에게 종이를 주러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 뒤로도 프레아는 게라에게 성 상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환기는 하루에 몇 번 하는지, 조명의 색이 너무 밝으니 누런빛이 도는 조명으로 바꾸는 건 어떻냐는지, 죄 질문을 빙자한 잔소리에 가까웠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속내를 알아맞히려는지 그윽이 쳐다보았다. 프레아가 하는 조언은 모두 성의 안주인이 할 법한 말이었다. 당연하게 안주인 행세를 하는 프레아를 밀리안이 기꺼워하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애인 건강 챙기는 거지.”
“흐응?”
“헉!”
프레아의 발언에 밀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옆에 있던 게라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프레아는 제가 말하고도 화들짝 놀라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속에 있는 생각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탓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게라, 내 침실 옆방으로 짐을 옮겨두도록.”
“예?”
“어서.”
“네.”
밀리안의 단호한 목소리에 멍하니 있던 게라가 서둘러 답했다. 갑자기 찾아온 아가씨를 정말로 성에 들일 모양이다.
게라가 짐을 든 채 뒤를 힐끗힐끗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밀리안이 ‘눈 안 치워?’ 하는 얼굴로 게라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게라가 계단을 올라간 것을 확인한 뒤 프레아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부모님한테는 말했어?”
“음, 편지 남겼는데.”
프레아가 볼을 긁적였다. 결정하자마자 짐을 싸고 나왔다.
그러느라 편지만 딸랑 남겨두었지만…… 그러면 된 거 아닐까.
편지의 내용도 무척 간단했다. 밀리안이 혼자 지내는 것이 걱정되니 당분간 테일러스 성에 머물겠다. 그렇게만 설명해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부모님은 우리 사이를 모를 테니까. 그냥 동생이 많이 걱정되나 보다 하고 넘어가실 거라 짐작했다.
물론 그건 프레아만의 생각이었다. 밀리안은 편지만 남겼다는 말에 알 만하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아마 자신이 청혼장을 보냈을 때처럼 또 한바탕 난리가 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리 났겠네, 또.”
“또라니?”
“아니야. 일단 이곳에 온 적당한 핑계를 대야겠네.”
“편지에다 적었는걸?”
“뭐라고 적었는데?”
“네가 걱정돼서 당분간 성에서 지내겠다고.”
프레아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밀리안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그것도 괜찮지만, 다른 걸 핑계로 대면 더 그럴듯하겠지. 이번 사건 때문에 상의할 일이 많아서 아예 옮겼다고 말해둘게.”
“굳이 안 그래도 될 텐데. 어차피 우리 둘 사이 아직 모르시고.”
프레아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밀리안은 그런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나저나 제 발로 들어왔으면 각오는 했겠지?”
“무슨 각오?”
“이런 거?”
밀리안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프레아의 입술을 훔치고 떨어졌다. 밀리안의 반응에 프레아가 흠칫했다. 그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것만 생각했지 다른 쪽은 전혀 생각 못 한 탓이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프레아가 밀리안을 유혹하려 한 거나 마찬가지 같았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프레아가 뒤로 슬슬 물러나려 하자 밀리안이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곤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어느새 분위기가 끈적끈적해졌다.
“경계심이 없어.”
“…….”
“애인이라면서 애인이 남자라는 자각이 없는 거야?”
“어음. 미안. 그냥 돌아갈게. 이건 아닌가 보다. 부모님도 아직 편지 못 읽으셨을…….”
프레아가 밀리안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밀리안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를 향해 곱게 미소 지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때는 그렇게 못 하지.”
* * *
진은 퇴근 후 잠시 서재에 들렀다. 책상 위 곱게 접힌 쪽지가 눈에 띄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쪽지였다. 진이 대수롭지 않게 쪽지를 펴 읽다가 사색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쪽지의 내용을 재차 확인하며 그는 경악했다.
[아빠, 아무래도 밀리안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아무리 독립했다고 해도 혼자 성에서 지내면 외로울 거예요.
제가 책임지고 당분간 테일러스 성에 머물면서 밀리안을 도울게요.
엄마한테도 잘 얘기해 주세요.
-프레아가-]
‘제 발로 밀리안에게 가다니!’
진이 손에 든 쪽지를 손쉽게 구겼다. 밀리안이 저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홀랑 호랑이 굴에 들어간 프레아가 걱정됐다. 당장 데리고 와야겠다 생각한 그는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에밀리를 떠올렸다.
우선 에밀리에게 말하는 것이 먼저였다. 밀리안 이놈이 또 무슨 달콤한 말로 프레아를 꼬여낸 건진 모르겠지만 같이 사는 건 말도 안 됐다.
진이 서재를 나와 침실로 성큼성큼 향했다. 공식적으론 같은 방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별거나 마찬가지인 침실이었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 지내온 것이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진이 방문을 벌컥 열고 에밀리를 불렀다.
“에밀리, 거기 있습니까?”
“잠시만요.”
에밀리가 진이 커튼을 젖히는 것을 만류했다. 어쩐지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진은 에밀리가 커튼을 걷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뒤 에밀리가 커튼을 걷었다.
“들어와요.”
진은 곧장 프레아의 쪽지에 대해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가가 무척 붉은 탓이었다. 에밀리가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진은 모른 척 넘어가지 않고 말했다.
“울었습니까?”
“못 본 척해주는 게 예의예요. 에드모어 공작.”
에밀리가 냉랭하게 답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진은 그런 에밀리의 생각을 존중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쪽지를 내밀었다.
“프레아가 테일러스 성으로 갔습니다.”
“그런가요.”
생각 외로 덤덤한 목소리였다. 아니, 다른 것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눈치였다. 그녀는 모든 게 다 귀찮아진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밀리안에겐 연락해 봤어요?”
“아뇨, 보자마자 왔습니다.”
“그럼 한번 연락해 보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죠.”
진이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에밀리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에밀리는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멍하기만 했다.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봐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무지 모른 척하기 어려운 모습에 진이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계약이기는 해도 부부가 된 지도 13년이 지났습니다.”
“그랬죠.”
“물론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서로 이익을 위해 맺은 계약이지만, 적어도 같이 지낸 세월 동안 충분히 믿음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
“다시 물을게요, 무슨 일입니까?”
“……진.”
진의 물음에 에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 넘지 마요.”
에밀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진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애초에 그를 찾기 위해 시작했던 계약 결혼이었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레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점차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그레이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원동력이었던 그레이가 살아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온전히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먼저 알았으니까.
안도감과 함께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갑자기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나타나지 않았다면 복수하겠다고 이라도 갈 텐데. 그런 몸으로 제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함께하는 동료로서 걱정하는 것도 선 넘는 행동입니까?”
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에밀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하는 이유가 이성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진과 에밀리 사이에 있는 감정은 동병상련이었다. 같은 아픔을 지니고, 같은 대상을 증오하여 맺어진 감정. 오히려 선을 넘어 말한 것은 에밀리였다. 에밀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예민했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에밀리의 사과에 진이 손사래 쳤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에밀리는 망설였다.
말해도 될까. 도와달라고 청해볼까.
그의 아내는 이미 죽었으나 자신의 남편은 살아 있었노라고 말해도 될까. 사실 에밀리는 그에게 애원하고 싶었다. 그레이를 살려달라고. 거듭된 망설임 끝에 에밀리의 입이 열렸다.
“사실 그레이를 만났어요.”
“……!!”
진이 뜻밖의 이름에 놀라 에밀리를 응시했다. 죽은 줄 알았던 자를 만났다니. 에밀리는 그런 진을 향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곧 죽을 거래요.”
“…….”
“도와줘요, 진.”
에밀리의 애원 섞인 목소리에 진이 얕게 신음했다.
그친 줄 알았건만,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다시 글썽였다. 늘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에밀리가 처음으로 진에게 매달린 날이었다.
* * *
테일러스 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손쉬웠다. 밀리안이 에드모어 성에 따로 연락을 취했는지 에드모어 성에서 돌아오라는 요청은 없었다.
프레아는 테일러스 성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정령 협회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테일러스 성에서 메샤르로 출근한 프레아가 서류를 살폈다.
협회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마탑에 정령석을 제공했었다. 최근 들어 그 양을 대폭 줄인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뒤를 밟히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프레아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비숍에게 물었다.
“협회장과 미팅은 어떻게 됐어?”
“언제든 찾아오라 했습니다.”
이미 앞서 협회에 미팅 요청을 했었기에 한 물음이었다. 의외로 곧장 답이 왔나 보다. 언제든 찾아오라니. 프레아는 협회장의 답신에 피식 웃었다. 그는 대외적인 행사에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그를 향한 소문도 무성했다. 그렇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 당황 하나 없이 언제든지 찾아오라? 그 말은 이미 메샤르에서 연락할 것을 알고 어떻게 해볼 증거는 다 없앴다는 뜻이다.
머레니가 제공한 서류에는 협회장에 대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 그 아래에 있는 간부들이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협회장도 모르게 정령석을 빼돌렸다는 건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그럼 바라는 대로 당장 가야겠네.”
“대표님.”
“응?”
프레아가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비숍이 프레아를 불러 세웠다.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자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말 있어?”
“음…… 아니에요, 조심하시라고요.”
비숍이 입을 달싹이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 하려던 말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꽤 수상하게 구는 비숍이었다. 할 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머제리 때문에 그래?”
“네? 아뇨?”
비숍이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프레아를 보았다. 정말로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프레아가 비숍의 정색을 보자마자 자신이 넘겨짚었구나 싶어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제 추측이 빗나가자 비숍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럼 왜 할 말을 삼키고 그래. 의심스럽게.”
“아니에요. 정말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흐음. ……알겠어. 일단 다녀올게, 그럼.”
비숍이 고개를 도리질하자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이었다면 어련히 알아서 할 거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비숍은 사무실을 빠져나간 프레아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매튜와 레이첼 후작과의 사이가 어쩐지 이상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후작이 프레아가 아닌 그를 찾아온 것도 이상했고, 반응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로 프레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협회 일로 정신없는 분이다. 말했다간 괜히 속만 끓이실 것 같았다.
비숍이 상념을 지우고 청소나 할 겸 빗자루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이상한 환청이 들렸다.
-앗, 잠깐만요. 내가 합니다!
“머제리?”
비숍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헛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에 비숍이 인상을 팍 쓰고 빗자루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이 대거 사라진 그날, 머제리는 비숍이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괜히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신경이 쓰였다. 이래서 제멋대로인 마법사들과는 친해지면 안 되는 건데.
비숍이 잔뜩 성을 내며 빗자루질을 했다.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여전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감정은 불안이었다.
* * *
협회에 도착하자 곧바로 협회장실로 안내받았다. 프레아는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최대한 당당한 걸음걸이로 뒤따라갔다. 협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협회장을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협회의 간부들뿐이었다. 워낙 개인주의적인 집단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브레이크 역시 협회장과 대면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회장님,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대표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협회장이 프레아를 보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루이스 안입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입니다.”
루이스가 프레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쉰 소리가 간혹 섞였지만 추측되는 나이대에 비해 낭랑한 목소리였다. 프레아가 루이스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는 외형이었다.
백발에 가깝게 흰 금발. 얼굴에 보석을 박은 것 같은 영롱한 초록빛의 커다란 눈동자. 창백하게 하얀 피부. 존재감을 과시하는 초록 눈만 빼면 전체적으로 하얀 느낌의 여인이었다. 여전히 총기를 잃지 않은 눈동자가 프레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프레아가 착석하자 비서가 차를 내왔다.
“안 그래도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루이스가 푸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시 한번’이라는 말에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 본 적 있으세요?”
루이스는 가만히 프레아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글쎄요. 그걸 봤다고 해야 하나, 스쳐 지나갔다고 해야 하나.”
“연회에서 마주쳤나 보네요. 제 기억에는 협회장을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협회장이 여자인지도 안 가문인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래 봤자 방계예요. 직계 가문 사람과는 교류해 본 적도 없죠.”
루이스가 연한 미소를 띠었다. 안 가문. 아네모네 황비를 배출한 가문이자 현재 황제를 견제하는 귀족파의 수장으로 있는 가문이었다. 에시드의 외척이기도 하고.
협회장이 안 가문이라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간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본인도 별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자신의 가설에 그녀가 안 가문과 유착 관계일 가능성을 추가했다.
루이스의 시선이 프레아의 귓가로 향했다. 정확히는 프레아가 끼고 있는 피어싱이었다.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도 정령사이니 윈드의 존재를 바로 알아보았을 터.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귀걸이, 평범한 귀걸이가 아니네요. 설마 정령을 가두는 게 취미인가요?”
악의 없이 던진 루이스의 말에는 분명 날 선 검이 숨겨져 있었다. 협회는 언령 연구자가 대거 사라진 뒤로도 계속 정령을 언령에 속박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아마도 장기간 아무런 부작용 없이 정령을 속박해 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사실 부작용이 아예 없는 게 아니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
프레아는 피식 웃으며 검날의 방향을 루이스에게로 돌렸다.
“취미로 정령을 가두려고 하는 건 협회장님이시겠죠.”
언령을 통해 정령을 구속하려 했던 일을 에둘러 까는 말이었다. 이에 루이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글쎄요. 정령을 완벽하게 가둔 당신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곧 풀어줄 거예요. 그러는 협회장님도 정령을 가두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프레아가 그녀의 목걸이를 눈짓했다. 루이스의 목걸이에선 강한 화마가 느껴졌다. 불의 정령이리라.
“칭찬은 고맙지만, 아직 불완전해요. 제가 원하는 건 이런 우스운 수준이 아니라서요.”
“죄송한데 칭찬 아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욕한 거예요.”
프레아가 그녀의 말에 반박하며 나섰다. 대놓고 비꼰 말이었다. 그런데 그걸 유순하게 받아들이니 당황스러웠다.
“후후, 저에 대한 반감이 많으시네요. 브레이크 때문인가?”
루이스의 입에서 브레이크라는 단어가 나오자 프레아가 시선을 맞추었다. 브레이크는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브레이크도 예전엔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당시 브레이크는 눈에 띄는 정령사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그의 스승님이 귀여워하던 시동으로 아는 이가 많았다고 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브레이크를 안다고 한 것이 의외였다.
“브레이크를 아시는군요.”
“그의 스승과 친했거든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죽은 건 좀 안타까운 일이지만.”
“친하다는 말을 쉽게 하시네요. 그를 숙청한 건 협회장님 아니셨나요?”
“그가 제 말을 따랐으면 될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뒤통수를 친 게 여전히 괘씸하죠. 뭐, 방심한 제 탓 아니겠어요?”
루이스가 사람 좋은 얼굴로 유려하게 대꾸했다. 저와 뜻이 안 맞는 사람을 숙청한 사람치고 경쾌한 반응이었다. 몹시 불쾌해진 프레아가 따져 물었다.
“방심하셨다고요, 그 방심에는 몇 명이 희생되었나요?”
“글쎄요. 그것까진 말해줄 의무가 없는 것 같네요.”
루이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프레아는 이미 수많은 정령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는 그레이 크로이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날 선 반응이 나오고 말았다.
협회는 그의 존재 자체를 지웠다. 촉망받는 정령사이자 간부였던 그레이 크로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실종이 아닌, 존재 자체가 사라진 상황.
어쩌면 반란군과 마탑, 정령 협회 간 모종의 관계 속에서 그레이가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여인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동조했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프레아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도대체 뭔가요? 이미 당신은 정령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잖아요.”
“글쎄요. 아직 만족을 못 해서요. 제가 원하는 걸 말하면 도와줄 건가요?”
“이제 보니 욕심쟁이셨네요. 정령은 장난감이 아니에요. 당신과 계약한 정령이 불쌍하지 않으세요?”
“이미 저와 소통하기를 거부한 정령과 무슨 말이 통할까요? 그리고 욕심 좀 부리면 안 되나요? 그만한 힘이 내게 있는데?”
루이스가 정말 이해 안 된다는 어조로 물었다. 악의 없이 개미집을 헤치고, 그것도 모자라 개미를 죽이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순진무구함이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무섭게 느껴졌다. 프레아가 짙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욕심은 만족이 없거든요. 결국 당신의 욕심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겁니다.”
“……누구랑 같은 말을 하네요.”
차가울지언정 그래도 미소를 짓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이 굳었다. 마치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불쾌해 보였다. 잠시 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 오래 사는 사람은 못 봤어요.”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뇨. 충고예요. 어쭙잖게 선인 행세를 하다가 죽은 사람을 여럿 보았거든요.”
“그럼 불필요한 충고네요. 전 선인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그런가요? 안 그래 보이는데.”
루이스가 비웃듯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자지러지게 웃었다. 명백한 조롱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선인이라니. 자신이 선인이었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에밀리는 일반인이기에 협회를 조사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프레아는 달랐다. 사실 프레아가 그녀를 만나러 온 목적은 이번 사건만이 아니었다.
프레아는 알고 싶었다. 아버지가 죽어야만 했던 진실을.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된 다음, 제 식대로 복수할 생각이었다.
이미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안 이상 그냥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끝까지 추적해서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밝혀낼 것이다. 프레아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제가 왜 선인이 아닌지.”
“기대되네요.”
협회장과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지지부진했다. 루이스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이번 일은 자신도 모르게 일부 간부가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그 표정이 어찌나 뻔뻔하던지 프레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물론 그 모든 걸 예상하고도 협회장을 찾아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프레아가 씩씩거리며 마차에 탔다. 마차를 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진 프레아가 토토를 불렀다.
“토토, 확인해 봤어?”
프레아의 부름에 현신한 토토는 여전히 미니미 버전이었다. 프레아가 폭주했을 때 내상을 함께 입어 여전히 골골거렸다. 보통 계약자가 다쳐도 정령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 달리 토토는 언령으로 갇힌 상태라 그런지, 계약자의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토토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일과 관련 없다는 말은 다 뻥이야. 주모자는 루이스 안인 것 같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협회가 마탑에서 받은 게 뭔지 알아냈어?”
프레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질문했다. 애초에 그녀의 증언 따위를 들으려고 만난 게 아니었다. 토토의 능력을 이용해 그녀의 기억을 더듬어 볼 요량이었다.
토토는 바람을 이용해 여러 곳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현재는 힘이 현저히 떨어져 접촉한 상대를 대상으로 비교적 최근의 기억만 대강 훑을 수 있었다. 토토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것까지는 확실히 확인 못 했어. 그나마 건진 건 최근 마탑의 마법사에게 복잡한 술식이 담긴 마법진 조각을 받았다는 것.”
“어떻게 생긴 건데?”
프레아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와 펜을 꺼내며 물었다. 토토가 그런 프레아에게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넌 가끔 날 사람처럼 대해. 내가 이 발로 펜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해?”
“아, 맞다.”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토토는 앞발을 내밀었다.
“이리 와봐. 머릿속으로 보여줄 테니까.”
프레아가 고개를 숙이자 토토가 두툼한 앞발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내 머릿속으로 한차례 기억들이 쏟아졌다. 곧이어 토토가 보았다던 마법진이 정확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프레아는 종이 위에 그대로 마법진을 그렸다. 잘린 모양을 보아하니 총 8조각이 나올 법한 마법진이었다. 아마 협회를 의심한 마탑이 일이 진행될 때마다 한 조각씩 제공한 모양이다.
“이게 뭘까.”
프레아가 일부분에 불과한 마법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토토는 앞발로 제 턱을 긁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글쎄. 마법진은 마법사가 제일 잘 알지.”
“믿을 만한 마법사가 주변에 있어야 말이지.”
“왜, 그 녀석 있잖아. 그 허우대만 멀쩡하고 나사 빠진 놈.”
“에시드 말하는 거야?”
“그래, 걔.”
토토가 머리 좀 쓰라는 듯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얄미워 프레아는 토토를 가볍게 흘겼다. 프레아가 궁금한 마법진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탑에서 저를 쓰러지게 했던 마법진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토토의 말대로 에시드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우선 다른 것부터 확인하고.”
프레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에시드는 용의자였다. 물론 이번 일까지 그가 연관되어 있을지는 확인해 봐야 할 문제지만, 예전만큼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없었다. 이 의심을 떨쳐낼 객관적 증거가 필요했다. 프레아가 마부에게 조용히 일렀다.
“라즐리 성으로 가줘.”
“네, 아가씨.”
마부가 곧장 방향을 틀어 라즐리 성으로 향했다. 에시드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머레니 코헨이었다. 그녀는 에시드가 외척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자진해서 살생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그를 통해 황권을 잡고자 하는 세력들이 존재했으니까.
머레니는 에시드가 무력이 센 마법사 위주로 살해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 마나 과부하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즐리 후작의 죽음은 조금 뜬금없었다. 그는 일반인이었으니까.
만약 라즐리 후작의 왼쪽 귀 뒤에도 붉은 반점이 있다면 더 이상 마법사에만 국한된 살인 사건이 아니다. 머레니의 증언만으로 그를 범인으로 몰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황은 그를 가리키게 되리라.
그러니 라즐리 후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에 머레니를 만나야 했다. 분명 머레니가 아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뭔가를 숨기는 기색이었으니까.
“뭐야, 라즐리 성엔 갑자기 왜 가?”
“확인할 게 있어서.”
“……또 싸우려고?”
“싸우러 가는 거 아니야.”
당연히 싸우러 가는 줄 아는 토토를 향해 프레아가 입을 비쭉였다. 토토가 미심쩍은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늘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으니 의심할 수밖에.
“뭘 그런 거로 토라져.”
토토가 앞발을 들어 프레아의 입꼬리를 올렸다. 프레아는 저항하지 않고 픽 웃어버렸다.
“안 토라졌거든?”
“그래, 그래.”
토토가 프레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사라졌다. 현신을 푼 걸 보니 몸 상태가 나쁘긴 한 모양이다. 잠시 뒤 토토가 조금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아까 그 협회장 말야. 어딘가 익숙했는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네.
“그래? 난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오래 살다 보면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이 저 사람 같고 그렇더라.
“지금 굉장히 어르신 같았어.”
프레아가 풉,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물론 어르신이 맞지만 프레아는 토토가 항상 친구 같았다. 늘 함께해 주는 친구. 에리카를 만나기 전부터 언제나 함께 있어 준 친구 말이다.
-언제는 친구라더니 이젠 늙은이 취급이네.
“내 친구에는 나이 제한이 없거든.”
-고맙네, 그것참.
한참 토토와 입씨름을 하는데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라즐리 성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자 집사가 부리나케 성문으로 나왔다. 그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프레아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프레아 아가씨.”
“마리아를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예. 우선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정중한 태도로 프레아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온 라즐리 성은 변함없었다. 화려한 가구들은 여전히 정돈이 잘되어 있는 상태였다. 입구에서부터 세련된 장식이며 예술품들이 눈에 띄었다.
프레아는 익숙하게 의자에 앉아 감상에 젖었다. 어릴 적엔 마리아가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조금 이기적이게 굴어도 저를 친구로 여긴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중 되어서야 마리아가 저를 들러리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땐 좀 서운했었지.
그것도 사실 다 옛날 일이라, 지금은 그냥 마주치지 않으려 서로 조심하는 사이였다. 어린 시절 다툰 뒤 마리아의 모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난번 장례식 때 처음으로 마리아의 약한 모습을 봐서일까. 마음 한편에 찝찝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괜한 것을 본 기분이랄까.
“네가 어쩐 일이야?”
마리아가 귀빈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평소의 새침데기 같은 말투는 아니었다. 정말로 네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프레아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널 찾아온 것도.”
“그러게.”
마리아가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처럼 담담히 말하곤 자리에 앉았다. 늘 마리아를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메이라는 하녀가 옆에서 차를 따랐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우리 사이에 차나 마시자고 왔을 것 같지는 않고.”
마리아가 프레아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본론부터 꺼내는 그녀를 본 프레아가 피식 웃었다.
“맞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뭔데?”
“근데 막상 얼굴을 보니 물어봐도 되는 건지 확신이 안 드네.”
“아버지에 관한 얘기구나?”
마리아가 프레아의 말을 눈치껏 받았다. 프레아와 마리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마리아의 얼굴에선 감정의 소용돌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프레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맞아. 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혹시 후작님의 왼쪽 귀 뒤쪽에 붉은 반점 같은 거 본 적 없니?”
“붉은 반점?”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아버지의 귀 뒤쪽에 점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아는 딸은 드물 테다.
실제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있어 클로드도 그 단서를 알기까지 한참 걸렸다고 했었다. 보통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기도 하고.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도리질했다.
“잘 모르겠다. 확인해 보고 연락 줄게. 봤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거든.”
“그래. 확인하는 대로 전보 줘.”
프레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그 뒤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마리아와 정상적인 대화를 해본 것이 오랜만이라 다음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프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이만 가봐야겠다.”
“프레아.”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나가려는 프레아를 마리아가 불렀다.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에 프레아가 뒤를 돌아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뒤돌아보지 않아 뒤통수만 보였다.
“왜?”
프레아가 돌아보지 않는 마리아에게 물었다. 이에 마리아가 선뜻 말하지 않더니 곧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릴 적 결혼식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널 몰아세웠던 거 미안해.”
“…….”
“괜히 그 후로 너만 보면 시비 건 것도 사과할게. 알잖아, 내가 좀 속이 좁고 이기적인 거.”
갑작스러운 마리아의 사과에 프레아가 움찔했다. 뒷모습만 보이는 탓에 마리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목소리를 통해 예전과 달리 진심이라는 것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나도 그때 머리채 잡아서 미안했어.”
프레아가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띠며 사과했다. 그녀 역시 무턱대고 폭력을 사용했었으니까. 어릴 적 치기 어린 행동을 이제 와 사과하려니 조금 머쓱했다.
“장례식에서도 고마웠어. ……그러고 보면 너랑 엮일 때마다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 같네. 그날 이후 처음이었어. 다른 사람들 시선 생각 않고 엉엉 울어본 건.”
“……그래서 두 번째로 망가져 본 기분은 어때?”
프레아가 마리아를 향해 가볍게 물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또 네가 괜히 자극해서 남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며 화를 내는 편이 더 그녀다웠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 그녀다운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프레아의 물음에 마리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나쁘지 않았어.”
아주 환한 미소였다. 후련한 얼굴이기도 했다.
“다행이네.”
프레아가 그런 마리아를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늘였다. 이번에는 마리아다운 답변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 치기 어린 싸움을 화해한다고 해서 전과 같아질 수는 없다.
프레아는 아무런 미련 없이 라즐리 성을 나왔다. 마리아 역시 더는 프레아를 잡지 않았다. 그간의 앙금을 풀어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젠 길 가다 마주쳐도 서로 으르렁거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미숙했고, 어리석었고, 서툴렀었다.
그간의 간극을 이제 와 채울 수는 없지만 두 사람 모두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아는 개운한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아가씨.”
테일러스 성으로 퇴근한 프레아를 게라가 반갑게 맞았다. 이제는 그녀가 성에 머무는 게 제법 익숙해졌는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프레아가 저를 반기는 게라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밀리안은 퇴근했어?”
“아직 안 오셨습니다. 먼저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야. 오면 같이 먹을게.”
프레아는 가볍게 거절했다. 어차피 밀리안도 곧 올 테니 같이 먹는 편이 좋으리라.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말씀하신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응. 마음에 들어.”
프레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 게라는 그녀의 입맛과 취향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 알려준 식재료들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것이 많았다. 애초에 불면증에 좋다고 하는 식재료였으니까. 밀리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이야 감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근데 정말 이 식재료가 아가씨의 취향이십니까? 후작님께 들은 것과는 조금 달라서요.”
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프레아는 배시시 웃었다.
“사실 그거 내 취향 아니야.”
“그럼 왜 따로 부탁하셨습니까?”
“그야 밀리안이 요즘 너무 골골거리니까 걱정돼서…….”
“앗! 그렇다면 아예 안주인으로 오실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게라가 프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호했다. 눈빛이 어찌나 빛나는지 마치 이날만을 꿈꿔온 듯했다. 그의 반응이 부담스러워 프레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안주인은 좀 이른데. 그리고 게라. 왜 당연하게 나랑 밀리안을 부부 관계로 엮는 거야? 누나가 동생 집에 좀 얹혀살 수도 있는 거지.”
“아닌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게라 우스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무, 뭘 다 안다는 건데?”
프레아가 움찔했다. 그런 프레아를 본 게라가 가슴을 당당히 쭉 펴며 말했다.
“이미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직접 애인이라고도 하셨잖습니까?”
아, 맞다. 그랬었지.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행동에 프레아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게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은 지난번에 아가씨가 후작님 방에서 몰래 나오는 것도 봤습니다.”
“그, 그건 언제 봤어?”
게라의 자신만만한 반응에 프레아는 당황했다. 수면에 좋다는 향초를 피우러 잠시 들어갔을 때 본 건가? 당연히 밀리안이 안 자고 있어서 곧바로 나올 수는 없었지만…… 절대! 그런 걸 바라고 몰래 찾아갔던 게 아니었다고.
게라가 보는 자신의 이미지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 만남부터 밀리안의 욕실에 들어가질 않나, 이젠 아예 성에 들어와서 살고 있질 않나. 여러모로 좋은 이미지를 쌓기엔 실패한 것 같았다.
프레아가 민망해 손부채질을 하자 게라가 눈치챈 계기가 또 있다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것뿐인 줄 아십니까? 아가씨께서 몰래 후작님의 침실을 염탐하는 것도 다 보았습니다.”
“그, 그건 또 언제…… 아니. 이게 아니라, 오해야, 게라! 난 그냥 밀리안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애써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후작님처럼 저돌적인 분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아무리 해명해도 게라는 이미 자기만의 결론을 내린 듯했다. 게라는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제 생각을 공고히 했다.
억울한 마음에 프레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앞뒤 없이 달리는 성격은 맞지만 절대로 밀리안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애초에 성에 들어온 목적은 밀리안의 치료였으니까.
‘부, 부끄러워!’
프레아가 차마 게라를 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또 오해했는지 게라가 프레아를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요즘은 여자 남자랄 것이 있습니까? 그냥 먼저 하고 싶은 사람이 다가가고 그런 것이지요. 저 게라는 그렇게 고지식한 집사가 아닙니다.”
“하아, 마음대로 생각해.”
프레아는 해명하기도 지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시에라를 불러와야 할 것 같다. 아직 밀리안과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해 에드모어 성에서 불러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후작님께는 아가씨처럼 적극적인 분이 계시는 쪽이 좋겠지요.”
“왜? 둘 다 폭주 기관차처럼 난리 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네? 그걸 제가 왜 말립니까? 저는 그냥 뒤로 물러나서 구경할 겁니다.”
“…….”
한 방 맞은 듯했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프레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데 게라가 물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언제 후작님과의 사이를 공표할 생각이십니까?”
“……어?”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게라.”
그때, 밀리안이 선수 치며 끼어들었다. 프레아가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올렸다. 게라도 서둘러 밀리안을 반겼다. 하지만 밀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언제부터 내 일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해도 된다고 했지?”
“그렇게 매정하게 선을 그으시다니. 너무하십니다, 후작님.”
“됐어, 그만 나가봐. 게라 우스.”
“매번 나가라고만 하십니다!”
게라가 무척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밀리안이 그를 빤히 보자 입을 비쭉이며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그러고 보면 게라는 에드모어 성에 있는 사용인들과 달리 밀리안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프레아가 어깨가 축 처진 채 처량하게 퇴장하는 게라를 눈으로 좇았다. 성에 머물면서 알게 된 건 밀리안이 게라에게 자주 하는 말이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쓸쓸히 사라지는 게라를 안쓰럽게 바라봐 주었다. 그때였다. 밀리안이 손으로 프레아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금 내 앞에서 딴 남자 보는 거야?”
프레아는 밀리안을 물끄러미 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걱정 마. 이젠 네가 질투 안 해도 너 말고 다른 남자는 다 건어물로 보여.”
“그러고 보니 스쳐 지나간 멸치 하나가 기억나네.”
프레아의 말에 밀리안이 입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그 멸치가 ‘글라디안 로테인’이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았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그 이름.
지금 생각해 보면 글라디안을 보고도 그냥 괜찮은 사람이네, 가 끝이었던 건 다 잘난 남동생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너무 잘생겼으니 다른 남자를 봐도 심드렁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프레아가 밀리안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성에 머물면서 그를 관찰한 결과, 그는 잔다고 해놓고 늘 깨어 있었다. 수면 향을 자주 피우는 것을 보면 약에 의존하는 것 같았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예쁜 얼굴에 자꾸 그늘이 지니 속상했다.
“수면 향은 언제부터 피웠어?”
“글쎄, 잘 모르겠네.”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길을 그대로 받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익숙하다는 말이 어쩐지 가슴 아팠다. 그래도 품질이 좋은 수면 향이라 부작용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자장가로 잘 나이는 지났는데.”
밀리안이 낮게 웃었다. 그럼에도 프레아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옆에서 자장가도 불러주고 등도 두들겨 주면 잠이 잘 오잖아. 난 그렇던데.”
“걱정하지 마, 요즘은 잘 자.”
“거짓말. 눈 밑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가를 톡톡 두들겼다.
‘잠을 잘 자기는. 매번 못 자고 있다가 들켰으면서 잘도 잔다고 말하네.’
프레아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몹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보니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간병하러 온 것 같네.”
“내 남자는 내가 관리해야지.”
프레아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말을 받자 밀리안이 미소 지었다. 그녀가 갑자기 찾아왔을 때는 놀랐었다. 마치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그녀와 마음을 확인하니 떨어져 있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데려올까 싶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온 이유가 뭔지 예측되자 불안했다. 계속해서 제 건강을 체크하는 프레아가 무언가를 알고 그러는 것 같았다.
혹시 아버지가 말을 했나.
밀리안은 불안하면서도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갑자기 내 건강은 왜 신경 써?”
“그냥 요즘 통 잠을 못 자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겠다?”
“응! 네가 잘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해서 불러줄게!”
프레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열띤 반응을 보였다. 밀리안은 피식 웃었다. 자장가를 불러준다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려 죽겠는데 잘도 잠이 오겠다 싶었다.
“그래도 아침에 눈 떴을 때 네가 있으면 기분 좋을지도.”
밀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프레아가 잠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프레아의 붉어진 볼을 가볍게 쓸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프레아가 단호히 말했다.
“손만 잡고 잘게.”
“…….”
“누나 믿지?”
“큭.”
밀리안이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라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누가 해야 할 멘트인지. 경각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습이 우스웠다. 하지만 저에게만 경계심이 없는 것 같아 기꺼웠다.
프레아는 이전부터 그랬다. 자신이 살살 꼬시는 줄도 모르고 다 받아주었으니까. 밀리안이 프레아을 바짝 끌며 속삭였다.
“널 어쩌면 좋을까.”
“어쩌긴. 그냥 내 말대로 하면 되지!”
“……그건 안 돼.”
“왜?”
“그야…….”
프레아의 볼에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턱으로 옮겨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리안이 깊게 닿았다 떨어졌다.
“너를 믿어도 나는 못 믿겠거든.”
“어?”
“내가 손만 잡고 자는 건 무리라는 말이야.”
“으음, 저녁 먹으러 갈까.”
프레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틀었다. 밀리안이 뻐걱거리며 슬슬 피하는 프레아를 더 바짝 끌었다. 그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숨결이 코끝을 자극하고 입술을 간질였다.
“어디 가려고?”
“저, 저녁 먹어야지! 배고프잖아.”
프레아가 횡설수설하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난 다른 걸 먼저 먹고 싶은데.”
“나, 난 아닌데?”
프레아가 흠칫하며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느른한 시선으로 프레아를 바라보며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쓸었다. 허리에 닿아 있는 손이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웠다.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아니야?”
밀리안이 시선을 내리깔며 귓가에 속삭였다. 요염하게 구는 밀리안을 보자 심장이 쿵,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유혹을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프레아가 시선을 슬슬 피하며 중얼거렸다.
“마, 맞는 것 같기도.”
“그래?”
“으음…….”
“잘 먹을게.”
밀리안이 낮게 웃곤 곧장 프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 뒤에서 게라가 몰래 눈을 빛내는 게 보였다. 프레아는 부끄러워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래선 게라가 상상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은 식당이 아닌 밀리안의 침실에서 해결해야 했다.
* * *
지난번 밀리안에게 잡혀 온 정령사는 사지를 결박당한 채 벽에 걸려 있었다. 잔뜩 초췌해진 얼굴에 퀭한 눈. 정령사의 시선은 밀리안을 향했다. 밀리안은 그 앞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사내를 마주 보았다. 수 분 후, 그가 옆에서 바짝 긴장하고 서 있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알아낸 건?”
“도통 아는 게 없는지 횡설수설하기만 합니다.”
“혀를 잘라 버려야 하나.”
밀리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내를 힐끗거렸다. 목을 조여오는 살기에 사내가 숨을 헐떡거렸다. 밀리안이 시선을 거두며 부하에게 말했다.
“지금부턴 내가 심문할 테니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도록.”
“예, 단장님!”
밀리안과 사내만 빼고 기사들이 모두 나갔다. 고요한 정적과 함께 밀리안의 눈이 붉게 빛났다. 눈빛으로도 사람 여럿을 죽일 것 같았다. 밀리안이 사내에게로 바짝 다가가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여동생이 있던데.”
“……!!”
“이름이 안젤리카였던가.”
“이, 이미 결혼해서 가문을 나간 아이입니다! 이 일과는 연관이 없고요!”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밀리안이 사내의 말을 가볍게 묵살했다. 사내가 침음하며 이를 악물자 밀리안이 주머니에서 푸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이를 본 사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는 물건인 모양이지?”
“그, 그건 자백제가 아닙니까! 자백제는 이미 제국에서 금지한……!”
쾅!
사내는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밀리안이 손바닥으로 벽을 내려친 탓이었다. 무거운 침묵 끝에 밀리안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불법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큭…….”
사내가 억지로 입을 벌리려드는 밀리안에게 반항하듯 바둥거렸다.
“턱 으깨지기 싫으면 벌려.”
“…….”
지독하게 차가운 음성이었다. 사내가 버티지 못하고 입을 벌리자 밀리안이 무차별적으로 액체를 들이부었다. 컥컥,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병 안에 든 액체를 모두 받아 마셨다.
곧 사내의 눈이 멍해졌다. 자백제는 일정 시간 동안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약물인데, 부작용이 심해서 악독한 범죄자에게만 사용했다. 잘못 사용하면 정신착란의 상태가 될 수 있는 극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밀리안은 이 약물의 사용법을 아주 잘 알았다. 전쟁터에서 라즐리 후작이 반란군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요긴하게 썼으니까.
우연? 웃기지도 않지.
우연히 반란군의 끄나풀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도 십몇 년을 삽질한 일인데. 밀리안이 조소를 머금곤 다시금 의자에 앉았다.
이미 클로드에게 이 일을 위임받으면서 제 식대로 심문하는 것에 동의를 얻은 상태였다. 물론 그 심문에 자백제를 사용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밀리안이 사내를 향해 물었다.
“정령 실험을 도운 이유가 뭔가.”
“협회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내가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것을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그는 협회장의 지시로 정령 실험을 도왔으며, 그것을 돕는 대가로 협회장이 마탑에서 무언가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가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뜻 마법진이라는 단어가 나오긴 했으나 어떤 마법에 관한 건지는 모른다고 했다. 자백제를 마셨으니 그가 모른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밀리안이 소득 없는 진술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 일에 관여되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빠짐없이 읊어라.”
사내는 멍하니 입을 열어 하나같이 잔챙이들만 나열했다. 이미 알아내 수배 중이거나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밀리안이 사내의 진술에 지루해할 즈음, 드디어 결정적 이름이 나왔다.
“……아네모네 황비. 벤 라즐리 후작.”
사내가 죽은 라즐리 후작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진술을 멈추었다. 라즐리 후작은 반란군과 관련 있음이 확인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의 이름이 사내에게서 나오자 밀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그래도 갑자기 죽어버려서 곤란하던 찰나에 단서를 찾은 기분이었다. 정령 실험이 반란군과 관련이 있다는 머레니의 진술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역시 협회도 반란군과 모종의 협약을 맺은 모양이군.’
밀리안이 사내에게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정령 협회는 반란군과 관련이 있나.”
“반란군의 수장이 바뀐 뒤로 협회와 반란군의 공조는 무산되었습니다.”
“수장이 바뀌었다라…….”
밀리안이 손가락으로 검집을 탁탁 두드렸다. 진과 에밀리를 통해 최근 반란군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점과 내란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해 들었었다.
그 내란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수장이 바뀌어 생긴 일 같았다. 밀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사내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더 질문했다가는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장은 누가 되었나.”
밀리안의 물음에 정령사가 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시드 안 헤로스.”
사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마지막 진술을 끝내며 그대로 기절했다. 사내의 진술에 밀리안의 두 눈이 커졌다. 밀리안은 사내가 남기고 간 이름을 입에서 우물거렸다.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사내가 말한 이름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으나 황실에서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태였다. 밀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이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왕좌를 탐내는 것일까.
전혀 그럴 리가 없다며 단언하던 클로드가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그를 그렇게 신임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그의 답은 오답이었다. 황족이 바라는 기적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예견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며칠 뒤 마리아에게서 전보가 왔다.
[네 말대로 아버지에겐 붉은 반점이 있었어.
시중들던 시녀에 의하면 꽤 오래전부터 보였다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내용은 간단했다. 프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라즐리 후작에게도 있었다. 은연중에 아니길 바랐건만. 아무래도 그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의심을 피한 것 같았다.
프레아는 데오 라즐리를 떠올렸다. 장례식장에서의 그는 울음을 참으며 의연하게 행동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것이 이미 예견된 죽음이라 덤덤했던 거라면?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프레아는 곧바로 비밀리에 마법사가 아닌 귀족들의 돌연사를 추적했다. 그리고 병이 들거나 죽기 전 만났던 사람들을 취합한 결과, 뜻밖의 정보를 발견했다. 죽은 사람 모두 누군가를 만났던 것이다.
‘머레니 코헨과 데오 라즐리…….’
데오 라즐리의 경우, 어느 정도 용의 선상에 있던 인물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의외의 인물은 머레니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행동에는 항상 모순이 있었다.
에시드가 마탑을 없애려는 걸 막아달라 해놓고 저 몰래 마탑이 해체될 만한 자료들을 황실에 제공했다. 게다가 아예 마법사들이 죽을 것을 알고 마나가 통하지 않는 감옥에 자진해서 갇혔다.
그녀는 에시드가 수상하다는 심증은 말했으나 그가 위험할 만한 단서는 제공하지 않았다.
……만약 에시드와 머레니가 사실은 한편이었다면? 그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거라면?
아무래도 황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머레니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연회 당일이니 기회를 보아 머레니를 찾아가야겠어.’
프레아는 벨벳 재질의 허리선이 잘록하게 드러나는 진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었다. 민소매 타입의 상의 위로 흰 레이스 숄도 걸쳤다.
시에라가 성 입구까지 배웅하며 당부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테일러스 성으로 옮겨온 시에라는 프레아에게 밀리안과의 사이를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좀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납득했다.
프레아는 그녀에게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수선한 일들이 해결된 뒤에 말씀드릴 생각이었으니까.
“응. 다녀올게.”
프레아가 밀리안의 손에 의지해 마차에 올라탔다.
움직이는 마차 안, 프레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연회 후에 잠시 머레니를 만나고 싶은데.”
“머레니 코헨은 왜?”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프레아가 이유를 숨기자 밀리안이 그녀를 응시했다. 머레니 코헨은 현재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금된 상태였다. 클로드가 프레아에게 마탑의 존속 비밀인 문장에 대해 전해 들은 뒤, 머레니의 감시를 강화했다.
혹여나 중요한 증인이 원격으로 죽게 될 것에 염려한 조치이자, 그녀가 반란군과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둔 처우였다. 이로 인해 머레니에 대한 면회는 극히 제한된 상태였다.
또한 이번에 반란군의 수장으로 에시드가 지목된 상황이라 황궁 안이 어수선했다. 밀리안이 평소답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만나게 할 수 없어.”
프레아는 밀리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라즐리 후작의 왼쪽 귀 뒤편에 붉은 반점 3개가 발견되었어.”
“…….”
“이후로 최근 죽은 귀족들을 추적해 보다가 그들이 머레니와 접촉했던 정황을 확보했어. 확인이 필요해.”
“마법사의 의문사가 머레니의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어쩌면 그녀가 대공과 한패일 수 있다는 말이야.”
프레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에시드를 지목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모든 증거가 그를 지목했으니까.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시드 대공은 현재 자택 근신 중이야.”
“……이유는?”
“반란 모의 죄.”
“……!!”
프레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같이 지내면서 그가 한 번도 티 내지 않은 터라 더욱 경악스러웠다. 기밀이었던 걸까.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미 협회 측 정령사를 통해 그가 반란군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고, 도주 위험이 있어 자택에 구금 중이야. 현재 그를 어떻게 처분할지 의논하고 있어.”
“……데오 라즐리는?”
“미리 알고 도주한 상태. 현재 은신처를 찾고 있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건이 일단락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혼자 삽질을 한 기분이었다. 프레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역시 반란이었다. 에시드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마탑을 붕괴시켰을까. 마탑은 가장 강력한 병력을 지닌 조직이다.
일부러 반란군의 위력을 감소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면 조금 난해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확인해 볼 것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만나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앞뒤가 안 맞잖아.”
“그렇게 해. 일단 에시드 대공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아. 너까지 혐의를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왜 여태 말 안 했어?”
프레아가 밀리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사실 나 지금 황명 거역한 거야.”
“뭐?”
“황제는 이 일을 그냥 덮을 모양이거든. 에시드 대공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황이고. 게다가…….”
밀리안은 황명을 어겨놓고도 한가하게 말했다. 너무 덤덤한 그의 태도에 오히려 프레아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가 기겁하며 쳐다보자 밀리안이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이 일이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아.”
“왜 그렇게 확신해?”
“왜냐면…….”
밀리안이 프레아의 어깨를 끌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난 오늘 데오 라즐리를 만날 예정이야. 그에게 연락이 왔거든.”
* * *
에시드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성 주변에 흐르고 있는 강한 마나의 파동.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하면 곧바로 폭발하게 되는 강력한 마법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시드는 그것이 제게 어떤 무력도 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마도구를 만든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해제할 수 있음에도 에시드는 성안에 그대로 머물렀다.
황제 역시 그가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저를 믿어볼 요량인 듯했다. 만약 자신이 이 마법장을 뚫고 성을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자신이 반란군의 수장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겠지.
이리될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휩쓸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생을 놓아버리고자 했다. 에시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정황을 확인해 놓고도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려는 바보 같은 형이 이제는 조금 가여웠다.
이젠 놓아줄 법도 한데. 형은 자신이 먼저 손을 놓기 전에는 절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제는 알까. 지금 성을 포위하고 있는 기사단이 누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지.
‘황제가 아닌 나,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단이라는 것을 형은 모르겠지.’
그때 조지 크로이드가 에시드에게 다가왔다. 그는 현재 에시드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청룡 기사단의 단장이자 반란군의 숨은 공신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가만히 있겠다면 어찌할 거냐.”
에시드가 메마른 목소리로 반문했다. 늘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던 반란군의 정체가 발각된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아직 반란군을 따르는 핵심 귀족들이 색출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수장이 들켰으니 이대로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했다. 더 늦기 전에 황성을 쳐야 승률이 높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황성을 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발뺌한 채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절정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깃발처럼 에시드의 고요한 얼굴 뒤에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사내가 있었다.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우물쭈물하는 나태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주군을 잘못 선택했으니 죽음을 각오해야겠지요.”
조지는 뒤늦게 에시드의 물음에 답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결연했다. 한 번 모시기로 한 이상 끝까지 그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는 아들 빌리앙이 부복한 채로 있었다. 이번 사태를 야기한 장본인의 여동생과 결혼한 빌리앙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젠장. 진즉에 형님을 쳐냈어야 했는데…….’
우선 급한 대로 휴양을 핑계 삼아 안젤리카를 시골로 내려보냈다. 그녀는 이 일에 아예 관련이 없으니까. 크로이드 가문이 반란을 꾀한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에시드의 외척인 안 가문과 손을 잡은 것은 이미 수십 년도 더 된 일이었고. 그들은 현 황태자 가문인 반 가문과 친분을 유지하여 반란군임을 숨기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처음 충성한 것은 에시드가 아닌 아네모네 황비였다. 하지만 이미 황비가 죽은 이상 그 뒤를 이을 자는 에시드뿐이었다. 그 스스로도 수장이 되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크로이드 가문이 그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아들이 명맥을 잇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은 에시드가 황비를 죽인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에시드는 어머니를 죽이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꺼져가는 초점 사이로 저를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가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어머니는 욕심이 과했고, 결국 아예 제국을 삼키고자 했다. 그것이 그녀가 죽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수장이 된 당시 에시드를 의심하는 자는 많았으나 점차 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저를 따르지 않는 신하는 필요 없다며 그가 가차 없이 싹을 잘라낸 탓이었다.
에시드는 수장이 된 이후로 아네모네 황비보다도 더욱 가혹하게 그들 위에 군림했다. 유약하게만 보이던 대공이 휘두르는 힘은 강력했다.
그를 의심했던 자들은 태풍에 꺾이는 노송처럼 반항 하나 못 하고 죽어갔다. 누군가는 의문사로, 누군가는 병으로. 그렇게 알게 모르게 반란군은 숙청당하고 있었다. 이번 마탑 사건도 저를 반대하는 이들을 의심 없이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더 지체했다간 조직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조지가 조금 강경하게 재촉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수장이 들켰으니 그 아래로 줄줄이 불려 나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행인 것은 황제가 에시드를 신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대로 묵비권을 행사할 시 유배 정도로 끝날 수도 있는 일. 하지만 반란군은 이미 황성을 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게다가 황제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탑의 붕괴 사건을 머레니의 단독 범행으로 여겼다. 에시드가 시켰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에시드는 머레니와의 거래를 떠올렸다.
‘제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집니다.’
‘그게 무엇이지?’
‘첫째는 저와 제 동료들의 심장에 박힌 인장을 없애주세요. 우리 중 마탑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는 대공님뿐이니.’
‘그리고?’
‘둘째론 새로운 마탑을 지을 터전을 마련해 주세요.’
‘그건 조금 곤란한데……. 혹여 그대가 마음이 바뀌어 나를 배신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자유를 원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마탑을 만들어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
‘저는 이 두 개 중 하나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대공님도 제 도움 없이는 대업을 이루지 못하실 테죠.’
머레니는 똑똑했고, 에시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았다. 그날 협상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녀와 뜻을 모은 젊은 마법사들과 그의 가족들은 에시드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상황이었다.
그들은 모두 반란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마탑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반란군은 이미 모조리 죽은 뒤다. 마탑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반란군은 노심초사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결국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반란군은 마탑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마탑주가 약속했던 키메라 군단은 황실이 폐기 명령을 내렸지만, 황성 내부에 있던 반란군이 빼돌려 둔 지 오래였다.
‘테일러스 후작이 처리하기로 했지만…… 프레아가 쓰러져 정신없었겠지.’
불완전한 키메라라고 해도 방패막이로 쓰이기에는 적합했다. 이제 와서 그것을 없애려 한다면 에시드까지 의심받으리라.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키메라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프레아가 알면 화를 낼까? 어쩌면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실망했을지도…….’
에시드가 씁쓸히 웃다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황성을 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지가 총기 어린 눈으로 단언했다. 반드시 수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이미 황성 안에서 일하는 귀족의 절반이 반란군에 도모하고 있다. 이 기세로 치고 들어간다면 에시드를 황제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변이라면…….”
“일을 도모하기 전,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를 암살하는 편이 좋습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가 강한 힘을 지닌 게 확인되었으니, 에드모어 공작과 결탁하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조지의 입에서 프레아의 이름이 나오자 에시드가 움찔했다. 데오 라즐리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일을 성공시키려면 프레아를 죽여야 한다고. 그러니 그녀가 그를 믿고 있을 때를 노려 죽이라고.
현재 제국에서 가장 강할 거라 추정되는 사람은 밀리안 테일러스와 진 에드모어였다. 그리고 최근 반란군은 프레아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프레아와 직접 대면한 루이스 안조차도 그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에시드는 프레아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죽일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인생을 꼬아놓았는데 어떻게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할 수 있을까. 에시드는 감춰져 있던 진실을 마주한 상황이었다. 아주 비정한 진실을. 에시드가 차가운 얼굴로 조지에게 말했다.
“자네는 생각보다 매정한 사람이었군. 그녀는 분명 자네의 친조카일 텐데…….”
에시드의 말에 조지가 시선을 들었다. 에시드는 이어 말했다.
“자네도 이미 그레이 크로이드가 에밀리 레이첼과 연인 관계였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것이 최선인가?”
“대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지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조카를 향한 일말의 애정도 없는 눈빛이었다.
대의, 대의라.
그가 말하는 대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에시드는 반란군의 수장이 되어서야 알았다. 프레아의 아버지가 그레이 크로이드며 그가 자신의 형인 조지 크로이드와 반란군의 수장인 아네모네 황비, 그리고 현재 반란군의 뒤를 봐주고 있는 정령 협회의 루이스 안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레이는 협회와 반란군이 결탁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정보를 빼돌리려 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한발 앞서 눈치챘고, 그를 죽이는 대신 실험체로 쓰이도록 만들었다.
즉, 반란군이 그를 마탑에 팔아넘긴 것이다. 그가 실험체가 된 이후 정령 실험의 여러 난제가 풀렸었다. 만약 그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분명 정령 실험은 더 빨리 성공했을 터.
그를 추적하던 반란군은 그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라는 걸 확인하곤 추적을 멈추었다. 어차피 곧 죽을 테니까. 에시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운명이 참 기구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정이 제 어미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단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반란군에 의해 아내를 잃은 진 에드모어와 재혼했다.
아네모네 황비에 의해 날개 한 짝씩을 잃은 자들끼리의 만남이었다. 또한 프레아는 친아버지와 같은 정령사가 되었고, 정령 실험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래서 정령 실험을 주도한 것이 아네모네 황비였다는 점이 에시드를 괴롭게 했다. 어머니는 죽고 나서도 망령처럼 제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
이미 손쓸 수도 없이 피를 묻힌 상태다. 악당이 되길 자처했고, 형에 의해 죽임당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여인.
하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닥으로 내팽개친 어머니를 둔 자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도무지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없는 사이였다.
지독한 운명의 굴레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고자 했으나 두 다리가 잘린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에시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는 결정할 때였다.
“루이스 안은 뭐라 하던가.”
“반란군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미 얻을 것을 모두 얻었다는 것이겠지요. 능구렁이같이 얍삽한 여인입니다.”
“어차피 그녀는 마지막 마법진의 한 조각을 얻으려면 반란군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에시드가 뒷말을 내뱉기 전에 숨을 골랐다. 그는 결정을 내렸고, 최대한 빠르게 이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는……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를 묶어둘 방법을 안다. 루이스를 통해 그녀가 불완전한 상태라는 걸 확인했다.”
“불완전하다니요?”
“정령사는 모두 계약 당시의 언령을 통해 정령을 다룰 수 있다. 한데 그녀는 계약 당시의 기억이 없더군. 강제로 계약을 끊어버리거나 무력화시키면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효율이 떨어지는 일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한단 말입니까?”
“머레니 코헨.”
“……!!”
“그녀가 루이스 안과 함께 레이첼 소후작의 무력화를 맡기로 했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빌리앙도 지원하도록.”
빌리앙은 갑자기 자신이 지목되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마탑 붕괴 사건의 원흉이 아닙니까? 그런 자를 어떻게 믿으십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벌인 짓은 반란군에 대적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의 염려와 달리 에시드는 여상히 대꾸했다.
“마탑주와 연락이 닿았다. 그녀를 당장 죽이겠다는 걸 쓸모가 있으니 남겨두라고 지시했지.”
“그게 무슨…….”
빌리앙이 믿을 수 없어 하자 에시드가 설명을 보탰다.
“자네도 알지 않나, 마탑주가 맘만 먹으면 마탑의 마법사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걸.”
빌리앙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시드는 빌리앙을 잠시 힐끔거리다 조지에게 말했다.
“데오도 이 일을 돕기로 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답이 올 때까지 우선 성에서 대기한다.”
“하나 축하연 때가 가장 적기입니다. 그보다도 늦어지면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조지가 에시드의 말을 거스르며 맞섰다. 곧 마탑 소탕 작전에 성공한 밀리안 테일러스와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를 위한 축하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황성은 에시드가 성에 묶여 있어 반란군이 몸을 사릴 거라고 여겼다. 적이 한껏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한참 뒤 에시드가 담담히 선언했다.
“답이 오는 대로 황성을 친다.”
“……따르겠습니다.”
에시드의 단호한 선언에 조지가 하는 수 없이 뜻을 꺾으며 낮게 명을 받았다. 빌리앙 역시 부복한 자세 그대로 따르겠다고 답했다.